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장기적인 정치 문제였다. 즉 어느 나라 군대가 어느 지역을 점령하고, 유럽 국경은 어떻게 되며, 누가 어디를 통제하느냐가 중요했다. 스탈린은 서방연합국이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2년이나 늦춘 걸 강하게 비판했다. 1942년 8월 처칠은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영불 해협을 건너는 상륙작전 시 영국이 치를 대규모 인명손실을 거론했다. 스탈린은 소련군은 매일같이 1만 명을 잃는다면서 비꼬듯이 말했다.

“위험 부담 없이 전쟁을 치를 순 없죠.”21

.

1945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련 고급문화의 기원, 발전 그리고 몰락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1930년대는 놀랍고 흥분되는 성장의 시기였다. 희망에 찬 모험(‘자연을 정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외딴 지역으로 떠났다)과 보잘것없는 삶을 개선하려는 집단적 목표의식이 있었다. 이 목적의식과 보잘것없는 삶에 대한 거부는 문학과 예술에 반영되었다. 작가들은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고 불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예술 이론으로 권장됐다. 이것은 흔히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현재에 밝게 빛나는 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했다. 방법론적으로는 대중들이 쉽게 인식하는 전통적 형식을 이용하고 전위적 기벽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창의적인 예술가와 일반적인 지식인에게 문화혁명 이후의 새로운 기준은 장단점이 있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관한 경고성 지침은 단점이 됐지만, 글과 그림에 대한 보수가 관대해지고 혁명 이후 잘 알려지지 않은 특권과 사회적 지위가 주어진 것은 장점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것은 채찍이기보다는 당근처럼 보였다. 스탈린은 고급문화와 고등교육의 개선을 통해 개인적인 위신을 세웠고 이것은 소련 말기까지 소련의 특징으로 남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r9FfQSoW9C5ARQa7

이 모든 혼란을 거친 후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이 도래했다. 당시의 소련은 복지국가였고, 비교적 가난했지만 상당히 평등했다. 모든 사람이 교육받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전쟁 전 시기에 있었던 상향(또는 하향) 이동의 큰 기회는 사라졌다. 고급문화가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qeS7guSikojbxRu7

지식인들이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가난해졌을 뿐만 아니라 ‘두꺼운’ 잡지와 같이 삶을 지탱해주던 주요 매체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지식인들과 소비에트 국가가 높은 가치를 부여한 교육과 고급문화는 후세대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후세대들은 미국 문화를 빠르게 습득하고 벼락부자가 되는 방법을 찾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f3qW7qkghhQq7RqS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쿠데타와 러시아 혁명/반혁명

소수파 사회주의 정당의 변호사였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르보프 왕자로부터 임시정부 권력을 인계받았다. 하지만 군대와 수도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독일은 계속 진격하여 8월에 리가(러시아제국의 일부였던 라트비아의 수도)를 점령했다. 그로 인해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에 가까지자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9월이 되자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졌다. 케렌스키가 최근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군대 사기 회복 임무를 맡겼던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 결과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의 관계가 멀어졌다. 이는 73년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1990년 8월에 쿠데타를 시도한 소련 지도자들의 관계와 똑같았다. 어쩌면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를 반대해서가 아니가 지원하려고 쿠데타를 감행했을 수도 있다. 철도 노동자의 즉각적인 조치로 코르닐로프 부대의 수도 진격이 저지당해 쿠데타는 실패했고, 케렌스키의 입지는 치명적으로 손상되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twhDyQXc2ArLqrjbA

고르바초프의 두 가지 권력 기반은 공산당과 대통령직이었다. 하지만 공산당의 평판과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고, 대통령직은 관료 조직과 여론 기관이 지지하지 않는 힘없는 자리였다. 강력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1916~17년 차르와 러시아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고르바초프는 허둥댔다. 고르바초프와 소련 체제의 정당성은 추락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논평가라면 모두 그에 대항해 좌파 또는 우파의 쿠데타가 일어나리라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1917년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처럼 우파 쿠데타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쿠데타는 8월 중순에 일어났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능하고 서툴렀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NvpXsTiyu4JGiBJ8

아마 이전의 코르닐로프처럼 모스크바의 음모자들은 소련을 분열로부터 구하기 위해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고르바초프를 도와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의를 텔레비전에 발표하는 그들의 역량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수만 명이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군대와 탱크가 도심에 나타났지만 발포 명령도 그럴 의도도 없었다. 쿠데타 음모자들의 무능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있던 옐친이 이 시기의 영웅이 되었다. 탱크 위에 있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전 세계로 퍼졌다. 음모자들은 겁을 먹었고, 고르바초프는 풀려나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위상과 소비에트연방의 존속 가능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cMedjRDdwX8r5PZ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드카 금지와 러시아 혁명/반혁명

징집된 일반 병사들의 분위기가 암울해졌다. 주로 사상자, 패배, 예기치 않은 오랜 복무 기간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병사들에게 제공하던 보드카를 황제가 1914년 지급 거부한 것에 대한 분노도 한 가지 원인이었을 것이다. 일반 시민에게도 적용된 금주법은 중요한 국가 수입원을 없애버렸고, 곡물이 가정의 불법적 밀주 제조에 사용되면서 빵이 부족해졌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8ogim6fG7M5McAU28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보드카에 대한 엄중한 단속으로 청교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금주 정책은 안드로포프의 짧은 통치기 때 시작된 것으로 남성의 기대수명 감소와 낮은 노동생산성에 대한 타당한 대책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국가예산 측면에서 좋지 않았고, 슬라브인 남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음주자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GHXP2aP3P38jQ4S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련과 민족주의

서구 열강들은 소련을 제국으로, 그것도 불법적인 제국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소비에트연방을 바라보았다. 볼셰비키당 지도부 중 다수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옛 러시아제국 치하에서 억압받던 소수민족인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제국주의와는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러시아제국이 몰락하기 전 3년 동안 점점 심해진 비러시아인 차별에 분노하면서 성장했다. 그들은 소비에트연방 지역 안팎, 특히 (19세기에 러시아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중앙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주민을 해방하는 일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러시아의 광신적 민족주의’가 ‘가장 큰 위협’이라는 1920년대의 슬로건은 소련의 모든 민족주의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러시아 민족주의라는 뜻이었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hMrDQbnFW5D6eF43A

볼셰비키는 열렬한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허위의식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민족주의가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녔고, 없애려고 시도할수록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볼셰비키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들의 전략은 비러시아인의 민족주의를 권장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각 민족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민족문화를 장려하며, 공화국 단위(예컨대 우크라이나)에서 시작하여 마을 소비에트 단위(유대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 라트비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다른 ‘자치 구역들’)까지 내려가는 독립된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소련의 행정 체계가 각 민족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 소련 통치의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Bbp6r6nE8Q3MHvxe8

다문화주의(무정부주의적 용어를 사용하자면)는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이었다. 민족적 선입견을 공공장소에서 표현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 <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저/안종희 역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vGMijbwSRkWEumD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