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슬라,아슬라


고구려는 여전히 신라를 한수 아래의 속국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는 남의 영토임에도 그곳에 들어가 사냥을 즐기곤 했다. 신라 하슬라 성주 삼직은 그런 고구려 장수를 잡아 죽이고 말았다 450년. 반 고구려 정서가 표면화한 것이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아슬라(阿瑟羅)

인문지리지명

 강원도 강릉 지역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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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하서라(河西良), 하슬라(何瑟羅)분야인문지리유형지명성격고지명소재지강원도 강릉시시대고대-삼국-신라성격고지명소재지강원도 강릉시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의 옛 지명.

키워드

하서정

내용

본래 예국(濊國)의 고도로서, 한무제(漢武帝)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할 때 임둔군(臨屯郡)을 두었던 곳이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라(河西良, 또는 何瑟羅)라고 하였다가, 신라의 영토가 된 뒤 512년(지증왕 13)아슬라주가 되어 처음으로 관리가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523년(법흥왕 10)에는 이곳에 군사령부인 하서정(河西停)이 설치되어 군사기능을 강화하였다.

선덕여왕 때 주를 소경(小京)으로 승격시켜 정복지역의 유공자를 이주시켜 그들의 정치세력을 견제시켰다. 658년(태종무열왕 5) 다시 아슬라주로 바꾸고 도독(都督)을 두어 진수(鎭守)하게 하여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삼국통일에 대비시켰다. 757년(경덕왕 16)명주(溟州)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5년강릉시와 명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강릉시가 되었다.

아슬라라는 지명은 ‘큰 바다’ 또는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氣運)’ 등을 뜻하는데, 이는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서 유래한다. 신라시대에 말갈족과 국경을 접한 지역으로, 국경분쟁이 잦았던 곳이다. 이곳은 영동지방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예로부터 중요한 곳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슬라(阿瑟羅))]
아슬라(阿瑟羅)

인문지리지명

 강원도 강릉 지역의 옛 지명.   


이칭 하서라(河西良), 하슬라(何瑟羅)분야인문지리유형지명성격고지명소재지강원도 강릉시시대고대-삼국-신라성격고지명소재지강원도 강릉시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의 옛 지명.

키워드

하서정

내용

본래 예국(濊國)의 고도로서, 한무제(漢武帝)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할 때 임둔군(臨屯郡)을 두었던 곳이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라(河西良, 또는 何瑟羅)라고 하였다가, 신라의 영토가 된 뒤 512년(지증왕 13)아슬라주가 되어 처음으로 관리가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523년(법흥왕 10)에는 이곳에 군사령부인 하서정(河西停)이 설치되어 군사기능을 강화하였다.

선덕여왕 때 주를 소경(小京)으로 승격시켜 정복지역의 유공자를 이주시켜 그들의 정치세력을 견제시켰다. 658년(태종무열왕 5) 다시 아슬라주로 바꾸고 도독(都督)을 두어 진수(鎭守)하게 하여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삼국통일에 대비시켰다. 757년(경덕왕 16)명주(溟州)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5년강릉시와 명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강릉시가 되었다.

아슬라라는 지명은 ‘큰 바다’ 또는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氣運)’ 등을 뜻하는데, 이는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서 유래한다. 신라시대에 말갈족과 국경을 접한 지역으로, 국경분쟁이 잦았던 곳이다. 이곳은 영동지방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예로부터 중요한 곳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슬라(阿瑟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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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이란 초고왕 2세라는 의미. 왜 학교에서 못 배웠을까?


소설가 최인호는 도미와 아랑의 이야기를 개루왕 때가 아니고 근개루(개루와 비슷하다는 뜻)라고도 불리는 제21대 개로왕(재위 455~475)년때로 추정해서 『몽유도원도』를 썼다. 개로왕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고구려의 침공으로 참수형을 당한 왕이다.
개로왕은 일명 근개루라고도 한다. 백제의 왕들은 전대의 왕 이름을 따서 앞에 ‘근’이라는 수식어를 넣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백제 최악의 왕인 개로왕에게 도미의 아내 이야기도 붙여 넣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낙랑과 대방이 멸망하자 백제는 그 인적자원을 흡수했다. 그로부터 큰 발전을 이룩했을 것이다. 백제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서로 다른 가문이 왕위를 놓고 다퉜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초고왕(재위 166~214) 계열이 정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발전의 기틀을 놓은 왕이 근초고왕이었다. 근초고라는 이름 자체가 초고의 후예임을 가리킨다. 근초고왕의 태자는 근구수(재위 375~384년)였는데, 이 이름도 백제
초기 구수왕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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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왕자와 낙랑공주


