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중세의 질서

프랑스에서 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고 하는 질서 관념은 인간을 세 가지 직분으로 나누고 있다. 이 구분은 인도유럽어족의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말해지는데, 이것이 기독교와 연결되어 1027년경에 랑의 주교 아달베롱 등에 의해 정식화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신의 집‘은 기도, 노동, 전투 세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상에서는 성직자, 농민, 기사가 그것을 담당한다. 아달베롱은 왕이 이 세 기능을 통합하여 보편적인 질서를 보증하는 존재이고 왕·성직자·기사는 ‘일하는 자‘(농민)을 보호하는 대신 노동의 봉사를 받는 상호 봉사의 관계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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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대숙청

이른바 ‘대숙청’이라는 공포 기간–소련 시민들은 완곡하게 ‘1937년’이라고 표현한다–은 1937년 초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시작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YdfthaxHqC74vn86

1937년 6월, 대숙청은 군으로 확산되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와 사실상 모든 최고위 군사령관(정치국원인 클림 보로실로프는 제외)이 독일과 공모했다는 혐의로 비공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유죄 선고를 받고 즉결 처형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gubqcngG8m5RCSQ7

엘리트 계층 체포는 1937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사장, 동료 노동자, 이웃에 대한 기회주의적 고발이 당국에 계속 밀려들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uZCAEDnCrDBbc1e96

아마도 볼셰비키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 내부에는 혁명이 끝날 때 자기 자녀를 잡아먹게 만드는 취약한 내적 논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241FVb622U59Z7Em7

70만 명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하고 100만 명 이상을 굴라그로 보낸 것은 너무 큰 대가였다.

대숙청 이후 당, 정부, 군, 보안대 등 모든 기관의 고위 지도부는 대부분 초보자로 채워졌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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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33 대기근

스탈린은 농민을 죽이려 했다기보다, 농민들이 봄 파종까지 생존할 수 있는 양만 남기고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려 했다. 문제는 누구도 그 양이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지방 관리들이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도록 압박했고, 농민들이 더는 숨겨둔 게 없다고 말해도 곧이 듣지 않았다. 농민들의 ‘기근 연기’와 ‘거짓 파산 행세’와 같은 기괴한 표현이 소비에트 담론에 등장했다. 농민들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간다는 것을 스탈린이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1932~33년 겨울, 굶주림을 피해 도망치는 농민을 막기 위해 도시 입구를 봉쇄해야 했다. 봄이 오자 파종을 위해 국가 창고에 저장했던 양곡을 다시 농촌으로 보내야 했다. 기아 사망자(수십 년 후까지 소련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500만 명 이상이었다. 기근은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반세기 동안 공식적으로 언급되지 않다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시절 우크라이나 당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건설 70주년 기념식에서 침묵을 깼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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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우대 정책, 적극적 조치

약자 우대 정책은 1930년대에 세계적으로도 신선한 것이었다. 동시대 영어에는 이런 정책을 표현할 용어조차 없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계급을 떠나고 싶어 해서는 안 되기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이 정책을 경멸했다. 하지만 노동계급, 농민, 비러시아인 출신 가족은 상승 기회를 환영했다. 미래의 국가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그 밖의 여러 공화국 토착민 출신 지도자들이 이 우대 정책의 수혜자들이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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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산업화와 문화혁명

국가가 지원하는 계획적인 산업화 프로그램을 마치 ‘계급의 적’이나 ‘외국 간섭 세력’에 맞서 싸우는 혁명전쟁처럼 제시한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스탈린은 무엇보다도 혁명가였다. 폭력과 계급적 분노 고취는 그가 할 줄 아는 일이었다. 당 역시 이런 일에 능숙했다. 이 방법은 경제적 합리성 측면에서는 매우 불합리했지만 당의 투쟁적 사고방식과 내전기의 당 체제를 고려할 때 그 나름대로 정치적 합리성이 있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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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은 1928년 초 산업 사보타주와 외국 정보기관을 위한 스파이 활동 혐의로 기소된 엔지니어들(‘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재판을 극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그들의 공분을 유발하는 특권적 지위를 가진 ‘파괴자’ 엔지니어들에 대한 마녀사냥에 나섰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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