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조르그는 그들이 지나가도록 비켜섰다. 크루쉬크들은 비로부터 총을 보호하기 위해 총신이 아래쪽을 향하게 들고 있었다. 그조르그는 신부의 혼수가 들어 있을 알록달록한 옷보따리를 살펴보면서, 신부의 부모가 넣어주었을 혼수 탄약통‘이 어느 은밀한 구석, 어느 상자 속, 어느 호주머니 속, 어느 수놓은 조끼 속에들어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것은 신부가 남편한테서 도망치려고할 경우, 남편이 사용할 권리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 생각에 겹쳐오랜 병치레 끝에 결국 혼사를 치를 수 없었던 그의 약혼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혼례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볼 적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그 일이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위안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기나긴 여생 동안 과부로 지내느니, 그가 이제 곧 그녀와 만나게 될그곳에 먼저 간 것이 그녀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인 듯 싶었던 것이다. - P38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섰으며, 누구도 피해자가 쓰러진 방향을 변경할 수 없듯, 또옛 카눈의 법칙들이 결코 수정될 수 없듯, 그 일에 대해 터럭만큼이라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드림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은 너무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에, 때로 그조르그는 그것을 상상하는 게 두려웠다. 그는 일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으며,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할지라도, 그런 삶은 그렇기 때문에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복수와는 상관없이 사는 몇몇가족들을 애써 떠올렸으나, 그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행복의 징후를 발견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위험과 관계없는 그런 삶으로는 생명의 값어치를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삶이덜 행복하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대로 복수가 들어온 가정들에서는 하루하루와 계절들이 그 속에 전율이 동반되어 있기라도한 듯 다른 가정들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으며, 그러한 가족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았고, 그러한 가정의 소년들은 소녀들로부터 더 인기를 끌었다. - P47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두려운 것, 위엄 같은 것이생겨났다. 그것을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가슴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심장이 그렇게 밖으로 노출되어 있기때문에 상처받기 쉬울지는 몰라도 공격에 극도로 민감하고, 크고작은 모든 사물들-나비, 나뭇잎,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벌판, 혹은 오늘 내리고 있는 비만큼이나 처절하게 내리는 비-에 대해서도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그의 심장 위로 쏟아져내린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의 심장은 그것을 다 견뎌낼 것이며, 그 이상도 받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P48
그는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런 바람 이상으로그는 현재 그가 받고 있는 기묘한 인상에 더욱 놀랐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턱이 조금씩 형태가 변해가는 같았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목젓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그들은 추운 겨울밤 내내 그날 분의 꼴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그것을 되씹기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복수를 한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나흘이오, 댁은요?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거친 모직 외투에서 조금씩조금씩 흘러나왔다. 검은 바퀴벌레와도 닮은 그들의 이야기는 슬금슬금 기어다니다가 서로 부딪치기도 했다. 삼십 일간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겁니까? 난 그동안 뭘 할까? - P87
문이 열리더니 한 낯선 사내가 들어왔다. 한눈에 그가 멀리서왔음을 알 수 있었다. 두세 차례 무심한 불빛이 그를 비추었다. 불빛은 그가 진흙투성이에, 후줄근하게 젖은 모습까지 알아볼 수있을 정도로 비추더니 그를 다시 어둠 속에 내동댕이쳤다. 깜짝 놀란 듯한 그 남자는 구석 쪽으로 가더니 나무 밑동 곁에자리를 잡았다. 그조르그는 불과 몇 시간 전, 그곳에 들어왔을 때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기 위해 곁눈으로 계속 그를 살폈다. 그 남자는 두건이 달린 망토를 벗더니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그의 사연은, 겉으로도 보이는 것처럼, 여전히 그의 내부 깊숙이 묻혀 있었다. 아직은 그의 목구멍에서 한참 먼 곳에 묻혀 있었다. 혹 그의 이야기가 아직 그의 육체와 일체가 되지 않았다면, 표면에, 그러니까 막 살인을 저지르고 꽁꽁 얼어, 완수하지 못한어떤 것을 이루고 싶기라도 한 듯 무릎 주위에서 신경질적으로떨리고 있는 두 손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 P88
