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남편도 좋아할 리가 없어요." 베라가 또 새된 웃음을 웃으며 말했죠. ‘손에도 안 좋아요. 내 손을 봐요!" 베라는 손을 내밀었어요. 손가락 마디에 옹이가 지고 피부는 거칠었으며 손톱은 짧고 각질이 삐죽삐죽 일어나 있었죠. 마술 반지를 낀 우리 어머니의 날씬하고 우아한 손가락과는 전혀 달랐어요. "험한 일을 하면 손에 나빠요. 남편도 아가씨한테서 빵 반죽 냄새가 나는 걸 원치 않을걸요."
"아니면 표백제나." 로사가 거들었어요. "걸레질해서."
"수를 놓는 거 같은 일이나 그냥 열심히 하면 좋아할 거예요." 베라가 말했죠.
"십자수." 로사가 말했어요. 그 목소리에 조롱이 섞여 있었어요.
나는 자수에 소질이 없었어요. 스티치가 느슨하고 칠칠치 못하다고 늘 흠이 잡혔죠,
"나는 십자수 싫어, 빵 만들고 싶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어요." 질라가 부드럽게 말했어요. "아무리 아가씨라도요."
"그리고 가끔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해요." 베라가 말했어요.
"아무리 아가씨라도요." - P35

"우리 모두 우리를 시험하려고 하느님이 보내는 고난을 인내해야하는 법이에요."질라가 말했어요. "희망을 놓아서는 안 돼요."
무슨 희망? 나는 생각했죠. 희망할 게 이제 뭐가 남았다고? 내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상실과 어둠뿐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이틀 밤이 지난 후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아침까지 알지 못했어요. 불치병에 걸리고 또 내게 말해 주지도 않은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거든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게 말을 해 주긴했던 거예요. 어머니는 고통이 곧 끝나기를 기도했으니까요.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죠.
회를 다 내고 났더니, 내게서 조각 하나가 툭 잘려 나간 느낌이 들었어요. 내 심장 한 조각, 그것도 같이 죽은게 틀림없었어요. 나는어머니의 침대를 에워싼 천사 넷의 이야기가 어쨌든 진실이기를, 그래서 천사들이 어머니를 지켜보다가 노래 속에 나오는 것처럼 영혼을 멀리 데리고 갔기를 바랐어요. 천사들이 어머니를 높이, 높이, 황금빛 구름 속으로 데리고 날아오르는 장면을 눈앞에 그려 보려 애썼어요. 하지만 도저히 진심으로 믿을 수가 없었어요. - P43

어젯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면서, 나는 머리카락, 아니 그나마남은 머리에 꽂은 핀을 풀었다. 꽤 오래전에 아주머니들에게 각오를다지는 훈화를 하며, 우리의 엄격한 금욕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기어드는 허영심을 경계하라고 설교했다. "삶에서 중요한 건 머리카락이 아닙니다." 나는 그때 그렇게 말했는데, 반만 농담조였다. 그 말은 사실이지만, 머리카락은 삶을 말해 준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머리카락은 육신이라는 초의 불꽃이고, 그 불꽃이 잦아들면 육신도 쭈그러들어 녹아 없어진다. 한때 정수리에 높이 틀어 올려 묶는 머리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나도 따라 할 만큼 숱이 있었다. 올림머리의시대에는 뒷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그러나 이제 내 머리카락은 아르두아 홀에서 우리가 먹는 끼니 같다. 듬성듬성하고 부족하다. 내 삶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있다.  - P47

나는 어떻게 끝날까? 궁금해졌다. 온후하게 홀대받는 노년까지 살아서 점진적으로 화석화될까? 나 자신의 영예로운 조각상이 될까?
아니면 체제와 내가 함께 쓰러지고 내 석상이 나와 함께 끌려 나가회한한 수집품으로, 잔디밭 장식품으로, 엽기적인 키치 예술품으로팔려 갈까? 요괴물로 재판을 받고 형장에서 총살당하고 가로등에 매달려 대중의 구경거리가 될까? 성난 군중에게 갈기갈기 찢기고 꼬챙이에 머리가 꽂힌 후 거리를 전전하며 놀림감이 될까? 나는 충분히 그럴 만한 분노를 유발해 왔다.
지금 당장은 아직 이 문제에 내가 선택할 여지가 있다. 죽을지 말지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것도 일종의 자유가 아닌가?
아, 그리고 누구를 같이 끌어내릴지도. 나는 명단을 작성해 두었다. - P48

