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이다 그가 휘파함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

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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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기쁘지도 않아?"
‘어머니 말씀이 맞아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왜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떨리지도 않을까?‘
여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올 대답에 귀 기울였다. 하늘이 내려준 놀라운 선물을 받으면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있을 법한데, 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혼란스러웠을 뿐. 이상하게도 두렵기만 했다.
‘이상하다.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우편물을 분류하다가 노르웨이의 잿빛 피오르 해안이나 프랑스 파리의가로수길, 이탈리아 소렌토 해변, 미국 뉴욕의 빌딩 사진이 인쇄된 그림엽서를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수백 번도 넘지 않았던가? 나는 언제쯤 이런 곳에 가볼수 있을지, 내게도 차례가 올지,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우체국 안이 텅 비어 있는 오전 시간 내내나는 무엇을 꿈꾸었지? 언젠가는 이 의미 없고 단순한일에서, 이 지겨운 시간과의 경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산산이 조각나고 갈기갈기 찢긴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가? 단 하루만이라도 똑같이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 P34

인정사정없이 잠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에 놀라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방을 덥히고, 우유와 빵을 집어삼키고, 서둘러 우체국에 도착하면 우편물에 소인을 찍고, 서류를작성하고, 전화를 받고, 업무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다림질하고, 빨래하고, 음식 만들고, 해진 옷을 수선하고, 어머니를 돌보고, 그리고 마침내 피로에 지쳐 죽은듯이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을 바로 이 책상에서, 둥지처럼 비좁은이 의자에서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꿈꾸었어.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어. 난 이곳에서벗어나 자유롭게 떠날 거야. 그런데 어머니 말대로 나는왜 기쁘지 않을까? 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걸까?‘ - P35

여자는 경직된 눈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리에 앉아, 낯설고 차가워 보이는 벽을 응시하며 마음에서어떤 기별이 오지 않을지, 늦게나마 설레는 느낌이 들지 않을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무심결에 호흡을 멈추고 마치 임신한 여자처럼 머리를 깊이 숙인 채 몸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의 몸은 새들이 떠나간 숲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스물여덟 살의 여자는 행복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깨달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다 잊어버린 한때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외국어와 - P35

내가 최근에 행복을 느꼈던 게 언제였지?‘
여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숙인 이마에 가느다란두 줄의 주름살이 생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오래된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뿌연 거울을 통해보이듯이 어떤 모습 하나가 떠올랐다. 짧은 면 치마를입고 어깨에 멘 책가방을 흔들며 날씬한 다리를 움직여걷는 어느 금발 소녀의 모습, 친구 열두 명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다. 빈 교외의 공원에서 열렸던 크리켓 경기에서 공이 하늘 높이 올라갈 때마다 웃음소리도 함께 솟구쳐 올랐다. 신나게 재잘대던 맑은 목소리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밝고 자유로웠는지 새삼 기억났다. 즐거운 웃음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소녀의 몸속에서 피부를 간질이고 핏속에서 소용돌이치고 들끓었다. - P36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진정 자유롭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어 수업 시간, 우스황스럽게 들리는 프랑스어 단어가 나오거나 누가 발음을 엉터리로 하면 소녀들은 두 손으로 의자를 움켜쥐고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소녀들에게는 웃음의 물결이 퍼졌다. 선생님의 말더듬이 버릇, 거울을 보며 찡그린 얼굴, 제 꼬리를물고 빙빙 도는 고양이, 거리에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는경찰관……. 아무리 사소하고 의미 없고 작은 일에도 소녀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건자연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소녀는 자는 동안에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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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1881-1942)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유대인 부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섬유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 모리츠는 독일어 외에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은행가의 딸인 어머니 이다 역시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여성으로서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 이처럼 좋은 환경과 빈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츠바이크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오페라를 감상하거나 많은 고전작품을 탐독하면서 문학적 감수성과 예술적 재능을 키워 나갔다.
1900년에 츠바이크는 빈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업보다는글쓰기에 몰두하면서 작가로서 준비 작업을 시작한다. 일찍이 보들레르와 베를렌의 시에 심취한 츠바이크는 이듬해인 1901년 시절은빛 현』을 발표하지만, 이후 시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소설과 전기(또는 평전)에서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소설집 에리카 에발트의 사랑을 시작으로 단편소설 「불타는 비밀」, 「모르는 여인의 편지」 「광란, 소설집 ‘감정의 혼란 등을발표하며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츠바이크 소설의 매력은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에서 연유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내적인 감정과 심리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서술하는 그만의 특유한 재능에서 나온다. 여기에 시적 감각을 바탕으로 하는성애 묘사와 에로티시즘적 소설은 동시대의 어느 산문작가도 따를수 없을 만큼 당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엔 히틀러를 피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브라질로 건너갔다. 하지만 전쟁과 나치즘으로 인해 점차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노트에 적은 뒤, 부인과 함께 약물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하게된다. 1942년 2월 22일, 그의 나이 60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마을 우체국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그래서 한 곳만 보면 다른 우체국에는 가볼 필요도 없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시절에 획일적으로 제작한 조악한 상태의 비품들로 똑같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우체국이나 경직되고 인색한 관료주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 눈 덮인 높은 산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알프스산맥 티롤 지방의 가장 외진 산골 마을 우체국에서조차 싸구려 담배와 먼지 쌓인 서류 냄새가 퀴퀴하게 배어 고리타분한 관청냄새가 난다. 우체국 내부 구조도모두 똑같다. 똑같은 비율로 직원의 업무 공간과 이용자 공간을 나무판자로 나눠놓고, 판자벽에는 칸막이 유리를 끼워놓았다. 시민이 공공장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탓에 우체국 이용자가 앉을 의자는 물론 다른 편의시설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P11

