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의 바늘, 우물집을 떠날 때 그녀가 버리고 간 바늘은 녹슬지도, 달아나지도 않았다. 자신에게서는 자꾸만 달아나려 하는 바늘이, 화순에게는 끈질기게 매달려 있었다. 화순의 손에서 바늘이 달아나는 것을 금택은 목격한 적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잡고 있어도 바늘은 그녀의 손에 속한 뼈처럼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과 화순둘 다에게 바늘을 나누어 주었다. 하나씩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래전 그날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건넨 바늘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자신들은 둘이지만 바늘은 하나라서, 종국에는 둘 중 한 명만 그것을 갖게 될 거라는 바늘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바늘 하나에 손이 두 개 매달려있는 경우를, 한복 거리 그 어디서도 금택은 본 기억이 없었다. - P323

자신이 도망치는 것이라면 정말로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화순의 말은, 화두처럼 금택을 괴롭혔다. 어머니인지, 바늘인지 아니면……… 화순의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이상하게 외팔 여자가 함께 떠올랐다. 자수 놓는 여자는 자신의 시어머니보다 매섭던 자수장이 아니라, 외팔 여자의 손으로부터 도망쳤다고 고백했다. 자수바늘을 잡은 외팔 여자의 손으로부터 외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금택은 기시감처럼 그 여자의 손을 본 것 같은기분이 들었다. 수틀에 팽팽하게 고정한 바탕감에 자수바늘을 수직으로 내리꽂는 외팔 여자의 손을.
외팔 여자에 대해서 듣기 전까지, 그녀는 화순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상이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85

손바느질로 옷을 짓는 여자들은 더러 있었지만, 누비로 옷을 짓는여자는 드물었다. 복래한복 여자도, 서울한복 여자도, 아씨한복 여차도, 정인한복 여자도 누비 바느질을 할 줄은 알았지만, 누비로 제대로 된 저고리나 두루마기는 지을 줄 몰랐다. 바느질이라면 눈을감고도 웬만큼 하는 그녀들이었지만, 누비 바느질은 익숙하지 않았다. 누비 바느질은 특별한 리듬과 강약을 요구하는 기법이었다. 숙달을 필요로 하는 기법이었다. 누비저고리를 한 벌 지을 시간에 민저고리나 회장저고리를 수 벌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애써누비 바느질을 하려 하지 않았다. 누비 바느질은 금 같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두 달이고 석 달이고 누비대 앞에 앉아 바늘땀을 떠 넣기에 그녀들은 돈이 궁했다. 그녀들은 바느질로 먹고살았다. 바느질로자식들을 키워 시집장가 보냈다. 어머니는 수십 년 누비 바느질로옷을 지었다. 어머니처럼 수십 년 누비 바느질로 옷을 지은 여자는 드물었다. - P400

재숙은 충동을 다스릴 줄알았다. 감정과 욕망을 화순은 숨기지 않았지만, 재숙은 숨기고 포장할 줄 알았다. 금택은 화순과 자신, 둘중 꼭 한 명을 지목해야 한다면 오히려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순보다는 자신의 기질이재숙의 기질과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충동을 다스릴 줄 알고, 욕망을 숨길 줄 안다는 점에서 그랬다.
누비대 위에서 절도 있는 리듬을 타면서 동일한 바늘땀을 연속해서 떠나가는 어머니의 손놀림을 보고도 경탄하지 않는 그녀에게,
금택을 누비 바느질을 배우려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비 바느질의 세계는 심오해. 단순한 바느질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짓는 거지."
그녀의 대답이 신선했지만 금택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명을 할 수는 없었지만 금택은 그녀의 대답이 교묘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누비 바느질을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 그럴듯한 말 뒤에 교활하게 숨기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금택은 그녀가 누비 바느질을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듣고 싶었다.
"삼라만상이요?"
"하나의 우주를 짓는 것하고 똑같다는 뜻이지." - P407