"손님은 정말 반신의 존재야. 그리고 처음 온 자가 돌연 손님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神性)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강화시켜주지 어느 집 대문을 몇 차례 두드리는 것만으로 하루아침에 신적인 지위를 획득한다는 사실은 신성을 한층 진실되게 해주지.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길손이 우리집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우리의 손님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며 그 순간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물, 범할 수 없는 지배자, 입법자, 이 세상의 불꽃으로 변하는 거지. 이런 변신의 돌연성이야말로 신성의 특성이라 하겠지. 고대 그리스인들의신들은 가장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불쑥 나타나곤 하지 않았어? 바로 그런 식으로 손님은 알바니아인의 대문 앞에 출현하는거지. 다른 모든 신들처럼 그는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어. 그는 운명이라 해도 좋고 숙명이라 해도 좋을 왕국에서 곧장 그리로 온거야 몇 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전(全) 세대의 생존이나소멸이 좌우될 수 있지. 산악 지방 알바니아인들에게 손님은 그런 존재라구." - P117
"그래서 베사로 결속된 손님이 불행을 당하는 것은 알바니아인으로서는 불행 중의 불행, 일종의 세상의 종말이 되는 거지." 그는 이 지역에서 자신의 손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치욕 중의치욕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아버지나 아들의 피의 회수는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손님의 피는 그렇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알바니아인의 집은 신과 손님의집‘이라는 그 굉장한 격언의 의미였다. 그녀는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 산들을 바라볼 때 세상의 종말이라는 시각보다 더 적절한 시각은 갖기 힘들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 P118
"햄릿은 분명한 동기에 의해 살인으로 내몰렸다고 말해야겠지. 그런데 그는 - 베시안은 손으로 그들이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ㅡ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동기, 때로는 그의 시대 너머에 존재하기도 하는 동기에 자극을 받은거야." 디안은 그 말의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주의 깊게듣고 있었다. 베시안이 말을 이었다. "그토록 먼 곳에서 온 명령에 따라 죽음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거인 같은 의지가 필요할 거야. 실제로 그런 명령은 때론이미 죽고 없는 세대들을 포함하여, 실로 아주 먼 곳에서 오기도하니까." - P172
창 너머에는 고뇌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오한이들 정도로 추웠지만 캄캄절벽 같은 어둠 속에서 작고 연약한 빛을 애타게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불빛을 찾았다. 불빛은 저 아래, 같은 장소에, 깊은 심연 속에, 너무도 약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어서 어둠에 삼켜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했다. 한동안 그녀는 어둠의 심연 속에 있는 한 점 가느다란 그 붉은불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원시의 불, 지구의 속살로부터 한줄기 약한 섬광이 비친, 천년의 마그마에서 분출한빛 같았다. 혹은 지옥의 문으로부터 나오는 빛 같기도 했다. 돌연참을 수 없이 강렬하게, 이 지옥을 거쳐갔을 남자의 영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조르그, - P193
그는 죽음의 메커니즘이 태곳적부터 그곳에 밤낮없이 돌아가는 고대의 물레방아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피의관리인으로서 그것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추방됐다는 느낌을 가시게 하는 데 일말의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하여, 한층 낯선 모습으로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지도와 장례 식사 때 펴놓는 식탁보 사이의 그 무엇 같은 차가운 평원을 마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장서실의 창가에 서서, 죽음을 부르는 지역의 지도를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엄정한 순서에 따라고원지대의 비옥한 대지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 P221
그조르그는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는 그곳에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위해 무란의 돌멩이들을 뽑아 사방으로 내던진 후, 그 위로 몸을날리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은 맹렬히 길 위에서 돌멩이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그는 돌멩이를 하나 발견했고, 손의 살갗이 반쯤 벗겨지기라도 한듯 익숙지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무덤 위에 던졌다. 돌멩이는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두세 차례 굴러가다가 다른 돌멩이들 사이에 끼어 멈추었다. 그조르그는 다시 움직이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 그곳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그 자리에 영원전부터 그렇게 던져져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그는 그렇게 서 있는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 P236
그조르그는 그 지역을 여러 날째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여정은 자주 바뀌었다. 길을 따라 있는 주막들, 낯선 얼굴들. 그는 자기 마을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라프쉬가, 특히 겨울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없는 곳인 줄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원 지대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그들의 고장에서 중심부로 끊임없이 물밀듯 몰려들어오고, 또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쪽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갔고 어떤 사람들은 내려갔다. 대부분은 같은 마을을 지나면서도 올라가기도 하고내려가기도 했다. 그것이 하도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결국 사람들은 현재 있는 곳이 출발한 지점보다 더 높은 곳인지 아니면 더낮은 곳인지 분간할 수 없어 당황해했다. - P241
