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는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가 독립될 필요성을 강조했으나, 카이로 회의 직전 루스벨트를 만났을 때는 장제스는 적어도 얼마간 "한반도가 중국과 미국의 보호tutelage를 받는 반부-독립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중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재점령하고자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라고 결론 내렸다. 루스벨트는 소련까지 참가하는 국제 신탁통치 방안을 선호했으나, 장제스는 이와같은 해결책을 피하고 싶어했다. 미국, 중국, 영국이 최종적으로 동의한「카이로 선언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한다. " - P132

전후의 기회를 준비하면서, 중국공산당은 공산당 내의 조선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 문제에 봉착했다. 1936년 이전 코민테른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나친 민족주의를 비판했지만, 전쟁 후에 코민테른은 노선을 수정하여 ‘통일 전선united front‘의 이상을 내세웠다.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노선을 따랐고, 이는 한반도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1936년 이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나라가 고대부터 하나의 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자 비판을 받았었다.

 이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투쟁이 사회혁명이 아니라 민족 해방을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비판을 받았다. 

코민테른의 노선 전환이 중국공산당원이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간의 파벌 투쟁을 격화시킨것은 당연하다. 비록 많은 조선인이 북중국에서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함께 투쟁했으나,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까지 작전을 확대할 계획이 없었다. 홍군 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해방 뒤에 조국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소련 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역시 붉은 군대를 위해 먼저 복무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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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처지에서 볼 때 청일전쟁 이후의 15년은 충격과 실망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는 한일합방이라는 예상치 못한 재난이었고, 조선인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그들 자신을 비난했다. 일본은 탐욕스럽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역동적이고 대담하고 질서정연하게 보였다. 반면 청나라는 후진적이고 무기력하게 보였다. 그리고 조선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과거가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고 평가하고,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과거의 방식을 고수했기에 민족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1910년 이후 일부 조선인은 이기심 혹은 향후 더 강한 조선을 건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본과 협력하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한반도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거나, 한반도 안에서 이론적이든 실질적 차원에서 민족의식을 양성하고자 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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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에 향후 100년간 중국과 한반도 관계에 영향을 미칠 서로 다른 두 가지 과정이 진행되었다. 하나는 조선 청나라 정부 관계의 점진적인 개선이었다. 건륭제의 꾸준하지만 강력한 외교, 그리고 건륭제의 오랜 재위 기간을 통해 조선인이 청나라 황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거의 명나라 말기와 유사할 정도로 복원되었다. 19세기 초까지 많은 조선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과거 명나라를 대하듯이 청나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또 다른과정은 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체제를 향한 서구 열강의 진출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온 배들이 조선 앞바다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조선인은 그들의 지리적 관념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하기도 했던 이수광李光은 "세상에서 사해(동서남북 사방의 바다)라 일컫는 것은 다만 중국을 표준으로1988)하여 말한 것이지, 천지 사이의 사해가 아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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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홍무제는 고려의 쿠데타와 이후 진행된 정치적 변화를 바라보며 매우 놀랐고,
한반도의 상황에 점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고려는 명나라의 봉신국이었다. 어떻게 한반도인이 명의 허락 없이 구질서를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홍무제는 건국 10년이 넘어가는 명나라 역시 ‘구질서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예禮의 위반 문제를 두고 우려와 실망을 표시했다. 결국,
홍무제는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를 사실상 승인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는 동의하지 않으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홍무제는 명나라의 안정뿐 아니라 북쪽과 서쪽 지역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과의 전쟁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대신에 홍무제는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서신을 보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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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경 북쪽의 여진족과 바다 건너의 일본을 견제할 때 명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진족과 일본을 상대하는 조선의 대외 관계‘는 명나라와의 봉신 관계보다 상당히복잡했다. 15세기 내내 조선은 여진족 그리고 명나라의 영향이 닿지 않는 다른 부족들을 다루는 데 명나라와 경쟁을 벌였다. 영락제水樂帝(재위1402~1424)가 접경지대를 모두 명나라에 편입하여 관리하려고 하자, 조선은 이에 경계심을 표했다. 태종은 조정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황제(옮긴이 영락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의 예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를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극 정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라고여긴다. 55) 영락제가 서쪽으로 해양 팽창을 하고, 베트남을 명나라의 한지방으로 복속시키려고 하자 조선은 명나라가 조선에도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선은 북쪽 국경 너머를 향한 개입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지도자들은 명 제국과 조선 사이의 만주를 일종의 완충 지대로 만드는 일이 조선의 안보를 전반적으로 확보할 수있는 길이라 생각한 듯하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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