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p.67

대보름


홑이불 같은 구름 헤치고
정월 대보름달
둥실 떠올랐다
연을 시집보내는 애들도 없고
지신밟고 논둑 고사 지내는 어른도 없다
쥐불놀이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부럼을 깨든 단단한 이빨들은
어디서 쓰디쓴 삶을 깨물고 있는지
귀 밝은 술 나 혼자 마신다

갈 테면 다 가고
뺏을 테면 다 뺏어 봐라
그런다고 내가 물러설 줄 아느냐
혼자라도 오곡밥 아홉 그릇 먹고
나무 아홉 짐 할 테다 - P34

하늘은 맑은데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보름달
물먹었다
올해도 물풍년은 틀림없겠다 - P35

모범생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몸으로 글자를 익혔다
아주 천천히

이제 몸은 경전이 되었다
걸어가는 모습도 글자가 되어
앞으로 갈 때는 ㄱ자가 되고
누우면 ㄹ자가 된다
서툴게 익힌 글자가 서 있으면
자꾸 뒤로 꺾어진다
몸의 기억은 완고하여 한 번 습득한 글을
결코 놓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에서
묵묵히 복습을 하는 사람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첫눈이 지운다 - P43

동행


그녀는 졸면서 국자로 갯물을 떠서
꽃게 등에 붓고 있다
졸음을 참느라 닫혔다가 간신히 열리는 눈꺼풀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손놀림
배 멀미에 차멀미까지 겹친 꽃게는
뽀글뽀글 힘겹게 바다를 토해낸다
생生이 죽음으로 가는 출발이라고 한다면
꽃게는 지금 생의 종점에서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바다를
몸으로 지우는 작업을 하는 중일 게다
그렇다면 졸린 눈을 끔벅이며
꽃게 등에 갯물을 떠 붓는
시장통 늙은 여자의 손놀림은
어떤 기억을 지우려는 반복일까
죽음을 기다리며 엎드린 꽃게처럼 사람들 
모두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몰릴테지만
그때 담담히 자기 생生의 모든 것을 지우려는
사람 - P44

몇이나 될까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 발꿈치 아래
바다를 버리고도 의연한 꽃게가
열 개의 발을 오므리며 합장을 한다 - P45

냉이꽃


참으로 모질기도 하구나
오고가는 길섶에
밟혀 죽은 줄 알았더니
겨우내 얼어 죽은 줄 알았더니
납작한 이파리마다
어느새 푸른빛 띄우고
모가지 길게 뽑아
눈물겨운 밥사발 가장자리 눌어붙은
밥풀 같은 꽃잎
몇 개 달고
天下의 봄을 호령하는
너는 - P56




한사발의 밥을 먹고 누는
한덩이의 똥
반드시 흙에 누어야 되리

그 똥
맛난 밥이 되어
살찐 흙
우리에게 고봉밥 한 사발 담아 주리니

밥이 똥이고 똥이 흙이고 흙이 밥이고
그 밥
달게 먹고 땀 쏟는 사람
비로소 흙을 닮은 사람 되리 - P66

보석


연두색 녹두
염소똥 같은 검은콩
흰팥 붉은팥
알록달록한 동부가
가을마당을 예쁘게 색칠했다

점심나절
여호와의 증인 전도부인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한바탕 설교하면서
저어주다가 허탕치고 돌아가고
오가는 사람들 잘 영글었다며
한번씩 만져 보고

몸 가벼운 어머니가
하루 온종일 젓고 저어
반들반들해진
저 황홀한 - P67

못자리 하던 날


앞산 진달래 혼자 붉어 혼자 지고
황사 바람 속 울던 뻐꾸기 어디론가 날아갔다
일터 잃은 사람들 한숨이 거리를 메우는 오늘도
신문을 꽉 채운 구역질나는 정치 놀음
밭둑 개나리마저 노랗게 질렸다

빼앗지도 뺏기지도 않는 그런 땅에서
더불어 살고 싶은 날
논 한 배미 있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
그 고마운 땅에
볍씨 한 움큼씩 뿌리면서
이 어린것들이 캄캄한 세월 틈에
어찌 뿌리 내려 자랄까
근심되는 하루
누런 들판 참새 떼 쫓는 행복을 꿈꾸면
고달픔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P70

새참 때
옛날처럼 싸라기를 빻아
쑥개떡을 빚어 내오신 어머니는
무논 넘치는 개구리 울음은
마른 봄 판 배곯아 죽은 어린 넋이라 하시며
눈시울 붉히는 저만치
四月, 답답한 마파람
구부러진 논둑에서 쉬엄쉬엄 불었다 - P71

