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 헐렁한 승복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지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자유롭고 행복하게 해드린 적이 있었을까.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이 저렇게 삶의 때가 안 낀 천진덩어리일 수가 있다니.
암만해도 저건 현실이 아니야,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영주는 그래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못했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곳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과 환상사이는 아무리 지척이라도 아무리 서로 투명해도 절대로 넘을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 P338

아침상에 앉은 세 사람은 모처럼 잘 잤다며 집터가 좋은가 보다고 덕담까지 해주었다. 내 보기에도 그들은 어제보다 훨씬 맑고 개운해 보인다. 어디로 보나 망측하고 지저분한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 같지가 않다.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나고 샘도났다. 그래서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툭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풍기면 어쩌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들을했죠?"
"어떻게 풍겨요. 우리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끼리도 어제 같이 잤지만 서로 그런 거 안 물어봤거들랑요."
용용 죽겠지 하는 투의 ‘소아마비‘의 대답은 옳았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왜 물어봤을까. 어떤 상처하고 만나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내 몸이 나는 대책 없이 불쌍하다.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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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공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 P10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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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어느 화랑의 내부를 천천히비추어 나갔다. 특이하게도 그 화가의 작품은 모두 바위를 정으로 쏜 질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사람이든 나무든,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은 모두 그러한 바탕에만 그려져 있었다.
그 화가는 아마도 외로움을 많이 탔거나 가족을 잃어 본 경험이 있는 듯했다. 왜냐하면 그 화가의 작품은 모두 우리가 흔히가족이라고 하는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모습만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외로움이 얼마나 깊었으면,
화폭 위에 가족의 구성원들만 그려 놓았을까?
그의 그림은 어느 것 하나 얼굴만 그려져 있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소품일지라도 카메라는 그의 그림 속 인물은 모두 전신이 다 그려져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보여 주었다. 그에게 가족은 얼굴, 그것만이 아니라 몸뚱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 P31

특이한 점은 나무 그림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나무를 그릴 때는 벗은 모습만 그렸다. 잎사귀가 무성하게 달린 나무는 찾아볼수 없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벗은 나무처럼 외로움을 무척 탔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은할 수 없이 옷을 걸치게 했지만, 나무에까진 그럴 필요가 없어벌거벗은 그대로 두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벌거벗은 나무는 화가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을 헐벗은 채 견뎌내야 하는 나무.
그렇다고 사람들의 모습이 나무의 모습보다 화려하거나 번잡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람들의 서있는 모습 또는 앉아 있는 모습. 사람들의 외로움을 나타내기엔얼굴보다도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전신의 모습이 더 적당하다고 화가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 P32

그러나 나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어쩌면 변화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것은 어차피 받아들여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디선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부인 듯한 남녀가 다투는 소리였다. 이 밤에 저 부부는 뭐가어긋나서, 생활이 어떻게 자신들을 속여서 다투는 것일까? 문득그 다툼 소리가 낯설지 않고 아주 익숙한 소리로 느껴졌다.
저 소리……. 부부가 살 비비며 사는 부부가 조금 뒤틀리고헝클어지고 뒤집어지고 어긋난 일이 있다고, 잠자리를 박차고일어나 한밤중에 너 죽고 나 죽자며 싸우는 저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밤엔 저 소리가 오히려 정겹다. 저 소리, 저소리가 정겹다. - P37

십년 전, 한창 피어나는 여고 2학년 때, 5월 어느 날이었어요.
우리가 살던 이 도시에 난리가 났어요. 사람들은 순박하기 짝이없었는데 서울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어요. 여기 사는 우리를 모두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설마 설마 했어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높은 사람들이 법을 어겨 가며 자리다툼하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기에 우린 그러지 말라고 모여서 떠든죄밖에 더 있느냐. 그런데 오히려 우리를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여기 사람들은 모두 흥분했지요. 아주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 때 나라는 몹시 어지러웠어요. 그런데도 높은 사람들은 나라를 바로 다스릴 생각은 않고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둥 오히려큰소리였어요. 그래서 우린 일어났지요. 그렇지만 어디까지나의사 표현 정도로만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친 거예요.  - P110

그 때 전 무얼 했냐구요? 여고 2학년이면 얼마나 꿈이 많았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보고 교복을 입은 채로 시민군 차에 올라탔어요. 그러고는 주먹밥 당번을 했지요. 주택가에서 아줌마들이 만들어 놓은 주먹밥을 시내로 나르는 일을 맡았는데, 그 일이 웬만큼 몸에 밴 어느 날 검문소 부근의 갈림길에서 총 소리가 나더군요. 본능적으로 차 바닥에 엎드렸지만, 제가탄차 운전사가 총에 맞아 차가 뒤집히고 저는 길 옆 도랑에 팽개쳐졌어요. 나중에 보니 제가 가슴에 총을 맞았더라구요. 그래도 모진 것이 사람 목숨이라, 그 때 죽지 않고 도랑 둑을 타고 벌벌 기어 나와 이렇게 살았지요. 몇 번씩 죽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뜻대로 안 되더군요.
치료하느라 일 년 가까이 누워 있던 병원의 간호사 언니가 잘해 줘서 저도 간호사가 되기로 했어요. 여고 남은 기간 어찌어찌마치고 나서 간호보조원 양성소에 들어갔지요. - P111

