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국嚴在國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 시인의 말


서른을 지나 마흔을 넘어
묘지의 숨을 쉬는

몸 속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뼈가 있어

나는 지금 바람의 봉분 속에 누워
몇 삽 말의 흙으로 뼈들을 숨길 뿐.


-이천육년 정월

엄재국의 시는 깊고 어두운 저탄층의 언어이다. 시인은 일상의 동력을 얻기 위하여 ‘괴탄의 불꽃‘ 같은 시를 찾아 그것의 심층을 캐들어간다. 시 「교대 근무에서 처럼, 시인은 친구의 하관식이 단순한 죽음의 제의가 아닌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근무 교대임을 보여주기 위해, 꽃을 공중에 매장하여 다음 생의 불꽃을 저장하는 ‘분홍빛 석탄‘의 결정(結晶)을 얻어낸다. 이런 식물과 광물의 이미지가 혼용된 절묘한 시구야말로 시인이 현실의 막장에서 건져올린 치열한 긴장의 산물이다. 시인이 나서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그의 고향땅 문경, 한때 석탄으로 홍성하다 일시에 불어닥친 폐광의 바람으로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처럼, 시간의 폭력 앞에서 망가지고 부서지는 주변 풍경과 사물에 대한 연민으로 앞으로도 그는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인에겐 꽃과 가시로 서로를 절반쯤 죽여주며 절정으로 치닫는 삶의 기쁨이 있으니, 해와 달이 어울리듯시인이 하고 싶은 말들이 저렇게 둥근 체위로, 이글이글!
송찬호(시인)

망각


바싹 마른풀밭이 비를 받아내고 있다

파랗게 질린 뽕잎이 누에를 받아내고 있다.

벼 베고 남은 그루터기가 잘려진 발목만으로 농부를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은 忌日, 10주년
어머니가 내 절을 받아들이고 있다. - P11

교대근무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북향의 산비탈
꽃잎이 공중에 매장되고 있다.

지하의 한 칸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친구의 하관식

병반의 광부가 막장의 임무를 교대하고 있다

퇴적된 목숨들이 겹겹이 일어서는, 캄캄한 공중의 광맥들
우수수 쏟아지는 분홍빛 석탄들

누군가,
공중에 꽃을 매장하고 있다 - P19

용접


깊은 밤 상가집 부엌마루 처마끝
백열등을 스치는 빗방울이 번쩍인다
용접봉의 불똥같다.

누가 저 지붕 위에서 용접을 하는가
구름과 구름과 어둠과 밝음과 하늘 자락과 처마끝 둥근선과,
침묵한 그의 말과
소주를 털어넣는 내 입술 사이로 불빛이 떨어진다

저 낙수의 불꽃 속에 내가 친구를 조문온 게 아니라
나를 다니러 온 친구를 내가 배웅하는 게 아닐까
그를 돌려보낸 내가 술을 마시는지
나를 보내고 그가 잔을 비우는지

절을 하고 나오는 처마는 여전히 불빛의 불똥이 떨어져, - P32

지붕위 하늘 자락에서 그가
단단하게 분리된 삶과 죽음을 붙이고 있다 - P33

꽃들은 밤길 걸어


감꽃 지는 소리에 마당에 나섰더니
꽃진 자리처럼 떠오른 달이
산과 강과 들의 문을 열어
마당으로 한 발 스윽 들이미네

저 달은,
세상 길들을 실처럼 꿰고 있네
달이 나를 한 땀씩 떠 가네
달이 깁는 성긴 밤

꽃들은 밤길 걸어 어디로 가나

손에 손에 등불 켜고 아침 맞으러 가는
세상 꽃들이 다 옳다고 말한 건 참 잘한 일이네 - P65

파블로 네루다가 그러하고, 미당 서정주가 그러하듯이 엄재국 시인은 시대를 뛰어넘어 땅 ㅡ자연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또렷하게 언어로 새겨놓는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무 한 그루가 상처를 입으면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같이 하는 감수성‘(김종철)을 갖고 있고, 땅 ㅡ자연으로 나아가는 땅ㅡ자연의 아들이다. 땅ㅡ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새로운 ‘지각의 지평선‘ 이 깃들어 있지 못하는 시를쓰는 시인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없다. 위대한 시인이란땅 자연을 갱신하는 상상력과 사유 속에서 그것을 새롭게발견하고, 그 발견의 경이를 인류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소명을 실천하는 이를 가리킨다. - P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한 자의 위대한 거부

