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표현의 자유 논증을 반박하다

마구잡이식 음모론을 퍼뜨리는 것은 파시스트 운동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공론장에서이성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진실은 결국 이념의 시장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가능성을, 심지어 거짓과 기이한 가능성까지도 다 발표하도록 장려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가장 유명한 철학적 변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1859년 저서 『자유론On Liberty』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이상을 옹호한다. 제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 밀은 설령 거짓인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침묵시키는 것은 잘못된일임을 논증하는 일에 착수한다. 거짓인 의견을 침묵 - P112

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오직 "[진리와] 오류의 충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참인 믿음은 열띤 논쟁과 불일치 그리고 토론의 시끄러움 속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로소 지식이 된다.
밀에 따르면 지식은 오직 반대 입장들을 심사숙고한결과로서만 나타나며, 이는 실제 반대자들과의 토론이나 내부 대화를 통해 일어나야 한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참인 믿음마저도 단순한 ‘선입견‘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거짓인 주장이나 음모론에 대한 옹호까지 모든발언을 허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지식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옳든 그르든, 많은 사람들은 밀의 『자유론을 ‘아이디어의 시장‘이라는 주제와 연관 짓고 있는데, 이 시장은 간섭 없이 놔두면 거짓을 몰아내고 지식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시장 개념과 같은 ‘아이디어의 시장‘이라는 개념은 소비자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해에 기반한 것이다. 아이디어 시장이라는 은유의 경우에는, 대화가 근거들의 교환에 의해 작동한다는, 즉 한쪽 당사자가 이유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근거를 들어 반박하고 그렇게 결국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된다는 유토피아적 전제가 깔려 있

‘아이디어의 시장‘을 옹호하는 논증은 말이 "기술적, 논리적 또는 의미론적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정치에서, 그리고 특히 파시스트 정치에서, 언어는 단순히 (또는 심지어 주로) 정보 전달에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된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아이디어의 시장‘ 모델을 이용하는 논증은, 한 사회가 비이성적인 원한과편견의 힘보다 이성의 힘을 더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면, 정치 선동가들은 공포를 심고 편견을 강조하며혐오하는 집단에 대한 복수를 촉구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 분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한 수사법을 이성적인 근거로 논박하려고 하는 것은 팸플릿으로 권총에 맞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 밀이 어떤 점에서 틀린 것일까?
의견 불일치가 있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일련의전제들이 공유되어야 한다. 심지어 결투에도 규칙에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당신과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의료보험 계획이 좋은 정책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다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을 파괴하고자 하는 무슬림 비밀 스파이라고 의심하고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 우리의 논의는 생산적이지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바마의 보건정책의 비용과 혜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책들 속에기만적인 반민주적 의도가 감춰져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선전가들 또는 ‘정치 기술자‘들은 RT‘를 위한 전략을 고안할 때, 진지한 의견들과 엉뚱한 이론들을 섞어서 불협화음을 내게 하면, 생산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배경이 되는 기본 전제들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저명한 복음주의미디어 인사인 토니 퍼킨스가 2014년 10월 29일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 ‘워싱턴 워치‘에서 시사한 대로) 기후변화를 말하는 과학자들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기후정책에 대해 합리적인 논의를 거의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의견을 공론장에 허용하고 진지하게 고려할 시간을 주는 것은, 숙의를 통한 지식 형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낳기는커녕, 바로그 가능성 자체를 파괴한다. 책임의식이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언론이라면 이러한 위협 앞에서 진실을 보도하려고 노력하고, 누군가 주장한다고 해서 허황된 이론까지 모두 다 보도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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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에 출간된 듀보이스W. E. B. Du Bois의 걸작 『흑인의 재건 Black Reconstruction』은 재건기에 대한 당시의 공식 역사를 단호히 반박한다. 듀보이스가 보여주듯, 남부 백인들은 북부 엘리트들과 결탁하여 재건기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이는 새로이 선거권을 얻은 흑인 시민들이 가난한 백인과 연합하여 자본의 이익에 도전하는 강력한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이라는 공포가 부유한계층 사이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다.  - P49

듀보이스는 재건기가 얼마나 정의로운 통치 시기였는지를 보여준다.
흑인 의원들이 사리사욕으로 통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백인 동료 시민들의 두려움을 수용하고 조정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시기였던 것이다. 당시 ‘흑인의 재건』은 백인 역사가들에 의해 대체로 무시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듀보이스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로 널리 인정되었다.

