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 시를 포함하여 모든 글쓰기는 차이의 기록이다. 하지만 차이란 말 그대로 차이일 뿐 정본이 아니다. 탁자 위의 물방울이 마른 흔적을 통해, 여기 물방울이 있었다고 기록할 수는 있겠지만, 물방울을 돌이키지는 못한다. 글쓰기는 말하자면 돌이킬 수 없는 물방울 같은, 좌절된 열망의 흔적이다. 나는 그 흔적의 글쓰기를 통해, 지금은 없는, 그대를 기록한다. 아니 그대의 흔적을 기록한다. 그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

더디고 더딘 발걸음으로 새 시집을 묶는다. 오랜만이다. 지나온 날이 그러했듯 어쩔 수 없어서 내가 내 앞을자꾸 가로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별다른 뜻 없이 크게네 부분으로 나누었지만, 세상에 아무 의미 없는 일이과연 있겠는가.

그대만 견디고 있는 게 아니므로 세월은 또 느릿느릿흘러갈 것이다.

2001년 여름
강연호

적멸


지친 몸빛이 저녁을 끌고 온다.
찬물에 말아 넘긴 끼니처럼
채 읽지 못한 생각들은 허기지다
그대 이 다음에는 가볍게 만나야지
한때는 수천 번이었을 다짐이 문득 헐거워질 때
홀로 켜지는 불빛, 어떤 그리움도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눈부시게 그리운 법이다
그러므로 제 몫의 세월을 건너가는
느려터진 발걸음을 재촉하지 말자
저 불빛에 붐비는 하루살이들의 생애가
새삼스럽게 하루뿐이라 하더라도
이 밤을 건너가면 다시
그대 눈 밑의 그늘이 바로 벼랑이라 하더라도간절함을 포기하면 세상은 조용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그 동안 베껴썼던 모든 문자들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혹은 그대의 텅 빈 부재를 채우던
비애마저 사치스러워 더불어 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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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죄 없는 자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하고
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하고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 더 많이 뉘우치고
힘들여 사는 자들일수록 고행의 순례길을 떠나고
적게 살생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러한 감사와 참회가 낡아빠진 문화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하여 내가사는 곳에 감사와 참회 따위가입에 오르는 일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래전에 낡은 체제를 혁명하고
또 혁명에 혁명을 거듭했기 때문에
더 혁명할 것이 없을 즈음에
마침내 어떤 진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많이 먹고 많이 가질수록 죄가 줄어든다는,

축의 시간


굵은 비 쏟아지는 산길
키 낮은 병꽃나무에 튼 둥지에서
새 한마리
알을 품고 있다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비를 다 맞고

날개 지붕을 펴 둥지를 덮고
떨고 있다 쏟아지는 것은 쏟아지라고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 알
시제가 없는 알

지금은 축의 시간
주둥이가 막힌 병
거센 물살 가운데 정지한 나무

꼭지가 막 떨어진 사과의 시간

지금은 오직 전체를 기울여야 할 때
시간은 수컷처럼 둥지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일 뿐

인간 형성


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몸가짐이 거침없고 말이 시원시원하다
똥 푸러 오는 사람들 속이 훤히 다 보일 것 같다

종일 남의 집 똥구덩이에 고개를 박고
얼굴에 입술에 똥물 바르고 그 돈 벌어 밥 먹고
애들 학교 보내고 마누라 화장품도 사주고 조상 제사도 모시고
아무나 하는 일 아니다 속이 컴컴한 자들
근기 모자라는 자들은 근처에도 못 가는 일이다

꽃을 노래하고 별을 우러르고
영롱한 이슬을 글에 담는 사람들더러
영혼이 맑은 사람인 것 같아요 누군가 감동하자
그 영혼들이 우쭐대지만 속사정은 개뿔이다

속에 구정물이 가득해서 이슬을 찾고
당장 숨이 차고 혼미해서 꽃을 찾고
인간성이 시궁창이라서 향기를 찾고

영혼이 누더기라서 별로 기워야 했을 것
아니면 오염되기 쉬운 선천적 기형이라서
별과 이슬을 복용해야 하거나

인간이 제 손으로 똥 푸는 일이 없어지고
자기가 싸놓고 제 것이 아닌 양
혐오하고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고상한 습성을
동물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습성을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른다

교차 신호등

삼십년지기 먼 길 배웅하고 돌아오던 밤길 지방도

마을도 교차로도 없는데 문득 켜지는 신호등 하나

너는 저만큼 가버리고 나는 어둠에 지워져 있고

길은 차갑게 식어 있고 따라오는 신호등 하나

낯선 길인 양 낯익은 길 오래되었으나 처음 들어선 길

나도 모르게 들어선 길 위에 둥근 달 신호등 하나

무무소유

굶주리는 사람이 건강 단식을 어떻게 이해하나
없는 사람이 무소유를 어떻게 이해하나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잃을 것은 사슬뿐인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날 거라지만
그들도 잃을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거지는 동냥 구역을 잃을 게 있지
없을수록 집착할 수밖에

거액의 자산가가 방송에 나와 무소유의 자유로움에 대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할 때 그건 분명 진심이었을 거다
무소유의 청빈함을 제대로 글로 쓰는 작가는 좀 살 만한자다
어디 가나 밥과 집이 넉넉한 스님이라야
무소유를 제대로 설법할 수 있다.