내가 사는 현재에서 나는 전설이다. 살아 있으나 산 것 이상이고죽었으나 죽은 것 이상이다. 나는 교실을 가질 만큼 신분이 높은 여자애들의 교실 뒤편에 액자로 표구되어 걸려 있는 머리로서, 음침한미소를 띠고 말없이 설교한다. 나는 하녀들이 어린애를 겁줄 때 쓰는 귀신이다. 착하게 굴지 않으면, 리디아 ‘아주머니‘가 와서 잡아갈거야! 나는 또한 본받아야 할 완벽한 도덕성의 모범이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네가 어떻게 하면 좋아하실까? 그리고 상상 속의 모호한 종교재판을 주재하는 판관이자 입법자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이런 경우에 뭐라고 하실까?
물론 나는 권력으로 한껏 부풀었으나 또한 그로 인해 성운처럼 모호하다. 형태도 없거니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나는 어디에나있고 아무 데도 없다. 심지어 나는 사령관들의 마음속에도 심란한그림자를 드리운다. 어떻게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정상적인 내 크기로, 평범한 여자의 크기로 다시 줄어들 수 있을까? - P49

그러나 내가 에둘러 명확히 해 둔 바대로 그건 내 안위가 보장될 때만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수표와 예금잔고의 신봉자였다.
이런 보안 조치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안일하게 방심하도록 용납하는 일은 없다. 길리어드는 위태로운 곳이다. 사고는 빈번하게일어난다. 누군가 이미 나의 장례식 추도사를 써 두었다는 사실은 굳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전율한다. 누구의 발이 내 무덤을 밟고 걷고 있는가?
시간을, 나는 허공에 대고 간청한다. 약간의 시간을 더 다오. 그게내게 필요한 전부다. - P93

내 삶은 아주 다를수도 있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시야를 넓게 가지기만 했더라도, 일부가 그랬듯, 충분히 이른 시기에 짐을 싸기만 했더라도, 그래서 그 나라를 떠나기만 했더라도. 하지만 나는여전히 바보같이 그 나라가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몸담았던 나라와같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후회는 현실적으로 쓸모가 없다. 나는 선택을 내렸고, 일단선택을 내리자 점차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었다. 두 갈래 길이 노란숲속에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간 길을 갔다. 그런길이 다 그렇듯 그 길에도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당신도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나의 시체는 그 가운데 없다.
사라진 나의 국가에서, 상황은 수년째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홍수, 화재, 토네이도, 허리케인, 가뭄, 물 부족, 지진, 이건 모자라고저건 넘치고 퇴락하는 하부구조……. 어째서 너무 늦기 전에 누군가 그 원자력 발전소들의 가동을 중단하지 않았던가? 침몰하는 경제, 실업, 추락하는 출생률.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러다가 분노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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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누구나 똑같이 한 세트의 동기를 갖는다고 생각해 버리고는, 그게아니면 괴물이라고 하지."
- 조지 엘리엇, ‘다니엘 데론다』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때는, 둘 다 단순히 혐오하는 얼굴을 보고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지요, 우리는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겁니까……?"
-나치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리스가 늙은 볼셰비키 모스토프스코이에게, 바실리 그로스만, 삶과 숙명』

"자유는 무거운 짐, 영혼이 짊어져야 할 거대하고 이상한 짐이다……. 당연히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런 선택은 어려울 수 있다."
- 어슐러 K 르귄, 아투안의 무덤

