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1940-프랑스의 작가 
1940년 9월 1일, 노르망디의 소도시 릴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브토로 이사한 후, 청소년기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딸의 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어머니는 아니 에르노를 사립 가톨획 학교에 입학시켰고, 에르노는 부르주아 계층의 소녀들 사이에처 처음으로 자신의 계급에 대한 수치를 느낀다.
루앙대학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1967년에 중등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71년 현대문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1977년부터 2000년에 은퇴할때까지 프랑스 국립원격교육원CNED 교수로 일했다.
1974년 자전적 소설인 「빈옷장』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행보를시작했다. 1984년 아버지의 삶을 다룬 ‘자리 Place」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세월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림 독자상을 수상했다. 2003년 그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2011년에는생존 작가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갈리마르 총서에 자전 소설과 미발표 일기 등이 포함된 삶을 쓰다가 편입되었다. 처음 데뷔했을때부터 픽션을 거부했던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직접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 구조를 파헤치는 예리한 글쓰기로 역사, 사회, 개인의 관계를 탐구하고 재구성하며 ‘자전‘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했다는 평을 받는다.
2017년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문학상을 받았으며,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로즈마리 라그라브 Rose-Marie Lagrave, 


1944~프랑스의 사회학자, 
1944년, 파리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에서 자랐다.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의 연구책임 교수였으며, ‘젠더, 정치, 섹슈얼리티‘라는 석사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가누다ressaisir』 등의 책을 썼다.

아니 에르노와 로즈마리 라그라브는 암묵적인 동조를 바탕으로 하는 솔직한 대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그동안 쓴 글들에 관해 성찰하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는 시대적 문맥 특유의 사회적 · 역사적 변모에비추어 자신들의 계급 변화와 페미니스트로의 이행 과정을 되짚어본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여자는 상대가 쓴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서로를알아보았고, 무엇보다 직접 겪은 체험과 그에 대한 분석을 오가는 작업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의 방식은 체험된 것과 그에대한 분석이라는 두 층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문학과 사회과학에서 끌어낸 실들을 교차시키면서 자신들이 겪은 지배 경험을 해석하기 위한 옷감을 직조해나가는 것이다. - P7

에르노

그때 나는 임신중지와 피임 자유화를 위한 운동MLAC에 참여하고 있었고, 막 발표한 소설『빈 옷장』도 배경이 불법 중절이었죠. 물론 그 배경 자체가 책의 목적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드니즈 르쉬르라는 주인공이 대학 문학부까지 학업을 이어감으로써 이르게 된 ‘정당성을 누리는‘ 부르주아 세계와서민적 출신 환경 사이에서 겪는 점진적인 괴리를 이야기하려 했죠. 임신중지를 포함해서 분명 자진적인 이야기였고요.
그때 원고를 ‘여성‘ 관련 시리즈를 내고 있던 출판사들에 보내지 않은 건 어느 정도는 본능적인 판단이었을 거고, 어쩌면출판계를 잘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난 그때 내책의 대상,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계급 탈주자가 지나온 경로‘라고 부를 그것이 여성에 국한된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플라마리옹에 먼저 보냈죠. 곧바로 거절당했고요. - P39

사실 그때는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여자가 살림하고 식구들 먹이고 아이들을 돌보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정신적인 부담이라고 부르는 일들은 진짜 주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F 매거진>이라는 잡지에서 소설가 카트린 리우아Catherine Rihoit의 글이 그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비판한 게전부였죠. 내가 쓴 많은 책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얼어붙은 여자』는 유난했어요. 거부의 대상이었죠. 그러니까,
1981년에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책이었던 거예요. 내가 문제 삼은 것들은 ‘사유되지 않은 것impensé‘에 속했달까요. 반면 단순한 열정』의 경우는…… - P43

버지니아 울프 얘기도 하지 않을 수 없죠. 나는 『자기만의방은 마흔 살이 돼서 읽었지만, 「댈러웨이 부인』과 『파도』는글을 쓰기로, 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했을 때 읽었어요. 소설가로서 버지니아 울프는 남자들이 지배하던 문학사에서 등대같은 존재였죠. 나에게 자극과 힘을 주었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해냈으면 나도 해낼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다! 이런 거죠.
상황을 조금 설명해야겠네요. 난 처음에 적성과 안 맞는 직업을 골랐고-초등학교 교사가 되려 했거든요, 그러다가 오페어로 영국에 머물렀고, 돌아와서는 장차 교수가 되고 글을 쓰겠다는 욕망으로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어요. 당시 ‘예비교양과정‘이라고 불리던 1학년은 경쟁이 아주 치열한 과정이었죠. 아무튼 그때, 놀랍게도,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 철학이 아니라 프랑스어를 월등히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이어 학사과정에 입학허가를 받고 현대문학을 골랐죠. 그런데 그 과정에 외국 문학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료증‘이 포함되어 있었고, 바로 그 수업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알게 되었어요.  - P49