이따금 그조르그는 날짜의 흐름을 생각하곤 했다. 그로서는시간의 흐름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았다. 나날들은 어느시간까지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복숭아 꽃잎 위에서한동안 바르르 떨다가 갑자기 굴러떨어져 부서지고는 마침내 죽고 마는 물방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월이 왔다. 그러나 봄은정착하기가 매우 힘든 모양이었다. 이따금 알프스 산자락에 드리 - P241
워진 푸른 띠를 볼 때면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되었다. 드디어 사월이 왔군요, 주막에서 서로 소개를 하면서 길손들은 그렇게 말했다. 올해의 봄은 너무 늦게 찾아온 감은 있었지만 환영을 받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휴전 날짜의 종료에 관한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다. 충고 전부는 아닌, 그렇다고 충고의 일부도 아닌, 단지 "얘야" 하던 그 말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월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의사월은 두 동강 나 반쪽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것에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배낭 속에 빵과 소금이없을 때조차 결코 이야깃거리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는 길손들의이야기에 그는 열심히 귀를 귀울였다. - P242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지 마." 물론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무언가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만일 무언가가 회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 고원 지대에 있을때에 가능한 것이며, 일단 아래로 내려가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회복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둠이 완전히 깔려 있었으며, 그는 더이상 그녀의 얼굴을 분간해낼 수 없었다. 그는 두세 차례 창가로 몸을 기울였으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 뒤 달이 길에 밝은 빛을 드리우자, 그는 차창에 이마를 붙였다. 차디찬 차창의 요동이 그의 머리로, 이어 전신으로 전달됐으나, 그는 한동안 그런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 P253
그들은 마을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파를 내려준후 걸어서 노파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어 마차는 주술이 걸린 것 같은 그 돌의 세계를 가로질러 다시 여정에 올랐다. 아, 저벽들 속에 사람들이 있다니! 수줍은 가슴을 지닌 처녀들과 신부(新婦)들까지 있다니! 라고 베시안은 생각했다. 한순간 그는 저딱딱한 외관 뒤로 끊어질 듯 팽팽하며, 베토벤의 리듬으로 벽을울려대는 생명의 맥박을 감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외부의 벽들과 총안들, 그리고 그 위로 스치는 희미한 햇살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돌연 그는 속으로 외쳤다. 저런 것들이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네 아내의 뻣뻣한 태도에나신경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는 갑자기 속에서 울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며, 이번에야말로 견딜 수 없는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태도, 그녀의 무력감, 그녀의 수수께끼에대해 속 시원한 해명을 요구할 생각으로 불쑥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 P262
마차가 그 불길한 마을을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아내와의 해명을 뒤로 미룬 이유는 오직 두려움 때문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 두렵다구, 그런데 이 두려움의 실체는 과연 뭐지? 그가 느끼고 있는 죄의식은 그들의 여행중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사실 그런 죄의식은 훨씬 오래전에 잉태된 것이었으며, 아마도 그가 이 여행을 계획했던 것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디안의 해명이 그의 죄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는 두려움이 그를 전율케했다. 아니다. 그녀가 이 ‘십자가의 길‘을 지나는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그녀가 미라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이 나았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말을 그녀에게서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 P264
"당신의 책들, 당신의 예술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오. 이 불행한 산악 지방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소재나 찾고 있소.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살찌우기 위해, 미(美)를 찾기 위해 이곳에왔소, 십중팔구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어떤 젊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당신은 그것이 살인의 미학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오. 당신은 내게 러시아 위선자들의 궁전에서 상연되던 연극을 연상시키오. 그곳의 무대는 수백 명의 연기자들이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큼넓은 반면, 객석은 오직 왕가만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요. 당신이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그 위선자들이란 말이오. 한 민족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 좌석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 - P294
