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오공은 어째서 석가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간단히 말하면, 이 대결은 유위법과 무위법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손오공은 철저히 물질과 문명, 곧 유위법의 화신이다. 변신을 하고불멸을 쟁취하고 하늘을 지배하고..... 이것은 자아의 무한증식을의미한다. 이 유위의 회로를 밟는 순간 누구도 멈추지 못한다. 인류역사가 그 산 증거다. 진시황을 비롯하여 모든 제왕들은 제국을정복, 통일한 이후 불로장생을 갈망했다. 모두가 실패했지만 이욕망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을 탐구하고 과학을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걸 활용해서 무기를 만들고 다시 세계를정복하고, 그 다음엔 또 불멸을 시도하고, 할리우드 영화가주구장창 반복하는 패턴이 이것 아닌가. 세상을 내 손 안에 넣고영원히 쥐락펴락하고 싶은 욕망! - P83

반면 석가여래는 이 세계의 근원적 무상성을 터득한 존재다.
마음에는 자성이 없다. 돌원숭이에게 근본이 없듯이, 그것은불현 듯 생겨난 곧 특별한 인연조건의 산물일 뿐이다. 아울러 이우주의 모든 것은 생성·소멸한다. 불멸은 없다. 불멸하는 건 ‘모든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무상하다. 이 무상의 방법적표현이 무위다. 하지만 마음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그때부터 인간은 무위법을 거부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과 증식, 이것은 결국 모든 타자들을 먹어치우면서만이 가능하다. 먹는 자와먹히는 자. 이것을 멈추게 하려면 유위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하늘나라의 온갖 고수들이 다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있다. 석가여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무위법을 온전히 터득한 이다. 유위법은 결코 무위법을 이길 수 없다. - P83

하지만 이건 서곡에 불과했다. 장안을 출발하여 양주 땅에 도착하자 황제의 칙령에 의해 강제소환을 당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다. 불법佛法을 위해 불법을 감행한 것. 하지만 그것이 도다. 도와 진리에는 국적도, 국경도 없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걸어야 할 보편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장면은 정반대다. 삼장법사는 당태종과 의형제를 맺고, 온갖 혜택을 다 받은 다음 제자 둘에 백마 한 필까지 제공받는다. "고향의 한 줌 흙은 그리워할지언정 타향의 황금 만냥을 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하지만 국경에 이르렀을 즈음,
삼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달빛을 보며 나아가다 갑자기 발을 헛디뎌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들소, 곰, 호랑이요괴들의 소행이었다. 덕분에 두 제자는 졸지에 요괴들의 밥이되었다. 81난 가운데 첫번째 고난을 맞이한 것. 결과적으로 실제의 현장법사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었다. - P90

여기서 알 수 있는바, 버려야 떠난다는 것, 떠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 당태종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이 길을 대신 갈수는 없다. 군대를 풀어 엄호해 줄 수도 없다. 이것은 제국의 통치력,
그 너머에 있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길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부처는 마음이요 마음은 부처니"
"오는 것도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 "버리기도 취하기도 바라는 것도 어렵도다."(2권 97쪽)이 불가사의한 매트릭스로 들어가려면 삼장법사 스스로 길을 열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걱정마시라! 관음보살을 비롯하여 천지만물이 그를 엄호해 줄것이고, 또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등 요괴 출신의 세 제자들이끝까지 그와 함께할 터이니. - P91

마지막으로 삼장법사. 스승이자 리더지만 별 활약이 없다. 일단세상물정에 어둡고 분별력, 판단력 모두 제로다. 요괴들이 속임수를쓰면 100퍼센트 넘어간다. 난관에 봉착하면 일단 징징거리거나운다. 저팔계의 이간질에 쉽게 놀아나서 제자들을 분열시킨다. 참, 이렇게 무능하기도 힘들다. 실제의 현장법사는 팔방미인이라가는 곳마다 찬사를 받았다는데, 작품 속의 이 ‘짝퉁‘은 달라도이렇게 다를 수가 한편 따져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현장법사는 ‘고독한 솔로‘였지만 삼장법사는 ‘밴드‘로 움직인다. 밴드로 움직이려면 힘이 한쪽으로 쏠려서는 곤란하다.  - P107

그렇다면 실제 현장법사의 출중한 능력을 세 제자가 나누어 가졌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그러니 삼장법사는 ‘저런‘ 수준이 될 수밖에. 엉뚱한 논리 같지만, 능력과 힘에도 질량 불변의 법칙이 있는 셈이다.
더 중요한 사항 하나. 어떤 조직이건 리더는 좀 ‘빈‘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멤버들이 개성을 펼칠 수 있다. 특히 이 제자들은 요괴 시절에 지은 죄가 많아서 무수한 공덕을-쌓아야 한다. 또 그들이 지닌 기예 - 손오공의 72가지 변신술,
저팔계의 36가지 변신술, 사오정의 항요장降妖杖: 둥글게 두 갈래로 갈라진창 등- 는 일종의 테크닉이지 도가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면 자신의 기량을 부지런히 발휘해야 한다. 아낌없이 쓰고 또 씀으로써 ‘탐진치‘의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 - P108

요괴들이 삼장법사를 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십세를 돌며 수행을 한 몸이라 ‘원‘을 고스란히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살‘을 먹으면 불로장생을 얻을 수있단다. 그런 점에서 삼장법사는 ‘텅 빈‘ 듯하지만 한없이 ‘충만한‘
신체다. 즉, 천지만물을 생육시키는 우주적 흐름과 연동되어 있는것. 하여, 그에게는 어떤 결핍도 간극도 없다. 요괴들은 그의 살을
‘먹음‘으로써 이 충만함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 P110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호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나왔을까. 나를 적대시하는 이들은 나를 궁극적으로 분발시킨다. 하지만 나에게 무한한 호의를 베푸는 이들은 나를 하나의 고정된 영역에 묶어두고자 한다. 내 안에 있는 능력을 독점하고 싶어서다. 수행자들이
최후에 마주치는 함정이 여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삼장법사와아이들‘은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저팔계만이 매번 우왕좌왕하지만 그 역시 정착해서 부귀를 누리기보다는 스승과두 형제들을 따라가기를 선택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구도는 유목이다! 구도와 유목이 마주칠 때, 그때 비로소 윤리가 탄생한다.
정착민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고귀하고 유쾌한! 강렬하고 유연한! - P113

삼장법사는 십세토록 원양을 보존해 왔지만 사람의몸을 지니고 있는 한 결코 81난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운명이다. 세 명의 제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앞에서밝혔듯이, 이들은 ‘탐진치‘의 화신들이다. ‘탐진치‘를 덜어내고무상과 자비를 터득하려면 끊임없이 싸우고 또 겪어야 한다.
그래야만 ‘탐진치‘로 향하는 기질과 습관이 덜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들에겐 전투와 환란이 곧 공부이자 수행인 것. 따라서 이싸움은 요괴와의 싸움이자 동시에 자신과의 대결이기도 하다. - P116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의아한 점이 있다. 그렇게 펄펄 날다가도 요괴들은 왜 주인만 오면 맥을 못 추는 것일까. 그 정도의 술법이면 주인하고도 ‘맞짱‘을 뜰 만한데 말이다. 이치는 간단하다. 스스로 터득한 능력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훔쳐왔기 때문이다. 그 경우엔ㅈ스스로 생성하고 창조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술법은 주로 부정적 파괴적 힘으로만 작용한다. 졸개들을 거느리고
‘나와바리‘를 점령하고 길을 막는 것. 다시 말해, 타인의 능력을 빼앗는 데는 능하지만 뭔가를 창조하고 생성하기엔 역부족이다.
그래서 ‘반자연‘이다. 니체가 말한 노예의 도덕이 이런 것일 터.
아무리 거대하고 강하다 한들 자신이 생성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아니고, 아무리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다. 그래서 자연에는대/소, 강/약의 척도가 아니라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적용된다.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노예가 될 것인가?
요괴와 구도자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 P125

적이면서 동시에 나의 분신이고, 영웅이면서 원수이며, 천하에몹쓸 요물이면서 동시에 보살의 현현이다. 안에 있는가 하면 밖에있고, 밖에서 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나의 심연을 차지하고 있다.
전후좌우 그 어디에도 있고, 또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요괴들의정체다. 그런 점에서 요괴란 일종의 ‘화두다. 깨달음에 도달하기위해 반드시 던져야 하는 존재와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화두!
삼장법사와 세 제자들은 이 화두를 붙들고 끊임없이 씨름한다.
그러므로 요괴를 만나지 않고서 도를 깨치는 건 불가능하다!
- P126

선을 행하고, 공양을 올리고, 수행을 하고, 경전을 낭송한다.
이게 다야? 라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게 다다.
기독교의 천국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가 천국이 되려면 한없이 담백하고 평화로운 삶이 펼쳐져야 한다. 하여 모두가 수행자이자진리의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그뿐이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천국이나 극락을 상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 P127

