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나 텔레비전에서나 사람들은 홍콩의 밤을 찬양했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이토록 화려한 야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높은 건물들과 조명들, 레이저 쇼...... 어떤 고층건물에는 시시각각 빛으로 다른 그림이 수놓이기도 했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보게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기남의 인생에서 벌어졌던 다른 모든 일이 그랬던 것처럼.

우경의 집은 추웠다. 솜이 채워진 차렵이불을 덮었지만 으슬으슬한 추위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기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패딩 코트를 걸쳐 입었다. 그러고 가만히 서서 마이클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답게 깊게 잠이 든 듯했다. 한밤중에 모닥불을 보는 사람처럼 기남은 오래도록그애를 바라보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평소처럼 수면제 반 알을 먹었는데도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그랬지만 나이가 들면서 잠귀가 더 밝아졌다. 기남은 작은 소리에 여러 번 깨면서 얕은잠을 이어서 잤다. 다섯시가 되니 눈이 떠졌고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기남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거울을 쳐다봤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자 그 사이로 머리칼 몇 가닥이 쉽게 빠져나왔다. - P276

기남은 마음을 가다듬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우경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산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스타킹을 신었다.
그 위에 검은색 패딩 코트를 걸치고 밤색 털실로 뜨개질해서 만든크로스백을 둘렀다. 분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마스크를 쓴뒤 밖으로 나가니 우경이 제인의 방문을 열고 서랍 위의 잡동사니들을 뒤지는 모습이 보였다. 우경은 잡동사니들 가운데서 검은 장우산을 꺼내고는 기남에게 건넸다.
"언제 한번 이 방 정리하긴 해야 하는데, 이삿짐에서 박스만 푼수준이야."
바닥에는 제인의 요와 이불이 반듯이 개켜져 있었다. - P279

어린 시절 기남의 방은 부엌 옆에 있었다. 그 방에는 문이 두 개있었는데, 뒷마당으로 연결된 문은 잠가도 되었지만 부엌과 연결미닫이문은 그럴 수 없어 누구나 언제든 열어볼 수 있었다. 기남은 아직도 겨울이 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방에서 사는 동안 겨울마다 얼마나 추웠는지, 그게 얼마나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괴로움이었는지 몸이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기남은 꿈을 꿀 때면 자주 그 방으로 갔다. 벌써 오십 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기남은 꿈속에서 현재의 나이로 그곳에 살고 있었다.
기남은 아홉 살 때부터 식모 일을 했다. 기남을 제외한 일곱 식구의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비질과 걸레질을 했으며, 얼마 - P279

지나지 않아서는 손빨래를 맡아 하고 밥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기남은 자신이 보통의 식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느 누가 식모를 학교에 보내주나. 동네 사람들은 기남이 지나가면 권사장네식모라고 불렀다. 그 집에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기남보다 세살어린 막내 아이는 너무도 해맑게 기남을 식모 언니라고 불렀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기남의 이름을 불러줬다.
어려서 기남은 권사장네 가족에게 소속되고 싶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식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어떤 말을 듣든, 어떤 일을 당하는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일이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워서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자신을 속일 만큼속이고 나서야 기남은 자신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P280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남은 권사장이 운영하는 공장의 주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김여사라는 여자와 함께 둘이서 일꾼 서른 명의 밥을 하는 일이었다. 김여사는 허리를 꼿꼿이 펴지 못했지만 손이 빠르고 기운이 센 사람이었다. 자식 여덟을 모두 출가시켰다며 이제는 오히려 일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고 했다. 그녀는 기남이 일하다 실수를 하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수가 적은데다 잘 웃지도 않아서 처음에 기남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기남이 사장님 내외의 덕으로 어려서부터 보살핌을 받고 국민 - P280

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대꾸했다.
"네가 무슨 덕을 봤는데? 여기서 일하는 거 월급도 안 주잖아? 사장네가 조그만 어린애를 요리조리 써먹고 생색만 내는 거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어서 기남은 그녀의 말이 듣기 싫기만 했다.
"권사장, 손해보는 장사 하는 사람 아니다. 뭐, 마음이 좋아 널키웠나. 너네 집에서 널 맡기는 비용까지 줬다. 내가 직접 봤다."
그녀는 기남의 부모가 권사장네만큼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저 키우기 귀찮았을 뿐이라고, 아들 없는 집의 여섯번째 딸을 참을 수 없었던 거라고, 헐값에 치워버린 거라고
"사람 가죽 쓰고서 무슨 죄를 받으려고……" - P281