죽은 사람에게만 석상이 허락되건만, 나는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석상을 하사받았다. 이미 화석이 된 것이다.
이 석상은 내가 세운 무수한 공적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라고, 헌사에서 말했는데 이를 대독한 사람은 비달라 ‘아주머니‘였다. 윗사람들의 지시로 대독을 맡은 비달라 아주머니는 하나도 고맙지 않은 눈치였다. 내 안에 있는 겸손을 모조리 끌어올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밧줄을 잡아당겨 수의처럼 나를 덮은 천을 걷었다. 펄럭이는 천이 땅에 떨어지자 내가 거기 서 있었다. 여기 아르두아 홀에서는 환호성을 올리지 않지만 얌전한 박수 소리는 좀 났다. 나는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 P11

석상이 대개 그렇지만 내 석상도 실물보다 크고 근래의 내 모습보다 젊고 날씬하며 훨씬 나은 모습이다. 어깨를 젖히고 똑바로 서 있고 휘어진 입술에 확고하지만 선한 미소를 띠고 있다. 나의 이상주의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헌신적 의무감, 모든 장애를 불사하고 전진하려는 결단을 표현하고자 시선은 우주의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그러나 아르두아 홀 정문에서 나오는 오솔길 옆 음침한 나무와 덤불속에 묻혀 있으니 하늘에 행여 뭐가 있더라도 내 동상의 눈에 보일리가 없다. 우리 ‘아주머니‘들은 주제넘게 굴면 안 된다. 심지어 돌의 형상이 되어서도, - P12

나의 왼손을 꼭 쥔 여자아이는 일고여덟 살쯤 되었고, 신뢰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내 오른손은 옆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의머리에 얹혀 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베일로 가리고 갈망이나 감사, 둘 중 하나로 읽을 법한 표정으로 눈을 들어 위를 본다. 우리 ‘시녀‘ 중 한 사람이다. 내 뒤로는 ‘진주 소녀‘ 한 명이 선교사업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서 있다. 내 허리를 감은 벨트에 걸린 물건은 테이저건이다. 이 무기를 보면 내 실패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좀 더 효율적이었다면 저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목소리에 깃든 설득력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전체 군상으로 보면 대단한 성공작은 아니다. 너무 바글바글하다.
내가 좀 더 강조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는 건 다행이다. 이 늙은 여성 조각가는(수십 년째 참된믿음을 지켜 온 사람이다.) 열렬한 신심을 강조하기 위해 눈알을 툭 튀어나오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그조차 안 됐을 수도 있다. 그 여자 - P12

가 제작한 헬레나 ‘아주머니‘ 흉상은 흡사 광견병에 걸린 몰골이고,
비달라 아주머니 흉상은 갑상선항진증 환자 같고, 엘리자베스 ‘아주머니‘의 흉상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석상 개막식에서는 조각가는 초조해했다. 자기가 표현한 내 모습이 충분히 보기 좋았나? 과연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걸까? 내가 기분이 좋다는 티를 내줄 것인가? 천이 벗겨지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도 측은지심을 아예 모르는 위인은 아니다.
"아주 실물과 흡사하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게 9년 전 일이다. 그후로 내 석상은 풍상에 닳았다. 비둘기들이 나를 장식하고 이끼가 내 축축한 틈새에 싹을 틔웠다. 참배자들이내 발치에 헌물을 두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다산을 비는 달걀,
만삭을 상징하는 오렌지, 달을 뜻하는 크루아상, 빵 종류는 무시하지만(보통은 비를 맞아 엉망이다.) 오렌지는 챙겨 호주머니에 넣는다.
오렌지는 정말 상큼하다. - P13

아르두아 홀 도서관 관내 나만의 성역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 땅전역을 휩쓴 열광적인 분서(焚書) 이후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도서관이다. 앞으로 반드시 도래할 도덕적으로 순수한 세대를 위한 청결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과거의 피 묻은 지문을 싹지워 버려야만 했다. 이론은 그랬다.
그러나 피 묻은 지문 중에는 우리가 찍은 것도 있고, 이런 자국은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무수한 유골을 파 - P13

