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와 본 적은 없지만 그 광장을 아니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나는 마음으로 알고 있었다. 물건에 볕이 드는 걸 막기 위해차양까지 달린 정식 매대를 갖춘 이들도 있었다. 벌써부터 더위가기승이어서, 동유럽의 평원과 숲에서 밀려드는 각다귀 같은 열기에날이 절절 끓었다. 잎사귀의 더위. 지중해의 더위와 같은 확신은 찾아볼 수 없는, 암시로 가득한 더위, 이곳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가장 확실에 가까운 건 할머니다.
다른 장사치들-전부 여자다은 직접 기른 것을 바구니나 양동이에 담아 온 변두리 마을 사람들이다. 당연히 매대가 없고, 집에서챙겨 온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서 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그 사이를 이리저리 거닌다. - P82

나는 그 사이를 이리저리 거닌다. 나이도 천차만별, 체격도 각양각색, 눈동자의 색도 모두 다르다. 똑같은 머릿수건을 맨 여자들은찾아볼 수 없다. 파를 썰거나 징글징글한 잡초를 제거하거나 붉은무를 뽑을 때, 가끔씩 쑤시는 허리가 고질병이 되지 않도록 허리를보호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저들이 젊었을 땐 엉덩이로 충격을 흡수했는데, 이제 그 역할을 도맡아야 하는 것은 어깨다.
나는 의자도 없이 서 있는 어떤 여자의바구니를 들여다본다. 그속엔 흐릿한 금빛의 패스트리와 자그마한 파이가 가득하다. 모양은체스의 말, 그 중에서도 캐슬과 비슷하다. 총안이 있는 곳을 위로 향하게 하지만 어느 쪽으로도 세울 수 있는 캐슬 크기는 하나에 십센티미터쯤 된다.
캐슬을 하나 집어 들고서야 실수를 깨닫는다. 패스트리라고 하기엔 너무 무겁다. - P83

켄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맞은편 벤치에 가서 앉는다. 육십 년 전에 자신의 지식을 내게 나눠 줬던 남자.
비록 그것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지만.
그는 어린 시절이나 부모님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마어렸을 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뉴질랜드를 떠나 유럽으로 오지 않았을까 짐작만 했을 뿐이다. 그의 부모님은 부자였을까, 가난했을까?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지금 이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게같은 질문을 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었을 것이다.
거리는 결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뉴질랜드의 웰링턴, 파리,
뉴욕, 런던의 베이스워터 로드, 노르웨이, 스페인, 그리고 내 생각엔 버마나 인도에도 잠깐 머물지 않았을까 싶다. 저널리스트, 학교교사, 댄스 강사, 영화의 단역 배우, 기둥서방, 가게도 없는 책 장수, - P84

크리켓 심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위에 거론한 것들 중에 몇 개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게 노비 광장에서 마주 앉은 그를 그리는 내 나름의 초상화다. 파리에서는 신문에 삽화를 그렸는데, 이건 확실하다. 그가 좋아했던 붓의 종류-손잡이가 유난히 긴 붓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발사이즈는 삼백 밀리미터였다.
그가 보르쉬 (고기와 각종 야채를 넣고 끓인 러시아식 수프-역자) 그릇을 내 앞으로 민다. 그러더니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숟가락을 닦아서 내게 건넨다. 검은색 격자무늬의 손수건이 낯익다. 수프는 맑고, 맛이 깊고, 붉은색이 나는 야채 보르쉬인데, 근대가 갖고 있는 천연의 단맛을 조금 중화시키기 위해 폴란드식으로 사과식초를 약간 넣었다. 나는 조금 먹다가 그릇을 다시그에게 밀고 숟가락을 돌려준다. 말은 한 마디도 오가지 않는다. - P85

그것들을 내게 직접 건네준 적은 없다.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만말하고 아파트의 벽난로 선반 한쪽에 올려뒀다. 차곡차곡 쌓인 여권 중에서 골라 가기도 했다.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 마르셀 프루스트, 『스완네 집 쪽으로,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 파티』.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 헨리 밀러, 『북회귀선』. 이유는 달랐지만 우리 둘 다 문학을 설명하는 것의 효용을믿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그에게 물어본 적도 없다. 그역시 내 나이나 경험에 미뤄 볼 때 이런 책들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모른다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없다. 프레데릭 트레브스, 엘리펀트맨.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파리에서 출간된 영문판). 우리 사이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부분적으로나마 책을 통해 배운다―또는 배우려 한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있었다. 그 과정은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그림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고난의 성자 요한. - P93

그는 사 년 전에 총살당했다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를 스페인어로 읽어 주었고, 그걸 우리말로 번역해서 들려주었을 땐, 열네 살짜리 주제에 인생이 무엇이고 뭘 걸어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믿었다.
세부적인 몇 가지들을 제외하고, 아마 이런 말을 그에게 했거나, 아니면 은연중에 드러난 나의 무모함이 거슬렸던 모양인지 그가 이런얘기를 했다. 세부적인 것들을 살펴야 해! 나중이 아니라 맨 먼저!
그의 말투엔 언젠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어도, 그 자신이 세부적인 것에서 후회로 남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후회가 남은 게 아니라 대가를 치러야 했던 실수. 그는 살면서 후회하지 않은 많은 것에 대가를 치렀다. - P94

스타일을 파악하고 비평의 기본을 처음으로 배운 것은 에지웨어로드에 있는 올드멧 뮤직홀의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였다. 러스킨,
루카치, 베런슨, 벤야민, 뵐플린은 모두 나중에야 알게 됐다. 내 비평의 기본은 올드멧에서 생겨났다. 이층 관람석에서 요란스럽게 환호하고 가차 없이 야유를 보내는 관중에 싸여 그 삼각형의 무대를내려다보면서 갖춰졌다. 그들은 스탠드업 코미디와 아다지오 곡예,
가수들과 복화술사를 가혹할 정도로 냉정하게 평가했다. 우리는 테사 오세아가 극장이 떠나가도록 갈채를 받는 것도 보고, 쏟아지는야유에 눈물로 머리카락을 적시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도 봤다.
공연엔 스타일이 있어야 했다. 청중의 마음을 하룻밤에 두 번은사로잡아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쉼 없는 개그 퍼레이드가좀더 신비로운 뭔가로 이어져야만 했다. 인생 자체가 스탠드업 공연이라는 음모적이고 불경한 암시 같은 것! - P95