삼장법사 일행은 능운도를 거쳐 ‘바닥 없는 배를 타고 피안에이른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 삼장법사는 마침내 몸의 태를 벗고해탈의 경지에 오른다. 그러자 삼장법사는 세 제자들에게 감사를표한다. 손오공의 답변, "사부님이나 저희나 모두 감사할 필요없습니다. 서로가 모두 돕고 의지한 것이니까요. 저희들은 사부님덕분에 해탈하고, 불문을 통해 공을 닦아 다행히 정과를 이루게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저희들의 보호를 받아 불법의 가르침을지켜 다행히 세속의 태를 벗게 되셨습니다."(10권, 212쪽. 오, 놀라워라!
이 ‘콩가루 밴드‘가 ‘모든 존재는 서로 돕고 의지한다‘는 인연법의오묘한 경지를 깨치게 되다니. 과연 여기가 서천임이 분명하다. - P128

‘긴고테를 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삼장법사가 말한다. "예전에는너를 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법력을 써서 너를 다스렸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부처가 됐으니 벌써 저절로 없어져버렸느니라. 아직까지 그 테가 머리 위에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느냐?
한번 만져 보아라."(10권, 284쪽 누군가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스스로 풀렸다. 그렇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 P131

돈키호테는 ‘보통명사‘다. 스페인어를 몰라도 아니 그게스페인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돈키호테가 뭔지는 안다. 명성에 관한 한, 돈키호테의 꿈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데뽀로돌진하는 또라이‘, ‘대책 없는 몽상가 등이라는 걸 안다면? 다시금투구를 쓰고 애마 로시난테를 달려 창을 휘둘러 댈까? 그렇지 않을것이다. 왜냐고? 죽기 직전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기사도에 미쳐날뛰던 그가 기사도 책들을 불태우고 저주하면서 죽은 것이다.
그의 묘비명이 그 증거다.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 P135

‘미치면 살고 정신 차리면 죽는다‘는 뜻인가? 그럴 수도 있다.
삶은 광기고, 죽음은 그 치유다, 고 읽어도 될까? 역시 무방하다.
그럼 광기란 대체 무엇인가? 또 삶과 죽음은? 이처럼 이 묘비명,
아니 돈키호테의 행적은 수많은 독해가 가능하다. 파면 팔수록 새로운 질문들이 생성된다. 이런 작업을 일러 고고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돈키호테는 광기에 대한 고고학적 탐색이다. 하지만 그작업에 동참하려면 우리도 여행을 해야 한다. 돈키호테와 함께 엉뚱발랄, 좌충우돌, 황당무계한 여행을내가 이 여행을 주목하게 된 건 『열하일기』로 인해서다.
『열하일기』를 통해 세계의 모든 여행기를 섭렵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게 되었는데, 그 야망에 더더욱 불을 지핀 이들이있었으니, 루카치·푸코·보르헤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대표작에는 돈키호테』가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한다. 이 지성사의 거장들은 왜 - P135

한결같이 『돈키호테』에 심취했을까? 이 미스터리를 꼭 풀고 싶다!
내가 선택한 번역본은 민용태 번역의 『돈키호테』 1‘2(창비,2005.
이하 이 장에서 이를 인용할 때에는 권수와 쪽수로 표시한다)다. 이 책의 미덕은 주석의 깊이와 세밀함이다. 아울러 작품의 묘미 가운데 하나가 돈키호테의 고상한 말을 산초가 늘 ‘싼티 나게‘ 비슷한 발음의 다른 언어로 옮기는 장면인데, 이걸 스페인어로 직역을 하면 실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역자는 그에 상응하는 우리말로 과감하게 의역을 시도한다. 예컨대 ‘재판‘에는 ‘개판‘으로, ‘일식, 월식‘에는 ‘해와 달의 질식‘으로, ‘풍년‘에는 ‘횡년‘으로, 기타 등등. 이런 언어유희를 음미하는 맛이 참 쏠쏠하다. - P136

생몰 연대가 보여 주듯, 세르반테스(1547~1616)와 셰익스피어(1564~1616)는 동시대인이다. 나이로는 후자가 훨씬 어리지만,
사망한 해는 물론 날짜까지 같다(1616년 4월 23일. 이 두 작가를 기려유네스코는 이날을 세계 책의 날‘로 지정했다고 한다). 유럽문학의거장이자 라이벌이 같은 시대에 활동한 것이다. 물론 작품의성향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또 셰익스피어는 햄릿 못지않게명성이 높지만, 세르반테스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작품의 차원에선셰익스피어의 어떤 명작도 ‘돈키호테』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런점에서 세르반테스의 라이벌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자신의
‘의붓자식‘인 ‘돈키호테‘인 셈이다. 하지만 막상 인생 역정을살펴보면 세르반테스의 인생이 돈키호테의 모험과 광기를 압도한다.
- P136

삶의 현장은 몸이다. 몸의 생리와 무관한 심리는 없다. 생리와심리의 흐름이 삶의 동선을 만들어 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의 신체적 특징은 이렇다. 골수가 말랐고, 늘 팔뚝 힘을과시하지만 하체는 엄청 부실하다. 잠이 거의 없고, 식욕도 최소수준이다. 그의 광기와 이런 신체성은 어떻게 연결될까? 주석을보면, "세르반테스와 잘 아는 우아르테 박사의 사상이론으로 해석하면, ‘마르다‘는 ‘지혜롭다‘는 뜻"으로, "속물들의 눈에는 돈키호테가 책을 읽다 돌아버린 것이고, 신의 눈에는 그가 참공부를 하고 신비로운 눈을 갖고 다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럴싸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는 몸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 P140

『동의보감』에는 이런 증상이 다반사로출현한다. 양생의 기본척도는 수승화강水昇火降: 물은 올라가고 불은내려간다는 뜻이다. 그게 잘 안 될 때의 증상을 ‘음허화동陰虛火動이라고한다. 음이 고갈되어서 화가 망동한다는 뜻. 그 불길로 인해 골수가 말라 버리고, 그러면 머릿속이 온통 망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심하면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만!‘ 보게 된다. 또 시선이 오로지 밖을 향하는 탓으로 인정욕망에 불타게 된다. 망상과 명예욕의 긴밀한 유착!
이 불의 세기를 조절해 주는 것이 물이다. 물을 주관하는장기는 신장이다. 고로, 신장의 물은 ‘존재의 평형수‘에 해당한다.
평형수가 마르고 불이 치성해지면 존재의 무게중심이 위로 떠버린다. 세월호 참사에서 사무치게 확인했듯이, 무게중심이올라가면 삶의 복원력을 잃어버린다. 돈키호테가 바로 그런 - P140

케이스다. 무게중심이 솟구치다 못해 완전히 ‘공중부양‘된 상태다.
그 결과 책과 세계의 관계가 전도되어 버렸다. 처음엔 세상을이해하기 위해 책을 보다가 이젠 책이 곧 세상이 되어 버린 것.
현대인들에게도 흔한 증상이다. 기사소설 대신 게임, 주식, 쇼핑, 야동 등으로 종목이 바뀌었을 뿐. 하여, 현대인들 역시 ‘음허화동‘을주기적으로 겪는다. - P141

돈키호테의 진짜 저자가 누구야? 이 물음의 의미를 모른다면 당신은 아직 책을 읽지 않은 것이다. 작품 속에는 수많은 저자들이 등장한다. 일단 원작자는 아랍인 ‘씨데 아메테 베넹헬리‘다.
기독교의 이상을 구현하는 게 기사소설인데, 무슬림이 저자라구?
이것부터가 세르반테스식 풍자요, 아이러니다. 원작자가 아랍인이면 그걸 번역한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그러면 역자는 누구인가? 그와 세르반테스의 관계는? 파고들수록 헷갈리기만한다. 그렇다. 이 작품에는 ‘다중적‘ 목소리가 흘러넘친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그려 놓은 동그라미 안에서 뺑뺑 돌지만, 세르반테스의 화법은 텍스트를 사방으로 분사한다.
지성사의 거장들이 돈키호테』를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돈키호테』를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경계에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이것이 인식론적 차원의 접근이라면, 루카치의 찬사는 역사철학에 근거한다. "세계문학 최초의 위대한 이 소설은 바야흐로 기독교의 신이 세계를 떠나기 시작하는 시대의 초엽에 서 있다." 즉, 돈키호테」는 ‘영원한 내용과 영원한 태도도 그 시간이 끝나버리면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멜랑콜리‘이다. 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 - P150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돈키호테에게는 꿈이지만 사실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눈꼽만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책에서 본 대로 믿는 정도를 넘어 이젠 믿는 대로 본다.
"보면 알게 된다" 가 아니라 "아는 대로 본다"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가히 전도망상의 진수다. 요컨대, 1권에선 허공을 향해 하이킥을 날리더니 이젠 아득한 동굴 안에서 일장춘몽에 빠져 버렸다.
허공에서 심연으로! 그런 점에서 비상과 추락은 한 쌍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다. 뒤집으면 비상을 꿈꾸는자만이 추락하게 된다. 높이 날아오르거나 아니면 깊이 침몰하거나,
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것이 광기다. 그래서 한 번도 현실에발을 딛지 못한다. 삶은 비상도 추락도 아니고, 걷는 것이다. 한걸음씩 앞을 향해 걷는 것, 그것이 삶이요 길이다. - P161