특별히 좋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그 책이 내 삶에 너무 늦게왔기 때문일 거예요. 어떤 글을 우리가 언제 만났는지도 중요하잖아요. 동시대 작품들에 대한 갈증으로 닥치는 대로 읽어나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뒤라스는 내 길에 없었어요.
작가로서 이미 자리를 잡고 난 후에 만나게 되는 책들의 경우, 물론 그 작가와의 사이에서 일종의 공명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멀게 느껴지기도 하죠. 내 경우엔 뒤라스가 그랬어요. 오히려 나탈리 사로트가 더 가깝게 느껴졌고요. 하지만 기억해보니, 이상하게도, 중등학교 3학년 과정 학생들에게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읽게 했네요! 나도뒤라스의 영화들은 늘 좋아했거든요. - P51

나도 안시에서 지젤 알리미 Gisèle Halimi의 선택하라 Choisirt 운동, 이어 임신중지와 피임 자유화를 위한 운동에까지 참여했지만, 페미니스트 활동과 만남은 대부분 파리에서 이루어졌죠. 파리는 내가 여섯 시간 기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고요. 1975년에 세르지"로 온 뒤에도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립이 더 심해졌죠, 국립원격교육원CNTE. 지금의 CNED의 교수로 임명된 뒤로 ‘원격‘ 수업을 하니까, 동료들과도 학생들과도 다 떨어져있게 된 거죠. 얼어붙은 여자』는 1978년 가을에 쓰기 시작했는데, 이론을 참조하지 않고 그냥 내 경험과 기억으로 써나갔어요. 말하자면, 환자가 의사 앞에서 자기 병력을 설명하듯이, 내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 한 거죠. - P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 작가는 질병의 이미지, 질병의 전통, 질병과 불편함의권유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자기 본성의 불안을 비추는 많은 거울을 들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감염된 문장이 새끼를 친다‘는 개념은 여성 문인에게 너무도 잘 들어맞는 진실이다. 오스틴과 셀리부터 디킨슨과 배럿 브라우닝에 이르는 19세기 소설가들과 시인들의 위대한 예술적성취는 사실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번번이 질병과 결부되었다.
그것은 마치 절망과 파편화가 빚어낸 감염성 ‘우울증‘으로부터건강과 완전함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역설하는 것만 같다. 문화가 건네는 독사과를 거부하는 여성 작가는 거식증 환자가 되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들어간다. - P158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의 오로라 리는 일찍이 ‘모국‘ 이탈리아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모국을 ‘잊기에 이른다. 그러나 마지막 사례가 암시하듯이, 이 모든 인물들과 작가들이 잊었을까 봐 정말로 두려워하는 대상은 정확하게 말해 가부장적 시학 때문에 멀어진 자신들 삶의 국면, 즉 자신들의 모계적 문학 유산이다. 그것은 애니고틀립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들에게 중요한 ‘여성직 힘‘이다. 따라서 ‘감염된 문장‘이 여성들 사이에 ‘새끼를 쳐나가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어떻게 질병을 통해 예술적 건강을 획득해내는가를 배우기 위해서도 ‘영향에 대한 불안이라는 블룸의 중요한 정의를 재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세기 여성들이 자신들을 쇠약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인식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여성의 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잃어버린 어머니들을 되찾고 기억해내 ‘작가가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한 일이 얼마나 지난했는지 추적해낼 수 있을 것이다. - P161

울프의 언급이 암시하듯, 자신의 문학적인 노력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여자들은 미친 사람 내지 괴물로 취급받았다. ‘성을벗어났기 때문에 기이하고 성적으로 ‘ 타락했기 때문에 기이하다는 것이다. 캐번디시의 비상한 지적 야망은 자연에서 탈선한듯 보였으며, 핀치의 글은 그녀를 바보로 만들었고, 애프라 벤(사실상 영국 최초의 ‘전문‘ 여성 작가)처럼 아주 뻔뻔하고 사죄할 줄 모르는 반항아는 항상 의심할 바 없이 문란하고 방종하며 ‘음란한‘) ‘수상한 여자‘로 간주되었다. ‘판단력과 신성한시를 금지당한 이 가련한 여자는 무엇을 했는가?‘ 벤은 솔직하게 질문했고, 또 솔직히 말하자면 왕정복고 시대 방탕자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마치 현실판 두에사처럼, 그녀는 진지한 문학의 정전에서뿐만 아니라 점잖은 사람들의 응접실이나 도서관에서도 점차 가차 없이 추방(나아가 삭제)당했다.  - P167

우리는 1869년 루이자 메이 올컷의 조 마치가 야심찬 고딕스릴러 대신에 어린이용 교훈 설교집을 쓰는 모습을 만난다. 이모든 선택, 즉 확실히 주류적인 것이 아니라 외관상 소품 같은것, 극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적인 것,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 영광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은 것을 선택한 데는 의식적이거나 반의식적인 아이러니가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런 선택의 필요성은 아주 최근까지 영미의 거의 모든 여성 작가들이처했던 상황, 즉 작가 되기의 병적인 불안을 강조해준다.
모든 여성의 삶과 시, 그리고 선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간단히 말해, 여성 문인이 세계 내에서 자신의 공적 현존을 규 - P168