무소유는 가진 뒤의 자유다
무소유는 소유라는 단어가 있은 뒤 조합된 낱말이다

다 내려놓은 사람의 무소유는 이미 그 낱말이 아니다.

가진 것이 넉넉해야 무소유를 맘껏 가질 수 있다

모과


맹렬하게 뿜어내는 저 향기는 나무를 떠난 뒤 급격히 기우는 시간의 기울기를 만회하려는 몸짓인가

당신이 떠난 뒤 지상의 것이 아닌 이 슬픔의 실상은 당신과의 분리로 인한 급격한 시간의 기울기가 만들어낸 죽음의 냄새인가

꽃은 이미 분리를 시작한 불안한 시간의 빛과 향기 모든 향기에는 죽음의 냄새가 묻어 있어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향기가 우리를 매혹시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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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그림들은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의 그림이 아니다. 과정의 순간이 캔버스에 포착된 것이다. 그것은 순수 회화다.
존은 순수에 열광한다. 그러나 그 열광은 오직 미술에만 한정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어머니들, 특히 그의 어머니에 대한 과장된 항의 선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살림살이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어쩌다 하는 설거지도 그는 빵 부스러기와 통조림 옥수수 낟알이 배수구에 걸려 있는 욕조에서 한다. 거실 바닥은 주말이 지나간 해변같다. 침대보는 그 자체가 ‘과정의 순간‘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순간이라는 것이 상당 기간 지속된다. 나는 그나마 덜 더러워 보이는슬리핑 백에서 자는 것을 선호한다. 욕실은 북쪽의 외딴 휴게소 화장실처럼 보인다. 변기 안쪽에는 갈색 테가 보이고 담배꽁초가 떠다니며, 타월이 혹시라도 있을 때면 손자국이 마구 찍혀 있고, 정체 모를 종이 조각들이 바닥 이곳저곳에 뒹군다. - P189

그러나 이 모임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알 수없다. 나는 어색하고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고통받지도 않았고 권리를 쟁취하지도 않았으므로 말을 꺼낼 권리가 없는 것이다. 문 안쪽에서 판결과 비난 어린 선고가 내려지는 동안 닫힌 문 밖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호감을 사고 싶기도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자매애란 내게 어려운 개념이야,
나는 자매가 없었으니까. 형제애는 어렵지 않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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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재빨리 내 손에 그의 손을 얹는다. ‘이 그림들세요" 그는 말한다.
요? 잘된 그림이 아니잖아요." 나는 묻는다.
토르비크 씨가 말한다. "나중에 그 그림들을 보고 당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사물을 아주 잘 그려요. 그러아직 실물은 그리지 못하죠. 신은 처음에 흙으로 머엄을 만들고영혼을 불어넣었어요.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해요. 흙과 영혼." 그는 짧은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지그시 누른다. "열정이 있어야 하는거라고요."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의 말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병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면 몸에 대해이야기하지 않고, 교회가 아닌 곳에서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흐르비크 씨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알지 못할수도 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당신은 미완성의 녀자예요. 그러나 이곳에서 완전히 끝나게 될 거예요." 그는 끝난다는 말이 못쓰게되고 끝장이 난다는 의미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나를 격려하려고한 것이다. - P123

고대 그리스를 마치고 로마와 중세, 르네상스 시기로 들어서는다음달에는 사정이 좀 나아지기를 기대한다. 고전적인 것이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탈색되고 부서진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그리스와 로마 유적들은 신체 일부가 없어졌다. 이렇게 큰 규모로활과 다리와 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내 신경에 거슬린다. 부러진 남자 성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온통 회색과 흰색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대리석 상들이 예전에는 선명한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노란 머리와푸른 눈과 피부색, 그리고 때로는 인형처럼 진짜 옷을 걸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수업은 개관 수업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별 예술에익숙해지도록 하고 나중에 배울 심화 수업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한것으로, 토론토 대학의 예술과 고고학 과정의 일부다. 이 과정은 내가 미술에 근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공인된 경로다.
요한 길이기도 하다.  - P125

