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위대한 거부
황현산(문학평론가)
신현정은 「자전거 도둑』(2005, 애지)을 출간하면서, 시인이 몸을 어디에 두어도 그 시는 살아 있다는 것을 넉넉히 증명했다. 천진하다고도 의뭉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그런 시집이었다. 지나는 길에 만나 의례적으로 악수를하고 역시 의례적으로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이튿날 아침, 잠이 깨면서, 아 그 말이 그 말이었구나! 화들짝 놀라게 되는 그런 경우에 빗대어야 할까. 그렇다고시의 말에 무슨 함정이 숨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깊은말과 그저 하는 말에 구별이 없었을 뿐이다. 새 시집 「바보사막도 두 모습이다. 겉으로 보면 담담하고 산뜻하나. 그 속마음을 짚어보면 처연하다. 달리 말한다면, 담담한 - P121
것도 그 처연함 위에서이고 산뜻한 것도 그 처연함의 힘에 의해서이다. 날이 선 정신은 늘 경계를 밟게 마련인데, 그때 마음이 처연한 것은 경계를 밟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처연함이 경계 너머를 넘보게 한다고 해야하리라.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첫 시 「바보사막은 당연히 서시의 구실을 하겠지만, 시집의 전체뿐만 아니라 한 생애의 전체를 요약하는 결어의 형식을 지니기도 한다. "오늘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출발하기도전에, 그 여행이 어떻게 진행되어 어떻게 끝날 것인지, 또는 끝나지 않을 것인지, 미리 알고 있다. 사막 여행은 그 출발지도 경유지도 목적지도 모두 사막이다. 거기에 어떤 격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막을 가는 사람은 "해 별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야 하고, 이 행렬에 "조금의 흐트러짐이나 순서의 뒤바뀜이 용납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모랫길을 밟는 일도 천지 운행의 지배 아래 그 율려를 체험하는 과정이지만, 그 체험이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사막을 가는 사람은 시작의 불모와 끝의 불모를 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삭막할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막을 가는 사람은 "난생처음 낙타를" 타보고, 허리에 찬 "가죽 수통"과 "달무리 같은 크 - P122
고 둥근 터번을" 뽐내기도 한다. 저 사막이 오래된 것처럼낙타도 수통도 터번도 모두 낡은 것이겠지만, 이제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은 "난생처음"의 감각으로 그것들을 접수한다. 여행의 끝은 비극적이다: "사막 한가운데 이르러서/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먹는다는 것이다." 낙타의 죽음이 여행자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행자는 여행의 끝에, 또는 삶의 끝에 "굳기름"을 먹겠지만, 그러나 또한 "난생처음" 먹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난생처음‘은 낡은 것들이 드리우는 낚싯바늘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낚싯바늘이 낚싯바늘인 것을 알고 무는 물고기는 없으나, 낚싯바늘이 낚싯바늘임을 모르고 무는 시인도 없다. 그 처연한 ‘희생‘이 바보들의 대물림 낙타에, 누군가 벌써 썼던 터번에, 또다시 먹어야 하는 기름에 ‘난생처음‘의 이름표를 달아준다.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책임지는 부분만 진정으로 그의 삶이며, 진정한 삶은 늘 난생처음의 삶이다. 세상에서 만나는 사물 하나하나에, 생애의 모퉁이 길 하나하나에 난생처음의 감각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또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그 삶을 누릴 줄 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한 속담에서 영감을 얻었을, 마지막시 「고슴도치는 함함하다」는 작은 것으로 깊고 풍족하게 - P123
사는 삶의 놀라운 표본 하나를 보여준다. 시인은 "고슴도치가 슬프다"고 생각한다. "온몸에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이 슬프고, "그렇게 하고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슬프다. 그 바늘 하나하나에 밤이슬이 맺힐 것이고, 그 이슬젖은 바늘 더미 속에 "눈 있고 입 있고 궁둥이 있을 것이기에 슬프다". 그 바늘 더미로 "제 새끼를 끌어안기도 한다니 더욱 슬픈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쳐 생각한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를 포근히 껴안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니" 그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함함하다‘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드르르하다는 뜻이다. 고슴도치에게서 바늘을 함함한 털로 만드는 것은제 새끼에 대한 사랑이다. 시인에게서 사물이 베푸는 작은 은혜, 대개의 경우 날카롭기까지 한 은혜를 시적 서정으로 만드는 것은 감각을 오롯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그 정성이다. 다른 시 「마루 끝에서 해바라기 하다」에서 "안이 바깥보다 춥기만 한 날 시인은 "고양이가 내준 자리"에서. "마루 끝에서 피고 지고 해바라기" 한다. 그는 "먼 산등성이"에서 빛나는 "잔설"을 볼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가 "손목이 긴 고무장갑을 끼고, 지난 가을에 묻어둔 "김장독에서 묵은지를 꺼내 다라이에" 옮기고, "아예 독항아리 - P124