하지만 먼저 세르반테스는 길 위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웠다.
라틴어와 수학, 별을 보고 시간을 헤아리는 법, 철학과 문학 등등.
길이 곧 대학이요, 강의실이었다. 더 중요한 건 화술이다. 온갖이야기를 주워듣는 귀동냥과 그걸 자신의 스타일대로 쏟아낼수 있는 입담을 터득한 것이다. 알제리로 팔려가서도 그 지역의통치자인 하산 파샤의 측근이 되어 특급 대우를 받았다. 그 이유는다름 아닌 그의 말솜씨였다. 세금징수원임에도 지역의 서민들과깊이 교감할 수 있었던 것, 종교재판을 받기 직전 극적으로 구출된것 역시 다름 아닌 그의 말솜씨 덕분이었다. 그 말들이 실개천처럼흘러들어 50대 후반 감옥의 한 독방에서 『돈키호테』라는 도도한 강을 이루었다.
그렇다! 반전의 포인트는 역시 ‘말‘이다. 이 말에는 행동과 덕이 - P175

수반된다. 그래서 로고스다. 로고스란 ‘말과 진리‘, ‘말과 지성‘의직접적 일치를 뜻하는 낱말이다.


『돈키호테』는 소위 정통소설과는 많이 다르다. 저자와 번역자, 작중 화자가 수시로 교차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토리 라인도 ‘기승전결‘의 스텝을 밟지 않는다. 또 ‘소설은 부르주아 시대의 서사시‘라는 루카치의 정의대로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갖은 고난을 거친 다음 성숙한 존재에 이른다는 성장소설의 유형과는 더더욱거리가 멀다. 중간중간 이야기들이 마구 끼어든다. 1권에선 ‘미친 에로스의 화신‘들과 ‘막장 남녀‘들의 이야기가, 2권에선 각종 연극, 인형극, 가면극이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 Félix Guattari가 말한
‘리즘‘이 연상시킬 정도로 얽히고설킨다. 그래서 돈키호테』에 대한 평가 역시 다중적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것을 최초의 ‘근대적‘ 작품이라 평했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선구로 추앙받기도 한다. 근대와 탈근대를 동시에 넘나드는 아주 ‘기발한 작품이 된 것이다. - P176

말은 에너지고 파동이다. 한번 태어나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변이할 뿐! 생장수장生長收藏 만물이 나서 자라고 수확하고 저장하면서때론 어울리고 때론 맞선다. 돈키호테의 웅변과 산초의 속담 역시그러하다. 1권에선 전자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권에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후자가 전자를 ‘찜 쪄 먹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산초가 하도 속담을 가지고 ‘개똥철학‘을 떠들어 대니까돈키호테가 "자네 그 연설 끝났나, 산초?" "이러다 내가 죽기 전에제발 그 입 좀 막아야겠다"2권, 259쪽)고 애원할 지경이다. 하지만산초는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소인이 말을 하고자 할 때는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라고 맞선다. 돈키호테는 절규한다.
"이런 육시랄, 육만 악마가 와서 제발 좀 너와 너의 그 알량한속담을 가져가라고 해라! 그 놈의 속담을 한 시간 동안이나 줄줄이주워섬기면서 그 하나하나로 그야말로 내게 물고문을 하고 있구나. - P179

요컨대, 언어는 권력이자 용법이고, 배치의 산물이다. 그것이놓여 있는 조건에 따라 광기가 되기도 하고 지혜가 되기도 한다.
바보짓이 되기도 하고, 고매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돈키호테』가뿜어내는 다중성의 원천도 거기에 있다. 이런 설정을 더한층과격하게 실험한 작가가 보르헤스다.
20세기 지성사에서 보르헤스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다.
20세기 중후반의 모든 사유에는 그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고해도 무방할 정도다. 예컨대, 푸코의 『말과 사물도 보르헤스의분류법에서 시작한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백과사전‘에는 동물이 ‘ⓐ황제에 속하는 것, ①식용 젖먹이돼지, ⑧인어, ⑦신화에 나오는 것,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것‘으로 분류되어 있다."<푸코, 말과 사물, 7쪽. 여기에는 공통의 장소가없다. 하여, 통사법을 해체하고 통념을 전복시켜 버린다. 왠지돈키호테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가. 웃기면서 당혹스럽다는 - P189

점에서 하긴 그렇다. 같은 스페인 문화권인데 세르반테스의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특히 그의 단편집픽션들』은 중남미 문학의 걸작에 속한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이 있다.
제목대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메나르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그럼 당연히 원작 『돈키호테』의
‘리메이크거나 아니면 새로운 시대적 버전이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고 생각한다. 한데, 둘 다 틀렸다.
진리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이 대목은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1부 9장에 있는 내용이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이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 P190

그럼 메나르의 작품은?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층고자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뭐야? 앞에 나온 거랑 똑같잖아? 그렇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를 고스란히 베낀 것이다. 한데 저자는 이 작품이야말로원작에 비해 무한정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극찬을 늘어놓는다.
논거는? 세르반테스는 자기 시대의 언어를 구사한 거지만,
현대작가인 메나르가 쓴 것은 ‘17세기 스페인의 고어체‘라는것, 동시대에 『돈키호테』를 읽는 것과 전혀 다른 시간대에 다른장소에서 ‘돈키호테』를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논법이다. 그러니원작과는 다른 아주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언어 자체가아니라 그 언어가 놓인 배치에 따라 의미와 효과가 달라진다는 - P190

것. 본질이 아니라 관계가 선행한다는 것. 『돈키호테』의 사상을 고스란히 재활용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보르헤스의 오마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마주를 통해 보르헤스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본과 복사본, 주체와 객체의 경계란 대체 무엇인가? 또 언어와 시대, 언어와 주체는 어떻게 조우하는가?
등등. 그 질문들이 살아 있는 한, 보르헤스와 더불어 세르반테스역시 불멸한다. 하여, 저 17세기 초 스페인의 한 감옥에서 탄생한 돈키호테와 산초의 방랑과 모험, 그 길 위에서 탄생한 ‘로고스의 향연‘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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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그림들에서 새롭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찾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이해한 건 다디는 고통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의 정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 P51

결혼식이 끝나고 형은 왼쪽 허벅지에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그해 11월에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이 계속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 1월, 암이 폐에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형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뉴욕에서 함께 산 2년 8개월 동안 도시 자체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뉴욕은 레코드 가게와 싸구려 식당, 워싱턴 스퀘어의 분수대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두서 없고 오색찬란하고 낭만적인 도시,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걷는 도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업타운으로 거점을 옮긴 내게 뉴욕은 마천루, 옐로 캡, 멋진 거리와유명한 건물들이 가득한 도시이자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발 디딜 곳을 찾아야만 하는 도시였다. 그러다가 형이 병에 걸렸다. 뉴욕은 하루아침에 암 병동의 병실과 형의 퀸스 아파트만 남은 도시가 되었다.
형의 아파트. - P58

몇 달 후, 우리는 필라델피아에 사는 어머니의 네 형제자매를 찾아갔다. 스물여섯 살짜리 아들을 땅에 묻은 후에 자신의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혹은 되지 않는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시간을 보내다가 어머니가 좀 더 단순하고 조용한 곳으로가자고 제안했고 우리 두 사람은 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차창문 밖으로 평범한 도시의 삶이 흘러가고 있었다. 거리는 조깅하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누군가에게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들 세상이 멈추는 일은 없으리라는 증거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벤 프랭클린 파크웨이를 벗어나 미술관 앞에 차를 세웠다. - P64

특징 없는 금색 배경 앞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당돌하리만치 죽은 게 확실한 젊은이를그의 어머니가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장면이다. 마치 아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를 껴안고 있는 어머니를 그린 이 그림은 ‘통곡annerstation‘ 혹은 ‘피에타 Pieta‘라고 부르는 장르에 속한다. 어머니는 늘 잘 울었다. 결혼식에서나 영화관에서나 눈물을 흘리곤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심장이 부서지는 동시에 충만해져서 그렇게 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림이 어머니 안의 사랑을 깨워서 위안과 고통 둘 다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배‘를 할 때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통곡‘을 할 때 ‘삶은 고통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담긴 지혜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 같은 현실 말이다. - P67

부모님과 누이 미아는 비행기를 타고 시카고로 돌아갔다. 나는 암트랙 기차를 타고 새로운 고향 뉴욕으로 향했다.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모든 의미에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미드타운의 분주한 행인들 틈에 섞였다.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앞으로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잃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는 침묵 속에서 빙빙돌고, 서성거리고, 다시 돌아가고, 교감하고, 눈을 들어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슬픔과 달콤함만을 느끼는 것이 허락되었다. - P69

