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19세기에 들어가면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궁핍이 아주 심해진다. 많은 사무라이들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해냈다. 그런데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다. 조선의 양반들은 가난해도 과거에만 붙으면 일거에 신세가 핀다. 그런데 사무라이는 문장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그 사회엔 당연히 과거제가 없다. 그럼 사무라이는 무엇으로 출세할 수 있나? 전쟁이다. 평생 닦은 무술 실력으로 전투에서 큰 공훈을 세우면 일거에 집안도 일으켜세우고 거액의 봉록도 받을 수 있다. 전쟁이야말로 사무라이들의 존재이유다.
그런데 도쿠가와 시대는 사무라이 국가이면서도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250년간 이렇다 할 전쟁이 없었다. 세계 역사상 보기 드문 장기 평화 시대였다. 차고 다니는 칼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니 사무라이들이 출세할 일도 없고, 그저 주군이 맡긴 자잘한 사무나 보며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아 근근이 생활해나가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었다. 세상이 소란해지고 전쟁을 해야 자기들이 위세를 부릴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상업이 발달해도 경제를 모르는 사무라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상인들의 배만 불릴 뿐이었다.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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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농업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특히 밭작물 생산력은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힘으로 100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농업생산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상품과 화폐경제는 위축되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국가재분배 경제라고도 한다. 이게 조선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왜 조선은 이웃인 청이나 일본과는 달리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는가, 혹은 그토록 성공적으로 상업 발전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나름대로 고도의 사회수준과 문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유럽 이외 지역에서도 근대의 ‘맹아’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청과 도쿠가와 일본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조선은 근대인인 우리들에게는 훨씬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그런 만큼 근대를 상대화하고 근대를 넘어서려는 상상에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연구대상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빈부격차였다. 한 사회에 엄청난 부가 쌓이고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그 혜택을 골고루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향평준화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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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접근과 사회적 불안이라는 내우외환의 시대에 직면하여, ‘세이시사이’는 역사적 실체로서 천황을 중심에 놓고, 일본이란 나라의 본체, 즉 국체(國體)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신론(新論)’이다.

‘세이시사이’는, 막부와 번의 정치적 상황을 강하게 비판하며, 시대적 위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체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번을 중심으로 사고해온 무사들의 인식을, 일본이라는 국가적·민족적 범위로 전환시켰다. - <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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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년의 판적봉환으로, 구 번의 영주가 자발적으로 판(토지), 적(인민)을 천황에게 반납하여, 다시 지번사(知藩事)로 임명되어, 번의 영지와 영주의 분리를 도모할 수 있어, 중요 지역이나 옛 막부부 직할지였던 부, 현과 함께 부번현체제(府藩県体制)가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진행시켜, 개혁을 전국적으로 망라하려는 데에 있어, 번의 존재는 방해가 되었고, 번 측에서도 재정의 핍박이 계속 되어, 자발적으로 폐번을 신청하는 번이 잇따랐다. 1871년 8월 29일, 사쓰마, 조슈 번 출신의 지도자에 의해 폐번치현이 실시되어, 도도부현제도 설치(당초에는 3부 302현, 직후 정리되어 3부 72현), 중앙정부로부터 지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 < 일본 근대 사무라이 사상가들,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탁양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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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사대부화
- 메이지 유신의 배경

일본은 18세기 말부터 급속히 유학‘이 확산되었다. 19세기는아마도 일본 역사상 가장 유학중심은 주자학이 번성한 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은 병영국가 도쿠가와 체제와는 잘 맞지 않인는 사상이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유학은 ‘위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유학이  전에 유학적 영향(Confucian Influence)‘에 따른 체제 동요가 이미 시작되었다. 즉 ‘일본적 사회 유학적 영향(동아시아 국가 모델의 수용 시도) → 서양의 충격 근대화‘라는 궤도를 걸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을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는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은 메이지 정부의 수립을 유학적 정치사상에 따라 봉건제(制)에서 군현제(制)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했다. 학교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이 설립되었고, 사무라이(군인)들이 학교를 다니는 기현상이 보편화되었다. 무술 실력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유학 소양은 사무라이들의 위신과 출세에 중요해졌다. - P10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200년이 넘는 장기 평화가 지속도쿠가와 사회에서 일반 사무라이들은 군인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방대한 관료제의 말단 실무자, 즉 리(吏)로 변해 갔다. 그들은 조선의 양반들과는 달리 정치에 참여할 의사도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유학이 급속히 침투하면서 그들은 ‘사(士)‘가 되어 갔다.(사무라이의 사화(化)) 그리고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메이지 정부가 폐도령(令)을 내릴 때까지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칼 찬 사대부! 문무(文武)의 결합 속에서 그들의 행동력은 커져 갔다.

19세기에 사무라이들이 벌인 전대미문의 전국적인 정치 운동(전투가 아니다!)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때 이들은 마치 명대(明代)의 중국 사대부나 조선조의 양반들처럼 ‘학(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에 기반을 두고 당파를 만들어 당쟁을 일삼았으며, 정치적 주장을 담은 상서를 쏟아 냈다. 필자는 이를 ‘사대부적 정치 문화‘라고 명명했다. 4장과 5장에서는 이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확산과사무라이의 ‘사화(化)‘에 초점을 맞춰 그것이 도쿠가와 체제를 동요시키고 정치 변혁을 촉발한 요소로 작용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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