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더욱 어렵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현실에 들고 나는 과정(in and out), 즉 인식 과정이 격렬해졌고 그만큼 언어화도 힘들어졌다. 근본적으로는 나의 무능력 탓이지만, 예전과 달리 이제는남성 문화뿐만 아니라 동료, 여성주의자, 여성들과 내 의견이 다른경우가 많아졌다.
분명 페미니즘은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한계 없는 자본주의, 인류세 시대의 한국 사회 페미니즘에 대한 억압과 금기, 반발은 그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 삶의 ‘기본값‘이 된 반면, 그만큼 남성 문화의 저항도 심해졌다. 이 문제의 양상은 상당히 복잡해 보인다.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의 의미는 이전과 달라졌고, 남성 문화는 그저 당황하고 있다. 다시 말해페미니즘의 대중화에 비해 한국의 여성주의 담론의 발전은 더디고,
일부 여성들은 기본적인 사회 정의에 반하는 언설(예를 들어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적대와 탄압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 P7

있다. 한편 남성 문화의 젠더 문해력은 ‘혐오‘ 수준에 가깝다. 지난30여 년간 여성 운동이 추구해 온 젠더 관련 법들은 그 시행과 결과 모두 극히 불안정하다. 금내 몸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역부족인 듯싶다. 매일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이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는 크게 변화했지만 그변화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는 준비가 부족한 듯하다. 최소한 나는그렇다. 한편 당연하게도 30대의 젠더와 50대의 젠더는 다를 수밖에없는데, 이 차이를 두고 사회와 타인과 소통하기도 쉽지 않다.
누구나 그렇듯 자기소개는 어려운 일이다. 나는 안목 있는 독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군 ‘위안부‘ 문제를 계속 공부하는 연구자,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자원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싶다. 이 중 맨 마지막은 앞의 두 가지에 비해 나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 P8

<페미니즘의 도전>이 사회 정의로서 여성주의를 소개했다면, 이책은 변화된 여성주의 정체성의 정치 위주의 담론을 분석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변화해 온 한국 사회의 성 문화(섹슈얼리티, sexuality)를 살펴보고 더불어 기존의 논쟁 구도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개인을 보호하는 공동체나 사회구조가 작동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아야 하는 통치 방식을 가리킨다. 이때 개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자원을 총동원하는데, 부모의 자원은 물론이거니와 나이, 건강, 젠더, 식사량(먹방 유튜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다. 특히 여성성은 기존에는 차별과 억압의 ‘원인‘이었지만, 지금 일부 여성에게는 자원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가속화할 것이다. - P9

특히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원으로 삼기 위한 ‘자기 결정‘을 하는 경우에는 매우 논쟁적인 이슈가 된다. 다시 말해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폭력처럼 성적 자기 결정을 침해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주장할 수 있지만 성매매, 다이어트, 외모 관리, 여아 낙태처럼 여성이자신의 의지로 (대개 남성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자원, 투자, ‘처벌‘, ‘학대‘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로도 주장할 수 있게된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나"이다. 내가 내 몸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협상하는 삶을 의미한다. - P18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기를 바란다. 여성학, 여성 운동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합을통한 생산적인 갈등 없이는 진전도 없다. 한국의 여성주의가 나아감 없이 여성의 생존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미소지니의 타깃이 되지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 질문에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 P20

사회적 약자의 피해와 고통이 저절로 규명된다면 이미 유토피아이고, 사회 운동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가자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가해자가 ‘내가 받은 상처 이상으로 처벌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피해와 가해 여부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한다. 문제는 성 중립적(gender neutral) 사회는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의미한다.
피해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경합적 가치다. 즉 피해를 당했다고해서 곧바로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 피해자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피해자는 투쟁으로 획득되는 지위‘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저항은 평생에 - P24

걸친 과정일 수도 있고, 생전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나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제주 4·3 사건도 그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일상적으로는 여성이 겪는성폭력이 대표적이다.
성폭력 실태 조사를 해보면 성폭력 범죄는 범인이 아는 사람인 경우가 70퍼센트를 넘고, 범행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인 비율이가장 높다. 증인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검찰과 경찰은 피해자에게 피해 증명을 떠맡긴다. 우리 사회에서 성범죄는 여전히 피해자나 여성 단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피해자가 사법 기관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취조받는 현실에도 변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구호가 피해자 중심주의다. 사기나 절도 범죄에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느 범죄나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자 말부터 듣는 게 상식이다. - P25

오드리 로드는 "주인의 도구로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는 말로 이 곤경을 정확히 해석했다. 남성 문화는 남성들의 주관성을 보편성, 객관성, 과학, 전통, 국민의 뜻, 대의 따위로 포장해 왔다. 이에 대항한 여성주의 지식은 남성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재구성하고 해체하려고 노력해 왔다. 남성도 마찬가지지만 여성의경험도 객관적이지 않다. 여성들 간에 이해의 충돌이 있을 때 어떤여성의 경험을 여성주의 지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지식은 맥락에서 발생하는 상황적 지식 (situated knowledge)이고 당파적/부 - P26

분적(partial)이다.
인식자의 위치도 유동적이어서 우리는 이를 유목적 주체, 과정적 주체라고 부른다. 남성 중심적 보편성이 인식론적 폭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피해자 중심주의가 그 대응 방법이 될 수는 없다. 피해와 가해는 논쟁과 경합의 산물이며, 이 과정에서 여성주의 지식도 발전한다. 여성주의 지식이 모든 학문 분야에서 ‘최첨단‘의 질문과 문제의식으로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힘도 상황에 맞는(contextual) 사유의 힘 때문이다. - P27

성차별은 여전하다.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여전하다 (100 대 60).
다만 변화하는 상황에 남녀가 다르게 대응함으로써, 특히 하층 계급 남성들이 자기만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김중배와 심순애 스토리로 대변되는 남성 심리, 여자는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통념-이데올로기-자격지심의 삼중합작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돈벌이가 시원찮아도, 가사나 육아에 적극적이고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하면 얼마든지 자신이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회적 자원과 경제력이 없을수록 열등감 때문에 시간많은 남성이 더 가사 노동을 안 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이런 상태는 여성이 결혼을 기피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이자 성차별 현실을요약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사 노동을 얼마나 천시하는지(솥뚜껑운전‘, ‘집에 가서 애나 봐라‘.......), 그리고 가사 노동 전담 여성을 얼마나 비하하는지 모르는 여성은 없다. 남성 문화는 가사 노동을 루저의 상징으로 삼는다. 여성들은 이 구조를 간파했다. 더욱이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춘 여성들이 많아졌지만, 남성의 의식은 그대로이고 남성의 입장에서는 배우자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P35

아예 맥락을 벗어난 기이한 일도 있다. 2022년 한국의 대통령 윤석열 부부가 동아시아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한때 일이다. 김건희 여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앓고 있는 14살 소년의 집을 직접 찾아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정상 배우자들의 앙코르와트 방문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대신비공개로 개별 일정을 진행한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이미지)‘에 동일시하는 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 캄보디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분노했다. 동시에 이는 평범한 시민의 고달픈일상이기도 하다. 타인이나 집단이 나를 마음대로 재현(묘사, 평가,
규정)할 때는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야 할까.
대통령의 배우자는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가 아니다. ‘가난한나라‘에서 국제적인 공식 회의가 있어서 대통령을 따라간 배우자가그 나라 빈곤 지역의 심장병 아동을 찾아가, 조명을 설치했다는 루머는 뒤로하더라도,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행위는 적절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다. 전쟁만 폭력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불가피한 전쟁도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타인이나 집단 전체를 이용하는 행위는 가장 뿌리 깊은 폭력이다 - P43