"옛 사람들은 옷을 지을 때 한 땀 한 땀마다 입을 사람의 복을 기원했다지. 건강과 장수를 빌면서 정성을 다했다지."
재숙은 조금 길게 여운을 두었다가 이어서 말했다.
"내 목표는, 끊긴 전통 누비 기법을 복원하는 거야. 잔누비, 중누비, 드믄누비, 납작누비, 오목누비……… 출토된 누비 복식들을 원형그대로 복원하는 게 내 목표이지. 누비를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것은 그다음 목표이고."
금택은 의문했다. 누비저고리를 한 벌 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하는 그녀가 전통 누비 기법을 복원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품었다는 사실이 모순 같았다.
어머니는 누비저고리를 지을 때, 누비저고리에만 집중했다. 어머니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누비저고리가 완성될 때까지 어머니는 바늘땀 하나에 몰두했다. - P411

금택은 때때로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바늘을 하나만 준 것 같다. 자신들은 둘인데, 두 개가 아니라 하나를 바늘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더더군다나.
자신들이 어릴 때 어머니는 그것이 무엇이든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친딸인 화순에게 더 크고 붉은 사과를 준 적이 없었다. 사과가한 알일 경우 어머니는 두 쪽으로 갈라 한 쪽은 자신에게, 다른 한 쪽은 화순에게 주었다. 금택은 차라리 그날 어머니가 화순이나 자신둘 중 한 명에게만 바늘을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차라리 화순에게만 바늘을 주었더라면.
금택은 바늘로 인해, 화순과 자신이 친자매보다 더 질기고 복잡한 인연으로 묶인 것 같았다.

만물이 바늘 끝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하루살이의 눈 같은 바늘끝에. 하늘도, 땅도, 나무들도, 강도, 바다도, 밤하늘의 별들도, 길들 - P447

도, 풀포기도, 허공을 날아가는 새들마저 바늘을 놓치면 그 끝에 매달려 있던 만물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다.
환영이 금택을 괴롭혔다. 손에 잡고 있는 바늘이 은빛 피라미가 되어 잽싸게 달아나는 환영이었다. 환영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바늘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에 더 힘이 들어갔다. 부러지는 게 아닌가 싶게 힘이 들어갈 때마다 금택은 외팔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강박과 두려움에 시달렸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그 여자의 자수바늘을 잡은 손에 그렇게나 힘이 들어간 것이라고,
병풍 가게 쌍둥이 여자를 도망치게 할 만큼 힘이 들어간 것이라고.
그러므로 자수바늘을 백 개 먹어 치운 것은 신사임당 초충도 ‘양귀비와 도마뱀‘이 아니라, 외곽 여자의 손가락이라고 외팔 여자의 손가락이 자수바늘을 하나씩 오독오독 분질러 먹어 치운 것이라고.
그녀는 어쩐지 소화되지 않은 자수바늘의 조각들이 외곽 여자의손가락에 고스란히 박혀 있을 것 같았다. 녹이 슨 조각들이 하나살갗을 찢고 선인장 가시처럼 그녀의 손가락에 돋아나고 있을 것 같았다. - P448

어머니 역시 그랬지만, 바느질하는 여자들은 대개 자신들의 손을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손이 얼마든지 바꾸어 낄 수 있는 장갑이나 되는 듯 굴었다. 여러 켤레 장만해 장롱 속에 재두기라도 한 듯, 쓰고 있는 손이 고장 나 못쓰게 되면 새 손으로 바꾸면 되는 듯, 그녀들은 손을 아끼지 않았다. 손을 열 개쯤 가지고 태어난 게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만큼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바느질을하지 않을 때도 그녀들은 손을 무위로 놀리지 않았다.
바느질을 하지 않을 때조차 그녀들은 손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바느질을 하지 않을 때 그녀들은 옷감을 염색하고, 풀을 쑤고,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했다. 장을 담그고, 멸치나 황석어로 젓갈을 담그고, 햇볕에 말릴 무나 호박이나 가지를 채 썰었다.
바느질하는 여자들의 손은 그녀들이 잠든 뒤에도 잠들지 않았다. - P470

"바늘은 매번 저를 찔렀어요. 찔러서 피를 흘리게 했어요."
그녀는 밤마다 바늘을 손에 잡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 했다. 지독한불면의 밤이 시작된 것은 오히려 바늘을 손에서 내려놓고 나서였다.
바늘을 손에서 놓지 못할 때 금택은 바느질을 하느라 날을 꼬박 새웠다. 바늘을 손에서 놓은 뒤로는, 바늘을 다시 잡고 싶은 욕구와 싸우느라 날을 새워야 했다.