묻었다. 다시 파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단지 당신의 계몽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미지의 독자여, 지금 당신이 읽고 있다면 이 원고는 적어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미망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게는 영영 독자가 없을지 모른다. 아마도 나에 대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오늘은 이 정도의 집필이면 충분하다. 내 손은 아프고, 내 허리는쑤시며, 밤마다 마시는 뜨거운 우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장광설은 감시 카메라를 피해 은닉처에 숨겨 둘 것이다. 나는 감시 카메라들이 어디 있는지 안다. 내 손으로 설치했으니까. 이렇게 조처해두긴 했으나 여전히 내가 무릅쓰는 위험은 잘 안다. 글쓰기는 위험할수 있다. 어떤 배반이, 어떤 탄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르두아홀 내부에도 이 원고를 손에 넣고 기뻐할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잠깐 기다려, 나는 소리 없이 그들에게 충고한다. 훨씬 나빠질게야. - P14

이런 점에서 사령관 인형은 내 아버지 카일 ‘사령관‘ 같았어요. 아버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착하게 굴었느냐고 묻고는 휙 사라졌어요. 차이가 있다면 사령관 인형은 서재 안에서 뭘 하는지 볼 수있지만(컴퓨토크와 서류 더미를 가지고 책상에 앉아 있었죠.) 현실의 아버지가 뭘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거였어요.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는 건 금지였거든요.
아버지가 그 안에서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들 했어요. 남자들이 하는 중요한 일들은 너무 중요해서, ‘종교‘ 과목을 맡은 비달라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뇌가 작아서 큰 생각을 못 하는 여자들이 관여할 게 아니라고 했어요. 고양이한테 크로셰 뜨기를 가르치려드는 거나 마찬가지야라고 ‘공예‘ 선생님 에스테 아주머니가 말하면우리는 왁자하게 웃었어요, 아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에요!
고양이는 하물며 손가락도 없잖아요!
그래서 남자 머릿속에는 손가락 같은 게 있다는 거야. 다만 여자애들한테는 없는 손가락이고, 그러니까 전부 설명이 되는 거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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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맑은 정신이라는 말을 가지고 말꼬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다시 말을 해도 괜찮다. 사령관이 주요 의례를 마치고 반지를 교환하고 베일을 거둘 차례가 왔기 때문이다. 우우. 나는 머릿속으로 야유를 퍼붓는다. 잘 봐둬, 이젠 너무 늦어버렸으니까. 천사들은 나중이 되면 시녀를 얻을 자격이 생길 거야. 특히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라면 더더욱. 하지만 너희 계집애들은 이제 볼 장다 본 거야. 이제 눈앞에 보이는 남자 외엔 그 누구도 없어. 하지만그들은 너희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아. 그냥 말없이 의무를수행해 주면 되는 거야. 의혹이 생기면,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볼수는 있지. 그 위에서 뭐를 보게 될지 누가 알겠어? 장례식용 화환들과 천사들, 먼지처럼 흩어진 별자리, 별과 다른 것들, 거미들이 남자고 간 퍼즐들. - P384

넌 언제나 그렇게 내숭이었어. 모이라가 말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애정이 묻어 있다. 참 그래서 덕을 많이도 봤겠다. 많이도봤어모이라가 옳았다. 지금 이 정말로 딱딱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지루한 의례가 이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이라가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권력을 지닌 자들에 대해 음담패설을 속삭이는 데에는,
확실히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 짜릿한 쾌감이 있고, 뭔가 발칙하고,
은밀하고, 금지된 전율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주문 같다. 그런음담패설은 권력자들의 바람을 빼고 쭈그러뜨려, 우리가 조롱할 수있는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화장실의 페인트칠한 칸막이에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런 낙서를 긁어놓았다. ‘리디아 아주머니는빠는 걸 즐긴다‘, 그건 마치 저항의 고지에서 흔들리는 깃발 같았다. - P385