그런엄청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전시된 모든 것은 유별날 정도로 통일성을보인다. 모든 유물이 아주 본질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이집트적이다. 고대 이집트인들만큼 3천 년이 넘는 긴 시간 내내 그들답게 존재한 인류는 없었을 것이다. 관람객들은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집트 특유의 미학을 알아본다. 무엇보다도 이집트는 우리의 상상력에 마중물을 붓는다. 왕가의 계곡, 피라미드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 모든 것들이 지어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재했던 것들이다. 이곳은 메트의 전시관들 중 가장 다양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곳이다. 청소년들, 트위드재킷을 걸친 교수들부터 명상가들, 아프로퓨처리스트Aftofuturist (아프리칸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기술 과학적 상상을 접목하는 문화적 장르 - 옮긴이) 만화가들까지 혼재해 있다. 이곳의 경비원이라면 방문객들이 던지는 가장 상징적인 질문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주 듣게된다. "저기요, 이거 진짜예요?" - P83

양조장과 제빵소가 합쳐진 모형에 바짝 다가선다. 그것은 전시실 안의 다른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유리벽 뒤에 있어서 방문객들이 만지지는 않을까 하는 경계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
그즈음 틈틈이 이집트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책으로읽는 것과 예술품을 직접 보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느낀다. 책 속 정보는 이집트에 관한 지식을 진일보시켰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의 파편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나를멈추게 한다. 이것이 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우리는 내용을완전히 이해하고 그다음으로 간단히 넘어갈 수 없다. 예술은 어느 주제에 관해 몇 가지 요점을 아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세상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이야말로 예술이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 P87

이집트인들은 시간에 대해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네헤Neheh‘, 즉 ‘수백만 년간‘이라고 불렀고 그것의 본질은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과 같은 순환이었다. 해가 뜨고, 지고, 또 뜬다. 나일강은 범람하고, 물러났다가, 또다시 범람한다. 별들은 한자리에선 관찰자의 주위를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회전하며 거대한 시간의 바퀴 또한 망자들을 처분하고, 새로 태어난 이들을 성숙과 숙성을 겪게 해 죽음으로 안내한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실제로 변하는 것은 없다. 이집트인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물의 본질로 여겨졌고, 이런 사고방식은 사후 세계로까지 확장해 메트에 전시된 인물상들의 끝없는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 P88

8시 45분에는 문 닫을 준비를 시작한다. 우리는 빠르게 돌아다니며떠나기를 머뭇거리는 손님들에게 폐관을 알리고 그들이 정 원한다면 사진 한두 장 정도 찍는 것만 마지막으로 허락한다. "완료?" 경비원들이 서로에게 확인한다. "완료" 우리는 다음 전시실의 동료들과 합류하여 그다음, 또 그다음, 차차 수를 불리며그레이트 홀까지 천천히 후퇴하는 대중을 바짝 쫓으며 몰아낸다. 건물 전체에서 비슷한 짙은 푸른색의 무리들이 비슷한 속도로 발을 끌며 걷는 관람객들 뒤로 모여든다. 모두 끝났다. 다 됐다. 매니저가 손을 들어 인사한다. "좋은 저녁!"
다음 날 아침, 배치 사무실로 들어선 나에게 밥은 다시 이집트 구역을 준다. - P105

내 눈길을 처음 끈 것은 새까만 잉크로 쓰인 완벽한 수직의 문자열을 자랑하는 콜로폰들이다. 보통 나는 중국어 구절들에 시간을 전혀 할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자를 읽을 줄 모르는 덕을 본다. 단 하나의 획도 언어적인 의미에 빠져 놓치지않고 이 화려하고 다양한 문자들이 펼치는 시각적 향연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획이 나른한 뱀처럼 나아가면 다음 획은 신속하고 격렬하게 연이어 찌르는 듯한 모양새다.
이 두 극단 사이의 모든 가능성이 지면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각각의 문자가 남기는 조금씩 다른 인상에 주목하면서 하나에서또 다음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말로 형용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하고 또 너무 순수하게 시각적인 것들이다. 이런 순간에 얼마나많은 감각적인 경험이 언어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지 깨닫는다. 서예가들의 기술과 관록은 예술 행위의 가장 근원적인충동을 고도의 기교를 통해 보여준다. 빈 표면에 짙은 자국을 남겨 그것을 작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싶은 그런 충동 말이다. - P111

몸의 방향을 돌리는 것만으로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앙아프리카까지 단번에 이동한다. 그곳에는 수많은 나무 주술상이 전시되어 있다. 보자마자 그렇게 느낀 건 아니지만 나는 이들 중 하나가 이 미술관에서 가장 멋진 조각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어떤 작품은 오랜 감상에 대한 보상을 주는 반면 어떤 작품에게서는 얻는 것이 덜한데 이런 차이는 첫눈에 알 수 없다는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는 중이다. 처음 그 조각상이 다른 유물들사이에서 특히 눈에 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오랫동안 의심했다. 큐레이터들이 그것을 더 높은 받침대 위에 배치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긴 시간, 고독하게 조각상을 바라보고 나서야 확신을 갖게 되었다. - P123

무엇보다도 조각가는 <은키시 주술상>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놀라운 기하학적형태를 완성한 것이 분명하다. 조각의 형태를 잡으면서 이 예술가는 엄청난 난관에 직면했을 것이다. 곽희의 두루마리나 모네의 그림과는 달리 그의 조각은 다른 것을 모방하거나 묘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성한 존재처럼 보이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그 자체로 신성한 존재여야 했고 따라서 일반적인 인간의 손길너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어떤 것의 모방이나 묘사가 아니라 새롭고 기적적이며 그 자체로 완성된 형태라는 확신을 가진 완벽한 존재, 다시 말해 어느 정도 갓 태어난 아기 같은 모습이어야 했다. - P126

박력 넘치는 조각상의 주위를 돌며 나는 예술가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이다. 예술의 위대한 기적이 행해졌고 아름다움의 새로운 모습이 세상에 더해졌다. 감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감동적이다. 눈을 지그시 감은 <은키시 주술상>은 다가오는 위험한 세력들에 대적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내면에 몰두하는 강력한 기운을 뿜는다. 이 조각상은 폭력, 불행, 질병 등 끊이지 않는 일상적인 고난으로부터 송예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었겠지만 그 시도만큼은 심금을 울린다. 엄청난 압박의 손아귀를 뿌리치기 위해서는 이렇듯 웅장한 모습이어야 했을 것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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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하층의 경비원 배치 사무실 앞에 빈 예술품 운송 상자들이 쌓여 있다. 1층의 무기와 갑옷 전시관 바로아래에 있는 사무실이다. 놓여 있는 운송 상자들은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커다란 박스처럼 생긴 것도 있고, 캔버스처럼폭은 넓고 두께가 얇은 것도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위풍당당하고, 옅은 색의 가공하지 않은 원목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져서 희귀한 보물 혹은 이국적인 야수까지도 담아 운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보인다. 근무복을 입고 출근한 첫날, 이 견고하고 낭만적인 물건들 곁에 서서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너무 강렬하게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 P13

그녀가 평범한 철제 문을 밀어 열자 마치 <오즈의 마법사>처럼 흑백 세상에 갑자기 색이 입혀지듯 환상 같은 〈톨레도 풍경Heworlado(스페인의 도시 톨레도를 묘사한 엘 그레코티El Greco의 대그는 그리스 출신이자 스페인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표현적인 회화로 명성을 얻었다 - 옮긴이)이 우리를 마주한다. 감탄할 시간은 없다. 아다가 걸어가는 속도대로 플립북을 넘기듯 그림들을 스쳐 지나가며 수세기를 넘나든다. 그림의 내용은 신성과 세속을 오가고, 배경은 스페인이었다가 프랑스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였다가 다시 이탈리아가 된다. 마침내 우리는 높이가 2.5미터에 달하는 라파엘로의 대작 <성좌에앉은 성모자와 성인들 Macdonna and Child Enthroned with Saints> (라파엘로 특유의 우아한 색감과 대칭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 <콜론나 제단화있다. ‘지저분하도록‘
Pala Coleter)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옮긴이)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 P14

"여기가 첫 근무지인 C구역이야." 아다가 말한다. "우리는 10시까지 여기에 서 있어야 해. 그다음은 저기. 11시에는 저쪽 A구역으로 갈 거야. 조금씩 돌아다니거나 서성거리는 건 괜찮지만 친구, 우리 자리는 여기야. 명심해. 자, 그다음에는 커피를 마시러 갈 거야. 여기가 당신의 전속 근무지지? 옛 거장의 OldMaster Paintings(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에는 "European Paintings"
으로 소개되고 있다-옮긴이) 전시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 운이 좋은 거야." 그녀는 계속 말을 잇는다. "결국에는 다른 곳으로도 배정받게 되겠지. 고대 이집트 전시실에 서 있다가 갑자기 잭슨 폴록으로 보내질 수도 있고. 하지만 처음 몇달간은 당신을 여기로 배치할 거야. 나중에는, 흠, 아마 근무일의 60퍼센트 정도만 여기서 일하게 될 테지. 여기서 근무하는 동안에는...." 그녀는 발을 두 번 구른다. "나무 바닥이라 발이 덜 피곤할 거야.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날 믿어. 나무 바닥에서 열두 시간 근무하는 건 대리석 바닥에서 여덟 시간 근무하는 거랑 동급이야. 여기서 열두 시간 근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발이 거의 아프지도 않을 거야." - P15