바늘에 집착하는 것만큼이나 바늘을 포기하는 것이 금택은 힘들었다. 바늘을 포기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착이었다.
금택은 보이는 바늘을 손에서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바늘을 집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바늘은, 보이는 바늘보다 깊이 금택을 찔렀다. 그녀는 바늘에 찔린 자국투성이였다. 어머니로부터 바늘을 건네받던 날밤, 그 바늘이 가슴을 찔러왔을 때처럼 피가 흘렀다. 그녀의 눈에만보이는 피였다. 피는 선지보다 검붉고, 비린내를 풍겼다. - P484

어머니를 닮고 싶어 하는 금택의 욕망은 한결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금택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를 닮고 싶은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머니를 닮는 것이 요원할뿐더러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누비 바느질로 인해 어머니의 어깨가 기우는 것을, 등이 굽는 것을, 척추가 주저앉는 것을,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고 뒤틀리는 것을, 곁에서 똑똑히 지켜보았으면서도 어머니를 닮고자 하는 욕망은 시들지 않았다. 누비 바느질로 인해 망가지고 무너진 어머니의 육체를 금택은오히려 동경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들러붙은 흉터조차 갈망하는 병적이고 맹목적인 욕망과 닿아 있었다.
금택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한 살이었다.  - P511

잔누비 쓰개 장옷은 재숙이 계획한대로 복원되었다. 3백여 년 땅속에서 잠들어 있던 옷이 넉 달 만에 원형 그대로 부활한 것이었다.
완성된 잔누비 쓰개 장옷을 금택은 구경하지 못했다. 어머니조차도 구경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부분들밖에 보지 못했다. 전체를 보지 못했다. 재숙이 왼쪽 소매를 가져다주면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자신의 누비대에 고정시킨 뒤 누비 선을 따라 바늘땀을 떠 넣었다.
실핏줄을 촘촘히 줄 세워놓은 것 같은 누비 선들을 무화과 씨보다 작은 바늘땀으로 채웠다. 어머니가 마침내 바늘땀을 다 떠 넣으면 재숙은 냉큼 그것을 누비대에서 거두어갔다. 오른쪽 소매를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다. 어머니는 그러면 그것을 받아 자신의 누비대에 고정시키고 바늘땀을 떠 넣었다. 재숙은 우물집이 아니라 서울 자신의누비 연구실에서 부분들을 연결했다. - P551

잠든 어머니 옆에서 금택은 명주 올을 튕겼다. 엎질러진 마음처럼어머니 앞에 펼쳐져 있던 명주였다. 그녀는 0.3센티 간격으로 올을 튕겨 누비 선을 표시했다. 한 시간쯤 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올을 튕기던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 곁에 깨어난 어머니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거미줄을 헤치고 나온 듯 흐릿한 모습으로 앉아 금택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머니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올을 튕겼다.
거문고 줄 수만큼 올을 튕기고 금택이 고개를 들었을 때 어머니는여전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불 밑으로 나온 어머니의 손이 명주 끝자락을 잡고 있어서, 그녀는 올이 아니라 어머니의몸속 실핏줄을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몸속 실핏줄을 죄다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 P557

금택은 바늘을 잡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바늘을 잡았다. 누비대 앞에 앉으려 하지 않는 어머니를 대신해 누비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어머니를 대신해 누비 선에 바늘땀을 떠 넣었다.
바늘땀 하나에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온몸의 피가 바늘을 잡은 두 손가락으로 쏠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집중했다.
자정이 넘도록 누비대 앞을 떠나지 않고 누비 선을 따라 반복해서 바늘땀을 떠 넣고 있는 금택을 어머니가 바라보고 있었다. 귀천을 떠도는 영혼이 한 생애 동안 깃들었던 육체를 바라보듯.
마흔 중반의 금택은 우물집으로 흘러들 즈음의 어머니를 빼닮아있었다. 그녀는 흰머리카락이 드문드문 올라오는 머리를 쪽 찌고,
흰 무명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 P562

