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물학에서 진화심리학으로

1975년 하버드 대학의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자는 취지로 새로운 학문 분야인 사회생물학을 창시했다. 하지만 남성우월주의와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학문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이 분야의 학자들은 공개적으로 스스로 사회생물학자라고 일컫기를 꺼려했다. 진화심리학은 바로 이 무렵에 탄생했고 실제로 많은 사회생물학자들은 기꺼이 진화심리학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현대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따른다. 하지만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와 한 인터뷰에서 “마음으로는 수없이 많은 간통을 저질렀다”고 고백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처럼 우리의 심리와 드러나는 행동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사회생물학이 행동의 진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진화심리학은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심리 기제의 진화까지도 분석하는 학문이다.
- < 진화심리학, 데이비드버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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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인간 가설의 부정

인류 역사가 이른바 ‘피로 얼룩진 역사‘라는 생각은 오늘날 오류로 판명 났다. 애초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에 대한 다트의 해석이 틀렸던 것이다. 화석이 부서진 것은 표범의 공격을 받았거나 무너진 동굴 잔해에 의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기본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 - P262

수렵과 동료에 대한 공격을 결부시키는 생각도 별로 신빙성이 없다. 포유류를 대상으로 동종개체에 대한 살해 비율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여기서 인류가 보인 결과값이 급격하게 올라간 시점은 농경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수렵으로 생활하는 동료를 살해하면 얻는 것이 별로없다. 그러나 농경을 시작하면 식량이나 재산이 많은 동료가 나타난다. 그런 동료를 살해하면 얻는 것이 클 것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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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순자의 차이를 통해 맹자 사상의 요지를 복원해 보면 우리는 인간 내면의 자주적인 각성 능력을 강조한 맹자의 견해가 중국 전통에서 진정으로 주류였던 적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정주가 육왕을 비판한 것은 유가와 불교의 차이를 보여 준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맹자를 이해하지 않고 또 맹자의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던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맹자는 더욱 주변적이었습니다. 역대 어느 황제든 진정으로 맹자의 학설을 믿고 맹자의 정치 이론을 실천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말과 글로는 ‘공맹’을 들먹이곤 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히 순자의 주장과 가르침이었음을 명확히 알게 됩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명백히 순자에게서 비롯된 사상과 학설이 왜 훗날 순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게 되었을까요? 그 중요한 역사적 이유는 바로 순자가 예와 법의 절대적인 구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가와 법가 사이의 가장 분명한 차이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이 법가와 혼동되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습니다. 순자의 성악론은 실질적으로 예를 법의 방향으로 크게 한 발자국 나아가게 한 것으로, 당시 나날이 성행하던 법가 쪽으로 크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가 자신의 입장을 세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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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맹자와 달랐을뿐더러 학설과 이론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맹자와 조화를 이루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맹자의 사상에서 예와 법은 각기 다른 층위에 속하는 범주입니다. 예는 인성의 근본 이치에서 비롯되지만 법은 부득이하게 마련되고 선택되는 보조 수단입니다. 이와 상대적으로 순자의 사상에서 예와 법은 그런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예는 법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고안된 외적 질서로서 사람의 내적 본성과는 무관합니다. 예는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것이며, 법은 강제되고 벌을 피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와 법은 본질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에 따라 구분됩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만약 사람이 “교육을 받으면” 예를 익히고 준수해 자격에 맞는 공민公民이 됩니다. 하지만 “교육을 받지 않아도” 법의 강제적인 규제를 받으면 역시 정해진 행위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예는 법과 연속적인 것으로, 가장 엄격한 예는 법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가장 느슨한 법도 예의 범위와 중첩되었습니다. 양자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았지요.

배움의 과정에서 규칙을 내면화해 더는 규칙의 조항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내면화하지 못했을 때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고, 또 준수하지 못했을 때 징벌에 관한 유무형의 압박을 주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게는 예의 행위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법에 따른 행위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배움의 성과에 따라 달라서 양자 사이에는 역시 명확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예와 법은 모두 외적인 것입니다. 단지 예의 외적 작용은 상대적으로 깊고 사람의 내면까지 도달하며, 법의 외적 작용은 상대적으로 얕고 공포와 위협의 성격을 띱니다. - < 순자를 읽다,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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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생각난다.


종이 끊임없이 발견되면서 분류 체계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개별 종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쉽지 않았다. 분류해 낸 동물들을 일일이 정의하기란 여간 귀찮은 일 아닌가! 그러자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분류한 동물 배후에 필연적으로 이 종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서서히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기존의 분류 체계로는 점점 더 처리하기 어려워진 데다가 분류하고 기록해야 할 동물이 갈수록 많아지자, 본질과 현상의 ‘이원론’을 흔드는 이론들이 생겨났다.

이 세계를 본질과 현상으로 나눈 중요한 이유는 현상이 너무 복잡해서 본질을 통해 좀 더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분류를 거쳐 얻은 본질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 15세기의 유럽인이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동물 종수를 80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설사 이 세계에 8천만 개의 서로 다른 생물 개체가 존재한다 해도 그 80종만 정확히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발견되고 기록된 본질 영역의 생물이 1만 종으로 늘어나자 기존의 분류학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팽창하고 말았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다윈은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중 대표적인 집단이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인데, 그들은 헉슬리가 해석한 진화론을 접하고서 그것이 창조론에 위배된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저자는 진화론의 최대 전복 대상이 창조론이 아니라 플라톤 이래로 절대적으로 떠받들고 있던 이데아론과 17~18세기에 린네가 수립한 분류학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다윈의 가장 큰 공헌은 동식물 분류는 고정불변하다는 당시의 전통 관념을 깨뜨린 인식론적 단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일부 분류학자들이 종의 분류와 귀속을 결정하는 특징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지만, 실제로 그 특징은 그 생물에게서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결국 외형적으로 보이는 현상과 유전자의 표출이 별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 된다.

유전자 배열 순서에 따라 종의 분류학을 새롭게 수립하는 것은 현재 유전자 생물학의 최대 과제이다. 극도로 어려운 이 도전 가운데서도 최대 난점은 모든 종의 유전자 순서를 정하는 것이 대형 프로젝트라는 점이다. 각 종의 유전자 순서를 정해야만 비로소 ‘배열’이 가능하다. 많은 천재 유전 생물학자들이 여러 가지 가설을 제기했지만 현재까지는 기존의 분류학을 대체할 획기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유전자 구성과 진화를 정복하는 때가 오면 인간이 분류학적으로 개와 훨씬 더 가깝고 원숭이와는 오히려 더 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물론 황당한 가정이지만 현재 이 학문이 발전 중에 있으니 결과를 좀 더 지켜보기로 하자 - < 종의 기원을 읽다,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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