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도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청양에서 자랐다. 서라벌고, 공주사대를 졸업한 후 대천고, 공주농고, 안면중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민중교육지 사건(1985), 전교조 결성(1989)으로 해직되었다가 1994년 복직되어 지금은 온양신정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시집 『백제시편」 「그 나라」 「사십 세」 「교사일기』 등이 있고, 산문집 「내 안의 작은 길』, 장편소설 「지난날의 미래』, 동화『넌 혼자가 아니야』, 교육에세이 『일등은 오래가지 못한다」 「삶· 사회 · 인간 · 교육』, 시 해설집 『선생님과 함께읽는 윤동주』 등을 펴냈다.

□ 시인의 말


일곱 번째 시집입니다.
전과는 다르게 시를 써 보려고 했습니다.
미완성으로 남겨두기, 생략하기, 직접 인용, 빈칸으로 두기, 공동창작, 그림 사진 만화 등으로 시어를 대신하기.... 시가 좀 재미있고, 풍부해지고, 따뜻한 피가 돌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그런 흔적들이 여기 조금 남았습니다.

그리고...

삶이 고단한 사람들은
‘좋은 날‘에도 많이 울더군요.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2007년 9월
조재도

흑백의 낡은 사진첩을 꺼내보듯 나이가 들면 자꾸 뒤돌아본다고한다. 지독히도 퍼부어대던 우기의 여름을 몸서리치며 보내고 맞이한 풀벌레 소리의 가을밤, 조재도의 시를 읽는 방안에 가만가만 가을비가 내린다.
쓸쓸한 것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또 쓸쓸함 속에 남는다. 가을이란 그런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 나는 푸른 햇살이 찰랑이는 섬진강가 은빛 모래밭 나무의자에 앉는다. 거기 이를 악물던 젊은 날을 보내고 느릿느릿 충청도처럼 조재도의 시가 걸어올 것이다.
박남준(시인)

매미 소리


처서 무렵 우는 매미 소리는
강철 빛깔이다
골무만 한 몸통에서
가슴팍 열어 젖혀 쟁명히 울어대는
매움 매움, 저 매미 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나 아니면 울 게 없다는
아니 아니 하늘과 땅 사이 울 것 투성이인데
아무도 울지 않아 내가 대신 운다는
매미가 쓰는 호곡론好哭論이다
그래 그건 그렇고
넌 언제 울어봤니
두 줄기 눈물 비줄배줄 흘리는 그런 울음 말고
막힌 칠정 한꺼번에 터져 나와 목젖이 다 갈라지는
크나큰 울음, 통곡을
넌 어느 때 울어 봤어
아파트 숲 단풍나무 가지에 앉아
꽁댕이 들었다 놨다 울어 퍼지르는
아흐, 저 빛살의 매미 소리
어떤 톱날로도 자를 수 없는 - P10

좋은 날에 우는 사람


슬픔의 안쪽을 걸어온 사람은
좋은 날에도 운다
환갑이나 진갑
아들 딸 장가들고 시집가는 날
동네 사람 불러
차일치고 니나노 잔치상을 벌일 때
뒤꼍 감나무 밑에서
장광 옆에서
씀벅씀벅 젖은 눈 깜작거리며 운다
오줌방울처럼 찔끔찔끔 운다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어여 눈물 닦고 나가 노래 한 마디 혀, 해도
못난 얼굴 싸구려 화장 지우며
운다, 울음도 변변찮은 울음
채송화처럼 납작한 울음
반은 웃고 반은 우는 듯한 울음
한평생 모질음에 부대끼며 살아온 - P12

삭히고 또 삭혀도 가슴 응어리로 남은 세월
누님이 그랬고
외숙모가 그랬고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했을,
그러면서 오늘
훌쩍거리며소주에 국밥 한상 잘 차려내고
즐겁고 기꺼운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 P13

가만있자 그러니까 그게 거, 할 때의 그 가만있자에 대하여


어떤 말이 저렇게 깨달음의 등불을 오롯이 드러낼까
어떤 말이 저렇게 강물처럼 흘리 순간마다 빛날까
어떤 말이 늘 서서 걸으며 달려가는 우릴 멈추게 하겠는가
그 자리에 멈추어, 앉아, 되돌아보게 하겠는가
가만있자의 그 순간이 어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소주 집에 앉아 싹둑거리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날아오를 자리 가늠하며 대가리 까댁이는
미루나무 꼭대기의 저 까치에게도
주춤대며 개천 다리 건너오는
오늘 아침 샛강의 자욱한 안개에도
그러니까 그 자세 가만있자의
낮은 걸음 자세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순간 불티처럼 튀어나온 그 깨달음에
극極으로 치닫던 마음이 돌아앉는다
제 몸 진저리치며 세우는 그 자리에 - P18