대상과 대상화는 다르다. 누구나 대상일 수 있다. 대상화는 ‘나‘ 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에대한 낙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결혼 제도의 정상성은 이혼과저출산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흰 피부의우월성은 흑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것이 사고방식으로서 ‘미소지니다.
카메라와 권총은 동반 발전했다. 사진을 ‘찍다‘와 총을 쏘다‘의 스펠링이 모두 ‘shoot‘로 같은 이유이다. 김건희의 성모 마리아, 오드리 헵번 흉내 내기는 ‘캄보디아‘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주의는 물자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까지 포함한다.
제국주의는 불쌍한 어린이를 이용해서 관용을 선전한다.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불편하다면, 순한 말로 바꿀 수 있다. 주인공병,
‘관종‘, 돋보이고 싶은 욕심, "돋보이고 싶다"도 그 행동에 비한다면 너무 좋은 표현이다. 타인의 생명과 고통을 볼모로 삼아 ‘셀럽(celebrity)‘이 되고 돈을 버는 이유가 겨우 돋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일까. - P46

미소지니는 대통령조차 ‘여성‘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남성 문화를 말한다. 미소지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벗은 몸으로 공격한 경우이다. 당시 나는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의 공적 영역의 지위가 성 역할로서 여성으로 환원되는 문화현상에 반대했다. 반면 김건희 여사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해서 가부장제가 원하는 규범적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자원을 확보해 왔다. 외모와 교양이 그것인데, 외모보다 ‘교양 확보‘는좀 더 복잡하다. 미술계에서 일하거나 대학원 생활을 조금이라도해본 이들은 그의 경력이 모두 위조라는 것을 안다. 자신만 모르는듯하다. 그러니 "돋보이고 싶은 욕심" "(기자에게 당신도 털면 안나올 줄 아느냐"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 P49

20~30대를 중심으로 한 ‘젠더 갈등‘이 왜 중장년층에서는 그만큼 격렬하지 않을까. 갈등은 상호 대칭적인 지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차별‘이 ‘갈등‘으로 재현되는가. 정치권은 마치 여성 유권자는 없는 것처럼, 일부 남성의 눈치를 보면서 ‘남성을 위한정책‘도 없으면서 그들에게 아부하는 데 정신이 없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남성 중심의 성차별 사회라는 증거다. 선거에서든 일상에서든힘 있는 집단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특히 정치인은 여성은 무시해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거 때조차 여성 인권을 누가 더 멀리 내팽개치나 경쟁하고 있다. 20~30대 청년의 구조적 어려움에 대응하기보다는 목소리 큰 편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어른‘의 태도인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의 ‘능력‘이 선거 전략인지 무지(ignore)인지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라도 나서서 "여성도 유권자"라고 그들에게 고지해야 할 지경으로보인다. - P53

우리는 2인 1조의 사업장에 배치된 19세 청년들이 혼자 일하다 사망하는 현실을 무척 자주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라지고없는 현실이 뉴스가 되고 있다.
가장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인 인식의 사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래도 예전(조선시대? 1980년대)보다는 나아졌다." 우리는 과거를 살아본 적이 없다. 과거를 어떻게 아는가?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과거에 살아야 하가? 심지어 "나아졌다"는 주장은 누구의 기준인가.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지위와 비교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서로 고통을 경쟁하면서약자에게 "당신들, 예전보다 나아졌잖아!"라고 분노하고 있다. 그핵심에 ‘이대남‘ 이슈가 자리 잡고 있다. 물론 20대 남성 내부의 인식도 같지 않다. 우리는 ‘온라인‘을 너무 믿는다. - P56

나는 성매매가 필요악인지 아닌지에 관심이 없다. 질문은 한 가지 왜 언제나 팔거나 팔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이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없다.
만취한 가해 남편은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꼭 집에 와서 아내만 구타한다.
1992년 10월 28일 기지촌 성 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윤금이(당시26세)가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당시 20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윤금이 이후‘ 격렬했던 여성 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으며 알려지지도 않는다. 여성에게는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나의 바람은 여성폭력 근절이라기‘보다‘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다. - P66

남성에게 성(섹슈얼리티)은 삶의 ‘유용한 도구‘이다. 갑이 남성이고 올이 여성일 때, 권력은 성폭력으로 행사된다. 스포츠 기대주였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낙태한 후 선수 생활을 포기한 사례만큼이나, 여자 선수를 지도하는 남성들이룸살롱에 갈 필요가 없다는 ‘자랑‘이 끔찍한 이유이다.
간혹 여론은 가해자들에게 비교적 ‘고른‘ 분노를 보이거나 가해자를 옹호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판단 기준이 가해자의 폭력이 아니라 피해자의 대응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완벽한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만 인정한다. 완벽한 인간도 없는데, 완벽한 피해자가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 잣대를 유독 여성에게만요구한다. 피해 여성은 끊임없이 사건 자체는 물론이고 자신의 모든 인생과 과거사를 검열당하고 변명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게 - P69

된다. 남성도 상사에게 구타당한 다음 날 ‘웃으며‘ 출근하고, 자기를 때린 사람을 위해 맛집을 검색한다. 이것이 피해자가 동의한 증거인가?
성폭력 범죄자가 강력한 처벌을 받기를 바라지만 그럴 필요도없다. 여성들은 합리적인 처벌을 바란다. 한국은 성폭력 관련 법이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이지만, 실제 법률 서비스 전 과정은 피해자에게 유리하지 않다. 대단히 지난한 과정이다. 미국에서는 몇백 년 형에 처해지는 범죄가 한국에서는 무죄 방면되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 성폭력 범죄자 손정우의 경우가 그것이다. 2018년 미국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이자 미시간주립대 의대 교수였던 래리 나사르는 여자 선수들 150여 명의 고발로 360년 형에 처해졌다. - P70

2018년에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은 구한말 노비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다. 그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어디서 왔느냐?(Where are you from?)"였다. 이방인인 그는이 질문이 고통스럽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는 것을 묻는다‘는평범한 의미가 아니다. "여기는 내 땅인데, 너는 어디서 왔니?"라는뜻이다. 익숙한 논리다.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편을 갈라 주고받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 노래가 시작이었을까.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間),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 P78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서 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러 질문들이 평생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편견이 담긴 고착된 질문은 폭력이다. 가장 괴로운 질문은 답이정해져 있는 질문일 것이다. 고문이 대표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질문은, 가해자(피의자)에게 해야 할질문을 피해자에게 하는 경우다. 성폭력 범죄가 그것이다. 조사를가장한 피해자 비난 여론 재판...... 유아 성폭력이거나 가해자가여러 명인 사건을 제외하곤(?) 피해자가 질문에 시달린다.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 저항했는지, 거절이 얼마나 단호하고 절절했는지,
특히 자신이 얼마나 피해자다웠는지 최대한 증명해야 한다. - P79

