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을 살펴보면 전자의 공공부조보다 후자의 사회보험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것은 사람들이 공공부조의 방식보다 사회보험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공공부조를 받는 경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끼지만 사회보험의 방식에 대해서는 나도 건강하고 일자리가 있을 때 병든 실업자들을 위해 기여했으므로 내가 지금 병들고 늙고 일자리를 잃어서 받는 사회보험급여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보장은 시민의 기본권이며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할 것이지만, 사회보장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섬세한 인간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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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만들어지는 보험은 기본적으로 같은 타입의 사람들의 위험에 대한 대응책이다. 사람의 타입에 따라 위험에 차이가 날 때 이런 다른 타입의 사람들이 섞인 보험은 균형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상품에 둘 이상의 타입이 가입할 경우 어느 한 타입이 손해를 보게 되고 손해를 보는 타입은 자신들만을 위한 보험에 들지 섞은 보험에 들지 않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영보험은 가능한 한 세분화된 타입들로 나뉜다.


문제는 여러 타입을 섞은 보험을 가입하면 이익을 보는 타입들이 대체로 불쌍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이라는데 있다. 이들 타입은 위험이 높다. 그리고 하나의 종류의 위험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험도 높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높은 위험에 상응하는 높은 보험료를 낼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보험을 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둘 것인가. 물론 그냥 두자는 냉혹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대세이다. 이들을 돕는 해결책은 두가지다. 하나는 정부가 이렇게 보험을 들 수 없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보험을 들 수 있는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야 한다. 형편이 나은 이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여러 타입을 섞은 보험을 만들어서 강제로 모두 가입시키고 형편이 좋은 타입의 사람에게 보험료가 좀더 비싸지더라도 참고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형편이 나은 타입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것이다. 전자를 공공부조라고 부르고 후자를 사회보험이라고 부른다.

 

앞서 말한대로 사회보험은 다른 타입의 사람들을 강제로 하나의 보험에 가입시켰기 때문에 돈 내는 사람 따로 있고 돈 받는 사람 따로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실업보험(우리나라에서는 고용보험)의 경우 실업할 확률이 높은 타입의 사람들은 덜 내고 더 받고, 실업할 확률이 낮은 타입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질병보험(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의 경우 질병에 잘 걸리는 타입의 사람들은 덜 내고 더 받고, 건강한 타입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산재보험의 경우 재해율이 높은 사업장의 사람들이 덜 내고 더 받고, 재해율이 낮은 사업장의 사람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노령연금(우리나라에서는 국민연금)의 경우 노후를 준비하기에 경제적 여력이 없는 이들이 덜 내고 더 받으며, 노후를 대비하기에 충분한 재력을 갖춘 이들은 더 내고 덜 받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실업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것 아닌가. 의료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 아닌가. 산재급여를 받지 않는 대신 다치지 않는 것 아닌가. 노령연금을 받지 않는 대신 넉넉한 재산이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재산을 넉넉히 갖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좀 더 내고 덜 받는다고 그렇게 열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좀 불공평하지만 양보할만 하지 않은가.

 

* 이 글은 김태성, 김진수(2001), 사회보장론, 청목출판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한 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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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얻게된 소중한 정보 중의 하나는 전통중국에서 교육이 갖는 의미였다. 다들 알다시피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를 선발했고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많이 이들이 평생을 매달렸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과거제도와 이를 위한 교육제도가 나름대로 계층이동을 위한 효과적인 통로로서 기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옛 교육제도 아래에서 교육은 비교적 싼 편이었다. 사숙은 일반적으로 촌락에 있었기 때문에 학생은 자신의 집에 거주하며 다닐 수 있었다. 유교경전이나 묵필, 종이 등의 가격은 대부분의 농촌 소년에게도 지불 가능한 액수였다. 게다가 친척이나 종족, 혹은 촌락이 총명하지만 가난한 소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젊은이의 교육을 주로 방해한 것은 금전보다도 오히려 시간이었다. 가난한 농민은 농사일을 도울 자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p. 269)."