"누비 바느질이요?"
"누비 바느질이라고 골이 빠지는 바느질이 있지. 누비옷 짓는 거나 배워보지 그래."
부령할매는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배워야 하는데요?"
"못해도 10년은 배워야 그냥저냥 지을 수 있지. 남보다 잘 지으려면 어디 10년으로 되나. 평생을 해도 끝이 나지 않지."
부령할매는 고개를 내둘렀다.
"평생을 해도요?"
끝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그녀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암튼 끝이 나지 않는 바느질이 누비 바느질이야."
누비 바느질이 낯설었지만, 수덕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미싱 바늘은두려웠지만, 바늘은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더구나 미싱이라는 기계가 자신과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미싱 소리가 그녀의 머리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수십 개의 바늘땀이 순식간에 떠지는 것도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 바느질을 배운 그녀는 뚜벅뚜벅 바늘땀을 떠 나가는 기쁨을 알았다. - P587

화순은 가장 오래 우물집을 떠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늘 어머니에게 돌아오려고 했다는 것을, 어머니와 바늘로부터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마흔 살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화순이 우물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 곁에는 금택이 있었다. 화순이 어머니를 떠났다 돌아오고 또다시 떠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금택이 늘 그렇게 말없이 어머니 곁을 지켰다. 어떤 의미에서 화순은 자신의 자리를 금택에게 양보했다. 금택이 절대로 우물집을, 어머니를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떠난 것이었다. 자매의인연으로 엮인 자신들이 운명적으로 빼앗고, 빼앗길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을 화순은 일찌감치 알았다.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금택에게만 특권처럼 주어졌다는 것을. - P611

우물집 바느질하는 여자의 집에 살고 있는 세 여자의 손 중 온전한손은 금택의 손뿐이었다. 그녀는 바늘을 유일하게 들 수 있었지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바늘을 드는 대신 바늘처럼 작고 가늘어진 어머니의 육체를 돌보았다. 어머니가 재숙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과동시에 금택은 스스로 바늘을 놓았다. 화순은 그녀가 누비 바늘을들지 않은 지 어느덧 여섯 해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금택은 누비 바늘을 잡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을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에 눈곱만치의 자비심도 베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병들지 않았다. 망가지지 않았다. 금택은 바늘을 들지 않으면서, 바늘이 자신의 손에서 달아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머니가 그것을 도로 거두어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 P622

자매는 자신들의 포개어 잡은 두 손의 살과 살이, 뼈와 뼈가, 핏줄과 핏줄이 섞이는 것을 느꼈다.
포개어져 하나가 된 자매의 손이 바늘을 잡았다.
바늘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적인 불안이 금택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바늘을 놓고 싶은 욕구가 화순의 목구멍에서 욕지기처럼 치밀었다. 불안과 욕구가 충돌하면서 맞대어진 금택의 손바닥과화순의 손등이 들뜨고, 엇갈려 잡은 손가락들 새가 벌어졌다. 불안이 욕구를, 욕구가 불안을 억눌렀다.

두 개이자 하나인 자매의 손이 첫 바늘땀을 뜨는 소리가 떠돌았다. -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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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 장만하시려고요? 이왕이면 십장생으로 하지 그러세요?"
"병풍은 십장생보다 신사임당 초충도가 끌린단 말이야. 풀하고 꽃하고 곤충 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노는 모습이 묘하게 흥분을 일으키커는 화사하면서도 소박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재치와 농담이 넘친단 말이야. 섬세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단순하고 담박해."
"신사임당 초충도 8폭 병풍이라면 우리 친정에도 있는걸요.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손수 수를 놓으신 병풍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1폭에 가지하고 방아깨비가 수놓아져 있던 게 기억나네요………."
"어디 가지하고 방아깨비뿐인가! 개미도 기어다니고, 나비도 날아다니고, 벌도 날아다니지 2폭에는 수박하고 들쥐하고 패랭이꽃하고 호랑나비가 등장하는데 들쥐 두 마리가 수박을 파먹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단 말이야. 3폭에는 어숭이, 개구리, 원추리, 매미가..... 4폭에는 여뀌, 메꽃, 잠자리, 벌, 사마귀......"
"5폭에는요?"
맨드라미, 산국화, 나비, 쇠똥벌레………"
"그럼 6폭에는요?" - P264

