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이해 못할 인간의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틀만 지나면 나는 서른두 살이 된다. 고작 서른둘이다. 얼마나 더 살아야,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생의 불가사의에 대해 의연하게 찡긋 윙크해줄 수 있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엄마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지않았으므로 피장파장이다. 연말은 이렇게 버틴다 해도 새해 첫날에는 집에 가야만 할 것이다. "그 아저씨 누구예요?"라고 곧바로 따지고 들어야 하나. "자주색 스카프 잘 어울리던데요"라고 빙빙 돌려떠봐야 하나. 어쨌거나 엄마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볼 자신이없다는 것만은 숨기지 못할 진실이었다. - P146

모름지기 시무식이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의지로 새로운 삶을살겠다고 의지와 열정을 활활 불태우는 장이 아니던가. 나 역시 첫 출근길까지만 해도 ‘새로운‘ 오은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기특한 욕망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으로 사장의 신년사를 경청하고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자 콘돔에 바람 새나가듯 절로 기운이 빠졌다.
그냥 느지막이 출근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을 서로 건네고, 신년맞이 특별 보너스 전달식이라도 좀 갖고, 점심으로는 새각오로 전투력을 다지라는 뜻으로 소갈비나 좀 뜯고는 일찌감치 퇴근하는, 아름다운 시무식을 진심으로 꿈꾼다. 그러나 사장의 연설은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 P152

도시의 방이란 무엇일까. 시골마을에서는 이웃에 가려면 언덕을넘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방과 방 사이, 집과 집사이는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물리적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며 늘 투덜거리곤 한다. 타인과 가까이 있어 더 외로운 느낌을 아느냐고 강변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언제나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줄 나만의 사람, 여기 내가 있음을 알아봐주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내 곁에 온 순간 새로운 고독이 시작되는그 지독한 아이러니도 모르고서 말이다.
컴퓨터의자에 앉은 태오의 등은 완강하고 딱딱해 보였다. 이럴 줄알았으면 방 두 개짜리를 얻는 건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걸터앉자, 이제 오롯한 내 공간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 화장실의 물 내리는 소리가 평소보다커다랗게 들려왔다. 도시의 방들은,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위에 위태로이 서 있다. - P18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 명제는 참일까? 물론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점점 더 힘이 든다. 빽빽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둘러선 숲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우리 회사 황부장에게는 백아흔아홉 가지의 나쁜 점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오후 네 시의 테러였다. 종일 아무얘기도 없다가 딱 오후 네 시만 넘으면 갑자기 호출해서는 새로운업무 처리를 지시하곤 하는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끝내라는 첨언은 차라리 애교스러웠다. 오늘 역시, 두어 시간 야근으로는 어림도 없을 만한 분량의 작업에 망연자실해 있을 때 유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은수, 뭐야? 어린애랑 살림 차렸다며?" - P183

나는 휴전을 선언했다. 태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딸깍, 걸쇠 잠그는 소리가 엽총의방아쇠 장전하는 소리처럼 터무니없이 커다랗게 공명했다. ‘비밀‘과 ‘연애‘는 서로 상냥하게 스며드는 단어다. 연애는 철저히 개인적인세계의 비즈니스다. 그러나 사귀고 있는 남자를 부모 앞에 데려가는것은 다르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주머니 속의 연애를, 광장에 세우겠다는 것이다. 공인을 받겠다고, 사회적 승인의 최초 단계를 통과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것이다.
나는 윤태오와 함께, 한낮의 태양이 내리꽂히는 광장 한복판에 나설 자신이 없다. 그리고 그에게 그것을 똑똑히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하다. - P189

우리가 달려가는 곳이 설마 절벽은 아니겠지? 재인은 서해안의 이름 모를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봄이 당도하지 않은 해변은 황량했다.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누가 나무 장승을 세워놓았을까. 다섯살짜리 사내아이 키 높이의 장승은 물이 밀려들 때는 바다에 잠긴채, 물이 쓸려갈 때는 몸을 드러낸 채 온종일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람이 휭휭 불어 머리칼이 휘날렸다. 버려진 검정색 비닐봉지도 춤추듯 나부꼈다. 바다 앞에 한 줄로 서서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때론 어떤 언어도 침묵을 압도하지 못한다.
서해안의 이름 모를 작은 해변 풍경 속으로, 우리들은 낡은 표지판처럼 묵묵히 잠겨들었다. - P279

