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과 조선 개항일본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일단 안정되자, 다음해인 1876년 조선을 개항시켰다. 동아시아에 밀려드는 서방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개항시킨 첫 주자가 된 것은 당시 국제정세를 규정하던 영국과 러시아 간 대결의 결과였다. 중국에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42년, 일본이 개항한 지 22년이 지나서 조선이 개항한 것은 영국과 러시아 모두 조선이 상대방의 동아시아 진출에 보루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양국 모두 조선의 현상유지를 원한 것이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영국은 러시아와의 세계적인 대치 상황이라는 세계 정치의 관점에서 조선을 봤다.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해 영국의 중국 진출에 차질을 줄까 우려했다. 러시아가 조선에 개입하지 않는 한 영국도 조선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1882년 조영수호조약 때까지의 기본 노선이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러시아는 조선과 조약교섭을 진행할 때도 조선이 계속 문호 폐쇄 국가로 남아 있게 하도록 중국에 권고하고 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완충지대로 남겨놓았다. 이는 조선이 어차피 겪어야 할 서방 세계와의 만남을 늦췄고,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에게 기회를 줬다. 개항한 이상 조선은 이제 더 이상 힘의 공백지대로 남을 수 없었다. 일본의 조선 개항 목적 중 하나는 러시아 영향에 대한 선제 방어였다. 조선은 그레이트 게임의 한 무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
크림전쟁과 크림반도이 일련의 전쟁 중 1853년 크림반도와 그 주변에서 영국·프랑스·오스만튀르크 동맹과 러시아가 싸운 크림전쟁은 당시까지 제국주의 전쟁 중 최대 규모였다. 동맹 쪽은 약 100만여 명 병력, 러시아는 약 70만여 명의 병력이 참전했다. 모두 35만~45만 명이 죽었다. 이 전쟁에 종군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백의의 천사’ 신화는 전쟁의 참혹함과 치열함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그 이전 전쟁들에서 획득했던 흑해에서의 독점 항해권과 도나우강 하구 등 크림반도 서쪽 지역의 이권을 대부분 상실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
그러나 ‘좋았던 옛 시절‘은 앞서 언급한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 개의 충격과 함께 막을 내리고 만다. 제3기인동아시아의 신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2010년 이후 중국과 센카쿠열도尖閣諸島(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둘러싼 영토 분쟁을 겪은 일본은 중국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미국과 동맹 강화에 나섰다. 두 나라는 2015년 4월 미일 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을 개정해 미일 동맹을그동안의 ‘지역 동맹‘에서 ‘글로벌 동맹‘으로 위상과 역할을 강화시켰다. 이어서 미국을 매개로 따로 기능하고 있던 한미 동맹과 미일동맹을 한 축으로 묶는 한미일 3각 동맹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P18
하지만 신냉전의 거센 흐름 속에서 한국은 한미일 3각 동맹을강화하려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한일 협력의 중대한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를 2015년 12월 12-28 합의로 봉합하고, 그 기반 위에서 2016년 11월 지소미아를 체결하고, 2017년 4월사드 배치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 P19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한일 간역사 갈등을 봉합하는 장치였던 12-28 합의를 무력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일 양국이 2015~2017년 이루어낸 여러 성과를 뒤엎으려 했다. - P19
유라시아 대륙 내부를 장악하던 초원 유목세력들은 18세기 들어 청제국의 강희제·건륭제가 신장위구르 지역 중가르를 완전히 정벌함으로써 변곡점을 맞았다. 이 정벌을 계기로 유라시아 대륙 중앙의 초원 유목세력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
리셜리에30년전쟁 때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Armand Richelieu는 자신이 가톨릭 추기경이면서도 프랑스의 신교동맹 참여를 적극 주도했다. “만약 신교 쪽이 완전히 파괴된다면, 오스트리아 왕가 세력의 예봉이 프랑스에 덮칠 것이다.” 프랑스는 이미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운영한 신성로마제국에 국왕이 생포당한 경험이 있었다. 유럽 한가운데에서 거대 세력이 형성될 경우 프랑스에 어떤 결과가 닥치는지를 경험했던 셈이다. 리슐리외는 베스트팔렌조약으로 확립되는 국민국가 체제와 이에 기반한 세력균형 질서를 설계한 근대의 첫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국가란 통치자의 인격, 왕가의 이익, 종교의 보편적 요구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실체였다. 리슐리외는 이런 국가 개념에 입각해, 중앙집권적 국가기제를 정립하고 세력균형에 입각한 대외정책을 선도했다. -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