피해자가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사자마다 다르며, 제3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피해자는 이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 운동은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성별 권력관계는 더욱 그렇다.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反)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 - P80

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 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 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해외 업무에 동반했습니까? 왜 평소엔 여성 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과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했습니까?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폭력과 관련된 질문 내용은 그 자체로 가해자의 시각에서 구성한 것이다. 위력 행사가 자연스럽다고 믿는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행동이 궁금하지 않다. 대신 피해자의 대응이의문시될 뿐이다. 피해와 피해 이후의 심문, 약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법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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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연히 황지우 시인과 최승자 시인을 인사동에서 만나 오랜만에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침에 집에서 수상 통보를 받고 나왔다고 하자 두 시인이
‘아 이제 여자에게도 상을 주는구나‘ 하면서 놀라워하던 일이 생각나요. 그만큼 여자들의 시를 제대로 읽어주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어요. 그 이후 미당문학상을 받았을때도, 대산문학상을 받았을 때도 제가 여자로서는 처음그 상을 받았다, 그런 보도가 뒤따랐지요. 그만큼 여자에게는 비평도, 수상도 인색한 시대였어요. 저는 비평가들에게서 이해를 바란다기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하나근거 없는 비방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게 바람이었지요. 그 당시 제 시집에 대해 글을 쓴 비평은 대부분 제시가 가정주부로서의 생활에서 나온 시라고 전제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살림하고 연탄 가는 여자가 같은구절이 비평 글 속에 있어서 사석에서 그 비평가를 만나저는 아파트에 살아서 연탄을 갈지 않아요, 하고 말한 적도 있었지요. 특히 제가 시론 같은 것을 쓰니까, 제 글에서 문장을 인용해 그 내용과제시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 P145

도 했지요. 그런 식의 비평이 많았어요. 시인의 에세이는시 장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내지 시학을 쓴 것인데, 제시에 대해 일일이 저의 시론을 적용해서 서로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는, 질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것은 마치 제가 시론을 먼저 정립해놓고 그에 맞춰서 시를 쓰는사람이라는 뜻이잖아요. 김춘수론이나 김수영론도 읽어보면 그런 적용을 받을 때가 많지요. 하지만 옥타비오 파스의 시론을 통해 옥타비오의 시를 읽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제 시에 대한 다른 이의 비평을 읽고 나서 제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그 비평과 제시가 함께 간다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평론가 한 분은 마치 형사처럼 제 시의 어떤구절이 어떤 책의 어떤 구절에서 온 것이라 설명해주려 분투하기도 했지요.  - P146

제가 등단할 무렵에는 자기 진영의 시인들에게만 평론가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지요. 그래서 시 세계가 정립된, 조금 나이 든 시인들에 대한 비평이 더 많았어요. 자신들의 진영이라 함은 무슨 세계관이나 인식이 같은 방향이라기보다 자신들이 속한 출판사 문예지에서 등단한 시인이나 시집을 낸 시인을 그렇게 여겼지요.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가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고루 출간하면서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제 출판사 간의 이념 논쟁은 그 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가지고 진행할수 없게 되었지요. 그리고 비평가와 시인이 오랜 기간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는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 없다고 봐야지요. 시집을 새로 출간할 때마다 같은 평론가가 그 시집에 대한 논평을 하고, 변화의 조짐을 읽어내고, 서로의문학이 고양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냥 비평을 읽어보고 말지요. 외국의 이론에 근거해 제시를 아무렇게나 절단한 비평을 읽을 때는 제 시가 그의 이론 수입의 당위를 마련해주는 것만 같아 씁쓸해집니다.  - P147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혈연으로 얽힌 관계를 정상 가족으로 보는 일종의 ‘가족주의‘를 ‘가족‘이라는 이름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가족주의로 추락시키고 있는 거지요.
가족주의는 여성주의와도 대치하고, 일인가족과도 대치하며, 혈연과 부모 자식을 벗어난 다양한 가족 형태와도 대치합니다. 자식이 있어야 가족입니까? 늘 묻고 싶었습니다. 국가주의는 가족주의의 정상성을 강조함으로써 유지되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가지려고 합니다. 가족주의는 국가사업입니다. 가족주의야말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초석입니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의 품 안에서 쉬어야 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느라 수고하는 자본주의의 일꾼은 가족의 위계질서 안에서 상위를차지하게 되지요.  - P159

저는 ‘가족 같아‘나 ‘가족이니까‘ 같은 말들을 참으로 싫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족‘이라 불리는 상대방은 ‘가족주의‘의 품 안으로, 가족 위계질서의 하위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의 하수인이 되는 거지요. 여자들이 나이 많은 남자나 남편을 오빠나 아빠로 부르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여자들 스스로 자신을 상대방과 같은, 평등한 위치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보기 좋지 않습니다. 사회를 가족화하려는 것 같아서요. 부부가되었으면 나이는 따지지 말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평등한 호칭을 사용해야 합니다. 의사가 여성 환자인 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식당에서 일하는 나이 든 여자를 언니, 이모라 부르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 P162

제 시가 만약 서양 사람들이 쓴 시집에 대한 리뷰들처럼
‘저항‘ 담론이라면 이 가족주의 이미지들의 연속성 안에서 표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시가 ‘마음으로 쓰이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가족인, 제 심장 속의 무의식적 지옥이나 그 지옥이 일으킨 상처의 형상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가족은 반복적인 환대와 책임과 - P171

‘문학하기‘는 읽은 만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읽은 것이 상상하기를 자극하니까요. 상상의 근육과 장소를 키워주니까요. - P179

바리공주의 저곳은 결코 선악의 ‘바깥‘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중립지대, 중간 지대라는 장소입니다. 세월호의 방송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무관심, 무대응, 무데뽀無鐵砲, 그곳은 그냥, 그런 장소입니다.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남의 둥우리에 탁란하듯 악랄하지만 자연스러운곳일 수도 있습니다. 옛 시인들은 저곳을 지옥, 낮은 곳,
지하, 바닷속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바리공주는 이곳에서저곳인 지금의 죽음을 왕복합니다. 너무 자주 죽습니다.
너무 자주 경계를 넘습니다. 바리공주처럼 그렇게 이곳과저곳을 왕복하는 시 언어를 저는 아직도 계속 생각하고있습니다. - P198

‘선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먼저 산‘입니다. 그러나 저는 ‘먼저 죽는‘ 혹은 ‘먼저 살다 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죽음을 학생들에게 보여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말입니다. 선생은먼저 죽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지요. 선생은 이제까지 있어온 문화를 칠판에 적는 사람입니다. 이제까지있어온 것을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학생들이 이제까지없었던 것을 발명하고 발견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지요.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이 선생입니다.
저는 수업에 임할 때 참 부끄러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을 한 걸음이라도 어딘가로 내딛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까지 제가 한 말이 이들을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할수 있었나, 늘 생각했지요.  - P208