엄밀히 말하자면 이 목록에는 매일 아침 8시에 유리칸막이를 열고, 사용할 비품들을 준비하고, 우편행낭을열고, 편지 봉투에 소인을 찍고, 우편환을 지급하고, 영수증을 작성하고, 소포의 무게를 달고, 일반인은 알아보기 어려운 이상한 글씨를 소포에 휘갈겨 쓰는 데 필요한 색연필들을 준비해 놓고, 전화를 받거나 전신기의 스위치를 켜는 직원의 이름도 기재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우체국 이용자들에게 우체국 직원 혹은 우체국장으로 알려진 이 직원의 이름을 목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직원의 이름이 기재된 서류는 중앙우편국 어느 부서 어느 공무원의 서랍 안에 보관되어있다. 다른 우체국, 다른 직원의 이름과 함께 기재되어있는 그 직원의 이름은 담당자가 바뀌면 다른 이름으로교체되고, 항시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 P14

건물이 낡으면허물어져 새 건물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나라 관료주의는 항상 똑같은 것만 고집하면서 세속의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체국 비품이 소진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훼손되었으면 상급 관청에 요청한다. 그러면 역시 똑같은 제품이 공급된다. 그렇게 하여,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막강한 권력의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용이 되는 알맹이는 없고, 형식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다. - P15

우체국 벽에는 달력이 걸려 있다. 매일 한 장씩, 일주일에 일곱 번, 한 달이면 서른 번 혹은 서른한번 찢어버리는 달력이다. 12월 31일이 되면 새달력을 요청하지만 언제나 똑같은 판형, 똑같은 크기, 똑같은 서체의달력이 지급된다. 해는 바뀌어도 달력은 바뀌지 않는다.
책상 위에는 가운데 세로줄이 있는 경리장부가 놓여있다. 왼쪽을 다 채우고 나면 오른쪽을 사용한다. 마지막 장까지 다 쓰고 나면 역시 똑같은 형식 똑같은 크기의 새 장부를 사용하지만, 먼저 쓰던 장부와 전혀 구분할 수 없다. 비품이 분실되면 우체국 업무만큼이나 변함없이 다음 날 즉시 똑같은 제품을 똑같은 나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책자, 연필이든, 클립이든, 서류 양식이든 항상 다른 물건이지만 항상 똑같은 물건이다.
관료주의 관공서에서 아무것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듯이, 아무것도 새로 추가할 수 없다. 이곳에선 꽃이 시들지도, 피지도 않는 삶이 계속된다.  - P15