이스트만의 주요 논점 중의 하나는 중국이 근대화를 경험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 사이에는 근대교육이 과거제도에 비해 훨씬 비싸고 서민이 접근하기 어려운 이동경로였다는 점이다. 근대교육은 우선 도시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농촌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의 경우 도시에 유학할 수 있는 비용이 필요했다. 또한 근대적 학교의 수업료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다. 그리고 교재 역시 선배나 선조로부터 물려받을 수 없고 새로 장만해야 하므로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20세기 초엽 중국의 새로운 엘리트는 유학파였다. 상해의 어느 회사의 월급표에 따르면 최고의 연봉을 받는 이는 서구 유학파이다. 중국의 대학 출신은 월급이 80원에 3X1.5 책상을 받았지만 일본의 제국대학의 월급은 150원, 유럽과 미국의 대학은 200원이었다. 하버드나 옥스포드 출신은 250원을 받았고 맞춤책상, 서가, 등나무의자에 크리스탈 잉크스탠드를 받았다.

청조 말엽에 정부는 국비를 들여 학생들을 유학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의 유학생들은 가난한 천재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엘리트 집안의 자제들은 유학을 엘리트코스로 여기지 않았기에 유학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을 통한 성공 가능성이 확연해지자 엘리트 가문이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자제들을 유학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변화의 시점에 부패한 청조가 신해혁명과 함께 무너지자 국비유학생이 급속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난한 천재들이 유학을 통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격감하였다.

중국 유학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이 근대혁명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인데, 이런 현상은 러시아의 혁명운동이나 독일 나치 운동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유학파가 부유한 집안 출신이지만 국민당계열과 공산당계열은 약간 차이가 난다. 전형적인 공산당 지도자는 지주나 부농의 자제로 농촌 출신이며 소련이나 프랑스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 이에 비해 전형적인 국민당 지도자는 상인이나 도시 전문직 종사자의 자제이며 해안지역 출신이 많았다.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이스트만의 이런 설명은 중국 근대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의 근대사에도 비슷한 굴곡이 있을텐데 관련된 연구를 요약한 글을 읽어보고 싶다. 근대조선, 일제강점기에서 근대교육이 전통교육과 비교할 때 민중에게 얼마만큼의 기회로 여겨졌는지가 궁금하며, 근대화운동 및 민족해방운동에서 유학파는 어떤 배경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역할들로 분화되었는지를 읽을 수 책을 만나기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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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경제성장


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악인가? 박정희는 독재자였지만 그의 재임기간 중에 한국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이를 근거로 경제성장을 위해 독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싱가폴의 리콴유 전 수상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전 수상, 대만의 장경국 전 총통 등을 추가적인 예로 든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쉽게 논박가능하다. 아래의 표는 경제성장의 성공 여부와 정치적 민주주의와 독재의 기준으로 네 개의 유형을 구분한 것이다. 독재가 경제성장의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D의 유형의 나라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독재이면서 경제성장에 실패한 나라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실종”이라는 영화로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은 경제성장에 실패한 사례로 유명하다. 군사독재정권이 장악한 1976년부터 1983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미국에 대비한 상대소득은 50.5에서 42.9로 급락하였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무자비한 독재자 이디 아민은 1971년 정권을 잡은 뒤 1978년 축출당하였는데 그 사이 우간다의 상대소득은 3.66에서 2.63으로 급속히 하락하였다.


 

 

경제성장

 

 

성공

실패

정치

민주주의

A

B

독재

C

D


민주주의 연구의 대가인 정치학자 쉐보르스키(Przeworski)는 1950년부터 1990년의 41년 간의 기간 동안 135국가의 224정권을 분석하여 독재와 경제성장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그는 “몇마리의 호랑이가 독재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재가 호랑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싱가폴의 리콴유 수상은 “아시아적 가치”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아시아에서는 독재가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서 “독재->경제성장”은 성립하지 않지만 “독재+아시아->경제성장”은 성립한다는 것이다.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대만, 중국 등의 나라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지만 경제성장에는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아래의 <표 2>에서 Ca의 사례는 풍부하고 Da의 사례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성장

 

 

성공

실패

정치

민주주의

A

B

독재

비아시아

Cna

Dna

아시아

Ca

Da


리칸유의 주장은 독재를 합리화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많은 사례들 때문에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많은 정치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은 아시아가 비아시아와 다른 이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유명한 정치학자 올슨(Mancur Olson)은 독재자와 마적단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에 주목했다. 올슨은 문명의 시작은 마적단의 세계에서 독재자의 세계로 변화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고 말했다. 사실 독재자와 마적단은 민간인들의 재산과 소득을 훔쳐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렇지만 마적단은 마을을 파괴하고 다른 마을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파괴하는 마을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에 비해 독재자는 그가 착취하는 영역에 대한 포괄적 이해관계를 갖는다. 만약 착취하는 영역이 번성한다면 점점더 많은 것을 착취할 수 있다. 경제성장에 관심을 갖고 이를 촉진하는 것이 독재자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마적단도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 이런 행동을 보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재자는 정착한 마적단이다.