문학은 기술적 연마가 아니니 ‘어떤 달성‘을 목표로 삼을수 없고, 그것의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문학하기도 일종의 인생의 선택인데, 이것은 낭비의 선택이고, 실패의 선택이고, 가난의 선택입니다. 황현산 선생님은 언젠가 "대학은 인생을 낭비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인문학은 경제적 성취나 기술적 성취의 면에서 보면 낭비의제도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그들 앞에 늘 있었으나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른 문‘을 열어보기를 바랐지요. 그 문은 다른 문을 닫아야 열기가 가능한 문이지요. 고독을 선택하고, 관계를 거절하고, 상투적 어법에 분노하고, 필멸을 마주한 자만이 닫을 수 있고 다시 열 수있는 문입니다. 그 문밖에선 각자 다르게 간직한 원초적장면이 보이고, 다른 모국어가 들리고, 다른 모국어 문법이 통용됩니다. 저는 학생들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릴, 그런귀한 말은 한 적도 없고, 그런 뿌리 내리는 말을 할까 봐 무서웠지요. 시는 늘 부정이니까요.  - P212

시를 쓰는 것은 사실 ‘설명‘을 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경찰관과 검사와 판사는 설명을 요구하지만 시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지요. 시 쓰기가 소설 쓰기와 다른 점은 이 설명을 포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지점에 있습니다. 시를처음 쓰는 사람에겐 이 설명을 포기하기가, 그리고 장식을 포기하기가 그렇게 어렵지요. 설명을 포기한 순간 시의 틀은 저절로 생겨나지요. 그다음 한국어의 결에 대해얘기할 수 있게 되지요. 자기자신과 타자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지를 제거하면, 낯선 언어의 기술이 스스로 가동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자신의 글쓰기의 그 낯선발생지를 처음 본 듯 발견하게도 되지요. 여기 앉아 있지만저 먼 곳에서 발견되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시는 설명에 소환되지 않는, 해석을 거부하는, 비평의 액자에 갇히지 않는, 모습이 정해진 것이 없는 말들이지요. 저항의 말이지만, 정리될 수 없는 말이기 - P214

도 합니다. 그러나 풍자를 장착한 시는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풍자의 수많은 기교가 포함된 언술 방법이 설명이지요. 그러니 시 강의가 어렵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다기보다 ‘시를 쓰겠다‘는그 의지를 존중했지요. 이 설명과 정보의 시대에 말입니다. 저는 학기 중에는 거의 제시를 쓰지 못했어요. 방학이되어야 비로소 제 시 쓰기가 가능했어요.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제 시를 여러 방식의 언어로 다 풀어줬으니까요.
한번 뱉은 것을 다시 주워 담기 싫었어요. - P215

말씀하신 것처럼 시는 강력한 정치이고 저항입니다. 그것을 읽어내는 데는 읽는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제가 파리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그들은 저를 ‘저항‘ 섹션에 넣었습니다. 그들은 제시가 제 욕망을 억압하는 권력 체계에저항하는 방식의 상상력과 경험을 동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상상하는 방식속에 저항의 방식이 숨어 있다는것을 말했습니다. 권력 밖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걸 모두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권력으로부터 도망할 수도없고, 권력 자체엔 밖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제 시를 그렇게읽지 않습니다. ‘사회의 바다‘로 나오라 하지요. 클로드 무샤르가 쓴 책 다른 생의 피부』를 보면 그는 저의 오래된 시들에 관한 크리틱에서 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여섯단어, 제시의 위험 요소들을 색출합니다. "저항, 변신, 증식, 삼킴, 고통과 웃음." 우리나라에선 아무도 그렇게 읽지않지요. - P223

문학작품 쓰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독자입니다. 작가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구‘들이 문학을 완성하거나 끝내주지요.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항상 열어둔 채 시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만약 문학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을 종용했다면 그 문학은 근대적 주체로서 휴머니즘의 부활을 바라는 저자의 것이겠지요. 그는 독자가 언제나 세계 내 존재로서 질서와건강을 유지하며 살기를 바라겠지요. 하지만 시에서는 그런 권유가 불가능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네 문학이 누굴 위로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저는 당황하기도 하고화가 나기도 하지요. 위로를 받으려면 교회나 성당이나절에 가야 하지요.
44시는 연대할 수 있지만 위로할 순 없어요. 저자가 말하는것이 아니라 시가 말하게 하는 것이 시이고, 시는 언어적사건이라 생각하는 저로서는 시인마저도 언어수행적 주체, ‘시하는‘ 존재로 생각하니까요. - P240

우리가 쓰는 언어를 하나의 도구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언어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꺼내게 하는 무엇입니다. 이것을 시의 언어라고 불러봅시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한 사람인 ‘나‘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어떤 사건을 꺼냅니다. 이것은 정말 작은 사건, 아니면 어떤 사건의 분자여서 절대로 누구도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사건의 분자 때문에 이 글을 쓴사람은 한 인간이 아니라 여러 사람인 한 인간, 자신마저도 벗은, 이미 존재를 탈각한 무엇의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됩니다. 그 작은 사건의 분자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여러 곳에 이 사건을 출몰하게 합니다. 익명의, 어쩌면 명사를 벗은 동사로, 움직이는 시의 언어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 P244

그 작은 사건의 분자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처럼 여러 곳에 이 사건을 출몰하게 합니다. 익명의, 어쩌면 명사를 벗은 동사로, 움직이는시의 언어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리듬으로 쓰인 시의 언어가 한 사람을 여러 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탈존의 존재의 글쓰기, ‘나‘ 를 죽임으로 여럿이 된, 죽은 후에 복수적 인간이 된 글쓰기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시하기‘의 리듬으로 달성되는,
검은 글씨들 밖으로 뛰쳐나가는, 리듬처럼 등장하더니 곧 - P244

사라지는 시의 모습일 겁니다. 유령이 된 화자는 거듭 출몰합니다. 동시적으로 여러 곳에, 그리고 다양한 ‘너(희)‘
를 향해, 독자를 향해. 그러니 우리는 시를 쓰면서 거듭 어딘가를 향해 열려 있겠지요. ‘내‘가 없는 곳을 향해. - P245

그렇지만 ‘시‘라는 이 이상한 제도는 문학의 관습화된 육체 속에 어떤 내밀성을 탑재한 미묘함 같은 것, 이름 없는실존이지요. 문화라는 것 안에 이 ‘시‘라는 것이 사멸한다면 그 문화는 허상일 겁니다. 시는 문화보다 자연에 가깝지요.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태어나서 죽는 자연 말입니다. 시는 문화의 어떤 이념처럼 특정 이데올로기 자아의 상, 이 시대 한국에서 유행하는 K 무엇처럼 국가의 상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를상정하지도 않습니다. 시는 문화처럼 전체를 가정하지 않지요. 근대 이후 시는 늘 위기를 먹고 살고, 재난을 먹고살고 있지요. 요즈음 우크라이나에서 쏟아지는 시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것을 읽고 있으면 시는 정말 위기를 먹고산다고 말하고 싶네요. 저의 시도 제 삶 안팎의 위기와 거기서 파생된 감각을 먹고 살아왔지요. 어떤 익명적 실존의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 P252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개개인의 모든 일이 책이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요. 책을 쓴 사람을 모두 작가나 창조자라고 부를 수 없는 시대에 말이에요. 그 책들은 상호작용해서 독자들에게 어떤 책의 모습을 지시하고있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책의 모습이지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 독자가 찾아내야 하는, 보물찾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P282

