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두 시간 강의하려고 세 시간 기다리는
지방 사립대학 휴게실 창 너머 첫눈 내리는 날
태화산 팔부능선을 천천히 지우고
문득, 눈발은 사라졌다가
산기슭의 페어웨이를 휩쓸어온다
달아오른 찻잔을 만지며 나는
눈발을 움직이는 힘이
보이지 않는 바람이었음을 안다
그래, 눈보라는 바람의 알몸과
알몸을 불에 덴 듯 날뛰게 하는
막무가내의 마음을 보여준다
눈앞에 죽음이 어른거리는데도
비명 지를 수 없는 병자처럼
유리창을 움켜쥐는 바람의 손바닥들
오늘은 그가 아무리 작게 두드려도
심하게 흔들릴 것만 같다
사람 기다리는 일, 정처 없어도 깊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시간 묻는 취객처럼
깜짝 찾아왔을 뿐인 기다림
뜨거웠던 찻잔을 식히고
휴대폰 진동 신호음에 놀라는 마음의
떨림은 오후 수업 끝나면 방전되어
저 산 어딘가에 지친 눈발들을 조용히 눕히고 있으리라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과 멍하니, 갇힌 사람이 있고 인간의 습성을 비웃으며 서서히 아웃되는 새떼들이 있다
단풍
산들도 제 고통을 치장한다
저 단풍 빛으로 내게 왔던 것 저 단풍 빛으로 날 살려내던 것
열려버린 마음을 얼마나 들키고 싶었던가 사랑의 벗은 몸에 둘러주고 싶었던가
불난 집처럼 불난 집처럼 끓어 마침내 잿더미로 멸한다 해도
산
산을 보면, 들어가고 싶어진다 산에는 안이 있다
그곳에서, 돌들은 뜨겁게 달아 알이 되고 몸은 묻혀, 천년의 영혼이 된다
역사보다도 더 오래고 질긴 바람, 악써 반음 높여 노래하던 길들은 어떻게 산 속으로 사라졌을까
너무 먼 길 가다 철퍼덕 주저앉았을 때 들던 생각,
망가진 생을 견인해 가려는 듯 불끈 엎드린 길을 껴안고 싶을 때 들던 생각,
몹쓸, 인간의 바깥에도 멀고 먼 안이 있다 들어오라는 듯 들어오지 말라는 듯, 산에는 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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