멜론

우리가 보기에 멜론은, 어딘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가뭄 같은 과일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계곡이나 흙먼지 날리는 갈라진 들판을지나가다 멜론을 발견하면, 오아시스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심정으로 그걸 먹었다. 맛은 기가 막히고 지친 심신을 달래줬지만,
사실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멜론은 자르기도 전에 물기 어린 단내를 풍긴다. 그 안에 담긴 한없이 진한 내음. 하지만 갈증을 해소하려면 어떤 예리한 기운이 필요하다. 차라리 레몬이 낫다.
작고 녹색을 띨 때라면 멜론이 젊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 하지만이 과일은 묘하게도 순식간에 나이를 초월해 버린다. 아이의 눈에비친 어머니처럼, 껍질에 난 흠집ㅡ흠집이 없는 경우는 없다-은사마귀나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점 같다. 다른 과일의 경우처럼 오래 됐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그 멜론이 개성을 지녔으며, 늘 그래왔음을 확인해 줄 뿐이다. - P107

이걸 한번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겉모양만 보고는 속을 거의 짐작할 수 없다. 자르는 순간까지 결코 드러나지 않는, 녹색으로살짝 방향을 튼 그 진한 오렌지색을 가운데 빈 구멍에 가득한 씨.
옅은 불꽃 같으면서도 촉촉한 색깔의 그 씨앗들이 한데 뭉쳐 매달린모습 앞에서는 제아무리 뚜렷한 질서의식도 무릎을 꿇게 된다. 그리고 구석구석 반짝이지 않는 데가 없다.
멜론의 맛에는 어둠과 햇살이 모두 담겨 있었다. 결코 함께 존재하지 못했을 상반된 것들을 기적처럼 한데 합쳐 놓았다. - P108

복숭아

우리가 먹던 복숭아는 햇볕에 검게 변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뻘건검은색이지만, 붉은 기운보다는 검은색이 더 짙었다. 시뻘겋게 달컸다가 꺼내 식히는 중이어서 여전히 뜨겁다는 경계심을 갖기 어려운 쇠의 검은색. 말편자 같은 복숭아.
검은색이 전체적으로 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그늘이 졌던 부분은 희끔했는데, 그러면서도 그늘을 드리웠던 나뭇잎들이 제 색을 슬쩍슬쩍 칠한 것처럼 녹색이 살짝 감돌았다.
우리 때에는 유럽의 부잣집 여자들이 얼굴과 몸을 복숭아처럼 희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집시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복숭아는 한 손에 꽉 차게 큰 것에서부터 당구공만큼 작은 것까지크기가 상당히 다양했다. 작은 것의 껍질은 더 섬세하기 때문에 살 - P108

이 짓무르거나 너무 익을 경우 보일 듯 말 듯 주름이 잡히는 경향이있었다.
그 주름을 보면 검게 그을린 팔뚝에서 접히는 중간 부분의 따뜻한피부가 연상되곤 했다.
속에는 씨가 있는데 질감은 짙은 나무껍질 같고, 모양새는 제멋대로인 게 꼭 운석 같다.
이런 야생의 복숭아는 신이 도둑들을 위해 만든 과일이었다. - P109

자두

해마다 8월이면 우리는 자두가 나오길 기다렸다. 실망스러울 때도맡았다. 덜 익었거나 섬유질이 많거나 거의 말라붙었거나, 그렇지않으면 지나치게 무르거나 물컹거렸다. 한입 베어 물 가치조차 없는 것도 많았는데, 만져만 봐도 적당한 온도가 아니라는 걸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섭씨나 화씨로는 잴 수 없는 온도, 햇빛에 둘러싸인 어떤 시원함의 온도, 어린 사내아이가 꽉 쥔 주먹의온도,
그 아이는 여덟 살에서 열 살 반 사이, 사춘기에 짓눌리기 전에 독립심을 키워 가는 나이다. 아이가 손에 자두를 들고 입으로 가져가한입 베어 물면, 과일의 혀는 쏜살같이 목 뒤로 넘어가고 아이는 그것의 약속을 삼킨다.
무슨 약속일까? 아직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이제 곧 아이가 이름을 붙이게 될 뭔가에 대한 약속, 아이가 느끼는 달콤함은 더 이상설탕의 맛이 아니고, 계속 자라나는 가지, 끝이 없는 것만 같은 그것 - P109

의 맛이다. 그것은 아이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어떤 몸에 달려있다. 그 몸에는 세 개의 팔다리가 더 있고 목과 발목이 있으며, 소년의 몸과 비슷하다. 단지 뒤집혀 있을 뿐. 가지의 구석구석으로 수액이 끊임없이 흐른다. 아이는 잇새에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이가 소녀나무라고 부르는, 이름 없는 하얀 나무의 수액.
자두 백 개 중에 하나만이라도 이런 느낌을 되살려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P110

체리

체리에는 다른 어떤 과일에서도 볼 수 없는 발효의 풍미가 있었다.
갓 딴 체리는 햇볕이 가미된 효모의 맛이 났고, 그 맛은 유난히 반짝이는 껍질의 윤기와 서로 보완이 됐다.
체리를 먹으면 딴 지 한 시간밖에 안 된 것이라 해도 그 자체의 썩은 맛이 섞여 있다. 체리의 금색이나 붉은색 속에는 늘 갈색의기미가 어려 있다. 살이 물러져서 해체되어 들어갈 색.
체리가 청량감을 주는 까닭은 순수함 때문ㅡ사과처럼―이 아니라, 발효에서 일어나는 기포가 혀를 살짝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살짝 간질이기 때문이다.
크기가 작고 과육이 가벼우며 껍질이 얇기 때문에 체리의 씨는 늘어딘가 느닷없는 느낌이었다. 체리를 먹으면서 씨를 예감하기란 어려웠다. 씨를 뱉어 놓고 보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과육과 그다지상관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내 몸의 침전물. 체리를 먹음으로써 만들어진 불가사의한 침전물처럼 느껴졌다. 체리 한 알을 먹을 때마 - P110

다 체리의 이빨을 하나씩 뱉어냈다.
얼굴의 나머지 부분하고 확실히 다른 입술과 체리는 그 윤기와 말창거리는 것까지 똑같다. 껍질은 둘 다 액상의 피부 같다. 모세관의표면, 우리의 기억이 옳은지, 아니면 죽은 이들이 과장을 하는 건지확인을 해 보라. 체리를 입 안에 넣고, 아직 씹지는 말고, 잠깐 동안그것의 밀도, 그것의 부드러움과 탱글탱글함이, 그걸 물고 있는 입술과 얼마나 완벽하게 일치하는지를 느껴 보라. - P111