정해야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든 똑같이 항상 자기 존재를 비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성 문인은 자신의 작품을전적으로 억압하거나 작품의 출판을 필명이나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녀는 겸손하게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고백하고, 열등한 능력에 걸맞게 숙녀들을 위한 ‘더 하찮은‘ 주제에 집중해야 했다. 후자의 선택이 실패의 인정으로 보인다면 여성 문인은 반항할 것이며 그 결과 불가피하게 추방당할 것이다. 그리하여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여성 작가는 당황스러운 이중의 속박에 갇혀 있었다.  - P169

여성 문인은 자신이 ‘단지 여자‘일 뿐임을 인정하거나 ‘남자만큼 훌륭하다‘고 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같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선택에 직면한 여자들이 문학작품을 창조하자 그들의 작품에는 제한된 선택에 대한 강박적 관심뿐 아니라 예외 없이 강박적 감금의 이미지가 강력하게 나타난다.
감금 이미지는 어느 쪽이든 숨을 틀어막는 양자택일과 그렇게만들어놓은 문화에 의해 여성 예술가들이 감금되고 병들었다고 느꼈음을 보여준다. 괴테의 허구적 인물인 천사 같은 마카리에뿐만 아니라 조지 엘리엇도 (버지니아 울프처럼)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 이유를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 P169

문학작품과 마찬가지로 여성 작가에게는 난항일 뿐이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에서 신랄하게 보여주었듯이, 여성 소설가가 자신을 백설 공주와 동일시하면 로맨틱한 유리 관은 죽음의 침대처럼 느껴진다.‘ 반면 여왕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하는 여성은 사회에서 추방한다는 암울한 사실은, 여성 문인에게 비극적이고 장엄한 이야기의 영감이기보다 늘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고귀한 자는 결국 맥베스이고 레이디 맥베스는 괴물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는 영웅이지만, 메데이아는 마녀일 뿐이다. 리어의 광기는 거룩하고 보편적이지만, 오필리아의광기는 그저 측은할 따름이다. 비극의 구조가 가부장제의 구조를 반영하는 한(다시 말해 비극이 ‘고귀한‘ 인물의 ‘몰락‘ 이야기여야 하는 한 비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 이야기를 단순히 사용한다기보다는 필요로 하는 것이다.  - P175

그러나 치료도 질병만큼 문제적이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교수와 조지 엘리엇을 논할 때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 분장의 문학적인 어려움이 보여주었듯, 자신이 여성임을 부정하는 천재 여성은 배럿 브라우닝 자신이 ‘헛된 부정‘ 이라고 말했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항의 외침은 / 버려진 여자의 흐느낌 속으로 잦아들고, 그녀의
‘여성스러운 머리칼‘은 ‘고통 속에서 헝클어진 힘‘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남자의 이름‘으로 얻어내는 실용적인 이점이 무엇이든 그것을 반증하고 반박하며 전복시키는 사례가허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여성성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플롯이나 시학의 가부장적인 성격에 정면으로 맞서는 여자는 장르와 젠더의 화해할수 없는 대립에 아연실색할 것이다. 마거릿 풀러의 일기는 이문제를 깔끔하게 요약했다.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생의 모든 물결을 느끼면서도, 나의생각을 형식으로 주조하려고 할 때면 나는 입이 딱 붙고 무력해 - P179

진다. 옛날 것은 어떤 것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 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나는 창조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무언가를 쓸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여자인 게 정말 좋다. 그러나지금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나‘의 영역을 제한한다.
어떤 때는 진정으로 여자로서 살지만, 또 어떤 때는 숨이 막힌다. 내가 예술가 역할을 할 때 마비되는 것처럼. - P180

가부장제의 문장(판결)으로 병들고 감염되었지만, 자신 안에서 느껴지는 ‘시적 정열의 절박성을 부인할 수 없는 여성 작가는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개발했을까? 그녀는 어떻게 남성 텍스트의 거울을 벗어나그녀 자신의 권위를 창조할 수 있는 전통 속으로 춤추며 들어갔을까? 창조성에 필수적인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지위를 박탈당한 채,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권리와기술과 교육을 다 거부당했지만 천사 같은 침묵 속으로 물러나지 않은 여성들은 처음에는 매우 제한된 선택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P180

18세기와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남자에 의해,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구조에 갇힌 채 지배적인 미학에 반항하기보다는 순응할 수 없다는 데 죄의식을 느꼈다. 생명력 있는 여성 문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여성 작가들은 다른 말하자면 남성) 작가들이 결코 느끼거나 표현하지 않았던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퍽 고통을 겪었다. 그들 자신의 권위를 의심할수 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디킨슨의 말마따나 ‘조롱거리가 되지않는 것을 묘사하려 했던 여성 작가들은 사회를 향해 비판적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예술적 회피나 은폐는 대부분 남성 작가들보다훨씬 더 정교하다. 19세기 문학 문화의 가부장적 편견을 감안한다면, 여성 문인은 감추어야 할 중요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85

