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단계적 지식 체계가 후대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을 얼마나 심하게 제한했을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가 늦게 태어났다면 경과 전은 못 쓰고 소와 집해를 집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령 경과 전을 쓸 만한 학문적 깊이가 있어도 소와 집해를 쓸 수 있을 뿐, 옛사람의 경과 전과 주를 넘어설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옛사람이 말한 적이 없고 표현한 적이 없는 것을 후대 사람이 말하거나 표현할 수 없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단지 옛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것을 존중하고” “옛것을 숭상하는” 것의 또 다른 면은 바로 “옛것을 조작하는”僞古 것에 대한 강한 유혹이었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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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존중한 탓에 중국 문화는 일정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옛사람에게 의지해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겁니다. 옛날 중국 문헌은 대부분 전주傳注 형식에 속합니다. 이것은 단계별로 고대 문헌을 해석하는 동시에 역시 단계별로 옛사람에게 의지해 말하는 형식입니다. ‘경經-전傳-주注-소疏’가 그 기본 단계인데, 전의 용도는 경을 해석하는 것이고, 주의 용도는 경과 전을 해석하는 것이며, 소의 용도는 경, 전, 주를 해석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겹쳐지며 그 내부에서 해석의 권한이 명확히 안배되어, 아래 단계의 해석은 위 단계의 해석을 의심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옛것을 존중하여”尊古 “옛것을 숭상하는”崇古 데 이르렀고, 엄격한 권위적 지식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나중에 나온 지식을 오래되거나 먼저 나온 지식 아래 배치해 양자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후대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학문이 뛰어나도 주나 소, 집해集解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희 같은 대유학자도 송나라에 태어났던 탓에, 그가 중국 학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은 자신의 개인 저서나 어록이 아니라 고대 경전을 대상으로 집필한 집해였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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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왕관학의 인문 정신에 반대하고 현실의 법률을 강조하며 백성에게 “관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以吏爲師고 요구하던 기풍은 결코 진나라의 짧은 십수 년 동안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뒤, 한나라 초기에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한무제가 “오직 유학을 높이고”獨尊儒術 나서야 한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진나라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뒤집고 본래의 주나라 전통을 계승하는 데 진력하게 되었습니다.

진시황 시대부터 한무제 시대까지 왕관학은 억압과 주변화 그리고 망각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한무제의 역사적 의의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에 의지해 한나라의 방향을 결정하고, 문제와 경제의 보수적이며 관망적인 태도에서 벗어난 데 있습니다. 그는 다시 왕관학의 전통을 껴안고 진시황과 상반되는 길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 < 상서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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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패주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짧은 몇 년간의 『좌전』 기록을 읽은 것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각국의 내란과 분쟁이 갈수록 빈번해지고 심각해진 데다, 변란의 성격에 있어서도 ‘나라 안’과 ‘나라 밖’ 그리고 ‘나라 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한 나라의 형제나 부자 사이의 분쟁 혹은 대부의 전횡이 봉건 친족 관계를 통해 다른 나라에 번지고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전의 유럽 형세와 비슷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가, 호엔촐레른가, 로마노프왕조 등의 몇 개 가문이 서로 혼인을 맺고 견제하면서 비밀 외교 협정을 체결했지요. 그 결과 어떤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복잡한 연맹 협정을 통해 확산되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 뜻밖에 요원의 불길처럼 전 유럽을 휩쓸고 심지어 유럽 이외의 지역까지 태워 버린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겁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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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 질서는 동시에 친족 질서였습니다. 만약 이모와 외삼촌이 싸우면 어머니는 절대로 모른 척할 수 없고 외할머니와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그 싸움에 관여하게 됩니다. 친족 간 네트워크가 분쟁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요. 가장 단순한 친족 질서의 기능입니다. 이런 틀에 근거하여 송나라에서 발생한 군주 시해 사건에 다른 나라들이 개입해 문제 해결에 협조하기로 했던 겁니다.

그런데 개입 방식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대국인 제나라가 회의를 소집하고 관련 국가들을 지정해 참가를 요구했습니다. 본래 친족 체계에 기반해 질서 회복을 꾀했던 형식이 이제는 패자霸者의 권력 행사 형태로 바뀐 겁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322

송나라의 조약 위반과 수나라의 회의 불참은 모두 제나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제나라는 이에 강경한 태도로 응징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수나라와 비교해 규모도 크고 지위도 높았기 때문에 수나라를 응징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송나라는 봉건 작위가 제나라보다 한 등급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주나라 천자의 명의를 빌리기로 하고 송나라 토벌 작전에 군대를 보내 달라고 주나라에 요청했습니다. “선백이 합류했다”는 것은 사실 선백이라는 사람이 혼자 와서 세 나라 연합군과 회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본래 제나라가 원했던 것은 주나라 천자의 군대가 아니라, 주나라 천자가 어떤 형식으로든 관여해 천자의 권위로 송나라를 압박해 주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불리해진 형국에서 송나라는 감히 천자의 군대와 맞싸우지 못하고 결국 투항하여 화의를 요청했습니다. ‘取成於宋’(취성어송)에서 ‘成’은 싸우지 않고 화의를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훗날 패자가 행한 패권 행사의 원형이었습니다. 패자는 반드시 상당한 군사적 우세를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무력으로 말 안 듣는 나라를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주나라를 존중했습니다. 실제로는 주나라 천자의 명의로 자신의 독립적 의지를 관철하면서 말이지요. 이것은 봉건 질서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타협을 이룬 방식이었습니다. - <좌전을 읽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6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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