햇빛 한 줌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잿빛 무거운 구름 뚫고
칼날바람에 꺾이지 않고
낮은 추녀 밑에
쭈그리고 앉아
마늘씨를 쪼개는
거친 손등 위에
잠깐 머물며
기죽지 말고 살라고
속살거리고
사라지는 - P116

정낙추 시집 「그 남자의 손(애지, 2006)은, 최근 우리 시가 현저하게 망각하고 있는 음역(音域)을 선명하게 복원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태작이 거의 없는 한결 같은 집중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어맨다. 그는 태안에 살고 있는 농부이자 시인이다. 그로서는 첫 시집이 되는 이번 작품집은, 이러한 그의 구체적인 농사체험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상처들을 채집하면서도, 그것들을 깊은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성과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시대의 주류 미학에까지 다다랐다가 최근 들어급격한 담론적 소강 상태를 보이는 우리 시대의 ‘농민시‘의 한 전형을 만나게 된다. - P117

시집 맨 앞쪽에 실려 있는 시편들은, 시인이 품안에 품고있는 가장 근원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넉넉하고 따뜻한 대지적 긍정에서 발원하여, 생명에 대한 경이와그 생명을 안아 기르는 섬세한 마음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구체적 ‘노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시집 전체 속으로 아련하고도 아프게 번져간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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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추

1950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1989년부터 지방문학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02년 내일을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시인의 말


다섯 마리의 일소를 부리다가 푸줏간으로 보냈고

세대의 경운기를 몰다가 고물상으로 넘겼다.

그래도 땅은 늙지 않는다.

이제 내 차례다

태안모항에서
정낙추

단식중인 대나무 같은 낙추 형님은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삽니다. 흔들림의 자리에서 자신의 발자국에다가 씨 뿌리고 가꿉니다. 세상붙이 짠한 심성으로 창을 열고 소박함으로 외투 삼고 결연함으로 낫을 벼리는데 하여 그에게 딱 맞는 호칭이 이 땅의 옳은사람이요, 옳은 시인입니다.
오늘도 형님은 불 놓은 들판을 깊게 바라보다가 차마 어쩌지 못한 마음으로 시한편 이부자리처럼 덮어주고 있을 겁니다.
한창훈(소설가)

정낙추는 진짜 농사꾼이다. 주말에만 빠꿈이 흙을 찾는 농사체험가가 아니란말이다. 게다가 그는 서해 뻘물을 끓여 자염을 만드는 소금장수다. 생명을 키우고싱거운 세상에 간도 맞춘다. 그가 삶의 질곡을 눙치거나 두툼한 해학으로 조선구들장을 놓을 때마다, 나는 명천 이문구의 소설 속 장삼이사張三李四)를떠올린다. 그 갑남을녀(甲男乙女)들의 오기와 배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생명에 대한 오체투지와 끝없는 쓰다듬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시집을 낸적 없으나 사람들은 그를 큰 시인으로 우러렀고, 수렁배미와 개펄에서 늘 소금꽃이나 피우고 있었건만 우리들은 그를 당대의 어른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저당산나무 한 그루가 한 마을 온 집안의 구들장 밑에 뜨거운 뿌리를 서려두고푸르게 숨쉬는 것과 같음이라. 어찌 그의 우람하고 두터운 말씀에 작디작은 내 펜촉 보습을 들이 밀 수 있으랴. 십수 년 동안, 한창훈 유용주 이경호라는 풋것들과 진달래빛 노을을 그러안고 망연해 하던 서해의 장관을 떠올릴 뿐이다.
이정록(시인)

득도得道


봉지 속에
한 사내가 있다
꽃 떨어지자마자 봉지 속에 유폐된 사내
얼마의 내공을 쌓았기에
독방에 갇혀서도
부처님 몸빛보다 더 찬란할까

봉지를 벗기자
눈부신 가을 햇살이 황금빛에 튕겨 깨진다

몸 안 가득 채운
단물은
사내의 땀방울이다 그리움이다
세상에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고 고인
눈물이다

눈물이 매달린 배 나뭇가지 사이에서
사내가
잘 익은 자기 얼굴을 웃으며 따고 있다 - P11

갈꽃비


아버지께서 갈꽃비를 만드신다
지난 가을
당신처럼 하얗게 늙은
갈대꽃을 한 아름 꺾어 오시더니
오늘은 당신 몫의 생애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묶듯이
갈꽃비를 만드신다