그럼에도 무한히 사회와 역사를 넘어 다른 텍스트와 연결되고 확장되는 망상 조직을 거느리는 것이 텍스트이기 때문에 영원히, 그 책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겠지만 ‘책‘이라는 것을 향해 가겠지요. 무한히 계획되고, 무한히 구축 중인 책이라는 것이 있겠지요. 어쨌든 당대의 책이라는 것에 시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투척하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아닙니까? 전통을 배반하면서, 상상력을 저곳이 아니라이곳에서 온 것이라고 믿으면서, 절대로 이곳을 위반하면서 하찮은 꿈을 써 내려가는 우리의 일 말입니다. 이곳의당대라는 그 책, 그 주변과 중심, 망각과 기억이 공존하는그 책이라는 것을 향해서 말입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그책을 향해서 말입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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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일단 저 고통이 타인의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할 겁니다. 거기에서 벌써 공감의 한계가 생기는 것이지요. 저는 타인의 고통은 표현할 줄 모릅니다. 특히 육체적 고통은 알 길이 없습니다. 타인의 마음의 고통이나 실패는 얼마만큼 공감할 줄 알지요. 하지만 육체의 고통에 저의 육체로 동참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저는제 육체적 고통밖에 표현할 줄 모릅니다. 그것도 잘하지는못하지요. 고통을 표현할 언어는 언제나 부족하니까요.
저는 제 고통이 극에 달한 밤, 제 몸에 돋는 거대한 날개를 목도합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여자의 어깨에 투명한날개가 돋았다고 씁니다. 더 나아가 여자의 고통이 여자를 하늘에 올렸다고 씁니다. 그것뿐입니다. 오직 즉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만 우리의 고통을 쓸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타인이 되어보는 상상을 할 때조차도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나‘는 타인의 관망자, 유령일 뿐이라고 자책합니다. - P85

전문가가 만든 음식이 보잘것없는 제 부엌의 음식보다 맛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식당에 가서 항상 제가 하는 ‘맛‘ 평가를 기다립니다. 자신들의 판단은 일단 보류해놓고요. 요리 동사를 생각해보십시오. 재료에 열을 더하고 빼고, 칼을 더하고 빼고, 물을 더하고 빼고, 요리하는 이의 손길을 더하고 빼고, 증기를 더하고 뺨에 따라 수많은 동사가 작열합니다. 굽고, 삶고, 지지고, 볶고, 졸이고, 따로 사전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많지요. 자작하게 하고, 팔팔 끓이다 뜸 들이고, 깍둑썰고, 어슷썰고, 질게 하고, 지집니다.
우리나라의 요리 동사들은 모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들과 똑같지요. 마음을 졸이고, 태우고, 볶지않습니까? 미각을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선지, 수, 화, 풍이 모두 작용하는 전 지구의 질료적인 조화가 필요합니다. 내 바깥의 생물을 조리하는 것과 마음을 조리하는 것은 아주비슷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누구의 마음을 조리하듯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하기 싫은데 나아닌 누구를 먹여야 하니까 게으른 검객처럼 칼을 들고, 불을 올리고 하지요. 저 혼자 살고 있다면 그렇게 열심히 반복적으로 조리를 하진 않았겠지요. - P89

저는 ‘모성‘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모성이 이데올로기가 되다니요? 심지어 모성은 본능적인 것이고, 신화적인 것이고,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라고, 어머니는 신 다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신 다음이 산후우울증에 걸린단 말입니까? 사실 서구에서 모성 이데올로기가 생겨난 것은 18세기부터라고 합니다. 여자를 가정에 두고, 아이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역할을 시킴으로써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좋았기 때문이죠. 여자 말고, 어머니를 신화적인 인물인 양 높여주는 척하면서 집 안에 가두는 것이지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자의적으로 사용한, 공고한 사회적 - P107

차별이 가부장제를 당연한 것으로 보장해준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볼 때 늘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출연자들이자신의 어머니 얘기를 꺼내면서 불에 덴 듯 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 있는 어머니를 가졌건,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졌건 말입니다. 아마 저도 그 상황에 처하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현상이 모성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엄마와 자식 양쪽 다 죄의식 때문에 그렇게 울게 되지요. 부모는 완벽한 모성을 발휘하지 못한 죄의식, 자식은 모성성을 유감없이, 목숨을 바치도록 발휘해서 희생한 자신의 엄마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말입니다. 모성은 사회적 구성물입니다.  - P108

이 구성물때문에 여자들은 여자처럼 살아야 하고, 자라서는 어머니노릇을 해야 하고, 주부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안녕과 쾌락을 구할 땐 죄의식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사회의 모성이데올로기가 여자들에게 영원히 다른 방식으로 어머나되기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니까요. 이때 어머니 스스로가 우울하건 불안하건 자신을 미완성으로 느끼건 소용없지요. 저는 이 모성이라는 말을 바꿔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은 여자겠지만, 안아주고 길러주고 돌봐주는 것을 ‘어머니성‘이라고 부르지말아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누구나 돌보고 보살필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남자건 여자 - P108

건 말입니다.
우리나라 남성 시인들이 쓴 ‘어머니‘에 대한 시들을 일별해본 적이 있습니다. ‘밥해주는, 온 정성을 다한, 희생한,
이제 늙어버린, 그러다가 죽어버린‘ 어머니들이지요. 혹은전능의 판타지를 장착한 어머니들이지요. 그들은 환상 속에서만 어머니를 위치시킬 수 있을 뿐, 실재의 어머니는보지 않으려 하지요. 그 남성 시인들은 여성성을 잃어버리거나 숨긴, ‘새벽 별을 이고 30년을 하루같이 자식들게 둥근 밥상을 대령한 어머니의 피폐한 노동을 왜 그토록 찬양하는 것일까요? 시마저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듬뿍품고, 모성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게 만드는지요? - P109

그러나 여성 시인들이 ‘어머니‘를 쓴 시들은 다르지요. 여성 시인들은 어머니의 자궁을 기쁨의 잠재성으로 노래하기도 하고, 반면에 피폐한 죽음의 공간, 훼손하여 버려야하는 기관으로 노래하기도 하지요. 자궁을 자연과 연결된 공간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그 크기를 오대양 육대주로 넓히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머니를 욕망을 가진, 슬프고 참담한, 절대로 모방하거나 답습할 수 없는, 낯설고 무기력한 존재로 보지요. 그리고 절대로 어머니를 닮지 않겠다는 각오도 하지요. 혹은 이분법적 성의 구별과 차별에 넌더리가 나서 양성적 존재의 구현을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으려 하고요. 저는 모성 또한 우리의 성정체성처럼 개인마다 다른 수천만 가지의 모습이므로, 이데올로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P109