이제 여기 내 방의 이 지나치게 더운 공기 속에는 채워야 할 공간이 있다. 채워야 할 시간도, 저녁 식사로 끊어진, 여기와 지금, 거기와 그때 사이의 시공. 환자식처럼 쟁반에 받쳐서 방까지 가져다주는식사의 도착, 필요 없는 사람, 환자. 유효한 여권은 없다. 탈출구는 없다 - P388

에서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되지. 우리는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남자로 바꿨다. 변화는 언제나 좋은 거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수정주의자였다. 우리가 수정한 건 물론, 우리 자신이었다.
옛날 우리의 사고방식을 돌이켜 보면 낯설기만 하다. 손만 뻗으면뭐든 가능할 것처럼 생각했다. 우연이라든가 한계 따위는 존재하지않는 것처럼, 한없이 뻗어가는 우리 삶의 경계를 마음대로 빚고 수정하는 일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을 것처럼, 우리는 믿고 생각했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행동했다. 루크는 내게 첫남자가 아니었고, 어쩌면 마지막 남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얼어붙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시간 속에, 허공 한가운데, 그때 그 나무들 사이에 떨어지던 모습으로, 그렇게 정지해 죽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 P393

이게 그 애란 말인가, 그 애가 이렇게 변했을까? 나의 보물어쩌면 이렇게 키가 크고, 달라졌는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꼭 옛날 첫 영성체를 하던 때 같다.
시간은 가만히 멈춰서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휩쓸고 지나가나를 깨끗이 지워 버리고 말았다. 나라는 존재는 경솔한 아이가 너두 발은 물가에 남기고 가버린, 모래로 만든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애에게 있어 이제는 하얗게 지워져 버린 존재다. 이 사진의반짝이는 표면 너머 까마득한 저 뒤에 존재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엄마들이 다 그렇듯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속에 나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애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살아 있다. 그 애는 살아서 성장하고 있다. 그건 좋은 일 아닐까? 축복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지워져버렸다는 사실을. 그녀가 차라리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 P396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좀 다르다. 나는 모이라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탈출해서 이번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니,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이라가 ‘이세벨의 집‘을 폭파시켜서, 그속에 있던 사령관 50명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대담무쌍하고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끝내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엄청난 일을, 그녀에게 어울리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결코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이라가 결국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끝을맺기나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후로 다시는 볼 수없었기 때문이다. - P436

이 이야기가 달라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좀 더 품위 있는 이야기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 속의 내가 더 행복해 보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더 적극적이고, 덜 우유부단하고 사소한 일들에 이렇게 넋을 놓는 사람이 아니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이라면 좋겠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갑자기 삶에서 정말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라거나, 아니면 최소한 일몰이나 새나 폭풍우나, 눈(雪)에 대한 이야기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도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에 중간에 너무 많은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은 속삭임들이, 타인에 대한 수많은 추측들이,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숱한 뜬소문들이, 너무나 많은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탐색과 - P459

비밀들이 끼어들고 만다. 그리고 너무도 오랜 시간을, 기름에 튀긴음식이나 짙은 안개처럼 지루한 시간들을 버텨내야만 한다. 고요하고 한가하고 몽롱한 거리에서 터진 폭발 사고처럼 시뻘건 사건들이한꺼번에 터져 버린단 말이다.
이 이야기가 이토록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교차 사격 한가운데 꼼짝없이 갇혀서 사살당하거나, 사지가 찢겨 능지처참을 당한 시체마냥, 내놓은 이야기란 것이 산산이 흩어진파편들이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바꿀 수 있는건 없다.
그래도 좋은 일들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써왔다. 예를 들어, 꽃 같은 것. 그마저 없다면 도대체 지금 어떤 기막힌 지경에 이르렀을까? - P460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럽다.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때도 단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이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기회가닿는다면, 미래에든 천국에서든 감옥에서든 지하에서든 다른 어떤곳에서라도 당신을 만나거나, 당신이 탈출했을 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까 미래, 천국, 감옥, 지하, 거기가 어디든 여기가아닐 것은 분명하다. 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 - P460