그녀는 쯧쯧 혀를 차면서 마늘 껍질을 벗겼다. 기남은 그런 그녀가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김여사를 만나고서야 권사장네 식구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가득 가지고서도 인색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추운 날에도 냉골 같은 기남의 방을 그대로 두었으며, 아무때나 방문을 열어 작은 것 하나라도 기남의손을 이용해 얻으려 했다. 혹여나 기남이 고기반찬을 조금이라도먹을까 전전긍긍했고 과일이 남아서 썩더라도 기남의 손에는 쥐여주지 않았다. 모두 기남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기남은 애써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편이 자신이 - P281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덜 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여사와 시간을 보내면서 기념은 자신이 여태킹 의존해왔던 기만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용기를 내며 큰사랑에게 월급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남은 길게은 분노를 느꼈고, 그 분노는 기남에게 약이 되었다 - P282

남은 건물을 나와 다시 해변을 따라 걸었다. 생각보다 멀리까지 왔는지 대관람차가 아주 작게 보였다. 기남은 바다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기남은 바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달이 눈앞의 바다를 파도치게 한다는 사실도 바닷속에서 길을 잃어 익사하는 거북이 있다는 사실도 기남은알지 못했었다. 기남은 여전히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익숙한 통증이 가슴에 퍼져나갔다. 멀리서 합창하는소리가 들렸다.
기남은 노랫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대관람차 가까이서 젊은이들 여럿이 마이크를 들고 캐럴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삼삼오오 모여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남은 주머니 속의 탁구공을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면서 그 노래를 들었다.
캐럴을 듣는 동안, 기남은 명동의 한복판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던 그날로 돌아갔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으로부터 벌써 사십 년 전이었다. - P303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 중식당의 냄새, 식기의 모양, 음식의 종류, 노인 옆에 있던 젊은 남자, 그러니까 노인의 아들이 입었던 옷과 큰언니라는 사람의 표정까지도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 P306

기남은 인파에 치이며 명동거리를 이리저리 걸었다. 흥겨운 음악과 반짝이는 불빛들이 쏟아지는 거리를 지나는 동안 기남은 자신이 지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큰길에 있는 극장 앞에 젊은 사람들 여서서 캐럴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기남은 구경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노래를 들었다. 노래는 아름답게 기남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했다. 버스가 나를 그냥 치고 지나가줬으면……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상상이 구체적인 실감을 가지고 기남에게 다가왔다.
생모는 기남이 결혼하기 전해에 죽었다. 여자는 가끔 기남에게전화를 걸어 그런 소식을 전하곤 했는데 어느 시점엔가 완전히 소식이 끊겼다. 여자는 살아 있다면 여든이 넘었을 나이였다. 하지만 죽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은 어떻게든 기남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연락했을 테니까. 그 어설픈 관심이 기남의 오래된 상처를헤집고 일상의 평화를 침해했다는 것을 그녀는 끝끝내 몰랐을까.
기남을 통해 자신의 삶은 그래도 기남보다 나음을 확인하고자 했던 걸까. 기남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 P307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 P319

기남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모르는 마이클은 자리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했다. 여자친구 에밀리에 대해서, 바다거북의 산란지인 카보베르데에 대해서, 그곳에서 태어난 새끼 거북들이 어떻게 바다를 향해 가는지에 대해서……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멀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
"할머니."
자신을 부르는 마이클을 보며 기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고 연약한 순간이 아직은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바라보면서.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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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허클베리 핀』 『백년의 고독 』 ...... 우리의 경험이라는 바탕은 어둡고, 우리가 창조하는이야기는 모두 그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불길 속에서 훌쩍 뛰어나온다.
상상력은 삶이라는 암흑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많은개인적 에세이와 자서전에서 내가 점점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신, 우리가 공유하는 친숙한 불행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한 번도본 적이 없는 것을 보고 싶다. 비전이 무시무시하게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나를 향해 뛰어나오면 좋겠다. 변화의 힘을 품은상상력의 불꽃이 되어. 나는 진짜 용을 원한다.
ㅡP 440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설, 즉 우리 모두 생각이 똑같다고 생각해버리는 실수를 소수집단이나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집단에 속한 작가들은 비교적 덜 저지르는 편이다. 그들은
‘우리‘와 ‘그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를 ‘모두‘와 혼동하는 것에 가장 유혹을 느끼는 것은 사회의 특권층이나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 또는 대학이나 백인 미국인 동네나 신문사 편집부원처럼 고립되거나 비호받는 환경에 속하는 사람이다.
전제는 이렇다. 모두가 나와 비슷하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추론 결과는 이렇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 P396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현상(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삽을 삽이라고 부르는 식으로 평범하고 소박한 말을하는 걸 막으려고 동정심이 흘러넘치는 자유주의자들이 꾸민 음모)은 앞의 추론 결과를 신념의 문제처럼 전시하며, 갖가지 편협한 주장을 옹호하는 데 이용한다.
오만은 보통 무지다. 때로는 순진함일 수도 있다. 다른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아이들의 무지는 용서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다. 지리적 요인이나 빈곤 때문에 고립된 공동체에는 어른이 될 때까지 평생 같은 공동체에서 같은 신념, 가치관, 가설을 갖고 살아와서 너나없이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 작가도 글에 드러난 편견이나 편협함을 옹호하는 도구로 무지나 순진함을 정당하게 들고 나올수 없다. - P397