"어숭이꽃, 도라지, 나비, 벌, 잠자리, 개구리, 메뚜기......
"형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세요?"
"보고, 보고, 보다 보면 저절로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나는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가물가물만 하지 뭐예요."
"감탄을 하면서 봐야 기억이 되지. 한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 하고, 백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천번을 봐도요?"
"천번이 아니라 천만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어떻게 천만 번 다 감탄을 하면서 본데요."
"천만 번이 아니라 백만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제대로 감탄을 할 줄 아는 것도 재능이야." - P265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 중의 명물(物)이요, 철 중의 쟁쟁이라. 민첩하고날래기는 백대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추호(秋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뚜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독수리요?"
"누라와 비단에 난봉과 공작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함은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이 미칠 바리요."
"아, 바늘이요!"
"바늘에 대한 글귀들중에 유씨 부인의 초침문을 따라갈 글귀가 또 있을까."
해가 기울도록 여자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자 어머니는 서쪽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건어물 행상 여자로부터 사두었던 멸치를한 주먹 우려 국물을 내고, 배추전을 부칠 밀가루를 반죽했다.  - P267

장독에서 간장을 뜨고 돌아서던 금택은 화들짝 놀랐다. 간장 뜨는모습을 지켜보았는지 옥 사모님이 금택의 뒤에 서 있었다.
"짐승의 눈동자 같구나."
"네?"
"흰 종지에 담긴 간장이 짐승의 눈동자 같아."
금택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들린 종지를 들여다보았다. 옥 사모님의 말대로 종지 속 간장은 짐승의 눈동자 같았다. - P267

명주 한 필은 치마와 저고리 한 벌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명주를 가슴에 끌어안고 서쪽 방에서 나온금택은 마당을 건너다 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꽁꽁 언 밤하늘은 무쇠 가위나 무쇠 식칼을 갈 때 숫돌에 흐르는 물빛이었다. 뭉텅뭉텅 떨어져 흐르는 구름들은 생인손을 앓는 손톱처럼 검푸르고 아파 보였다. 금택은 불현듯부령할매가 그리웠다. 까맣게 잊고 있던부령할매의 얼굴이 떠오르려고 해서 얼른 고개를 저어 지워버렸다.
부령할매를 만나면 금택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늘이 쥐날인지, 호랑날이지, 뱀날인지, 돼지날인지, 원숭이날인지······ 쥐날이었다면 부령할매는 하루 종일 바늘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옷감이 풀리는 방향인 식서 방향으로 올을 튕기는 것은 집중을요구했다. 튕길 올을 골라내는 것부터가 벌써 까다로웠다. 가위로 재단한 부분은 올이 약간 풀려 있기 마련이었다.  - P271

올 여섯 줄을 튕기고 나서야 금택은 한숨 돌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올을 튕겨 표시한 누비 선들을 바라보았다. 0.3센티 간격으로 고르게 표시된 누비 선들이 금택은 거문고 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손으로 튕기면 소스라치듯 떨면서 ‘덩‘ 하고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문고 줄을 타듯 누비 선들을 타면 ‘덩, 둥, 등, 당, 동, 징‘ 울림과 높낮이가 다른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문고 줄을 명주실로 만든다는소리를 금택은 음악 시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올을 튕길 때 어머니는 거문고나 가야금 줄을 고르는 것 같았다.
딸들이 올을 튕겨 가져다준 명주로 어머니는 저고리와 치마를 한벌 지었다. - P273

화순에게 바늘을 들게 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금택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친딸이 금택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바늘을 들었다. 금택에게 진실을 똑똑히 일깨워주기 위해
바늘만큼 진실을 분명하게 깨우쳐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화순은 알았다. 바늘은 화순이 말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진실을 금택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금택이 특별히 친구를 사귀지 않는 것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우물집으로 달려오는 것은, 순전히 바늘 때문이었다. 금택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끝내듯 자신 몫의 집안일을 한 뒤 바늘을 들었다. - P282

어머니의 오른손 흉터가 북두칠성처럼 신비롭게 다가온 뒤로, 금백은 그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흉터를 고스란히 자신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로 옮겨오고 싶었다. 그것은 바늘을 훔치고 싶던 충동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활동에 사로잡힌 금택은 바늘 끝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지느러미처럼 붙어 있는 살을 찔렸다.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듯 피가 맺혔다. 반짝이는 그 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을 또 바늘로 찔렀다. 바늘끝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은, 별이 떠오르듯 피가 맺히는 순간 황홀감으로 바뀌었다.
황홀감에 취해 눈동자 초점이 몽롱하게 풀어진 금택의 귀에 화순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황홀감에 취한 금택은 비로소, 바늘땀과 바늘땀의 거리가 별과 별의 거리만큼 멀다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늘땀과 바늘땀 사이, 기껏해야 좁쌀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 안에는 몇 백 광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했다.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지만 바늘땀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했다. - P286

