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 사건


1956년 8월 30일, 조선로동당 3기 2차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서휘, 윤공흠, 리필규 등이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자 김일성이 이들을 모조리 숙청한 사건. 조선로동당이 공산주의 정당에서 일인 독재 정권의 도구로, 북한이 일당제 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 수령이 살아있는 신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봉건주의,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바뀌게 된 단초라 평가되고 있다. 8월 종파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말 그대로 8월에 (북한 입장에서) 종파 세력들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 8월 전원회의 사건이라고도 한다.

북한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공개적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김일성의 권력에 도전했던 사건이다. 북한 내부에서 알려지지 않은 쿠데타 시도 등이 더 있었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인 회의에서 김일성에게 도전했던 사건은 이 사건이 유일하다.<나무위키>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탈스탈린화에 착수했을 때, 중국과 소련의 정치적 조언 사이에서 김일성이 추구하던 숙청은 위기를 맞이했다. 흐루쇼프는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초청했고, 6주간 김일성은 그의완고한 정치 노선을 두고 비판을 받았다. 평양에서 김일성의 정치적 경쟁자들은 김일성이 귀국하면 그를 권좌에서 축출할 준비를 했다. 소련에 노선의 개선을 약속한 후 북한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정치적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적어도 사적인 차원에서는 김일성에게 따뜻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던 중국 지도부는 소련 대표단과 함께 김일성이 정치적 경쟁자와 타협을 하는 상황을 참관하는 대표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 대표로 한국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던 펑더화이를 평양으로 파견했다. - P154

그러나 대표단이 떠나자 김일성에게 반대했던 이들은 투옥되거나 더 나쁜 상황에 놓였다. 1957년 김일성은 측근을 제외한 모든 조선로동당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 수천 명이 처형되고, 일부는 중국이나 소련으로 도망쳤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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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을 거친 후에 선조가 권력을 유지한 것과 한국전쟁 후에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권력을 유지한 것이 공통된 결과이다.

특히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유지한 것은 생각할수록 미스테리다. 북한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50년대 북한 정치사를 읽어봐야겠다. 중국이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북한이 혈통 중심의 체제로 유지되는 것의 기원이 이 시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저지른 치명적인 실책에도 불구하고 권좌로 복귀했다. 소련은 김일성을 보호했고, 전투 대부분을 담당했던 중국은 김일성을 대신할 만한 그들만의 후보가 없었다.

 남쪽에서도 미국의 여러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살아남았다. 신임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에 따르면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우리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이 개자식아"로 요약되었다.  - P150

몇몇 중국인은 한국전쟁이 실제로는 중국에 이득이 되는 전쟁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은 중국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젊은 조선인 지도자가 스탈린의 격려 아래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많은 중국인 지도자의 시선에서 볼 때,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한 푸닥거리를 하고 비용을 치른 것은 바로 중국이었다.

몇몇 중국인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우려했지만, 마오쩌둥은 그들과는 의견을 달리했다.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중국의 개조라는 더 큰 사업의 일부였다. 지난 100년간 중국은 모든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이제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 맞서 교착 상태를 이끌어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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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으로부터 한국전쟁의 재가를 받은 북한이 왜 중국의 군사적 지원을 직접적으로 받았는지 의문이었다. 냉전사의 대가인 저자의 설명 덕분에 궁금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일부 풀렸다. 막 내전을 끝내고 허약했던 중국이 미국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오쩌뚱 입장에서 미국의 북진은 임진전쟁에서 일본의 북진이었고 당시 명이 조선을 도왔듯이 신생중국이 북조선을 도왔을 것이다. 정치와 역사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막 건국된 신중국은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일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의 재건에 미칠 수 있는 피해를 이유로 한반도 개입에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중국 국경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 이는 신중국 정권에 실존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중국으로의 관문이었다. 국공내전 당시 중국국민당을 지원했던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적이었고,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가 패배한다면 이를 이용하여 일로, 그리고 국민당 잔존 세력이 공산 중국을 압박할 것이 분명했다.

1950년 당시 중국공산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에게 이념과 역사, 안보는 모두 중요한 문제였다. 마오쩌둥은 다른 동료들보다 사회주의 진영 내의 이념적 유대에 역점을 두었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북한)의 동지들을 도울 의무가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동지들은 과거에 중국공산당을 도왔고 조선과 중국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라였다. - P147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적어도 5, 6개 사단을 38선을 향해이동시켜달라고 개인적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요청이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과 중국공산당이 어디까지 헌신할스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중국 지도부는명령을 내리는 것을 망설였다. 10월 2일 정치국 회의가 열렸고 여기에서는 개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마오쩌둥이 마침내 개입을 결정하기까지 정치국, 그리고 소련과 거의 2주간의 논의가 필요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라 이름 붙인 중국군이 10월 19일부터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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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뚱은 프랑스와 싸우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훈련을 도와주고싶어 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의 전투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볼 때 한반도의 통일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져야 했다. 이미 마오쩌둥은 1949년 5월 김일성의 특사로중국을 방문한 김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년 초에 국제적 상황이 조선 동지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뀔 때만 남조선을 향한 공격이 가능할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 앞에서는 더 직설적이었다. 중국은 전쟁 전戰前 수준의 경제를 회복하고 전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3~5년간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 P142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도록 그들의 초강대국 후원자들에게 더 많은 무기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드의 내전이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와 같은전쟁에서 역할을 하는 데 큰 열의가 없었다. 1949년 여름 두 강대국은, 한반도의 두 정권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자국 병력의 대부분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다.
- P143

었다. 김일성은 남한을 향한 공세에 스탈린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김일성은 현재는 북한의 전력이 우세하지만, 향후 남한의 게릴라들이 진압되고, 남한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군사적으로 회복되면 향후의 세력균형은 불리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스탈린은 당시 진행되고 있던 중국의 국공내전을 이유로 김일성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1950년 1월 스탈린은 마음을 바꾸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군사적 승리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의 서방의 도발에 보복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도자는 한반도의 무력통일을 돕겠다고 암시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한반도 무력통일을 지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 P144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낸 김일성은 1950년 5월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의지원을 문의했다. 마오쩌둥은 아주 많은 이유로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1) 거절은 스탈린의 결정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2) 그리고 이는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할 때 북한이 도와준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기도 했다. 

3) 그러나 아마도 제일 중요했던 것은 만약 중국이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는 공산당의 신중국이 일본의 부상 이후 깨어져 나간 중국 한반도의 긴밀한 관계를 재확립할 의도가 없다는 신호로 읽힐지도 몰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보다 먼저 수립되었지만, 중국 지도자는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동생‘이라고 지칭했다. 형제적 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중국은 김일성의 계획에 동조하고,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비록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원했던 한반도 무력통일 작전에 대한 중국의 실질적인 지원은 제한된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지만, 김일성은 그가 원하던 바를 얻어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군사적 승리 이후에 통일이 신속히 이루어져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약속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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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에도) 대부분의 조선인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의 전투 요원으로 활약했다.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1946년 중반부터 국공내전이 격화되었다. 여기에서 조선인 부대의 활약은 중국공산당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일성이 1946년 초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활동하던 북한 지역과 만주가 인접했다는 점도 국공내전 시기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소련의 묵인 아래 중국공산당군은 국민당군과의 전투 중 한반도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들은 무기, 보급, 의료품을 한반도 북반부에서 지원받을 수 있었다. 1946년 말에는 북한 지역의 젊은이들이 모집되어 만주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싸웠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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