"혼잔데요. 저 혼자예요."
나는 가만히 되었다. 안심 스테이크가 포함된 디너 코스를 주문하고, 하우스와인도 한 잔 시켰다. 나를 위해 이 정도의 작은 선물은 해줄 수 있었다. 비통할 것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다. 오랫동안 나는 온전한 내 힘으로 나를 벌어 먹였다. 그저 쉬고 싶었을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은 내 자발적 의지의 산물이다.
와인은 향긋했고 스테이크의 육질은 보드라웠다. 나는 태연한 포즈로 고기를 꼭꼭 씹었다. 눈물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불행하지는않다고, 간신히 생각했다. - P292

"오늘 뭐 했어?"
이렇게 묻는 당신. 당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 "밥은 먹었어?"라거나 "요즘 감기 무섭더라" 따위의, 별뜻 없는 안부 인사와 다를 바 없는 말이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무심한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순식간에 면도날로 턱을 베인 느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달라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오늘 내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기 어려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라. 오늘 한 일이 무어라고 자랑스레 떠들어대지 못한달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오늘 한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니까. - P295

끙, 들릴락말락한 신음을 목울대로 삼키며 아버지가 돌아누웠다. 딸에게 아버지는 최초의 남자이고, 아버지에게 딸은 최후의 여자라고 했던가. 내 인생 최초의 남자는, 신문에 나오는 ‘나쁜 아버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서 배다른 동생을 낳아오지도 않았고, 식솔들로 하여금 커다란 경제적 곤궁을 맛보게 하지도 않았다. 육체적 폭력을 사용한 일도 없다. 그것이 전부일까. 그렇다면 ‘좋은 아버지‘인가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 사이에는 얼마나 수많은 현실의 아버지들이 있는가. 나는 설거지통의 주걱을 꺼내들어 부엌 벽에 패대기쳤다.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소리와 함께, 흰 벽에 뿌연 물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P360

엄마가 식탁에 올린 음식은 냉이가 듬뿍 들어 있는 된장찌개였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가 만든 된장찌개의 맛을 평가하기에 내 혀는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버렸으니까. 지금껏 엄마가 만든 된장찌개를 모두 몇 번이나 먹었을까. 헤아릴 수 없는 그숫자들의 무게만큼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세월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차곡차곡쌓인다는 걸 알겠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 식구(食口)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구성원 셋은 한 톨의 대화도 없이, 오직 끼니를 때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처럼 열심히 밥을 먹었다.
김치를 집다가 엄마 쪽을 보았다. 엄마는 무엇인가를 어금니로 오래오래 씹고 있었다. 눈 아래 거뭇한 기미가 번져 있었다. 눈은 깊고 고요했다.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엄마의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 P361

이것은 결국 아버지와 엄마의 일이었다. 당사자인 그들이 직접 해결해야 했다. 결론이 어떤 방식으로 내려지든 나는 그저 인정하고 따르면 될 뿐, 애초부터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사춘기 때부터 주구장창 주장해왔으면서, 왜 부모의 인생이 그들의 것임을 몰랐을까.
암흑 같은 원룸의 스위치를 올리면서 갑자기 외로워졌다. 혼자 살기 시작한 뒤 이런 심란한 기분은 처음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가족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세상에 무수히 많은 1인 가족이 있다는 건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사회의 최소 단위는명백히 자기 자신일 뿐이다. 개인과, 개인과 개인과, 개인으로 이루어진 세계.
나라는 개인은 제도 안에서 비껴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해왔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독이라는 허기를 참지 못하고 체온을 나눌 누군가를 찾아 주파수를 곤두세운다. 개인과 개인이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 제도가 탄생하는 그 모순을 뼛속깊이 겁내면서도. - P362