1925년, 수도 빈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 크렘스 시에서 믿지 않은 곳에 있는 보잘것없는 마을 클라인-라이틀링의 우체국, 이곳의 교체할 수 있는 정부 ‘비품‘은여성이다. 당국에서는 그냥 ‘우체국 여직원‘이라고 부른다. 이 우체국이 인구가 적은 시골에 있기 때문이다. 수수하지만 호감이 가는 한 젊은 여성의 옆얼굴을 유리칸막이를 통해 볼 수 있다. 다소 얇은 입술에 핏기 없는창백한 얼굴, 피곤한 탓인지 눈 밑이 검다. 저녁 무렵 여자가 사무실 전깃불 스위치를 켜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도 여자의 이마와 눈가의 주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젊은 나이의 이 여자는 창가에 놓인 접시꽃과 오늘 재미 삼아 철제 세면대 위에놓아둔 양딱총나무 어린 가지와 함께 클라인-라이플링우체국에서는 가장 신선한 비품이다. 그녀는 적어도 15년 정도는 이 우체국에서 더 근무할 수 있을 것이다.  - P16

그런데 언니가 자신은 갈 수 없고 딸을 보내겠다는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클레르는 제복을 입고 장대처럼 서 있는 호텔 보이에게 손짓했다. 보이는 그녀에게 다가와 진보의 내용을 받아 적고는 모자를 귀까지 덮어쓰고 우체국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잠시 후 전신기에서 발신한 문자 부호는 천장의 구리 선을 타고 우체국 밖으로 나가 순식간에 국경을 넘고, 수천 개의 산봉우리가있는 포어아를베르크를 지나, 작은 국가 리히텐슈타인과 계곡이 많은 티롤산맥을 거쳐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빙하를 타고 내려가 도나우 계곡을 가로지르고 린츠에 있는 변압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신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사람들이 ‘빠르다‘라고 말할 틈도 없이 번개 같은 속도로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 지붕에 설치된 전기 회로망을 거쳐 전보 수신기로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한 여인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그녀가 놀라고 당황하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게 했던 것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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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으로 인해 사람들이 들끓는 바람에 새로 부흥한 이지역은 현재로서는 라투르 신부의 관할아래 놓여야 할 것 같다고 캔자스의 주교는 말하고 있었다. 라투르 주교의 거대한대교구는 이미 남쪽과 서쪽으로 수천 평방마일 확대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북쪽으로 아직도 미개지이면서 갑자기 중요한 지역이 된 콜로라도 로키 산맥까지도 떠맡아야할 판이었다. 리벤워스의 주교는 라투르 주교에게 그곳으로가능하면 빨리, 이 온갖 종류의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을 한껏 잘 지켜 나갈 수 있는 신앙심이 독실할 뿐 아니라 기지가있으며 똑똑하고 유능한 사제를 한 명 보내 달라고 간청하고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사제는 침구와야영장비, 의약품과식량, 몹시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옷 등을 챙겨가야 한다고 - P275

했다. 덴버에는 담배와 위스키 말고는 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곳엔 여자들도 없고, 요리용 화덕도 없다고 했다. 거기서 금을 캐는 사람들은 반쯤 구워진 밀가루 빵과 술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곳은 산골짜기 물조차도 깨끗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있어 열병으로 죽기도 한다고했다. 살아가는 환경은 모두 최악의 상태라고 했다.
저녁식사를 한 후에 라투르 신부는 이 편지를 서재에서 바일랑 신부에게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편지를 모두 읽었을때 그는 빽빽하게 글씨가 쓰여 있는 편지지들을 내려놓았다.
「요셉 신부, 당신은 할 일이 없다고 불평해 왔잖아요. 바로여기 당신이 할 일이 있어요.」 - P276

의 가운데 그 사막 지역에 있는 누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그에게는 가장 사랑스러웠었다. 하지만 그런 유대 관계를 깨고 작별 인사를 한 후 미지의 다른 곳으로 또다시 떠나야 하는 것이 그의 삶의 규율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요셉 신부는 그의 장화에 기름칠을 하고 발에 생긴 딱딱한 굳은살을 낡은 면도날로 도려내고 있었다. 트루카스 산맥 쪽치마요라는 멕시코인 마을에사는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성당에 있는, 말을 타고 있는조그만 산티아고 성자 상을 각별히 모시는 편이었다. 그들은이 성자가 밤마다 말을 타고 밖으로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느라 구두가 닳는다며, 몇 개월에 한 번씩 그 성자 조각상에게 새로 만든 장화를 신겨 주곤 했다. 그곳에 머물면서 요셉 신부는 자신의 손을 주님께 헌납하였는데, 이에 준하여주님께서 선교사의 발에도 특별한 축복을 내려 주셨으면 한다고 그곳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 P277