큐치

짙고, 작고, 타원형이며, 길이가 사람의 눈동자 정도 되는 자두의 일종. 가을이 되면 잘 익어 나뭇잎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큐치.
익으면 거무스름한 보라색이 되지만, 씻을 때 손가락으로 문질러닦지 않으면 표면에 과분(果粉)이 남는다. 푸르스름한 나무 연기 색깔의 과분. 이 두 가지 색을 보면 우리는 물에 가라앉는 것과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동시에 생각났다.
노르스름하니 옅은 녹색의 과육은 달콤하면서도 시큼해서 깔쭉깔쭉한 톱니의 느낌이 난다. 자잘한 톱날을 혀로 슬며시 문지르는것 같은. 큐치는 자두처럼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다.
이 나무는 늘 집 가까이에 심었다. 겨울에 창밖을 내다보면 작은새들이 먹이를 찾아 매일같이 몰려와서 이 가지 위에 깃을 쳤다. 콩새, 울새, 박새, 참새 떼에다 먹이를 뺏어 먹는 까치 한 마리도 가끔끼어 있었다. 다시 봄이 오고 꽃들이 막 피어날 무렵이면 그 작은 새들이 큐치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부르곤 했다. - P111

이게 노래의 과일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큐치를 통에가득 담아 발효시켜서 만드는 놀이라는 슬리보비츠, 그러니까 일종의 자두 브랜디를 불법으로 담가 마셨다. 그리고 기포가 뽀글뽀글올라오는 이 술 한 잔을 마시면 예외 없이 사랑의 노래, 고독과 인고의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 P112

옆에 딸린 야트막한 컵 모양의 공간-직경 사 미터 - 으로 기어들어가 보니 불규칙하게 출렁이는 한쪽 벽에 빨간색으로 곰 세 마리가 그려져 있다. 몇 만 년 뒤에나 전해질 동화처럼 아빠 곰, 엄마 곰.
그리고 아기 곰이 쪼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곰 세 마리와 그 뒤로보이는 조그만 아이벡스 두 마리. 화가는 깜빡이는 횃불의 불빛으로 바위와 대화를 나눴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곰이 앞으로걸어갈 때 앞발에 엄청난 체중을 실어 휘젓는 듯한 느낌을 제대로살려냈다. 갈라진 균열은 아이벡스의 등과 딱 들어맞는다. 화가는자신이 그리는 동물들을 속속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손은어둠 속에서도 그것들을 그려낼 수 있었다. 바위는 화가에게 동물들-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이 그 속에 있으므로 손가락에 빨간 물감을 칠해서 그걸 바위의 표면으로, 얇은 막 같은 그표면으로 불러내어 바위에 몸을 비비고 냄새를 묻히게 할 수 있다고말해 주었다. - P136

그들은 얼마나 자주 이 동굴을 찾았을까? 화가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을까? 대답이 없다. 그저 위험과 생존, 두려움과보호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고, 그것을 추억에 담아 가기 위해 이곳에 왔을 거라는 추측으로 만족해야 할까?
어느 시대건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무리일까?
쇼베 동굴에 그려진 대부분의 동물들은 맹수지만, 그림에는 두려움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존경심, 그렇다. 우정 어린, 친밀한 존경심, 그리고 그것은 여기 그려진 모든 동물의 이미지 속에서인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즐거이 드러난 존재.
이곳의 모든 동물들은 인간 안에서 안온하다. 이상한 조합이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다. - P137

쇼베 동굴의 특징은 이곳이 봉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만 년전에 동굴 입구-널찍하고 빛이 스며드는-의 천장이 무너졌다.
그때부터 1994년까지, 화가들이 마주했던 어둠이 왜냐하면 어둠은그들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부터 들어와서 그들이 남긴 모든 것을 묻어 보존했다.
석순과 종유석은 계속 자랐다. 몇몇 곳에서는 방해석이 백내장처럼 세밀한 부분들을 덮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표현의 비범한 신선함은 대체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즉시성은 선형적인 시간감각을 방해한다. - P139

서쪽으로 가는 몇 무리의 동물들. 그 속에, 멀리 있는 거대한 동물들과 닿아 있는, 아주 작게 그려진, 가까운 동물들.
건기에 불을 제대로 놓으면 순식간에 번질 수 있기 때문에 그걸지켜보고 있으면 공기가 쏠려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크로마뇽인들의 그림은 가장자리를 중시하지 않았다. 흘러야 하는 곳에서 흐르고, 가라앉고, 덮어씌우고, 이미 그곳에 있는 이미지를 가라앉히고, 그러면서 싣고 가는 것의 비례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크로마뇽인들은 어떤 상상의 공간에서 살았던 걸까?
유목민에게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경험에종속된다. 지나가 버린 것, 또는 기다리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숨겨져 있다. - P140

사냥을 하는 쪽이든 사냥을 당하는 쪽이든 생존의 전제조건은 잘숨는 것이다. 목숨은 은신처를 찾아내는 데 달렸다. 모든 것이 숨는다. 사라진 것은 숨어 버린 것이다. 빈자리 - 죽은 이의 부재처럼ㅡ는 버림받은 느낌이 아닌 상실의 느낌을 안겨 준다. 죽은 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숨어 있다. - P141

타일러 선생님은 이차대전 직후 오십대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가스난로인지 집이 다 타 버린 화재인지, 아니면 문을 닫은 채 차고 안에서 시동을 켜 놓은 자동차 사고인지와 관련이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는데, 체계적이고 깔끔하고, 퉁명스러우리만치 숫기가 없었으며,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무심하게 또는 부주의하게 죽어 버렸다는 또는 생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는 - 인상을 풍겼기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것들은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
저희는 곧 떠날 거예요. 그의 팔꿈치께에 선 키르케가 나지막하게말한다. 차가 커서 선생님의 짐을 실을 자리도 넉넉하답니다. - P156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바르샤바와 모스크바를 잇는 대로를 따라동쪽으로 가고 있다. 양쪽 다 통행량이 많다. 몇 년만 지나면 여기는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길은 수많은 숲의 언저리를 스쳐 가거나 관통한다. 여름의 빛이 녹색을 띠고, 가문비나무 줄기가 높이 자랄수록 깃털 같은 오렌지색으로 변하는 북쪽의 숲들. 새들에게 붉은 가문비나무의 꼭대기는 물고기들에게 산호가 갖는 의미와 같다. - P160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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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께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다면 망자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합니다. 그리고우리는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겉으로야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저 전통적이고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행위였죠. 그러던 것이,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면 전부 ‘퇴물 취급을 하는 세계 경제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여러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냘픈 희망이지요. 하지만 살찐 희망은 헛소리입니다. 그러니 이 가느다란 희망을 간직해 나갑시다. 이제 독자여러분께 넘깁니다.


2006년 2월
존 버거

리스본 어느 광장에 가면 한가운데에 루시타니안 사이프러스(그러니까 포르투갈 사이프러스)라고 부르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의 가지들은 하늘을 향하지 않고 밖으로 평평하게 뻗어 나가도록가꿔 놓았기 때문에 햇살도 빗방울도 뚫지 못할 직경 이십 미터의거대한, 그리고 아주 나지막한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백 명은 너끈히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다. 비틀리고 육중한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는 쇠 버팀대가 가지를 받치고 있다. 수령은 최소한 이백 년이 넘었다. 그 옆의 공공 게시판에는 지나는 이들을 위한시 한 편이 적혀 있다.
걸음을 멈추고 몇 줄 해석해 본다.


