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당신에게 도달하는 그리움은 없다
그리움은 내게로 온다
기름을 만땅으로 넣고 남쪽 바다 수직 절벽까지 가서
흰 갈매기들의 보행 멀리, 구멍뿐인 공중을 팽팽히 당겨보다가도
시월 햇빛 난반사하는 끓는 가마솥, 그 다도해에
무수히 뛰어 들어보다가도,
그리움은 그리움의 칼에 베여 뒹구는 것
우리가 두 마리 어지러운 짐승으로 불탔다 해도
짐승으로 세상을 헤쳐갈 수 없어
한 짐승은 사람이 되어 떠나고,
짐승으로 세상을 헤쳐갈 수 없어
한 짐승은 짐승으로 남았으므로
칼을 녹여 다시 불을 만들 순 없다
제 골대로 역주행하는 공격수처럼 멍청히
뭉그적대는 귀경 차량들 틈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다급한 건 생활이어서,
길은 경기도계에서부터 저렇게 밀리는 것이리라
짐승을 사랑할 수 없어
당신이 두 마리 사람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내가
두 마리 짐승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사 들고 온 비닐봉지를 헤쳐 뭔갈 또 우물거리는 밤
당신에게 나눠 줄 그리움이란 애초에 없었던 거다
혼자 갉아먹기에도 늘 빠듯했던 거다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던 무른 벌레를 눌러 죽였다
나는 살기 위해 평생을 허비할 것이다

시인의 말
우울은, 쓰게 한다. 명랑은 그걸 오래 계속하게 하고. 주름 없어 잘 웃지 않는 명랑은 말한다. 네 모멸의 기쁨, 겸손의 쾌락을 내려놓아라.... 다 내려놨어, 나는 거짓말하고. 명랑하고, 아야, 내 신세야..…
2018년 7월 이영광
방심
그는 평생 한 회사를 다녔고, 자식 셋을 길렀고 돈놀이를 했다 바람피우지 않았고 피워도 들키지 않았다 방심하지 않았다 아내 먼저 보내고 이태째 혼자 사는 칠십대다 낮술을 몇 번이나 나누었는데 뭐 하는 분이오, 묻는 늙은이다 치매는 문득 찾아왔고 자식들은 서서히 뜸해졌지만,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그는 이제 정말 방심하지 않는다 치매가 심해지고 정신이 돌아온다 입 벌리고 먼 하늘을 보며, 정신이 머리 아프게, 점점 정신 사납게, 돌아온다 그는 방심이 되지 않는다 현관에 나앉아 고개를 꼬고,
새가 떠나면 구름이 다가올 뿐인 먼 하늘에 꽂혀 있다. 꽃 지자 잎 내미는 산벚나무 그늘 밑 후미진 꽃들에 들려 있다 그는 자꾸 정신이 든다 평생의 방심이 무방비로 지워진다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저녁엔 퇴근하는 내게 또 담배를 빌리며 어제 왔던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뭐 하는 분이오? 침을 닦으며,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촛불
나는 나를 백만분의 일로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거대해질 수 있다
분노는 내가 묻는 것이다 슬픔은 내가 먹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비는 것이다 싸움은 내가 받는 것이다 해방은 내가 없는 것이다
나는 타오른다 나는 일어선다 나는 물결친다 나는 나아간다
나는 모든 죽음을 삼켜버린다
서울역
역사에는 여행이 있고 광장엔 흔히 설교와 노동자 집회가 있다 종교는 정신없이 아프고 노동은 아파서 간신히, 정신을 가누고 있다 기차가 슬슬 똬리를 풀며 기적도 없이 울어대서 여행은 또 떠나야 하지만 종교는 멀리 하늘로, 노동은 땅끝까지 피 흘려 나아가야 한다 소주병 쥐고 앉아 노숙은 모든 떠남들을 지켜봐야 한다
파랗게
갓진 십일월 은행잎들은 죽으면 뭐 하나 하다가도 살면 또 어떡하지? 하며 노랗게 거리를 죽여주고
갓 핀 사월 은행잎들은 살면 뭐 하나 하다가도 죽은들 또 무슨 소용 있나 하며 파랗게, 거리를 살려낸다, 파랗게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봉선사 범종 소리는 범종을 버리고 절을 버리고 세상 끝 지평선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사자후는 멀어라 진흙 논에 드리운 백일홍 그림자, 찬물을 벌겋게 데우는 이 세상 군불
홍조를 띄우고 그대 내 곁에서 갱년기로 웃을 때
말
분노는 말을 때린다 말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무섭다 말은 눈물을 뿌리며 달린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닿아야 분노에 맞지 않을 수 있나 분노를 떨어뜨릴 수 있나 질주하는 말은 분노의 헝클어진 발음기호다 말은 분노를 흐느낀다 분노는 말에 매달린다 분노는 말을 더듬거린다
무릎
무릎은 둥글고 다른 살로 기운 듯 누덕누덕하다
서기 전에 기었던 자국 서서 걸은 뒤에도 자꾸 꿇었던 자국
저렇게 아프게 부러지고도 저렇게 태연히 일어나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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