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사변 1931 => 상하이 사변 => 윤봉길 의거 1932년 4월29일 => 송호정전협정 1932년 5월 5일 => 이누카이 총리 암살 5.15 사건 =>장졔스 임시정부 지원 => 김원봉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 => 이육사 1기생 1932년

만주사변 당시의 수상인 와카쓰키 레이지로 중국과의 화해는정책을 펴길 바란 정당 정치가였다. 그는 공포 상태에 빠졌다. 관동군은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으나 군사 행동은 총리의 관할 밖의 일이기 때문에 관동군의 소행에 대해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내각에서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민간인에 불과한 총리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최고사령관인 천황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다. - P107
이누카이는 그의 전임자처럼 이 모든 일에 무능한 방관자였다. 천황이관여해주기를 탄원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일본 군대가 상하이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고 한 번 더 시도를 했으나이에 반감을 품고 해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때 암살되었다. 그 이후일본은 ‘국가 통합‘ 내각이 통치하였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을통치한 14명의 총리 중에서 민간인은 단지 4명뿐이었다. 이것은 이시하라 간지 같은 책략가뿐만 아니라 그의 계획에 공모한 도쿄의 군 최고위층의 목적이기도 했다. 만주와 상하이에서 일어난 ‘사변‘ 이후 육군대신과해군대신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 - P108
1928년에 관동군이 지방 군벌인 장쭤린의 열차를 폭파함으로써시기 상조였던 모의가 실패했다. 이시하라는 중국군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일본군이 지배권을 잡는 구실을 만들길 바랐다. 그러나 그 일은 끝내실현되지 않았다. 그런 무질서한 행동에 겁먹은 히로히토 천황은 총리를사임시켰고 그 사건은 불문에 붙여졌다. 1931년엔 좀더 조직적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9월 18일 밤 선양 근처의철도 옆에서 일본군이 폭탄을 투하하였다. 남만주철도 재산에 실질적인피해는 아무것도 없었고 기차도 여전히 정시에 달리고 있었지만, 이 사건을 선양의 중국군이 ‘사보타주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중국군을 공격할 좋은 구실로 삼았다. 여기 - P106
가장 눈에 띄게 바뀐 점은 세력 균형의 변화였다. 1932년까지 권력은왕실, 관료, 군대, 의회에 분배되어 있었다. 의회는 항상 가장 약한 고리였으나 1920년대 정당 내각을 통해 그 힘을 키워왔다. 정당 내각이 끝나게되면서 일본 정치는 왕실의 신하들을 비롯해 육군과 해군 장교 그리고 관료가 하나가 되어 이끌어 갔으며, 종종 이 광신도적 부하들은 정당정치인들에게 그 결정을 강요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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