최근 페미니즘 연구가들이 상실되거나 은폐되었던 여성 문화의 많은 진실을 복원한 덕분에, 여성 독자들은 19세기 여성 문인들이 무언가를 숨겨야 한다고 느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여성의 글에 나타나는 회피와 은폐 현상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상상력』에서 퍼트리샤 마이어 스펙스는 여성 작가들이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진실에 대해 여성 작가의 소설이 드러낸 ‘땅밑의 도전‘ 같은 방식들을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캐럴린 하일브런과 캐서린 스팀프슨은 여성문학에 나타난 ‘부재의 현전‘, ‘작품 안의 구멍, 중심, 동굴(자신이 기대한 활동이 상실되었거나[··] 거짓으로 부호화되어 있는 장소들)‘에 대해 논한다.  - P185

따라서 이 미친 분신은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의 한층 반항적인 이야기에서 중요하듯 제인 오스틴이나 조지 엘리엇의 지극히 온전한 소설에서도 중요하다. 고딕 작가와 반고딕 작가 두부류는 모두 선택받은 수녀와 저주받은 마녀 사이에 있는 에밀리 디킨슨처럼, 또는 고상하고 비판적인 과학자와 분노에 찬 어린에 같은 괴물 사이에 있는 메리 셸리처럼, 자신을 분열된 자아로 재현했다. 여성 작가의 이런 정신분열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것이 19세기 작가들을 (자신을 댈러웨이 부인과 미친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 둘 다에게 투사하는) 버지니아 울프, (자신을 분별 있는 마사 헤세와 미친 린다 콜리지 사이에서 분열시키는) 도리스 레싱, (자신을 석고로 만들어진 성자이자 위험한 ‘늙은 황색‘ 괴물로 본) 실비아 플라스 같은 20세기의 후배 작가들과 연결해주기 때문이다. - P190

말하지 않는 법을 버리기‘와 같은 매우 결정적인 투쟁을 벌였음에도 예술의 외관 뒤에 숨는다는 것은 여전히 숨기는 것이고 제한받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비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감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보내는 통렬하고도 통찰력 있는 시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노래하기를, 디킨슨은 나름의 ‘반쯤 미친 방식으로‘ ‘즐거움을 위해 침묵을 선택했으며, ‘마침내 [그녀] 자신의 집에서도 /침묵을 선택했다‘고 했다.  - P197

이것은 바로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작업대를 5센티미터 폭의 작은 상아 조각이라고 아이러니하게규정하면서 그녀가 선택한 바이며, 에밀리 브론테가 자신의 시를 부엌 찬장에 숨기면서 (그리고 아마 자신의 곤달 이야기를없애버리면서) 그녀가 선택했던 바이며, 크리스티나 로세티가 ‘수도원 문설주‘와 같은 종교적인 속박을 칭송했던 예술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바다. 리치의 집/전제premises 라는 다의어적 말장난은 우리를 이 여성들의 감금, 즉 가장 위대한 승리의 순간에도 피할 수 없었던 감금, 비밀 속에 내포되어있는 감금으로 데려간다. 이 감금은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이다. 글자 그대로 디킨슨, 브론테, 로세티 같은 여자들은 가 - P197

정, 아버지의 집에 갇혀 있었다. 실제로 거의 모든 19세기 여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남자의 집에 갇혀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여자들은 비유적으로 남성 텍스트에 갇혀 있었고, 오로지독창적인 재간과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남성 텍스트에서 도망칠수 있었다. 그러므로 거의 강박적인 강렬함으로 잘 다듬어진 폐쇄와 탈출이라는 공간적 이미지가 그들 작품의 특징이라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공간에 대한 불안이 19세기와 20세기 여성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엘런 모어스가 최근에 ‘여성 고딕‘이라고 불렀던 장르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대개 이해할 수없을 만큼 복잡하거나, 숨막히게 답답한 집에 붙잡혀 있거나, 족쇄가 채워져 있거나, 덫에 걸렸거나, 심지어 산 채로 묻혀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 P198

글자 그대로의 집이 된다는 것은 결국 몸을 정신적으로 초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그런 초월성이야말로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주장했듯, 인간을 고유하게 인간으로 만들어주는데 말이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출산에 갇혀 있는 것은(그리고 우리가 지금 ‘출산‘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19세기 단어가 ‘감금‘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떤 점에서는 집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다. 사실상 여성 문인에게,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하는 것처럼, 임신의 감금은 사회의 감금을 반복하는 것처럼 다가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은유적으로만 초월을 거부당했다고 할지라도, 집/몸의 방정식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여성 작가는 그런 은유가 그녀를 유리 관에 ‘넣을‘ 뿐 아니라 그녀 자신을 일종의 유리 관으로 변형시킨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 P206