황현산(문학평론가)


신현정은 「자전거 도둑』(2005, 애지)을 출간하면서, 시인이 몸을 어디에 두어도 그 시는 살아 있다는 것을 넉넉히 증명했다. 천진하다고도 의뭉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그런 시집이었다. 지나는 길에 만나 의례적으로 악수를하고 역시 의례적으로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이튿날 아침, 잠이 깨면서, 아 그 말이 그 말이었구나!
화들짝 놀라게 되는 그런 경우에 빗대어야 할까. 그렇다고시의 말에 무슨 함정이 숨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깊은말과 그저 하는 말에 구별이 없었을 뿐이다. 새 시집 「바보사막도 두 모습이다. 겉으로 보면 담담하고 산뜻하나.
그 속마음을 짚어보면 처연하다. 달리 말한다면, 담담한 - P121

것도 그 처연함 위에서이고 산뜻한 것도 그 처연함의 힘에 의해서이다. 날이 선 정신은 늘 경계를 밟게 마련인데,
그때 마음이 처연한 것은 경계를 밟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처연함이 경계 너머를 넘보게 한다고 해야하리라.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첫 시 「바보사막은 당연히 서시의 구실을 하겠지만, 시집의 전체뿐만 아니라 한 생애의 전체를 요약하는 결어의 형식을 지니기도 한다. "오늘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출발하기도전에, 그 여행이 어떻게 진행되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또는 끝나지 않을 것인지, 미리 알고 있다. 사막 여행은 그 출발지도 경유지도 목적지도 모두 사막이다. 거기에 어떤 격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막을 가는 사람은 "해 별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야 하고, 이 행렬에 "조금의 흐트러짐이나 순서의 뒤바뀜이 용납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모랫길을 밟는 일도 천지 운행의 지배 아래 그 율려를 체험하는 과정이지만, 그 체험이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사막을 가는 사람은 시작의 불모와 끝의 불모를 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삭막할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막을 가는 사람은 "난생처음 낙타를" 타보고, 허리에 찬 "가죽 수통"과 "달무리 같은 크 - P122

고 둥근 터번을" 뽐내기도 한다. 저 사막이 오래된 것처럼낙타도 수통도 터번도 모두 낡은 것이겠지만, 이제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난생처음"의 감각으로 그것들을 접수한다. 여행의 끝은 비극적이다: "사막 한가운데 이르러서/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먹는다는 것이다." 낙타의 죽음이 여행자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행자는 여행의 끝에, 또는 삶의 끝에 "굳기름"을 먹겠지만, 그러나 또한 "난생처음" 먹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난생처음‘은 낡은 것들이 드리우는 낚싯바늘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낚싯바늘이 낚싯바늘인 것을 알고 무는 물고기는 없으나, 낚싯바늘이 낚싯바늘임을 모르고 무는 시인도 없다. 그 처연한 ‘희생‘이 바보들의 대물림 낙타에, 누군가 벌써 썼던 터번에, 또다시 먹어야 하는 기름에 ‘난생처음‘의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책임지는 부분만 진정으로 그의 삶이며, 진정한 삶은 늘 난생처음의 삶이다.
세상에서 만나는 사물 하나하나에, 생애의 모퉁이 길 하나하나에 난생처음의 감각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또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그 삶을 누릴 줄 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한 속담에서 영감을 얻었을, 마지막시 「고슴도치는 함함하다」는 작은 것으로 깊고 풍족하게 - P123

