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는) 제4공화국 기간으로 이 기간 동안 제3차와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다. 1960년대에 줄곧 고등교육 정원 증원을 억제해왔던 정부는 1970년대 들어 지속적인 산업화에 요구되는 고급인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공 분야별로 선별적으로 고등교육 정원을 확대시켰다.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산업 분야의 지역별 배치를 고려하여중화학 공업계와 경상계, 외국어 학과 등을 중점 중원하였으며, 국가 인력수급상 필요한 전공 분야 외의 학과는 1960년대에 이어 대학정원의 중원을 계속 억제하였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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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이와 같이 강력한 통제 정원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 정책 배경은 고급인력의 실업률 증가 및 경제발전 정책의 추진, 사립대학의 기업화 및 부실운영, 정치적 안정에의 필요 등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강하게당시의 고등교육 정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되게 된 배경은 고급인력공급의 과잉 현상이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된 고등교육 인구는1960년대 들어 대량의 고등 실업자군을 양산하였다. 1962년 대학 정비를단행하기 이전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은 40%를 넘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공보부, 1962: 158. 송광용, 1989: 17에서 재인용),

1963년에는 45.5%, 1965년에는 37.6%였고 이중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은 1963년에는 38.7%, 1965년에 34.7%에 불과하였다.

고등 실업은 국가적으로 볼 때나 개인적으로 볼 때나 모두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는한편, 좌절로 인한 사회 불안을 초래할 여지를 안고 있어 특히 정책 결정에 주요 고려사항이 되었다. ‘학교정비기준‘에서 전국 대학생 정원 총수를 책정할 때 ‘국가의 인력 수요를 첫 번째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당시고급 인력의 유민화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60년대는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로서,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이 교육계의 중요한 과제로 던져졌던 출발점이다. 국가발전은 1960년대 이후 ‘학교정비기준령‘을 비롯하여 정원정책의 주된 이유 혹은 목적으로 일관성 있게 강조되었고, 여기에서 대학정원에 대한 국가 통제가 정당화되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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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부터 4년제 대학은 정원 중원의 억제라는 대원칙 아래, 첨단 과학기술 분야만을 부분적으로 증원하는 정책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부터 대학 졸업생의 취업률이 하락하기 시작하여 졸업정원제가적용되기 시작한 1981년 입학생이 졸업하던 시기인 1985년에는 전년도의48.3%에서 무려 7.4%가 떨어진 40.9%를 기록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급격히 확대되어 온 대학 정원 때문에 공급 과잉 현상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량의 고등 실업자가 산출되었고 대학 정원 증원의 억제는 불가피하였다. - P217

그러나 ‘풍요 속의 빈곤‘ 현상으로 대학 졸업자의 높은 실업률에도불구하고 첨단 산업 분야에서는 고급 인력의 부족을 호소하자, 정부는 이분야만을 한정적으로 확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비교적 우수 인력이 배출된다는 수도권 지역 8개 대학의 경우 1990년 현재 정원이 33,135명으로1979년에 비해 14,910명이 증가했는데, 전자, 기계 등 주요 산업 기술과학계 정원은 1990년 5,730명으로 같은 기간 동안 550명이 늘어났을 뿐이어서 전체 정원에 대한 이들 주요 학과 정원의 비율은 같은 기간에 26.9%에서 17.3%로 감소하였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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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신규대졸자 실업문제

이와 같이 강력한 통제 정원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 정책 배경은 고급인력의 실업률 증가 및 경제발전 정책의 추진, 사립대학의 기업화 및 부실운영, 정치적 안정에의 필요 등으로 집약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강하게당시의 고등교육 정원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되게 된 배경은 고급인력공급의 과잉 현상이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된 고등교육 인구는1960년대 들어 대량의 고등 실업자군을 양산하였다. 1962년 대학 정비를단행하기 이전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은 40%를 넘지 못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공보부, 1962: 158. 송광용, 1989: 17에서 재인용),
1963년에는 45.5%, 1965년에는 37.6%였고 이중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은 1963년에는 38.7%, 1965년에 34.7%에 불과하였다.18) 고등 실업은 국가적으로 볼 때나 개인적으로 볼 때나 모두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는한편, 좌절로 인한 사회 불안을 초래할 여지를 안고 있어 특히 정책 결정에 주요 고려사항이 되었다. ‘학교정비기준령‘에서 전국 대학생 정원 총수를 책정할 때 ‘국가의 인력 수요‘를 첫 번째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당시 고급 인력의 유민화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1960년대는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기로서,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이 교육계의 중요한 과제로 던져ㅈ던 출발점이다. 국가발전은 1960년대 이후 ‘학교정비기준령‘을 비롯하ㅇ정원정책의 주된 이유 혹은 목적으로 일관성 있게 강조되었고, 여기에대학정원에 대한 국가 통제가 정당화되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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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가 죽고 몇 달이 지난 1983년 4월 경제학자와 사회학자 수백 명이 소련의 영속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룬 질문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와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세계 두 번째 강대국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라는 안드로포프의 요구에 용기를 얻은 회의 참가자들은 쇠락하는 경제 성과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애를 썼고 열악한 기후 환경, 숙련된 인력 부족, 근무 기강 해이 등의 상투적인 설명은 제외하고 중앙계획경제의 훨씬 폭넓은 폐단에서 문제점을 찾으려 했다. 학자들이 내린 평가에 따르면 소련 경제는 낮은 생산성, 조잡한 생산물, 천연자원의 낭비라는 스탈린 시대의 낡은 틀에 갇혀 있었다.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만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개인의 진취성을 말살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을 중앙에서 내리는 중앙통제체제는 산업기반이 형성되던 시기에는 꽤 잘 작동했지만 이때의 경제 난국은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노보시비르스크 회의 참가자들은 검열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결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용어로 포장하는 데 신경을 썼다. 결과보고서는 58부로 한정하고 번호를 매겼다. 표지에는 “기밀-대외비”라는 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보안에 신경 썼지만 한 부가 서방에 유출되어 하룻밤 사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178 소위 노보시비르스크 보고서는 세계를 휩쓰는 기술혁명이 제기한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소련의 막후 논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획일적이고 정체된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 뒤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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