이어지는 순찰 구역은 13세기와 14세기 이탈리아의 그림뿐만 아니라 바로 옆 커다란 전시실의 프랑스혁명 시기 그림들까지 아우른 곳이라 우리는 역사의 타임라인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돌아다니면서 때때로 아다는, 필요하긴 하지만 능력은 자신보다 한수 아래로 치는 감시 카메라와 경보기의 위치를 알려준다. 인간 노동자들을 더 대단하다고 여기는 그녀는 우리 경비원들과 거의 맞먹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곳의 숨은 조연들을열거하는 데 더 열을 올린다. 관리인, 우리의 노조 형제자매, 진통제를 나눠주는 간호사, 한 달에 하루밖에 쉬지 않는 계약직 엘 - P20

리베이터 관리인, 은퇴했거나 비번일 때 미술관에 상주하는 소방관 두 명, 무거운 작품을 옮기는 인부, 더 섬세한 작품들을 다루는 전문 아트 핸들러, 목수, 페인트공, 목공 기술자, 엔지니어, 전기 기술자, 조명 기술자 그리고 우리가 비교적 덜 마주치게 되는 큐레이터와 보존 연구원, 경영진까지.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롭지만, 나는 우리가 1300년경에 그려진 두초 Duccio 의 <성모와 성자Madonna and Child〉로부터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없었다. 오전 내내 어떤 그림과도 마주 서서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가 없던 터라 나는 4500만 달러라고 알려진 이 그림의 가격을화제 삼아 아다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아다는 내가 그런 저속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슬퍼할 뿐이다.  - P21

몇 과목밖에 듣지 않았던 미술사 강좌는 학부 수업 중 가장설레는 시간들이었다. 강의실의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웅웅거리며 살아나면 스크린 위로 성당들, 이슬람 사원들,
궁전들과 같은 세상의 모든 웅장함이 딸깍 딸깍 딸깍 소리를내며 튀어 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은 초크 그림이 백 배로부풀어 올라 초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밝은 스크린 위에서 고요히 진동하는 더 정적인 순간도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겸손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벽화 청소 작업에 참여하셨던 교수님께 수업을 받을 때면 마치 내가 촉망받는 학자가 되어 그 현장의 작업대 위에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 P31

하지만 형인 톰이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되면서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 8개월동안 나에게 현실세계란 베스 이스라엘 병원의 병실과 퀸스에 있는 방 하나짜리형의 아파트가 전부였다. 졸업 후 뉴욕 중심가의 고층 빌딩에서화려한 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정작 나에게 아름다움, 우아함,
상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를 가르쳐준 것은 그런 조용한공간들이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서 있고 싶었다. - P32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이 마을이라면 주민은 거의 9천 명에 달한다(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전시관을 크게 확장한 다음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숫자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배경에 나오는 아기 천사, 투우장의 관객, 개미 크기의 곤돌라 사공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주민들은 596점의 그림 속에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거의 그숫자에 맞먹는 햇수 이전에 붓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다. - P37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뺨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 (<잠든 하녀 A Maid Asleep〉, 잠든 인물을 둘러싼 일상 속의 물건들이 정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실내로 들어오는 빛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절묘한 작품 - 옮긴이)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 P41

이 작품은 너무나 아름다운 침묵의 시와도 같아서 앞에 선 내 기분까지 거기에 함몰되어버린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인간 아도니스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아마빛 금발의 비너스와 여신의 품을 거부하고 위험 가득한 속세로 돌아가려는 자신만만한 젊은이 아도니스 둘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고를 수가 없다. 나도 티션이 본 고대의 시를 읽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결국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있다. 아도니스는 죽고 비너스는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져 그의흐르는 피에서 붉은 아네모네 꽃이 피어나도록 한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은 ‘바람에서 태어나다‘라는 뜻이다.
아직 관람객이 없는 시간,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시실 안을 걷다가 티션의 또 다른 작품을 발견한다. <비너스와 아도니스>보다 훨씬 작고 덜 알려진 작품이다. 티션이젊었을 때 그린 <남자의 초상 Portrait of Man)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 P44

히커리 로드의 빨강 벽돌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찍은 스냅 사진들도 많다. 낙엽 더미 위에서 뛰고, 생일 케이크를 먹고, 침대 위에서 씨름을 하는 모습들. 포착된 그 모든 순간과 수많은 기억은 낡아진 사진들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릴 듯 위태롭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친 총합은 그보다 훨씬 큰 것, 바로 톰에 관한 기억을 만들어내서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기억은 티션의 초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이미지 말이다.
오늘의 첫 방문객이 도착한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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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억은 원천적으로 날조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이요, 판타지다. 사건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나의 시선은 한곳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건들이 흘러가버렸음을 깨닫고 소위 ‘진실‘을 뒤쫓지만 늘 뒷북이요, 변죽이다. 아, 그렇다고 절망할 것까진 없다. 이런 식의 날조와 뒷북이야말로 삶의 대가이자 인간의 숙명이므로 어쩌면 인간이란 사건과 기억, 주술과 진실사이의 ‘밀당‘을 즐기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밀당속에서 문득 예기치 않은 ‘길‘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도 그렇게 출현한 ‘길‘들 중 하나다.
나의 기억으론 2008년부터였다. 우리에게 아주 낯선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더 디테일하게 말하면, ‘아, 우리가 정녕21세기에 살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된 것은 그즈음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IMF 이후 우리 사회를 추동했던 동력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부동산, 주식, 벤처 등으로 대박을 꿈꾸던 시절이 끝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누려 온 풍요가 대부분 채무경제였다는 것을.
말하자면 우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빚더미 위에서 축제를 벌이고있었던 것이다. 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바로 이런 것인가? - P14

버블경제의 붕괴와 성공(행복)신화의 몰락. 그때부터인가한국사회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지역공부방을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오던 인문학이 전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한것이다. 참으로 뜬금없는 현상이었다. IMF 이후 스펙문화가 확산되면서 인문학은 멸시천대를 받아 왔다. 심지어 인문학의 산실인 대학에서도 인문학을 추방하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외친 스티브잡스 때문이라는 ‘썰‘도 있고, 외부로 향했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썰‘도 있고, 그저 힐링의 대체물이라는 ‘썰‘도있고……. 물론 그 무엇도 답은 아니다. 분명한 건 사람들이이전과는 아주 다른 시선,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기시작했다는 것. 영화 <설국열차>식으로 말하면, 문은 앞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옆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셈이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프레임이 바뀐 것이다.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과연그렇게 되었다! - P16

요컨대, 생리와 심리, 그리고 물리는 서로 상응한다. 이걸 지도삼아 삶의 윤리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양생술이자 ‘도‘다. 이런 오래된 지혜가 우리 시대 인문학과 만나면 새로운 에콜로지가 된다.
인간과 자연의 이항대립을 넘어서는, 소통과 융합의 기예로서의 에콜로지! 하여 21세기의 화두는 단언컨대, 몸이다. 몸은 수많은 이분법적 대쌍들의 교차지대다. 거시와 미시, 정신과 물질, 개인과사회, 보편과 개별, 남성과 여성 등등, 한마디로 생명과 우주의 모든양상들이 ‘크로스‘는 실존의 현장이다. 고로, 몸을 보면 세계의흐름을 알 수 있고, 우주의 이치를 알면 내 존재의 심연을 탐사할 수있다. 몸과 우주, 그 대칭성의 눈부신 향연!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 P21

야생적 신체성을 동력 삼아 삶 전체가 우주적 순환에 참여할 수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핵가족의 문턱을 넘어야한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성공신화의 핵심기제는 핵가족(혹은스위트홈)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도, 남보다 더 많이소유해야 하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이룬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핵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적 존재가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엔 더 가열차게 달려야한다. 요컨대, 가족이 소유와 증식의 온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가족사이가 가장 위태로운 관계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위트 홈‘은 더 이상 삶의 윤리적 척도가 될 수없다. 따라서 이젠 혈연과 가족을 넘어선 생명과 우정의 다양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소유를 향한 진격을 멈추고 생명의 대순환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그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다. 이 ‘스마트한‘ 시대에 자꾸만 야생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 P24

그렇다! 바야흐로 집의 시대가 거하고 길의 시대가 ‘래하고‘
있다. 정주에서 유목으로! 집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정주민에겐모든 것이 고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소유와 증식, 서열 및 위계가공고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선 반대다. 모든 것이 유동한다. - P24

국경, 세대, 성정체성, 노동과 화폐 등등 그 어떤 것도 절대적우위를 점할 수 없다. 가치의 고정성은 물론 척도의 절대성도사라진다. 상이한 방향의 힘들이 각축하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좌충우돌하는 것,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거듭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유목이다.
유목은 유랑이나 편력이 아니다. 관광이나 레저는 더더욱아니다. 어디에 있건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능력이다. 유목민에겐 돌아갈 고향도, 도달해야 할 종착지도 없다. - P25

