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가 가져온 상처를 치유한 정체성 정치로서의 민족주의는 고진이 갈파한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요청, 호수 원리의 구현에 다름 아니다.
근대화 초기 단계 곧 농업 의존적인 사회관계가 파괴되고, 잘 결합되어 있던 전통적 공동체의 연결이 붕괴됨과 동시에, 정체성의 안락한틀을 제공하던 종교적 믿음마저 쇠퇴한 시기에 이미 개념적 단절이나타나서 민족주의가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를 마련해주었다. 마을과 성읍에 존재하던 소규모 인간 공동체의 결속력과 정체성도 와해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직업적 이동성과 도시화 때문이기도 하고, 대가족의 해체와 함께 친숙했던 대상과 공간이 사라졌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상의 파열을 다시 꿰맬 수 있는 것은 총체적인 정체성 정치뿐이었다. 오직 민족주의만이, 의사소통의 새 도구들로인해 가능해진 강력한 추상성을 가지고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97
헤이즈가 잘 보았듯이, 18세기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쇠퇴했다고해서 초월적 힘에 대한 인간의 오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종교의 대상이었던 것이 근대화로 인해 다른 것들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자연, 과학, 인본주의, 진보의 개념이 그것들인데, 이 개념들은 모두 이성의 범주에 드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는 인간을 종속시키는 강력한 외적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8세기 말 지적, 종교적 변혁의 절정을 이룬 것은 민족주의의 출현이었다. 민족주의는 그리스도교 문명의 심장부에서 출현한 이념답게 시작부터 어떤 뚜렷한 특징을보여주었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로마군대 편제에 맞춰 신앙을 조직한 것처럼, 근대에는 민족국가가 같은 방식으로 신념을 조직하였다. 민족국가는 스스로 어떤 영속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민족국가는 숭배를 요구하고, 세례의식이나 혼인서약 같은 종교의례 대신엄격한 시민등록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자신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을 배신자와 이단자로 간주한다. - P100
헤이즈의 생각은 민족주의를 일종의 근대 종교로 보는 이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를, 죽음이라30는 최종 사태에 새로운 방식으로 맞서는 신앙의 한 유형이라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근대화라는 대단절 사태 안에서 인간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한 종교로 규정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변화 - P100
하는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이 새로운 세속 종교가 가진 주요 기능의 하나였다. 또 어떤 학자들은 민족주의가, 사회 질서와 계급적 서열을 지탱하기 위해 종교적 숭배라는 영구 비계를 설치하는 기능을 하는근대 종교라고 진단하였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민족주의의 종교적 속성에 대한 이상의 여러 가정들을 받아들인다면, 아직 답을 얻지 못한 다음 두 질문에 마주칠 것이다.
정말로 민족주의는 영혼의 참된 형이상학이라 할 만한 것을 제공하는가?
또한 민족주의는 일신주의 종교들처럼오래 지속될까? - P101
민족주의와 전통 종교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초월적 종교의 큰 특징인 보편 지향적 성격과 개종을 환영하는 경향은 폐쇄적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민족이 초월적 대상보다 언제나 그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점도 국가를 위한 대중 결집을 용이하게 하는 요소다. 전통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일시적으로 벌어질 수는 있어도 영속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전통 종교와 가장 밀접하게 닮은 이데올로기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통의 사회관계 안에서 계급 간 경계를 가로질러 성공적으로 사회 통합을 추진해온 점에서도 그러하다.
민족주의는 그 어떤 세계관이나 규범 체계보다 더 효과적으로 개인 정체성과 집단 정체성 모두를 형성했다. 고도로 추상화된 관념들을 가지고도 두 정체성 사이의 간극을 잇고 결합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계급정체성, 공동체 정체성, 종교 정체성도 더 이상 민족주의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다. 물론 그 정체성들이 아예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롭게 나타난 민족주의라는 정체성과의 공생적인 연계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계속 존속하기가 어려워졌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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