서른두 살 봄밤. 나는 ‘스노우 펠리스 205호에 홀로 누운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저 천장을 방바닥으로 쓰던 여자, 몇 달 전 쓰러진 채 발견되었던 305호 여자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그녀의 인생도나처럼 까끌까끌했을까. 언제부턴가 삶은, 아래로 쭉쭉 미끄러지기만 한다. 서울시 마포구에 거주하는 1975년생 여성들을 무작위로추출하여 ‘현재 가진 것‘과 ‘장래성‘의 항목을 중심으로 심사한 뒤, 순위에 따라 한 줄로 쭉 세우는 상상을 해본다.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을 때,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나 보다. - P363

오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친구들을 따라 점을 보러갔을때, 점쟁이는 동쪽으로 가면 귀인이 나타난다고 했다. 솔깃해지는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동쪽으로 가면 서쪽 남쪽 북쪽은 어떡하라는거지? 기회란, 동서남북 사방에 모래알처럼 그득그득 널려 있는 건줄로만 알았으므로 나는 오만하게 투덜거렸다.
반드시 지금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묻어나던 자신감의 그림자를 기억한다. 골라야 할 품목이 너무 많아질식해버릴 것 같다고, 선택을 미루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지껄여댈 때에도 역시 그 말들 속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확고한 암시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착각의 거울이 와장창 깨져버린 지금, 사방이 가로막힌 광 - P363

장 한가운데 갇혀 있는 느낌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떤다. 이대로 조금더 지체했다가는 안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둔 마지막 패 하나마저 시효를 잃을 것이다. 꽁꽁 숨긴 그 마지막 패의 이름이, 정말로 ‘결혼‘인지는 묻지 마시라. 인생이란 어차피 불분명한 게임이니까. 과감히 질러야 할 순간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터질것 같다. - P364

우리는 입을 다문 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때론 타인의 상처를일부러 건드려 파헤치지 않는 것이 이 도시에서 통용되는 우정의 한방식일지도 몰랐다. 우리들은 어쩌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갈까.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시간을 지난 적이 있다. 대학 졸업반 무렵의 늦봄이었다. 우리는 캠퍼스 한구석의벤치에 조르르 앉아 꽃이 지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내년 이맘땐 - P438

다들 어디 있을까?" "그러게 말이야. 안 그래도 심란한데 꽃은 왜지고 난리야." 그때 우리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이 너무도 드넓게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큰 소리로 떠들고, 짧게침묵했다. 침묵의 찰나는 깊었다.
해마다 어김없이 봄꽃은 피었다 지고, 우리는 여전히 막막하게 흔들리고 있다. 다시 십 년쯤 뒤 우리는 또 어딘가에 모여 꽃이 지는이유를 추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 모두 조금. 아주 조금씩은 달라져 있겠지. 꽃이 지는 새로운 이유를 발견해냈겠지. 그렇게 믿어보기로 한다. - P439

불현듯 기습적인 허기가 느껴진다. 포장마차의 휘장을 걷고 들어선다. 구부정한 자세로 떡볶이를 먹는다. 별별 일이 다 일어났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곤 하는 이 도시에서,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찍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조그만 여자의 모습은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다. 반투명한 비닐 창밖으로 거리가 어룽져 보인다.
내 곁에 다가왔다 떠난 이들이 나에게서 무엇을 읽고 갔는지 나는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단 한 가지. 그들이 기억하고 있을 그어떤 나의 얼굴도 오롯한 오은수는 아니라는 것. 완전한 오은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여기, 맵고 달콤하고 뜨겁고 말캉한 떡을 묵묵히 씹어 삼키고 있는 나의 심장은 1초에 한 번씩 진지하게 뛰고 있다. - P440

