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과 헬렌 컬러의 인연






1842년 찰스 디킨스가 로라 브리지먼에 관해 글을 썼을 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 소설가가 관심을 보인 덕에 로라는 누구나다 알 만한 존재가 되었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헬렌 켈러가 초기에 명성을 얻은 것도 상당 부분 당대 가장 유명한 작가 덕분이었다. - P114

트웨인은 스탠더드오일 경영진 헨리 로저스의 아내 에밀리 로저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경이로운 아이가 가난 때문에 학원을 중단해서 미국에 좋을 일이 없습니단 헬렌이 그들과 계속 공부한다면 수세기에 걸쳐 역사에 남을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특별한 길을 걸어가는 이 아이는 모든 세대에 걸쳐 최고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구상을 해 보았습니다. 남편분을 붙잡고 남편을 비롯해 존 록펠러 윌리엄 록펠러 씨 등 스탠더드오일 경영진이 헬렌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애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걸국 로저스는 헬렌이 래드클리프에 다니는 비용을 충당할 거액의 기금을 마련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상당수의 사회 저명인사가 자선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 유명한 소녀의 이름 옆에 자기의 이름과 자산을 갖다 대려 안달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트웨인의 행동은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것이 틀림없다. - P117

트웨인과 헬렌의 유명한 우정을 기록한 연대기 작가들은 주로 두 사람의 다정한 농담, 유머, 서로 존경하는 마음을 보여 주는 이런 일화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누락되는 것은 두 사람이 좀 더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주 의견을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헬렌은 이렇게 썼다. "나처럼 장애를 지닌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클레멘스 씨 같은 친구가있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우리는 세상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주고받았다. 그는 한 번도 내 의견이 쓸모없다고 느끼게 하지 않았다.....클레멘스 씨(마크 트웨인)는 우리가 눈과 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사고능력이 오감으로 측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P122

인종적 편협함을 점점 더 혐오하게 된 트웨인은 나중에 헬렌에게 대단히 중요해지는 여성참정권과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등 여러 사회운동에 관한 정치적 견해를 쌓아 나간다. 비록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이렇게 선언하며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혁명을 일으킬 만큼 참을 수 없는 억압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언제나 혁명주의자의 편이다."

헬렌은 트웨인과 알고 지낼 때까지는 커져 가는 자신의 정치신념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평생 클레멘스 씨는 정치에서, 전쟁에서, 그리고 필리핀과 콩고, 파나마 선주민에 대한 잔학 행위에서,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불의를 볼 때마다 맞서 싸웠다."  시사에 관한 토론에 대해서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공적인 사안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가 아주 마음에 들었고 서로 같은 생각일 때가 많았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과 달리 트웨인은 진지한 사안에 관한 헬렌의 의견을 청해 들으며 서로 깊이 존경하는 마음을 키워 나갔다. - P124

잘 알려진 대로 1910년 트웨인이 사망하자 부커 T. 워싱턴 (Booker T. Washington)은 "마크 트웨인의 후계자는 아무도 없다"라며 누구도 그의 유산을 이어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트웨인을 연구한 학자 브렌트 콜리 (Brent Colley)는 그의 진정한 후계자가 적어도 한 명은 있었을 것으로 믿는다. 보수적인 남부 출신이라는 배경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명성을 활용해 미국을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은 급진적인 운동가로 자라날 여성 말이다. 스톰필드에 다녀온지 얼마 후 헬렌은 사회당에 입당한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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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컬러와 그레이험 벨 그리고 설리반

켈러 대위는 딸에게 개인교습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벨을 찾아갔겠지만 벨은 한눈에 헬렌의 잠재력을 알아본 듯하다. 아서 켈러에게 교습이 아니라 퍼킨스 시각장애인학교의 마이클 아나그노스에게 편지를 보내 딸을 전담할 교사를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아서는 로라 브리지먼에 관한 글을 읽어 이미 퍼킨스학교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던 케이트의 동의를 얻어 아나그노스에게 첫 번째 편지를 보냈다. 




벨은 헬렌이 태어나기 4년 전인 1876년에 전화기를 발명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벨이 머지않아 사방에 퍼진 이 기술을 발명한 동기가 보편적인 통신수단 개발이 아니라 청각장애인의 삶을 향상하겠다는 평생의 사명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 과학자는 아내와 어머니가 모두 청각장애인이라 수십 년 동안 보청기를 개발하는 실험에 매달렸다. 부족한 연구 자금을 충당하려고 자신의 아버지가 개발한 원리에 따라 교육하는,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이를 위한 교습소를 운영했다.  - P61

대부분은 헬렌의 사연을 기적으로 여기고 넘어가려 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헬렌을 가르친 방식에 더 관심을 보였다.

청각장애 교육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청각장애인 공동체에 상당한 발언력을 갖고 있었다. 1892년 《침묵의 교육자 (The Silent Educator)》에 애니의 교수법이 소개되자 벨은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이의 교육에 "상당한 중요성을 띤다고 믿는 한 가지 요소를 강조하는 답변서를 썼다.