편협성에 대한 거부를 모두 자유주의자의 음모로 보는사람들이 그런 책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릴지도 모른다. 출판사와 비평가도 그런 작품을 대개 게토로 몰아넣어, ‘일반적인 흥미를 다루는‘ 소설과 분리한다. 남자의행동을 중심에 놓은 소설, 주요 인물이 남자, 백인, 이성애자, 젊은이인 소설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언급되지 않고, 소설 자체는 ‘일반적인 흥미를 다루는‘ 작품으로 분류된다. 주요 인물이 여자, 흑인, 동성애자 노인인 소설에 대해서는 비평가들이 그 특별한 집단을 다룬 작품이라고말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작품에 공감하는 비평가들조차이런 소설은 주로 또는 오로지 그 집단의 흥미를 끌 뿐이라고생각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기성 비평계와 출판사의 홍보 활동 및 판매 전술이 편견에 엄청난 권위를 부여한다. - P408

많은 어른들의 문제는 정반대다. 자신감이 부족하다는것, 여자들, 특히 자녀가 있는 여자들이나 나이가 중년 이상인 여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엄청나게 힘들어한다. 이타주의의 함정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돈을 벌어 와야 하는 평범한남자라고 생각하며 자란 남자들도 역시 자신을 작가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생각의 도약을 잘 해내지 못한다. 수십 년전부터 아마추어 작가와 반아마추어 작가 집단들이 크게발전했고, 워크숍이 엄격한 평등주의를 기반으로 기능하고있는데도, 워크숍에 강사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강사는 이미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짜작가로서, 워크숍의 중심인물이 되어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참가자 모두에게 작가의 기분을 느끼게 해줄 수있다.
따라서 강사는 반드시 글쓰기 교사가 아니라 글쓰기를가르치는 작가여야 한다. 워크숍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문적인 글을 발표한 적이 있어야 한다. - P420

연습은 흥미로운 단어다. 우리는 연습이 초보자에게나맞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을 연습하는것은 곧 예술을 하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예술이다. 워크숍참가자가 자기처럼 연습중인 작가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글쓰기 연습을 하고 나면, 정말로 작가가 되었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워크숍의 요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집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집단의 형성에는 강사의 도움이 있지만, 사람들의 모임 그 자체가 에너지원이 된다. 참고로, 그 모임이 가능한 한 문자 그대로 서클, 즉 원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P421

워크숍에 참가해서 글을 쓰고, 읽고, 비평하고, 토론하는사람들은 많은 것을 배운다. 무엇보다 먼저, 비평을 받아들이는 법, 자신이 비평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배운다. 부정적인 비평, 긍정적인 비평, 공격적인 비평, 건설적인 비평, 가치 있는비평, 멍청한 비평,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직접 해볼 때까지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비평을 두려워하다 보면, 글을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 자신이 가차 없는 비평을 받았는데도 계속 글을 쓸 수 있음을 깨닫고 나면, 갇혀 있던 많은 에너지가 자유로워진다. - P422

워크숍 참가자들은 또한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책임 있는 비평을 내놓는 법도 배운다. 남의 글을 제대로 읽는 경험을 이때 처음 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휴식과 도피를 위해 쓰레기 같은 글을 읽을 때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독서와는 다르다. 영문학 기초 수업을 들을 때처럼 냉담하게머리만 써서 글을 분석하는 독서와도 다르다. 적극적으로 열심히 글을 읽으면서 부분적으로만 머리를 사용해 텍스트와협업하는 독서다. 이런 독서를 가르치는 워크숍은 스스로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집단이 만들어지고 나면,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이 서로의 작품을 그런 식으로 읽게 된다. 이런 독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 방식이 몸 - P422

