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 Sovok

쓰레받기Sovok는 ‘소비에트 남자’(그리고 여자)를 지칭하는 새로운 경멸적 용어였고, 언론은 그런 미개한 사람들을 자주 조롱했다. 《구소련 러시아어 해설 사전An Interpretative Dictionary of the Language of Sovdepia》이 소비에트 언어 용법에 대한 안내서(또는 기념서)로 출간되었다. 외국어와 러시아 구어와 문어의 최근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사전이 많이 필요했다. 대중매체의 언어가 갑자기 극적으로 서구화되었고, 엄청나게 많은 조어들은 한때 소비에트 두문자어처럼 괴상했다. 1990년대의 인기 소설인 빅토르 펠레빈의 《호모 자피엔스Homo Zapiens》는 새로운 광고와 텔레비전의 세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였다. 여기에서는 이미지와 홍보가 모든 것이며 핵심적인 정체성은 이미 사라졌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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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복(sovok)
‘소복‘은 소련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도 삶의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단어로 반어와 경멸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명사 ‘소복(sovok)‘은 형용사 ‘소비에트(소련식의 советский)‘의 준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소복‘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나라 명칭이나 (예시: ‘소복에 산다‘라고 하면 ‘소련에 산다‘라는 의미다), 사람의 성격을 표현할 때 (예시: ‘그는 어쩔 수 없는 소복이야‘라고 하면 ‘그는 어쩔 수 없는 소련식 사람이야‘라는 의미다) 사용한다. 사람을 ‘소복‘이라고 칭하면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사람, 전적으로 국가에 의지하면서 적지만 국가로부터 받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시대를 ‘소복‘이라고 표현하면 뭔가가 지루하고 음울하고 정체된 시대를 말한다(소련이 해체되기 전 마지막 20년을 ‘정체된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소복‘은 공식적인 선전선동이 실제 삶과 완전히 동떨어졌던 거짓과 위선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단어이다.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기 위해 소복의 시민들은 반드시 일련의 의식들을 치러야 했고(예컨대,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고 말로만 ‘국민을 대변하는‘ 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한 표를 행사해야 했다), 국가권력이 무슨 행보를 취하든 이런저런 형태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빈궁한 자신들의 생활을 심하게 불평도 하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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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몰락과 지식인의 운명

지식인들이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꺼운’ 잡지와 같이 삶을 지탱해주던 주요 매체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지식인들과 소비에트 국가가 높은 가치를 부여한 교육과 고급문화는 후세대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후세대들은 미국 문화를 빠르게 습득하고 벼락부자가 되는 방법을 찾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igEhx2V3RrDHiPWRA

지식계급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실패로 실의에 빠졌고(그로 인해 지식계급은 고르바초프와 함께 다수 국민으로부터 비난받았다), 지식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고 도덕적 지도력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으며 새로운 러시아에서 그들의 입지를 찾기 어려웠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SMq1RH8nKq7kByJ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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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호황, 한국과 소련

공교롭게도 1986년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역사적 고점을 찍었던 석유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해였다. 1970년대 중반 배럴당 약 60달러였던 유가는 1980년에 배럴당 120달러를 상회했다. 그러던 유가가 1985년 말 급락하여 80년대 말까지 40달러대를 유지했다. 소련의 연간 GNP 성장률은 흐루쇼프 시대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1990년에는 마이너스 2. 3퍼센트를 기록했다. 1987년 6월 중앙위원회에 보고된 소련 경제 상황을 살펴본 고르바초프는 낭비, 비효율성, 부정확한 보고가 ‘위기 직전’ 상황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QxGPYMaxEYa5VTn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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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순서, 소련 대 중국

덩샤오핑의 아들이 말하길, 경제개혁을 정치개혁보다 앞세우지 않은 고르바초프를 덩샤오핑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의 개혁 결과를 비교할 때 이 말은 타당한 판단인 것 같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판단 역시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경제 재건을 반대하는 고착 세력들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흐루쇼프의 지역경제위원회를 기억해보라!)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개혁 성향의 지식계급이 주도하는 여론의 도움으로 그들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1FQEeatQJywKqPr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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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고르바초프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로 획기적 변화를 연상시키게 될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이자, 자신이 추진한 개혁에 추월당한 개혁자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다민족 제국을 해체되게 한 황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정보화시대로 이끌려고 했지만 소련의 몰락을 주재할 운명에 처했다. 혁명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았어도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소통의 달인이었다면 고르바초프는 촉진의 달인이었다.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기 시작한 초기 볼셰비키와는 대조적으로, 고르바초프는 역사가 자연스러운 경로로 되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헤엄을 쳤다. 혁명이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해진 뒤에도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서 뒷걸음치지 않았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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