고양이
쥐의 일에
슬퍼도 하고
밭에서 돌아온 소가
부어오른 제 발등을 핥기도 한다

어느 말이 저렇게 어두운 골방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담뱃불이겠는가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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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화朴梨花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남해를 거쳐 대구에서 성장,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댄스스포츠 트레이너, 심판으로 활동중이다.

□ 시인의 말



지지난 봄, 도둑고양이 몇 마리 내 집 담장을 슬금슬금 넘나들더니 지난 봄부턴 나 몰래 새끼까지 치고는 아예 제집인양 의기양양하게 살고 있다. 이렇듯 내 집 정원엔 제멋대로 들어와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이들 뿐이 아니다. 능소화도 그렇고 보랏빛등꽃이며 달개비꽃 등등...... 가만 생각해보니 내 무관심과 무신경이 이들을 만만하게 불러들였던 것같다. 타고난 내 게으름 덕분에 영악한 도둑고양이도 눈치빠른 잡초도 경계심 턱, 풀고 제 삶을 부렸을 터이다. 돌아보면도 내게 그렇게 왔다. 그렇게 쭈삣쭈삣 와선 이젠 아주기둥서방처럼 건들거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너것들 사람 잘못 봤다.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올 때는네 멋대로 왔는지 몰라도 갈 때는 어림없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항시, 어디서건, 악랄하게 준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 심드렁한 일상의 늪 속에 너것들은 이미 너무 깊이 너무도 오지게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격랑은 헤쳐 나갈 수도밀려 나올 수도 있지만 무심의 늪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법. 이젠 아무도 내게서 살아 돌아가진 못하리. 사랑, 너도결국은 마찬가지!

2006년 고양이털 날리는 봄날에
박이화

박이화의 시에서 베어나오는 아릿한 꽃물은 우리 생애에 있어서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알리바이다. 마흔 그늘 아래 뿌리 내린 복숭아나무가 바람에 선분홍 꽃으로 화안히 울컥, 온 몸을 피운 제선연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렇게 ‘저 한 마리 들락이지 않는 날에마도 온종일 화사하게 들떠 있는 나무가 박이화의 시다. 그 화사빛깔 속, 삶의 핏물이 햇볕과 달빛에 바람과 비에 바랜 채 묻어 있는게 쉽게 느껴진다. 생애 전체가 꽃인 삶의 서러움일까? 대저 곳이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기도 한 것 아님의 하늘에 열심히 가는가, 저 화염의 열린 꽃!

박이화의 시는 몸으로 피운 꽃이다. 몸 중의 몸, 그 중심에 닿아 있는 꽃이다.
뭔가 불편해서 외면하지만 자꾸만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곳, 그곳에서 올라오는 몸의 언어는 힘이 세다. 그녀는 좌사우고, 곁눈질하지 않는다. 직핍이다.
꽃분홍 복사꽃 향기 도처에 낭자하지만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은 시적 자아의탈은 맨얼굴이다. 그렇다. 몸으로 피운 꽃은 가식이 없다. ‘이건 속옷인걸‘ 하고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의 손아귀를 가차없이 비틀어버리는 손길은 분명 날것의 감각이다. 매울 ‘신‘의 날것이다.
장옥관(시인)

산벚꽃의 봄은 산벚꽃이 안다


봄이라고
모든 나무가 꽃피우는 건 아니다
나무의 나이테엔
그 나무의 전생
또 그 전생의 전생이 기록되어 있다 아니,
그 후생까지
아름다운 타원형 속에 비밀스레 내장되어 
있다
따라서 우연한 봄날
우연히 꽃 피우는 나무란 없다
거역할 수 없는 윤회의 법칙처럼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순환
그래서 저 벚꽃
일생 중
오로지 4월의 미풍에만 황홀하게 전율한다