정치학자 에반스(Evans)는 후진국의 국가를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와 약탈국가(predatory state)로 구분하여 발전국가는 경제성장에 기여했지만 약탈국가는 경제성장을 저해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구분은 올슨의 정착한 마적단과 떠돌아다니는 마적단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어떤 정권은 발전국가적 행동을 하고 어떤 정권은 약탈국가적 행동을 할까? 그 차이는 정권을 잡은 이가 자신의 권력의 안정성에 대한 확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 자신이 쿠데타나 민중봉기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독재자는 장기적인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착취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에 비해 권력 기반이 탄탄하다고 믿는 독재자는 지금 당장 착취를 극대화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착취량의 증가를 추구하고 이 과정에서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를 하게 된다.


발전국가와 약탈국가의 차이는 권력의 미래에 대한 확신의 문제이며 이런 점에서 둘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발전국가적 독재자가 미래의 권력에 확신이 사라지면 약탈국가적 독재자가 될 것이다. 향후 권력의 안정성은 민중과 정치적 경쟁자에게 약속한 경제성장의 성공 여부에 영향을 받는다. 장기적인 착취를 위해 장기적 안목에서 투자했지만 본의 아니게 단기적으로 나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에 민중들은 동요하고 다른 권력 엘리트들은 민중의 동요를 기반으로 권력을 흔들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독재자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단기적 착취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게 된다. 이것은 쿠데타와 민중봉기를 촉발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졌던 독재자의 예상은 현실화된다.


독재자가 갖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단기적인 경제성장의 결과에 영향받고 장기적인 경제성장이 독재자의 확신에 의해 영향받는 구조 하에서 독재는 매우 불안정한 경제성장의 결과를 낳게 된다. 많은 독재자들은 처음에는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가끔 단기적인 성공으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한껏 부풀어오르지만 단기적인 실패로 인해 약탈적 행태를 띠게 되고 새로운 독재자에 의해 교체된다. 경제성장에 성공한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계속 유지한 독재자이며 이러한 지속적 확신은 집권 기간 내에 발생한 단기적인 실패가 별로 없었거나 단기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민중봉기나 쿠데타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행운이 겹친 경우에 한정된다. 경제성장에 성공한 아시아의 독재자들이 예외없이 긴 집권기간을 유지한 것은 이러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박정희는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을, 리콴유는 1990년까지 32년간 총리를 하고 이어서 아들이 총리를 하는 동안 올해까지 13년의 선임장관을, 마하티르는 1981년에 수상에 취임한 후 올해까지 22년간 수상에 재임하였다.


올슨은 민주주의를 다수(majority)에 의한 소수(minority)에 대한 착취체제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독재는 한 사람에 의한 전체에 대한 착취체제이다. 다수는 독재자에 비해 훨씬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며 따라서 훨씬 큰 포괄적 이해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독재에 비해 경제성장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 올슨의 생각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통치자가 약속한 정책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약속을 어긴 정치인이 다음 선거를 통해 낙선되는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이러한 약속 파기의 비용을 통치자가 부담하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정책의 안정성이 보장되고 착취도는 줄어들며 민간의 경제활동은 극대화될 수 있다.