...나는 당신이 사용하는 곡괭이의 자루요, 집의 문이며, 요람의널빤지이자, 관을 짜는 목재이니…. - P11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원칙은 원칙이지.
존,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해. 다른 사람의 선을 대신 그어 줄 수는 없어. 물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규칙을 지키는 것과 삶을 존중하는 건 같지않아. 그리고 삶을 존중하려면 선을 그어야 해.
그래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고 장소는 그렇다는 거예요? 내가 다시 물었다.
존, 이건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란다. 이제 전차가다니는 도시는 많지 않잖니. 여기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밤에몇 시간만 빼고.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나요?
리스본 시내에서 전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는 거의 없단다. - P16

뒤늦게야 나도 초를 몇 개 사서 불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누굴 위한 촛불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바다에 나가 있는 세 명의 친구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일 길어서 오래도록 탈 초들을 사서 한쪽 테이블로 다가갔다.
가장 가까운 쇠심에 초를 하나씩 차례로 꽂았다. 그러고 나서야 이미 타고 있는 다른 초에서 미리 불을 붙였더라면 다른 두 초를 꽂아놓고 쉽게 불을 옮겨 붙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이제는 그 바람 속에서 성냥을 긋는 것도 힘들뿐더러, 성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실수를 깨닫고 있는데 뒤에 있던 조그만 체구의 한 여자가불이 켜진 초를 내게 내밀었다. 그게 누구일지 전혀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보지도 않고 그걸 받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선 채 새로 밝힌 세 개의 촛불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 P46

왜 제 책을 하나도 안 읽으셨어요?
나는 또 다른 인생을 보여주는 책들을 좋아했어. 내가 읽은 책들은 다 그런 거야. 전부 진짜 인생을 다루지만, 접어 뒀던 부분을 다시 찾아 읽어도 그건 나에게 일어났던 인생은 아니었지. 책을 읽을때면 모든 시간 감각을 상실했어. 여자들은 항상 다른 삶을 궁금해하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지나치게 야심이 큰 나머지 이걸 이해못해. 다른 삶, 전에 살았던 삶, 살 수도 있었던 삶. 그리고 난 너의책이, 또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상상만 하고 싶은 삶, 말없이 나혼자 상상해 보고 싶은 그런 삶에 대한 것이길 바랐어. 그러니까 읽지 않은 편이 더 나았지. 서점의 유리창을 통해 네 책들을 볼 수 있었단다. 내겐 그걸로 충분했어.
요즘은 헛소리를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요.
뭘 쓰더라도 그게 뭔지를 당장에 아는 건 아니야. 늘 그랬어. 어머니가 말한다. 다만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려고노력하는지, 그것만큼은 알아야 해. 더 이상은 그걸 혼동하는 실수를 용납할 여지가 없으니까. - P50

리스본은 인고의 도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과 애칭의 도시다.
아구아스 리브레스 수도교는 1748년에 완공되었다. 칠 년 후에 대지진이 도심을 강타했지만 이곳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군사공학자들이 수도교의 진로를 잡으면서 지질학적 단층선을 피해 갔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런 재난에도 멀쩡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구아스 리브레스로 흐르는 공급용수의양을 늘리기 위해 여러 수도교들이 추가되고 보완되었다. 회의론자들이 처음부터 경고했던 것처럼 도시의 용수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 P53

19세기에 이 수도교는 파세이우 도스 아르코스, 즉 아치의 길이라고 불렸는데, 서쪽 마을 사람들이 물건이나 날품을 팔러 도시로 넘어올 때 이 다리를 지름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알칸타라계곡을 내려가서 물을 건넌 다음에 다시 올라올 필요가 없었다. 그냥 하늘을 가로질러 일 킬로미터만 걸어가면 됐다. 서른 개 남짓한알칸타라의 아치에 리아, 아딜라, 카롤리나, 상드라, 이라세나 같은애칭이 하나씩 붙은 건 그런 연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조 아치인, 가운데의 크고 뾰족한 아치에는 마이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수로를 이용해서 도시에 물을 공급하자는 최초의 현대적 제안-로마 사람들이 전에 시도했던이 나온 건 위생이나 만성적인 식수난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화재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도시곳곳이 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 P53

수로가 완공되자 후작과 은행가들은 큰 줄기에서 물을 끌어다 쓸수 있도록 개인용 수로를 연결했다. 반면에 물이 나오지 않는 곳에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공공 식수대에 의존해야 했지만, 가뭄이 들면 그마저도 말라 붙었다. 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값을부르는 물장수들에게서 물을 사야만 했다. 아구아스 리브레스, 자유의 물이라는 뜻을 지닌 그곳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너는 늘 전부를 원하니? 어머니 목소리에 생각이 중단된다.
어머니가 데친 근대 뿌리의 껍질을 벗겨 썰던 모습이 기억난다.
근대와 쌀막한 칼을 쥔 손, 얼룩진 손가락과 보랏빛으로 반짝이던진홍색 단면, 그 색의 강렬함은 어쩐지 지금 당장과 하루하루에 집중하던 어머니의 강렬함하고 잘 어울렸다. - P54

안쪽은 공기가 더 서늘했다. 하늘이 아니라 지하에 있는 것만 같았다. 빛도 달랐다. 밖에서는 반짝이고 투명하던 빛이 터널 속으로스며들면 금색으로 변했다. 둥근 천장에는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석둥 모양으로 만든 작은 탑이 십오 미터마다 하나씩 있었다. 원경속으로 점점 멀어지는 석등을 통해 빛이 금색 커튼처럼 쏟아졌고,
그 커튼은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소리도 달랐다. 두 개의 현무암 송수관을 따라 망이 다구아로 흘러가는 물이 고요함 속에서 찰락찰락, 물을 핥아먹는 고양이의 혓바닥처럼 불연속적으로 찰락거리는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는지는모르겠다. 어쩌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십오 년 동안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면 자식들의 시간은 두 배로 빨라지거나 가속이 붙을 때가 많다. - P62

마침내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말했다. 호의를, 존!
어머니는 첫번째 석등에서 쏟아지는 빛의 폭포를 향해 걸어갔다.
양쪽 송수관 수면에 반사되는 빛이 그 물에 띄운 초처럼 출렁거렸다. 어머니가 금빛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커튼처럼 어머니의 몸을 가렸고, 빛 밖으로 다시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 때문에 몸은 더 작아졌다. 걸음걸이는 점점 가벼워지는것처럼 보였다. 멀어질수록 더 활기차졌다. 어머니는 그 다음 금색커튼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나왔을 땐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숙여 어머니를 따라 흐르는 물속에 손을 담갔다. - P63