내 몸 속
수천억 개의 세포는

내 전생의 잎, 잎들
그래서 당신, 그 봄날 같은 입김에
그토록 뜨겁게 반응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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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고 있는 곳의 山水를 닮는다. 그럴 것이다. 탄생의 배경이되며 거기서 나온 것을 먹고 자란 데다 사람은 가장 오래 바라보는 것을 닮으니까. 베두인족 눈에 사막의 지평선이 있듯 김수열 시인의 두 눈에는 제주의 푸른 수평선이 들어 있다. 그곳에서 쉬지 않고 출렁인다. 그의 큰 키 또한 한라산에서 왔다. 수직의 산세와 수평의 물결, 그 거대한 두 세계가 붙어먹어 새로운 DNA를 만들었으니 그게 이번 시집 「빙의」이다. 그가 높고 깊은 어떤 지경까지 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창훈(소설가)

맹물 같은 시다. 오래된 소갈증이 사라진다. 시원하고 담박하다. 근데 이놈의 맹물 시가 다시 갈증을 불러온다. 속이 탄다. 좋은 시는 당연 조감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키가 훤칠해서 당연 눈이 높다. 거시적 통찰이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키 큰 사람은 싱겁다. 이 말을 하루하루 실천하며 산다. 맹물로 가장 키가 큰 게 강물이다. 그는 강을 세워 논 것같다. 사막에 사는 포아풀도 맹물 한 모금 먹으려고 600미터나 발돋움한다. 그는 또 골목길 가로등과 닮았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늦은 귀가와 훌쩍임과 배웅이 있다. 모퉁이와 구석이 있다. 그 골목 끝자락에 집이 있고, 마루가 있고, 아랫목 이불 속에는 따뜻한 밥그릇이 있다. 나물이 있고, 비린것이 있고, 맹물 한 그릇이 있다. 한국 시 가운데 제주도 국어 선생이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시다. 설명할 게 없어서 멀뚱멀뚱 종 치기만 기다리는데, 눈시울은 젖고 가슴은 먹먹하다.
이정록(시인)

시인의 말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 시집으로 넘어오는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한 가지만 꼽으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그것이다.

하여, 이 시집에는 그분의 흔적이 드문드문 박혀있다.
살아생전 아들의 자잘한 글에 돋보기 들이대고 꼼꼼 읽으시곤 했는데…….

부끄러운 이 글에도 눈길 한번 주십사 하면 지나친 욕심일까?
나이가 들수록 내 글의 눈높이가 그분을 닮아간다.

2015년 1월
김수열

빨래


어제를
빨아

오늘
넌다

내일은
마를까 - P11

사랑을 배우다


성산포 광치기해안 모래밭
일출봉 배경으로
오리 한 마리
상처 받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인기척 있어도 미동하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선다

아,
그 곁에
반쯤 해체된
오리 한 마리

죽은 사랑을 껴안은
아픈 사랑의 날갯죽지 위에
아침 햇살이
시리다 - P12

아내의 건망증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며칠 전 출근하는데 아무 생각 없더란다 문득 정신 차려보니 차는 삼양검문소 지나 함덕으로 가고 있어 갓길에 세우고 멍하니 있다가 차 돌려 부랴부랴 출근했다며 힘없이 숟가락 내려놓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한마디 거드는데 걱정 말라고 나이 들면 다 그런 거라고 나도 얼마 전 아무 생각 없이 봉개 지나 명도암 입구까지 갔다가 차 돌려 신엄으로 갔다고 심상하게 말해주었다

살다 보면 가끔씩 샛길로 빠질 때도 있다고 말할까 하다가 밥만 먹었다

나무의 시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P20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원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게 이런 거라고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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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시, 두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김수열은 거기에 따라 서로다른 미의식을 보여준다. 민족예술상을 수상한 작품 「목마른 신들」이 보여주듯이, 그가 연출한 연극들이 군사 파시즘의 혹독한 억압 속에서 민중의 역사적삶을 풍자·해학. 요설로 용기있게 형상화해낸 작품들이라면, 그의 시들은 그러한 집단의식의 치열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외되기 마련인 개인의식 · 감정의 애틋한 내면 풍경을 잘 보듬어 안아주고 있다. ‘공동체와 나‘ 라는 어려운 명제를 조화롭게 실천하는 그의 예술에 축복이 있기를.
-현기영(소설가)