통치자는 민주주의 하에서건 독재 하에서건 늘 착취를 극대화하길 원한다고 가정하자. 민간은 과도한 착취를 예상할 경우 생산을 줄이고, 낮은 착취를 예상할 경우 생산을 늘린다고 하자. 통치자 입장에서는 우선 낮은 착취를 약속한 뒤 민간이 생산을 늘리면 이 약속을 뒤집고 높은 착취를 실행하는 것이 가장 이익이다. 그런데 독재체제에서는 통치자의 약속파기의 비용은 거의 없다. 민간 입장에서는 독재자의 약속이 실제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약속을 믿지 않고 낮은 생산량을 결정한다. 결국 독재자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약속파기로 인해 통치자가 큰 비용을 치루게 된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통치자의 약속은 이행될 가능성이 높고 이에 따라 민간은 안심하고 높은 생산을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경제의 잠재력을 해치는 의사결정권자에 의한 과도한 착취를 줄인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제성장론 분야의 유명한 학자 배로(Barro)는 민주주의가 소득재분배 정책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는 점에 주목하였다. 소득재분배는 고소득자의 노력과 재능 발휘의 인센티브를 꺾고 저소득자의 자활의지와 노동의욕을 약화시키는 나쁜 영향을 준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올슨 역시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익집단의 로비가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비록 1인1표의 원리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실제 정책의 결정과정에는 얼마나 많은 돈(자원)을 쓰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비효율적인 선풍기산업을 계속 보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낀 정부가 시장개방을 추진한다고 하자. 이로 인해 현재의 선풍기산업을 운영하는 사업주들은 큰 피해를 입는다. 이 때문에 이들은 큰 돈을 퍼부을 용의가 있으며 이에 강력한 로비를 전개한다. 하지만 선풍기산업의 개방으로 이익을 얻는 소비자들은 그 수가 많지만 한사람 한사람의 이익은 시장개방의 로비를 위해 자기 돈을 내놓고 거리시위를 할 정도가 되지는 않을 수 있다. 소비자 개개인은 자기가 나서기는 부담스러우며 남들이 나서서 시장개방을 추진해주면 좋다는 의미에서 무임승차의 경향을 보인다. 고양이 목에 방울걸기의 상황과 유사하다.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는 선풍기산업을 개방하는 것이 낫지만 개방운동에는 어떠한 자원도 투입되지 않고 개방반대운동에는 소수의 사람들의 많은 돈이 투입되어 시장개방은 좌절된다. 소수의 이익과 적극적인 노력이 다수의 이익과 소극적인 행동을 압도하는 것을 특수 이익 효과(special interset effect)라고 부른다.


소수 집단의 정치적 로비에 의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정책이 채택될 수 있다는 올슨의 주장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으로 큰 이익을 보는 소수 집단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반론에 직면했다. 정책의 향배를 둘러싸고 자유로운 정치적 경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경쟁 과정에서 비생산적으로 자원이 낭비될 수 있고 이것은 다시 민주주의의 약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독재는 짧은 시간 안에 큰 비용 없이 결정을 짓지만, 민주주의는 긴 시간 속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서 결정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비용은 민주주의가 부담해야할 비용이며 이러한 비용은 결정된 정책의 장기적 효과와 독립적으로 경제성장에 부담이 된다.


독재가 경제성장에 필요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박약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는 주장 역시 그러하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은 단선적인 인과관계를 갖지 않으며 이것은 민주주의를 독자적인 가치로서 옹호하는 이들에게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확대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논리적, 실증적 근거가 없으며 민주주의의 확대가 경제와 독립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점은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를 촉진한다는 가설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연구에 따르면 경제성장이 높은 수준에 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많이 관찰되며 고소득국가에서는 어떤 이유로건 확립된 민주주의가 독재로 회귀하는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소득국가에서 확립된 민주주의가 경제성장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좀더 확대된다면 경제성장은 촉진될 것인가, 아니면 저해될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독재로 회귀할 가능성은 충분히 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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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소득분배는 경제성장을 저해하는가


2003. 11. 10

Version 0.9 


쿠즈네츠는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실증적 관계를 분석하여 소득수준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소득수준이 증가할수록 소득분배가 악화되며 소득수준이 일정수준 이상이 될 경우에는 소득수준이 증가할수록 소득분배가 개선된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을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Inverted U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쿠즈네츠의 가설을 실증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Dollar and Kraay(2002)의 논문에서 사용된 소득불평등 자료를 Penn World Table(이하 PWT)의 자료를 결합하여 분석할 것이다.1)  쿠즈네츠의 가설은 한 나라가 경제성장이 진행됨에 따라 소득불평등의 정도가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쿠즈네츠의 가설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긴 기간 동안의 한 나라의 연도별 소득자료와 불평등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를 갖춘 나라들은 많지 않다.

