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 가능성과 계층상승 욕구

조선은 유동성이 강한 사회였기 때문에 가업에 대한 생각이 약했다. 지금도 자기 직업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진 않다. 대개의 부모들은 자식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직업을 갖길 바란다. 또 그게 실제 가능했던 게 한국 사회였다. 한국인들의 유별난 계층상승욕은 실제로 그게 어느 정도 가능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상승 가망이 없는 사회에서 계층상승욕이 이렇게 광범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박훈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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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노선 대 말콤 엑스 노선

1990년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멀찌감치서 목도한 뒤부터 어떠한 이념 세례도 나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견이지만, 모든 운동 노선은 ‘마틴 루서 킹의 길‘과 ‘맬컴 엑스의 길‘이 있다고 본다.1960년대 미국 흑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회복하는 방안을 놓고 전자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라는 리버럴 성향의 백인들을 포섭해 민권법을 개정하는 길을, 후자는 ‘흑인 해방을 위한 흑인 국가의 건설‘을 대안으로 각각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실질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끌어 낸 것은 마틴 루서 킹의 온건 노선이었지. 맬컴 엑스의 ‘사이다 해법‘이 아니었다.

"백인들은 죽어도 흑인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식의 언설은 운동의 주체들에게 자기 위안을 줬을지는 모르지만, 운동의 확장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데아‘가 강한 분들에게는 유쾌하게 들리지 않을 얘기지만, 언젠가는 나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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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형사재판 대 마녀사냥
- 기소자가 유죄를 증명할 것인가? 아니면 피의자가 무죄를 증명할 것인가?




누군가 나를 사기꾼 살인범이라고 지목했다고 가정하자. 지목한 사람이 개연성있는 근거를 먼저 내놔야 나 역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대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이를 갈아온
‘중세 마녀사냥‘의 논리가 아닌가?

근대 형사재판은 의심만으로 마녀를 단정하고 화형에 처하는 식의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죄 없음을 입증하라"는 것은 한마디로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는 역발상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피해자에게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 금지, 피해자다움 요구 금지라는 ‘3중 갑옷‘을 덮어씌우고 밝히려는 진실이 과연 진실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까?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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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일본이 옛날에는 우리보다 못했고 가난했는데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통에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에 수립된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일본은 급속히 발전했다. 이때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 되었고 부자나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도 세련된 수준에 이르러 다도, 가부키, 기모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는 대개 이때 형성되었다.
18세기 전반 조선에서 영조가 통치하던 무렵, 일본 인구는 3000만 명이 넘는다. 우리 인구가 그에 이르는 것은 해방 무렵이다. 당시 조선 인구는 많이 잡으면 1500만 명이지만 대략 1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것은 지금 한일 인구 비율과 일치한다.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7500만 명. 일본은 1억 3000만 명 정도로 예나 지금이나 약 두 배 정도, 혹은 그 이상이다. 일본은 왜국倭國이 아니라 큰 나라다. 특히 수도였던 에도, 지금의 도쿄 인구는 100만 명이었다. 우리 서울은 약 20만 명 정도다. 당시 전 세계에서 인구 100만 도시는 청나라의 베이징 등 몇 개밖에 되지 않았다. 오사카, 교토도 모두 인구가 3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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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을 거부하면 전쟁은 당연했고 전쟁을 하면 필패였다. 사무라이 정권인 막부는 청 조정처럼 서양 오랑캐 따위는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오직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막부이기에 전쟁에서 지면 끝장이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지고도 건재했지만, 막부는 다르다. 장군將軍의 원래 이름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아닌가. 말 그대로 오랑캐를 정벌하라고 있는 자리다. 전쟁에서 지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게 막부가 서양과의 전쟁을 끝내 회피한 이유다. 실제로 막부가 무너진 것은 조슈번長州藩과의 전쟁에서 패한 게 결정타였다. 무력이 정통성의 원천이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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