시 짜릿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 텍스트를 과대평가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활기찬 워크숍의 사소한 위험 중 하나다.
글을 읽는 법을 배우면, 글쓰기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자신이 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제알기 때문이다. 비평과 협업 기술을 자기 작품에도 적용할 수있게 되었으므로, 건설적인 퇴고와 수정이 가능하다. 경험이일천한 많은 작가들처럼 퇴고가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까 봐,
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워크숍에서 집단 활동을 하며 심리적 예리함과 감수성을 믿고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함께 힘든 일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고 느끼는 데에서, 정직과 신뢰가 일을 해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경험한 데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정직과 신뢰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재주를 모두 동원할 것이다. 집단이 집단으로서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면, 강사를 포함해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이 에너지를 얻어 더 강해진다. - P423

예술은 기술이다. 모든 예술은 언제나 기본적으로 기술의 산물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 작품에는 근본적이고 영속적인 핵심이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기술이 작용해서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돌덩이 안에 들어 있는 조각상을 조각가는 어떻게 찾아내는 걸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각상을 어떻게 알아볼까? 이것이 진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내가 가장 즐겨 하는 대답 중 하나는 다음과같다. 누군가가 윌리 넬슨에게 어떻게 악상을 얻느냐고 묻자그는 이렇게 말했다. "허공에 곡조가 가득합니다. 나는 그저손을 뻗어 하나를 골라잡을 뿐이에요."어서이건 비결이 아니지만, 달콤한 미스터리다.
그것도 진짜 진짜 미스터리, 바로 그거다. 픽션 작가에게 이야기꾼에게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이야기가거기 있으니, 작가는 그저 손을 뻗어 붙잡을 뿐이다.
그다음에는 그 이야기가 스스로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는능력이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침묵 속에서 기다리는 - P430

법 침묵 속에서 기다리며 귀를 기울인다. 곡조를, 비전을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움켜쥐지도 말고, 밀어붙이지도 말고, 그냥 기다리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원하는 것이 찾아올 때 잡을 수 있게 준비를 갖추고서. 이것은 신뢰의행동이다. 자신을 믿고 세상을 믿는 행동, 예술가는 말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내게 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움켜쥐고자 하는 탐욕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준비 자세가 필요하다. 기꺼이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선명한 눈으로 정확하게 본 다음에 단어들이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아가게 가만히 두고 보는 자세. 거의 올바른 길이 아니다. 올바른 길이다. 그 비전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기술이다. 연습은 바로 이 기술을 위한 것이다. 준비 자세로 기다리라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 P431

비록 작가들이 주로 하는 일이 그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을 연습한다. 그리고 글쓰기는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예술이다. 음계와 손가락 연습, 연필 스케치,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채 계속 퇴짜를 맞는 이야기들...... 연습하는 예술가는 연습과 성과의 차이를 안다. 그둘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언뜻 몇 시간또는 몇 년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인내심과 준비 자세, 좋은 귀, 예리한 눈, 솜씨 좋은 손, 풍부한 어휘력과문법 지식이라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재능이 어디서 오는 - P431

지는 하느님만 아시지만, 기술은 연습에서 온다.
힘들게 얻은 숙련된 기술, 이 도구를 가지고 예술가는 ‘아이디어‘(곡조, 비전, 이야기)가 일그러지지 않고 선명하게드러나도록 최선을 다한다. 어리석음, 어색함, 서투름이 없어야 한다. 관습, 유행, 여론에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과격한 일이다. 자신의 직업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 예술가가 아이디어를 다루는 일, 비전을 언어라는매체로 다듬어내는 일.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일이고, 기술은 내가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즐겨 말하는주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한없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작업의 기반이 되는 비전, 즉 ‘아이디어‘ 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니까. - P432

허공에는 곡조가 가득하다.
돌덩어리에는 조각상이 가득하다.
땅에는 비전이 가득하다.
세상에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예술가는 이것을 믿는다. 맞는 말이라고 믿는다. 그렇게확신한다.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 ‘아이디어‘ 를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여기서부터 나는 음악과 미술을 빼고 이야기에만 집중하겠다. 비록 모든 예술의 뿌리는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진짜 지식을 갖고 있는 분야는 이야기뿐이다).  - P432

상상한 내용을 지칭하기에 아이디어는 이상한 단어다.
추상적이지 않고 대단히 구체적이며, 지식이 아니라 표현으로 구현된 내용을 지칭해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아이디어라는 단어를 고수한다. 또한 이 단어가 완전히 과녁에서 빗나간 것도 아니다. 상상력은 이성적인 능력이니까.
"꿈에서 그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1년 내내 좋은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  "오전이 절반쯤 지난 지금 내 머리에는 갖가지 아이디어와 비전 등등이빽빽하게 차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올바른 리듬을 찾지 못해서......"
마지막 문장은 1926년에 버지니아 울프가 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이다. 나중에 이 문장에 대해 다시 살펴볼 것이다. 리듬에 대한 언급이 예술의 원천에 대해 내가 생각하거나 읽은 그 어떤 내용보다 더 심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경험과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다. - P433

