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홈 하나 없는 인간이라면, 내가 실수한 적 없는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를 요즘 많이 생각한다. 나의 어떤 과거 혹은 과거의 어떤 발언이나 행동들은 누군가에게 말하기가 너무 부끄러운것들이라 그것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렵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또알게 되면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과거의 나 자신이다.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던 나...... 물론 그때도 나는 늘 당당했고 내가 하는 말에 자신이 있었으며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는 참기보다 말하는 사람이었다. 남자아이들과 싸우기도 많이 싸워서, 내가 나를 알기 전부터 난 이미페미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닫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때 괜찮은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는지, 여성 혐오에 일조하는 인간이었는지를,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보며 깨달았다. - P150

나는 고등학생일 때 반 아이들 몇 명과 이 영화를 봤다. 그때의나는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가 자신들을 성희롱하는 남자의 트럭을 폭발시키는 장면을 보고 "어휴~ 아무리 그래도그렇지, 뭘 저렇게까지 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리 반 반장(여고으므로 당연히 여자였다)이 화를 내며 "저게 왜 심하다고 생각해? 저남자가 잘못했는데?"라고 내게 따졌다. 나는 지지 않고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트럭까지 터지게 하면 어떻게 해"라고 말했던 거다. 지금돌이켜보면 우리 반 반장은 페미니스트였던 것 같다. 내가 지금 깨닫고 공부하는 많은 것을, 그 애는 그때 이미 알았으니,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주 얌전한 아이를 보고 내가 무심결에 "여자 중에 여자"라고 표현한 거다. 그러자 반장이 내게 물었다.
"여자다운 게 뭔데?" - P151

"나는 어느 지점을 이제 지나온 것 같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아 그녀는 이제 그녀로서 자리한다. 갇히고 억압받는 그녀가아니고 온전히 그녀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그녀의 삶의 모든 패턴과 방향을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해줬다면, 이제부터는 그녀가 직접 결정한다. 이것이 맞고, 이것이 옳다. 그녀는 이 모든 일, 지금의위기가 자신 때문에 일어났음을 깨닫고 루이스에게 사과한다. 그때 루이스가 그런다.
‘내가 말했잖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때, 바로 그때, 루이스가 그렇게 말한 그때, 그제야 갑자기 내가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아, 맞다! 이게 왜 델마 잘못이야? 이게 왜델마 잘못이냐고, 그런데 나도 무의식적으로 델마를 원망하고 있었잖아, 맙소사! 델마를 강간하려는 남자가 없었다면, 그들의 돈을 모두 훔쳐간 남자가 없었다면, 그랬다면 그들의 인생이 이렇게 절벽으로 향하진 않았을 텐데! 애초에 그녀를 어릴 때부터 강압적으로 가둬두고 살았던 남편이 없었다면?
- P155

시종일관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가 그랬다. 그랬는데, 그게지금 우리의 삶이다. 강압적인 남편과 강간하려는 남자, 피해자인여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경찰, 돈을 뜯어가는 남자, 아무렇지도않게 성희롱을 일삼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자. 루이스의남자 친구는 그중 ‘나은‘ 남자였는데,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자, 테이블 위의 모든 것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버리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여자를 때리진 않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칠게 변하는 남자를 좋은 남자라고 할 순없을 것이다.
친구와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영화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여성 혐오가 남아 있는 것 같아 너무 괴로웠다.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그렇게나 공부하고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아직도 갈 길이 멀다니.. 아직도 많이 부족하구나, 나라는 인간 친구와 나는 이번 여행에서 <델마와 루이스〉를함께 본 시간이 가장 좋았다고 얘기했다. - P157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와 침대를, 화장실을, 부엌을 함께 사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불 꺼진 집에 돌아가 내 손으로 불을 켜고 내 손으로 보일러를 돌리고, 내 손으로 침대의 시트를 갈아치우는 일들이 간혹 외로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더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런 삶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기가 무척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레이브스조차 도시로거처를 옮겨 다른 이들과 함께하기를 원하니까. 내가 비명을 지르면 옆에서 누군가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곳. 내 공간에 내가 비록 혼자일지언정, 문을 열고 나가면 얼마든지 다른 누군가를 볼 수 있는그런 삶을 그가 원하니까 - P223