길 건너 스타벅스에 들어가 카페모카를 주문한다. 문득 웃음이 난다. 1,500원짜리 떡볶이로 저녁을 때운 주제에 후식으로 두 배가 넘는 가격의 커피를 마시다니. 통장 잔고를 헤아려보려다 그만둔다. 창가 자리가 나를 위해 운 좋게 비어 있을 리 없다. 매장 한 구석 작은 원형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는다. 쟁반 위에, 머그잔이 달랑 하나뿐이다. 혼자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실감난다.
서른두 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아스팔트 위로 돌연 굵은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거리를 걷던 행인들이 일제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쳐 든다. 모두들 오늘 - P440

의 일기 예보를 충실히 숙지한 채 길을 나섰나 보다. 거리는 곧 색색의 우산들로 물결을 이룬다. 나에게는 우산이 없다.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사는 것은, 오로지 나뿐인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다.
곤두박질치듯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무늬 없는 7cm 검정 하이힐이 주저하듯 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내려다본다.
빗속은 생각보다 아늑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팔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다. 버스 정류장에서 발을 멈춘다. 저녁의 정거장, 길들은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것이다. 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 - P441

작가의 말


이것은 나의 도시에 사는, 나의 은수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의 도시에 사는, 당신의 인물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당연하다. 나는 요즘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2005년 늦여름부터 2006년 초여름까지 은수와 함께 지냈다. 누군가와 헤어져야 할 때 억지로라도 태연을 가장하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맨송맨송한 얼굴로 보내기 힘들다. 덕분에 여러 가지를 버틸 수 있었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내 이름이 아니라 오은수의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신 권신아님과 문학과지성사 식구들에게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2006년 7월
정이현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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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에도 순서가 있듯, 삶도 그럴 것이다. 완벽한 메이크업을 마치고 난 얼굴, 그것을 진짜 내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으로 한 겹 가리고 나면 내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 고개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이 점점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모습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손바닥으로 황망히 얼굴을 가렸다.

성장은, 긍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다. 고통을 통해 정신의 키가 한 뼘 자랐으며 보다 성숙한 인간에의 길에 한발 다가섰다고 믿고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면 마음이 좀 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P42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겨진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이 - P43

단단한 제도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 다니면서? 그러다 다른 물고기나 산호초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생긋 한번 웃어주고는이내 제 길을 가는 거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미련두지 않고! 물론 그런 삶이 행복할지는 미지수다.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소통을 원하고 누군가와 안정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내안의 질긴 열망은 또 어쩌고?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도 저렇게도할 수 없는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아, 하지만 예단은 금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냥 이대로 한번 가보는 거다. 미리 준비하고 예측한다고해서 삶이 어디 호락호락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주던가. 그리고 내가 원했던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지금 여기 도착해 있지 않은가. 나는 단호하게 와인 색 립스틱을 집어 들어, 입술에 발랐다. 안 어울리면 어떠랴. 내일은 베이지핑크를, 모레는 단풍잎 같은 빨강을 바르면 된다. 아니면 까짓것. 깨끗이 지워버리면된다. - P44

어느 쪽의 내가 이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건 기나긴 어제가 드디어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침 여덟 시. 출근 준비를 모두 마쳤다. 또다시 새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 그러나 어제와 다른 하루.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굽 없는 갈색 스웨이드 단화에 발을 꿰었다. 이 구두는 오늘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줄까? 그 미지의 시간을 향하여 나는 용감한 척, 걸음을 내디뎠다. - P45

사무용 의자에도 계급이 있다. 그 자명한 진리를 미처 모르던 순진무구의 시절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다.
우리 회사의 의자는 모두 네 개의 등급으로 나뉜다. 사장실 의자, 이사실 의자, 부장들의 의자, 그리고 과장급 이하 평사원들의 의자. 목 받침이 없으며 우레탄 재질의 팔걸이를 가진 중국산 사무용의자에 앉아 나는 종일을 보낸다. 가끔 외근이 있긴 하지만, 한 달에 사나흘 정도는 마감이라는 명목 아래, 아침 아홉 시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엉덩이를 뭉개고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사무직 노동자의 평균 노동 시간에 비해 결코 적은 양은 아닐것이다. - P54