나이 들어 정신도 육신도
가벼워진 아버지와 갈대꽃이
한데 어우러져 조용히 흔들린 끝에
만들어진 갈꽃비
평생 짊어진 가난을 쓸기엔 너무 탐스럽고
세상 더러움을 쓸기엔 너무 고운
저 갈꽃비로
무엇을 쓸어야 할까 - P12

서러운 세월 다 보내신
아버지의 한 방울 눈물을 쓸면
딱 알맞겠는데
아버지는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으신다 - P13

감기


늦가을비 맞으며 불청객이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
독한 소주 한 잔에
고춧가루 푼 뜨거운 콩나물국을 대접해도
돌아가지 않고 곁에 누워
일년 농사 얘기나 하자며 자꾸 조른다

빚 얻어 빚 갚고도 모자라
가을마저 저당 잡힌 몸뚱이
으실으실 춥다가 펄펄 끓는다
밤새 휑한 가슴을 쓸고 나온 마른기침에
노란 은행잎이 무더기로 떨어져
머릿속 가득 어지럽게 쌓이는 밤

쉬 떠날 기미 보이지 않고 자꾸 시비 거는
손님이 귀찮아 눈감으면
보인다, 보여 - P14

텅빈 벌판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을 피해
가쁜 숨 몰아쉬며 도망가는
초라한 사내가 - P15

갯벌에서


물 빠진 갯벌에 태양이 드러눕는다
무수히 많은 바다의 숨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간간한 바람이
제방너머 산으로 올라가 송화가루를 몰고 내려온다
하얗게 핀 소금꽃이 노란색으로 변한 갯벌
하루 종일 농게들이 천천히 소금꽃을 뭉쳐
집을 손질하다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먼 바다 물결 소리에 밀물 때를 계산한다
달이 차면 바다가 되고
달이 기울면 땅이 되는
네 것과 내 것이 없는 갯벌에서
기다림의 고통 없이 마감하는 생은 축복이다
그 축복 속에 몸을 풀고 스스로 생을 접는
무수한 생명들이
바다의 숨구멍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갯벌엔
물의 갈대도 적당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갈매기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 P24

끊임없이 생과 죽음이 반복되어도
슬프지 않음을 모르는 건 사람들뿐이다
오늘도 제 숨구멍을 틀어막는 어리석음을
밀물과 썰물이 조용히 증명한다 - P25

밥 한 사발


세상천지 만물들이 생겨날 때에 허투루 생긴 것 하나 없듯이 쌀도 마찬가지여, 금방 방아를 찐 쌀 알갱이를 자세히 들여다 봐, 뽀얗고 둥그스름한 것이 꼭 어린놈들 고추 끄트머리 닮았지, 옛날에 쌀 한 톨 만들려면 따뜻한 봄날 모를 심어 뙤약볕 자글자글 끓는 여름 한 철 동안 애벌에 두 벌 세 벌 논을 맨 까닭은 벼 뿌리를 자꾸 긁어주고 건드려야 벼 포기가 단단해져 가을에 개꼬리같이 치렁치렁한 벼이삭이 매달리기 때문이여, 그래서 쌀은 양陽이고 男子여, 아닌 말로 사내 꼭지들 뿌리도 자꾸 만지작거려야 무슨 노릇을 해도 하지 그냥 놔둬 봐, 동네 장정들 다불러 역사役事 한다고 그 물건 일으켜 세울 수 있나,

가운데 금이 그어진 보리쌀 좀 보게나, 
꼭 女子들 귀한데 닮았지, 해 짧은 가을에 심어 겨울을 넘기자면 자꾸 북을 주고 다독여 줘야 하는 보리 싹처럼 여자도 그저 아껴주고 살펴줘야 되는 겨, 툭하면 여자를 보리 찬밥 취급들하는데 그러면 못 써! 옛날에 흉년 구제는 보리가 하고 보 - P26

릿고개 넘긴 놈이 쌀밥 구경한 것처럼 엄동설한에도 죽지않고 새끼 쳐 한여름에 익어서 사람뿐 아니라 날짐승들짐승 먹여 살린 보리는 자식을 키우는 어미를 닮았단 말이지, 그래서 보리는 음이고 女子여, 보리꺼럭이 왜 붙었는지 알아? 여자를 얕보지 말라는 뜻이여,

