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셴크론(1962)이 지적했듯이, 후진국들은 다행히 선진공업국들로부터 기존의 기술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게르셴크론은 후진국일수록 이들이 진출하고자 하는 시장이 더욱 가혹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시장을 둘러싼 쟁탈전의 냉엄함은 시장을 이용하려는 모든 국가에게빈부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적용되지만, 특히 기술과 자원이 없는 후진국에게는 더욱 혹독하다. 생산성이 낮은 나라일수록 투자촉진을 위해 저금리정책을 펴야 하고, 저축장려를 위해서는 고금리정책을 써야 한다.
수출촉진을 위해 통화를 저평가할 필요가 있는 반면, 외채부담을 경감시키고 부국과 빈국이 모두 수입해야 하는 원자재, 그리고 빈국이 생산하지 못하는 중간재와 자본재의 수입비용을 극소화하기 위해 환율을 높게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진국들은 또 수입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유무역이 필요한 반면,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 정책을펴야 한다. 성장을 계속하고 자본의 유출을 방지하며 장기투자를 권장하기 위해 안정을 갈구하지만, 안정의 전제조건은 성장이다.
이 같이 여러 모순된 조건 속에 놓인 후발공업국 정부의 주된 기능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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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가 주밀하면 아래는 의혹을 품고, 위가 음험하면 아래는 속이며, 위가 치우치고 구부러지면 아래는 끼리끼리 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백성을 하나로 만들 수도 없고, 부릴 수도 없고, 알기 쉽게 만들 수도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지러움의 시발점입니다. 그러니 군주의 도는밝으면 좋고 음험하면 좋지 않으며, 명백히 펼치면 좋고 숨기면 좋지 않습니다(主道利明不利幽, 利宣不利周].순자 「정론正論) - P102

순자 사람들이 포상을 바라 움직인다면 같은 이치로 자신에게 해롭다 생각하면 바로 그만둘 것입니다. 그래서 상·형벌 · 위세 · 속임수 따위는사람의 힘을 다하고 죽음으로 싸우게 하기에 부족합니다. 군주된 자가아래 백성들을 대할 때 예의충신으로써 하지 않고 상·형벌 위세 · 속임수로 궁지로 내몰아 공을 얻고자 한다면, 큰 적이 도달할 때 그들에게위태로운 성을 지키라 하면 반드시 배반할 것이고, 적과 맞서 싸우라하면 반드시 도주할 것이며, 힘들고 괴로우면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아래가 위를 제압할 것입니다. 그러니상·형벌 · 위세 · 속임수 따위는 날품팔이나 장사치의 도인 것이며, 대중을 화합시켜 국가를 아름답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부그러이 여기고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P163

순자 그렇습니다. 똑같이 직분을 나누면 차등이 생기지 않고, 위세가 모두 같으면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여럿의 위세가 같으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分則不偏, 齊則不量, 齊使). 하늘과 땅이있는 것처럼 아래와 위는 차등이 있고, 밝은 왕이 처음 서서 나라를 세울 때 이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양쪽이 모두 똑같이 귀하면 서로 섬길 수가 없고, 양쪽이 똑같이 천하면 서로 부릴 수가 없으니, 이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위세와 지위가 모두 같고 바라고 싫어하는 바가 모두같은데 재화가 넘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싸움이 일어나면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지면 빈궁해집니다. 선왕께서는 그 어지러움을 싫어하셔서 예의를 만들고 직분을 나누어 (制禮義以分之] 빈부귀천의 등급이 있게 해서 서로 어울려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기르는 근본입니다. 『서』에 "그저 가지런하기만 한 것은 가지런한 것이 아니다維齊非齊]"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이른 것입니다.(순자 「왕제) - P198

순자 옛날 선왕들이 인민들을 갈라 차등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름답게 어떤 이는 추하게 하고, 어떤 이는 후하게 어떤 이는 박하게 대하며, 어떤 이는 편하고 안락하게, 어떤 이는 수고하게 했습니다.
이는 쓸데없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인의 문식文節(꾸밈이나 예식)을 밝히고, 인의 질서(상하의 질서)를 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以明人之, 通人之也). 그러므로 (옥이나 집, 혹은 기물 따위를) 조각하고 (의복이나 관복에 색과 무늬를 넣는 것은 귀천을 구분하기 위함(貴賤]일 따름이지 멋있게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갖은 타악기 · 관악기 · 현악기를 만드는 것은 길흉과 합환, 정화를 구분하려는 것이지 그 나머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궁실과 높은대를 만드는 것도 습기와 더위를 피하고 덕을 길러 경중을 구분하게輕重] 하려는 것일 뿐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 P201