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사진 중에 아마 1980년대 초반, 그러니까 그가 자신의 ‘고국들‘ 가운데 한 곳이라고 주장했던 제네바에서생을 마감하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기 한두 해 전에 찍은 듯한 사진이 한 장 있다. 사진을 보면 그가 거의 실명했다는 걸 알 수있고, 보르헤스 자신이 시 속에서 종종 언급했던 것처럼 실명이 곧감옥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사진 속의 그 얼굴은 수많은 다른 인생들이 깃들어 있는 얼굴이다. 동반자들이 꽉 들어찬 얼굴. 저마다의 취향을 가진 많은 남녀들이 거의 시력을 잃은 그의 눈을 통해 이야기를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욕망의 얼굴, 수세기, 수천 년을지나는 동안 시인들에게 ‘익명‘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대여했을 법한 그런 초상이다.
제네바는 살아 숨쉬는 사람만큼이나 모순적이고 불가사의한 도시다. 이 도시의 신분증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 국적: 중립, 성별:여성, 나이: (신중함이 개입되는 항목이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임. 혼인 여부: 별거, 직업: 옵서버, 신체적 특징 : 근시로 인해 약간 - P65

구부정한 자세 비고: 섹시하고 신비로움.
유럽의 도시들 가운데 천혜의 환경이 이정도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곳은 톨레도뿐이다. (도시 자체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톨레도를 생각하면 엘 그레코가 그린 풍경이 떠오르는 반면에, 제네바는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그림이 그려진 적이 없고, 이곳의 상징이라고 해 봐야 호수 위로 물을 뿜어내는 장난감 같은 대형 분수 하나뿐인데, 그것조차 할로겐 램프처럼 꺼졌다 켜졌다 한다.
제네바 하늘의 구름은 바람에 따라 다르지만 ㅡ바람 중에서도 건조하고 따뜻한 편과 차가운 북동풍인 비즈가 가장 악명이 높다-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프랑스, 또는 독일의 라인 계곡 아래쪽, 베네룩스 삼국과 발트해에서 흘러온다. 가끔은 저 멀리 북아프리카나폴란드에서 오기도 한다. 제네바는 수렴의 장소이고, 스스로도 그사실을 알고 있다. - P66

사실을 알고 있다.
몇 세기 동안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들은 나중에 오는 여행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편지와 안내문과 지도와 목록과 각종 메시지를 제네바에 남겼다. 제네바는 호기심과 자긍심이 뒤섞인 심정으로 그것들을 전부 읽는다. 그러고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태어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모든 열정을 살아내야만 하는 모양이구나. 열정이란 눈을 멀게 하는 불운인 것을, 제네바의 중앙우체국은 대성당만큼이나 웅장하게 설계되었다.
20세기초에 제네바는 유럽의 혁명가들과 반역자들이 정기적으로모이는 장소였다. 지금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위한 만남의 장소가 된 것처럼, 국제적십자사, 유엔, 국제노동기구, 세계보건기구, 세계교회협의회 등은 아예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인구의 사십 퍼센트가 외국인이다.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여기서 살며 일하는 사 - P66

람은 이만오천 명이다. 유엔에는 부서간의 문서 전달을 위해 상근적으로 일하는 사람만 스물네 명쯤 된다.
혁명을 꾀하는 이들에게 고뇌하는 국제 협상가들에게, 그리고오늘날의 경제 마피아들에게 제네바는 평온함과 석회 맛이 나는 화이트 와인과 호수 여행, 눈, 예쁘게 생긴 배, 수면에 비친 황혼,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볼 수 있는 나무에 내린 흰 서리, 세상에서 제일안전한 승강기, 호수에서 잡아 올린 북극의 물고기, 밀크 초콜릿, 그리고 한없이 사려 깊으며 세련되기까지 해서 차라리 도발적인 안락함을 제공해 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제공하고 있다. - P67

보르헤스는 열다섯 살이던 1914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가 전쟁이 나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됐다. 보르헤스는 칼뱅 고등학교를 다녔다. 누이는 미술학교에 다녔다. 아마 그가 첫 시를 쓴 것도 아파트가 있었던 페르디난드 호들러 거리와 학교를 걸어서 오가는 동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지루해 한다. 지루해 하면서도 좋아한다. 영원한 탈출을 꿈꾸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보다는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니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들은 즐거운, 때론 대담하기까지 한 여행자들이다. 여행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평소처럼 정성껏 준비한 저녁 식탁에 언제나처럼 맞춤법 하나 틀리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모든 음식도 늘 제때 준비되어 애매한 미소를 곁들여 나온다. - P67

공원묘지엔 너른 잔디밭과 큰 나무들이 있었다. 방금 깎은 풀밭위를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깡충거리며 가려 딛고 있었다. 보스니아 사람인 정원사에게 방향을 물었다.
안쪽 구석에서 마침내 무덤을 발견했다. 단순한 묘석 하나, 그리고 직사각형으로 깔린 자갈길 위에는 고리버들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흙을 담아서 줄기가 굵고, 잎이 작고, 열매가 달린 아주짙은 녹색 관목을 심어 놓았다.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아내야 한다. 보르헤스는 엄밀함을 사랑했으니까. 엄밀함은, 글을 쓸 때 그가선택한 바로 그 지점에 정확히 착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는 평생 동안 정치에 빠져 추문에 휘말리고 번민했지만, 글을 쓰는 지면 위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 P75

나는 상처를 합리화해야 한다.
나의 행운이나 불운은 상관없다.
나는 시인이다.

보스니아 정원사에게 물어 보니 회양목이라고 했다. 그걸 몰라봤다니. 오트 사부아의 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가지를 성수에 담갔다가 사랑했던 이의 시신에 마지막 세례를 하며 명복을 빌 때 사용한다. 이것이 성스런 나무가 된 까닭은 부족함 때문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종려주일(부활절 바로 전 일요일-역자)에 쓸 버드나무 잎이늘 부족했고, 그래서 상록수인 회양목 가지를 대신 쓰기 시작했다묘석엔 그가 1986년 6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었다. - P76

나는 옷으면서 남은 장갑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카티아도 역시웃으면서 내 뒤에 올라탔다. 신호등이 대체로 녹색으로 이어진 덕분에 금세 론 강을 지나 도시를 뒤로 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고개를 올라갔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에 미지근한 공기가 와 닿았고, 굽은 길에서 카티아는 몸을 기울였다. 카티아가 얼마 전에 엘레아학파인 제논의 역설을 문자메시지로 보냈던 게 기억났다. "운동중인 물체는 존재하는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라죠. 제겐 이게 음악의 정의 같아요."
그렇다면 포시유 언덕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음악을 연주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오토바이를 멈추고 내려서 호수를, 알프스를, 그리고 수많은 삶이 깃든 제네바라는 도시를 바라봤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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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반 볼렌 부인은 엘킨스 경의 은밀한 대화에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장군은 눈치채지못했지만, 그는 부인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았다. 이제는 존경받으며 부유하게 살고 있는 클레르 반롤렌 부인의 몸속 깊은 곳에는 미끄러운 바닥을 위태롭게 걷듯이 불안에 떨며 조심히 다가가는 그 어두운 곳에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 어느 사건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 하나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가끔 꿈에 나타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공포, 자신의과거가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클라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삼십 년 전, 여자는 교묘한 수단으로 유럽을 벗어나 미국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안토니 반 볼렌을 만나 결혼했다. 안토니는 성실하기는하나 속물근성이 있는 평범한 남자였다. 클레르는 두 사람의 만남에 이바지했던 자기 돈의 출처를 안토니에게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 2천 달러의 돈이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 P193