라투르 신부는 은으로 된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기적은모든 게 다 잘되는 것이 기적이지요, 요셉. 하지만 이번 일은꼭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아요. 난 당신을 친구로 내 곁에 두고 싶어서 소환장을 보낸 거였어요. 주교로서의 권위를 내개인적인 소망을 위해 쓴 거지요. 그건 이기적인 것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으로서 당연히 그럴 만한 일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같은 나라 사람인 데다가,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며 함께 추억할 일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두 친구가 이곳에 함께 왔다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야 하다니...…. 하지만그도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요. 나는 이 모든 일에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 P282

가난한 멕시코인들이 이 단순한 형상에 사랑을 쏟아 부은첫 번째 사람들은 아니라고 주교는 생각했다. 라파엘과 티티안은 그들이 살던 시대에 성모 마리아를 위해 의상을 만들었고, 음악의 거장들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고, 위대한 건축가들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성당을 지었다. 성모마리아가 지상에 태어나기 오래전, 인류의 타락과 참회 사이의 오랜 여명 속에서 이교도 조각가들은 늘 여자의 모습을한 여신상을 만들려고 애썼었다. - P287

도 있어요」바일랑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난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가 일어서더니 방을 왔다 갔다하며 주교를 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살아온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어요. 우린 오래전에, 우리가 신학교 학생이었을 때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을 해냈잖아요. 적어도 그 일들 중 몇 가지는요. 젊었을 때 꿈꾸었던일들을 실현시키는 것, 그것은 최고로 행복한 일이잖아요.
어떤 세속적인 성공도 이를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흰둥이.」 주교가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오만이나 수치심을 갖지 않고 영혼을구해 주는 위대한 사람이에요. 나는 늘 좀 냉정한데... 당신이 항상 말하듯, 학자인 척만 하는 사람인데요. 훗날 천국에가서 우리가 별들이 달린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면, 당신은 수많은 별들이 무리져 있는 왕관을 쓰게 될 거예요. 내게축복을 베풀어 주세요.」주교가 바일랑 신부 앞에 무릎을 꿇었고, 바일랑 신부가그를 축복해 주자 다시 바일랑 신부가 주교 앞에 무릎을 꿇었고, 교대로 주교가 바일랑 신부를 축복해 주었다. 그들은과거를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서로 꼭 껴안았다. - P292

언젠가 그가 선교를 위해 테스케를 방문했다가 노새를 타고 나오는 길에 시내를 따라오던 중 이곳을 우연히 지나치게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작은 멕시코인이 사는 집 한 채와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만큼 굉장히 크게 자란 살구나무로그늘이 드리워진 정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나무는 줄기가두 개였는데, 각 줄기가 사람의 몸보다도 더 굵었다. 그리고분명히 아주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열매를 주렁주렁매달고 있었다. 살구는 크고 빛깔이 아름다웠으며 굉장히 맛이 좋았다. 이 나무가 언덕을 배경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대주교는 햇살에 많이 노출되는 곳이 좋은 과일을 맺게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바위로 울퉁불퉁한 경사진 언덕으로부터 반사되는 태양의 열기가 이 나무에 똑 고르게 온도를 유지시켜 주며 양쪽에서 따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도 이렇게 양쪽에 벽이 있는 곳에서열린 복숭아가 완벽할 정도로 맛이 좋았었다. - P296