이미지의 연쇄와 끝없는 시간, 공간적인 인접성의 환기,
그로 인한 현실의 변형과 굴절, 그것들을 굴러가게 하는리듬이 ‘나‘의 결핍 그 자체를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원 대립 속에서 하나의 개념을 채택하는 은유의 동일자 의식을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은유는 근원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바탕으로 갖고 있기에 그런것을 갖춘 ‘그‘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선 사물/여자는 몸서리를 치게 되지요. 간혹 시를 읽다가 그런 시인의 은유를 만나면 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자의, 대상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의미‘를 준 생산자의 얼굴을 마주한 듯한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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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경험 속에서 제시의 여성 화자의 언어들, 그 목소리의 유령 화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전에 썼던 시들의 화자는 이런 유령 화자들이었습니다. 이승의그라운드에 발 디딜 데가 없는 바리공주처럼, 세 번이나죽임을 당했으나 다시 돌아온, 거절당하고 쫓겨난 바리공주처럼 죽임을 당한 화자들이었습니다.  - P40

무당이 죽은 영혼의 억울함과 슬픔을 자신의 몸에 얹어 발설하는 것, 혹은죽은 이의 영혼에게, 목소리에게 가보는 것처럼 거절당한유령 화자가 시를 발설하는 거였다고, 이전 제시의 화자를 저 스스로 이해했습니다. 바리공주 신화는 죽음을 극복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죽음을 여행하는, 죽음을 넘나드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리공주 신화를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에서 여성의 시학을 전개하는데 ‘비빌 언덕‘으로 삼은 것은 바리공주가 여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체제로부터 거절되고, 추방되고, 헤쳐졌으나, - P40

다시 여자이기 때문에 작은 노동 행위들에 대한 신성을발견할 수 있었고, 종당에는 죽음(죽임)에서의 귀환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화는 저에게 죽음이 일회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의 사건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끝없이 귀환하는 생명의 사건임을 드러내주었습니다. - P41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그래서 제가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바로 변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영혼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으로 믿음의 틀안에 가둘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혼이라고 명명하는순간, 이미 영혼이 아닌 것이 되는 게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우리에게 ‘나‘에게 한 사람 또는 개인 - P41

의 것이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복수적이고 집단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우리는 연민하고 사랑하고 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영혼이라불러야 한다면 할 수 없지요. 이것은 저 나무와 저 돌과저 물과 저 동물에게 고루 번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것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그것에서 나오는 감각들로 얽히고설키는 것이겠지요. - P42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개정판을 출간하기 위해 다시교정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의 한국말과 20년 지난 후의 한국말이 많이변했다는 것도 있지만, 제가 바리데기의 세 번의 여행 (죽음 여행)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여행, 그러니까바리데기가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 되는 세 번째 여행을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은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만약 그 책을 지금 쓴다면, 그 세 번째 여행에서 바리데기가 강을 건네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 애도의 여행이었다는, 공감의 행함이었다는의견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바리데기는영원히 애도해주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남은 사람들만이 아닌 죽은 사람들과 우리의 연결성, - P42

영혼을 위해서 말입니다. 비탄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연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영원한 비탄의 연대가 영혼을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영혼이라는 단어는 그런 행함을 지칭하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쓰면서 비탄의 연대를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영혼이라 이름 붙인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저는 시를 쓰면서는 늘 존재론적 개종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 P43

그렇다고 제가 전체주의적이고 탈개인화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식물의 영혼, 동물의 영혼, 인간의 영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세계처럼 영혼계와 현실계를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이원성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의 집으로서의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혼은 일개인을 넘어선,
자아 정체성을 넘어선 어떤 거대한 존재성을 가진 것이겠지만, 그것을 흡입하면 자아 정체성이 더 세어질 것이라는 역설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내‘ 영혼이라고 하기에는너무나 큰 것이 ‘내‘ 영혼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합니다. ‘내‘ 영혼이 ‘내‘ 육체를 알아볼까? ‘내‘ 영혼이 지금 쓴 ‘내‘ 시에 깃들였나? 하고요. - P43

당시에 저는 남해의 절에서 참선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좀 더 자세히, 다른 방향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가부좌한 우리에게 떨어질때마다 제 몸이 그렇게 비루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 멀리 공중으로 떠올라서 제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돼지를 먹는 돼지의 몸을, 돼지로 다루어지는 몸을, 저는 육욕에 사무친 우리의 몸을 비하하는 스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그에 반하는, 혹은 핑계를 대는 시를중얼거리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몸이 있다는 것은 ‘감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 - P46

는 그때 침묵하는 돼지 행성의 돼지 한 마리로서 멀리서돼지의 목을 자르고 희롱하고 마침내 먹는, 구제역에 걸린 돼지를 산 채로 구덩이에 묻는 인간인, 나와 같은 감각을 가진 동물 돼지를 봤습니다. 심지어 돼지와 몸을 서로맞대고 있다는 공통감각을 홀연히 느꼈습니다. 서로를 인지하는 존재의 감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을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동물성이라는 공통감각, 감각의 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이 동일한 감각 말입니다. 저에게서 동물 존재라는 어떤 추상성이 떨어져나가고, 동물 존재의 총체성이라는 어떤 생의 감각이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저의 존재가 살아 있는 살 속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동물들과함께 도살된 동물의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 P47

그동안 우리는 동물을 결핍의 존재, 언어 없는 미물, 응답없는 주체로 느끼고 판단해왔지 않습니까? 마치 남자들이여자들을 그렇게 느꼈듯 말입니다. 휴머니즘이 버린 두존재가 동물과 여자라는 항간의 말이 있지 않았습니까?
동물성은 저 자신이 시를 쓰며 그것과 내통함으로써 재현이나 비유가 아니라 어떤 내재성을 몸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동물성은 저의 내적 세계의 비유의 산물이 되거나 초월이 필요한 어떤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동물 자체가 자연에 내재하듯 저라는 시인의 내재성이 되었습니다. - P47

제가 쓰는 용어 ‘시하다‘ ‘여성짐승하다‘는 ‘되기‘가 아닙니다. ‘되기‘는 은유를 전제로 하지요. ‘하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다‘는 타자를 동사적 관계 속에서 발견합니다.
타자를 명사로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다‘를 통해동물의 몸, 벌거벗은 몸, 자연의 몸이되지 않습니까? 그처럼 ‘하다‘ 속에서 저는 타자 앞에서 동요하는 자이고, 구멍 난 자이며, 타자에게 매달려 안달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다‘는 나를 타자로 만듭니다. 그래서 랭보처럼 "나는 타자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시하다‘는 ‘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 모든 시는 몸으로 하는 연애시이며 풍자시라고 저는오래전에 저의 에세이‘에서 쓴 적이 있습니다. 시는 몸으로 ‘하는‘ 관계 맺기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관계 그 자체가 되지요. 우리는 서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도 아니 - P57

고 전체의 부속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이고 몸입니다. 익명적이고, 비분리적이고, 생물인 몸입니다. 이것으로 시하는 것이지요.
타자의 몸은 총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삐져나옴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삐져나온 것들과 일그러진 것들과 나의 삐져나옴과 일그러짐을 맞대는 것입니다. 동일성에의 강요가 우리를 얼마나 폭력 아래 있게 했고, 우리를 죽게 했는지 알지않습니까? 서정시마저 시인의 그런 시선 아래 타자를 둘수는 없습니다. 시에서는 타자의 나머지와 저의 나머지가만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의 몸으로 관계 맺고 있기에 서로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런 것으로 우리는 관계 안에서 서로 끝없이 발견하는 것이지요. - P58

