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염상섭


X회사 이층에서 하물계 荷物係주임 나리가 감숭한 윗수염 위에 뭉툭한 큰 코를 얹어놓고 또 그 위에는 검정 대모테 안경을 끼어놓고서, 인천 운송점에서 도착한 하물표를 들여다보며 주판질을 하고 있으려니까 따르릉따르릉 하는 소리가 뒷구석에서 나더니,
"녜, 녜, 그렇습니다. 어디세요? ....... 글쎄 누구세요? ...... 녜에. 그러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전화를 받던 아이 녀석이 시룽대는 소리로 말끝을 길게 빼다가 툭재치는 어조가 저편이 여자인지 놀리는 수작 같다.
"이주사 나리, 전화 받읍죠. 급한 전화랍니다."
여드름바가지의 사환 아이놈은 달뜬 목소리로 한마디 외치고 나서, 저편에 앉았는 출하계出荷係주임인 김주사를 바라보고 콧날을 으쓱한다. - P17

"가다간 이런 일두 있어야 살 자미가 있는 거야."
아씨의 신기가 이렇게 좋기란 결혼 이후에 처음일 것이다.
"그래 아무 소리 없이 내놉디까?"
"마침, 아들두 나와 있겠죠. 영감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전화를 안 내놓거나 하면 돈만 뜰까봐 겁은 나구, 아들은 못 믿겠구 해서뒷구멍으로 알아보느라 이리 직접 편지를 했던가봅니다. 그러나 아들이 오백원에 흥정이 된 거라고 고집을 부립디다마는, 그럼 무르자고 야단을 쳤드니 결국 영감이 수그러지드군요. 칠백원이래두 저희는 이가 되기에 선뜻 또다시 이백원을 내놓겠지."
"흥, 자식이 떼먹은 것이니까 창피한 생각도 들어서 내놓은 것이겠지만, 그 영감 결국 채홍이에게 아들의 해웃값 무리꾸럭해준 셈이군."
하고 슬며시 아내더러 들어보라고 이런 소리를 하였다.
"그럼 채홍이 집 김장은 김주사가 해줬구려? 흥, 그래?"
인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이 아내는 샐쭉 웃다가,
"여보, 우리 어떻게 또 전화 하나 맬 수 없소?"
하고 옷도 채 못 벗고, 턱밑에 다가앉아서 조르듯이 의논을 한다.
남편은 하 어이가 없어서 웃기만 하며 아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 P41

염상섭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돈‘에 대한 구구한 설명과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는데, 소설이란 결국은 세속의 산물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전화‘는 개발독재시대였던 1970년대까지도 특권의 상징이었는데, 192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라면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추첨을 통하여 ‘매어놓게‘ 된 하물계 주임의 집에 처음 걸려온 전화가 고작 기생의 것이어서, 부부싸움으로 소설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전화‘라는 이 새로운 물건을 누릴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상태로 생활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면서 그것을 남에게 되팔아넘기고 약간의 시세차익을 얻는데, 주인공의 아내가 ‘어떻게 전화 하나 또 놓을 수 없느냐‘고 조르면서 소설이 끝난다. 식민지 부르주아가 누리는 풍족한 일상이라고 해봤자 이렇듯 시시껄렁하기만 하다. 부르주아였던 발자크의 냉정하고 정직한 현실주의적 시선에 대해, 엥겔스는 "바로 이들 귀족들을 그릴 때 그의 풍자가 더 예리해지고 아이러니가 더 신랄해졌다"라고 말한 것을 읽은 생각이 난다. 염상섭은우울한 시선으로 찍은 퇴색한 사진 몇 장을 늘어놓음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해놓고 있다. - P47

쥐불鼠火
이기영


며칠째 연속하던 강추위가 오늘은 조금 풀린 모양이다. 추녀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내린다.
바람이 분다.
그래도 정초라고 산과 행길에는 인적이 희소하였다. 얼음 위에 짚방석을 깔고 잉어 낚기로 생애를 삼던 차첨지도 요새는 보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강 위에는 벌써 언제 온지 모르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갓모봉의 험준한 절벽 밑을 감돌고 다시 편한‘ 들판으로 흘러내린 K강은 마치 백포를 편 것같이 눈이 부신다. 간헐적으로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풍旋風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올라간다. 광풍狂風은 다시 강상백설을 후려쳐서 강변 이편으로 들날린다.  - P49

