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뒤비의 전사와 농민!
그리고 신의 평화
기사도의 출현
이들이 몸에 겨운 채 전사로서의 직분을 놓는 동안 다른 이들의 삶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엄혹했다. 농업과 교역은 기사 집단의 패도적 행태에 타격을 받아 위축되었다. 심지어 지체 높은 귀족들과 황들도 그칠 출모르는 무질서 상태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큰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강력한 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이 파괴적 광란 상태를 제어할 수 있었겠는가?
현대인들이 보기에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당시 기준에서 단 하나의 희망은 교회에 있었다.
당시 지라르라는 한 지방 주교가 있었다. 지라르는 당대 고위 성직자들처럼 귀족 집안의 자제였다.
물론 당시 교회도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측면에서는 기사단 무리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평화 증진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 권력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 영역을 관장하는 권력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보유한 제일의 무기는 바로 십계명의다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지어다" 를 어긴 죄로 영원히 그치지 않는지옥불을 내리겠다는 위협이었다.
1024년에 이르기까지 지라르는 플랑드르 백작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전사 기사단의 막무가내식 통치가 사회를 파괴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강력한 설득전을 폈다. - P39
두에에서 열린 대공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도처에 만연한 폭력과 혼돈의 책임 소재를 두고 서로를 비난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지라르와 왈테, 플랑드르 백작은 한 가지 합의에 이르렀다. 다름 아니라 ‘신의 평화‘가 수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내릴 것이니 이 시간 동안은 공격과 약탈을 중지해야 하며, 오로지 왕의 남자들만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금지령을 거역한 이들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거나 수도원에 유리된 채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터였다. - P40
캉브레의 지라르가 11세기 플랑드르 지방을 순회하며 설파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문화적 전환이었다. 당시 왕들은 성직자인 선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전사 집단들이 궁벽한 시골을 배회하던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영웅으로부터 ‘정중한 귀족과 ‘남성적 배려가 돋보이는‘ 기사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촉진했다. 결국 이 전사 집단을 황제의 궁정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11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정치한 기사도 문학이 출현했는데, 이 장르는 특히 기사들에게 약자에 대한 가부장적 측은지심, 여성에 대한 낭만적 사랑, 그리고 문학적 세련됨의 의미를 심어주었다. 폭력은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쓰이고, 연출된 마상(馬上) 시합 무대에서나 제한적으로 펼쳐지게 될 터였다. 프랑스 남부의 음유시인 기로 드 보르넬은기사들을 청중으로 모아놓고, 고상한 마상 시합을 약탈이나 강탈과 맞바꾸지 말라는 시구를 읊었다. "연약한 양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 교회와 여행자들을 약탈한 연후에 / 숙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 기사는 수치스러움을 알지니. ן ו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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