사는 삶의 놀라운 표본 하나를 보여준다. 시인은 "고슴도치가 슬프다"고 생각한다. "온몸에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이 슬프고, "그렇게 하고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슬프다. 그 바늘 하나하나에 밤이슬이 맺힐 것이고, 그 이슬젖은 바늘 더미 속에 "눈 있고 입 있고 궁둥이 있을 것이기에 슬프다". 그 바늘 더미로 "제 새끼를 끌어안기도 한다니 더욱 슬픈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쳐 생각한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를 포근히 껴안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니" 그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함함하다‘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드르르하다는 뜻이다. 고슴도치에게서 바늘을 함함한 털로 만드는 것은제 새끼에 대한 사랑이다. 시인에게서 사물이 베푸는 작은 은혜, 대개의 경우 날카롭기까지 한 은혜를 시적 서정으로 만드는 것은 감각을 오롯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그 정성이다.
다른 시 「마루 끝에서 해바라기 하다」에서 "안이 바깥보다 춥기만 한 날 시인은 "고양이가 내준 자리"에서.
"마루 끝에서 피고 지고 해바라기" 한다. 그는 "먼 산등성이"에서 빛나는 "잔설"을 볼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가 "손목이 긴 고무장갑을 끼고, 지난 가을에 묻어둔 "김장독에서 묵은지를 꺼내 다라이에" 옮기고, "아예 독항아리 - P124

를" 물행주로 가셔놓으려 하는 모습을 눈여겨본다. 그는 아내가 가까이 오지만 모른 체한다. 그가 아내에게 무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은 봄기운이 아직 완연하지는 않은 날 충분하지 못한 햇볕을 조심스럽게 모아 누리듯이, 아내가 생활에 바치는 정성을 제 마음속에 고이는 또 하나의 정성으로 깊이 음미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시에서 동사의 현재형을 쓰는 대신, ‘하다‘ ‘옮기다‘ ‘걸어오다 빛나다 같은 동사의 원형을 쓴다. 시인이 작은것 속에서 풍요를 보는 이 공간은 현재에 무시간성의 영원한 가치를 주어 아내와 햇볕이 구별되지 않게 하는 선택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스러져도 영원히 남을그 감각의 기억으로 작은 것들이 큰 것으로 확장된다.
작은 계기에 제 감수성의 전체를 투자하는 시인은 자주말과 설명에 인색하다. 그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알기 위해서는 어떤 육체적 참여 같은 것이 요구된다. 「복숭아」에서는, 그 작고 예쁜 엉덩이에 "목숨 壽자를 새겨주고" 싶다는 바람을 단 세줄로 쓴다. 예쁜 것들이 누리는 목숨은 그렇게 짧지만 거기에 투자되는 생명의 감각은 그렇게 길다. 「장수하늘소를 찾아」에서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느끼게 되는 거의 신경질적인 흥분을 말과 비유를 바꾸어 반복하던 끝에 - P125

"오늘은 오늘은 정말로 장수하늘소를 만날 것만 같다"고 다른 설명 없이 쓴다. 그 이름 속에 ‘하늘‘과 ‘싸움‘을 포괄하고 있는 이 곤충에 관해서라면, "괜히 싸움을 걸고" 싶고, "무언가를 질근질근 씹고 싶고", "하나님도 끌어내리고" 싶은, 저 안달하는 마음자리를 짚을 수 있을 때만 그 시적 정당성이 확연하게 이해된다. 「산책하는 자전거는 자전거를 타다 말고 자전거를 끌고 함께 걸어간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새소리가 울리면 새소리를 듣고, 그루터기를 만나 그루터기에 앉고, 모로 눕힌 "자전거 바퀴 건성도는 거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끌려가는 자전거가 팔에 전달해주는 무게감만이 두 차례 반복되는 "자전거와 나란히"라는 말의 깊은 서정성을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때로는 이 사소한 감각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길 위의 우체부」에서는 한 우체부가 행낭 속의편지들을 자신은 나비 떼라고 부르는 것들을 숲길에 쏟아 붓는다. 그도 역시 "민들레 옆에 자전거를 모로눕히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아, 나는 선량했다‘고 말한다. 그는 봄날 제 감각에 겨워 제 생명을 방생하듯, 편자나비 떼를 "선량하게 방생한 것이다. 인색한 물질들 속에서 인간의 근면과 성실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제가 작은 낙원을 만들듯이, 이 사소한 것들 앞에서 거 - P126

