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 완화와 자산불평등의 인과 메카니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중앙은행이 과도하게 돈을 찍을 경우 자산 가격 폭등으로 부유층과 권력층만 더 부유해질 뿐 중산층은 오히려 가난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이념적으로 자유주의 우파 경제학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연준의 양적 완화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연준이나 한국은행 등 각국의 중앙은행이 돈을 찍으면 그 돈이 금융 기관과 부유층에 먼저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부유층은 자금을 활용해 부동산과 주가가쌀 때 매입해서 막대한 시세 차익을 누리게 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나 2020년 팬데믹 위기가 발생했을 때 돈줄이 메마르는 신용경색이 일어났는데, 이때 연준이 푼 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대상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각국 중앙은행이 푼 돈이 서민들에게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이미 자산 가격이 급등한이후라 서민들은 매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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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이병철 그리고 중앙일보


이 발포로 민중들의 투쟁은 더욱 격화됐고, 4.19혁명이 마침내 성공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당연히 서울에서 발포를 최종 명령한 사람이 누군지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됐다. 사망자만 약 100명에 부상자만 450여 명이었다. 민중들을 폭도로 몰아 총질을 명령한 책임자를 찾는 일은 혁명의 뒤처리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검찰 수사 결과 경찰의 발포 최종 명령자가 바로 홍진기로 밝혀졌다. 1960년 8월 검찰은 홍진기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법정마저 홍진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홍진기는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그리고 1963년 8월 홍진기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홍진기가 목숨을 건지고 특사로 풀려난 데에는 홍진기를 ‘평생의 동지’로 여겼던 이병철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이병철이 어떤 방식으로 홍진기를 감옥에서 ‘꺼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병철이 홍진기를 첫 만남 때부터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그를 출소시켜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1967년 이병철은 자신의 3남 이건희를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시키며 두 가문은 사돈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홍진기는 1968년 <중앙일보>의 사장에 오른 뒤 평생을 그 신문사에서 일하며, <중앙일보>가 ‘생명의 은인’ 이병철을 위한 신문이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다. - <한국 재벌 흑역사 (상)>,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3aa9kwt9TtqDwvu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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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칼을 뽑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가 신세계SVN 브랜드에게 1%라는 말도 안 되게 낮은 수준의 입점 수수료업계 통상 수수료는 5%를 물린 것을 부당거래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부당한 내부거래는 정용진 당시 신세계 부회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신세계SVN은 정용진의 동생 정유경이 40%의 지분을 가진 회사였다.

그런데 부당 지원 사실도 밝혀졌고 총수 일가가 개입한 사실도 드러났는데, 검찰은 정용진을 기소하지 못했다. 신세계의 의사결정에 정용진이 개입한 정황만 있을 뿐, 정상적인 결재 라인에 그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기소가 된 사람은 전문경영인인 허인철 전 이마트 대표였다.

실제로 신세계그룹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명희는 물론, 정용진이나 정유경 등 그룹을 지배하는 일가들은 결코 회사의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는 법이 없다.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모두 그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도, 그들은 회사의 과오에 대해 책임질 위치에 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부회장, 회장 등의 직함만 가질 뿐 경영상 책임을 지는 등기임원의 자리는 항상 거부한다. - <한국 재벌 흑역사 (상)>, 이완배 지음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9r9nfrEXvKBBE2d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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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2016년 연표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속 기간을 1945년까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945년에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아 독립했는데 정작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속 기간을 1945년에 끝내 버리는 게 이상합니다. 이는 1945년부터 우리나라를 통치했던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1919년 임시정부의 시작을 분명히 표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미국이 1945년 이후 임시정부의 존속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속하고 있었다고 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거꾸로 읽는 한국사>, 조경철, 조부용 - 밀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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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고구려를 이어 세운 후고구려는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교과서로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궁예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사실 고려였습니다. 우리가 배운 후고구려는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옛 역사서들을 살펴보면 ‘후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부 궁예의 “후고려”라고 쓰여 있죠. 고구려가 바꾸었던 나라 이름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앞에 ‘뒤 후後’ 자를 붙인 것입니다 - <거꾸로 읽는 한국사>, 조경철, 조부용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sKU7bpbzx4TuE5ec7

한국사에서 ‘고려’라는 나라 이름의 역사는 아주 깁니다. 고구려, 발해, 궁예, 왕건이 모두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죠. 이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 ‘KOREA 코리아’는 ‘고려’와 발음이 흡사합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결코 중국의 역사가 아님을 이렇게 국호로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거꾸로 읽는 한국사>, 조경철, 조부용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W5hkAeqHkxinimZG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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