지독한 무기력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소일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우물집에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언젠가 자신과 화순 둘 중 하나는 우물집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은 고질적이 것이었다. 자신과 화순둘 다 우물집에, 어머니 곁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금택은 화순과 자신이 급격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질적으로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았다. 두 기질이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밀어낸다는 것을. 둘 중 하나가 우물집을, 어머니를 떠나는 날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다.
그녀는 떠나는 쪽이 자신이 될까 봐 두려웠다. 화순이 어머니의 친딸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었다. 화순이 스스로 떠남으로써, 그녀의 고질병처럼 오래된 강박과 두려움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 P305

며칠 뒤, 금택은 서쪽 방에 들었다가 어머니가 새로 완성한 누비저고리를 보았다. 화순이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우물집을 떠날 즈음부터 짓던 누비저고리였다. 누비대 위에 놓여 있는 누비저고리는 언젠가 화순이 우물 속에 수장시킨 누비저고리와 비슷했다. 한 마리의두루미 같던.
어머니는 서쪽 방에도, 부엌에도 없었다. 석 달에 걸쳐 완성한 누비저고리를 누비대 위에 펼쳐놓고 뒷산에 든 것이 틀림없었다.
금택은 누비저고리로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골이 지게 반복해서뜬 바늘땀들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바늘땀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0.2센티 간격으로 고르게 떠 넣은 바늘땀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바늘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미묘한 역동 속에서 서로 밀고 끌어당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누비저고리 앞섶을 들추고 그안으로 손가락들을 밀어 넣고는 더듬기 시작했다. 더듬으면 심장이 만져질 것 같아서. - P319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가 살아 생전에 입었던 옷들을 태우고, 새로 옷을 해 입혔다. 어머니의 단골들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었다. 그녀들이 죽은 뒤 남겨질 옷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들이 어머니에게서 지어다 입은 누비저고리나 누비치마나 누비마고자가 남겨질 생각을 하자.
검정 저고리를 금택은 앉은뱅이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서쪽방에서 주운 천 조각들 위에, 검정 저고리는 죽는 까마귀였고, 천 조각들은 새들의 찢긴 날개였다. 온갖 새의 찢긴 날개를 죽은 까마귀가 품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마을 어떤 여자가 죽은 사람 옷을 태우는 것을 봤어요. 죽은 사람옷을 죄다 마당에 끌어내놓고 태우고 있었어요. 한 장, 한장 불길 속으로 던지면서 태우고 있었어요……"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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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점에 살 때, 부령할매에게서 수의를 해간 여자가 붉은 팥 한 말과 노란 좁쌀 한 말을 싸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가 원삼을 입혀드리자 기적처럼 성불(成佛)하셨다고,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붉은 팥과 노란 좁쌀을 앞에 펼쳐놓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연둣빛 길에 자줏빛 깃을 달고, 일곱 빛깔 무지개 색동으로 소매를 단 원삼을 입혀드리자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성불하셨어요.....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는 걸 일평생 위안 삼아 사셨을 만큼 박색인 어머니가 천하일색 양귀비나 황진이 뺨치게 어여뻐 보이더라니까요."
중얼거리는 내내 여자는 붉은 팥알을 손으로 집었다 놓았다 했다.

금택은 장의사의 한지꽃을 접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내내 한지꽃을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불어나 무덤처럼 자신을 덮도록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 무덤 속에서도 여자가 한지꽃을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읍내 거리를 덮도록 접을 것 같았다. 읍내 전체가 한지꽃으로 뒤덮인 거대한 상여가 될 때까지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 P192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또다시 금택을 찾아왔다. 그 소리는 금택이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금택은 서쪽 방 들창 밑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 어느 날처럼 부령할매가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그곳까지 따라와 떠돌았다. 뒷산으로 난 들창은 한 뼘 정도 들려 있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에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겉돌았다.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다가 어느 순간 화음을 만들어냈다.
광목 조각 같은 참새들이 탱자나무 가시들 속으로 날아들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 금택은 기분이 이상했다. 죽은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가 산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서. 죽음이 목숨을 불러온 것 같아서. - P204