순자 그렇습니다. 선왕과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군주가되어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이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부유하지 않다면 민을 관할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악기를 동원해 귀를 채우고, 조각과 문양을 통해 눈을 채우고, 갖가지 맛으로 입을 채운 후, 관직을 정비하고형을 엄하게 해서 백성을 다스립니다. 상과 벌로 현명한 이를 등용해 천시와 지리, 인화를 얻으면 재물은 황하나 바다처럼 넘치고 언덕이나 산처럼 쌓일 텐데 어찌 부족을 걱정하겠습니까?
군주가 할 일을 버려두고 백성들을 부양하고 어루만지는 것에만 힘써서, 겨울에는 죽을 쑤고 여름에는 오이와 보리밥만 먹으면서 잠시의명성을 얻는 것은 도를 훔치는 것입니다(道].(이상 『순자』 「부국富國) - P206

묵자 예전에 우두머리들을 세워 높은 작위를 주고 부귀하게 해준 것은그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즐기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며 萬民興利除),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부귀하게 해주고富貴貧寡], 위태로운 것을 안정시키고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라安危治亂)는 것이었습니다. 옛날 선왕들의 정치는 실로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왕공대인들의 형정은 이와 반대입니다.  - P208

순자 왜 삼년상을 치르는 것입니까? 상처가 크면 낫는데 오랜 시일이 걸리고, 통증이 크면 치유되는 것이 더딥니다. 삼년상이란 사람의 정을 의식으로 정해 지극한 아픔을 드러낸 것입니다. 지팡이를 짚고 죽을 먹으며 여막에 거주하는 것도 다 아픔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5개월로 상기를 끝내는 것은 애통함이 그대로지만 보내는 데도 절도가 있기에 어쩔수 없이 그러는 것입니다.
.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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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꿈꾸었던 세계는 서주 시대처럼 귀천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신분제 사회였다. 이 신분제 사회에서 ‘인‘이라고 불리던 귀족충들은 ‘민民‘이라고 불리던 피지배층을 온정으로 다스리고, 반대로 직접 생산자였던 피지배층은 귀족층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가 보았을 때 피지배층이 귀족층을 존경했던 이유는, 귀족들이 예에 입각해서 평화롭게 공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귀족층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 분열은 군주와 경대부 사이의 갈등으로 첨예화한다. 공자는 군주와 경대부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서주 시대의 예를 복원함으로써 충분히 봉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귀족층들은 다시 한 번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피지배층들의 자발적 존경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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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사상에서 경대부와 민중 그리고 왕권의 향배


만약 경대부들이 자신의 봉토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민중에게 지나치게 세금을 거둔다면, 이제 민중은 성문법에 의지하여 경대부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법적으로 경대부들과 민중은 아무런 차등이 없어질 것이다. 물론 이런 법적 효과가 군주권을 강화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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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C.11세기에 상나라 변방에 살았던 상족 이외의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주족을 중심으로 상나라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동맹군이 구성되는데, 이때 상나라를 공격하는 동맹군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 바로강족이었다. 결국 상나라 사람들의 불길한 예감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이 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강족은 주족과 함께 상나라를 붕괴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에는 주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된다. 그러나 그 후 고대 중국 사회에서 강족의 영향력은 결코 시든 적이 없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정치적·문화적으로 가장 강대했던 제齊나라가 바로 강족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 P40

그래서 그들은 강상을 대표로 하는 강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래살았던 중국 서쪽을 떠나서 중국 동쪽, 즉 황해黃海를 바라보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쪽으로 옮겨가게 했다. 비록 말로는 강상을 제齊나라의 군주로 봉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것은 정치투쟁에서 실각한강족을 자신들 주족의 생활 터전에서 거의 축출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족에 대한 잠재적인 두려움 때문에 주족은 강족이 새롭게정착하게 된 제나라와 자신들의 주나라 사이에 노나라와 위衛나라를 겹겹이 만들고 그 군주의 자리에 자신들의 동족을 부임시켰을 정도였다. - P44

고대 중국에서 ‘인‘과 ‘민‘, 혹은 ‘백성‘과 ‘민‘이 각각 상이한 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라는 것에 주목하면, 우리는 주나라의 통치가 왜 예와 형刑이란 두 가지 수단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수 있다. 예禮가 통치 계급, 즉 동성同姓의 귀족들이나 이성異姓의 귀족들을 포함한 지배층 내부에 통용되는 행위규범이었다면, 형 즉형벌은 직접 생산에 참여하던 민중, 즉 민民에게 적용되던 가혹한 형법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주나라는 ‘예‘라는 행위규범만으로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했던 이상적이고 훌륭한 사회가 결코아니었다. 예기禮記」20) 라는 책을 보면 우리의 이런 의문에 응답해줄흥미로운 구절이 나타난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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