가족이라서 멀쩡한 아버지의 요강을 어머니가 비운다는 말, 같은 가족인데도 요강을 비우지 않는 아들. 이 집은 대체 어떤 집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나 연애, 혹은 결혼에 ‘난 반댈세‘
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다 저마다의 사연과 사정이 밖에서 보았을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것이 거기 담겨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렇지만 평생 아버지의 요강을 비워온 어머니와 그 상황에한 점의 의심이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이 가족 구성원을 보노라니, 나나에게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고 싶어졌다. ‘부부‘여서 왜아내가 남편의 요강을 비워야 하는가. 왜 남편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지 않는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는가. 지랄 맞은 경우가 아닌가. - P238

시간이 지나 소설 속에서는 아내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시간이있는 거라며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고, 남편은 ‘아내에게도 아내의시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였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진작 일어났어야 했고.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해서 같은 꿈을 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에겐 상대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반드시, 꼭 필요한 법이다. 이건 기쁜 일,
축하할 일, 마땅히 좋아해야 할 일이니까 네 의견을 묻지 않아도 당연히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은 정말이지 오만하지 않은가. - P244

변방에 남겠다는 김경미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나는야 세컨드 1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 P247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델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고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 P248

나는 동물을 키우지 않고 앞으로도 키울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E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아는 E는 사람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관심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다. 함께길을 걷다가 한 어린 아이가 엄마 뒤에 따라가면서 소리 내어 우는걸 본 적이 있다. 아, 저 아이 왜 울지? 라고 나는 계속 그 아이를 봤는데, E는 내가 보지 않는 곳으로 뛰어가서는 길고양이한테 먹이를주더라. 그때 내가 에게 말했다. 우린 이렇게 다르구나, 같은 길을걸으면서 나는 우는 아이를 보는데 너는 고양이를 봐. E는 내가 사람을 예뻐하는 만큼 고양이를 예뻐하고, 내가 사람에게 위로받는만큼 고양이로부터 위로받는다. 그러니 E에게 고양이가 심각하게아픈 것은, 나에게 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것과 다를 바 없다, 라고 나는 다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나는 E의 고통을 공감한다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 P265

동물 학대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그토록 끔찍한 짓을 하는 게인간이다. 그러니 독미나리 술이나 먹을까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지긋지긋한 인간들, 내가 그런 인간들 중의 하나라니. 그러나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알리고 싶어 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인간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노래하는 것도 인간이다. 아픈 동물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돌보겠다고 하는 것도, 동물 해방을 주장하는 것도 역시 인간이 하는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이 지구를 버텨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과 동물 실험을 하는사람들 또 동물 해방을 주장하고 돌보는 사람들, 그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 - P270

게다가 남자들에게 강인함을, 냉정함을, 객관적임을 주입하는 순간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와 동시에 ‘그래서 열등하다‘가 되어버리니까. 이 책에도 나오지만, 여자들은 남자들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약하니 우리를 보호해줘, 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너네, 폭력을 쓰지 마!‘를 말하는 거지.
토니 포터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사회에서 차별을없애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없애는 길은, 남자의 사회화 자체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고. 토니 포터같은 사람이 알고 있고 또 여러 사람에게 얘기하기를 선택했다는것은 분명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백 명이 듣는다고 백 명이 다 바뀌는 건 아니겠지만, 그중의 일부는 그동안 자신이 ‘선한 남자로서‘ 폭력이 행해지는 것에 어떻게 일조했는지를인지할 테고, 잘못을 뉘우칠 것이며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할테니까. 그런 사람이 점차 많아지면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더 나은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나도.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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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랑에 푹 빠졌을 때, 우리가 일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간신히 회사에 앉아 있는 일들의 연속이었음을. 중요한 일을 업무 시간 내에 하는 것조차힘겨웠음을, 누군가를 ‘너무‘ 혹은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이성을 얼마나 앗아가는지를. 우리가 문자 메시지를, 전화를, 이메일을 얼마나 기다리는지를. 그런 것들을 내가 보낼 때면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고심하는 것도, 심지어 보내는 시간조차 지금이면될까 망설이던 순간들을. - P67