를" 물행주로 가셔놓으려 하는 모습을 눈여겨본다. 그는 아내가 가까이 오지만 모른 체한다. 그가 아내에게 무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인은 봄기운이 아직 완연하지는 않은 날 충분하지 못한 햇볕을 조심스럽게 모아 누리듯이, 아내가 생활에 바치는 정성을 제 마음속에 고이는 또 하나의 정성으로 깊이 음미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시에서 동사의 현재형을 쓰는 대신, ‘하다‘ ‘옮기다‘ ‘걸어오다 빛나다 같은 동사의 원형을 쓴다. 시인이 작은것 속에서 풍요를 보는 이 공간은 현재에 무시간성의 영원한 가치를 주어 아내와 햇볕이 구별되지 않게 하는 선택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스러져도 영원히 남을그 감각의 기억으로 작은 것들이 큰 것으로 확장된다. 작은 계기에 제 감수성의 전체를 투자하는 시인은 자주말과 설명에 인색하다. 그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알기 위해서는 어떤 육체적 참여 같은 것이 요구된다. 「복숭아」에서는, 그 작고 예쁜 엉덩이에 "목숨 壽자를 새겨주고" 싶다는 바람을 단 세줄로 쓴다. 예쁜 것들이 누리는 목숨은 그렇게 짧지만 거기에 투자되는 생명의 감각은 그렇게 길다. 「장수하늘소를 찾아」에서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느끼게 되는 거의 신경질적인 흥분을 말과 비유를 바꾸어 반복하던 끝에 - P125
"오늘은 오늘은 정말로 장수하늘소를 만날 것만 같다"고 다른 설명 없이 쓴다. 그 이름 속에 ‘하늘‘과 ‘싸움‘을 포괄하고 있는 이 곤충에 관해서라면, "괜히 싸움을 걸고" 싶고, "무언가를 질근질근 씹고 싶고", "하나님도 끌어내리고" 싶은, 저 안달하는 마음자리를 짚을 수 있을 때만 그 시적 정당성이 확연하게 이해된다. 「산책하는 자전거는 자전거를 타다 말고 자전거를 끌고 함께 걸어간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새소리가 울리면 새소리를 듣고, 그루터기를 만나 그루터기에 앉고, 모로 눕힌 "자전거 바퀴 건성도는 거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끌려가는 자전거가 팔에 전달해주는 무게감만이 두 차례 반복되는 "자전거와 나란히"라는 말의 깊은 서정성을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때로는 이 사소한 감각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길 위의 우체부」에서는 한 우체부가 행낭 속의편지들을 자신은 나비 떼라고 부르는 것들을 숲길에 쏟아 붓는다. 그도 역시 "민들레 옆에 자전거를 모로눕히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아, 나는 선량했다‘고 말한다. 그는 봄날 제 감각에 겨워 제 생명을 방생하듯, 편자나비 떼를 "선량하게 방생한 것이다. 인색한 물질들 속에서 인간의 근면과 성실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제가 작은 낙원을 만들듯이, 이 사소한 것들 앞에서 거 - P126
두어들이는 담담하면서도 고양된 관능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깊게 고르면서 겉도는 감각의 분란을 가라앉히고 정신의 주파수를 한껏 낮추는 절차가 필요하다. 사소한 사물과 관능의 깊이가 만나는 자리, -이 자리는 또한 신현정식의 환상이 산출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는 자주 ‘조촐한 환상이 있다.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에서 화자는 난쟁이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모자를 벗어 식탁 한가운데 올려놓는다. 벗어놓은 모자는 동화에서나 만나게 될 "높다란 굴뚝" 같고, 그래서 "굴뚝새라도 들어와 살 것" 같다. "식탁 위에서 모자는 검게" 빛난다. 식사가 끝난 후 주인과 손님은 "문밖에서 꽥꽥하는 거위"까지 불러들여 함께 식탁을, 모자 주위를 돌았다. 한 인간의 기품을 뽐내는 장식이거나 그 권력의 무장이던 모자가 식탁 위에 내려 놓인 그 순간 일상과 그 구성요소들의 기품과 권위 그 자체로 된 것이다. 바뀐 것은 모자의 위치일 뿐이지만 그것으로 용렬한 현실이 환상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 앞의 시 「모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야 할까. 시에서 화자는 레스토랑에서도, 극장에서도,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 - P127
