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나큰 힘의 차이를 고려할 때 청이 왜 조선을 팽창하는 제국에 완전히편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나는 만주족과 그 동맹 세력은 훨씬 더 중요한 명나라와의 전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적을 돕는 일을 포기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상의 강요였다. 홍타이지는 먹어야 할 더 큰 떡이 있었고, 그래서 조선을 내버려둘 정도로 현명했다. 

그러나 조선의 생존은 정해진 선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청은 명나라를 대신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명 제국 대신에 제국이 되기를 원했다. 어떤 학자들은 청나라가 중국이 되고 싶었을 뿐 아니라 중국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명나라가 정한 대부분의 전례에 순응해야 했고, 동시에 이 전례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노력했다. 청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작동했다. 청 제국은 중국인동시에 중국을 넘어선 존재였다. 이들은 만주족 황실을 중심으로 하고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는 제국인 동시에, 명나라와 명나라 이전의 모든 것을상속받은 중화中華 제국이었다. 이는 청나라가 1644년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을 점령한 이후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79)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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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은 13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26세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의 회시(2차 시험)와 전시(황제 앞에서 보는 최종 시험)에 연거푸 1등, 2등으로 합격했으니 흔치 않은 국제적 천재였다.

이색이 개경에서 문하생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원에서 유학과 벼슬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1356년경부터일 것이다. 당시 신진사대부 계열의신세대 인재들은 원에서 선진 성리학을 흡수하고 막 귀국한 젊은 천재이색에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색 학당‘은 당대 최고의 명문 엘리트 사학으로 각광받았으며, 

고려 말 개혁파유신 대부분이 ‘이색 학당‘ 출신이었다 할 정도로 개혁파 선비들을 다수 배출했다.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 이숭인 · 권근 - 이존오(李存吾) ·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 뒷날에 여말선초의 중앙 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이 대부분 이색 문하였으니, ‘이색 학당‘은 개혁파의 정치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이색이 전파한 성리학은 온건개혁파 유신들과 역성혁명과 유신들의공통된 정치 이념이 되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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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이후 그리스의 역사에서 천재나 거물이 등장하지않은 것은 사실이다. 30인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을 부활시킨것도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와 민중이었다. 기원전 403년에 부활한 민주정은 그 후 80년간 안정된길을 걸었다. 지도자들은 과거와 같은 가문이나 문벌 출신이 아 - P231

니라 민회에서의 변론을 통해 정책결정에 참여한 새로운 유형의정치가들이었다. 특히 그 기간에는 정치군인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 장군들은 군사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과거보다 더욱 충실한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경제도 부흥했다. 민주적 제도는 앞선어느 시절보다 더욱 충실하게 정비됐다. 민회 회의장은 더욱 넓어져 아테네 시민의 민회 참여가 더욱 더 확대됐다.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되어 참가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추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던 것은 당시 연극관람이 정치참여의 하나로중요시됐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치에서 법치로 지배원리를 변경한 아테네 민중은 페리클레스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인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재무관을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의 등장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민주정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훗날 민주정을 파탄시키는 원인의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파탄의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없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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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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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유수
- 다윗을 왕이자 신의 죄인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환경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수와 귀환이라는 대사건은 유다지역의 엘리트 식자층 전직 궁정서기나 제사장, 또는 그 후손인 사람들에게 왕조 통치자로부터 직접 지배를 받던 때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정치 붕괴와 그로 말미암은 비상 권한의 공백이라는 역사적 돌발 사태는, 그들에게 새롭고도 예외적인 행동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권력이 아닌 종교를 통해서 큰 보상을 받는 독특한 문학적 창조의 무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왕조 창시자(다윗)를 찬미하면서도 그를 더 높은 신적 존재에게 벌 받는 죄인으로 묘사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오로지 그러한 상황 속에서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표현의 자유가 신학적 대작(인용자 추가, 구약)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오직 그 때문일 것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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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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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과거에 투사하는 소설!
- 중국도 마찬가지.
- 백성이 지칭하는 대상은 도성 내에 거주하는 성씨를 가진 일부 집단에 한정
- 근대사회가 되면서 심지어 노비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

교육시스템이나 공통된 표준 언어가 없고 또 소통수단도 제한되어 있던 문맹의 소농사회, 곧 극소수 비율만이 읽고 쓸 수 있었던 사회에서, 토라 한두 권은 숭배의 대상이었을지는 몰라도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는 이념적 서사로 기능했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최고 권력자가 백성의 이해를 구하려는 것 역시 근대적 현상으로, 고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은 역사적 감각의 부족으로 인해 그런 이미지를 계속 고대사에 갖다 붙이려 한다. 왕은 민족 정치로 대중을 결집시킬 필요가 없었다. 왕들은 행정계급 및 소수 토지귀족들로부터 왕조에 대한 느슨한 이념적 합의를 얻어내는 것만으로 대개 만족했다. 왕들은 백성들의 헌신이 필요치 않았고, 혹시 그런 헌신 의식이 있었다한들 그것을 군주에게 붙잡아 매어둘 수단도 없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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