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화는 쌍방향으로 일어난다. 인간은 물론 가축화에 참여하는 동물에게도 생태적 이득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인간의 몸과 동물의 몸은 동시에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이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성인이 되어서도 우유 속의 유당(락토스)을 소화시키기 위해락테이스 효소를 분비할 수 있게 된 인간 몸의 변화다. 원래 인간을 비롯한 대다수의 동물들은 젖먹이 때에만 락테이스 효소를 분비해 유당을 소화시켰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효소 분비가 중지되면서 우유를 먹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가축화로 인해 인간이 동물의 젖을 먹게 되면서DNA의 한 부분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났고, 지금은 성인이 되어서도 락테이스를 분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우유만 먹었다 하면 설사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전통적으로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아시아 사람들에게 락테이스가 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은 우리몸의 진화가 동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 P39

그렇다면 인간은 왜 하얀 공막을 가진 쪽으로 진화한 걸까? 다른 동물은 대개 포식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들키지 않으려고 피부색과 비슷한 공막과 눈동자를 가졌다. 인간은 정반대의 이유에서 하얀 공막을 가지게 된 건 아닐까? 일촉즉발의 사냥 현장에서 동반자 사냥꾼과 눈빛만으로도 호흡을 맞출 수 있는 협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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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는 이토의 명복을 빌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가 서울 장충단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순직한 무관들을 제사하는 자리였다.

박문사 건립 운동은 조선총독부의 제창으로 시작되었고 조선과 일본에서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조선의 모금 목표는 이십만 엔이었고 이 액수는 각 도에 할당되었다. 조선 왕궁인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서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1973년에 박문사 부지는 삼성 재벌에 매각되었고, 이 자리에 1979년에 신라호텔이 건립되었다. - < 하얼빈, 김훈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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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전기차의 싸움이 끝난 후에 전기차와 휘발유차의 대결이 벌어진다. 

만약 말과 휘발유차의 대결이 먼저였다면 자동차가 지배자로 올라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살라의 기술의 진화에는 전기차와 휘발유차의 대결만 서술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이스몸의 주장이 좀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했다. 


기술사학자 하이스몸이 말했듯이, 말을 이긴 이동수단은 휘발유차가 아닌 전기차였다. 당시의 휘발유차는 기술이 너무 뒤떨어졌다. 그러나 일단 말이 사라지자 휘발유차가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몸은 휘발유차가 성장한 것이 결코생산 비용이 더 저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휘발유차의 생산 비용이 저렴해진 것은 전기차를 시장에서 어느 정도 몰아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즉 휘발유차의 승리를 이끈 것은 가격이 아닌 다른 요인이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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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는 이기적인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하여, 자기 몸의 한 오라기 털을 잃는 것만으로 공공에 이익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하지 않는다.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보전하려고 하여 공적인 일을 철저하게 없애 버리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한다. - < 맹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결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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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맹자는 지성至聖인 공자의 뒤를 이은 아성亞聖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그 역할로 보자면 맹자와 공자 사이에는 이미 지대한 차이가 있지요. 맹자는 전국 시대에 공자처럼 교육자의 신분으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맹자가 공자로부터 계승한 부분은 공교롭게도 공자가 일생 중 가장 쓰라린 패배를 맛봤던 부분, 즉 군주에게 이념을 전달하고자 정치 유세를 펼친 부분입니다. 공자는 정신없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군주에게 수많은 도리를 얘기했지만, 결국 그 어떤 군주에게서도 신임을 받아 중용되지 못했지요.

바로 이 점에서 맹자는 공자와 닮았고, 심지어 다소 비극적인 좌절이라는 결과조차도 비슷합니다. 비록 당시 최고의 논변술을 지녔고 명석한 두뇌로 굳건한 신념을 견지했지만, 평생 동안 최선을 다하고도 맹자는 앞에서 언급된 양 혜왕과 제 선왕을 포함해서 단 한 명의 군주도 진실로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인정을 베풀도록 설복하지 못했습니다.

- < 맹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결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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