될까, 생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는 마치 뇌가 혹은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똑똑하다는 말을 듣던 나도, 재치 있다는말을 듣던 나도 없어졌다. 이런 행동은 옳지 않아, 하며 평소에 하지 않던 일들까지 저질렀고, 말문이 막히는 일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행동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그 자체였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의 저 한 줄 한 줄이 다 내얘기였다. 내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내 얘기이며 지독한 사랑에 빠진 모든 여자들의 얘기였다.  - P67

그 글을 보노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결같은 고민을, 항상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남자들이 혹여 술집 포스팅을 쓴다면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좋다‘는 글을 쓸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여성 전용 화장실,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 전용 휴게소를 두고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것들이 ‘왜‘ 있는지 전혀 모르는 걸까?
어제는 내내, 앞에 인용한 레베카 솔닛의 문장이 떠올랐다. 남자들아, 밤에 돌아다니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P118

늦은 밤에 아이를 데리고 걸어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이장 할머니는 얼른 본인의 일을 마치고 차를 몰고 태우러 오지 않았는가. 이런 공감, 이런 배려를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도우려고 하시는 분이다 보니 이장 역할도 매우 잘해내실 거라고 믿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간 이장 뽑는 제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못마땅하다고 여겨서 기권했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는 ‘잘못된 걸 바로잡겠다‘ 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겼다. 이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가! 불평과 불만을 가진 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해 나가려고 하다니, 나는이 이장 할머니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 P131

할아버지는 손녀를 어떻게 협박해야 하는지 잘 안다. 이건 우리 둘 다 행복해지는 거라고,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네가 밖에 나가서 이상하게 말해도 아무도 네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말비나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기절할지경이 되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심지어 말비나가 어릴때부터 이 부당한 폭력에 노출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할머니는 죽어가면서 이 어린 소녀에게 유언까지 한다. 할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달라고. 이제 남자 친구가 생기고, 자신의 이름이
‘권리‘를 뜻한다는 걸 새삼 되새긴 말비나는 깨닫는다.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해서도 안 되었다. 그것이 할머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되었다. 이것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는 것을. - P133

내게 일어났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건 아주 오랫동안 나 스스로 나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의 나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게 일어나는 일이 무언지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했고, 그것을 인지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내 안의
‘음탕함‘이 싫었다. 내가 싫다고 계속해서 분명히 말했다면, 도망쳤더라면 그 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내가 미적지근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으므로 그 일이 반복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것은 내 안의 음탕함이 되었다. 어린년이 음탕했다고,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볼까 봐 두려워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혹여 어릴 때부터 음탕했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나는 정말로두려웠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당했다는 것, 그게 어린 나의 음탕함 때문이라는 것,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그래서 누르고 눌렀다. - P134

언젠가부터 나는 그 일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입 밖으로내면서, 어릴 적에 울지 못했던 것들을 나중에야 울게 되었다. 여러명의 여자들과 함께 모여 이 일에 대해 얘기했을 때 내가 놀란 건,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이 대부분 나랑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거였다. 그들 대부분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그들이 당한 일을 주변 어른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이 들은 대답은 말비나와 내가 들은말과 똑같았다. "네가 예뻐서 그렇지." 그들은 더는 누구에게도 그일을 말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 P134