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없었다.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지는 압박감과 적대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P217

으로 들어온 크리스티네는 밤새도록 꼼짝도 하지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단 하나생각에 사로잡혀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머릿속은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는 통증이 아니라, 마취 상태에 있는 환자가 살을 파고드는 외과 의사의 칼을 어렴이 느끼며 체험하는 둔통처럼 깊은 곳에서 둔탁하게박동하는 고통을 느꼈다. 여자는 실내를 가득 채운 침묵에서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보고 앉았다. 마비된 의식 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꿈처럼 흘러간 아흐레 동안 그녀의 자리를 차지했던 새로운 존재, 그녀와 똑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졌던 가공의 존재,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었던 폰 볼렌 양이 여자 안에서죽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얼어붙은 듯 뻣뻣한 목에 다른 여자의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을대담하게 바른 채 ‘폰 볼렌‘이라는 여자의 방에 앉아 있었다.  - P227

분한 마음에 얼어붙은 듯 의자에 앉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벽과 문을 통해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태평하게 자는 사람들의 숨소리도 쾌락에 몸부림치는 연인들의 비명도, 병든 사람들의 신음도,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발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벌써 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새벽산들바람 소리도 듣지 못했다. 방에, 호텔에, 우주에 혼자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녀의 육체는 마치 절단된 손가락처럼 여전히 온기는 남아 있지만 감각도 힘도 없이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같은 잔인한 삶이었다. 이대로 조금씩 조금씩 굳어가다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여자는 폰볼렌양의 뜨거운 심장이 마침내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는 듯 심장 박동 소리에 귀 기울이며 굳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 P229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잔크트 펠텐 역에 도착한 크리스티네가 지친 몸으로 열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플랫폼을 가로질러 급히 달려왔다. 스탈러 선생이었다. 여기서 밤새 기다렸을 것이다. 크리스티네는 한눈에 사태를파악했다. 그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손을 내밀자 남자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안경 너머 그의 두 눈이 어쩔 줄 몰라 하며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네는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쩔쩔매는 그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는 작은 동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고통도, 슬픔도, 놀라움도 없었다. - P237

여러 사람이 짐을 손에 들고 어헤헤 베고 내려가자, 나무 총계는 발을 디딜 때마다 심위치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마침내 모두 떠나다. 그들이 가자마자 크리스티네는 창문을 활짝 열했다. 그동안 냄새에 숨이 막혔다. 퀴퀴한 담배 냄제 싸구려 음식 냄새, 축축히 젖은 옷에서 나는 쉰 냄노파의 공포와 걱정과 한숨이 밴 냄새, 소름 끼치는 가난의 냄새.….
‘이런 곳에서 계속 살아야한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어디엔가 다른 세상이진짜 세상이 있는데 왜 매일 여기서 숨을 쉬어야 하지?‘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여자는옷을 입은 채 침대에 풀썩! 몸을 던져 누웠다. 자신도모르게 가슴속에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나자, 베개를 입에 물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눌렀다.
‘인간이 싫다. 세상이 싫어. 나도 밉고,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 꼴도 보기 싫다.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정말 지긋지긋한 삶이야.‘ - P247

악의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추하고, 사악하고, 적대적으로만 보였다. 여자는 매일 아침 증오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것은 연기에 그을린 다락방 천장의 대들보였다. 낡은 침대, 싸구려 누비이불, 등나무 의자, 깨진 물주전자가 놓여 있는 세면대, 벗겨진 벽지, 판자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모든 것이 지지리도 궁상맞고 흉측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명종소리는 여자의 귓전을 때리며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었다. 해진 속옷, 역겨운 검은색 원피스...... 원피스의 소매는 이미 오래전에 찢어졌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옷을 고쳐? 이곳 얼간이 농부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아주 잘 차려입은 거야. 어서이 구역질 나는 방을 나가 출근하자‘ - P253

프란츠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잘 알고 있어. 자네는 할 수만 있다면 국립은행을 털어서라도 나를 장관으로 만들어 주고 싶겠지.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나는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 P293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언젠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다버리거나 토해낸 찌꺼기를먹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때까지 나는 계속 그렇게 할 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이해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정열이 담긴 큰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소리쳤다. 크리스티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이남자와 똑같은 감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넬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침내 화풀이할 기회를 잡은것이다. - P294

"휴가를 못 갔다고? 스위스의 초호화판 호텔에서 실컷 놀다 와서 왜 여기서 불평을 해?"
"나는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았어. 전쟁이 계속되는동안 쉬지 않고 불평했던 사람은 언니였어. 그리고 스위스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내게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거야. 나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를 이제야 알았어,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전쟁이 내게서 무엇을빼앗아 갔는지, 우리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조차 모르고……"
여자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낯선 남자의 시선을 느끼자,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초면의 남자앞에서 속내를 너무 많이 드러냈음을 깨닫고 목소리를낮췄다. - P295

저는 남의 행복을 시샘하지않아요.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남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면 자신은 왜 그렇게살지 못하는지, 자책하듯 스스로 묻곤 하죠.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저의 행복을 비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왜저는 행복하지 않은지를 생각할 뿐이죠."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크리스티네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줄곧 생각해 오던 것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막연하게 느끼던 것들을 남자는아주 명료하게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고 싶지는 않다고, 단지 내 권리를 찾고 내 인생을 살고 싶을뿐이라고, 다른 이들이 따뜻한 방 안에 있는 동안 추운바깥에서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서 있지 않기를 바랄 뿐‘
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 P303

여자는 남자에게 휴가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행 중에 겪었던 분노와 수치, 감격, 변신 등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풍요로움에 도취했던 경험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비록 괴롭기도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초라한 가방 하나만 들고 허름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호텔 프런트 종업원이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했던 일도 들려주었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여자의 말을 말없이 경청했다. 벌름거리는 콧방울만이 남자가 숨을 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듯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고, 푸대접받았던 여자의 분노에 공감했다. 한 번 댐이 무너지면 흘러가는 물을 막을수 없듯이 여자는 원래 말하고자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겨운 시골 마을에 대한 중 - P314