밍밍한 쌀밥과 깔깔한 보리밥을 섞어 먹어야 밥맛 나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크러져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게 바로 음양陰陽의 이치理致여, 그러니 기름 잘잘 흐르는 쌀밥이나 구수한 보리밥을 아무 속내 없이 퍼 처먹지들 말고곰곰 생각하며 먹으란 말이여, 이 잡것들아!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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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시나무는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 애증어린 나무이지만 적어도 저는 그 순간 한 나무가 가진 미덕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왜 아카시아를 아까시나무라고 하는지 의아해 할 터이니 우선 이것부터 설명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아카시아(acacia)‘라고 부르는나무는 열대지방에 관목상으로 자라는 다른 나무입니다. 아까시나무는 학명에서 가짜 아카시아‘ 라는 뜻인데 우리나라로 들어와 진짜 아카시아로 되어 버린 것이지요. 아카시아라는 이름이 주는 세련되면서도 친숙한 느낌으로 이 이름을 버리기는 못내 아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본래 이 이름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아까시나무로 해야 맞습니다. 식물 이름은, 특히 세계가 공통으로 쓰는라틴어 학명은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식물이름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국제식물명명규약‘ 이란 것이 있어 선취권을 엄격하게 따져이름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좀더 많은 미움을 받는 아까시나무. 하지만 이 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을 엿보며 조금씩 이해하다보면 오히려 미안할 사람은 바로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시나무가 눈총받는 가장 큰이유는 좋은 우리 땅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까시나무는 일제시대 때 산을 수탈하느라 소나무를 마구 베는 바람에 산사태가 우 - P186

려되는 땅에 응급복구용으로 들여와 심은 것이지, 이 나무 스스로 우리 땅을나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방이 되고도 한동안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빨리 키워 땔감으로 쓰도록 식수를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콩과 식물인 이 나무는 공중의 질소를 고정해 땅을 비옥하게 할 수도 있으니 이 나무 입장에서는 억울하지요. 그저 시기를 잘못 만났을 뿐이지요.
아까시나무가 있는 숲은 나쁜 숲이라는 얘기도 그렇습니다. 좋은숲과 나쁜 숲을 딱 잘라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우리나라 고유의 나무들이 우거져 살아가는 숲을 좋은 숲이라고 말한다면 아까시나무는 이런 숲에 들어가 살 수 없습니다. 이 나무는 자라는데 햇볕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늘 속에서 세력을 군락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언젠가 숲의 천이를 설명하면서 이 원리를 설명했지요. 그러니 나쁜 숲이라는 것도 역시 우리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 아까시나무탓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 주엔 아까시나무의 무서운 가시와 더없이 달콤한 꿀 이야기를 좀더 할까 합니다. 그 전에 문밖으로 나가서 아까시나무 향기와 조우해 5월의 기운을 한껏 느껴보기를 권합니다. - P187

능소화의 별명이 ‘양반꽃‘ 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어, 혹 일반 백성의 집에서 이 나무가 발견되면 관가로 잡혀가 곤장을 맞았다는 얘기도 있지요.
한여름, 늘어진 꽃자루 끝에 입을 대고 한껏 힘주어 부는 나팔처럼싱그럽게 고개를 쳐들고 피는 능소화꽃들, 바람이 불고 비라도 몹시•내리면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이 능소화 꽃송이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 그 나팔을 닮은 꽃들이 불어내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양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 P217

더욱이 상사화는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에 본성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입장이 아닌 식물 입장에서 꽃의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열매를 잘 맺지 않을 뿐 아니라, 열매가 달린 듯해도 후손이 될 씨앗은 여물지 않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리워하다 죽어가는 그런 소극적인 절꽃은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왜 절에 많냐고요? 사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상사화 알뿌리의 방부효과 때문입니다. 불경을 만들 때 종이를 배접해 책을 묶는 데쓰는 접착제에 넣거나 탱화를 그릴 때 섞으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않게 해주니 항시 곁에 심어두고 이용했던 것이죠.
상사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는 것이 병이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고운 상사화 분홍 꽃빛을 넋 놓고 바라보며 이제는 아련해진 첫사랑의 추억에나 빠져드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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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 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다.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쉿, 나의 세컨드는(문학동네 2006) - P225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창비 1993) - P258

시벽(詩癖)

이규보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삼공에 올라보았네.
시 짓는 일 이제는 놓을 만한데
어찌해 그만두지 못하는 건지.
아침부터 귀뚜라미처럼 읊조려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 양 노래 부른다.
어찌해볼 수 없는 시마란 놈이
아침저녁 남몰래 따라와서는,
한번 붙어 잠시도 안 놓아줘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 도려내
몇편의 시를 쥐어짠다네.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살에는 조금도 안 남았다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웃을 만하다.
그렇다고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비비며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옮는다.
살고 죽음 반드시 이 때문이리
이 병은 의원도 못 고치리라.