그들은 캐시미어 트윈 세트와 낙타털 코트와 질 좋은 트위드 치자를 입고 납작한 진주 귀걸이를 하고 다닌다. 단정한 중간 높이 굽이 달린 펌프스를 신고 맞춤 블라우스나 점퍼 스커트, 아니면 같은뇌의 치마와 단추가 달린 작은 조끼를 입는다. 나역시 이런 옷을있고 그들 속에 섞이려고 노력한다. 쉬는 시간에는 다양한 대학 휴게실과 식료품실과 커피숍에서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먹는다. 그들은 손가락에 묻은 도넛 설탕을 핥으며 옷에 대해 토론하거나 사귀고 있는 남학생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명은 이미 확실한 애정 고백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의 눈은 물기가 많아지고, 희미해지고, 물러지며,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아기 고양이 눈처럼 상처받기 쉽게 보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눈은 간교하고 생각에 잠겨 있으며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 P127

나는 그들과 있는 것이 마치 거짓 흉내를 내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다. 흐르비크 씨와 몸의 촉각성은 예술과 고고학과와 들어맞지 않는다. 나신의 여자를 그리려는 나의 어설픈 시도는 시간 낭비로 여겨질 것이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남은 일은 암기하는 일뿐이다. 실물화 강좌 전체는 거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노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명선, 내 진정한 삶이다. 점점 더 나는 그것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고 나 자신을 다듬기 시작한다. 첫 수업 시간에는 체크무늬 점퍼 스커트와 피터 팬 깃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 P127

입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적응하는 법을 빠르게 배운다. 나는남학생들과 다른 여학생처럼 차림새를 바꾼다. 검은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 이 옷차림은 여타 다른 옷차림처럼 가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충실함의 표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기를 내어 대낮의 예술과 고고학 수업에도 이런 옷을 입고 간다. 단 어느 누구도 입지 않는 청바지는 제외하고, 그 대신 나는 검은 치마를 입는다.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도록 고등학교 시절처럼 앞머리를 길러 뒤로 넘겨머리핀으로 고정시킨다. 캐시미어와 진주를 걸친 여학생들은 예술가 행세를 하는 비트족들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고, 내게는 점점 더 말을 건네지 않는다. - P128

이것은 내 삶의 한 측면, 낮 동안의 나의 삶이다. 다른 측면의 삶, 진짜 삶은 밤에 펼쳐진다.
나는 수지를 자세히 관찰하며 그녀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수지는 사실 나와 같은 나이가 아니라 두 살 이상 많다. 거의 스물한 살이다.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고 애비뉴 로드와 세인트 클레어 애비뉴가 교차하는 곳 북쪽에 위치한 고층 건물의 1인용아파트에 산다. 부모님이 집세를 내 주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그 아파트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런 빌딩에는 엘리베이터와 화분이 놓인 넓은 홀이 있고, ‘몬테 카를로‘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이런 곳에 산다는 것은 대담하고도 세련된 일이다. 비록 그런 곳에는간호사 삼인조가 산다고 화가들이 비웃을 일이기는 하지만, 화가들은 블루어 스트리트나 퀸 스트리트의 철물점이나 여행용 가방 도매점 위층, 아니면 이민자들이 사는 골목에 산다. - P140

나는 캘리포니아의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오빠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는 자신이 편지를 쓰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오빠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 버렸다. 그리고 나 역시 편지를 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내가그렇듯이 이전에 모르던 일들을 이제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샌드위치를 먹으며 동시에 편지를 쓰고 있다면 오빠는 어떻게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일까? 그는 저격병 자리같은 그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에 만족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신중해야 한다. 내가 항상 용감함이라고 여겨 왔던 그의 자질은어쩌면 결과에 대한 무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가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열린 공간에,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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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있어서도 우리 부모님의 책임이크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을 사지 않는다. 아버지가텔레비전은 우리를 백치로 만들 것이며 해로운 복사에너지와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방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들이 나를 데리러 오면 아버지는 지하층에서 오래된 회색 펠트 모자를 쓰고 망치나 톱을 들고 나타나서 그들과 힘찬 악수를 나눈다. 아버지는 빈틈없고 반짝이고 풍자적인 작은 눈으로 그들을 평가하며, 마치 그들이대학원생 제자라도 되는 듯이 존칭을 붙여 부른다. 어머니는 고상한숙녀처럼 행동하며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아주예뻐 보인다고 남자 아이들 앞에서 말한다. - P71

나는 오빠의 이런 행동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예상했다. 오빠의 말은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남자 아이들에 대해 연애 만화책에 나오는 소녀들이 으레 품는 그런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전화를 할지 조바심을 내며 앉아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십대 잡지에 나오는 뺨에 진주 목걸이 같은 눈물을 흘리는 침울한 소녀들의 그림은 내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면에서는 남자 아이들은 내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게 심각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을 심각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몸이다.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 현관에 앉아서 나는 그들의 몸을 듣는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이 침묵 속에서 이 몸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나에 의해 창조되며, 형태를 갖추게 된다. 남자아이들이 없어 심심할 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의 몸이다. 나 - P73