그는 그 지역의 야생화들을 집의 정원에 심어 개량하기도했다. 그는 뉴멕시코 언덕에서 무더기로 낮게 자라는 자줏빛꽃이 피는 버베나를 개량시켜 그의 정원의 한쪽 언덕을 완전히 뒤덮게 하기도 했다. 그것은 태양 아래 내던져진 거대한보랏빛 벨벳 망토 같아 보였다. 이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염색공들과 직조공들이 수 세기 동안 애써 온 미묘한 음영을지닌 색조를 띠고 있었는데, 장밋빛으로 가득 찼으면서도 라벤더 빛깔이랄 수는 없고, 거의 분홍빛이 되려는 파란빛이면서도 다시 하늘로 후퇴한 짙은 자줏빛 같은 보랏빛으로진실한 기독교의 빛깔이자 무수한 변이를 혼합적으로 가진 빛깔이었다. - P298

1885년에 한 젊은 신학교 학생인 베르나르 뒤크로가 뉴멕시코로 왔는데, 그는 라투르 신부에게 아들 같은 존재가 되었다. 늙은 대주교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몽페랑에 있는 수도원과 교실에서 종종 이야기되곤 했기에 라투르 신부는 이소년의 상상 속에 자리 잡아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오래도록 이곳에 오기를 기다려 왔었다. 베르나르는 잘생겼고머리가 비상했으며, 존경하는 상관이 지니고 있는 우수함을또한 존경할 줄 아는 훌륭한 청년이었다. 그는 라투르 신부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고, 라투르 신부의 회고담을 들었으며, 라투르 신부가 이야기해 준 추억들을 소중히여겼다.
「틀림없어요.」 주교는 사제들에게 말하곤 했었다. 주님께서 내 마지막 남은 세월 동안 나를 도와주라고 이 젊은이를내게 보내 주신 겁니다.」 - P298

뉴멕시코에서 그는 늘 젊은이처럼 깨곤 했었다. 그가 일어도 할 때에서야 자신이 점점 늙어 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가 깨자마자 처음으로 의식할 수 있는 것은붙어 들어오는 가볍고 건조한 바람이었는데, 이태양과 산 쑥과 클로버 냄새를 가져다주었다. 바왕은 누군가에게 몸이 가볍다고 느끼도록 만들며 누군가가마음속으로 어린아이처럼 <오늘이다. 오늘이야.>라고 외치도록 만들었다.
아름다운 환경, 학식 있는 사람들과의 교제, 고상한 여자들의 매력, 우아한 예술 등도 그에게 그런 느낌의 사막에서의 마음 가벼운 아침이나, 다시 소년으로 만드는 바람을 잃어버린 것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새로운 지역의 공기 속이 특질도 사람에 의해 땅이 개간되어 수확을 하게 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을 그는 주목했다. 그가 처음에 널따랗게 펼처진 지역으로 보았던 텍사스와 캔자스 지역들이 비옥한 농장지대로 바뀌게 되자, 공기는 마른 향기 좋은 냄새를 풍기던 가벼움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경작을 한 땅의 습기와 노 - P306

고의 무거움과 성숙해서 곡식을 품고 있는 이 모든 환경이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의 환한 가장자리, 거대한 초원지, 혹은 산 쑥 숲이 군집해 있는 사막에나가야 그런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공기는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애가 끝난 후가 되리라.
그가 타인 뉴멕시코로 가서 여생을 보내고 거기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때가 언제였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야생적이고 자유로운 어떤것이 있었다. 베개 위에서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며 마음을 가벼이 해주고 슬그머니 열쇠를 돌려 빗장을 빼내고 감금된 정신을 바람 속으로, 파란색의 금빛 대기 속으로, 아침 속으로, 아침 속으로 풀어 놓아 주는 그 어떤 것이! - P307

그래서 인간은 잔인한 삶으로 인해 잔인해져 있었다. 초창기 선교사들은 거인들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고 있는 이지방의 딱딱한 심장 위에 벌거벗은 그들의 몸을 내던진 것이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고생했고, 바위 사이에서 굶주렸으며, 발에 돌투성이로 타박상을 입으며 무시무시하게험준한 계곡을 오르내렸고, 오래 굶주렸던 배를 깨끗하지도않고 비위에 맞지도 않는 음식으로 채웠다. 이들은 분명히 베드로와 그의 형제들이 경험했던 정도를 능가하는 굶주림과 갈증과 추위와 헐벗음을 참아 내야 했다. 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든지 간에 그것은 모두 안전한 작은 지중해 세계, 옛날부터 알고 있는 방식으로 옛날부터 알고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순교를 견뎌 냈다 해도 그들은 그들의 형제들이 있는 곳에서 죽었고, 그들의 유물은 성스럽게 보관되었고, 그들의 이름은 성자의 입을 통해 살아 있게되었다. - P310