다른 많은 여성들이 어린 시절 성추행당한 일을 말하지 못하고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더 많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은 자신이 당한 일을 입 밖으로 꺼내며 울었다. 어린 그들을 만지고 더 심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그 위치도 다양했다. 할아버지, 아빠 친구, 옆집 아저씨, 사촌 오빠 등등.
모두들 그저 말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누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한번은 친구에게 나의 속마음까지 얘기했다. 나 스스로 어린 게 음탕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무엇보다 그게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고 그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음탕하다는 말은 초등학생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줄줄 눈물을 흘렸다. 그간 내가 어린 나를 미워하고 원망했다는 게 미안해졌다. 또 언젠가 술을 마시며 친구들 앞에서 얘기했을 때, 그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네잘못이 아니야." - P135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어쩌면 아주 많은 사람이 어린 날의 상처를 안고, 그것이 자기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표현하고 드러내고 주변에 좋은 친구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드러내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같이 울고 화내고 욕하면서 풀어낸덕분에 지금 건강한 생활을 해나간다. 이런 나와는 달리 자신의 상처를 안으로만 삼키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비밀로만 간직한 탓에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여전히 듣지 못한 채 자기 자신만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건 정말이지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은 더 반항할 수 없었고, 당신은 음탕하지 않고,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혹여 이걸 모르는 채로 여전히 세상의 잔인한 소식들에 울며 가슴을칠 사람이 있을까 봐 이 말을 해주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정말 그렇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 P139

아주 갈길이 멀지만 위에 언급한 노르웨이처럼, 사회적으로 아빠가 육아휴직을 받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렇게 육아를 함으로써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다면 많은 것이 점차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그렇게 되기까지 아주 아주 멀다는 걸안다. 멀기만 할까? 실현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아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는 아이를 낳기만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나라가 아이를 키우는 데 대체 뭘 얼마나 해준다고 자꾸 아이를 낳으라, 낳으라고 하는가. 가임기 여성 분포도‘ 같은 걸 뿌려대는 나라에 과연 어떤 답이 있을까. 지금 내가 아빠와 엄마가 함께 육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지점과 가임기 여성 분포도를 뿌려대는 그 지점의 간극은정말이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먼가. 이건 무슨 우주에 혼자 떨어진 느낌 같은데,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혼자 우주에 남겨진 앤해서웨이의 기분이 이런 걸까.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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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신 그대로를 상대에게 보여주고, 상대방은 나라는 사람 자체를 매력적이라고 느껴야 한다. 나의 외모와 성격 모두가 나를 형성하고 있고, 그것을 상대에게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하는 거다. 친구나 연인이 되는 데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되는 거다.
호프밀러 소위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는 우유부단해서 소녀를 절망에도 빠뜨리기도 하고 또 가장 황홀한 희망을 품게도 한다. 그러나 그 희망조차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결국 절망으로 바뀔 것이 뻔하다. 우유부단한 연민이 끊어내지 못한 동정심이 그녀에게 더 큰 절망을 안겨준다. 아, 이 빌어먹을 연민, 그는 자신의 연민에 대해 후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걸 반복한다. 더 큰 절망을 줄 거라는 걸 알면서 제대로 된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순간을뒤로 늦춘다. - P119

예전에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과 좋은 관계가 되고, 예전 같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일을 허락하게 된다면, 나이를 먹는 것도 그다지 나쁠 것 같지 않다. 혼자서 산을 오르며 생각하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일흔넷이 되어도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고 새로 사귄다는 게근사하게 느껴진다. 스무 살이 아니어도 서른다섯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벨이 울리는 순간 ‘무지개가 뜬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아,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 P179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먹는 양이 적어지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일러지고 쉬는 시간이 길어져도 내 안의 감정들은 생생히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만나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사랑을 주고 싶어지는 일들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가능하다면, 이 세상을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그 순간이 빨리 오기를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에도 내가 여전히 한 사람의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시간이 가는 것을 온몸으로 막고 싶다는 생각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대부분은 두려운 마음이지만, 가끔은 설레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어김없이 묵묵히 산에 오를 수있는 것 같다. - P179

누군가는 커피가 필요한 사람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의미를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요리를 하면서 의미를 찾을 것이다. 누구나어떤 식으로는 다른 이의 삶에 혹은 이 사회에 작은 보탬이 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텐데, 나만 내가 하는 일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일인가. 이 일을해 번 돈으로 나는 소주를 마시고 고기를 먹고 책을 읽지만, 그런 내가 이렇게 먹고사는 일 말고 대체 이 세상에 어떤 쓸모가 있는가. 내가 여기서 일함으로써 이 회사에, 이 지역사회에 혹은 타인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니 의미 없 - P226