누비옷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옥 사모님은 오랜 단골들과 달랐다. 어머니가 자리라도 비우면 어머니에 대해 이런저런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다른 단골과도 달랐다. 옥 사모님은 햇수로 치자면 어머니와 인연이 가장 짧았지만, 어머니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른 단골과 다르게 어머니를 재촉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문한 누비옷이 완성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삼회장 누비저고리와 치마를 지어 입기 위해 1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었다.
닷새 전에도 옥 사모님은 우물집에 다녀갔다. 어머니가 두 달 내내매달려 완성한 누비치마를 두르면서 그녀는 말했다.
"땅을 두르는 것 같아." - P219

옷감이 다양하지 않다는 단골들의 불만을 금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우물집 마당과 뒷산에서 얻은 씨앗이나 잎, 열매, 나무껍질, 뿌리 등을 재료로 내는 색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색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색을 입은 옷감들 역시 그 어디에도 없는, 서쪽 방에만 있는 옷감들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대구에서 끊어오는 옷감들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차원이 다른 옷감들로 재탄생했다. 무명이면서, 무명과 다른 차원의 옷감이 되었다. 염색을 통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깔을 입고, 푸새와 다듬이질을 거쳐 이 세상 어디에도없는 질감과 광택을 띤.
나흘 전 어머니가 양파 껍질을 재료로 무명에 들인 노란색은 엄밀히 말해 노란색이 아니었다. 노란색을 넘어서는 그 어떤 색이었다. - P223

버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난 뒤에는 삼베휴먼지가 날리듯 일했다. 부슬비가 온종일 촉촉하게 내린 이튿날에는 명주휴먼지가 차분하고 우아하게 일었다. 얌전하고 새침한 여학생의 까만 운동화 뒤회에서는 자미사흙먼지가 자미사는 얇고 부드러워 초가을 옷감
으로 쓰였다. 그것으로 치마를 해 입으면 걸을 때 사각사각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신작로를 따라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필즈음이면 노방흙먼지와 한라흙먼지가 한복 치마의 안감과 겉감처럼 겹쳐 일었다. 소의 혀같은 구름이 낮게 하늘을 뒤덮어 바람이 거의 일지 않는 날에는 양단홈먼지가 낮고 묵직하게 깔려 일었다. 바람이 잔잔하고 햇빛이 화창한 날에는 숙고사흙먼지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듯 일었다. 초봄에는 결이 촘촘하고 빳빳한 옥사흙먼지가 쌀쌀하게 손사래 치듯 일었다. 초복부터 중복까지 한여름에는 주로 툭툭한 광목흙먼지가, 건조하고 맑은 가을날에는 까끌까끌하고 쌍그런 모시흙먼지가 일었다.
모시흙먼지와 삼베흙먼지는 비슷한 듯 천지 차이였다. 모시흙먼지는 곱고 빛깔이 매화꽃처럼 고왔지만, 삼베흙먼지는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황달이 든 듯 누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 P239

건어물 행상 여자가 다녀갔는지 마루에 멸치가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넉 달 전쯤 찾아왔을 때 그녀의 배는 불러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새로 짓고 들깨토란탕을 끓여 그녀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밥을만 들깨토란탕을 연신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말했다. 배가 불러 행상을 다니는 자신이 불쌍하고 안쓰러운지 문전박대하는 집 없이 냉수라도 한 대접 먹여 보내더라고, 목이 타입이 간장좋지 같을 때는 냉수가 꿀물이라고… 금택은 그녀가 아들을 낳았을지 딸을 낳았을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가 또 딸을 낳았을 것 같아서였다.
걸쭉한 들깨 국물에 희멀건 토란이 둥둥 떠다니는 들깨토란탕은 운문 양단이었다. - P243