"애니는 헬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어린이와 다름없이 대하기로원칙을 정하고, 처음에는 아이가 못 알아듣는 말이 훨씬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헬렌이 들을 수 있었다면 직접 말했을 단어와 문장을 그대로 손에 써 주면서 대화했다. 말을 고르거나 가리지 않고 일상적인 관용구가 포함된 문장 전체를 자주 반복 사용함으로써 아이의 기억에 언어를 각인시켜 점차 모방하도록 이끌고자했다. 설리번 선생이 헬렌을 가르치면서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위대한 원칙은 일단 꺼내 놓고 보면 당연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듣고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어린이의 언어습득과 관련해 우리가 익히 아는 원칙과도 다르지 않다. 바로 언어는 모방으로 습득한다는 원칙이다.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이가 이해하기에 앞서 언이를 먼저 제시해야 하며, 모방할 것이 생기기 전에 어린이가 그 모델에 익숙해져야 한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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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청교도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밀로반 질라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 소련군이 벌이는 행패를 불평할 때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도스토옙스키를 읽으셨겠죠? 인간의 영혼, 즉 마음이 복잡한 것을 아시겠죠? 한 남자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베오그라드(유고슬라비아의 수도-옮긴이)까지 계속 싸웠다고 가정해봅시다. 폐허가 된 조국과, 전우와 사랑하는 이들의 시체들을 넘어 수천 킬로미터를 헤치고 말이오! 그런 자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행동할까요? 그리고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여자와 재미를 보는 게 뭐가 그리 끔찍하겠소? 귀하는 소련군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군요. 소련군은 이상적이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 가장 중요한 건 독일군과 싸운다는 것, 그리고 잘 싸워야 한다는 겁니다. 나머진 아무래도 좋소.”27

1945 중에서

스탈린은 이후 곧 입장을 바꾼다. 이런 소련군의 행동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격렬히 저항했고 군사적 부담이 줄지 않았다. 그리고 동유럽에서 공산정권을 세우기에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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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스의 글에는 소련 병사들이 독일로 진격해 왔을 때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아래와 같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독일 병사에 의해 파괴된 소련 영토를 수천킬로 되짚어온 가난한 소련 병사 앞에 풍족한 독일 도시와 민간인들이 어떻게 비쳤을지 말이다.




캅카스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농부소년들이 보기에 크라이니츠나 슈트렐라의 평범한 독일 마을의 집은 궁궐 같았다. 시골길도 고속도로처럼 보였고, 잘 먹인 독일 소들은 소련 집단농장의 말라빠진 짐승과는 전혀 달랐다. 이 풍요로움은 분명한 의문을 자아냈다. 이토록 잘사는 독일인이 왜 가난하고 압정에 신음하는 러시아를 침략했을까? 소련군 중위 보리스 이텐베르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기생충들은 정말 잘살았어! 폐허가 된 집, 버려진 가구, 단정하게 나무가 심어진 인도, 읽지도 않은 새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을 비롯해 정말 풍요로운 삶의 수많은 증거를 봤어. 아직 멀쩡한 집에 들어가면 놀라운 것이 보여. 의자, 소파, 옷장. 독일인들은 정말 잘 살았어. 왜 그 이상을 바라지? 독일인들은 전쟁을 원했고, 결국 대가를 치렀어.”13

1945 중에서


“식량 창고에 집에서 훈제한 고기, 말린 과일, 딸기잼 같은 게 가득했다. 독일 안으로 들어갈수록 곳곳에서 보이는 풍요에 구역질이 났다. … 잘 정리된 병과 깡통에 주먹을 날려 부셔버리고 싶다.”14

소련군 장병 다수에게 독일 민간인에 대한 태도가 부러움에서 분노로, 그리고 범죄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들은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선동 문구를 기억했다.

“날짜를 세지도 말고, 거리를 헤아리지도 말라. 그저 네가 죽인 독일인의 수만 세라.”

이 유명한 선동가는 병사들에게 패망한 적국 독일에 “어떤 자비도 베풀지 말라”고 부추겼고, 병사들은 그말에 따랐다.

1945 중에서

보병소대의 정치장교로 복무한 시인 보리스 슐루츠키는 독일인을 향한 잔인함에 “그 어떤 정당화도 필요 없다”고 믿었다.

“지금은 법과 진실을 말할 때가 아니다. 독일인들이 먼저 선과 악을 넘어서는 길을 선택했다. 이제는 똑같이, 100배쯤 되갚아주자.”

1945 중에서

소련군이 접근하자 독일 민간인들이 보인 공포 반응은 강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보여주는 초기 징후였다. 새로운 미군 부대가 규모를 갖춰 새로운 경계선으로 다가가면서 “넋을 잃고 무질서한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압도당했다. … 이들은 걸어서, 자전거를 타고, 수레를 끌고, 마차를 타고, 그 외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해 몰려왔다.”19 피난민들의 이동 방향은 압도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향했다. 동쪽에서 서쪽이었다

194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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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아이젠하워의 차이

“베를린은 예전의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2선급 부대를 베를린 쪽으로 파병하려 합니다.”

베를린 함락에 대해 나중에 집필한 역사가 앤터니 비버는 이 공문을 “현대 역사상 가장 큰 만우절 허풍”이라고 평가했다.11 ‘영도자’는 베를린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베를린 전투가 이 전쟁의 절정과도 같은 것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독일 제국의회와 국가수상부는 크렘린이 소련 권력의 상징이듯 나치 권력의 상징이었다. 대체로 군사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하는 아이젠하워와 달리, 스탈린은 정치적·전략적 관점으로 생각했다.

1945 중에서

아이젠하워의 주요 목표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 인명피해를 최소로 억제하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루스벨트가 전적으로 지지한 목표이기도 했다. 반면 스탈린은 결정을 내릴 때 인명피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런 결정이 초래할 정치적 결과에는 편집증적으로 집착했다. 적국 수도 함락은 스탈린이 나치독일의 정복자라는 평가를 확고하게 함으로써 동유럽의 거의 대부분에 대한 지배를 확고부동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소련과 독일에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힐 각오를 했다.

194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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