내가 한때 시인의 꿈에 부풀어 애타고 있을 때였다. 1982년 실천문학에 실린 그의 등단작 「어머니」라는 시를 보고 무릎을 치던 일이 있었다. 문득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했었다. 십여 년이 훨씬 넘어서야 그를 만났고 그와 함께 제주 바다를, 크고 작은 오름을, 마라도와 우도 섬을 걸었다. 흰빛이 일렁이는 산호의 사장에 누워 우리는 쪽빛 제주 바다와 그 하늘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때 그 오름의 길에서 만났던 보랏빛 갯쑥부쟁이 꽃밭의 눈부심이라니.
김수열의 시를 들여다보면 그때 그 오름의 길에서 만났던 갯쑥부쟁이가 떠오른다. 쪽빛 그 싱싱한 바닷물에서 갓 건져올려 피우는 그의 해맑은 웃음이떠오른다. 왜 그리운 것들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이냐. 더디고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냐.
-박남준(시인)

후기


어중간하다
살아온 나날이 그렇고 가늠하기 힘든 내일이 그렇다

흩어졌던 글들을 한 코에 꿰면서
문득 시에도 피가 있고 살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허나 묶어놓고 보니
이건 피도 아니고 살도 아니다
내 삶이 그러했던 탓이리라

지나친 욕심이겠지만
한때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벗들
그러나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생각에
돌아오기를 주저하는 그런 벗들에게
부끄러움의 시편들을 고백처럼 바치고 싶다
나 또한 너무 멀리 왔다고
그래서 이렇게 망설이고 있다고

경진년 초겨울 화북에서
김수열

나는 왜 몰랐을까


책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고
아이들은 호호 불면서 유리창을 닦고
나는 책장 앞에서 책을 정리하는데
한나절을 꼬박 매달려도
위칸의 책이 아래칸으로 내려오고
아래칸에 있던 책이 옆칸으로 자리이동을 했을 뿐
너저분하고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진데
책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왜 몰랐을까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
나에게는 소중한 것부터
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부터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는 걸
미련이 남아 있을 때 - P11

미련 없이 버려야만
마음의 빈칸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여태껏 몰랐을까
그 빈칸 있어야 누군가 찾아와
잠시나마 머물다 갈 수 있다는 걸
나는 왜 바보같이 몰랐을까 - P12

바람까마귀


하늘이 낮게 가라앉은 날
바람까마귀도 새벽바람을 이기지는 못한다

마음이 깊게 내려앉은 날
사람 사는 일도 사랑을 이기지는 못한다 - P17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지상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을 
밤새도록 흔들어놓은 바람이
잠깐 숨 고르고 있을 즈음 나는
바람을 만나러 바람 속으로 간다
바람의 잔해들은
허리 잘린 나무 그 찢겨진 몸통 위에
뿌리째 뽑혀나간 아름드리 가로수 그늘 아래
하얀 이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 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신호대기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신호등을 쳐다보는데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신호등이 없다
꼬라박아 자세로 엎드려 아무 말이 없다
문득 길이 없어지고
나는 가야 할 곳을 잃었다
갑자기 나는 아무 데도 없다 - P20

길 없이 길을 나설 수 없는 나는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다

바람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가
바람 속에서 까마득히 길을 잃었다 - P21




깊은 산
붉은 노을이 진다

그윽한 섬
파란 물살이 인다

오름마다 물매화 핀다
거기 사람들이 산다

깊고그윽한 - P33

갯쑥부쟁이


마음으로야 골백번 넘게 떠났지만
정작 떠남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외돌개 해안 절벽에
아스라히 매달린 너는
사람 없는 섬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에 매달려 한 뼘이나마
그대 곁으로 다가서려고
섬 끝에 발을 내린 채
이미 야위어진 몸으로
섬을 밀고 밀었던 것이다
꽃이 지기 전에
계절이 가기 전에
한순간이나마 함께하려고
파르르파르르 온몸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석 달 열흘 기나긴 날을 애태웠지만 결국
더는 다가설 수 없음을 안 너는
언제부터인가 머리 풀어 보랏빛 꽃향내를 - P70

그리운 그 사람에게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꽃은 이미 지고
계절도 벌써 가버렸지만
외돌개 해안 절벽에
아스라히 흔들리는 너는
산산이 부서지는 살점들을
애타게 그리운 그 사람에게
오늘도 하늘하늘 날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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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金秀烈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산문집으로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다.

□ 시인의 말


얼마 전
가까운 벗들과 이덕구 산전을 찾았다
아직 복수초는 피어 있지 않았다.

동자석을 벗 삼은 무덤을 지나
길 아닌 길로 접어든다.