정민 한시 미학 산책」(휴머니스트 1996) - P281

겨울밤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먼 바다』(창비 1984)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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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례咸順禮


196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시와사회」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 시인의 말


지난 한 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작품으로만 흠모해오던 시인들의 시집 여덟 권을 묶어내는 동안 입에서 단내가 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교정을 핑계삼아 그들이 갖고 있는 詩力을 들여다보면서 무릎 내려치기도 하고 고개 주억거리기도했다. 가야할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가닥 잡히기도 했다. 과연 일 년을 넘길 수 있을까?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 되는쪽에 무게를 실었다. 그리고 딱 일년이다. 그들이 그토록 염려하던... 일 년을 무난히 넘겼다.


이제... 내 피붙이와도 같은 여덟 권의 시집에 또 한 권을 보태려 한다. 나를 세우려 한다. 까마득한 후배를 위해 먼길 한달음에 달려와 구들장 다숩게 덥혀 놓으신 선배님들 계셔서 두렵지 않다. 춥지 않다. 두 발이 뜨겁다.

2006년 성하盛夏 대전에서
함순례

시의 맛과 파장은 아주 싱겁고 엷어서 무미한 진동에 가까워야 하고 그 소극적 운동성이 미세하지만 깊고 먼 여운을 남길 것이라 믿는다. 함순례의 시는 결연한 의지에 차 있지도 않고 세계를 토막내고 비틀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조용히 스며드는 울림이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족과 이웃, 자연에 대한 깊고 진솔한 고백들은 순박하고 순정하며 담백하다. 자칫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로 흘려듣기 쉬우나 그것들은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망각 속에 방치해 두었거나 뿌리쳤거나 ‘요금별납‘ 도장을 찍어 멀리 날려 보낸 것들이다. 그 기억들이 지금 다시 살아나 시인의 오늘을 깨우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인의 손아귀에 쥐어진 분노와 두려움의 「돌멩이」는 물살에 깎여 따스해졌다. 서정시의 미덕은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지 않고 멈추거나 뒷걸음질치며 모든 기억들을 치유하고 얼싸안는데 있다.
최영철(시인)

어서 오게. 여기 시가 한상 차려져 있네.
이 자리에서 자네는 고향산천의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자란 풀꽃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네. 그 모진 비바람 속에서 척박한 땅을 일구어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던 사람들이 있었네.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읽다 보면 눈물이 날 거네. 참 어려웠던 시절의 암담했던 풍경과,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설움과 쓰림까지도 외면하지 말기를.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서 합쳐질 것이니. 함 시인의 시세계는 허황된 관념의놀이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실체와 풍속의 세계를, 인간과 자연의 참 모습을보여주고 있기에 문학적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네. 마음껏 들고 가시게.
이승하(시인, 중앙대교수)

꼴림에 대하여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칠흙 어둠을 끌고 간다
한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들녘마저 점점이 등불을 켜든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마음속 냉기 풀어내면서
빈 하늘에 기러기 날려보내는 것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 P11




바위 위에 누워 젖은 몸 말린다 인적 없는 숲은 마음껏 엎드려 있기에 좋다 개미들이 발가락 새 파고들다가 옆구리 쪽으로 기어올라 손등에 달라붙는다 허기로 가득찬 몸놀림, 움직이지 않으면 밥 한 그릇 먹을 수 없는 내 생애와어찌 그리 닮았는지, 한 끼 밥이 지닌 무게를 생각하며 개미 한 마리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손, 손금을 훑는다 나도 너처럼 바람과 햇살 따스한 곳으로 항상 까치발 세우며 살고 있으리라 서른 아홉 늦은 저녁, - P21

화인火印


요금별납, 印을 찍는다
반액 할인 위해 우편번호대로 분류한
책들 풀고 또 묶는다
행간을 열지 못한 채 구석으로 밀려날 지 모르는
받는 즉시 폐기될 지 모르는

낙인을 찍는다
낱낱의 환부만을 건드리는 건 아닌지
멈칫 멈칫 흔들리지만
질긴 누군가의 생에
요금이라도 대신 내주고 싶어
힘주어 꽝! 찍는다 - P31




안개 깔린 이른 아침
느리게 차를 몰면서 새들이 걷는 걸 본다
시속 30km 틈새로 찍히는
새들의 발자국
얼음 물 속에 콕!콕! 부리를 적신다

사방 숲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제 뼛속 비우고
먹은 것 땅에 내려놓았구나

아프다, 라는 말
잇몸새 누르고 계신 골다공증 어머니
병문안 가는 길이다 - P85

폭포


여기부터 시작이라는 것인가

내리꽂히는 황홀함에 길들여져 왔으나
물이 뛰어내린 자리에 발 담그며 환호했으나

폭포는
물의 계단

폭발하는 바닥의 빛!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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