후니페로 신부가 수도사들에게 말하길, 그 집에 들어가는순간부터 왠지 이상하게 그 어린아이에게 끌렸으며 그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그가 그냥 어머니 곁에 있도록 놔두었다고했다. 사제가 저녁 기도를 드릴 때 그 아이는 바닥에 앉아 어머니 무릎에 기대고 있었고 양은 그의 무릎에 있었는데, 신부는 그의 일과성무서에 시선을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기도 후에 그는 그 집 가족들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하면서 조그만 소년한테 몸을 굽혀 축복을 해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손을 들어 조그만 손가락으로 후니페로 신부의 이마에 십자 성호를 그어 주었다고 했다.
라투르 주교가 하룻밤 묵고 있는 대 저택의 벽난로 가에서들은 후니페로 신부의 성스러운 가족에 대한 이 이야기는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그 이야기에 대해 실로 애정 - P314

을 갖게 되어 두 번씩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번은 필로메네가 원장으로 있는 리옹 수녀원의 수녀들에게였고, 또 한 번은 로마에 있을 때 마츄치 추기경이 베푸는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 위대함은 소박함으로돌아온다는 생각은 늘 아주 매력적이었다. 시골 처녀들 사이에서 건초를 만드는 여왕이라든가처럼 …. 하지만 예수님의역사와 영광이 여러 세기가 지난 후 가난한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겸손한 멕시코인 가족의 모습으로현현했다니, 그것도 세상의 끝에 있는 황야에서, 천사들도그들을 찾는 일이 거의 드문 그런 곳에서! - P315

그것은 바일랑 신부와는 아무런 관계도없는 존재 같았다. 그는 자신이 베르나르를 보는 것처럼 선명히 요셉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그들이뉴멕시코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감상이 아니었다. 그의 기억 속 요셉 신부에 대한 모습은 그것뿐이었다.
다른 모습은 없었다. 주교는, 장례식이란 단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 주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자 했다. 장례식은 야외에서 텐트를 쳐놓고 거행되었는데 덴버에는, 그러니까 극 서부 지방 전체에는 건물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다. 그문제로 말하자면, 야외 장례식은 흰둥이의 장례식으로는 충분한 곳이었다. 장례식 이틀 전부터 마을과 광산 야영 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물밀듯이 내려왔다. 그들은 마차나 텐트나 헛간에서 잠을 잤다. 수도원 광장에 국민 전당 대회 때처럼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 장례식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 - P321

어느 날 아침 간호사가 그의 침대 근처에 신문을 놓고 나갔는데, 거기에 콜로라도의 주교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수녀가 돌아왔을 때 어느새 환자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즉시 기차역까지 마차를 타고가겠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덴버에 도착하자마자 마차를 타고 주교의 장례식장으로 가달라고 했다. 그가 거기 도착했을때는 장례식이 거의 반은 끝나 가고 있었다. 죽어 가는 사람이 택시 운전사와 두 사제의 부축을 받으며 군중 속을 뚫고들어가 관 옆에 무릎을 꿇었는데, 이 장면은 어느 누구도 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를 위해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나머지 장례식 동안 그는 관 가장자리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있었다. 바일랑 주교가 무덤으로 운반되자 르바르디 신부는 병원으로 다시 이송되었고, 거기서 며칠 후에 그는 죽었다. 이것은 홍인족 인디언이건 황인종이건 백인이건 간에 요셉 신부가 친구를 아주 잘 사귀기도 하지만, 한번 사귀면 오래도록 진실한 친구로 만들어 개인적으로 특별히 헌신하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실례이다. - P322

