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 P82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 P83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 P84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 P85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모터 수리공장에 일 나가던 전도사가 어느날 신학교시절에 알던 후배가 찾아올 것이니 좀 만나보라고 했다. 선배가 낯선 땅에서 개척교회를 열었으니 당연히 불원천리 위로차 온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전도사가 굳이 나를 부른 이유도 알 만했다. "애인을 찾아서 왔습니다. 경산에 있는 방직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대요. 주소도 전화번호도 아무것도 남기지않고 갔어요. 그 여자는 내가 지긋지긋하대. 날 피해달아난 거라구요......" 그러면서도 그는 사정과는 달리밝게 웃었다. 그 사람이 박영근 시인이었다. 그는 내가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았다. 그에게 사랑은 사랑일 뿐 그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떠한형식욕망도 조건욕망도 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사랑을 사랑할 뿐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관심이 - P90
없어 보였다. 그뿐 아니었다. 고통스런 현실을 말하면서도 시대적 아픔을 말하면서도, 슬픔을 과장하지도 아픔에 호들갑을 떨지도 감상에 빠지지도 궁상을 떨지도 구차스럽지도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대단히 철저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깊은 좌절에 빠졌던 것일까? 단순한사고방식일까? 그가 걸어온 길에 얼마나 큰 슬픔이 있었을까? 그는 또 무엇이든 조건과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그 자체‘를 손상하지 않고 곁에 두거나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 P91
삶은 의문투성이지만, 자본지배의 시대에는 그 의문조차 그리 순수할 수 없게 된다. 많은 질문들이 본질에서벗어나 자본의 가치를 생산한다. 왜 사느냐? 하는 질문도그렇다. 그것은 삶의 근원적 의문에서 나온 질문도, 존재의 철학적 질문도, 자기성찰적 삶을 요청하는 윤리적 질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은 음모적이다. 이것은 자본의 경쟁체제에 종속된 인간의, 그 행위결과의 공허함에던지는 잔인한 질문이다. 그것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표현하면서, 경쟁은 멈출 수 없으며, 이 질문에 답할 자격을 가지려면 끊임없이 뛰어라! 아직은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검열의 이 질문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추궁하 - P91
고, 몰아세운다. 이것은 자본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행위의 자기부정, 즉 물신화된 질문이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 추궁을 당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고, ‘그 자체‘의 외부로부터 온갖 권력장치를 끌어오고 도구적 창작물을 생산한다. 그가 대화에서, 또 그의 시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법은 좀체 없다. 왜?라는 질문은 외부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는 왜?가 아니라 전존재를 ‘그 자체에, 어떻게!‘ 실어갈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시인의 삶은 자본에 의한 인간존재의 물신화 과정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삶이었다. 그의 어떠한 일탈행위도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저항의 방식이었다. - P92
그러나 "민중은 내가 가야 할 미래"라고 하면서도 그는 극렬한 저항시는 쓰지 않았다. 왜일까? 저항해야 할 것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이미 물신화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세상의 부조리함을 인식했음은 물론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조차 허위의식에 빠져 있음을 보고 있었다. 그에겐 이것이종종 큰 슬픔이 되어 세상과 정면으로 대면하지 못하게만들었다. 건전한(?) 노동생활이 없는 시인의 삶 때문에 노동문학을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시인의 노동자성에 회의적 - P92
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정반대다. 그가 등단 이후 줄곧 노동의 희망과 투쟁과 좌절, 그리고 민중적 삶의 진정성에 대한 미학적 고투를 쉬지 않은 것은 물론, 노동에 내면화된 자본지배의 억압적가치화로부터 시인보다 더 깊게 더 멀리 탈주에 성공한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 시대 최고의 노동시인으로 그를 손꼽는 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노동계급의식을 가짐과 동시에 그 계급화로부터탈주해야 하고, 노동을 하면서도 동시에 노동의 판매자로부터, 자본이 구성한 삶과 가치 안에서 바로 그 가치화부터 절규하고 탈주하지 않으면 계급동일성에서 벗어날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고 계급해방을 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국가와 권력관계속에서 자신의 계급을 구성하고 다시 국가와 권력 장악을 통해서 자신을 해방해야 하는, 권력 원환(圓環)의 폐쇄회로에 갇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대립하여 분열되어 있다는 말이다. 노동은 노동계급 안에서가 아니라 노동 이상의 그 무엇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판매자 이상의 그 무엇에서만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누구보다잘 알고 있었다. "악기 공장/닫힌 철문 앞에서/원직복직 - P93
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 돌아볼 옛날도/훗날도 없는 텅 빈 시간"(「희망에 대하여」,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이라고 한다. 원직복직을 하고 나면 다음날부터 다시 그 지긋지긋한 노동의시간이 온다. 눈물겨운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은것일까, 반문한다. 이 과정이 부르주아국가를 전복하고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다를 바 없음은 현실사회주의에서도 보아온 것이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희망이라고 말하는가?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한다. "돌아볼 옛날도/훗날도 없는 텅 빈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죽은 노동의 시간을 말하는 동시에 죽음 후의 시간을 암시한다. 아직 탐사되지 않은 시간이다. 시인은 그곳까지 탈주하였다. 물론 시인의 절망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더 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 - P94
어떤 죽음은 너무도 생생하여 다른 죽음들을 삶과 혼동하게 만든다. 어떤 죽음은 어둠이 검음보다 더 명징하여 대낮을 빛바래게 한다. 너무도 가혹한 삶의 증거가 죽음의 영역을 무색케 하고, 고독과 절망의 비유가 비리디비리다. 살았을 적 박영근의 문학은 간절하고 고달픈 ‘삶의‘ 노동문학이었다. 이제 그가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시들을 읽자니 그의 문학은 벌써 ‘죽음 속‘ 노동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뗀석기,간석기, 긁개, 자르개, 도구는 일찌감치 있었으되 예술이 매장 이후 비로소 출현하는 것을 보면 비유는 정작 자연형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명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박영근을 예로 들며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죽음은 노동의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다. 그 전에, 노동은 죽음의 연장이 아니라 심화다.....
김정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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