에둘러진 낮은 돌담
벌러진 솥단지

이름 없이 스러진,
아직 순을 틔우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큰절 올리고
상왜떡으로 음복을 한다.

이것들 죄다 마음에 품고 산을 내린다.

2006년 봄
제주에서 김수열

김수열의 시는 참 따뜻하다.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처럼 마음을 녹인다. 그는 아픈 이야기도 편하게 한다. 눈물 나는 이야기도 담담하게 한다. 웃으며 읽다가 눈가에 눈물 어리게 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도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진솔하게 말한다. 목소리에 공연히 힘주지 않고 담백하게 말한다.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평범하고(只是常), 참맛은 담백한 데 있다."고 하는데 김수열의 시가 그렇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삶에서 우러난 깊은 맛을 지닌 시들이다.
도종환(시인)

유도화油挑花


너를 보내고 돌아오는 공항로에
독성 강한 꽃 낱낱이 만개했다
그길 천천히 지나왔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저들이 서둘러 고개 숙인다

아,
내 안에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숨어 있다니! - P11

지삿개에서


그립다는 말도
때로는 사치일 때가 있다
노을구름이 산방산 머리 위에 머물고
가파른 바다
漁火 점점이 피어나고
바람 머금은 소나무
긴 한숨 토해내는 순간
바다끝이 하늘이고
하늘끝이 바다가 되는 지삿개에 서면
그립다, 라는 말도
그야말로 사치일 때가 있다

가냘픈 털뿌리로
검은 주검처럼 숭숭 구멍 뚫린
바윗돌 거머쥐고
휜 허리로 납작 버티고 선
갯쑥부쟁이 한 무더기! - P12

해장국


열불나면 걷잡을 수 없는 거라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이면
날계란 하나로는 어림도 없는 거라
김칫국물 정도로는 턱도 없는 거라
그럴 때면 막걸리나 한 잔 하면서
가만 놔둬야 하는 거라
그러면

씩씩거리다가도
제 스스로 몸 낮추고
차분하게 마음 가라앉히는 거라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사랑도 그런 거라
분노도 다 그런 거라 - P16

건강보조식품 판매원


칠순 훌쩍 넘긴 나이에도
당신은 어스름에 집을 나서
출근부에 도장 찍습니다
이 나이에 꼬박꼬박 도장만 찍어도
기본급을 주는 일자리가 어디 있냐며
약상자 바리바리 싸들고 회사문을 나섭니다

한때 계모임 했던 친구네 집
사돈에 팔촌까지 이미 한 순배 돌고 돌아
더는 갈 곳도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에 침발라 낡은 장부 뒤적입니다
고생 접고 편히 사시라 해도
성한 몸뚱어리 놨다 어디 쓰냐며
단호하게 손사래칩니다
몇 상자 팔아야 남는 이문으로는
글쓴답시고 술담배에 절어 사는
자식놈, 키토산도 먹이고 - P32

가진 것 없는 시부모 만나 맞벌이하는
며느리, 하이폴렌도 먹이고
손주녀석, 비타칼슘도 먹이고

마음만 종종걸음일 뿐
마땅히 갈 데 없고 오라는 데는 더욱 없습니다
온종일 발품에도 허탕치고
해거름 등지고 집에 들어
뜨는 둥 마는 둥 저녁상 물리고
집채만한 은행빚 무게에 겨워
애벌레처럼 오그라든 채 잠자리에 드는
당신 - P33

정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
반백 년전
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
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
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
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
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
육중한 몸뚱어리로 짓이길 때마다 다시 죽고
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 - P91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
‘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
‘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 라고
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
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
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
몸 뒤척일 때마다 뼈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빠직빠직 빠지지지직

이따금 나를 태운 시조새
하늘과 땅으로 오르내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잠시 두 발 들어올리는 것
눈감고 창밖을 외면하는 것 - P92




고희 넘긴지 오래인 어머님은
텃밭에 시를 쓰신다
골갱이 들고 고랑을 파 이랑 만드신다
배추도 심고 무도 심고
주둥이 깨진 독에서 삭힌 오줌으로
잎 키우고 꽃 피우신다

노란배추꽃엔 노란 나비
하얀 무꽃엔 하얀 나비

오늘도 텃밭에 앉아
한땀 한땀 정성으로 시를 쓰신다
行間에서 字間까지 완벽하다
퇴고가 필요치 않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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