두어들이는 담담하면서도 고양된 관능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깊게 고르면서 겉도는 감각의 분란을 가라앉히고 정신의 주파수를 한껏 낮추는 절차가 필요하다.
사소한 사물과 관능의 깊이가 만나는 자리, -이 자리는 또한 신현정식의 환상이 산출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는 자주 ‘조촐한 환상이 있다.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에서 화자는 난쟁이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자를 벗어 식탁 한가운데 올려놓는다. 벗어놓은 모자는 동화에서나 만나게 될 "높다란 굴뚝" 같고, 그래서 "굴뚝새라도 들어와 살 것" 같다. "식탁 위에서 모자는 검게"
빛난다. 식사가 끝난 후 주인과 손님은 "문밖에서 꽥꽥하는 거위"까지 불러들여 함께 식탁을, 모자 주위를 돌았다. 한 인간의 기품을 뽐내는 장식이거나 그 권력의 무장이던 모자가 식탁 위에 내려 놓인 그 순간 일상과 그 구성요소들의 기품과 권위 그 자체로 된 것이다. 바뀐 것은 모자의 위치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용렬한 현실이 환상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 앞의 시 「모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야 할까. 시에서 화자는 레스토랑에서도, 극장에서도,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 - P127

한다"는 이 모자는 화자 그 자신의 위의를 표현하는 것이아니라. 그가 세상에 바치는 겸손과 존경을 뜻한다. 모자를 쓰고 있는 한 그는 여행한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제가바치는 경애의 힘으로 그때마다 사물을 새롭게 느끼며,
그 난생처음의 감각이 환상을 만든다. 이때 환상은 사물이 저마다 감추고 있는 위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어서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는 서울 시계의 길목에 세워진해태상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는 그 해태가 어느 날구름을 타고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머리 복판의 뿔을 뽑아던지고 떠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시인은 상투적이라고도할 수 있을 해태상에서 그 생기를 오롯이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신화적 진실까지도 넘어다본다. 그 좌대에 새겨진환영과 전송의 인사말을 새긴 사람도 건성으로 새겨놓았고, 읽는 사람도 건성으로 읽게 마련일 글자들을, 시인은액면 그대로 순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 말의 주체가누려 마땅한 생명력을 감득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환상은성실성의 문제이다.
신현정에게 환상은 일탈도, 방황도, 기분풀이도 아니다. 그것은 선량하고 진솔한 한 인간이 사물에 바치는 진정을 통해 그것의 또 다른 모습을 감지하여, 그것을 일상의 삶 속으로 끌어와 다시 음미하는 일일 뿐이다. 지식의 - P128

그물에 걸려들지 않은 정신, 유혹과 미끼에 나대지 않는감각, 쌓아둔 것에 함몰되지 않는 삶만이 그 일을 감당할수 있을 터인데, 신현정이 시적 서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도, 시적 서정으로 획득하게 되는 힘도 기실 거기 있다.
그는 빼어난 시 「백경」을 이렇게 쓴다.


고래를 주마고 했다

아니라고 했다

파이프에 갈매기를 꾹꾹 눌러 담아 피우는 그는

모자도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삼각 파도 모양의 넓은 모자였다

안경을 벗어 들더니 이 안경은 어떠냐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한쪽에는 구름이 다른 쪽에는 섬이 떠 있는 안경이었다

병 모가지를 쥐고 병째 한 입 쭈욱 들이켜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 P129

낙조처럼 독한 것이었다

작살도 맘에 들면 가지라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또 돛만 떼어갈 수 있으면 그리하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먼 바다도 불러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발치에 벗어놓은 검은 장화가 출렁거렸다

거기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얼 끄집어냈다

문어를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주려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의 이 대화는 아마도 훨씬 더 길게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또한 거부의 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또는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제 시야를 가리는 것을 하나하나 거부할 때, 그는 그것들 속에 있으면서 또한 그것들 밖에 있는 것, 그것들을 다 합한 것이면서 또한 - P130