따라서 그런 은유의 그물망에 갇힌 채, 이른바 에이드리언 리치가 명명한 ‘생각하는 여자‘는 자신이 자신의 이질적이고 혐오스러운 몸에 갇혀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여성 예술가는 갇혀 있는 수인은 물론이요괴물이 된다.
마치 이 모든 문제들을 종합해서 (다시 말하자면 여성 작가들이 유사한 병행적 감금으로 보았던 텍스트와 집, 출산하는여성의 몸 등 불안을 유발하는 모든 것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논평하려는 듯, 샬럿 퍼킨스 길먼은 이 모든 문제를 결합시켜 1890년에 여성의 감금과 탈출에 대해 놀라운 이야기를 썼다. - P206

에밀리 디킨스처럼 길먼도 ‘감염된 문장도 새끼를 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여성의 절망에 대한 치료는육체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어야 하며,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미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먼은 「누런 벽지」를 통해 ‘미쳤다‘고 추정되는 여자가 자신의 몸이라는 ‘감염된‘ 집에 갇히는 형을 받았을 때조차 (70년 후 실비아 플라스가 말했던 것처럼) "회복할 자아, 여왕‘이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 P211

‘경계‘와 ‘울타리‘라는 공간 이미지는 작가들이 제인오스틴을 받아들일 때마다 확산해나가는 것 같다. 마치 오스틴이 드러내는 바에 대한 그들 자신의 불안을 보여주는 듯하다.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논평은 ‘오스틴은 나름대로 훌륭하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거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대표적이며,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오스틴의 소설을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것은 확실하다. 다만 멀리 나아가지 않을 뿐이라고 가볍게 묘사한 것도 마찬가지다. 에머슨이 오스틴의 이야기의 사소함과 하찮은 가정사에 혐오감을 느끼며 ‘왜 사람들이 오스턴의 소설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어조는 저속하고, 예술적 창작력은 빈곤하고, 영국 사회의 불쌍한 인습에 갇혀 있으며, 천재적 재능이나 위트도 없고, 세계 - P236

에 대한 지식도 없다. 삶이 심각하게 위축되거나 힘겨웠던 적도없다. 내가 읽은 두 작품 『설득』과 『오만과 편견』에 드러난 작가마음속의 문제는 오직 결혼할 수 있느냐다. 소설 속 인물들의모든 관심은 오로지 그 한 가지 문제, 그(또는 그녀)에게 결혼할 돈과 적합한 조건이 있느냐다. 그것은 ‘맹목적인 절망‘, 이를테면 영국 하숙집의 ‘광기‘에 가깝다. 자살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 P237

그러나 오스틴의 사소함을 진부한 태도로 판단한 남성 중 단연 압권은 마크 트웨인일 것이다. 트웨인은 오스틴의 가장 강력한 미국인 옹호자였던 윌리엄 딘 하우얼스에게 편지를 쓸 때오스틴의 이름을 정확하게 쓸 마음도 없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산문은 읽을 수 없다. 제인 오스틴의 글처럼‘이라고 말하면서 둘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고 덧붙인다. ‘돈을 받는다면 포의 산문은 읽을 수 있지만 제인의 산문은 그렇지 않다. 제인 오스틴은 조금도 못 참겠다. 그들이 그녀를 자연사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 유감천만이다.‘‘‘ D. H. 로런스도 오스틴을 공격하면서 여성 작가를 향한 유사한 적의를 표현했다. 로런스는 오스틴을 ‘인물 대신 ‘성격‘을 전형화하며, 종합적으로 아는 것 대신 따로따로 날카롭게 아는 노처녀‘라고 비난했고, ‘내가 느끼기에 오스틴은 매우 불쾌하고 형편없고 인색하고 속물적이라는 의미에서‘ 영국적이라고 했다.  - P237

오스틴은 문화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녀가 끈질기게 보여준 자신이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에 대한 불편함, 특히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부여한 협소한 위치에 대한 불만, 성적 착취의 경제학에 대한 분석은 지금도 충격적이다. 동시에 오스틴은 처음부터
자신에게는 좁은 장소 이외의 다른 어떤 곳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의 패러디 전략은 부적절하지만 피할 수 없는 구조에대항한 자신의 싸움에 대한 증언이다. 만일 스콧과 브론테, 에퍼슨과 제임스처럼 우리가 계속 오스틴의 세계를 협소하고 하찮다고만 본다면, 우리는 험버스톨에게 ‘우리가 좁은 곳에 있을때 제인을 필적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 협소한 장소는 문학적이며 사회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패러디적인 초기 작품부터 읽어나갈 것이다.  - 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또 백설 공주나 사악한 여왕처럼, 이들의 초기 욕망이 양가적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유리관 속에서 숨 막히게 꼭끼는 코르셋으로 자기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조이거나, 거울밖으로 나와 불같은 죽음의 춤을 추어 스스로를 파괴하라고 유혹받는다. 그러나 천사와 괴물이라는 한 쌍의 이미지가 제시하는 걸림돌이 가로놓여 있었어도,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과 불모성에 대한 공포로 고통을 받았어도, 여성 작가들은 작품을 산출했다. 18세기 말까지 여성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책 전반에서 우리가 보게 될 가장 중요한 현상인데)가부장적인 이미지와 인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허구의 세계를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앤 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텍스트라는 유리 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문학적 권위에 대한 근본 정의는 공공그리고 은근히 가부장적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작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학 전통이 여성들에게 제해주는 주된 이미지가 천사와 괴물, 착하지만 바보 같은 백설사고 광적인 여왕 같은 극단적인 대립쌍뿐이라면, 그이미지는 여성이 글을 쓰는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마왕의 거울이 왕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그 목소리가 들려주는생원한 춘계는 여왕 자신의 목소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여성이 듣는 목소리가 주로 왕의 목소리인 만큼 여왕은 왕의 음색, 왕의 억양, 왕의 표현, 왕의 관점을 모방하여 왕처럼 들리도록 애쓰지 않을까? 아니면 여왕은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면서 - P140