-은수야..... 실은 나 오늘 회사 관뒀어.
-헉. 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유희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만한 중견기업 전산실의 과장이었다.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고 공언하고 다니는 만큼 그녀는 우리 셋 중에 모아놓은 돈도 제일 많고 승진도 제일 빠르며 연봉도 제일 높았다. 그 번듯한 회사를 그만두다니. 어디 더더욱 번듯한 데로 스카우트라도 된 게지.
-나, 뮤지컬배우가 될 거야.
-....................................
저 끝없는 말줄임표야말로 이 순간의 솔직한 심정이다. 뮤지컬 배우라. 멋지다. 멋져. 그렇지만 31세 미혼 여성의 장래희망으로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주부 가요 열창이나 알뜰 주부 선발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꿈이 현실적일 것 같다. 물론 인정한다. 내 친구 남유희, 노래 잘한다. 댄스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었다. ‘가무‘가 특기는 될망정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십 년 전이면 모를까, 두 달 뒤면 우리는 서른두살이었다. - P72

그녀는 벌써 뮤지컬배우 지망생을 위한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곧 재즈댄스와 연기 레슨도 받을 거라고 했다. 나이는 좀 많은 편이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생 경험도 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겠느냐며 벅찬 희망을 늘어놓았다. 모니터 가득 펼쳐지는 유희의 옹골찬 계획을 나는 멍한 눈길로 좇았다. 재인의 결혼 발표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둔하고 벙벙한 충격이 숨골을 내리눌렀다. 재인과 유희는 미친 게 아니다. 재인은 재인대로, 유희는 유희대로 자기만의 길을 쉼 없이 찾아가고 있는 거다. 오직 나만 조그만 웅덩이의 썩은 물처럼 이 자리에 멈춰 있다는 자괴감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태오에게 ‘좋아요‘라는 답장을 보낸 건, 
유희가 ‘인생에 대한 용기!!‘를 전염시켜주어서일까? - P73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인간 오은수도 지금,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인터넷 즐겨찾기의 맨 위에 등록해놓고 자주 들어가보는 곳은, 자동차 미니쿠퍼의 웹 사이트다. 미니의 앙증맞은 자태를 담은 사진이 모니터 가득 일렁인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팽팽히 조여든다. 차 옆에는, 열 가지 색깔별로 칸칸이 나누어진 다트판이 놓여 있다. 그중 검정색 칸에 마우스를 올리면, 마술처럼, 자동차가 블랙으로 변한다. 마우스를 조작할 때마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양 자동차가 한 대씩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누구도 두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참으로 잔인한 아이디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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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보시다시피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다만 이제 스무 살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떡국 몇 그릇 더 먹었다고 세상이훼까닥 바뀔 리 있겠는가. 열일곱이나 스물이나 어디 가서 여자애‘ 소리 듣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소녀 시절도 살아보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원하면 돈 벌 껀수도 얼마든지 널렸고 급할 땐 좀 치사하지만 울어버리면 된다. 아저씨 시대보다. 할머니 시대보다 솔직히 짱 멋지지 않은가? 그 이름도 찬란한 소.녀. 시. 대! - P95

그녀의 틈새,
눈을 감으면 그녀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린 꽃잎에 번성하는 목화진딧물의 냄새, 갓 말린 바다 냄새, 처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 냄새, 혀끝이 열리고 온몸이 아리아리해지는 냄새,
태초의 냄새. 세상의 모든 냄새.
너의, 너 자신의 냄새. - P123

잘못 눌렀습니다. 비밀번호 네자리를 눌러주세요.
그녀의 생일, 너의 생일, 그녀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 너의 집전화번호 뒷자리...... 모두모두 그녀가 지정한 숫자가 아니다.
너는 암호를 풀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컴퓨터를 켜려다 그만둔다. 메일은 삼십 분 전에 확인했다. 그녀가 그사이에메일박스를 확인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아니다. 삼십 분은 충분히 긴 시간 같기도 하다. 너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녀의부재는 예고 없이 내린 폭설처럼 네 영혼을 지극한 혼돈으로 덮어버렸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악(惡)의 무수한 가능성들 때문에너는 한없이 불안하고 절박하다. - P131