픽션 작가만 이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다. 항상,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을 이야기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미쳐버린다. 아니면 유아나 (아마도) 동물처럼 역사가 없는 세상, 오로지 현재밖에 없는 세상에 산다.
동물의 정신은 커다랗고, 신성하고, 현존하는 미스터리다. 나는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언어는 전적으로 진실만을 말한다.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은 우리뿐인 것 같다. 우리는 현실과 다른 것, 처음부터 달랐던 것, 처음부터 달랐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내서 말할 수 있다. 없는 것을 지어내고, 가정하고, 상상할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기억과 함께 뒤섞인다. 그래서 우리는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동물이다. - P434

원숭이는 경험을 기억하고, 경험을 기반으로 추정할 수있다. 개미탑을 막대기로 찔렀더니 개미들이 막대기를 타고올라오는 걸 한 번 본 뒤, 원숭이는 그 개미탑을 다시 그 막대기로 찌른다. 어쩌면 개미가 또 막대기를 타고 올라올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또 그 개미들을 핥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냠냠, 그러나 상상력을 지닌 동물은 우리 인간뿐이다. 원숭이가 개미탑을 막대기로 찔렀다가 빼보니 막대기에 금가루가잔뜩 묻어 있었는데, 광물을 찾아다니던 사람이 그 광경을 본것이 1877년 로디지아에서 일어난 대 골드러시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동물은 우리 인간뿐이다. - P434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다. 이 이야기에서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일부 원숭이가 정말로 개미탑을 막대기로 찌른다는 사실과 로디지아라는 지명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1877년에 로디지아에서 골드러시가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부분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다. 나는인간이므로 거짓말을 한다.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다. 이건진실이다. 내 말을 믿어야 한다. - P435

픽션은 경험에 상상력이 작용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경험, 기억, 힘들게 얻은 지식, 과거사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사실 픽션이 아주 많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다. 지금 내가 말하는 주제는 진짜 픽션, 즉 소설이다. 소설은 모두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일에 상상력이 작용해서 변화시키고, 걸러내고, 왜곡하고, 선명하게 다듬고, 미화한 결과물이다.
‘아이디어‘는 세상에서 머리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이 과정 중 내 관심사는 바로 아이디어가 머리를 통과하는 부분이다. 상상력이 원료에 작용하는 부분. 하지만 아주많은 사람이 마뜩잖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P435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허클베리 핀』 『백년의 고독 』 ...... 우리의 경험이라는 바탕은 어둡고, 우리가 창조하는이야기는 모두 그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불길 속에서 훌쩍 뛰어나온다.
상상력은 삶이라는 암흑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많은개인적 에세이와 자서전에서 내가 점점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신, 우리가 공유하는 친숙한 불행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한 번도본 적이 없는 것을 보고 싶다. 비전이 무시무시하게 이글거리는 모습으로 나를 향해 뛰어나오면 좋겠다. 변화의 힘을 품은상상력의 불꽃이 되어. 나는 진짜 용을 원한다. - P440

경험은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픽션은 경험을 상상력으로번역하고 변형하고 변신시킨 것이다. 진실에는 사실이 포함되지만, 진실과 사실이 항상 같은 시공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예술에서 진실은 흉내가 아니라 환생이다.
사실을 담은 역사책이나 회고록에서 경험이라는 원료가 가치를 지니려면 선별, 배열, 성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소설에서는 이 과정이 훨씬 더 과격하다. 작가는 원료를 선별해서 성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융합하고, 발효시키고, 다시 결 - P440

합시키고 다시 손보고, 다시 배열하고, 다시 탄생시킨다. 이과정에서 원료는 자기만의 형태를 찾을 수 있게 되는데, 합리적인 사고는 여기에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모든 과정이 순수한 창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괴물에게바쳐진 제물로 바위에 묶여 있는 여자. 미친 선장과 하얀 고래, 절대적인 힘을 주는 반지 용그러나 세상에 순수한 창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출발점은 경험이다. 창작은 재조합이다. 우리는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작업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머릿속에는 괴물, 리바이어던, 키메라가 있다. 이들은 정신적인 사실이다. 용은 우리에 관한 진실 중 하나다. 그 진실을 표현할 다른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용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개 용에게 잡아먹힌다. 안에서부터. - P441