는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담배를 들어 올리는 그들의 손을, 어깨의경사를, 엉덩이 각도를 관찰한다. 곁눈으로 살펴보며 나는 그들을여러 각도에서 점검한다.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시각적인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움직이지 마. 그대로 있어. 내가 가질 수 있도록. 나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은 눈을 통해 유지된다. 내가 그들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는것은 한편으로는 신체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시각적으로 흥미를잃었기 때문이다. - P74

"이것이 모두 섹스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분명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차가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차가 없는 아이들과 나는 버스나 전차, 새로 개통된 깨끗하고 안전하며 옅은 색 타일이 붙은 긴 목욕탕처럼 보이는 토론토 전철을 탄다. 이런 아이들은 집까지 나를 데려다 준다. 우리는 먼 길로돌아간다. 계절에 따라 공기는 라일락 냄새나 새로 깎은 잔디나 타는 낙엽 냄새를 풍긴다. 우리는 새로 지은 시멘트 인도교를 걷는다.
위로는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아래쪽에서는 시내를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다리 위 가로등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아래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댄다. 그들의 팔은 내 몸을 감싸고 내 팔은그들의 몸을 감싼다. 우리는 서로의 옷을 들추고 서로의 등뼈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는 상대방의 등뼈가 부서질 듯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몸 전체의 길이를 느끼고 얼굴을 만지고는 경탄한다. 남자 아이들의 얼굴은 너무나 많이 변한다. 그들은 부드러워지고, 활짝 열리며, 아파한다. 그들의 몸은 순수한 에너지, 결정화된 빛이다. - P74

*빈 공간이야. 거의 존재하지 않지. 그것은 힘에 의해 한곳에 붙잡혀 있는 몇 개의 미세한 알갱이에 불과해, 원자 내부의 수준에서는 질량이 존재한다고 하기조차 힘들어. 그저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오빠는 지금 코딜리어를 더 혼동시키고 있어."
나는 말한다. 코딜리어는 담뱃불을 붙이고, 다람쥐 여러 마리가풀밭에서 서로 뒤쫓는 창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빠는 코딜리어를 주시한다. "코딜리어는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 그는 말한다. - P78

"원자에 대해서요." 나는 말한다.
그는 말한다. "아, 원자, 나도 기억해. 그래, 요즘 원자는 어떤 변명을 하고 싶어 하지?"
"어떤 원자요?" 나는 반문을 하고, 그는 웃는다.
"어떤 원자, 그럼 그렇지. 정말 훌륭해." 그는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일종의 주고받기. 그러나로딜리어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 자기 아버지를 너무 두려워하는 것이다. 코딜리어는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코딜리어가 공포로 떨고 더듬거리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말,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어떤 연유에서든 그녀는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분노한다. 코딜리어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싶다.
어쩌면 저렇게 비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언제 제대로 배우게될 것인가?
코딜리어는 동물학 중간고사에서 낙제한다. 그래도 전혀 개의치않는 것 같다. 그녀는 시험 시간 절반을 몰래 여러 선생의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그림들을 보여 주며 과장되게 소리 내어 웃는다. - P89

서두르고 바쁜 척을 하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는외출에서 돌아오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나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책망하는 눈으로쳐다볼 것이다. 마치 코딜리어의 현재 모습이 내 책임이라는 듯이,
마치 코딜리어가 아니라 내 모습에 실망했다는 듯이 내 실수가 아난 일로 왜 내가 그런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가?
"안녕, 코딜리어."
나는 현관에서 인사한다. 나는 코딜리어의 팔을 잠시 붙잡았다가그녀가 내 뺨에 키스하기 전에 재빨리 돌아선다. 뺨에 키스하는 것은 그 가족의 관습이다. 코딜리어가 나로부터 무언가를, 그녀의 옛생활, 아니면 그녀에 관련된 무엇을 기대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잔인함과 무관심, 친절함의 부재에 놀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 P103

기억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질병이 있다. 예를 들면 명사나 아니면숫자를 잊어버리는 것. 더 복잡한 기억상실증도 있다. 어떤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과거 전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신발 끈을 어떻게 매는지, 포크로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어떻게 읽고 노래 하는지를 배워 가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친척들과 가장 오래된 친구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소개받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기억상실증 환자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용서보다 더 나은 두 번째 기회를 부여받는다. 다른 기억상실증의 증상은 먼 과거는 기억하지만 현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5분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평생 알아 온 어떤 사람이 방에서나갔다 들어오면, 마치 20년 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할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과 재회한 것처럼 기쁨과 안도의눈물을 흘릴 것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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