사에서의 리듬은 시가 전개하는 시간이고, 에너지와 긴장,
현기증입니다. 한 편의 시의 리듬은 한 편의 시의 생애지요. 시에서의 리듬은 한 편의 시가 시라는 장에서 살아내는 모습, 과정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듬안에 시의미학과 윤리학이 작동할 겁니다. 물론 리듬은 신이 우리에게로 걸어오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시인이 받아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시의 리얼리즘을 말하는 사람들이 시에 등장하는 내용만을 가지고 시에서의 윤리학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시를 하나의 장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소설을 다룰 때와 똑같이 시를 다루는 것입니다. 시의 시간은 강렬한 응축이기 때문에 운율이나 박자 혹은 호흡만으로도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 P62

리듬은 시 속의 언어들과 그 언어들 때문에 언어 밖에 있게 된 입자들의 흐름이며, 그 흐름의 방식, 수학입니다. 리좋은 규칙이 아니라 생성입니다. 리듬이 시안에서 시인을 잉태하고, 시인을 분만합니다. 물론 한 편의 시 안에는반복이 있고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일종의 변용입니다.
저는 『날개 환상통』에 「리듬의 얼굴」이란 제법 긴 시를 실은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시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제가 그 시를 쓰는 중에 이글이글 타고 있으나 싸늘한, 사라졌으나 따가운,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제 몸의 살 - P62

아 있는 고통들, 그 고통의 리듬 끝에서 사라진 어머니의희미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제 몸의 고통은 고뇌와 달리 리듬이었습니다. 그곳의 제일 깊은 곳엔 죽음도넘어서는 끝없이 ‘나‘를 소멸로 밀어 넣는 리듬의 실체,
사라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내 고통의 주인은언젠가 제 몸을 수태한, 제 몸의 주인이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이의 얼굴로 거기 있었습니다. 내밀성으로 깊이깊이침잠해가는 무한수열의 고통, 그 리듬의 끝에 제 몸의 기관을 하나하나 만들었으나 지금은 제 몸에 부재하는 어머니의 몸 같은 존재가 앉아 있는 걸 보았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제 몸을 만드신 이는 자신의 몸이 지닌 리듬을 나누어 ‘나‘를 만들었을 겁니다.  - P63

리듬이 쓸개가 되고, 리듬이허파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의 제목을 "리듬의 얼굴"이라 했습니다. 저는 시라는 것이 결국 그 텅 빈얼굴인 음악에 이르고자 하는, 끝끝내 하나의 벌어진 입술모양, 하나의 모음에 이르고자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호스피스에 입원해 계셨는데, 저는 엄마가 입원한 방에 들어갈 때마다 유리 믹서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자신의 일생을 천천히 믹서로 갈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블렌딩blending의 리듬이 느껴졌지요. 엄마가 경험한 산과 바다, 엄마의 시간, 엄마가 저장해둔 공간들. 그리고 우리 형 - P63

제들을 모두 소멸의 수학 속에 집어넣은 듯한 리듬 속에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말을 못 하게 된 날부터는 모음 한 개가 방 안을 채웠다가 다른 모음 한 개가 다시 채우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하나의 모음의 끝에다다르는 수열이 리듬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루트 기호를 붙인 것처럼 하나의 숫자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모음 하나로 꺼지는 리듬 말입니다. 거기에 이르기위해 엄마의 리듬은 끝없이 헤엄쳐온 것이지요. - P64

황 시인이 제가 답변 중에 빠트린 ‘반복‘을 질문해주었습니다. 한 번 경험한 것은 영원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파토스를 말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이미 반복이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반복이 있을 겁니다. 시작도 끝도 반복의 결과물입니다. 지금 저의 현재는 반복을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반복을 반사하는 거울입니다. 단적으로 잠자고 일어나고 잠자고 일어나듯이 저의 과거는 저와 함께일어나고 잠듭니다. 그렇지만 리듬은 이 규칙적인 반복을시적인 이행으로 생성해주는 것이겠지요. 제가 시는 쓰는 것이라기보다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 P66

이것은 시의 리듬이 이 반복과 반복을 ‘수행하기‘ ‘이행하기‘로 변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성들의 시에 대해 글을 쓰면서 느낀건 저와 동시대의 남성 시인들과 다르게 여성시의 화자들이 시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자 스스로 행위를 한다는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시안에서 몸을 움직이고, 행위를주고받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하다‘라는 용어를사용했습니다. 요즘 제가 쓰는 시들도 ‘죽음하다‘를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지속을 영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 P66

유한하게 닫힌 시간과 공간이 무한한 순환으로 자기유사성을 뚫고 우주선처럼 솟아오릅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하고, 지금의 절망사건이 미래에도 끝나지 않을 절망 사건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음악은 반복으로 구성됩니다. 열 번, 스무 번을 반복해도더 들려줄 것이 남았기 때문에, 아직 끝이 아니기 때문에음악은 반복합니다. 하지만 시는 이 음악을 배면에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이미지와 해석적 진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 위에서 물처럼 튀어 오르고, 반대로 흐르고, 교 - P67

차합니다. 그래서 시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은 다릅니다.
시는 박자가 아닙니다. 시는 반복 사이에 있는 것, 그 반복 사이에 있는 감각적이고 해석적인 것들의 리듬, 그것의 확장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시의 모습, 시의 반복은 모방해야 하고, 재현해야 할 원본을 전제로 하지 않기때문에 밖으로 튀어 오를 준비를 진행해나갑니다. 여자들의 시는 디뎌야 할 부동산이 없으니 방향 없이, 도달할 수없는 ‘사이‘의 공간에서 쓰이니까 더욱 그렇지요. 발 디딜곳 없는 미지에서 리듬의 발자국만 떠도는 것이지요. - P68

시의 원료는 감각이지요. 시는 어떤 장르보다 감각이 주재료이고, 시는 감각기관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장르입니다. 한 편의 시가 서사를 진행한다 해도 그 서사에서 시간적 요소를 제거하면 감각이 오롯이 남지요. 저는 학생들과 수업할 때 항상 학생들이 내놓은 감각적 소여를 가지고 어떻게 그것들이 한 편의 시가 되는지 토론했습니다.
물론 감각이니 지각이니 하는 용어를 써서 학생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학생들의 재료를 감각으로 옮겨 가게 하고, 그 감각들의 뭉텅이를 보이지 않는 어떤 에너지 흐름의단위, 생성의 블록, 묘사의 시점 안에 모이도록 만들어보게 했습니다. 그 감각들이 어떻게 문장에 놓여야 하는지,
그 감각들이 병렬적으로 교차하거나 수렴하고 발산해서대상에 종속되지 않고 어떻게 지각의 범주를 벗어나게 할수 있는지도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저는 감각이라 하지않고, 학생들에게 묘사의 숨은 형식들, 구조의 시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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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까지 시에 관한 글들을 모은 세 권의 책(『여성이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을 출간했습니다. 그 책들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생체시학‘이라 부를 수 있겠다고 언젠가 생각한 적 있습니다. 몸에게서 이름과 인종과 피부 색깔과 취향과 그 모든 것을 제거한 몸, ‘돼지‘의 시학이지요. 나중에 그 돼지를 ‘여자짐승‘
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가려움과 갈증과 배고픔과 결핍의 비명과 갈망이 제 몸의지금이고 직감이듯이 시의 직감도 그와 같지요. 지금의직감으로, 그 모든 것을 떨군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저는 시를 감지하지요. - P18