자신의 음색과 자신의 어휘로 왕에게 ‘응수‘ 할까?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답변해야 할 기본 질문은바로 이런 물음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19세기 여성문학을동해할 때 이 장뿐만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 질문들로 되돌아가야 한다.
작가들이 선배들의 업적을 소화하고 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을 긍정하거나 거부하는 일은 문학사에서 당연히중요하다. T. S. 엘리엇, M. H. 에이브럼스, 에리히 아우어바흐 프랭크 커모드 같은 다양한 이론가들은 그것의 미학적 형이상학적 의미를 상세하게 논의한 바 있다.‘ 좀 더 최근에는 일부문학 이론가들이 문학사의 심리학이라 부르는 것(작가들이 선배들의 업적뿐 아니라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장르, 문체, 은유의 전통과 직면했을 때 느끼는 긴장, 불안, 적대감, 결여 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J. 힐리스 밀러가 말했듯이 이런 비평가들은 문학작품이 ‘이전 작품들의 현존, 메아리, 인유, 손님, 유령이라는 기생체의 거주지‘가 되는 방식을 연구한다. - P141

미첼과 다른 이론가들이 주장한 합리적 심리분석적 이유뿐만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에도, 블룸이 남성 작가에게 제시했던 오이디푸스적 구조에 상응하는 엘렉트라 패턴에 여성 작가를 가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성 작가가 여성 모델을 찾는 이유는 (우리는 여성들이 줄곧 이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여성성‘에 대한 남성의 정의를 충실하게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저항을 합리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의 대부분 여성처럼 여성 작가도 자신의 젠더를 고통스러운 걸림돌 내지 쇠약하게 만드는 부족함으로까지 경험한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대다수 여성들처럼, 여성작가는 미첼이 말한 ‘가부장제 여성들을 열등하게 취급하는 ‘대 - P146

체‘(『제2의 성』) 심리학‘의 희생자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 예술가의 고독, 여성 선배와 후배에 대한 갈증과 남성 선배로부터의소외감, 남성 독자의 반감을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 여성 독자에 대한 절박한 갈구, 문화적 조건 안의 자아를 극화시킬 때 튀어나오는 소심함, 예술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여성창조의 부적절함에 대한 불안 등등 이 모든 ‘열등화‘ 현상은 여성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정립하려는 분투의 표식이며,
자아 창조를 위한 그녀의 노력을 남성 작가와 구분해주는 현상이다. - P147

마치 디킨슨에게 화답하듯이, 고틀립은 선배 여성 작가를 찾는 과정에서 여성 작가는 감염과 쇠약만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 작가는 여전히 ‘여성적 힘‘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잃어버린 문학적 모계를 찾기위해서는 ‘그 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했을 때 어머니에 대한 디킨슨 자신의 고백은 많은 의미를 드러낸다. 디킨슨은 ‘나는 어머니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렸을 때 나는늘 집으로 두려움에 차 달려갔다. […] 어머니는 몹시 무서운사람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 어머니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기적이었다‘라고 말을 바꿔가며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드러나듯, 작가가 되는 일이 불러일으킨 그녀의 불안은 ‘절망‘이었다. 그것은 병든 생모와 고통받은 문학적 어머니가 옮겨 들이마신 절망일 뿐만 아니라, 가끔은 가까이서 가끔은 ‘수세기나 떨어진 곳에서‘ 그녀에게 말했던(‘거짓말‘까지 했던)문학적 아버지가 퍼뜨린, 문학적 텍스트라는 검열의 거울에서옮겨붙어 들이마신 절망이었다. - P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원평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과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2001년 제6회 <씨네21> 영화평론상을 받았고, 2006년 제3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순간을 믿어요>로 시나리오 시놉시스 부문을 수상했다.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인간> <너의 의미> 등 다수의 단편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첫 장편소설 《아몬드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두 번째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으로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다. 그전에 벌어진 피, 광장, 투쟁의 흔적은 사진과 다큐에서나 본 겪지 못한 옛날 얘기일 뿐이다. 세상은 몇 발자국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몇 발자국이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부당함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당연히 보통 사람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대세에 머리를 조아려 수긍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나는 남들과 달리 몹시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주목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야 하는 세상이 왔다. 나는 하필이면 이 시대에청춘의 끝자락을 맞이한 숱한 여럿 중 하나이다.
물론 내게도 시작이 있었다. 대부분의 탄생이 그러하듯, 내 삶의 시작도 누군가에겐 두고두고 얘기하는 특별한 추억이다.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엄마는 전국이 호돌이 마크로 도배되고 굴렁쇠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던 더웠던 여름날을 이야기하곤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펼쳐진 올림픽에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전국의 국민들은, 여덟 살아이가 굴렁쇠를 구르며 드넓은 운동장을 과연 실수 없이 가로지를 수있을 것인지를 두 주먹을 꽉 쥔 채 지켜봤다. - P8