는 삶을 사는 걸로 여겨지는 거다.
이건 이 책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영화 <26>을 보면서도든 생각이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아픔을 누군가는 몸소 겪었고 누군가는 그 영향을 받았다. 세상에 알려야 할 일에 대해 누군가는 그걸 만화로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영화로 만들어냈다. 나는 관람석에 앉아 그 영화를 보는 동안 초반부터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자꾸만 등장인물들 앞에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들과 같은 일을 결코 할수는 없겠지만, 나는 소심하니 앞에 나서서 어떤 일을 진행할 수는없겠지만, 작게라도 어떻게든 무언가는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 P227

각자의 자리에서 아프고 힘들고, 그래서 외면하기도 하고 정당화해보기도 했던 사람들을 보노라니, 나는 뭐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반드시 그 자리에서 혹은 그 일에 대해서 뭔가 해야한다고 생각한다기보다는 내 삶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 이어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무엇 때문에사는 걸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울적하다. 이 일이 아닌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 걸까. 그러면 나는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나저나 이 책의 저자인 엘린 켈지는 전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한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직업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를 품게 되리라는 것을.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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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설로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알려주고 소설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 흔한 말이지만 소설은 재미와 감동 그리고 세상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 읽기를 권하고 싶다. 소설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소설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한방 날리고 싶다. "늬들이 소설을 알아?" 그리고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일단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읽어보란 말이야!"
소설에는 세상 모든 게 다 있다. 버려지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감동과 따뜻한 마음, 그것들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장들. 도대체 이런 소설을 읽지 않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또 버텨낸단 말인가. 소설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쥐고 있어야 할 거룩한 예술이다. - P22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르 귄이란 작가의 소설이 궁금해졌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르 귄의 소설을 읽어보라 권하고, 그렇게 내가 읽었을 때 권해준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르 귄의<어둠의 왼손>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나직하게 그러나 웅장하게 삶에 대해 말해준다. 쓰는언어가 다르고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살고 있고 몸 안에 남성과여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도, 어떤 이들은 권력을 욕망하고 어떤 이들은 배신을 한다. - P24

아 진짜 근사하다. 나는 지금도 소설 이외의 책을 거의 읽지 않는 것이 약간 콤플렉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소설이 아닌 다른책을 읽을 수 있는 건 그동안 소설을 읽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만약 내가 소설을 읽지 않고 지내왔다면 아마 다른 분야의 책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울게하고 웃게 한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더 나은 환경과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 그러나 책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다음, 그 모든 것들을 실천해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건 책이아니라 ‘책을 읽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 P40

나는 가끔, 내가 어렸을 때 내 주변에 괜찮은 어른이 있었다면지금보다 더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이 정도의 인간밖에 되지 못한 것은 나 자신의 문제임이분명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주변 환경의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원망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한창 자랄 때, 누군가 "지금 네가 아는게 다가 아니야"라거나 "그것 말고 이런 방법도 있지"라거나 "너는이걸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라고 얘기해주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누구도 내게 "넌 어느 쪽에 재능이 있으니 그쪽으로해보럼" 같은 말이나 "너는 이런 전공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같은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금 내게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할 것 같다. 내게 더 나은 것, 내가 그나마 조금 더하고 싶은 것이 뭔지는 어렴풋이 알게 됐으니까.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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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 세워진 산타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에 이르니 안개가걷히고 있었다.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에서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는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신의 검을 찾게 되는 배경이 된 곳이기도 했다.
꿈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자아의 신화를 만들기 위한 그의 끝없는 여정속에 지금 내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다.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고 바란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진실을믿어야 한다고 코엘료는 말했다. 그것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 P293

삶이 궁극에는 모두 순금의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음을 마음에새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최선의 시간을 살아내야만한다.
그동안 카미노 길의 수많은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카미노를 걸어본사람들은 삶에도 이런 친절한 이정표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여 제나름의 이정표를 만들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마음을 이기내며 나아가자! 새롭게 새겨진 믿음의 이정표를 따라 멈추지 말자!
하며.... - P294