독서는 가장 신비로운 행동이다. 시청이라는 방식이 독서를 대체한 적은 과거에도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시청은 완전히 다른 방식이고, 보상도 다르다.
책을 읽는 독자는 그 책을 만들어간다. 임의적인 상징과인쇄된 글자를 자기만의 내적인 현실로 번역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독서는 창조적인 행동이다. 여기에 비해 시청은 수동적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영화에 참여해 영화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영화에 흡수되는 것이다.
독서를 할 때는 독자가 책을 잡아먹고, 영화를 볼 때는 영화가 보는 사람을 잡아먹는다. - P442

이건 아주 굉장한 일일 수 있다. 좋은 영화에 먹혀서, 자신의 눈과 귀를 따라 어쩌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현실 속으로끌려 들어가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러나 ‘수동적‘이라는말은 ‘취약하다‘는 뜻이다. 수많은 매체가 우리에게 이야기를들려주며, 바로 그 점을 이용한다.
독서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적극적인 거래다. 텍스트는 독자의 통제하에 있다. 독자는 텍스트를 건너뛸 수도 있 - P442

고 한 곳에서 머뭇거릴 수도 있고, 테스트를 해석할 수도 있고, 오독할 수도 있고, 앞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에 잠길 수도있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고,
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그 판단을 수정할 수도 있다. 진정한상호작용을 할 시간도 여유도 있다. 소설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활발히 진행되는 협업이다.
시청은 이것과는 다른 거래다. 협력적이지 않다. 시청자는 영화 제작자나 프로그래머에게 통제권을 넘겨주기로 동의한다. 심리적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서 영화와 프로그램이들려주는 시청각 이야기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다. 스크린이나 모니터는 일시적으로 시청자의 우주가 된다.
자유재량의 여지는 거의 없고,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정보와 이미지를 통제할 방법도 없다. 그 정보와 이미지를 거부하고,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거기서 스스로 멀어지는 방법뿐이다. 그러면 그 정보와 이미지가 기본적으로 무의미하게보인다. 아니면 아예 프로그램을 끄는 방법도 있다. - P443

작가들은 모두 서로의 어깨 위에 서 있다. 모두 서로의아이디어와 재주와 플롯과 비결을 이용한다. 문학은 공동 작업이다. ‘영향의 불안‘이니 뭐니 하는 말은 그냥 남성호르몬의 작용일뿐이다. 내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표절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흉내 내기, 베끼기, 도둑질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정말 고의적으로 다른 작가의 글을이용했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이자리에 서서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종이봉투로 내 머리를 가렸을 것이다(저명한 역사학자 여러 명도 이렇게 해야 한다). 내 말은, 경험이 우리에게 스며들듯이 다른 사람의 책에서 이런저런 것이 우리에게 스며든다는 뜻이다.  - P455

딱 맞는 단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문체는 아주 간단한 문제예요. 리듬이 가장 중요하죠. 이걸 알고 나면 엉뚱한 단어를 쓰기가 불가능해집니다. 오전이절반쯤 지난 지금 내 머리에는 갖가지 아이디어와 비전등등이 빽빽하게 차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덜어낼 수 없습니다. 올바른 리듬을 찾지 못해서. 이건 매우 심오한 문제예요. 리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단어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어떤 광경, 감정이 마음속에 이렇게 물결을 일으킵니다. 그러고 한참 지난 뒤에야 거기에 단어를 맞춥니다. 글을 쓸 때 우리는 이것을 다시 포착해서 (이것이 현재나의 믿음입니다) 작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단어와는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고 나면 그것이 마음속에서 깨어지고 구르면서 단어를 자신에게 맞추죠. 하지만 내년이면 내 생각은 틀림없이 달라져 있을 것 같네요. - P461

울프가 이 글을 쓴 것은 80년 전이다. 그녀가 그 이듬해에 생각이 달라졌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글에서 울프의 말투는 가볍지만,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매우 심오하다. 나는 이야기의 원천, 즉아이디어의 원천에 대해 이보다 더 심오하거나 더 유용한 것을 아직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 P461

기억과 경험 아래에, 상상과 창조 아래에, 울프의 말처럼단어 아래에 리듬이 있고, 기억과 상상력과 단어는 모두 그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작가가 할 일은 그리듬이 느껴질 만큼깊이 내려가서 리듬을 찾아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듬이 기억과 상상력을 움직여 단어를 찾아내게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울프는 아이디어가 가득한데 덜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리듬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울프는 그 아이디어들의 잠금장치를 풀어, 그들이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게 해줄 박자, 그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게 해줄 박자를 찾지 못했다. - P462