학창 시절 내내 그런 일들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가나다가 ABC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뿐, 주변엔 어디에나 지혜가 산적해 있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심지어 한 반에 지혜가 다섯 명이었던 적도 있는데,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까만 지혜, 통통한 지혜 등, 이름보다 형용사가 구분의 기준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참 색깔이 없는 ‘작은 지혜‘였는데 특별히 내가작아서라기보단, 큰 지혜가 월등히 컸고 그에 비해 나는 덜 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전국의 지혜들은 역시 전국에 만만찮게 포진해 있는 민지, 은지, 은정, 혜진이 들과, 양념처럼 한 반에 한 명쯤은 포진한 보람, 아름, 슬기 들과 어울려 무럭무럭 커갔다.
- P12

복사기가 뿜어내는 금빛 섬광이 뺨 위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들이 토해져나온다. 예술가를 혐오했던 플라톤과 미적지근하게 인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앤디 워홀의 통조림과 메릴린 먼로의 사진도 흘러나온다. 유일무이한 오리지널이냐 복제와 레디메이드의 미학이냐. 예술의 본질에 대한 강의인가보다. 예술이창조냐 모방이나, 예술의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대학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강의와 커리큘럼이 비슷하다.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걸 들으러 오는 걸까. 이런 지식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문 바로 앞에는 커다란 나무가 뻗어 있는데 아직 잎이 돋지 않아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사무실 안에서 외부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가 바로 여기라는 점이다.  - P15

다시 복사를 시작한다.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어느 정도일까. 복사기토너? 나사 정도의 부품? 문득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딱 봐도, 성실하고 야무져 보이는 여대생이다. 면접장소가 어디냐고 조심조심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의 바르게 묻는다. 나는손끝으로 면접 장소를 가리켰다. 총총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싱그럽다. 아까 본 이력서 속 경력이 떠오른다. 여기서 일하기에 너무 모자람이 없는 이력이다.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모자람이 되어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지 못할 것이다. - P36

어쨌든 금요일이다. 그럭저럭 일을 마치고 프로모션으로 구백 원에, 판매 중인 마트 캔맥주를 몇 개 사서 집으로 들어왔다. 오층짜리 빌라의 오 층에 있는 쾌적하고 아담한 내 방 이라고 원주에 계신 부모님은 알고 계신다. 대학 때만 해도 실제 그런 집에 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를 상징하듯 점점 층수가 낮아지더니 어느덧 반지하다. 그래도 손바닥만 한 고시텔은 아니라는 점과, 그나마 아직은 지상과 지하에 걸쳐 있다는 게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부모님은 딸기 농장일을 하시느라 바쁘신 데다 서울에 거의 올라오시지 않는다. 가끔은 엄마가 갑자기 찾아오는 상상도 하지만 다행히 아직 상상은 현실이 된적이 없다.
- P36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 안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러니까내 인생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한입 머금고 목구멍 저아래에서부터 스며나오는 불안과 섞어 삼켜버린다. 연예인이자신의 사업 실패와 바가지 긁는 마누라 얘기를 털어놓으며 눈물 섞인웃음을 선사한다. 창밖으론 점점 화려해져가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있겠지. 어딘가 높은 곳에 사는 누군가의 눈엔 분명 그런 그림이 보일거다. 각자의 창으로 보이는 장면이 조금씩 다른 것뿐.
시계를 보려고 휴대폰을 들자 검은 액정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발그레한 얼굴과 풀린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웃음은 뇌를 춤추게 한단다.
가짜 웃음이든 진짜 웃음이든 일단 웃기만 하면 뇌는 도파민이니 뭐니하는 좋은 호르몬들을 생산한단다. 생전 만나볼 일 없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나를 웃게 한다.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으니 조금쯤은, 적어도하루쯤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거다. - P37

나는 그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라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하는 척 피해 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보통은 해. 가끔 덤벙대기도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있어‘ 정도면충분하다. 그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이다. 특히 대단한 보람이나연봉,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일수록.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인 걸까. 아니면 꿈이 없는 사람인 걸까. - P43