황인찬

몸뚱이의 내밀성으로 시를 감지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선생님의 시는 항상 몸에 대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 시에서 무의식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 또한 바로 그 몸에 대한 깊은 천착에 의한 것이 아닐까 헤아려보게 됩니다. 돼지의 시학이 결국 폭력과 죽음을 통해서, 즉 육체성의 무력화를통해서 드러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생각되는데요. 선생님의 세계에서 죽음이란 몸과 참 가까운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자서전』 역시 죽음을 탐구하는 작업이었고요.
원래는 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이어가려 했지만, 죽음을 함께 짚어가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쭙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시에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 P19

김수영 시인의 「눈」에서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김수영이 생각한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김수영은 왜 젊은 시인에게 "눈더러 보라고" 기침을 하고 "가슴의 가래"를 뱉으라 했을까요? 저는 김수영이 죽음을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같은 상태라 지각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영이 생각하기에죽음을 잊어버린 젊은 시인은 시인이 아니었지요. 그러니죽음을 잊어버리지 않은 시인은 눈에게 살아 있다고, 아 - P20

지 죽지 않았다고, 죽음으로 살아 있다고 마음껏 말해야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김수영에게는 죽은 자야말로 시인이고, 가래를 뱉을 수 있는, 죽음으로 산 자였지요. 저는아주 오래전에 김수영론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그때 저는 레퍼런스 없이 제 생각만으로 논문을써서 제출했습니다. 그러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강렬하게 레퍼런스를 100개 이상 달아오지 않으면 통과를 시켜주지 않겠다 해서 기호학을 가져다가 도식적으로 김수영시를 분해했습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김수영이 참으로 형식적인 시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산이 참 정확했습니다. 일상어를 쓰는 시적 혁명을 도모했지만, 시 안에서의 형식은 참으로 도식적이었습니다. 저는그가 시에서 주로 ‘생활, 죽음, 자유, 혁명, 고독‘을 다루고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 논문의 챕터를 나누었습니다.
시를 쓸 때마다 김수영은 ‘생활, 죽음, 자유, 혁명, 고독‘의반대편에 위치한 구절과 에피소드 들을 도식적으로 배열했어요. - P21

사실 저는 죽은 자의 죽음이 아니라 산 자의 죽음을 쓴 것입니다. 저는 살아서 바리공주의 여행을 하고 싶었습니다.
바리공주처럼 저의 죽음인 저의 바깥을 왕복하고 싶었습니다. 죽음을 왕복하면서 만난, ‘나의 죽음‘을 포함한 죽음의 존재들은 몇 인칭일까요? 저의 죽음을 ‘나‘라고 부를수 있을까요? ‘나‘가 유령 화자로 말을 시작하자 제 죽음은 인칭을 특정할 수 없는 ‘너(희)‘가 되었어요. 저는 제가죽은 후 ‘나‘라는 단독 자아로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죽음은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만들 겁니다. ‘나‘
는 아마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지 않을 겁니다. ‘나‘가 죽은그곳에, ‘내‘가 여럿이 된 그곳에 그 시들이 ‘나‘를 기다리 - P24

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의 화자인 ‘너(죽음)‘는 인칭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죽음의 인칭은 몇 인칭일까 자주 생각해봤어요. 아마 육인칭이나 칠인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를 쓰는 것자체가 일인칭에서 육인칭이나 칠인칭으로 건너갔던 순간을 쓰는 것이 아닐까요? - P25

바람이 창문 아래서 두려움에 떤다.
바람은 침묵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가만히 있어, 소리치는 침묵은 어떤 나라 같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빛 아래 드넓은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
다 치료받으러 갔다.
평평하고 광활한 운동장, 그러나 그 안은 스텐처럼 싸늘하다.
바람은 합창단에 가입했다 쫓겨난다.
바람의 목소리는 나무 꼭대기에 붙은 나뭇잎 두 개를 떨게 할 만름 높이 올라갈 수 있지만
탁자의 잔들이 모조리 깨질 만큼 예리하지만 음정이 계속 틀리는 바람, 박자를 못 맞추는 바람. 악보를 못 읽는 바람.
두 옥타브 올라갔다가 세 옥타브 떨어지는 바람. - P26

바람이 다리를 떤다. 바람이 창문을 떤다.
바람은 긴장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기분이 잘 상한다.
바람의 불안이 극도로 커진다. 교실의 전등이 모두 흔들린다.
바람이 미술치료 시간에 그려놓은 밤바다를 보라. 물결치는 수억만의 머리카락을 보라.
전봇대가 윙윙 운다.
입술 밖으로 전류가 흐른다.
싸늘한 운동장이 벌벌 떤다.
바람에게 누가 귓속말하나 보다.
바람은 흰 이빨 블록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가지런한 문장들을 견디지 못한다. - P27

바람이 어디선가 험한 메시지를 받아온 사람처럼 포효한다.
바람에게 최면을 걸어야겠다.
바람에게 수면치료를 해야겠다.
바람은 바람들과 파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이 집에 도착하니 바람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바람을 입관하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더욱 심해진다.
펼쳐진 영혼처럼 울먹인다.
귓속말로 명령을 계속 받는가 보다.
바람 속에 몇백의 아이가 들어 있다. 바람은 그 아이들하고만 얘 - P27

기한다. 그 아이들하고만 산다.
바람은 다중인격이다.
바람은 구강애호증이다.
바람에게 공갈젖꼭지를 물려야겠다.
바람에게 진정제를 놔줘야겠다.
바람의 두 팔을 결박해야겠다.
바람은 상담치료를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밖에만 있지 않다.
바람은 꿈 분석을 싫어한다.
바람은 빙 둘러앉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 P28

바람은 걸레 같은 가면 아래서
회오리치는 무의식의 대륙들과 만나는 걸 싫어한다.
거대한 풍선처럼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가 의자 모서리에 찔려 터진다. 통곡한다.
저물녘 붉은 물감을 칠한 바람이 폭발한다. 몇 시간째 데굴데굴구르며 회오리친다. 번개 친다.
바람에게서 바람이 뽑혀나가며 지르는 비명.
바람은 자유연상을 못 견딘다.
연상의 끝에는 꼭 무시무시하게 일어서는 밤바다가 있다.
바람은 일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육인실을 견디지 못한다.
바람은 관에 못이 쳐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유골함도 견디지 못한다. - P28

바람은 견디지 못한다.


- 「바람의 장례」 전문 「피어라 돼지』 - P29

당시에 저는 문학동네 온라인 지면에 시도 아니고 산문도아닌 ‘시산문‘이라 스스로 명명한 글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다시는 그 글들을 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온세상을 향하여 이 나라가 저 생때같은 아이들에게 한 짓을보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는 어른이라니, 참으로 저 자신이 수치스러웠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에게 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해왔습니다. 시인이란 인간은 원래 무턱대고 무한한 자유를 동경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시의 목적을 정치적 운동에 두지 않더라도 어느 시인이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이 그 현장에 가서 생일시를 쓰고, 지금도 끊임없이 낭독회를 열고, 학생들 가족과 연대해 책을출간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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