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있어서도 우리 부모님의 책임이크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을 사지 않는다. 아버지가텔레비전은 우리를 백치로 만들 것이며 해로운 복사에너지와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방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들이 나를 데리러 오면 아버지는 지하층에서 오래된 회색 펠트 모자를 쓰고 망치나 톱을 들고 나타나서 그들과 힘찬 악수를 나눈다. 아버지는 빈틈없고 반짝이고 풍자적인 작은 눈으로 그들을 평가하며, 마치 그들이대학원생 제자라도 되는 듯이 존칭을 붙여 부른다. 어머니는 고상한숙녀처럼 행동하며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아주예뻐 보인다고 남자 아이들 앞에서 말한다. - P71
나는 오빠의 이런 행동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예상했다. 오빠의 말은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남자 아이들에 대해 연애 만화책에 나오는 소녀들이 으레 품는 그런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전화를 할지 조바심을 내며 앉아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십대 잡지에 나오는 뺨에 진주 목걸이 같은 눈물을 흘리는 침울한 소녀들의 그림은 내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면에서는 남자 아이들은 내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게 심각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을 심각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몸이다.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 현관에 앉아서 나는 그들의 몸을 듣는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이 침묵 속에서 이 몸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나에 의해 창조되며, 형태를 갖추게 된다. 남자아이들이 없어 심심할 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의 몸이다. 나 - P73
는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담배를 들어 올리는 그들의 손을, 어깨의경사를, 엉덩이 각도를 관찰한다. 곁눈으로 살펴보며 나는 그들을여러 각도에서 점검한다.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시각적인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움직이지 마. 그대로 있어. 내가 가질 수 있도록. 나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은 눈을 통해 유지된다. 내가 그들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는것은 한편으로는 신체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시각적으로 흥미를잃었기 때문이다. - P74
"이것이 모두 섹스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분명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차가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차가 없는 아이들과 나는 버스나 전차, 새로 개통된 깨끗하고 안전하며 옅은 색 타일이 붙은 긴 목욕탕처럼 보이는 토론토 전철을 탄다. 이런 아이들은 집까지 나를 데려다 준다. 우리는 먼 길로돌아간다. 계절에 따라 공기는 라일락 냄새나 새로 깎은 잔디나 타는 낙엽 냄새를 풍긴다. 우리는 새로 지은 시멘트 인도교를 걷는다. 위로는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아래쪽에서는 시내를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다리 위 가로등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아래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댄다. 그들의 팔은 내 몸을 감싸고 내 팔은그들의 몸을 감싼다. 우리는 서로의 옷을 들추고 서로의 등뼈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는 상대방의 등뼈가 부서질 듯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몸 전체의 길이를 느끼고 얼굴을 만지고는 경탄한다. 남자 아이들의 얼굴은 너무나 많이 변한다. 그들은 부드러워지고, 활짝 열리며, 아파한다. 그들의 몸은 순수한 에너지, 결정화된 빛이다. - P74
*빈 공간이야. 거의 존재하지 않지. 그것은 힘에 의해 한곳에 붙잡혀 있는 몇 개의 미세한 알갱이에 불과해, 원자 내부의 수준에서는 질량이 존재한다고 하기조차 힘들어. 그저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오빠는 지금 코딜리어를 더 혼동시키고 있어." 나는 말한다. 코딜리어는 담뱃불을 붙이고, 다람쥐 여러 마리가풀밭에서 서로 뒤쫓는 창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빠는 코딜리어를 주시한다. "코딜리어는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 그는 말한다. - P78
"원자에 대해서요." 나는 말한다. 그는 말한다. "아, 원자, 나도 기억해. 그래, 요즘 원자는 어떤 변명을 하고 싶어 하지?" "어떤 원자요?" 나는 반문을 하고, 그는 웃는다. "어떤 원자, 그럼 그렇지. 정말 훌륭해." 그는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일종의 주고받기. 그러나로딜리어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 자기 아버지를 너무 두려워하는 것이다. 코딜리어는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코딜리어가 공포로 떨고 더듬거리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말,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어떤 연유에서든 그녀는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분노한다. 코딜리어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싶다. 어쩌면 저렇게 비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언제 제대로 배우게될 것인가? 코딜리어는 동물학 중간고사에서 낙제한다. 그래도 전혀 개의치않는 것 같다. 그녀는 시험 시간 절반을 몰래 여러 선생의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그림들을 보여 주며 과장되게 소리 내어 웃는다. - P89
서두르고 바쁜 척을 하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는외출에서 돌아오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나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책망하는 눈으로쳐다볼 것이다. 마치 코딜리어의 현재 모습이 내 책임이라는 듯이, 마치 코딜리어가 아니라 내 모습에 실망했다는 듯이 내 실수가 아난 일로 왜 내가 그런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가? "안녕, 코딜리어." 나는 현관에서 인사한다. 나는 코딜리어의 팔을 잠시 붙잡았다가그녀가 내 뺨에 키스하기 전에 재빨리 돌아선다. 뺨에 키스하는 것은 그 가족의 관습이다. 코딜리어가 나로부터 무언가를, 그녀의 옛생활, 아니면 그녀에 관련된 무엇을 기대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잔인함과 무관심, 친절함의 부재에 놀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 P103
기억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질병이 있다. 예를 들면 명사나 아니면숫자를 잊어버리는 것. 더 복잡한 기억상실증도 있다. 어떤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과거 전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신발 끈을 어떻게 매는지, 포크로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어떻게 읽고 노래 하는지를 배워 가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친척들과 가장 오래된 친구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소개받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기억상실증 환자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용서보다 더 나은 두 번째 기회를 부여받는다. 다른 기억상실증의 증상은 먼 과거는 기억하지만 현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5분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평생 알아 온 어떤 사람이 방에서나갔다 들어오면, 마치 20년 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할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과 재회한 것처럼 기쁨과 안도의눈물을 흘릴 것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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