그것들이 모두 스러져야 오는 것에 대한 윤곽을 아련하게그려나갈 수 있다. 신현정은 지식이건 재물이건 축적된것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해묵은 길을 새 길로 갈 수 있다는것을 안다.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 그 발가벗은 육체로 느끼고 사랑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그의 것이다. 존경과성의를 바친 것만 그의 것이다. 인내한 것만 그의 것이다. 그 자유로운 개화와 사랑을 위해, 그것이 난생처음 거기있게 하기 위해, 그것이 한 이름으로 거기 있게 하기 위해, 소유하기를 거부한 것만이 그의 것이다. 신현정은 ‘그의 것이 죽음 뒤의 광휘가 되어 보일 때까지 인내한다.
그것을 신현정의 위대한 거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P131

신현정 시인은 뵐 때마다 서글서글하시다. 당신의 시를 읽으면 우락부락한 나도 벙긋벙긋해지고 상냥해진다. 당신은 낙타와 난쟁이와고래와 은숙이와 장수하늘소와 토끼와 칸나와 해태와 분꽃과 오리와같이 살고 있으니 대식구의 가장인 셈. 이 식구들에게 해와 별과 꿈을 모자처럼 얹어주니 멋스러움과 우주적 대창大昌이 있으시다. 당신은 부처님. 하나님과는 부탁하고, 투정 부리고, 호통을 치는 막역한 사이 당신 아니라면 누가 이 낙차를 감히 즐기겠는가.
선량하고 명랑하고 엄살도 떨 줄 아는 이 청량한 시심을 ‘나란히 가는 시심‘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당신은 당신의 행렬에 누구든 따돌림 없이 끼워준다. 남의 뜻에 선뜻 응해 다 들어주니 수순 그자체이시다. 무엇보다 아가의 마음처럼 반짝반짝 막 태어나는시심은 참 부러운 것이요, 우리 시사詩史에서 오랜만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갑갑하게 가두지 않고 꽃처럼 자꾸피어나려 하는 시들의 탄력을, 무궁한 호기심을 보라. 시집을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냅다 줄행랑을 놓고 싶다. 어디 구석진 곳에 숨듯이 앉아 시집을 펼쳐 들면 내 마음도 맨드라미처럼 활짝 피어날 것같다. -문태준(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끼에게로의 추억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 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 P36

순한 구름


나 흰 구름 가는거 본다

어디로 가느냐

저 구름 가는데로 가면서 양으로 가고 싶다

착한 나사螺絲 같은 뿔을 달고 입을 오물거리며 구름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 어디 순례하는 자 있어 나를 몰고 가겠지

그도 고개를 숙이고 나를 몰고 가겠지

나는 순하지

암, 서쪽으로 가겠지

서쪽은 순하지. - P37

바람난 모자


모자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휘파람새 같은 것으로

너구리 같은 것으로

물고기 같은 것으로

아니 사르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푹 눌러쓰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쓰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악어 같은 것으로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 P74

길 위에서


신발끈을 고쳐 맬 때가 있다.

길 가다가 신발끈이 풀어져서 신발끈을 고쳐 매주었다

도중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을 무릎에 돌처럼 눌러놓고

신발끈을 엇방향으로 집어넣어 빼내면서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단단히 옭맸다

신발끈이 또 풀어졌다

나비로 해서 그런가

다른 것은 없을까

두루미 같은 것은 어떨까

저 청산을 훨훨 가고 있는 두루미로 어찌 안 될까

두루미로 하면 영 안 풀어질 것 같기도 한데 - P94

그런데 어디서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네가 불현듯 나타나더니

야 이놈아

신발끈 풀지 말고 그래 길 위에서 평생 살아라 소리치는 게 아닌가. - P95

소망은 온전하다


나도 내 자전거가 있었으면 하는 것으로

그러면 자전거를 아주 잘 탔을 텐데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아버지를 지나 나를 지나 비로소 우리 애한테 가서 이루어졌는데

