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가 구상한 새로운 질서의 주요한 축 중 하나인 천황숭배는 신토의 신의 탄생에 기원하는 일본 문화의 바탕으로서, 일본 정신에 내재한, 고대로부터의 의무로 나타난다. 이것은 빌헬름 시대의 독일의 고딕적고안만큼이나 각색된 사실이다. 낭만주의적인 중세 독일의 성처럼 과거에서 요소를 빌려온 것이며, 메이지 시대에 진화된 천황숭배는 야마가타의 징집제 군대만큼이나 근대적인 산물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결코최고의 신으로 천황을 숭배하지 않았다. 에도시대 말기까지 천황은 교토에 거주하며, 문화를 육성해왔고, 일본 관습과 정신의 영적 보호자였다.
당시 신토는 국가 종교나 국가적 우상이 아니었고, 일본 탄생의 신들, 다산, 자연의 축복, 절기의 축제, 애니미즘적 의례의 집합이었다.
고치대 - P65

군대의 최고통수권자이자 신으로서 추앙받는 황제라는 생각은 일본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가 종족의 아버지라는 생각 - 국가적
‘종족‘이라는 바로 그 생각은 19세기 중반 미토학의 국수적 교리와섞인 근대 독일풍의 인종국가론과 유사하다. 문명개화에 대한 야마가타의 권위주의적인 대응을 단순히 근대화 또는 서구화를 막기 위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아이디어를 서양에서 빌려왔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들이 우연히도 매우 비자유주의적인 것들이었다. 그가구상한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의 모습은 후쿠자와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본의 군대식 훈련은 막사에서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회의하는 개인주의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약화되도록 잘 훈련된 순응주의자들을 양성하였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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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과두지배 집단은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길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은 과두지배층이 원로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정치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개념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들도 헌법과 정치적 대표의 제도가 현대 국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조건임은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슬람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유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당시 일본은 고심해야 했다. 근대화를 진행하면서 동시에고대의 전통을 유지하기 원했다. 이것은 독일의 이념과 일본의 신화를 접목하여 달성되었다. 독재자들은 군사 훈련, 신화적 군주제, 혈통과 고향에 근거한 국가관의 선전을 공유했다. - P62

새로운 국가의 질서를 세우는 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은 비스마르크적 매너를 갖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사교 댄서가 아니라, 이토의 오랜 동료로서 무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그는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두 가지로서 군대와 교육을 중시했다. 그에게있어 교육은 충성심, 기율, 복종을 가르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갖지않도록 양성하는 것이었다. - P62

1873년부터 건장한 일본인 남성은 3년간 군대에서, 그리고 4년간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에게그것은 서구화의 첫 경험이었다. 그들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서구식 막사에서 살았으며, 서구식 군대의 기술을 배웠다. 대다수가 읽고 쓰는 법도 배웠다. 그들이 읽는 내용의 대부분은 민족주의 선전물이었다. 후쿠자와의 학교나 자유토론회 외에는 군대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젊은이들이근대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 P64

천황의 군대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천황의 정책에 의심을품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 대한 개인적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야마가타의 목적은 군대에서 정치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천황의 의지를군대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폭동을 예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의 결함은 50년 후에 명백히 드러났다. 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군인의 유일한 의무가 신성한 군주에 대해서만 있었으므로,
천황의 의지를 묵살하는 민간 정치가에 반대하는 반역은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1936년에 열렬한 파시즘 신봉자인 젊은 장교들이 황권에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내각 관료들을 살해한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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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1930년 1970년

1853년에서 1868년....기간을 ‘바쿠후마쓰‘ 또는 ‘바쿠후 말기‘라고 한다. 바쿠후마쓰는 경박하고다소 외설적인 ‘세기말‘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로서, 부패한 가부키 연극과 훨씬 뒤에 수많은 검투 영화에서 표현되는 음침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 바쿠후 말기는 반란과 진압, 도쿠가와 충성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남서쪽의 봉건 영주들의 폭력적인 계략, 살인 음모들이 횡행하던시대였다. 그리고 대중적인 광란 상태와 천년왕국이 득세하는 시대였다. 폭도들이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에 모여 신토의 상징들을 갖고 신사를찾아다니며 반라로 거리에서 춤추고 공공연히 성행위를 하고 부잣집을습격하였다. 그러면서 거의 종교적 흥분 상태에 빠져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하는 것은 뭐든 괜찮아!"하고 소리치며 다녔다. 1930년대와 1970년대 초처럼 1869년에도 젊은 극단주의자들이 많이 양산되었다. 나라를 구한다는 방편으로 극단적 폭력을 사용했다. 이것은 안정된 시대에 억눌린통제가 분출된 결과였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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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화가 모두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정치적 계산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지식인 몇몇은 일본을 보다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꾸고자 서양사상을 흡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자만하는 경향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삶은 최고의 메이지 문화를 대표하였다. 스스로가 말하기를 그의 역할은 오로지 "서구 학문을 소개하는기능을 하는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도쿄에 학교를 세웠으며 이 학교는 게이오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서양의 관습과 도덕관을소개하는 그의 책은 엄청난 베스트셀러였고, 그의 여러 출판물은 ‘후쿠자와 문고‘로 알려졌다. - P56

일본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독일의 지식인층처럼 일본의 인텔리겐치아도 뒤로 물러나 학문이나 조경을 음미하며 지냈다.
후쿠자와는 기대했던 자유가 종말을 고하는 것에 낙담하였으나, 공개적인 저항은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 상황을 진지하게 관찰하여 자서전을썼으나 그것을 개인 소장 문고에 묻어 두었다. 한 친구가 그것을 발표하라고 그를 재촉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마흔 살이 넘었고 당신도 그렇다. 우리가 다른사람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다음 세대의 일본 지식인에게서도 그대로 반복된 듯하다. 1870년대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이러한 중요한 관심들이 사라지게되었고, 1945년이 될 때까지 그것의 회생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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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개화‘의 형태나 외양은 정치적 슬로건이라기보다는 문화적 슬로건이었다.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양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을잘 드러내는 메이지 시대의 풍자적인 속담이 하나 있다. "상투 틀지 않은사람의 머리를 건드리면 ‘분메이카이카‘라고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유럽식 머리가 고등교육의 상징처럼 된 것이다. 몇몇 메이지 지도자들은유럽식 예절을 준수하는 것을 보여주면 서구 열강들이 불평등조약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메이지 개화에는 귀족적이면서 우스꽝스럽고 융통성 없는 면이 있었다. 근대화에 맞춰 토착적인 복장에 고대나 유사 고대의 관습들이 고안되거나 재현되기도 했지만, 그 시대에는 과거를 일소하거나 거부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들이 서양인들에게는 오히려 경박하거나 천박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 P52

거의 한 세기 후에 20세기 일본 최고의 소설가로 평가받았던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메이지 시대의 피상적인 고상함에 대해 격분하였다. 공공연히 옷을 벗는 것, 남녀 혼욕, 이밖에 ‘저속함과 상스러움‘을 나타내는 민망한 행태들을 금지시킨 것은 본성에서 나오는 고상함을 향한 욕구에서발현된 것이 아니라, 서양 외국이 그런 풍속을 인정해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미시마는 메이지 일본을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불안한 주부‘에 비유했다. 손님에게 먼지 하나 없이 흠잡을 데 없는 깨끗하고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일상생활 용품들을 옷장 속에 감춰 놓고 편한 일상복을 안 보이도록 치우는 주부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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