1875년 주교는 자신의 대성당을 짓기 위해 프랑스에서 온건축가가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기 전 그에게 애리조나를보여 주려고 그 지역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나바호족이 말을 타고 대평원을 다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기뻤다. 두 명의 프랑스인들은 이상하게 생긴 절벽을 구경하기 위해 캐년 데첼리 계곡에까지도 들어갔다. 위로 솟아오른 모래바위 벽들 사이 아래 땅에서는 또다시 곡식들자라고 있었고, 굉장히 웅장한 미루나무들 아래서 양들이 풀을 뜯으며 달콤한 시냇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인디언의 에덴동산 같았다.
이제 늙어 아프게 되자 지나간 세월의 어둡고도 밝았던 그모든 장면들이 주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추방되어 가는 나바호족들이 리오그란데 강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며 짓 - P332

고 있던 그 무시무시한 얼굴 표정들, 얼마 남지 않은 가축들을 몰고 노인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게 줄지어 늘어선 생존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그가 이른 봄철 리틀 콜로라도에서 유사비오와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 양이 새끼를 분만하는 철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여서..… 피부가 거무스레한 사람들이 말을 타고이리저리 다니며 엄마 잃은 어린양들을 찾아 품에 안고 들어왔고..... 젊은 나바호족 여자가 엄마 양을 찾을 때까지 어린양에게 자기 젖을 주고 있었다.
「베르나르」 연로한 주교가 중얼거렸다. 주님께서 그런잘못된 일들이 올바로 되는 행복을 내가 볼 수 있도록 오래살게 해주셨구나. 옛날에 나는 인디언이 멸종할 것이라고 믿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아. 주님께서 인디언을 보호해주시리라 믿어.」 - P333

수녀원장과 막달레나와 베르나르가 병든 주교의 시중을들었다. 주교는 침상에서 평화롭게 고통 없이 누워 있었기에그들은 지켜보며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편안한 모습으로 보아 가끔 그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은 뜨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감돌고 의식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을 즈음, 촛불이 켜지는 어스름 녘에주교 노인이 편치 못해서 약간 움직이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프랑스어였는데, 베르나르는 몇 마디를 알아듣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신부님? 저 여기 있어요.」주교가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손을 약간 움직이자, 막달레나는 그가 뭔가 물어보거나 말하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335

하지만 실상, 주교는 거기에 이미 없었다. 그는 그의 고향 산천 가운데 끝이 툭 튀어나온 푸른 밭에 가서 있었다. 그는 선교하러 떠날 것인지 그냥 고향에 머물 것인지, 그 앞에 놓인두 개의 기로 속에서 고통에 차 있는 젊은이에게 위로를 해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신앙심이 돈독하고 고통으로 인해 지쳐 있는 사제에게 새로운 <의지>를 북돋워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짧았다. 파리행 역마차가 이미 산길에서 우르릉거리며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 어두워진 후 대성당 종이 울렸을 때, 산타페에 사는 멕시코 주민들은 무릎을 꿇었고 미국인 가톨릭교도들도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음속으 - P335

로는 기도를 했다. 유사비오와 테스케에서 온 소년들이 그들의 부족들에게 주교의 임종 소식을 전하기 위해 조용히 떠났다. 다음 날 아침 대주교 노인은 그가 지은 성당의 높은 제단앞에 놓여 있었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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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첼란 Paul Celan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체르노비츠는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으로 독일어를 쓰는지역이었다.) 그의 나이 21세 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체르노비츠는 유대인 거주 지역(토)으로 확정된다.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첼란의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하던 그는 부모의 처참한 죽음에 관한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또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살아남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간다. 종전 후 그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출판 일을 하다가 이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1948)를 발표한다. 그리고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강에 몸을 던져 1970년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시문학상을, 1960년게오르크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옮긴이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고등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첼란의 시』, 카프카, 나의 카프카』, 『괴테의 도시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 『괴테와 발라』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괴테 시 전집』, 『괴테자서전-시와 진실』(공역), 『데미안, "변신 시골의사 말테의 수기 보리수의 밤 등이 있다. 2011년 괴테 연구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상중최고 영예의 상으로 꼽히는 괴테 금메달을 동양인 최초로 수상했다.

이제는 부를 수 없는 것, 뜨겁게입안에서 들린다.
다시금 그 누구의 목소리도 없고,
아파 오는 안구의 밑바닥.
눈꺼풀은가로막지 않고, 속눈썹은들어오는 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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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29 15: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 아메리가 떠올랐어요.....

2023-09-30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슈테판 츠바이크까지...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