한국은 1960년 저소득국에서 빠른 성장을 통해 2000년 중위소득국으로 발돋움하였으므로 쿠즈네츠의 가설의 성립 여부를 살펴보는데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림 1>의 KOR은 한국의 연도별 소득불평등도2)를 보여준다. 1980년 전후를 전환점으로 하여 그 이전에는 소득불평등이 심화되다가 그 이후에는 소득불평등이 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쿠즈네츠의 가설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림 1>

하지만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용의 하나로 불리는 대만(TWN)의 경우 불평등도는 1964년부터 1997년 사이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림 1>에서 보듯이 변화량은 작지만 1980년 이전에는 불평등이 감소하고 이후에는 불평등도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대만의 경험은 쿠즈네츠의 가설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경우는 산업화가 이미 19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으므로 장기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Williamson and Lindert(1980)의 연구에 따르면 1820년부터 1860년에 이르는 기간 사이에 미국의 불평등은 빠르게 증가하였으며 1860년대부터 증가속도가 떨어지고 192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평등화가 진행되었다. Dollar and Kraay(2002)의 자료로 전후 미국의 소득불평등을 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는 불평등도가 안정적이지만 그 이후 그 이후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지니계수는 1980년대 이후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고 소득수준이 20% 이하인 사람들의 소득점유율인 Q1을 보면 80년대 이후 뚜렷이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의 심화 현상은 1980년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소득불평등의 심화가 선진국에서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유럽 대륙의 선진국과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의 심화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림 2>

최근 빠르게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1980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빠른 속도로 소득수준이 상승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소득불평등은 경제성장과 함께 빠르게 심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과 일치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비교적 빠른 성장을 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아세안 국가들은 소득불평등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림 3>

 

19세기에 이미 자본주의가 시작된 나라들의 경우 경제성장과정에서 초기에 불평등의 심화현상이 나타나다가 이후 불평등이 완화되는 경우가 있었다. 2차대전 후 한국의 경우 고도성장을 한 6-70년대에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8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한 중국에서도 불평등의 심화가 수반되었다. 하지만 대만이나 아세안 국가들에서는 뚜렷한 불평등 심화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쿠즈네츠의 가설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개별국가의 추적조사를 통해서 확증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개별국가의 추적조사가 어렵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은 동일한 시점에서 여러 나라의 소득자료와 불평등도 자료를 모아서 비교하는 것이다.  고소득국이 저소득국의 미래의 모습이라는 가정 하에서 쿠즈네츠의 가설이 맞다면 동일한 시점에서의 여러 나라의 소득과 불평등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면 역U자 모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일시점의 여러 나라의 자료를 분석하는 것을 횡단면분석이라고 부르는데 횡단면분석의 결과는 쿠즈네츠의 가설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Dollar and Kraary(2002)의 자료에 있는 나라는 PWT의 나라보다 작다. 이는 소득분배의 자료는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많은 나라를 포함시켜도 대상국가는 38개국밖에 되지 않았다. 1960년의 미국에 대비한 상대소득과 지니계수의 관계는 <그림 4>와 같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최저소득국의 경우 상대소득이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증가한다. 이에 비해 상대소득 20% 이상의 구간에서는 상대소득이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감소한다. 놀라울 정도로 쿠즈네츠의 가설과 일치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그림 4>

이러한 현상은 2000년에도 나타난다. <그림 5>는 동일한 38개국의 소득수준과 소득불평등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20% 이하에서는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증가하지만 20% 이상의 영역에서는 소득불평등이 대폭 떨어진다. 상대소득 20% 이상의 영역에서 1960년에는 평균 40 정도의 지니계수를 보이던 것이 2000년에는 평균 35 정도로 하락했음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변화는 2000년의 경우에는 상대소득 60% 이상의 나라들에서 상대소득이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60년의 경우 상대소득이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감소하는 것과 상반되는 결과이다.

<그림 5>

38개국은 40년 사이에 상대소득의 변화와 소득불평등의 변화를 동시에 겪어왔다. 상대소득 변화와 소득불평등 변화 사이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이행확률표 상에서 소득불평등 변화를 검토해보았다. <표 1>은 그것을 보여준다. <표 1>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그림 6>이다.


