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일지라도도제 훈련을 정상화하려는 민간단체의 노력은 지금 봐도 유효하다. 문제는 오늘날 자발적 민간단체는 없고 정부와 그 대리자들은 행정절차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소수의 헌신적인 교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많은 자발적인 박애주의 단체들이 영국의 도제 훈련과 관련된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특히 Knox 1980: 9장을 볼 것). 그들의 노력은 당시의 사람들이 청소년 훈련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이해했던 방식을 보여주며, 독일의 제도와 구분되는 중요한 차이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P203

 특히 유태인 단체와 기독교 단체는 지역사회에서 흔런업체와 청소년 사이의 연계를 구축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868년에 유태인후원협회산업위원회 Industrial Committee of the Tearts Board of Guardians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고, 1886년에는 유사한 단체인동런던기독아동도제기금 East London Apprenticing Fund for Christian Children의 설립으로 이어졌다(Jevons 1908: 455-6).
- P204

이 단체들은 지역사회 내에서 청소년들이 훈련을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하는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많은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1) 기업과 도제를 연결시켜 주고,
2)  훈련생에게 적절한 업체를 안내해주고, 또 기업이 적합한 도제를 찾도록 지원했다.
3)  또한 종종 이 단체들이 나서서 도제에게 대출을 해주어 기업에 특별 경비를- 혹은 수업료 - 지불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는 기업이 보통의 도-제가 - 일반 도제 혹은 ‘직종‘ 도제가 —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훈련을 자기 기업의 도제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약속하면 제공되었다. 
4) 이 단체들은 종종 도제에게 ‘후견인‘
을 배정하기도 했다. 후견인은 주기적으로 작업장을 방문해 도제의 성장을 감독하고 고용주가 협정상의 의무를 다하는가를 확인했다 (Jevons1908: 455-6; Knox 1980: 299-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인의 힘이 크래프트 유니언으로 이어진 영국에서는 도제의 공급 통제가 노사갈등의 주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제의 훈련 품질에 대한 이슈는 노사 사이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도제들은 자신들의 훈련 품질 개선이 어려워지자 각자도생을 선택했고 우수한 도제 먼저 도제제도를 벗어났다. 장인계급에게 숙련인증권한을 정부가 부여한 독일에서는 도제의 훈련 품질을 장인이 독점하고 보증하면서 이 권한을 산업계로 가져오려는 산업자본가에 의한 생산적 경쟁이 강화되었고 노동조합은 이 문제를 노사갈등의 문제로 만들지 않았다.

 초기 노동조합의 전략은 숙련노동의 공급을 조절함으로써 임금과 고용에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영국에서는 도제 훈련을 둘러싸고 독일처럼 독립 장인 부문과 새롭게 등장한 산업부문이 대립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크래프트 유니온과 숙련에 의존하는 산업부문의 고용주들이 대립하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동학이 작동했다.
- P1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옮긴이의 요약이 본문보다 더 통찰력 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제국 바로 옆 한반도에서 ‘민족‘이 형성된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베스타는 청 제국도 조선도 각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양해하면서, 청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안정적으로작동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청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할때에도 조선은 청 제국으로부터의 이탈보다는 밀착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본이 변수로 작동했다. 지금까지 조선이 청 제국 아래 누려왔던 자주는 사대주의로 비판받았고, 일본은 조선에게 청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요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일본은 제국주의화하면서 한반도를 병합했고, 이는 한반도의 민족 개념이 강렬한 민족주의‘로변환하는 계기가 된다.

문제는 한반도와 중국에서 모두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해지면서 저자가 다룬 시기의 복합 주권과 복합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 P218

한반도는 중국 제국 옆에서 사대를 통한 ‘자주‘를 오랫동안 지켜왔다.

중국 제국이 흔들리자 한반도는 짧은 독립을 누리다가, 나라를 잃었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오랜 길을 걸어야만 했다. 가까스로 얻어낸 ‘독립‘이기에 우리에게 자주독립은 매우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주독립의 세계관 안에서 제국과 공존해왔던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기란 쉽지 않다. 

중국이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포용력있는 제국이 되기 위해서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 P2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에서 중국 민족주의자들은 제국을 민족으로 새롭게 형성한다는 불가능한 도전에 직면했다. 끝내 공산주의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중국공산당이 과거 청 제국의 경계 아래 사는 모든 인민을 대표한다는 선언이다. 중국공산당은 55개의 소수민족과 현재인구의 96퍼센트를 구성하는 한족이 결합된 ‘중화민족中華民族을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 창출해냈다. 이 중화민족 개념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을 모두 포함하는 중국 국가國家 아래 사는 모든 인민이 아주 오래전부터 중화민족에 속해 있었다고 가정한다.

그 기원과 실체의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한반도와 중국에서의 현대 민족주의는 모두 과거의 복합적인 주권 형태를 이해할 여지를 줄이고 있다. - P2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과 명청과의 관계보다 현대사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더 훌륭하다. 제국과 의로운 민족과의 관계는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의 현대사 요약은 간결하고 명확하다.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 자신이 서명했던 핵확산금지조약 Non-prolitteration Treaty, NPT을 북한이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어 같은 해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발표했다. 

이와 같은 북한의 행보는 미국과 다른 국가들에 경종을 울렸다. 빌 클린턴 Bil Clinton 행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과의 회담을 받아들였다. 김정일의 권력 승계 직후인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기본 합의‘를 체결했고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잔류하기로 했다. 이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볼 때 제네바 기본 합의는 자비로운 패권국이 세계 전체를 대표하여 협상에 나선 것이었다. 

김정일에게 제네바 기본 합의는 분명 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이 합의는 김정일 정권의 체면을 크게 차려주었을 뿐 아니라 북한은 비핵화의 대가로 미국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미국과 완전한 관계 개선을 기대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의 핵 합의는 유지되지 못했다. 1994년 중간선거 이후 공화당이 다수파가 된 미국 의회는 북한과의 협정을 지지할 의사가 없었다. 미국은 제네바 기본 합의의 대가로 북한에 제공하기로 했던 중유의 공급에 대한 자금 지원을 보류했다. 또 미국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지속해온 북한을 향한 제재도 해제하지 않았다.  - P174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는 대가로 북한이 약속받았던 것은 2기의 경수로였다. 경수로 건설은 첫 삽은 떴으나 완료되지는 않았다. 

경수로 건설 사업은 조지 부시 George W. Bush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미국 정보당국이 북한이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기술을 확보하려 한다고 보고한 이후 완전히 중단되었다. 부시는 9·11 테러이후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자 "주민들은 굶기면3서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하는 정권"이라 선언했다.)ㅣ - P1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