오, 아까운 청춘을 앗아간 전쟁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수 없이 생생하게 터져 나왔다. 여자는 누구에게도 그토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몸을 점점 깊숙이 웅크렸다.
"미안합니다." 마침내 남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전했다. "제가 어처구니없이 아가씨를 비난했군요.
시도 때도 없이 미련하게 화를 내고,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무나 걸리기만하면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듯이 퍼붓게 되는군요. 그리고 저 혼자만 전쟁하러 갔던 것처럼 착각하조 수백만이나 되는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데 저는 매일 아침 일터로 가면서, 집을 나서는 사람들을 관찰하곤 합니다. 잠에서 덜 깨어 얼굴은 지치고 창백하죠. 원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터로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면 다시 전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표정이나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겁죠. 아무 이유 없이, 혹은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모두 지쳐있어요.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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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니 마치 욕조에서 바로 나온 듯 상쾌했다. 행복한 기분에 온몸의 신경이 파르르 떨렸다. 이모부의 손을 잡고 몸을 굽혀 감사의 입맞춤을 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여자는 객실 안에서 혼자가 되었다.
사방이 돌연 조용해지고 혼자 있자니 무섭고 불안했다. 드레스 아래 맨살이 화끈거렸다. 여전히 흥분에 들떠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넓은 방이 이제는 비좁아 보였다.
여자는 발코니 문을 열었다. 드러난 어깨 위로 눈이 내렸다. 발코니로 나갔다. 추위로 몸이 떨리긴 했지만 기분이 상쾌했고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광활한 풍경을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심장이 거대한 밤하늘 아래서고동쳤다. 방 안의 고요함보다 더 적막한 자연 그대로의고요함이 느껴졌다.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없는, 부드러운 고요함이었다. 한낮에 빛나던 산들이 이제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다. 산들은 반짝이는 흰 눈에 덩치가 큰 까만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표면이 고르 - P110

지 못한 노란 진주 같은 보름달이 높이 떠 있었다. 음산하고 차가운 달빛을 받아 안개 자욱한 계곡의 윤곽이희미하게 드러났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녀가 아는 어떤 것과도 다른 신성하고 고요하고 부드럽게사람을 압도하는 풍경이었다. 차츰 고요 속으로 빠져들자 흥분된 마음도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계곡 아래에 있는 교회의 종소리였다. 소리는 계곡 암벽의 왼쪽 오른쪽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여자는 마치 자신이 그 종이라도 된 듯 깜짝놀랐다. 그리고 안개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금속성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숨을 죽인 채 종소리의 수를 셌다. 아홉, 열, 열하나, 열둘, - P111

‘자정이다! 말도 안 돼. 이제 겨우 자정이라니? 수줍을 많고, 겁 많고, 내성적이고, 깡마르고, 보잘것없고, 소심한 영혼을 가진 여자가 도착한 지 이제 겨우 하루, 아니 열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야?‘
그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 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 P111

‘시간 맞춰 일하러 가야 해! 늦으면 안 돼!‘
지난 십 년 동안 습관이 되어버린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 자명종이 울릴 거야……. 다시 잠들면 안 돼... 책임감! 책임감을 잊어선 안돼! 당장 일어나자. 여덟시에 업무가 시작되잖아. 그전에 일어나서 불 피우고, 커피 끓이고, 우유와 빵 사 오고, 방을 정돈하고, 어머니 붕대를 갈아주고, 점심 식사 준비도 해놓아야 하잖아?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는데 ...... 아! 맞아. 식료품 가게 여주인이 어제 외상 갚으라고 했었지...... 안돼, 자면 안 돼, 정신 차리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야해...... 그런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있나? 자명종이 울리질 않아....... 고장 났나? 태엽 감아 놓는 걸 깜빡했나? 자명종 어디 있지? 방 안에 빛이 벌써 환한데·· 세상에! 늦잠을 잤나보다. - P112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여자의 눈길이 천장을 더듬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연기에 그을리고 거미줄이 무성하며 경사진 다락방의 우중충한 잿빛 천장과 갈색 나무 대들보는 어디 가고 황금색 테두리에 푸른색과 흰색으로 깔끔하게 채색된 천장이 보였다.
‘이 빛은 전부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간밤에 다락방에 새 창문이 생겼을 리도 없는데……. 여기가 도대체어디야?‘
여자는 자기 손을 보았다. 낡은 갈색 담요가 아니라, 붉은색 꽃으로 수놓은 새파란 푸른색 담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니야(첫 번째 충격)! 이건 내 침대가 아니야(두 번째 충격!) 여긴 내 방이 아니잖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기억을 되찾았다(세 번째 가장 큰 충격).  - P113

휴가, 여행, 자유, 스위스, 이모, 이모부, 으리으리한 호텔!
걱정할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다. 해야 할 일도 없고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다. 자명종도 없다! 불을 지피야 할 난로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몰려올 사람들도 없다. 십 년 동안 그녀의 생활을 짓밟아 온 끔찍한 굴레가 처음으로 벗겨졌다. 온몸에더운 피가 흐르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보드랍고 따뜻한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어도 괜찮았다. 커튼을 젖히기만하면 방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온기가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눈이 다시 감겨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그녀에게는 게으름 피울 권리가 있다. 꿈을 꾸어도 되고, 기지개를 켜도 되었다. 머리맡에 있는버튼을 눌러 종업원을 부를 수도 있다(여자는 이모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 P114

이 매혹적인 세계에서는 수만 번이라도 서비스를 주문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원한다면 방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버튼을 눌러도 되고, 안 눌러도 된다. 일어나도 되고, 안 일어나도 된다. 다시 잠을 자도 되고, 침대에 앉아 있어도 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되고, 뜨고 있어도 된다. 마음껏 공상에 잠겨도 괜찮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된다.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 시간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있는 게아니다. 미친 듯 돌아가는 시간의 바퀴를 따라갈 필요가없다. 노를 배 안에 들여놓은 배처럼 눈을 감고 시간에몸을 맡기며 둥둥 떠가면 된다......
크리스티네는 꿈꾸듯 그 새로운 느낌을 즐기며 누워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일요일 아침 교회 종소리처럼몸에서 혈관이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 P115

약한 시간 후에 산 경사면 한가운데 볼록하게 튀어오른 전망 좋은 자리에 다다르자, 여자는 풀밭 위로 몸을 던졌다.
‘이것으로 충분해!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묘하게 행복했다. 눈꺼풀 아래로 피가 고동치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드러난 피부가 쓰라렸다. 하지만 고통에 가까운 이런 느낌마저 새로운 재미로 여겨졌다. 여자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온몸을 뒤틀게 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젊음과 생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피가 이토록 힘차게 혈관 속을 흐르고, 맥박이 이토록 빨리 뛸 수 있는지 몰랐다. 한계를 뛰어넘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서도 이토록 민첩하고 힘이 넘칠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상쾌한 기분으로 얼음처럼 차고 향기로운 알프스의 이끼를 손으로 뜯으며, 파노라마처럼펼쳐지는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 P119