「쥐불」은 이기영이 2차 카프 검거 선풍으로 옥고를 치르기 전에 쓴 중편소설이다. 이를테면 그의 「쥐불」과 「고향은 카프 문예운동을 선언한 이래 비로소 관념이나 이론이 아닌 작품으로 당대를 형상화한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1933년 무렵은 앞서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좌우합작운동이던 ‘신간회‘가 해체되었으며, 윤봉길의 상해거사가 있었고, 전국적인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총독부는 치안유지법 개정으로 삼천여 명을 구속했다. 그리고 미곡 생산 통제를 위하여 농촌갱생운동신생활운동을 실시한다. 유신이란 단어도 그랬지만 내가 1970년대에 예비군으로 겪은 ‘국민교육헌장‘ 암송은 선배들의 일제시대 ‘교육칙어‘ 암송에 해당되고, ‘새마을운동‘은 ‘신생활운동‘과 흡사하다. - P125

「쥐불」은 돌쇠라는 주인공이 동네 청년들과 정초에 노름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사실은 소 판 돈을 갖고 있던 이웃집 응삼이의 돈을 따먹으려고 꾀었던 것이다. 응삼이는 사람이 모자란데다 이쁜이라는 이름처럼 고운 아내를 가졌고, 그녀는 속으로 돌쇠를 좋아한다. 면서기 원준이는 자기가 탐내는 이쁜이의 속내를 눈치채고 유지들을 선동하여 마을회의에서 돌쇠를 신생활운동을 저해하는 타락분자로 몰아세우고,
돌쇠는 자책과 함께 어느 지식인 청년의 도움으로 유지들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소작농의 현실을 말한다. 지식인의 등장 - P125

과 유부녀인 이쁜이와의 정분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여도, 작가는 민중의 부정적인 이중성을 작품에 그대로 까발림으로써 당시의 농촌사회를드러낸다.
‘쥐불놀이‘는 해동 무렵에 한 해 농사의 밑거름과 해충구제를 위하여 논밭에 불을 지르는 일종의 정화 행사인데, 아마도 그뒤에 씨를 뿌리면건강한 알곡이 열릴 것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다른 신경향파 작가들의 지옥도 같은 생활상이나 경직된 투쟁의 교훈 없이 살아 생동하는 사람살이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기영은 그의 「창작방법 문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P126

현재에 있어서, 문학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은 대개 소시민적 인텔리층 출신이므로, 그들의 제작하는 작품이, 필연적으로 인텔리적 취미를 띨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르문학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문학이 되는 이상, 모름지기 대중성을 가져야 할것이 아닌가? 더구나 문화의 정도가 얕고 전 인구에 문맹이 대다수를 차지한 이 땅에서는 그럴수록 통속적이고 대중적여야 할 것 아닌가?(동아일보, 1934.6.4.)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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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p.67

대보름


홑이불 같은 구름 헤치고
정월 대보름달
둥실 떠올랐다
연을 시집보내는 애들도 없고
지신밟고 논둑 고사 지내는 어른도 없다
쥐불놀이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부럼을 깨든 단단한 이빨들은
어디서 쓰디쓴 삶을 깨물고 있는지
귀 밝은 술 나 혼자 마신다

갈 테면 다 가고
뺏을 테면 다 뺏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느냐
혼자라도 오곡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 짐 할 테다 - P34

하늘은 맑은데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보름달
물먹었다
올해도 물풍년은 틀림없겠다 - P35

모범생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몸으로 글자를 익혔다
아주 천천히

이제 몸은 경전이 되었다
걸어가는 모습도 글자가 되어
앞으로 갈 때는 ㄱ자가 되고
누우면 ㄹ자가 된다
서툴게 익힌 글자가 서 있으면
자꾸 뒤로 꺾어진다
몸의 기억은 완고하여 한 번 습득한 글을
결코 놓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에서
묵묵히 복습을 하는 사람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첫눈이 지운다 - P43