울프는 그것을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부른다. 어떤 광경이나 감정이 그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도 한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떨어지면, 중심에서부터 침묵 속에 완벽한 리등으로 원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 마음은 그 원들을 따라밖으로, 밖으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단어로 변한다…… 하지만 울프의 이미지는 이보다 더 거대하다. 그녀가 생각한 물결은 파도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바다 위를 1천 킬로미터 넘게가로질러 와서 해안에 철썩 부서지는 파도. 파도가 부서져 날아오르면서 단어라는 거품이 된다. 그러나 그 파도, 일정한박자의 충격은 단어 이전에 존재하며,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작가가 할 일은 그 파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저 멀리 바다에서, 마음이라는 대양 저편에서 조용히 부풀어오르는 파도를 알아보고 해안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해안에 - P462

저 파도는 단어를 변화시키거나 스스로 단어가 되어 품고 있더 이야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미지를 토해내고, 비밀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고는 이야기의 대양으로 스르르 다시 물러간다.
아이디어와 비전이 꼭 필요한 저변의 리듬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울프는 왜 그날 오전에 아이디어와비전을 ‘덜어내지 못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것, 걱정거리.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작가가 너무 서둘러서 단어를 너무 일찍 움켜쥐기 때문에 단어를찾지 못할 때가 아주 많은 것 같다. 작가는 파도가 들어와 부서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작가인 탓에 그냥 글을 쓰고싶어 한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른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자신이 아는 것, 아이디어, 의견, 신념, 중요한 생각...... 작가는 파도가 들어와 모든 아이디어와의견 너머로 자신을 데려가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그곳에서는 엉뚱한 단어를 쓰기가 불가능해지는데. - P463

우리들 중 누구도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지만, 모든 작가가 적어도 한 순간이나마 파도를 타본 적이 있다면, 항상 딱맞는 단어를 찾아내는 경험을 했다면 좋겠다.
독자로서 우리는 모두 그 파도를 타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안다.
산문과 시, 모든 예술, 음악, 춤은 우리 몸, 우리 존재, 이세상의 몸과 존재가 지닌 심오한 리듬에서 솟아나 그 리듬과 - P463

함께 움직인다. 물리학자가 읽는 우주는 아주 다양한 진폭의진동,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은 그 리듬을 따라가며표현한다. 일단 올바른 박자를 찾기만 하면, 우리의 아이디어와 단어가 그 리듬에 맞춰 춤춘다. 누구나 합류해서 춤을 수있는 윤무輪舞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되고 장벽이 내려간다.
잠시 동안. - P464

그녀가 여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신, 초월적인 존재
원래 모든 것을 아는 존재.
타자기 앞의
원형
나는 이 말에 저항한다.

그녀의 일, 나는 정말로 그녀의 일이
싸움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일, 나는 정말로 그녀의 일이
자신의 진짜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일, 그녀 자신의 일,
그녀가 인간인 것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 P479

그래, 만약 내가
작가라면, 내 일은
단어다. 쓰지 않은 편지들.
단어들은 나의 존재 방식
인간, 여자, 나,
단어는 나를 자아내는 물레,
인생이라는 천을 짜기 위해
세월이라는 날실 사이로 던져진 북,
모양을 잡아
사용하고, 장식하는 손.
단어는 나의 치아,
나의 날개.
단어는 나의 지혜.

나는 낡은 책상의
비밀 서랍 안
편지 다발.
편지에 무엇이 있나?
무슨 말이 있나? -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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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유럽 사람들은 ‘하나의 유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독재의 사령부가 된 유럽을 반대한다. 유럽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생의 공동체로 거듭날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그런 이상주의자들은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사람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희망도간직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유럽연합이 지금까지그래왔던 것처럼 개혁이 불가능한 집단임이 분명해진다면, 그어떤 언론의 선동이 있더라도 유럽인들은 유럽연합을 버리는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P231

프랑스와 독일의 철도 공기업들은 각각의 유럽 국가들이 각자자신의 환경에 적합한 최적의 철도운영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놔두라고 유럽연합에 요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 문제에대한 노조와 사용자 측의 현실 진단은 거의 똑같았다. 그들은신자유주의의 유럽이 저지른 거대한 실수를 이제 모두 인정하고 있다. 다만 노조는 17년 전에 알았던 것을 사용자는 이제야,
그것이 자신들이 설 자리마저 밑동부터 위협하자 인정하게 된것이다. 그 해법을 찾는 데서 사용자는 여전히 유럽연합 지도부에게 뒷덜미를 잡혀 있다. 그들도 내심 노조의 강력한 압박을 바랄지도 모른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덜 자유롭다. 떨어지기를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높을수록 진실에서 멀어진다. 발이 땅에 닿지않기 때문에,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자들에게는 머리를 날려 허공에 떠 있는 자들이 현실을 깨닫도록 만들어야 하는 고단한 임무가 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계급투쟁이라 불렀다. - P240