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부분은 결코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착하게 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무엇 하나빼먹거나 생략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무튼 당신은 이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고, 내가 빠뜨린 이야기들, 별건 아니라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P461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다.
나는 닉을 다시 찾아갔다. 몇 번씩, 나 혼자서, 세레나 몰래, 누가시킨 것도 아니었고, 댈 핑계도 없었다. 그를 위해 한 일도 아니고,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내 몸을 그에게 준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어야 주지 않겠는가? 그가 나를 들여보내 줄 때마다 나는 베푼다는 생색이 들기는커녕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무모해졌고, 어리석게 모험을 했다. 사령관과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갔지만,
그러고 나서 나중에 복도를 따라 뒤쪽에 달린 하녀들의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부엌을 통과했다. 부엌문이 등 뒤에서 짤각 하고 닫힐 때면 나는 거의 매번 정말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그 소리는 쥐덫이나 무기 같은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 P461

서, 휘파하느님, 당신이 원하신다면 난 못할 일이 없어요. 나는 기도한다.
이제 주님이 내 주인이 되셨으니, 정말로 원하시기만 한다면 나 자신을 하얗게 지워 버리겠어요. 진정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참된 성배가 되겠어요. 닉을 포기하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까맣게 잊겠어요.
불평도 그만두겠어요.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겠어요. 희생하겠어요. 참회하겠어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어요. 모든 인연을 끊겠어요.
옳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이레드센터에서 가르친 모든 것들, 내가 이제까지 저항했던 모든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한꺼번에 나를 덮친다. 고통은 싫다. 머리는 얼굴 없는 계란형의 천주머니가 되고, 두 발은 허공에 매달린댄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장벽‘에 걸린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날개 없는 천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가고싶다. 내 몸은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다. 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나는 비굴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실감한다. - P495

나는 내 방 창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무릎 위에는 구겨진 별들이 한 뭉치 흩어져 있다.
이번이 내가 뭔가를 기다리는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뭘 기다리고 앉아있는 거야? 옛날에는 그런 말들을 썼지. 그건 ‘서둘러라‘라는 뜻이었다.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었지. 뭘 기다리고 있는 거니?라는말은 다른 질문이지만, 난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꼭 기다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보다는 일종의 미결 상태라 하는 편이 좋을까. 긴장감도 없는 마침내 시간도사라지고 없다.
나는 정숙과 기품의 화신이 아니라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다. 이보다 더 참혹한 기분이 되어야 하는데. - P501

하지만 나는 고요하고, 차분하고,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다. 그 치들이 너를 짓밟게 내버려두지 마라. 이 말을 혼자 되풀이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거기 공기가 들어가게 하지 말라든가 아예 존재하지 말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런 말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다.
비가 올지 궁금하다.


바깥에서 햇빛이 희미해지고 있다. 벌써 붉은 빛이 돈다. 곧 어둠이 찾아오리라. 지금은 조금 전보다 훨씬 어둡다. 이렇게 어두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P502

문 뒤에 숨어 복도를 절름거리며 걸어오는 세레나를 기다릴 수도있다. 참회는 형벌이든 처분을 무조건 받아들이며 고분고분하게 굴다가 불시에 덮쳐 머리에 날쌔고 정확하게 발길질을 할 수도 있다. 그녀를 고통에서 구해 주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도 고통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우리들의 고통에서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
그러면 시간도 절약될 텐데.
차분하게 계단을 내려가서 분명한 목적지라도 있는 듯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시험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간색은 너무 눈에 잘 띄니까.
ㅡ예전처럼 차고 너머닉의 방에 갈 수도 있다. 나를 방에 들여보내줄지, 은신처를 제공해 줄지 시험해 볼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로 은신처가 절박하게 필요해지고 말았으니,


이런 허망한 대안들을 상상해 본다. 각각의 선택은 나머지와 꼭같은 비중이다. 무엇 하나 다른 것보다 나아보이지 않는다. 피로가내 몸 속에, 다리와 눈에 자리 잡고 있다. 결국은 거기 굴복하고 만다. 믿음은 그저 장식된 글자일 뿐이다. - P503