그럼에도 예술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누비옷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는 바늘과 실로 꽃이나 나비를 그리지 않았다. 흠질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바느질로, 가장 작은 바늘땀을 반복해서떴다. 점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떴다.
누비 바느질은 점을 통해 선에 도달했지만, 자수는 선을 통해 면에도달했다.
금택에게는 황금색 실로 입체감 있게 수놓은 나비나 꽃보다 0.2. 0.3센티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그리는 선이 훨씬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금택은 어머니가하는 누비 바느질 역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이라는 말을입속에서 중얼거리는 순간 갈비뼈들이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 같은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떨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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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랑몰랑한 백설기를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오전일한시경 부스에 든 뒤로 화장실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사이 햇살요양원 마당을 거닐던 노인들은 사라지고 없다. 늦은 오후의 산책을 끝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증발해버린 것 같다.
그녀는 의자 밑에 놓아둔 가방에서 은색 파우치를 꺼낸다.
화장품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얻은 파우치다. 파우치 지퍼를열고 립스틱을 꺼내든다. 립스틱을 바르자 입이 얼굴과 겉돌면서 붉게 떠오른다. 그녀는 립스틱을 덧바른 뒤 도로에 두눈을 고정시킨다.
석양이 깔려와 부레처럼 부풀어 보이는 도로 위로 차가 한대 나타난다. 차는 음산요금소를 향해 느리지도, 빠르지도않은 어중간한 속도로 달려온다. 차 종류와 색깔이 잘 분별이 안 된다. 그녀는 방금 립스틱을 발랐다는 것을 망각하고는 립스틱을 덧바르며, 검은색 그랜저가 아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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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생각했다. ‘릴리트‘라는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의사진이 그토록 끔찍하진 않았으리라.
릴리트는 유대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로, 최초의 여자이자아담의 첫 아내였다. 민담에 따르면, 하느님은 릴리트를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빚은 뒤 코에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릴리트는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첫날밤, 아담이 동침하려 했지만 릴리트는 그의 밑에 깔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주인이자 남편으로 섬기기를 거부한 릴리트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다. 얼마 뒤 하느님은 흙이 아니라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최초의여자이자 아담의 아내는 릴리트가 아닌 하와가 되었다. - P21

철식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어깨를 움츠렸다. 한순간 어머니의 눈동자가 카메라 렌즈를향했고, 철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흑백사진 속 정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에 가까운 탄식을 내질렀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이 자신이 생각했던것보다 훨씬슬픈 얼굴이어서, 슬픔이 깊어지면 감탄을 자아낸다는 걸,
어머니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앞에 놓고 그녀는 철식에게 물었다.
"악랄한 포주처럼 자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어떤 걸까? 그런 여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원망스럽고 저주스럽지 않을까? 더구나 아이가 아버지의 눈빛을 하고 있으면 그아이가 끔찍하지 않을까?"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 - P44

깻잎 밑에서 뛰고 있는 것은 아가미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어머니의 오그라든 심장이, 깻잎 밑에서 자맥질하듯 뛰고있었다.


한때 그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세상모든 폭력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탄 테러도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 P46

"당신, 무엇을 위해 시를 쓰지?"
"무슨 말이야?"
"시 말이야. 무엇을 위해 쓰지? 응?"
그녀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자 감정이 격해진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니었어?"
"영혼...…?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나는 지금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 P58

불멸할 것 같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그녀는 생각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신은 아버지에게 가장 존귀한사람을 보내주었다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 사람을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고. - P62

지난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게 아니야‘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들은 뒤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한 말이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오래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걸.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자신이, 자신의 영혼조차 어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혼이 나는 통과의례 같아. 나도, 당신도 피할 수 없는통과의례, 시속 백이십 킬로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만난 터널처럼....."
"그래...... "
"나는 이혼이라는 통과의례가 내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
"그래야겠지......" - P64

울산요금소를 통과하는 기분이 어떤지 그녀는 문득 궁금하다. 육 년 전 폐쇄된 요금소를 통과해 흘러든 뒤로 도시를벗어났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 화투장처럼 쌓인 ‘고속도로 통행권‘들이 미처 지불하지못한 고지서 같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순간순간 청구된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요금이 적힌 고지서들이 그녀 자신 앞에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쌓여 있는 것 같다. 뒤적뒤적 통행권들을 살피던 그녀는 한 장을 집어들고, 그것에 인쇄된 문장을소리내 읽는다. "통행료 미납, 기타 부정한 통행료 면탈의 경우 당행 통행료 외에 열 배의 부가 통행료를 부과합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하이패스 구간을 통과해 도시를 빠져나간다. 1.5톤 트럭 적재함에 실린 세간들이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것 같다. 그녀가 음산요금소 부스를 지키는 동안, 그녀의 원룸 세간들이 꾸려져 다른 도시로 보내지는 것같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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