너의 생리대에는 이제 희미한 연갈색 얼룩도 묻어 나오지 않는다. 한껏 부풀어오른 자궁 점막이 떨어져내리고 그 벗겨진 자리에 보드레한 막이 새로 돋을 채비를 할 동안까지도 너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너는 한 장의 일러스트도 그리지 못했다. 영어 교재 삽화의 마감 날짜도 지키지못했다. 출판사는 너와의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 당연하다. 계약이란 그런 것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기면 다른한쪽에서 응분의 조치를 취한다. 그녀와 너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으나, 어떤 계약도 맺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너에게 알릴 의무는 애초부터 없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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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없을 것 같은 순간이 닥쳐와도 돌아가거나 피해 가는 길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었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성을 발휘한다면, 어쩌면 숲속에 숨겨진 지름길을 발견하게 될지도몰랐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참고 기다리며 지키면, 결국은 달콤한 열매를 얻게 된다. 나는 어둠침침한 계단을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갔다. - P17

 혜미의 아버지는 서울 시내 요지에 다섯 채쯤의 빌딩과열 채쯤의 다세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혜미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다고 둘러댈까 하다가 그냥 옆자리에 올라탔다.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었다.
내가 조그만 무역회사의 여사무원이 되어 나이 들어가거나, 물간 생선회와 식은 LA갈비찜이 포함된 싸구려 뷔페를 피로연으로 결혼식을 올릴 때, 혜미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밀라노에서 패션 공부를 할 수도 있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십평짜리 빌라트에 신혼 살림을 차릴 수도 있었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했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P25

공업용 비닐로 덮인 실내에서는차가운 금속과 덜 마른 페인트의 냄새가 났다. 조심스레 시동을 걸어보았다. 엔진 소리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대한민국에서 배기량 2,000cc급 자동차의 오너가 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2002년형 진주색 EF 소나타 골드. 그녀는 자신의 새 차가 마음에 들었다. - P42

차장님, 이거 비밀인데요. 권이사랑 선미. 글쎄 그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았대요. 나 참, 회사 땡땡이치고 지금도 같이 있는 거 아닌지 몰라. 그녀는 흥미롭게 눈망울을 반짝였으나 시간 관계상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브랜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녀와 브랜든은 본사의 수석 부사장을 공항으로 영접 나가야 했다. 매끈한 서류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우아하고 완벽했다.
은색 렉서스의 옆자리에 올라타면서 그녀는 저 멀리 세워진 자신의 자동차에 홀낏 시선을 주었다. 차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2002년형 EF 소나타, 사 년 연속 부동의 베스트셀러1위, 대한민국 도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제 겨우 천 킬로미터를 주행했을 뿐이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 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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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예술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주는것이 아니다. 대상과 마주해 놀라거나,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감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지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는데, 이제는 코로나 사태까지 덮쳤다.
대면 수업은 불가능하고 많은 미술관, 영화관도 폐쇄됐다.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작품을 감상한 뒤 소감이나 의견을나눌 수 없게 됐다. 이런 식으로 ‘예술‘을 가르칠 수 있을까? 어느 동료 교수(소설가이기도 하다)가 교육에는 ‘육감‘과 ‘육성‘이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정말이지 그렇다.
그렇긴 하나 나는 D군의 리포트에서 다소 위로를 받았다. D군은 위에 인용한 글을 다음과 같이 이어 나간다. "만약 내일이 세상이 끝나 남은 24시간을 좋아하는 데 써도 된다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싶다. 그리고 미술관에 가서 르네상스 시대의 정열적인 작품들을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싶다." - P406

"지금 또다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지난 9월 11일 일본 펜클럽에서 발표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긴급 메시지‘는 이 한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얼마나고독하고 두려운 일인가. 나는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도늘 수심에 차 있던 그의 표정을 떠올린다. 자신이 인터뷰한 수백명의 ‘작은 사람들‘(서민)이 그랬듯, 그 자신이 끝없이 이어지는고난과 고뇌 속에 있는 것이다.
나와 그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두 차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해 대담을 했다. 첫 번째는 2000년 <파멸의 20세기-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와 서경식>), 두 번째는 알렉시예비치가 노벨상을 수상한 이듬해인 2016년 (<마음의 시대‘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서>)으로, 이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지를 함께걸었다. - P409