황혼을 내다보고 겨울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드럽고 가볍게 내리는 눈은 보드라운 결정으로 만물을 덮어 버리고, 비가 내리기 전의달무리처럼 사물의 윤곽선을 흐리고 색채를 말소해 버린다. 얼어 죽는 건, 첫 번째 오한만 지나고 나면 고통이 없다고들 한다. 어린애들이 만든 천사처럼 눈 속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도 있다.
등 뒤에 그녀의 존재가 느껴진다. 나의 선임자, 내가 대역을 맡은그녀는 별들과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샹들리에 밑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공중에 멈춘 새, 천사가 되어 버린 여자가 사람들한테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발견했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나 혼자밖에 없다고 믿어왔던 걸까? 언제나 우리 둘이 함께였는데, 그녀는 극복해야지 하고 말한다. 나는 이 신파극이 지겨워지려고 해. 침묵을 지키는 게 지겨워. 네가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없고 네 삶은 아무짝에도,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어라고 대꾸한다.
삶을 끝내 버리고 싶다. - P504

나의 의혹은 그의 머리 위 허공을 떠돈다‘ 나를 경고해 의혹을 몰아내려는 어둠의 천사, 그래, 알 것만 같다. 그라고 해서 ‘메이데이‘
를 모르라는 법이 어디 있나? ‘눈‘이라면 누구든 그 말을 알고 있을터이다. 그들은 지금쯤 숱한 육신으로부터, 숱한 입들에서 그 말을짜내고, 짓뭉개고, 비틀었을 터이다.
"나를 믿어요"
그 자체로는, 그 어떤 효력도 없고, 어떤 보장도 해 줄 수 없는 한마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그 제안에 허겁지겁 매달린다. 내게 남은 건 그게 전부니까. - P506

코라와 리타가 주방에서 황급히 나온다. 코라는 울기 시작한다.
내가 그녀의 희망이었는데, 꿈을 실현시켜 주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영영 아기 없는 여자로 남으리라.
밴이 이중문을 활짝 열어놓고 진입로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내 양편에 자리 잡고 선 두 남자가 내 팔을 부축해 태운다. 이것이내 끝이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이방인들의 손에 내 몸을 맡겼을 뿐.
"그래서 나는 차에 오른다. 그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암흑으로 아니 어쩌면 빛으로.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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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이며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러하다. 그에게 나는 그저 쓸모 있는 육체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나는 짐을 싣지 않은 배,
포도주가 담겨져 있지 않은 잔이 아니며, 속된 말로 빵 하나 못 굽는 오븐이 아니다. 그에게 나는 그저 텅 빈 존재가 아니다. - P282

"저도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하지만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하마터면 나는 그가두려워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오."
"제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고 싶으신 거군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직설적인 지적처럼 느껴졌다. 단호하고 의도가 분명한 진술, 내 삶이 견딜만하다면, 그럼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 다 정당화된다.
"그래 맞아, 나는 그랬으면 좋겠소."
"좋아요, 그럼" - P326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내가 그의 약점을 쥐었다. 그에 대항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나 자신의 죽음이다. 내가 잡은 약점은 바로 사령관의 죄책감이다. 드디어.
"당신은 뭘 갖고 싶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기만 하다. 이게 단순한 금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사탕이나 담배를 사듯이 거래 규모도 아주 하찮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핸드로션 말고 말씀이시죠?"
‘핸드로션 말고."
그가 동의한다.
저는...... 저는 알고 싶어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이라,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어리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저한테 알려줄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하게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에요." - P327

밤이 내린다. 아니 이미 내린 지 오래다. 어째서 밤은 여명처럼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 내리고 저문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일몰 시각에 동편을 보면, 밤이 내리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의 장막 너머 검은 태양처럼 어둠이 지평선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불길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산불이나 도시가 불탈 때 지평선바로 아래 죽 늘어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 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지 모른다. 두꺼운 커튼이눈앞을 가린다. 양모 담요,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밤이 내렸다고 해야겠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밤의무게가 느껴진다. 산들바람 한 점 없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 곁에앉아 있다. 커튼은 활짝 걷어두었다.  - P331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 P366