에콰도르에서 NGO 활동을 하며 만난 두 친구. 에너지가 넘치는조아나와 달리 산드라는 무척이나 왜소하고 가냘프다. 그런 그녀가 남자친구와 이별 후 1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잊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조금 더 견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녀가 말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려운 때를 아파하고있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견디는 시간은 이기는 시간이다. 그 시간만큼세상을 살아내고 있으니까. 많이 울어도 도망가지 말고 스러지지 말아야한다. 비록 통증일지라도 깨끗이 비워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것이니까. 그녀도 나도 모두 이겨 내야 할 삶의 한때를 살고 있었다.
산드라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지루하고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끈적끈적 발길을 잡는 숲길을 지나니 도심까지 이어진 도로길 저 멀리사리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다다른 곳에서 마지막 알베르게를코앞에 두고 가파른 오르막 계단이 숨 가쁘다. 서로 파이팅을 외치며산드라와 조아나는 공용 알베르게의 마지막 베드를 차지했다. - P309

잠시 잊었던 그리움이 뒤범벅되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선생님이 신기한 듯 다가와 한솥단지에 무엇을 만들어 먹는지궁금해하면서도 권하는 음식을 극구 사양한다. 누가 봐도 이 민족의취향은 선뜻 소화하기 힘들 것 같다. 빨간 고추장에 마늘까지 들어갔으니선생님 취향은 정말 아니다. 오늘의 요리는 주제도 이름도 없는 그냥먹거리일 뿐이다. 그저 때우기 식사였음에도 내겐 최고의 밥상이었다.
그렇게 갈리시아의 어느 맑은 날, 그리운 밥을 먹는다. 따뜻하다. - P324

이른 새벽 어두운 길에도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다. 이제 평온한 새벽길도북적대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한 시간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던사람들이 이제 길 위에 넘쳐나고 있다. 때론 사람이 그립다가도 번거로워지기도 하고, 기운도 되지만 그로 인해 한없이 지쳐버릴 때도 있었다.
이제 막바지로 접어든 길에 많은 얼굴이 스친다. 그들은 지금도 묵묵히길을 걷고 있을까? 또 다른 길을 선택하고 떠났을까? 조금 더 많은사람들과 나누고 인연 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지금의무탈한 시간이 그저 고맙다.
‘함부로 인연을 만들지 마라.‘
그것이 비단 사람뿐일까? 무엇을 얻게 되고 희망과 기쁨을 안고도우리는 그것을 잃을까 염려한다. 소유는 기쁨도 되지만 한편으론 마음의어려운 몫을 갖게 되기에 항상 쉽지 않았다. - P327

그 기록 중에 가장 많은 날을 함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훌리오선생님이다. 첫날 나바레테 성당 앞에서 손짓 발짓으로 시작된 우리의우연이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았고, 몸의 언어도모자라 수첩에 그림도 숱하게 그렸다. 교직 생활을 오래한 탓인지선생님의 그림은 설득과 이해의 충분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남다른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다.
딱히 약속된 것도 없이 시작된 하루 이틀의 우연한 만남이, 어느새단짝 동무가 되고 난 후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안하며 안아주었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있을 때는 누구보다 흥겨운 친구였고, 그를 통해스페인과 카미노를 더욱 깊게 이해하며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걸음을 떼듯 하나둘 카미노 말을 배워갔다. 무엇보다 심신의기운이 지쳐 쓰러졌을 때 진심으로 걱정하며 보듬어주었다. 그것은 결코잊을 수 없는 작은 빛으로 남았다. 그 귀한 마음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따뜻함을 나누는 인연의 경이로운 시간은 주어질 것이라믿는다.


