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후반 소련 해체가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은 더 이상 북한에게 핵우산을 제공하지 못하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감시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에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물려받은 소련 핵무기의 통제가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소련 핵무기를 물려받은 여러 나라의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배치했던 미국 핵무기를 철수할 필요가 있었고,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는 그 일환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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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하반기 중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선언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해빙 현상의 배경에는 미국이 소련 핵무기의 통제를 위해 호전적 태도를 삼가야 했던 조건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소련 해체에 따른 제반 문제가 정리되고 나자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위세를 뽐내는 데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1992년 10월 이후 미국이 팀스피릿 재개 방침을 비롯해 북한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1년 사이의 상황 변화가 작용한 것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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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92년 5월 초 IAEA에 최초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정직하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미국이 제기함으로써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5개월 후 팀스피릿 재개 방침이 나오면서 사태가 마구 악화되기 시작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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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이 예산도 제공하고 정보도 제공하면서 사찰을 엄격하게 하도록 몰아붙인 것이다. 걸프전 이전의 관행과 전혀 다른 엄격한 사찰 기준에 첫 번째로 걸려든 것이 바로 북한이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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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NPT 탈퇴 당시에 북한의 핵기술이 핵무기 제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혀져왔다. 북한의 국제질서 진입 노력을 그 시점에서 미국이 도와줬다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미국은 도와주지 않았고, 그 결과 북한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어내며 핵무기를 만들어냈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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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반핵 구호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공통 배경

북한은 1950년 이래 미국의 핵 공격 위협을 계속해서 받아왔다. 1980년대까지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평가가 미국과 남한에서 지배적이었고, 남한의 열세를 메우기 위해 미국 핵무기의 존재가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남한에는 1957년 이래 다량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던 반면 북한에는 소련 핵무기가 배치된 적이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핵무기의 불균형 상태가 수십 년간 계속되었지만, 소련 붕괴 때까지는 미·소 간의 핵균형 덕분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지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소련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한 중국 핵 능력으론 미국과의 핵균형이 불가능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재래식 군사력에 있어서 남한의 열세 주장도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핵무기의 남한 배치는 누가 봐도 평화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1991년 하반기에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에 이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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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후에 다가올 ‘고난의 행군’ 상황이 1991년 시점에서도 빤히 내다보이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이 오랫동안 시행해온 시혜적 교역방법을 경화 결제로 바꾸면서 북한 경제는 발전은커녕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 <냉전 이후>, 김기협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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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체로서의 화약

화약은 초기 대포의 추진체로 그 쓸모를 드러냈다. 한쪽은 막고 반대쪽은 열어 둔 관에 화약을 장전한 후 압축하면 화약이 연소하며 가스가 발생하고 급격히 팽창하여 발사체를 엄청난 힘으로 빠르게 밀어냈다. 이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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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처음 주로 사용된 화기는 정말로 큰 총, 즉 화약 대포였다. 보통 작은 것이 큰 것보다 먼저 생겨나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과는 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형 무기, 즉 휴대용 총기는 나중에서야 유럽인들의 무기고에 추가되었고, 서양의 첫 기능성 화기는 대포였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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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포탄에서 주철 포탄으로

주철 포탄이 실용화된 이유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적이고 참신한 개념인 표준화 때문이었다. 역사는 뛰어난 형제, 장 뷔로와 가스파르 뷔로에게 가장 큰 공을 돌린다. 뷔로 형제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전문 포병에 가까웠다. 18세기까지 유럽의 포병은 자신을 군인이라기보다는 고도의 기술을 다루는 기술 조합이자 엘리트 계층으로 여겼다. 뷔로 형제는 전문 포병이자 대포 제조업자로서 대포를 속속들이 잘 알았고, 백년 전쟁의 마지막 이십 년 동안 지휘관으로서 프랑스의 포병대를 이끌기도 했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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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년 필리프 2세가 오드루이크에서 거둔 승리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의 예고편으로 불안한 진실을 드러냈다. 화약 대포는 그전에도 포위 작전에서 사용되곤 했지만, 오드루이크에서 처음으로 성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어 압도적이고 분명한 승리를 이끌었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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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공성포의 사용 여부에 따라 지상전의 승자와 패자가 갈라졌다. 프랑스군은 백년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대포를 사용하여 영국군을 프랑스 땅에서 몰아내고 패배를 승리로 바꿨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인들은 대포를 사용하여 무어인의 마지막 요새를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종국에는 유럽의 첫 강대국인 스페인을 세웠다. 또한 화약 대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오스만왕조는 1453년에 거대한 포탄을 이용하여 고대 콘스탄티노플의 벽을 무너뜨리고 로마제국의 마지막 흔적을 지웠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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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는 성의 종말을 의미했다. 성은 중세 유럽 전사 계급들의 독립성과 힘을 상징할뿐더러 유럽에서 새롭게 생겨난 왕조 군주국들이 중앙 정부를 수립하려는 야심을 뻗칠 때 그에 저항하는 수단이 되었던 건물이었다. 따라서 대포가 성벽을 무너뜨리자 옛 귀족 전사 계급이 가진 자치권도 함께 무너졌다. - <화력 (FIRE POWER)>, 폴 록하트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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