호동은 봄날 4월에 멀리 나라의 남쪽 끝까지 여행을 떠났다. 호동이 간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인근이 될 텐데, 그 시절에는 옥저 지방이라 불렀다. 호동은 이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낙랑왕 최리를 만난 것이다.
낙랑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세운 군현의 이름이기 때문에 ‘낙랑의 왕’이라는 존재는 이상하다. 낙랑에는 태수가 있을 뿐 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낙랑왕은 낙랑군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쩌면 낙랑국이란 낙랑군이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으로 가로 막힌 그 동쪽의 영동7현(옥저 지방과 인접한 곳이다) 중 어떤 곳이 독립하여 왕국 행세를 한 것일 수 있다. 또는 그 현 중의 하나를 고구려가 점령한 이야기가 후대에 과장되어 왕국으로 전해
내려올 가능성도 있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호동이 낙랑국을 멸망시키는 데 일등공신이었으니 그 위세가 많이 올라갔을 것이다. 그것은 왕실의 세력 균형에 큰 불안을 조성했다. 당연히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가 가장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이 왕비의 아들이 후일 고구려왕이 되는데 악행을 일삼다가 시종에게 살해당하는 모본왕(재위 48~53)이다. 자식의 행태로 보아 평소 왕비의 성품을 알 만하다. 첫째 왕비는 대무신왕에게 호동이 자기에게 마음이 있어서 음란한 짓을 하려고 한다고 일러바쳤다. 하고 많은 모함 중에 이런 저급한
모함을 한 것을 보면 어쩌면 왕비 자신이 호동의 미모에 반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호동은 자살을 선택했다. 주변에서 그걸 알고 만류했다.

“이렇게 누명을 쓰고 죽어서는 안 됩니다. 해명을 하십시오.”

호동은 고개를 저었다. 이때는 11월. 호동이 4월에 낙랑공주와 결혼을 했다면 낙랑국 함락, 즉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반 년 남짓한 세월이 지났을 뿐이다. 기간은 이보다 더 짧을 수도 있다. 호동이 낙랑공주와의 슬픈 사랑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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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도 삼한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청나라 때 학자인 고염무 1613~1682가 “오늘날 사람들이 요동을 삼한이라 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근거를 가져와 조선 실학파인 이규경 1788~1856이『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삼한이라는 이름은 조선에서 비롯되어 요동도 삼한이라 칭하였다”라고 쓴 바 있다.

신채호는 적극적으로 전후삼한론을 주장했다. 원래 고조선이 셋이 있었으며, 요동·길림 쪽에 진조선, 요서·개원 이북에 번조선, 한반도에 막조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조선들의 이름인 진, 번, 막을 신, 불, 말로 읽어서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이라고도 부른다. 이중 중심나라는 진조선이었다.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진조선, 번조선이 붕괴되었고 진조선, 번조선 유민들이 압록강 이북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에 진번조선을 만들고, 또 한 일파는 한반도 남부로 갔는데, 번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진조선 유민이 참여한 나라는
변진변한이 되고, 진조선 유민만으로 만들어진 나라는 진한이 되었다.

이때 막조선은 진개의 침공을 막아내어 조선의 이름을 지켰으나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남쪽으로 달아나 마한을 세웠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주장은 정인보, 안재홍1891~1963 등에게 이어졌고 역사학계에서는 천관우1925~1991가 더욱 정교한 형태로 주장한 바가 있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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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는 남으로 월남 지역에 9군, 서남이 지역에 5군, 흉노의 하남, 하서 지방에도 군현을 설치하였으며, 요동에도 4군을 설치했다. 이들 군현은 중국 안에 만들어진 군현과는 성격이 달랐다. 무엇이 달랐는가?

중국 안에 설치된 군현에서는 개개인에게 인두세와 요역을 부과하고 병역을 징발했다. 그러나 중국 밖에 설치되었던 군현에서는 인두세, 요역, 병역을 요구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 지역들에서는 한의 법률로 통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풍속, 즉 고속故俗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 말은 이 지역 사람들의 통치가 그들의 지도자 추장, 군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황제의 대리인인 관리가 인민을 개별적으로 지배한다는 황제지배체제는 중국 밖의 군현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전통적인 중국 안의 군현을 내군內郡이라 부르며, 중국 밖의 군현은 외군外郡, 또는 변군邊郡이라 불렀다. 한무제 당시의 중국인들도 내군과 변군을 구분하고 있었으며, 변군을 중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변군은 중국인과는 다른 이민족들이 사는 땅이었다. 변군에서는 원래 그곳을 다스리던 토착 세력의 지배 형태가 유지되었다. 이 점에 주목해서 중국에 복속한 이민족을 전담하는 군을 변군 중에서도 ‘내속군’이라며 다시 분류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중국의 군현을 내군, 변군, 내속군 등등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한 국가의 통치체제에 대한 연구는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데 어렵게 진행해 쌓아온 오늘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세기 이전인 6~70년대의 이병도 학설 같은 것만 가지고 와서 “역사학계는 기존의 학설만 되풀이한다”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 <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지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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