동행


그녀는 졸면서 국자로 갯물을 떠서
꽃게 등에 붓고 있다
졸음을 참느라 닫혔다가 간신히 열리는 눈꺼풀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손놀림
배 멀미에 차멀미까지 겹친 꽃게는
뽀글뽀글 힘겹게 바다를 토해낸다
생生이 죽음으로 가는 출발이라고 한다면
꽃게는 지금 생의 종점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바다를
몸으로 지우는 작업을 하는 중일 게다
그렇다면 졸린 눈을 끔벅이며
꽃게 등에 갯물을 떠 붓는
시장통 늙은 여자의 손놀림은
어떤 기억을 지우려는 반복일까
죽음을 기다리며 엎드린 꽃게처럼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몰릴테지만
그때 담담히 자기 생生의 모든 것을 지우려는
사람 - P44

몇이나 될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 발꿈치 아래
바다를 버리고도 의연한 꽃게가
열 개의 발을 오므리며 합장을 한다 - P45

냉이꽃


참으로 모질기도 하구나
오고가는 길섶에
밟혀 죽은 줄 알았더니
겨우내 얼어 죽은 줄 알았더니
납작한 이파리마다
어느새 푸른빛 띄우고
모가지 길게 뽑아
눈물겨운 밥사발 가장자리 눌어붙은
밥풀 같은 꽃잎
몇 개 달고
天下의 봄을 호령하는
너는 - P56




한사발의 밥을 먹고 누는
한덩이의 똥
반드시 흙에 누어야 되리

그 똥
맛난 밥이 되어
살찐 흙
우리에게 고봉밥 한 사발 담아 주리니

밥이 똥이고 똥이 흙이고 흙이 밥이고
그 밥
달게 먹고 땀 쏟는 사람
비로소 흙을 닮은 사람 되리 - P66

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 P67

못자리 하던 날


앞산 진달래 혼자 붉어 혼자 지고
황사 바람 속 울던 뻐꾸기 어디론가 날아갔다
일터 잃은 사람들 한숨이 거리를 메우는 오늘도
신문을 꽉 채운 구역질나는 정치 놀음
밭둑 개나리마저 노랗게 질렸다

빼앗지도 뺏기지도 않는 그런 땅에서
더불어 살고 싶은 날
논 한 배미 있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
그 고마운 땅에
볍씨 한 움큼씩 뿌리면서
이 어린것들이 캄캄한 세월 틈에
어찌 뿌리 내려 자랄까
근심되는 하루
누런 들판 참새 떼 쫓는 행복을 꿈꾸면
고달픔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P70

새참 때
옛날처럼 싸라기를 빻아
쑥개떡을 빚어 내오신 어머니는
무논 넘치는 개구리 울음은
마른 봄 판 배곯아 죽은 어린 넋이라 하시며
눈시울 붉히는 저만치
四月, 답답한 마파람
구부러진 논둑에서 쉬엄쉬엄 불었다 - P71

햇빛 한 줌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잿빛 무거운 구름 뚫고
칼날바람에 꺾이지 않고
낮은 추녀 밑에
쭈그리고 앉아
마늘씨를 쪼개는
거친 손등 위에
잠깐 머물며
기죽지 말고 살라고
속살거리고
사라지는 - P116

정낙추 시집 「그 남자의 손(애지, 2006)은, 최근 우리 시가 현저하게 망각하고 있는 음역(音域)을 선명하게 복원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태작이 거의 없는 한결 같은 집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어맨다. 그는 태안에 살고 있는 농부이자 시인이다. 그로서는 첫 시집이 되는 이번 작품집은, 이러한 그의 구체적인 농사체험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상처들을 채집하면서도, 그것들을 깊은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과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주류 미학에까지 다다랐다가 최근 들어급격한 담론적 소강 상태를 보이는 우리 시대의 ‘농민시‘의 한 전형을 만나게 된다. - P117

시집 맨 앞쪽에 실려 있는 시편들은, 시인이 품안에 품고있는 가장 근원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넉넉하고 따뜻한 대지적 긍정에서 발원하여, 생명에 대한 경이와그 생명을 안아 기르는 섬세한 마음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구체적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시집 전체 속으로 아련하고도 아프게 번져간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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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추

1950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1989년부터 지방문학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 내일을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시인의 말


다섯 마리의 일소를 부리다가 푸줏간으로 보냈고

세대의 경운기를 몰다가 고물상으로 넘겼다.