늦은 오후, 하늘은 아지랑이가 피고, 햇살은 퍼져, 마치 황동 먼지처럼 사방에 무겁게 깔려 있다. 나는 오브글렌과 함께 인도를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우리 둘이 한 쌍, 우리 앞에는 한 쌍이 더 있고, 길건너에 또 한 쌍이 있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보기 좋을 것이다. 마치 벽지의 부조 장식에 붙어 있던 네덜란드의 젖 짜는 처녀들처럼.
옛날 도자기로 된 소금 그릇, 후추 그릇이 가득 얹혀 있는 찬장 선반처럼,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변화 없이 이어지는 백조들의 선단 뭐 그런 것처럼, 그림같이 보기 좋긴 하겠지. 눈에 눈들에, ‘눈‘들에게 보기 좋겠지. 이 모든 쇼는 그들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기도부흥성회‘에 참석해 우리가 얼마나 순종적이고 경건한지 보여 주러가는 길이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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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마는 울기도 했다. 너무 외로웠다면서.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난 친구들도 있었고 재수가 좋은 편이었는데, 하지만 그래도 외로웠어.
나는 어떤 면에서 우리 엄마를 존경했지만, 우리 관계는 한번도 쉽지 않았다. 내게 거는 엄마의 기대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당신의 생을 옹호하고, 당신의 선택을 편들어 주길 바랐다. 나는 내 인생을 엄마가 내건 조건에 맞춰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사상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완벽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래서 싸웠다. 나는 엄마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나는 한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다.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바람은. - P212

여긴 덥고, 너무 시끄럽다. 주위의 여자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나지막하게 읊는 음송이라도 날마다 침묵 속에서 지내던 내게는지나치게 시끄럽다. 역시 방구석에는 양수가 터져 나왔을 때 닦은피로 얼룩진 이불 홑청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아챘다.
방 안에서는 냄새가 나고 공기도 텁텁하다. 창문을 하나 열어야하는데, 냄새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살내다. 유기적인 냄새, 땀과 홑청의 피에서 나는 희미한 철분 냄새, 그리고 또 다른 냄새가 난다.
좀 더 동물적인 이 냄새는 틀림없이 재닌한테서 풍기는 냄새다. 동굴의 냄새, 사람이 살고 있는 동굴의 냄새, 난소를 제거하지 않은 고양이가 침대에서 출산을 했을 때 체크 무늬 담요에서 나던 냄새. 자궁의 냄새. - P213

나는 말한다. 이젠 나도진이 빠지고, 완전히 초주검이 되었다. 젖가슴이 탱탱하게 아파왔고, 심지어 젖이 약간 새기까지 했다. 가짜젖 간간이 이런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벤치에 앉아 이송되어 간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어져 빨간 옷 뭉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는 아파한다.
우리 모두 무릎 위에 유령 하나씩을 존재하지도 않는 아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흥분이 사그라진 지금, 우리는 저마다의 실패와 대면해야 한다. - P221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받지 않아도 된다든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 P235

나는 어두침침한 복도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지나, 몰래 내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불을 끄고, 단추와 후크를 하나도 끄르지 않은 채, 빨간 드레스를 그대로 입은 채로 의자에 앉는다. 옷을 다 입고 있을 때만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내게 필요한 건 올바른 시각이다. 액자 하나와 평면 위에 배열된형상들을 통해 만들어진 깊이의 환영, 원근법이 필요하다. 그렇지않으면 고작해야 2차원뿐일 테니, 원근법이 없으면 벽에 부딪혀 납작하게 으깨진 얼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만물이 거대한 전경(前景)이 되어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 클로즈업, 털이며 이불 홑청의싸임까지 눈앞에 훤히 보일 것이다. 심지어 얼굴의 분자들까지도 보일 것이다. 내 이 피부 위에 마치 지도(地圖)처럼 불모의 도해가 되어,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작은 길들이 지그재그로 교차하리라.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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