모든 개인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다. 모든 개인적 고통이 사회적 고통이듯, 나의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 남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느낄 수 있을 때 사회적 치유가 시작되고, 그 안에서개인이 치유될 때 비로소 역사는 전진한다.
2016년 봄,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혐오misogyny의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추모와 분노, 조소와 야유로 부딪혔다. 여성들은 비로소 우리 모두가 피해자였음을, 그 자잘한 일상의 불 - P262

안과 불쾌함, 공포가 여성 모두의 것이었음을 말하는데, 자신의평소 언행이 여자들을 하루하루 죽여가는 것이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들은 그들의 조용한 추모와 분노에 끼어들어 이를 조롱했다.
여성혐오에 대한 여성들의 폭발적 자각과 그 앞에 선 남성들의 망연함 사이에서, 정부는 무슨 일을 했는가. 마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듯 정부는 아무 말도 행동도취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파리에 가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꿈에 부풀어 있을 뿐이고, 정부의 나팔수 <조선일보>는 강남역에모여든 추모 인파들을 세월호 유가족처럼 폄훼했다. 해결은 없고 훼방만 있으며, 대화는 가로막고 대결만 조장한다.
그러나 솟아오르기 시작한 불기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으리라. 그 누구도 현명한 제도적 해결 방안을 제시해줄 리 없는 사회에서,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여성들의 상처를 있는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녀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성이 피눈물 흘리는세상에서는 남성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 P264

신자유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옷처럼 우리 몸에 달라붙기 시작한 외환위기 시점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남녀 간 불평등은기하급수적으로 가중되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략 이때부터 한국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이 다소 다른 양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모순이 극대화되면, 폭발할 수밖에 없다. 수습 불가능한 수준으로 축적된 모순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표출의 방식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짓밟고 능멸해오던 대상들이 마침내 발끈하며 일어서자, 남자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어리둥절함이다. 그리고 정의당 탈당 사태에 이어 <시사인> 절 사태가 보여주듯,
기존의 전선과 이념을 초월해 남성들의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되고 있다. 가부장제를 수호하기 위한 이러한 ‘남성 연대‘는 충분히 예측됐던 광경이다. - P267

여성협오를 둘러싼 이 무수한 국지전을 보며 생각한다. 여성에대한 조직적 차별은 가부장제 발생 이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것이지만, 마치 그들에게 원한이라도 가진 듯 여성을 혐오하고공격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남자들이 출현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도드라진 한국사회의여성혐오를 보며 지배계급의 프레임 속에 걸려든 것은 아닌지나는 강한 의혹을 품고 있다. 그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조장해온 피지배계급 간의 분열 프레임.
박정희가 호남을 차별하고 영남에 특혜를 제공하면서 지역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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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너는 들어오지 마ㅡ
그 안으로 들어간 누군가가 외쳤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와
찬물 한 컵과 마주하여 앉았다
창 바깥에는 사다리차가
누군가의 세간살이를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

찬물이 식어가는 동안에
찬물을 마시지 않았다

파란 박스가 네 개씩 포개어져 누군가의 거실로
차곡차곡 운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곧 이웃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들어오지 말라던
그 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남긴 한마디를

나는 모두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찬물이 식어가고 있다

세수를 했다
흰 비누 거품으로 칠해진 얼굴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이 얼굴은 한 번도 진심으로 미워해본 적이 없다
악몽이 보호하고 싶어 하는
나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사 왔어요ㅡ
인터폰 화면 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채워져 있다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안으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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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가 있는 정물


그대라는 자연 앞에서
내 사랑은 단순해요.

금강에서 비원까지
차례로 수국이 켜지던 날도

홍수를 타고
불이 떠내려가던 여름
신 없는 신앙을 모시듯이

내 사랑에는 파국이 없으니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과육을 파먹다
그 속에서 죽은 애벌레처럼
순진한 포만으로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사랑일 수밖에요

죽어가며 슬어놓은 알

끝으로부터 시작이
말려들어갑니다

스미다강의 불꽃 축제


강으로 가자고 했다.
진흙 코끼리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좋은 것은 무엇일까
외투를 입히고 단화를 신겼다
부스스 흙이 떨어졌다
코끼리는 밀차 손잡이를 꼭 쥐고
천천히 발을 뗐다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
더는 걷지 못하겠다는 듯
옆으로 풀썩 누웠다
교각 위에 차량이 길게 늘어섰고
화가 난 사람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연잎만큼 넓은
코끼리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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