공상에 잠겼다. 깨어 있는 상태로 꿈을 꾸는 듯했다. 한두 시간 동안 여자는 그렇게 맹렬한 감정의 격동과 자연의 강하고 격정적인 움직임을 온몸으로 음미했다. 그때 입술을 태워버릴 듯 날카로운 햇빛이 여자의 얼굴에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산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노간주나무, 용담, 세이지 등 꽃 몇 송이를 땄다. 날씨가 추워서 꽃잎 사이사이에 수정 같은 얼음이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관광객답게 차분하게 걸어가다가, 이내 중력에 몸을 맡기면서 빠르고 대담하게이 돌에서 저 돌로 겅중겅중 뛰어 내려갔다. 가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고, 전에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리저리 굽은 길을 돌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여자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골짜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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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난방이 안 되어얼음처럼 차가운 객차를 타고 가 늦은 저녁에야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빨래하고, 옷을 꿰매고 깁고, 다렸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일한 후에야, 옆으로 넘어진 가방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1918년,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지만 전쟁은 여전히계속되었고, 걱정 없고 자유로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거울을 보거나 골목길에 고개를 내밀 시간도 없을만큼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크리스티네의 어머니는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눅눅하고 쉴만한 공간이 없는 병원에서 일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에게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길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도 병원에서 너무 오랫동안 일하느라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매일 끔찍하게 사지가 절단된 70~80명 환자의 입원 서류를 타이핑하느라몸 한구석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 P43

1919년, 여자가 스물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끝없이 쏟아내는 법령 아래 숨었을 뿐이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전쟁 공채와 지폐의 방공호 아래로 교활하게 기어 들어가 숨어있던 가난은 뻔뻔스럽게 기어 나와 우묵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쟁의 시궁창에 남겨진 것들을 집어삼켰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던 겨우내 하늘에서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돈다발이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눈은 온기 있는 손에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돈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녹아버렸다. 다시 시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나무 굽을 댄 구두로 바꿔 신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 버렸다.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항상 너무 늦었다. 생활이 수학이 되고,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숫자들의 소용돌이가 되고,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시커멓고 탐욕스런 진공 속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바람이되었다.  - P44

스물여섯 살의 크리스티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런처녀들의 형태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자존심과 욕심, 빈틈없고 대담한 시선, 도발적인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남자아이들이 아무리 노골적으로 몸을 더듬어도 웃기만 하는 처녀수치심도 없이 남자아이들을 숲속으로 이끌고 가는처녀들과 마주치곤 했다. 여자는 그들을 볼 때마다 심한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충족하고,
성에 대해 개방적인 전후 세대 젊은이들과 비교할 때자신은 너무 늙었고, 너무 지쳤으며,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압도당한여자는 경쟁하고 싶은 마음도, 경쟁할 능력도 없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경쟁하거나 애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조용히 몽상하고, 묵묵히 일하고, 창가의 꽃에 물이나 주면서 차분히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바라는 것도 갖고싶은 것도 없이, 여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새롭고 신나는 일도 찾지 않았다.  - P47

바위투성이 우뚝한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사람을 압도하는 낯설고 거대한 풍경이었다. 크리스네가 그동안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알프스산맥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놀라움으로 몸을 떨었다. 동쪽에서는 아침 햇살이 산봉우리를 뒤덮은 만년설을 비추어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희고 깨끗하고 생경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고 날카로워서 여자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라운 광경을 좀더 가까이 보려고 손으로 유리창을 누르자, 창문이 왈칵 열렸다. 찬바람에 날려 객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과 함께 얼음처럼 - P58

차고 유리처럼 예리한 공기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여자의 입을 통해 폐까지 들어왔다. 생애 가장 깊고도 깨끗한 호흡이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렸다. 가슴을 부풀리며 들이마신 시원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 정말 대단해!‘
시원한 바람을 맞아 기분이 상쾌해진 여자는 고개를좌우로 돌리며 차창밖풍경을 감상했다. 점점 더 흥미를 느끼며 화강암 산비탈을 따라 눈 덮인 산 정상에서산허리까지 바라봤다. 곳곳에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폭포에서는 흰 물줄기가 계곡으로 쏟아져내리고 산허리에는 아담한 돌집 몇 채가 암벽 사이 깊고 좁은 틈새에 새집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산 정상 위에서는 독수리 한 마리가 서서히 선회하고, 그 위로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여자는 이처럼 강렬하며 행복감에 취하게 하는 대자연의 위력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 P59

어린 시절, 여자는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열이 내리자 어머니는 희고 달콤한 아몬드 밀크를 가져왔다. 아버지와 오빠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온 가족이 그녀를 돌보며 분주했다. 가족 모두 그녀에게 다정했다. 옆방에서는 카나리아가 지저귀고, 침대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학교에 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비록 힘이 없어서놀 수는 없지만 침대 위에는 장난감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니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미용사들의 서비스를 마음껏 즐겨보자..……‘
여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어린 시절의 그런 아늑함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생각난 것이다. 피부가, 따뜻해진 관자놀이가 기억 - P86

불러내고 있었다. 손을 민첩하게 놀리던 미용사가 이마음 "좀더 짧게 자를까요?" 같은 질문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듯 약간 거만하게 이런저런 요구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앞에 있는 거울을 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용사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
빛나는 유리병에서 나오는 향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위로 흘렀다. 면도날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다. 머리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진 느낌, 목이 시원하게드러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비된 듯, 꿈같은 느낌이 기분 좋게 이어졌다.  - P87

그것은 여자가 꿈도 꾸어보지 못한, 노동도 가난도 없는 세상이었다. 이모는 여자에게 산봉우리와 호텔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나치면서 만나는유명인 호텔 손님들의 이름도 말해주었다. 여자는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외심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경험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마침내 이모가 시계를 보았다. - P89

축복받은 어느 먼 나라에서 온 와인이리라.
얇은 크리스털 잔에 담긴 와인이 투명한 호박만큼 눈부시게 빛났다. 와인은 달콤하고 시원한 크림처럼 목구멍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처음에 크리스티네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모금만 마셨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에 한껏 기분이 고조된 이모부가 줄곧 잔을 채워주었다.
크리스티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많아졌다. 코르크 마개를 뽑은 샴페인처럼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용돌이치듯 쾌활하게 터져 나오는말에 자신도 놀랐고, 그동안 마음을 가두고 있던 ‘불안‘
이라는 견고한 벽이 단숨에 무너진 듯했다.
‘이런 곳에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모, 이모부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주위에 말끔하고 화려하게차려입은 사람들도 한결같이 세련되고 품위 있어. 아아,
세상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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