오직 자신이 서 있는 그 시공간이 삶의 전부다. 하여 온전히 누리고 즐기되 시절이 바뀌면 훌훌 털고 떠나간다. 비움과 채움, 머묾과 떠남의 이중주! 따라서 유목을 위해 반드시 초원이나 야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유목은 도심 한가운데가 더 적당하다. 앞서도 밝혔듯이 21세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칭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대칭적 네트워크는 문명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문명적 대안이 될 수 있으므로, 문명 안에서 ‘문명의 외부‘를 사유할 수 있는 길, 그것이 곧 유목이다. 따지고보면 디지털 문명은 그 자체로 유동하는 신체다.
인터넷 안에선 모든 경계가 흔들리지 않는가. 또 SNS에선 중심도 방향도 없다. 접속과 변용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디지털이야말로 유목적 신체 아닌가. 문명의 첨단인 디지털과 야생적 신체인노마드(유목민)가 운명적으로 마주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 P25

그때 깨달았다. 디지털 세대에겐 국경이 없다는 것. 그들에게집을 떠난다는 건 국경을 넘는 곧 ‘월경에서부터 시작된다는것. 그때부터 신체는 전혀 다른 리듬과 강밀도를 지니게 된다는 것.
이를테면, 디지털과 신체, 문명과 야생, 주체와 타자 등 아주 낯선기호들이 융합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길 위에서 ‘길‘ 찾기를해야겠다고 작심한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그래서 시작된 비전이MVQ다. MVQ는 Moving Vision Quest의 약자로 고전과 여행을 다양한방식으로 접목하는 프로젝트다. - P27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문호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구절이다. 좀다르게 표현하면, ‘길이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는 것이곧 길‘이라는 의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늘 길 위에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저기로, 청년에서 중년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천지만물이 생성소멸을 멈추지 않는 한, 사계절이 끊임없이돌아오는 한, 인간은 늘 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선택은 둘 중하나다. 이미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길을 열어 갈것인가 다시 말해, 길 위에서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길 위에서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길을 떠나려면 지도를 그려야 한다. 지도를 그리기 위해선 - P27

하늘의 별을 보라고 했다. 우리 시대의 별은 바로 ‘고전‘이다.
『열하일기』, 『서유기』, 『돈키호테』,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리스인조르바』, 『걸리버 여행기 등등. 인생과 우주의 지혜를 담은 책들을고전이라고 한다면, 고전 자체가 ‘길‘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짜 여행을 다룬 책들이 있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길‘ 자체가 주인공이자 주제인 그런 책들. 이름하여 ‘로드클래식 (여행기 고전)! 위의 작품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작품들은 각 문명권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그야말로 ‘별중의 별‘이다.
- P28

「톰 소여의 모험』의 자매편이라고 생각하면 눈이 확~ 떠질 것이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다. 대학 1학년 시절, 이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드클래식‘을기획하는 순간 바로 이 작품이 떠올랐을 정도니, 이거야말로 ‘내안에 너 있다‘의 진수 아닌가. 어디 나뿐이랴. 이 작품을 읽게 되면누구든 깊이 잠들었던 야생과 탈주의 본능이 되살아날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여정은 한마디로 기상천외다. 무엇을 상상하든그 이상이다! 한데, 어디를 가든 걸리버는 인간의 역사와 본성을향해 지독한 ‘똥침‘을 날린다.
만약 이 ‘로드클래식‘의 주인공들과 여행을 한다면? 아마오대양 육대주를 다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 돈키호테,
삼장법사와 그 제자들, 허클베리핀과 조르바, 그리고 걸리버,
이들은 대체 길 위에서 어떤 삶, 어떤 운명과 마주친 것일까? 그지도를 탐사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콘셉트이다.
사족 하나, 길 위에서 ‘길 찾기‘를 하려면? 먼저 묵은 것들을흘려보내야 한다. 버블경제와 성공신화, 스위트 홈의 망상 등은말끔히 잊으시라. 비우는 만큼 길이 열릴 것이니. 이 ‘로드클래식‘과더불어 그 길을 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유에서 자유로,
증식에서 순환으로 이어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삶‘을! - P29

이렇듯, 이 여행은 시종일관 정주와 질주가 격하게 교차하는이중주였다. 하지만 연암은 이 리듬에 휘둘리지 않았다. 거꾸로 그걸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발목이 묶일 때는 인정물태와 청문명의 저변을 훑고, 질주해야 할 때는 사유를 통해 ‘심연과 산정을넘나들었다. 고담준론과 깨알 같은 에피소드, 화려한 레토릭hetorics수사과 황당한 해프닝, 풍속과 역사 등 아주 이질적인 담론들이 매끄럽게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간은 시간의 펼침이고, 시간은 공간의 주름이다. 시공의 펼침과 주름, 그것이 곧 리듬이다. 이 리듬에 고유한 강밀도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여행은 곧 유목이 된다. 연암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 P37

그렇다! 그들이 장사꾼으로 떠도는 건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천하를 떠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바로장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자본의 흐름과는 정반대다. 전자는정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후자는 오로지 자신의 영토를확장하기 위해, 소유와 정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을 유목이라한다면 이때 수반되는 윤리가 곧 우정이다. 우정 없는 유목이란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왜연암을 그토록 환대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것이 연암이 타자들과 접속하는 기술이다. 탈주는 은밀하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궤도를 벗어난다. 하지만현장은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하다. 이 매끄러운 리듬 속에서 술과웃음, 예능과 서사, 풍속과 윤리가 자유롭게 교차한다. 은밀하게 유쾌하게! - P42

그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 바로 열하로 가는과정이다. 굶주림과 잠 고문 속에서도, 생사를 오락가락하면서도그의 신체와 사유는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였다. 이것이 바로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이리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존재의무게중심을 잃지 않는 강철 같은 체력! 또 빛나는 명랑성!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늘 반전을 야기할 수 있는 동력도 거기에있다. 고독한가 하면 왁자지껄하고, 위기인가 싶으면 순식간에 출구가 열리고, 백척간두가 곧 ‘깨달음‘의 현장이 되는 식으로 그렇다. 유목민에게 있어 길은 늘 반전의 연속이다. 여행이든 삶이든 인생도처유 ‘반전‘! - P46

원수라 해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오랑캐의 나라는저토록 활발한데 중화를 표방하는 조선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학맥이나 당파로는 주류적 라인에 속했음에도 연암은 이 불편한진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청문명의 장관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파격적테제들, 수레·온돌·벽돌 등에 대한 생생한 관찰 등은 다 거기에서비롯한다. - P48

무릇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것과 같습니다. 줄을 당기다가 줄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곳 가까이처했던 쪽이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힘이대등하게 겨룰 만하기 때문에 천하에는 거스르는 것과 순종하는차이, 즉 밀고 당기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쪽이 옳다든지 어느쪽이 틀렸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박지원, ‘열하일기』 2, 김혈조 옮김,
돌베개, 2009, 419~420쪽.} - P49

천주교가 코스모스라면 티베트불교는 카오스다. 전자가 근대를 향한 빛의 유토피아라면 후자는 근대 ‘너머의 헤테로토피아다. 이 카오스는 기존의 표상에 포획되지 않기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황홀하다. 저 요술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이처럼 연암과 열하의 마주침은 18세기 당대는 물론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아도 낯설고 이질적이다. 카오스이자 판타지아인 세계, 이 매트릭스 위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여행의 입구였던 저 요동벌판에서 외친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존재일 뿐"이라는 탄식이 열하라는 시공간을 만나 한층 더강렬하게 변주된 셈이다. 결국 연암의 시선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 P50

‘길 없는 대지‘(크리슈나무르티)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길이 있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여행!
이 ‘길 없는 대지‘ 위에서 잠들었던 말들이 웅성거리고 천지의비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때 길은 글쓰기의 향연이자 전장이 된다. - P51

18세기는 연암과 다산이라는 두 거성의 시대였다. 다산 정약용이양적으로 가장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면, 연암 박지원은 질적으로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연암으로 인해 한문은 ‘갈 데까지 갔다‘고들한다. 대체 어떤 경지이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글에는수많은 문체들이 범람한다. 그것은 고문도 아니고 금문도아니다. 정학正學도 아니고 소품체도 아니다. 고문과 금문, 정학과소품문‘사이‘, 이를테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글쓰기, 곧
‘연암체‘다. 타고난 자질에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젊은 날을유람과 독서로 보내면서 갈고닦은 실력일터, 그 내공이 유감없이발휘된 작품이 『열하일기』다. 그러므로 『열하일기』는 단순한여행기가 아니라, 글쓰기의 ‘로드맵‘이다.
여행이 시작되자 연암은 말 위에서 수많은 ‘썰‘들을 풀어낸다.
"수십만 마디의 말이, 문자로 쓰지 못한 글자를 가슴속에 쓰고,
소리가 없는 문장을 허공에 썼으니, 그것이 매일 여러 권이나되었다."(박지원, 『열하일기 2, 471쪽.) 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말과사물‘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때론 화려한 수사와우아한 논리로, 때론 열정의 패러독스와 깨알 같은 유머로. - P55