그래도 땅은 늙지 않는다.

이제 내 차례다

태안모항에서
정낙추

단식중인 대나무 같은 낙추 형님은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삽니다. 흔들림의 자리에서 자신의 발자국에다가 씨 뿌리고 가꿉니다. 세상붙이 짠한 심성으로 창을 열고 소박함으로 외투 삼고 결연함으로 낫을 벼리는데 하여 그에게 딱 맞는 호칭이 이 땅의 옳은사람이요, 옳은 시인입니다.
오늘도 형님은 불 놓은 들판을 깊게 바라보다가 차마 어쩌지 못한 마음으로 시한편 이부자리처럼 덮어주고 있을 겁니다.
한창훈(소설가)

정낙추는 진짜 농사꾼이다. 주말에만 빠꿈이 흙을 찾는 농사체험가가 아니란말이다. 게다가 그는 서해 뻘물을 끓여 자염을 만드는 소금장수다. 생명을 키우고싱거운 세상에 간도 맞춘다. 그가 삶의 질곡을 눙치거나 두툼한 해학으로 조선구들장을 놓을 때마다, 나는 명천 이문구의 소설 속 장삼이사張三李四)를떠올린다. 그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의 오기와 배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생명에 대한 오체투지와 끝없는 쓰다듬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시집을 낸적 없으나 사람들은 그를 큰 시인으로 우러렀고, 수렁배미와 개펄에서 늘 소금꽃이나 피우고 있었건만 우리들은 그를 당대의 어른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저당산나무 한 그루가 한 마을 온 집안의 구들장 밑에 뜨거운 뿌리를 서려두고푸르게 숨쉬는 것과 같음이라. 어찌 그의 우람하고 두터운 말씀에 작디작은 내 펜촉 보습을 들이 밀 수 있으랴. 십수 년 동안, 한창훈 유용주 이경호라는 풋것들과 진달래빛 노을을 그러안고 망연해 하던 서해의 장관을 떠올릴 뿐이다.
이정록(시인)

득도得道


봉지 속에
한 사내가 있다
꽃 떨어지자마자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
얼마의 내공을 쌓았기에
독방에 갇혀서도
부처님 몸빛보다 더 찬란할까

봉지를 벗기자
눈부신 가을 햇살이 황금빛에 튕겨 깨진다

몸 안 가득 채운
단물은
사내의 땀방울이다 그리움이다
세상에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고 고인
눈물이다

눈물이 매달린 배 나뭇가지 사이에서
사내가
잘 익은 자기 얼굴을 웃으며 따고 있다 - P11

갈꽃비


아버지께서 갈꽃비를 만드신다
지난 가을
당신처럼 하얗게 늙은
갈대꽃을 한 아름 꺾어 오시더니
오늘은 당신 몫의 생애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묶듯이
갈꽃비를 만드신다

나이 들어 정신도 육신도
가벼워진 아버지와 갈대꽃이
한데 어우러져 조용히 흔들린 끝에
만들어진 갈꽃비
평생 짊어진 가난을 쓸기엔 너무 탐스럽고
세상 더러움을 쓸기엔 너무 고운
저 갈꽃비로
무엇을 쓸어야 할까 - P12

서러운 세월 다 보내신
아버지의 한 방울 눈물을 쓸면
딱 알맞겠는데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으신다 - P13

감기


늦가을비 맞으며 불청객이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
독한 소주 한 잔에
고춧가루 푼 뜨거운 콩나물국을 대접해도
돌아가지 않고 곁에 누워
일년 농사 얘기나 하자며 자꾸 조른다