<표 1> 상대소득 변화와 지니계수의 변동값

 

 

2000년 상대소득수준

 

 

최저소득국

7.5% 이하

저소득국

7.5-20%

중위소득국

20-50%

고소득국

50-75%

최고소득국

75% 이상

1960년 상대소득수준

최저소득국

7.5% 이하

0.387

0.794

0

0

0

저소득국

7.5-20%

-4.573

-3.666

3.499

0

0

중위소득국

20-50%

0

-7.0164

0.745

-3.336

0

고소득국

50-75%

0

0

0

-16.133

-5.044

최고소득국

75% 이상

0

0

0

1.085

3.471


예를 들어 1960년 7.5-20%와 2000년 20-50%에 해당하는 3.499가 의미하는 바는 1960년에 7.5-20% 구간에 있다가 경제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어 2000년 20-50%에 이른 나라들은 지니계수가 평균적으로 3.499만큼 증가했다는 것을 말한다. 1960년 50-75%와 2000년 75% 이상에 해당하는 -5.044가 의미하는 바는 1960년에 50-75% 구간에 있다가 경제성장이 빠르게 진행되어 2000년 75% 이상에 이른 나라들은 지니계수가 평균적으로 -5.044만큼 감소했다는 것을 말한다. 최저소득국인 7.5% 이하의 나라들은 지니계수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1960년에 저소득국인 7.5-20% 구간의 나라들은 상대소득수준이 현수준을 유지하거나 현수준보다 떨어질 경우에는 소득분배가 개선되었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갈 때는 소득분배가 악화되었다. 1960년에 중위소득국 20-50% 구간의 나라들은 경제쇠퇴를 겪을 경우 소득분배가 개선되고 경제성장을 겪을 때도 소득분배가 개선되지만 현수준을 유지할 경우 소득분배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에 고소득국인 50-75%였던 나라들은 현수준을 유지할 때 큰 폭의 소득불평등 완화가 있었고 현수준보다 나아질 때도 소득분배가 개선되었다. 1960년 상대소득 75% 이상의 최고소득국은 소득불평등의 악화가 있었다.

<그림 6>

이상의 결과를 거칠게 정리하면 20-50%의 소득구간이 일종의 전환점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이보다 더 낮은 소득수준에서는 경제성장이 진행되면 소득불평등이 악화되고 이보다 더 높은 소득수준에서는 경제성장이 소득불평등의 개선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이 지난 40년 사이 대체로 관철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역U자 가설과 배치되는 것은 최고소득수준의 나라에서 소득불평등이 악화된다는 현상이다.

또하나 흥미로운 점은 초기의 소득불평등 정도가 경제성장의 성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된 나라들은 일본,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개발 초기에 소득불평등이 낮은 나라였고 경제성장이 실패한 나라들은 볼리비아, 엘살바도르, 베네주엘라 등으로 개발 초기에 소득불평등이 높은 나라들이었다는 것이다.


<표 2> 초기 소득불평등과 경제성장의 성공과 실패

 

 

40% 이상 성장률 감소

-40-40% 성장률

40% 이상 성장률 증가

1960년 상대소득수준별 1960년대 지니계수

1960년대 상대소득수준

7.5% 이하

46.5

32.6

33.0

36.2

7.5-20%

48.9

48.3

36.4

47.0

20-50%

51.5

47.5

35.6

47.9

50-75%

 

41.3

 

41.3

75% 이상

 

32.7

 

32.7

성장률별 1960년대 지니계수

 

49.6

41.5

35.3

43.2


1960년과 2000년 사이에 미국과의 상대소득이 40% 이상 증가한 나라와 40% 이상 감소한 나라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이들 나라의 경제성장 초기시점 1960년의 소득불평등 정도를 측정하여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는 <표 2>에 요약되어 있다. 경제성장에 성공한 나라들은 대체로 소득불평등이 낮은 나라들로서 지니계수가 35.3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크게 실패하여 쇠퇴한 나라들은 초기 소득불평등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평균 49.6에 이른다. 상대소득 변화율이 -40%에서 40% 사이에 있는 나라들은 성공국에 비해서는 초기 불평등이 높고 실패국에 비해서는 초기 불평등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Dollar and Kraay(2002), Growth Is Good for the Poor, Journal of Economic Growth

2) 소득불평등도는 지니계수를 측정하였다. 지니계수는 0에서 1 사이의 값을 가지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 이 글에서는 100을 곱하여 0에서 100사이의 값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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