한다"는 이 모자는 화자 그 자신의 위의를 표현하는 것이아니라. 그가 세상에 바치는 겸손과 존경을 뜻한다. 모자를 쓰고 있는 한 그는 여행한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제가바치는 경애의 힘으로 그때마다 사물을 새롭게 느끼며, 그 난생처음의 감각이 환상을 만든다. 이때 환상은 사물이 저마다 감추고 있는 위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어서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는 서울 시계의 길목에 세워진해태상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는 그 해태가 어느 날구름을 타고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머리 복판의 뿔을 뽑아던지고 떠나지 않을까 걱정한다. 시인은 상투적이라고도할 수 있을 해태상에서 그 생기를 오롯이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신화적 진실까지도 넘어다본다. 그 좌대에 새겨진환영과 전송의 인사말을 새긴 사람도 건성으로 새겨놓았고, 읽는 사람도 건성으로 읽게 마련일 글자들을, 시인은액면 그대로 순결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 말의 주체가누려 마땅한 생명력을 감득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환상은성실성의 문제이다. 신현정에게 환상은 일탈도, 방황도, 기분풀이도 아니다. 그것은 선량하고 진솔한 한 인간이 사물에 바치는 진정을 통해 그것의 또 다른 모습을 감지하여, 그것을 일상의 삶 속으로 끌어와 다시 음미하는 일일 뿐이다. 지식의 - P128
그물에 걸려들지 않은 정신, 유혹과 미끼에 나대지 않는감각, 쌓아둔 것에 함몰되지 않는 삶만이 그 일을 감당할수 있을 터인데, 신현정이 시적 서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도, 시적 서정으로 획득하게 되는 힘도 기실 거기 있다. 그는 빼어난 시 「백경」을 이렇게 쓴다.
고래를 주마고 했다
아니라고 했다
파이프에 갈매기를 꾹꾹 눌러 담아 피우는 그는
모자도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삼각 파도 모양의 넓은 모자였다
안경을 벗어 들더니 이 안경은 어떠냐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한쪽에는 구름이 다른 쪽에는 섬이 떠 있는 안경이었다
병 모가지를 쥐고 병째 한 입 쭈욱 들이켜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 P129
낙조처럼 독한 것이었다
작살도 맘에 들면 가지라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또 돛만 떼어갈 수 있으면 그리하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먼 바다도 불러주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발치에 벗어놓은 검은 장화가 출렁거렸다
거기에 손을 집어넣더니 무얼 끄집어냈다
문어를 주마고 했다
아니요라고 했다
주려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의 이 대화는 아마도 훨씬 더 길게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또한 거부의 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또는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제 시야를 가리는 것을 하나하나 거부할 때, 그는 그것들 속에 있으면서 또한 그것들 밖에 있는 것, 그것들을 다 합한 것이면서 또한 - P130
그것들이 모두 스러져야 오는 것에 대한 윤곽을 아련하게그려나갈 수 있다. 신현정은 지식이건 재물이건 축적된것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해묵은 길을 새 길로 갈 수 있다는것을 안다.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 그 발가벗은 육체로 느끼고 사랑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그의 것이다. 존경과성의를 바친 것만 그의 것이다. 인내한 것만 그의 것이다. 그 자유로운 개화와 사랑을 위해, 그것이 난생처음 거기있게 하기 위해, 그것이 한 이름으로 거기 있게 하기 위해, 소유하기를 거부한 것만이 그의 것이다. 신현정은 ‘그의 것이 죽음 뒤의 광휘가 되어 보일 때까지 인내한다. 그것을 신현정의 위대한 거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P131
신현정 시인은 뵐 때마다 서글서글하시다. 당신의 시를 읽으면 우락부락한 나도 벙긋벙긋해지고 상냥해진다. 당신은 낙타와 난쟁이와고래와 은숙이와 장수하늘소와 토끼와 칸나와 해태와 분꽃과 오리와같이 살고 있으니 대식구의 가장인 셈. 이 식구들에게 해와 별과 꿈을 모자처럼 얹어주니 멋스러움과 우주적 대창大昌이 있으시다. 당신은 부처님. 하나님과는 부탁하고, 투정 부리고, 호통을 치는 막역한 사이 당신 아니라면 누가 이 낙차를 감히 즐기겠는가. 선량하고 명랑하고 엄살도 떨 줄 아는 이 청량한 시심을 ‘나란히 가는 시심‘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당신은 당신의 행렬에 누구든 따돌림 없이 끼워준다. 남의 뜻에 선뜻 응해 다 들어주니 수순 그자체이시다. 무엇보다 아가의 마음처럼 반짝반짝 막 태어나는시심은 참 부러운 것이요, 우리 시사詩史에서 오랜만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갑갑하게 가두지 않고 꽃처럼 자꾸피어나려 하는 시들의 탄력을, 무궁한 호기심을 보라. 시집을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냅다 줄행랑을 놓고 싶다. 어디 구석진 곳에 숨듯이 앉아 시집을 펼쳐 들면 내 마음도 맨드라미처럼 활짝 피어날 것같다. -문태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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