김 부장의 사직은 내게 커다란 혼란이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내가아니라 김 부장이 느껴야 마땅했다. 그의 인사평가에 그 쪽지가 보탬이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모르긴 해도 규옥조차 그런 생각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이면에는, 그 반동으로 이익을 누린 사람이 나라는 죄책감이숨어 있었다. 다시는 그를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만이 그 죄책감의면죄부였다.
대개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시간 속에 희석된다. 그러나 드물게는 영영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누군가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과거의 수치심을 복기시켰다. 내게 분노와 절망을 가르쳐준, 희미해진 기억 속의 아픈 존재가 - P147

그들은 공식적인 인터뷰를하거나 신상을 전면에 공개하는 대신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남겼다. 앵커가 조용히 그것을 읽었다.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는 나이 들어서 오늘을 기억할 겁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우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여전히 비판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가 수수께끼 같은 말이라며 마지막 두 문장을 읽어나갔다.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가 당신에게 어떤 권위를 부여할지 모르겠지만 잊지 마십시오. 의자는 의자일 뿐입니다."
마지막 문구가 익숙한 메아리처럼 귀를 울렸다. 나만 아는 비밀스런암호가 낯선 곳에서 전송되고 있었다. - P228

연달아 취업에 실패하던 시절, 정말 여기만은 내 자리일 거라고 생각했던 면접을 망치고 나오던 날, 날이 참 밝았었다. 어딜 올려다봐도 뿌연 대기에 가려 해도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눈이 부셔 눈을 뜨기조차힘든 날이었다. 거기다 비 온 흔적도 없는데 바닥은 시야 끝까지 다 젖어 있어 몹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무거운 마음을 실어 터벅터벅 걷는데 갑자기 발밑에 무지개가 떠서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흘러온 기름이 작은 물웅덩이에 고여 찬란한무지개띠를 만들어낸 거였다. 그런데 모양이며 색이 어찌나 선명한지,
진짜 무지개보다 더 진짜 같았다. 그 묘한 아름다움이 생경해서 기름띠가 물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꼭 비온뒤 청명한 하늘에 뜨는 무지개만 아름다운 건 아니구나. 아무런 사건도등장인물도 없는 그날의 기름 무지개가 내 인생에서 꼽는 몇 장면 중 하나란 건 참 아이러니하다. - P232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P232

하지만 내가 진짜 나아가고 싶었던 곳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다 싶으면 갑자기 거대한산이 나타났고 기를 써서 그 산을 넘었더니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어이없는 여정이었다. 그간 쌓아온 노력이나 나만의 색깔 같은 건 비웃듯 획 내동댕이쳐져서 처음부터, 완전한 0에서, 아무런 힌트도 없이, 그저 다시 시작하라는 못하겠으면 그만두라는 지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곤 했다. 그 지령은 늘 내가 만나볼 수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결정됐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이 내게 내린 명령이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름 모를 평가자들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었던 귀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거라고 하하하. 하고 위악을 떨며 허세를 부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용을 썼다. 굳이 말하자면 그게 내 나름의 반격이었다. 그러나 내가 허세 어린 동정론을 펴든 지쳐서 울든 세상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다. 이상에 도달하는 건 어려운 것이고, 반복된 실패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 P2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발치


이를 빼고 치과를 나서니 스산한 바람이 분다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걸 그동안 몰랐다
아니 통증을 전하는 방식으로 여러 차례
알려왔으나 애써 무시하며 지냈다
이런 일 여러번 겪어본 아내는
바람이 사소하게 불어도 흔들릴 풍치의 나날과
둘 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이 견뎌야 할 불안한
노후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허전해지는 삶의 한 모서리 사리물고
초가을에서 깊은 가을로 돌아오는 길
옹송그리며 서 있는 과꽃 몇송이가 보인다
이파리 몇개는 벌레 먹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도
자줏빛 꽃 곱게 피우고 있는 게 예쁘다

겨울비


아침부터 겨울비 내리고 바람 스산한 날이었다
술자리에 안경을 놓고 가셨던 선생님이
안경을 찾으러 나오셨다가
생태찌개 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색 바랜 연두색 양산을 들고 계셨고내 우산은 손잡이가 녹슬어 잘 펴지지 않았다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툭하면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땐 이렇게 찢기고 갈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가장 큰 목소릴 내던 이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철창 안에서도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담요에 엉긴 핏자국보다 끈끈한 어떤 게 있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겁이 많은 선생님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 중도가 좋다고 하시면서
안경을 안 쓰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낮부터 ‘처음처럼‘만 두 병 세 병 비우셨다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는 왼쪽에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월이
다시 오고 추적추적 겨울비는 내리는데
선생님 옛날이야기를 머리만 남은 생태도
우리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옛날은 없는데
주말에는 눈까지 내려 온 나라 얼어붙는다고 하는데

은은함에 대하여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한 송이 꽃


이른 봄에 핀
한 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