빚 얻어 빚 갚고도 모자라
가을마저 저당 잡힌 몸뚱이
으실으실 춥다가 펄펄 끓는다
밤새 휑한 가슴을 쓸고 나온 마른기침에
노란 은행잎이 무더기로 떨어져
머릿속 가득 어지럽게 쌓이는 밤

쉬 떠날 기미 보이지 않고 자꾸 시비 거는
손님이 귀찮아 눈감으면
보인다, 보여 - P14

텅빈 벌판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을 피해
가쁜 숨 몰아쉬며 도망가는
초라한 사내가 - P15

갯벌에서


물 빠진 갯벌에 태양이 드러눕는다
무수히 많은 바다의 숨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간간한 바람이
제방너머 산으로 올라가 송화가루를 몰고 내려온다
하얗게 핀 소금꽃이 노란색으로 변한 갯벌
하루 종일 농게들이 천천히 소금꽃을 뭉쳐
집을 손질하다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먼 바다 물결 소리에 밀물 때를 계산한다
달이 차면 바다가 되고
달이 기울면 땅이 되는
네 것과 내 것이 없는 갯벌에서
기다림의 고통 없이 마감하는 생은 축복이다
그 축복 속에 몸을 풀고 스스로 생을 접는
무수한 생명들이
바다의 숨구멍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갯벌엔
물의 갈대도 적당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갈매기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 P24

끊임없이 생과 죽음이 반복되어도
슬프지 않음을 모르는 건 사람들뿐이다
오늘도 제 숨구멍을 틀어막는 어리석음을
밀물과 썰물이 조용히 증명한다 - P25

밥 한 사발


세상천지 만물들이 생겨날 때에 허투루 생긴 것 하나 없듯이 쌀도 마찬가지여, 금방 방아를 찐 쌀 알갱이를 자세히 들여다 봐, 뽀얗고 둥그스름한 것이 꼭 어린놈들 고추 끄트머리 닮았지, 옛날에 쌀 한 톨 만들려면 따뜻한 봄날 모를 심어 뙤약볕 자글자글 끓는 여름 한 철 동안 애벌에 두 벌 세 벌 논을 맨 까닭은 벼 뿌리를 자꾸 긁어주고 건드려야 벼 포기가 단단해져 가을에 개꼬리같이 치렁치렁한 벼이삭이 매달리기 때문이여, 그래서 쌀은 양陽이고 男子여, 아닌 말로 사내 꼭지들 뿌리도 자꾸 만지작거려야 무슨 노릇을 해도 하지 그냥 놔둬 봐, 동네 장정들 다불러 역사役事 한다고 그 물건 일으켜 세울 수 있나,

가운데 금이 그어진 보리쌀 좀 보게나, 
꼭 女子들 귀한데 닮았지, 해 짧은 가을에 심어 겨울을 넘기자면 자꾸 북을 주고 다독여 줘야 하는 보리 싹처럼 여자도 그저 아껴주고 살펴줘야 되는 겨, 툭하면 여자를 보리 찬밥 취급들하는데 그러면 못 써! 옛날에 흉년 구제는 보리가 하고 보 - P26

릿고개 넘긴 놈이 쌀밥 구경한 것처럼 엄동설한에도 죽지않고 새끼 쳐 한여름에 익어서 사람뿐 아니라 날짐승들짐승 먹여 살린 보리는 자식을 키우는 어미를 닮았단 말이지, 그래서 보리는 음이고 女子여, 보리꺼럭이 왜 붙었는지 알아? 여자를 얕보지 말라는 뜻이여,