그럼 이런 글쓰기는 기술지의 영역인가? 아니면 철학잠언인가? 왜 이런 우문을 던지느냐면 흔히 기술지는 글쓰기의 영역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과학자나 의사들이 글쓰기와담을 쌓는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맺는 관계에 있다. "독서란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모리스 블랑쇼)는 말도 있듯이,
글쓰기의 역능 또한 사물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솔직히 기술지만큼 글쓰기와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좋은예로, 『동의보감』은 의학적 임상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와 노래로표현한다). 자연의 물리적 법칙이 생활의 현장과 마주칠 때 그것을 일러 소위 기술이라 하고 문명이라 하지 않는가. 기술에도 윤리와철학이 필요하듯, 사물들도 ‘일상의 향연‘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 P66

"글자는 군사요, 글자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요 고사의인용은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다."(소단적치인騷壇) 이것이 연암의 글쓰기 전략이다. 글쓰기가 병법이라면 목표는 간단하다.
적을 제압하는 것. 그걸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연암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가장 흔하게 쓴 전략은 ‘줍는‘ 것. 연암은 길 위에서 틈나는대로 ‘말들‘을 줍는다. 전설과 민담, 야담과 실화 등등, 연암은 닥치는 대로 주워서 한 편의 글로 버무려 낸다. 많은 글이 그렇게 탄생했다. - P67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일이 또 있겠는가?" 정조대왕의 말이다. 과연 호학 군주답다.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소개하면, 첫째, ‘고전을 통해 진리를 배운다.‘ 둘째, ‘탐구를 통해 문제를 밝힌다. 셋째, ‘호방한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 낸다. "이것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일"안대회, [정조치세어록 푸르메 2011, 21~22쪽] 이라는 것. 글쓰기의 통쾌함이라! 그것도 ‘우주적 통쾌함‘이라니, 그건 곧 ‘도‘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 시대야 글쓰기가 한낱 테크닉으로 전락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글쓰기란 인간의 보편적 활동이었다. 성리학이 통치의 근간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여, 글쓰기의 비전은 언제나 우주적 이치 혹은 생사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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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원자폭탄과 인터넷이 등장하고, 수많은 종들이 지구상에서 급속도로 사라지는 시대에 말이지요. 그렇지만 작가들이 쓰는 글이 ‘문학‘이라는 높은 담장 안 정원에만 갇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가 영향을 미치고 결과를 낳는다고 가정해보세요. 그러면 상상력의 사제가 자신의 특권이라고 주장하며 무시해왔던 윤리, 책임, 그 비슷한 귀찮은 것들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제‘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까요. 사제가 단순히 의식을 거행하는 숭배자는 아니지 않나요? 백성의 목자이자 신과 인간의 중재자 아닌가요?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디덜러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옮긴이)는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내 민족이 아직 창조하지 않은 양심을 버리기 위해 나아갑니다. "양심", 도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지요. 만약 작가에게 정말 그런 힘이 있다면,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작가)과 당하는 사람(나머지 사람들)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 P147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든 직업군으로든 가장 악랄하고 경멸스러운 작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곳은 작가들이 직접 쓴 책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사랑하지도 않아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은 작가와 한 거울을 공유하지요. 파우스트로서의 작가는 거울을 보며 거만하고 사악하 - P147

고 초인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이자, 마술의 대가이자, 운명의 지배자를 마주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인간들은 끈으로 조종할 수 있는인형이거나 자신들의 마음과 내밀한 비밀을 그의 손바닥에 맡긴바보 같은 존재들이에요.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로서의 작가는같은 거울 속에서 떨고 있는 한심한 파우스트를 발견합니다. 영원한 젊음과 끝내주는 잠자리, 엄청난 부를 갈구하는 동시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끼적임과 유치한 말장난(그래놓고 뻔뻔하게 "예술"이라부르지요)으로 이런 바람을 짠하고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한심한망상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파우스트 말이에요. - P148

아래는 A. M. 클라인이 현대 시인의 수치스런 존재감 상실에대해 노래한 시입니다.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사라졌다는 것,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
흔적이 남아 있다면 고작 통계자료,
이를테면 누군가의 투표, 아마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누군가 던진 비웃음, 정부 위원회의 점 하나.
하지만 소리치는 군중, 누군가의 한숨에서 그는
느껴지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 P150

오, 자신의 두루마리에서, 왕자의 인용문에서연단에 퍼지는 큰 울림에서 우리의 문화를 펼쳐냈던 그,
한 이름으로는 천국을,
다른 이름으로는 일곱 고리의 연옥을 노래하던 그그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숫자이고, 미지수일 것이다.
익명의 길 잃은, 누락된호텔 장부의 어떤 스미스 씨일 것이다.  - P151

참고로, 이런 정신적 상처는 주로 남성들이 입었지요. 여성 작가들은 낭만주의 시대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으며, ‘천재‘라는메달을 별로 걸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천재‘라는 단어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보통 어울려 다니지 않아요. 남성 ‘천재들이 하는 기이한 행동을 여성이 하면 보통 ‘미쳤다‘는 꼬리표가 붙거든요. 심지어 ‘재능 있는‘ ‘대단한‘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사회에 실제로 영향을 끼쳐놓고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야심을 시인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날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힘이 감소했다거나 세계 무대에서 위신이낮아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걸출했던 여자 선배들과 비교해 자신들이 아주 허약하다고 여기지 않지요. - P151

지금부터는 고상하게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정체성을 대체할 또 다른 정체성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자기 인식의 위기에 대해 논하려 합니다. 그중 하나는 예술과 돈과 권력이 엇갈리는 독특한 교차점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하나(이것도 앞의 것과 무관하지 않지요)는 ‘도덕적 책임‘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고,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밟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 P152

작가는 도덕적 법 위에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루하고 우둔하고 재능 없는 지극히 평범한 대중은 지켜야만 하는 평범한 규칙을 작가는 전혀 적용받지 않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인 걸까요? 한편 글쓰기가 예술 작품으로서 그 자체가 아니라 실은 작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살인을 창조해낸 작가가 드러낸 건 어떤 자아일까요? 별로 훌륭한 자아는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기껏해야 부도덕한 자아, 최악의 경우엔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괴물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이 모더니즘과 하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섬기는 최고 사제인수전 손택은 초기에 쓴 자신의 반전통적 에세이에 대해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 P154

나는 강렬한 자기 모독을 저질렀다. (...) 그 에세이들은 근엄했을뿐 아니라, 확실히 금욕적이었다. 마치 내가 내 상상력의 관능성을 믿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선한 것들,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들을 지지하고 싶었을뿐이었고, 그건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 사고의 틀은 언제나 도덕적이었기 때문이다! - P155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 아 그렇습니다. 모든 부모가 예술의 그런 유익한 기능을 간절히 원하고, 북미의 모든 교내이사회가 그기능에 동의하고, 그중 일부는 그런 합의를 검열의 구실로 사용하지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바로잡는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걸까요? 그러니까 사람을 바로잡고, 또 일부 사람들이 유해하다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는 걸까요? - P155

하지만 예술가의 눈이 차가운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감옥에서>의 마지막 부분을 볼까요.


이 눈은
울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시선은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려도
절대 흐려져선 안 된다

그것의 목적은 명징함이다
어떤 것도
잊어선 안 된다  - P176

작가는 보편적 인류와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정말로 권력이 주어진다면, 권력의 사다리 어디쯤에 자리 잡아야할까요?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했다시피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몇몇 가능성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들, 그리고 난제들은 짚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젊은 작가에게 꼭 조언을하라면, 앨리스 먼로의 말처럼 "원하는 대로 하고 결과는 스스로 감수하라"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고, 혹은 "공들여 쓰다 보면 사회라는 문제는 절로 해결된다"고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비밀을 말하자면 (아무 토론회에나 가서 써먹어도 상관없습니다),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걸 정하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그리고 바로 그 독자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입니다. - P177

그러니 만약 독자들께서 이 작품이 현 시대, 아니 어쩌면 헬리오가발루스 시대에 만들어진 최고의 요리 원칙을 엄격히 고수했다는 걸 알게 되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 그 말인즉, 앞서 언급한 위대한요리사가 나리들의 식욕을 돋우어주었던 것처럼 독자들께서도 이 책을 영원히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 헨리 필딩, <톰 존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곁에 있다. 심지어 이야기를 읽는 사람도 이런 동료애를 나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고립되어 있다. (..) 이런 고독 속에서 소설의독자는 누구보다 악착같이 책을 붙든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준비가, 이를테면 걸신들린 듯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데틀레프 폰 릴리엔크론의 운율에는 빈정거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말했다. 시인은 명성을 얻지 못하기가 힘들다. 살아생전 대중의환심을 사지 못하면, 후대가 굶어 죽어간 그의 영웅적 행적을 칭송할테니, 한 마디로, 판다는 것은 영혼까지 전부 팔아치운다는 것을 뜻했다.

