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노예제 운동에 직접적으로 불길을 지핀 사건은 1781년노예무역선 종zong 호 사건이었다. 종 호는 과도하게 많은 노예를 싣고 리버풀을 떠나 자메이카로 향하다가 보급 부족과 위생 문제 등 여러 문제점에 봉착했다. 그러자 선장은 133명의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익사시킨다는 사악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게다가 선주는 이 사건으로 입은 손해를 보험 회사가 보전해주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무자비하게도 선장이배를 구하기 위해 ‘화물을 바다에 버린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이것이 반노예무역 운동을 자극한 계기가 되었다. - P160
그러나 미국 남부, 서인도 제도, 브라질 등에 여전히 노예노동력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혼자 노예무역을 포기하는 것은 큰 효과가 없었다. 영국이 차지했던 부분을 스페인이나 브라질 등 다른 나라들이 메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영국이 포기한 수익을 경쟁국들이 차지할 경우 그것은 영국 경제에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힐 것이었고, 이제 노예 노동력 대신 자유노동에 의존해야 하는 서인도 제도 식민지의 경제와 안보에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자유노동력에 의한 생산은 노예 노동에 의한 생산보다 비싸질 것이고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생산되는 설탕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을 게 뻔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노예무역 억제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즉 한편으로는 노예무역에 가담하고 있는 나라들에 압력을 가하면서 외교적 노력을기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무역 단속 함대를 창설하여노예무역 중심지인 서아프리카 연안에 배치했던 것이다. -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