학계의 역사학자들은 다 알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재건기에 대한 거짓 역사를 퍼뜨렸다.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북전쟁에서 생겨난 미국 백인들의 심리적 상처를 달래기 위해 학문을 이용했다.

역사학자들은 주새들 사이의 극명한 도덕적 차이를 덮어버린 안온한 역사관을 제공함으로써, 이전의 노예제에 찬성한 주들이 흑인의 시민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마저도 제거해버린 일을 정당화했다.
「흑인의 재건』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역사라는 프로파간다」이다. 이 장에서 듀보이스는 정치적 목표를 홍보하기 위해 역사적 학문성, 진실, 객관성이라는 이상에 호소하는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역사학의 학문적 규율을 훼손하는 것이라고듀보이스는 선언한다. 

듀보이스에 따르면, 진실과 객관성이라는 소중한 이상을 내걸고서 정치적 이익을 위해 거짓 서사를 주창하는 역사가들은, 역사를 프로파간다로 바꿔버리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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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보상을 받을 것을 기대해서, 혹은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을 기대해서, 이렇게 동기부여되어 나타나는 행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도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 이타적 행위란 행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지, 번식상의 적합도에 미치는 효과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두 의미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이 진화이론에서 사용되는 의미에서는 이타주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지적 장애인들을 돕는 자원봉사자의 행동이 이성의 눈에 너무 매력적으로 보인 나머지 그의 적합도를 상승시킬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자원봉사 행동이 지적 장애인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일 뿐 이렇게 하면 이성의 관심을 끌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면, 적합도의 상승이라는 그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와는 무관하게, 그의 행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 이타주의적이라고 볼수 있다. 

즉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타주의라는 개념은 행위자의 의식적인 동기와 기대에 비추어 이해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꿍꿍.
이속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구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뭔가를 바라지 않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사람들을 찾아 보상해준다. 그 이유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이해를 희생하려는 태도를 사회적으로 진작시키고 싶어서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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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환경 : 일의 여건


나와 일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는 아니다. 생동적 참여가 곧장 이루어질 여건을 갖춘 업무들이 있는가 하면, 생동적 참여가 영 어려운 업무들도 있다. 1990년대 시장의 원리가 작동해 미국의 수많은 전문직(의학, 언론, 과학, 교육, 예술계)이 대거 판도 변화를 겪게 되자, 이들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끝없이 수익을 늘리라는 압박이 더러 일의 질과 삶의 질을 해친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칙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o3umDAGx7EJgXbST8

이는 결국 가치 정렬의 문제였다. 다시 말해 좋은 일을 하는 것과(타인에게 실제로 효용이 되는 것을 만드는 양질의 일을 하는 것) 일을 잘 하는 것(돈을 충분히 벌고 전문가로서 출세하는 것)이 잘 맞물릴 때, 그 분야는 건실해진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FYVya1cWN7T4DBe99

언론인들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애초 그 분야에 발 들일 때만 해도 대부분이 언론인이 높은 이상(진리에 대한 존중,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간절한 열망, 자유 언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든든한 초석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면서 가족 경영 방식의 신문사들이 퇴조하고 대기업형 미디어 제국이 위세를 떨치며 미국의 언론마저 또 하나의 수익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그저 잘 팔리고, 경쟁사들을 제칠 만한 것을 파는 데에만 혈안이 돼 버리지 않았던가? 좋은 언론이 사업 경영에는 더러 해롭기도 하다. 괴담, 과장, 조작된 갈등, 성 추문 등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소화하기 좋게 파편으로 잘려 보도가 되었고, 곧잘 이런 뉴스들에서 더 많은 수익이 나곤 했다. 이런 미디어 제국에서 일하는 수많은 언론인은 자신이 등 떠밀려 뭔가를 팔면서 자신만의 도덕 기준을 어기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고 토로했다. 이들의 세상에서는 가치 정렬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장을 더욱 많이 점유해야 한다는 더 크지만 고상하지는 않은 사명이 있음에도 도저히 거기에 생동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었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pgNvkv5YM3hQh1Wc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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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효능



식물들은 특정한 조건을 갖춰 주면 쑥쑥 자라나는 만큼, 햇빛과 물을 어떻게 조절해 주어야 식물이 자랄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건 생물학자일 터다. 사람들도 특정 조건을 조성해 주면 쑥쑥 성장하는바, 사랑과 일을 어떤 식으로 해 나가면 삶이 행복하고 의미가 있다고 느낄지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자이다. -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 조너선 하이트 지음 / 왕수민 옮김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zjaCP6ybR92wQCy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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