- 피터 게이 <쾌락 전쟁>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진술이다. 그렇기에 적은 관객을 기대할수 있다.

-그웬돌린 매큐언, <선택>>

그는 형편없는 대형 신문사의 눈에 띄면서 칭송받고, 성유 부음을 받고, 왕관을 쓰게 됐다. 마치 뚱뚱한 안내원이 지팡이로 꼭대기 의자를 가리키기라도 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왕좌에 배정받았다. (...) 어쩌다 보니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엄청난 파도가 무언가를 휩쓸어버렸다. 그 파도가 내 작은 관습의 제단과 그 위에 놓인 반짝이는 양초와 꽃을 쓰러뜨리고 텅빈 거대한 사원을 세워 올려버렸다.
닐 패러데이가 세상으로 나온다면 그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일 터였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불쌍한 남자는 끔찍한 시대속으로 쑤셔 넣어질 운명이었다.

- 헨리 제임스, <유명인의 죽음

나는 봉투를 찢는다. 나 지금 방콕이야
(...) 너는 네모난 봉투에서 이 푸른 사절들을 쏟아낸다.
널 세상에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계속 따라가기 힘들 때,
너의 엽서가 이렇게 말한다
"날 기다려줘."

- 앤 마이클스, <마사에게 온 편지

시인이었던 나의 한 대학 은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작품에나 공통으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질문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작품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라고요. 어쩌다보니 그 말에 동의하긴 했는데 시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어떻게 결정될까요? 생물학적 정의를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성장하고 변화하며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반면, 죽은 것들은 아무 활동성도 띠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텍스트가 성장하고 변화하고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걸까요?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야한 시를 베끼는 한 우체부가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게 정답입니다. - P200

그보단 녹사에게 친근하게 관심을 표하지요. 아래는 러시아 시인 푸시킨 <예브게니오네긴>이라는 시의 말미에서 독자에게 멋지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부분입니다.


독자여, 당신이 누구든,
친구든 적이든 간에,
정답게 헤어지고 싶다네.
잘 가시게, 이제 끝이 났으니.
이 조잡한 글에서 무엇을 찾아냈든,
격정적인 추억이든,
고생 끝의 휴식이든,
그냥 문법적 오류든, - P204

생생한 묘사들, 떠들썩한 재담이든.
당신이 이 작은 책에서
감동이나, 재미나,
꿈이나, 잡지의 논쟁에 필요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얻어가기를 바라네.
이쯤에서 헤어지세. 그럼 안녕. - P205

하지만 그는 중요한 사실을 모릅니다. 꿈속의 그 인간들이 바로이라는 것을요. 그들이 책의 인간적인 요소라는 것을요. 그의카에 신의 음성이 들립니다. "여기에 책은 없다." 하지만 그는 그말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후반부가 되면 그가 수집한 모든 책이생명을 얻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요. 지금까진 그로 인해 죄수처럼 개인 서재에 갇혀 있었으나 이젠 자신들의 메시지를 자유롭게퍼트리고자 하는 거예요. 앞서 말했듯 책은 독자로부터 독자에게로 이동해야 살 수 있으니까요. 이윽고 그는 책에, 그리고 자신의몸에 불을 지릅니다. 화형, 그것이 이단자의 운명이지요. 책이 불타기 시작하자 책 속의 글자들이 그가 창조한 ‘데드 레터 오피스를 탈출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 P208

때로 책은 작가의 개입 없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아래는 제이 맥퍼슨이 쓴 <책>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의 시입니다. 여기서의 책은 말하는 책인 동시에 수수께끼이지요. 물론 답은 제목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독자여, 당신 같은 인간이 아니기에나는 그대처럼 사랑할 수 없고, 그대도 나처럼 사랑할 수 없다 - P208

하지만 그대처럼 큰물로 나가서
보잘것없는 배로 사나운 바다를 이기려 하나니.

개울 수면을 젖지 않고 덧없이 떠가는 물방개도
나보다는 가냘프지 않고
흥분된 눈으로 심해를 살피는 고대의 고래도
나보다는 대단하지 않도다.

비록 창조자의 의지로
공기, 불, 물, 땅을 가로지르지만
내 부피가 그대의 손에 짐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꽃피운다. 그대가 보는 데서, 그리고 그대를 위해서.
그를 섬기지만 나는 인간과 씨름하길 주저하지 않으니
붙잡히고 삼켜져도 그를 축복한다. 독자여, 받아주기를  - P209

이 작은 책은 배이며, 고래이며,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에게 축복을 내린 천사입니다. 아울러 성찬식에서 섭취되는 대상으로서,
삼켜지지만 파괴되지는 않는 음식입니다. 또한 축제에 온 손님의영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새로이 거듭나게 하는 축제이지요. 천사는 드잡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동화되고 결국그의 일부가 됩니다. - P209

오 위대한 신이여, 밤의 왕자들이여,
빛나는 존재여, 불의 신 기발이여,
지하세계의 장군이라이여 (...)
점을 칠 때 제 곁에 계시길.
제가 바치는 이 양이
진리를 드러내기를 비옵니다!

ㅡ메소포타미아 기도

그런 뒤 죽음의 배를 지어라,
망각으로 가는 가장 긴 여행을 떠나야 하니.
그리고 죽음을 죽어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놓인 (...)

오 죽음의 배를 지어라, 너의 작은 방주에
음식과 작은 케이크와 포도주를 채워 넣어라
망각으로 내려가는 어두운 항해를 위해

- D. H. 로런스, <죽음의 배>

겨울은 컴컴한 우물 위에 걸려 있고,
내 등은 하늘을 향해 있으니,
그 암흑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지,
반짝이는지, 눈을 깜박이는지 보기 위해서다

아니, 나는 바닥으로부터
잃어버린 모든 것, 빛나는 모든 것과 누워서
하늘의 흰 빛을, 내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나의 겨울은 죽은 자들과 함께다

진리의, 이미지의, 말의 우물.
저 아래 오리온이 놓인 자리극점의 웅덩이가 계단이 되는 게 보인다.
성좌가 뜬다.

-제이 맥퍼슨, 〈우물〉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서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
그들을 건드린 것을 만지는 것은
그들 덕분이니 (…)

영이 된 뼈들과 하나가 된 흙에
무릎까지 박고 서서
고고학의 태양을 받는다 (...)

해질녘 마을,
교차하는 어둠의 강물에
가슴까지 담그고 서 있으니,
말 없는 사냥꾼들과
어두운 불 위로 몸을 숙인 여자들,
나는 그들의 낡은 자음을 듣는다 (...)

- 알 퍼디, <인디언 마을의 유적 > 

내양 손바닥에서 기쁨을 취하라
약간의 꿀과 햇빛을,
페르세포네의 벌이 우리에게 명한 것처럼.

- 오시프 만델슈탐, <내 양 손바닥에서 기쁨을 취하라> 

죽은 자의 땅으로 가서 저세상 사람을 산 자의 땅으로 데려오는것. 이것은 인간의 아주 깊숙한 욕망이자, 아주 엄격히 금지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글을 씀으로써 죽은 자에게 일종의 생명을 부여할 수 있어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단테에 관한 아홉 편의에세이"에서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단테가 《신곡》, 그러니까 ‘지옥 편‘ ‘연옥 편‘ ‘천국 편‘ 세 편 전부를, 그 모든 방대하고복잡한 세계를 만들어낸 까닭은 죽은 베아트리체를 어렴풋하게나마 보기 위해서, 그녀를 자신의 시 속으로 불러내기 위해서라는거지요. 그가 그녀에 대해 글을 쓰고 있기에, 그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그 이유만으로, 베아트리체는 작가와 독자의 마음속에 다시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 P238

죽은 자들은 피를 구합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허기와 갈증에시달리지요. 그들에게 피를 제공한 대가로 시인은 천리안을 얻고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합니다. 오래된 합의 방식대로지요.
모든 작가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습니다. 계속 글을 쓰는 한, 작가는 앞서 글을 썼던 작가들의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평가받고 질책당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작가는 작가로부터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조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과거도, 이야기도, 특정한 진실(지하세계로의 여정을 다룬 윌프레드 오언의 시 <이상한 만남>에서 "감춰진 진실"이라 부르는 것도 모두 통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이야기를 마음껏 탐닉하려면 결국 지나간 시간에서 온 사람들과 거래를해야 합니다. 그 지나간 시간이 겨우 어제라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이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 P246

가장 믿을 만한 출처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에 가는 건 쉽지만 돌아오는 건 어렵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모든 이야기를 돌에 새겨야만 합니다. 운이 좋아 올바른 독자를 만나면 돌이 말을할 겁니다. 돌이 혼자 세상에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마지막 말은 시인 오비디우스에게 넘기겠습니다. 그는 쿠마에의 무녀 시빌에게 발언을 허락해주었죠. 그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추측컨대 오비디우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작가들의 희망과 운명을 위해서.


하지만 운명이 내게 목소리를 남겨놓아,
사람들이 그 목소리로 나를 알아보게 될 겁니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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