밍밍한 쌀밥과 깔깔한 보리밥을 섞어 먹어야 밥맛 나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크러져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게 바로 음양陰陽의 이치理致여, 그러니 기름 잘잘 흐르는 쌀밥이나 구수한 보리밥을 아무 속내 없이 퍼 처먹지들 말고곰곰 생각하며 먹으란 말이여, 이 잡것들아!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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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시나무는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 애증어린 나무이지만 적어도 저는 그 순간 한 나무가 가진 미덕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왜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라고 하는지 의아해 할 터이니 우선 이것부터 설명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아카시아(acacia)‘라고 부르는나무는 열대지방에 관목상으로 자라는 다른 나무입니다. 아까시나무는 학명에서 가짜 아카시아‘ 라는 뜻인데 우리나라로 들어와 진짜 아카시아로 되어 버린 것이지요. 아카시아라는 이름이 주는 세련되면서도 친숙한 느낌으로 이 이름을 버리기는 못내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본래 이 이름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아까시나무로 해야 맞습니다. 식물 이름은, 특히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라틴어 학명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식물이름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국제식물명명규약‘ 이란 것이 있어 선취권을 엄격하게 따져이름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좀더 많은 미움을 받는 아까시나무. 하지만 이 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을 엿보며 조금씩 이해하다보면 오히려 미안할 사람은 바로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시나무가 눈총받는 가장 큰이유는 좋은 우리 땅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까시나무는 일제시대 때 산을 수탈하느라 소나무를 마구 베는 바람에 산사태가 우 - P186

려되는 땅에 응급복구용으로 들여와 심은 것이지, 이 나무 스스로 우리 땅을나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방이 되고도 한동안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빨리 키워 땔감으로 쓰도록 식수를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콩과 식물인 이 나무는 공중의 질소를 고정해 땅을 비옥하게 할 수도 있으니 이 나무 입장에서는 억울하지요. 그저 시기를 잘못 만났을 뿐이지요.
아까시나무가 있는 숲은 나쁜 숲이라는 얘기도 그렇습니다. 좋은숲과 나쁜 숲을 딱 잘라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우리나라 고유의 나무들이 우거져 살아가는 숲을 좋은 숲이라고 말한다면 아까시나무는 이런 숲에 들어가 살 수 없습니다. 이 나무는 자라는데 햇볕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늘 속에서 세력을 군락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언젠가 숲의 천이를 설명하면서 이 원리를 설명했지요. 그러니 나쁜 숲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 아까시나무탓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 주엔 아까시나무의 무서운 가시와 더없이 달콤한 꿀 이야기를 좀더 할까 합니다. 그 전에 문밖으로 나가서 아까시나무 향기와 조우해 5월의 기운을 한껏 느껴보기를 권합니다. - P187

능소화의 별명이 ‘양반꽃‘ 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어, 혹 일반 백성의 집에서 이 나무가 발견되면 관가로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는 얘기도 있지요.
한여름, 늘어진 꽃자루 끝에 입을 대고 한껏 힘주어 부는 나팔처럼싱그럽게 고개를 쳐들고 피는 능소화꽃들, 바람이 불고 비라도 몹시•내리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이 능소화 꽃송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 그 나팔을 닮은 꽃들이 불어내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양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 P217

더욱이 상사화는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에 본성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입장이 아닌 식물 입장에서 꽃의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열매를 잘 맺지 않을 뿐 아니라, 열매가 달린 듯해도 후손이 될 씨앗은 여물지 않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리워하다 죽어가는 그런 소극적인 절꽃은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절에 많냐고요?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상사화 알뿌리의 방부효과 때문입니다. 불경을 만들 때 종이를 배접해 책을 묶는 데쓰는 접착제에 넣거나 탱화를 그릴 때 섞으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않게 해주니 항시 곁에 심어두고 이용했던 것이죠.
상사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는 것이 병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고운 상사화 분홍 꽃빛을 넋 놓고 바라보며 이제는 아련해진 첫사랑의 추억에나 빠져드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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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 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다.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6) - P225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창비 1993) - P258

시벽(詩癖)

이규보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에 올라보았네.
시 짓는 일 이제는 놓을 만한데
어찌해 그만두지 못하는 건지.
아침부터 귀뚜라미처럼 읊조려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 양 노래 부른다.
어찌해볼 수 없는 시마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와서는,
한번 붙어 잠시도 안 놓아줘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살에는 조금도 안 남았다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웃을 만하다.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비비며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옮는다.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이리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정민 한시 미학 산책」(휴머니스트 1996) - P281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먼 바다』(창비 1984)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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