그리고 그녀가 그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보다 더 한층 믿기지 않는 일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 사람들이 그녀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근방을 헤매는 것을 보았는지도 모르지만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의 행방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그녀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곳까지 갔으며,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녀 자신조차 어떻게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몇 마디나마 고원 지대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로 판단해보건대, 그녀는 아마도 그 순간 완벽한 초월의 경지, 그러니까 탑 속에 들어간다는 생각만이아니라, 그 문까지 걸어간다는 것도 대단찮은 일로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무중력 상태를 겪은 것 같았다. - P298
그는 폭포를 두고 돌아서기가 힘들었다. 직사각형을 펼쳐놓은듯한 길은 한없이 뻗어 있었으며, 그 끝은 주홍빛으로 얇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남아 있었다. 베사가 끝나면, 그는 카눈의 시간을 벗어날 것이었다. 시간을 벗어난다…… 그는 되뇌었다. 사람이 그처럼 자신의시간으로부터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은 조금 남았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서 그는다시 되뇌었다. 구름층의 으깨어진 장미들은 이제 약간 어두워져있었다. 그조르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했다. 어쩔 것인가 하는 수 없지! - P312
이따금, 그를 두렵게 만드는 마음의 평정이 찾아오면, 그는 고원 지대에 그만큼의 조공(租貢)을 지불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 그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요정과 오레이아스들에 대해, 그가 들어앉아 유혈이 낭자한 사람들이 벌이는 연극을 보았던 극장의 작은 박스 좌석에 대한 조공을. 그러나 벌은 아무 데서든, 예컨대 티라나에서도 그에게 닥칠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각했다. 고원 지대는 아주 멀리까지, 나라 전체에, 모든 시대에 그 파장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투 소매를 올리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오였다. - P314
그조르그는 고개를 들고 구름층 밑으로 보이는 태양의 자취를더듬으며 생각했다. 정오로군. 그의 베사는 이제 종료되었다. 그는 대로를 따라 펼쳐진 황무지로 천천히 올라섰다. 지금부턴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릴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사방 풍경은인적이 끊겨 황량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카눈에 대한 위반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지였다. 멀리 경작지와 몇 그루의나무가 보였으나, 그의 주변에는 자그마한 동굴조차 없었다. 하다못해 몸을 숨길 만한 덤불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피신처를 발견하면 즉시 그곳으로 가서 숨어야지. 그가 그렇게 몸을 노출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숨을 만한 곳을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은 듯,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야는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 P315
베시안은 집으로 아내의 빈 껍데기만 가져가고, 진짜 그녀는 산중 어디엔가에 놓아두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이제 한 달 전, 그들의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헐벗은 황무지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라프쉬를 보기 위해, 아마도 마지막으로 그곳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산들이 침묵 속에서천천히 줄을 지어 지나갔다. 희끄무레한 안개가 연극이 막 끝난무대 위로 드리워지는 커튼처럼 산들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 P325
같은 순간, 그조르그는 한 시간 전에 들어선 ‘깃발들의 대로‘ 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대기 속에서 처음으로 석양의 서늘한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는 도로의 한쪽으로부터 몇 마디 짧은 말소리를 들었다. "그조르그, 인사말 좀 전해주렴, 제프 크리예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어깨에서 소총을 내리려 했으나, 그의동작은 그 끔찍한 이름의 나머지 절반인 ‘키크‘라는 음절과 뒤섞였다. 그 음절은 어수선하게 그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그조르그는 땅이 앞뒤로 흔들거리다가 격렬하게 뒤흔들리더니, 이내 그의 얼굴에 와서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그조르그는 고꾸라졌다. 한순간 세상은 아주 고요해진 것 같았다. 이어 고요한 침묵 사이로 그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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