검찰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대우가 받은 불법 대출은 10조 원이었고 해외로 빼돌린 자금은 24조 원이었다. 대우가 꾸민 분식회계 규모는 무려 41조 원이었다.

영미권에서 최악의 분식회계로 기록된 사건은 2001년 파산한 엔론의 경우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가 “엔론 사태는 테러 공격보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런데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린 엔론의 회계부정 규모는 5년 동안 고작(!) 13억 달러1조 4000억 원였다. 반면 1999년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규모는 엔론의 30배에 가까운 41조 원이었다. 대우그룹이 얼마나 대담했고, 얼마나 무모했으며, 얼마나 비도덕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거대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대우그룹의 총수 김우중은 179개국에서 공식 수배령이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한국 경제, 아니 어쩌면 전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분식회계 사건이었다. - <한국 재벌 흑역사 (하)>,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BxmhnxWCwPe4rk7M6



SK글로벌이 입은 손실은 1000억 원이 넘었다. SK글로벌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사용했다. 분식회계 규모가 1조 5000억 원을 넘어섰다.

2003년 2월 22일 최태원이 SK글로벌을 이용해 SK증권을 부당 지원했고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최태원이 구속된 사유는 단지 분식회계를 지휘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최태원은 알뜰하게 자기 호주머니를 채웠다. 최태원의 구속 사유에는 분식회계 외에도 그룹 계열사끼리 주식을 사고팔도록 해 자기 호주머니에 959억 원을 챙긴 혐의가 추가됐다. <한국 재벌 흑역사 (하)>,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Cng8RQV1Pdkd2oURA


영미권에서 최악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으로 기억되는 엔론의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Jeffrey Skilling은 2006년 사법부로부터 24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연히 1년의 감형도 없었고 스킬링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그런데 최태원은 분식회계로 구속된 이후 단 7개월 만에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게 바로 봉건과 자본주의의 또 다른 차이다. 우리가 아직도 봉건적 재벌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 <한국 재벌 흑역사 (하)>,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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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 완화와 자산불평등의 인과 메카니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중앙은행이 과도하게 돈을 찍을 경우 자산 가격 폭등으로 부유층과 권력층만 더 부유해질 뿐 중산층은 오히려 가난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이념적으로 자유주의 우파 경제학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연준의 양적 완화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연준이나 한국은행 등 각국의 중앙은행이 돈을 찍으면 그 돈이 금융 기관과 부유층에 먼저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부유층은 자금을 활용해 부동산과 주가가쌀 때 매입해서 막대한 시세 차익을 누리게 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나 2020년 팬데믹 위기가 발생했을 때 돈줄이 메마르는 신용경색이 일어났는데, 이때 연준이 푼 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대상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각국 중앙은행이 푼 돈이 서민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이미 자산 가격이 급등한이후라 서민들은 매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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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이병철 그리고 중앙일보


이 발포로 민중들의 투쟁은 더욱 격화됐고, 4.19혁명이 마침내 성공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당연히 서울에서 발포를 최종 명령한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사망자만 약 100명에 부상자만 450여 명이었다. 민중들을 폭도로 몰아 총질을 명령한 책임자를 찾는 일은 혁명의 뒤처리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 경찰의 발포 최종 명령자가 바로 홍진기로 밝혀졌다. 1960년 8월 검찰은 홍진기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법정마저 홍진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홍진기는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그리고 1963년 8월 홍진기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홍진기가 목숨을 건지고 특사로 풀려난 데에는 홍진기를 ‘평생의 동지’로 여겼던 이병철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이병철이 어떤 방식으로 홍진기를 감옥에서 ‘꺼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병철이 홍진기를 첫 만남 때부터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그를 출소시켜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1967년 이병철은 자신의 3남 이건희를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시키며 두 가문은 사돈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홍진기는 1968년 <중앙일보>의 사장에 오른 뒤 평생을 그 신문사에서 일하며, <중앙일보>가 ‘생명의 은인’ 이병철을 위한 신문이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다. - <한국 재벌 흑역사 (상)>,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3aa9kwt9TtqDwvu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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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칼을 뽑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가 신세계SVN 브랜드에게 1%라는 말도 안 되게 낮은 수준의 입점 수수료업계 통상 수수료는 5%를 물린 것을 부당거래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부당한 내부거래는 정용진 당시 신세계 부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신세계SVN은 정용진의 동생 정유경이 40%의 지분을 가진 회사였다.

그런데 부당 지원 사실도 밝혀졌고 총수 일가가 개입한 사실도 드러났는데, 검찰은 정용진을 기소하지 못했다. 신세계의 의사결정에 정용진이 개입한 정황만 있을 뿐, 정상적인 결재 라인에 그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기소가 된 사람은 전문경영인인 허인철 전 이마트 대표였다.

실제로 신세계그룹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명희는 물론, 정용진이나 정유경 등 그룹을 지배하는 일가들은 결코 회사의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는 법이 없다.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모두 그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도, 그들은 회사의 과오에 대해 책임질 위치에 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부회장, 회장 등의 직함만 가질 뿐 경영상 책임을 지는 등기임원의 자리는 항상 거부한다. - <한국 재벌 흑역사 (상)>,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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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2016년 연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속 기간을 1945년까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945년에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독립했는데 정작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속 기간을 1945년에 끝내 버리는 게 이상합니다. 이는 1945년부터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1919년 임시정부의 시작을 분명히 표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미국이 1945년 이후 임시정부의 존속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속하고 있었다고 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거꾸로 읽는 한국사>, 조경철, 조부용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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