이제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많은 이들이 여정을 마치는 곳! - P345

집을 떠나온지 40여 일이 되어 간다. 그만큼 멀어진 현재의 시간에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하자니 풋 하고 터지는 웃음과 함께 밀려오는 허무한 느낌이 우습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내 삶 속에도 나는 없었다.
동장의 잔고를 쌓으려 한 만큼 내 마음의 곳간도 채워야 했었다. 부재한삶. 그저 세상 속에 존재하기 위한 모양새를 꿰맞추려 분주했었다.
세상으로부터 역할과 직무를 부여받고 살아왔지만 정작 내 스스로 살을향한 뜨거운 응원가 한 번 부르지 못했다. 한없이 딱하고 안쓰러운 시간들이었다. - P378

위인전 같은 삶을 바란 것도 아니고, 인간의 굴레에서 엄청 벗어난오류를 범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삶은 내게 단호했는지. 그것은 세상속의 옷을 벗고 채워놓은 시간의 몫이었다. 스스로 행동하고 마주 선진실. 그 값진 가치의 진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찌 보면 그 모자람으로고통을 앓고 넘어지고 부서진 것이었다. 그러한 영혼의 통증이 내두려움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다시 길로 나서며 야릇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이제 온전히 혼자가 된이 길을 참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행복한 긴장감이었다. 그동안 부재한 삶과의 외로운 동거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넘어져야 일어서는 법을 알아가듯, 그때야말로 삶의 풍요로운 시력을 찾을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 P378

나는 헛걸음에 지쳐 이정표 없는 길 위에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한없이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나는 바람이 감미로웠다가 뜨끔하게두려움으로 나를 몰아세우고는 사라져버렸다. 길을 잃는 것이 크나큰과오는 아니다. 하지만 왜 길을 잃고 너는 여기에 있는지….
때론 이해하고 반성하고 견뎌야 하는 그때를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잠시 겸손한 성찰의 시간이 지난 후 만나게 되는 지혜는 평화롭다. 나는이제 조금 더 배려하고 진실한 나와 남은 길을 걷고 싶다. 새삼 지금까지무던히 스스로를 믿고 단단히 끌어안아 준 날들이 고맙다.
길을 걸으며 매번 나를 괴롭힌 또 하나는 길 끝의 허전함을 어찌할까걱정했었다. 성공적 결과 지향의 길들여진 시간 속에서 목표의 부재는매번 공허하게 버거웠다. 그 조바심 가득한 마음을 어찌 메울 수 있을까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망설임이었다. - P381

920km. 그리 쉬운 걸음이 아니었다. 여정의 끝에서 지난 시간의숨결이 푸르게 살아나 안겨 왔다. 그 날들 속의 사람, 풍경, 괜한 슬픔,
오기와 탄식, 후회의 시선, 가슴속 축복의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마음에풍요로웠다.
그 길 위의 조화로운 시간 속의 환희가 저기 깊고 눈부신 대서양 바다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작지만 성취된 빛나는 선물이었다.
지나온 시간이 아름다운 영광으로 차오르며 일렁였다. 삶의 막다른곳에서 선택한 길을 걷고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바다 저 너머엔 삶을요동치게 할 무엇이 있을까? 대륙의 끝자락을 밟고 서니 설렘의 탄성과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 P382

내가 만나고 싶은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길을 걸으며 나는 두렵고위태로웠다. 그렇게 차오르지 못한 허전함 속에 무던히 꺾이지 않는신념의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된 내 안으로의여행에서 묵묵히 견디며 걷는 영혼의 순례자를 만났다. 더디게 참고,
끝없이 응원하고 위로하던 내 영혼의 순례자.
나는 오늘 삶의 물결 위에 카미노란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울었던 아픔은 평화로움으로, 미숙한 시선은 더욱 인내하며 자라는지혜로 거듭나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제 선택된 일상에서 진실한 가치로꾸준히 격려할 것이다. 내 영혼에 새겨진 이 길을 기억하며.. - P382

나는 오늘 순례자입니다.
타인의 시선보다 내 안의 물음을기적을 바라기보다 기도를,
스포트라이트보다 등대를,
비겁함보다 인간적 눈물,
소유보다 존재를 잊지 않게 하소서이제사람을 읽고, 길을 읽고떳떳한 가치를 찾는 걸음과한 뼘의 마음이 자라게 하소서


김수연
그림이 좋았지만 열심히 그리지 못했다.
영혼 없는 생의 반나절이 지나며인간이 제 이름만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길을 나섰다. 자신과의 불편한 진실 속에마음 길의 도로시가 되어보기로 한 것이다.
아직 삶의 습작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을 것이다.
thankstocamino@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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