2016년의 대담 때 알렉시예비치는 이야기에 열중하다 그만약 먹는 시간을 놓쳐 고통스러운 듯 대화를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다. 지병을 앓던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런 그의 문을 지금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두드리고 있다. 나는 만년을 나치의 압박과 감시 아래 보내다가 나치 독일의 항복 직전에 고독하게 병사한 여성 예술가 케테 콜비츠를 연상하기도 했다.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지금은 벨라루스 펜클럽의 회장이자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다 탄압받고 국외로 피신한 야당 후보자와 시민 단체 대표들이 설립한 ‘조정평의회‘라는 조직의 간부이기도 하다. 9월 9일 발표된 그의 ‘긴급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P410

"이제 ‘조정 평의회‘의 간부회에는 나와 생각을 같이하는 벗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모두 옥중에 있거나 국외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지막 한 사람 막심 즈나크가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나라를 탈취하더니 지금은 우리의 가장 좋은 사람들을 강탈해 가고 있다. 그러나 강제로 앗아 간 동료들 대신에다른 몇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들고일어난 것은 ‘조정 평의회‘가 아니다. 나라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연합 국가들 사이에 끼인 벨라루스에서는루카셴코 대통령의 강권 정치가 1994년 이래 26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국내 출판을 금지당하는 등 언론·사상의 자유도 제한되었다. - P410

유럽행 비행기가 우랄산맥을 넘어갈 때면 눈 아래로 평탄한 숲의 바다가 펼쳐진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나는 그 숲의 바다가눈앞에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끝없는 고뇌의 수해樹海다. 당장 20세기에 독소(독일-소련)전쟁의 주된 전장이었던 그곳에서는 마을들이 불타고 무수한 사람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유대인 주민에 대한 학살도 있었다. 역사가 티머시 스나이더 TimothySnyder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해, 북으로는 발트 3국, 남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블러드랜드‘(유혈지대)라 명명했다. 그곳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 알렉시예비치의 저작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이걸로도 부족한가‘ 하고 말하듯 가득 들어차 있다.
2016년의 대담이 끝나갈 즈음 나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100년이 걸리더라도 좋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고 말합니다. 나는 거기에 경외심을 느낍니다. 이념이나 이상을 단념한 다채 이익이나 욕망만 추구하는 상황이 러시아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계속되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미래를믿는지요?"
그는 말을 고르고는 대답했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갈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에 대한 나의 답입니다. - P412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작은 일을 해 나가며 선한 쪽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히 말해 나는 그의 이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늘 "선한 쪽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한국과 벨라루스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지금 만일 그 사람들이 절멸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희망 자체의 절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알렉시예비치의 메시지는 끝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나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오랜 관습에 따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어째서 당신들은 침묵하는가? 지원의 목소리가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작은, 긍지 높은 국민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고도 어째서 침묵하는가? 우리는 지금도 당신들의 형제인데 말이다. 우리 국민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합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침묵하는가?"라는 물음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게만 던져져 있지 않다. - P413

아. 세계는 얼마나 무자비한가. 나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연대의 뜻을 전하는 짧은 메일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이렇게나 멀리 떨어진 극동의 땅에 무력하나마 당신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가 있다. 그것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F도 연대의 메일을 보내도록 힘을 실었다.
미얀마, 벨라루스, 홍콩....... 손 닿지 않는 세계 곳곳에서, 서로 만날 수도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의 고뇌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고뇌에 ‘공감compassion‘하는 이는 해결되기 어려운 고뇌를 떠안고, 자신의 심신마저 상처받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감‘ 같은 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공감‘하게 되는 게 인간이 아닐까. ‘연대‘하려 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그런 정신의 기능까지 포기할 때 ‘비인간화‘가 완성되고 ‘전염병‘이 개가를 올릴 것이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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