그참 이제라도 이루어지는 소망, 소망아 고맙다

내가 봐도 우리 애, 자전거를 참 잘 탄다

어쩌면 바람이 내준 자리가 아닌가 하였으며

바람이 내다르는 것 같았으며

수양버들 휙휙 늘어진, 저수물 찰랑거리는 뚝방길을 달리는데

바람이 바람을 가르는 것이었으며

새소리가 났으며 - P118

바퀴살은 햇살을 훼살지으며 돌았으며

소망은 아직도 새것인 양 반짝거렸으니 소망아 고맙다

허참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더니만

타라고 해서 얼떨결에 그만 손바닥만한 짐칸에 올라타고 말았는데

이놈 보게 처음에는 핸들에서 한 손을 떼어놓더니

어렵쇼 양손 다 놓아버리고 냅다 달리니

내 등 뒤에선 잠바가 바람이 하나가득

아 내 소망은 온전하였다. - P119

고슴도치는 함함하다


나는 고슴도치가 슬프다

온몸에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을 보면 슬프다

그렇게 하고서 웅크리고 있기에 슬프다

저 바늘들에도 밤이슬 맺힐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

그 안에 눈 있고 입 있고 궁둥이 있을 것이기에 슬프다

그 몸으로 제 새끼를 끌어안기도 한다니 슬프다

아니다 아니다

제 새끼를 포근히 껴안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니

나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 - P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말



시인은 평생 환자입니다.

내게 있어서는 결백증과 결벽증이 한 가지로 되어 있어 참으로그 치유를 기대하기란 어렵겠습니다.

일류 살청殺靑 기술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몽상가로도 고급 스타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일들은 즐거운 숨바꼭질입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영원한 술래로 만들어보려구요.

왜 무의미일수록 내 심장은 붉고 크고 게걸스러워지는 것일까요.

무위無爲와 실컷 놀다 갔으면 합니다.

2008년 여름 장마
신현정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 P12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 P13

와불臥佛


나 운주사에 가서 외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 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와불이 누우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게 무심코 내찼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 P20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잔뜩 긴장하고서 mbc앵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5분 남았다. 이제~!
환자들 돌아올 시간은 10분 남았다.

나팔꽃들의 행진行進


이른 아침, 마당 수도가에 나와 양치 및 세수하다

나팔꽃 핀 것 보면서 아ㅡ 아ㅡ 아ㅡ 아 입안에서 물을 우물거리다

문득 나팔꽃을 따라 높다랗게 오르고 
싶어지다

나팔을 불면서 오르고 싶어지다

이대로 줄 타는 광대이면 어떨까 싶어지다

신명이 좀 나면 어때서, 아뿔싸 발을 헛딛는 척도 해볼까나

나팔을 일부러 놓아버릴까나

나팔을 아래로 아래로 까마득히 떨어뜨려보고 싶어지다

나팔을 불며 춤추듯 나팔을 불며 높다랗게 오르며

나팔을 떨어뜨리며 - P60

개인 날


하늘이 개였다, 흐렸다,

아하, 개이기는 개이려나 보다

비 온 뒤 조금 흐린 날

어디서 지렁이 나와 기고 있는

땅 한 줄 향기롭다. - P72

매미울음


한시적이라는 것

얼마나 지독한 사랑의 맹세인지는 몰라도

매미가 운다

녹음을 찢듯이 운다

금강석을 찢듯이 운다

구름은 부풀고

등짝을 찢듯이 운다

수천 마리로 운다. - P74

외면外面


연잎 위에 개구리 가부좌를 하고 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어쩌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개구리 그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바람 불어 연잎 날리고

급기야는 개구리 첨벙하고 못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아서

아 못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것 같아서

가부좌란 저런 동작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연잎 위에 개구리 애써 외면하며

하늘 본다 흰구름아 어디 가느냐. - P77

산수山水


산 첩첩

기암괴석 첩첩

물 첩첩 떨어지는 어디 그런 곳 있다

저 까마득한 폭포를 타고 오르는 물고기 바라보며

폭포 아래를 지나가면서

나, 오줌 눈다

힘주고 힘주고 오줌발에 무지개 서리도록 힘주고

오줌발에 물고기 올라타도록 힘주고 힘주고

나, 오줌 눈다

저 폭포를 타고 오르는 물고기 아찔하게 올려다보며

나, 오줌 다 눗고 몸을 부르르 떨어보는 것이다. - P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