이에서 시체로 발견됐어요.
대학생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괴심에다 친동생인 제가 이렇게 된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정신분열이 일어났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만 거예요.
그런데 오빠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어요. 웅덩이는 어른이 빠져 죽을 만큼 깊지도 않은데다가, 오빠가 약을 먹었다는 흔적도없었거든요. 나중에 들으니까 오빠가 시내 중심가의 분수대에올라가 만세를 부르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오빠의 죽음은 일단 정신질환을 앓는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어요.
그 때 신문은 이렇게 썼지요. ‘집 나온 정신 질환 대학생 변사체로 발견, 음주 후 실족사로 추정‘이라고요. - P116

저는 갑자기 이 도시가 거대한 정신과 병동처럼 느껴졌어요.
무딘 사람들만이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마음이섬세한 사람이라면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정신과병동 말이에요! 좀더 강하고 좀더 질겨야 살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강하고 질기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갑갑하고 너무 막히고 너무 닫혀 있는 세상이에요. 하지만 이런 생각만 하고 앉아 있을수도 없었어요. 병실에서는 언제나 또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 P117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그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하는데아직 그것까지 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사랑을 배신하거든요…."
나는 이 대목에서 걸려 넘어졌다. 어떻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나. 그런데 아가씨는 그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그건좀 이상하다. 그건 좀 이상하다! 원수는 깔아뭉개서 끝까지 쳐부숴야 한다.
다행히 아가씨도 아직은 그들까지 사랑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내 팔을 훔쳐간 원수들에게 수배령을 더욱 단단히 내렸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아가씨의 오른쪽 가슴을 훔쳐 간 원수들에 대한 수배령까지 내렸다. 아가씨는 원수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지만, 내가 아는 사랑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없다. 그놈들을 찾아 내서 원래대로 모든 것을 돌려 놓고 혼내주리라. 혼내주리라! - P119

나는 이제야 보고한다.
너무나 많이 쏘다니고, 너무나 자연스레 나를 내주고, 너무나힘있게 나를 던졌던 그 도시, 그 거리.아니, 이 도시, 이 거리에내가 평범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이제 다시 낯설지 않게 되었다는 뒷얘기와 함께.
그리고 나는 덧붙여 알려 준다.
이젠 누구든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또 나는 분명히 힘주어 말한다.
나는 지렁이보다 구렁이보다 바퀴벌레보다 쥐보다 더 큰 힘으로 살고 싶다고. 화해는 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 ?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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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E


매년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세계적인 거장, 1936년 알바니아 남부의 기이로카스터르에서 태어났다. 알바니아 최고의 명문 티라나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26세 때 발표한 처녀작 죽은 군대의장군」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등장으로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던 알바니아의 정치적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산독재정권하의 조국 알바니아의 혼과 집단기억을 문학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리는그의 작품들은 마르케스의 그것에 비견되며, 전제주의와 유토피아의 위험을 고발하는 헉슬리와 오웰의 뒤를 잇는 반(反)유토피아 가계의 후예로 꼽히기도 한다. 우스꽝스러운 비극과 기괴한 웃음의 조화, 우화와 신비에 싸인 놀라운 이야기로 세계적 작가의 자리를 굳혔으며, 1990년 독재정권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한 이래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인간 실존의 비극적 상황을그려낸 대표작 부서진 사월은 유럽 전역에서 극찬을 받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는 죽은 군대의 장군」 「광기의 풍토」서류」 「꿈의 궁전, 아가멤논의 딸」 「후계자」 등이 있다.



이십대의 청년 조르그는 몇 날 밤을 매복한 끝에 원수의 가족 중 한명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다. 그의 임무는 마침내 완수되었다. 그러나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알바니아의 관습법 ‘카눈‘에 의해 이제는 그 자신이 복수의 희생양이 될 차례다. 작가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그조르그의 한 달이 채 못 되는 휴가를 긴장과 초조, 전율, 때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변주하며 긴박하게 그의 뒤를 좇는다.




그조르그는 그들이 지나가도록 비켜섰다. 크루쉬크들은 비로부터 총을 보호하기 위해 총신이 아래쪽을 향하게 들고 있었다.
그조르그는 신부의 혼수가 들어 있을 알록달록한 옷보따리를 살펴보면서, 신부의 부모가 넣어주었을 혼수 탄약통‘이 어느 은밀한 구석, 어느 상자 속, 어느 호주머니 속, 어느 수놓은 조끼 속에들어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것은 신부가 남편한테서 도망치려고할 경우, 남편이 사용할 권리가 있는 물건이었다. 그 생각에 겹쳐오랜 병치레 끝에 결국 혼사를 치를 수 없었던 그의 약혼녀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혼례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볼 적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그 일이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위안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기나긴 여생 동안 과부로 지내느니, 그가 이제 곧 그녀와 만나게 될그곳에 먼저 간 것이 그녀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인 듯 싶었던 것이다.  - P38

그러나 그는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섰으며, 누구도 피해자가 쓰러진 방향을 변경할 수 없듯, 또옛 카눈의 법칙들이 결코 수정될 수 없듯, 그 일에 대해 터럭만큼이라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두드림이 없었더라면 모든 것은 너무도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에, 때로 그조르그는 그것을 상상하는 게 두려웠다. 그는 일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으며,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할지라도, 그런 삶은 그렇기 때문에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복수와는 상관없이 사는 몇몇가족들을 애써 떠올렸으나, 그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행복의 징후를 발견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위험과 관계없는 그런 삶으로는 생명의 값어치를 알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삶이덜 행복하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대로 복수가 들어온 가정들에서는 하루하루와 계절들이 그 속에 전율이 동반되어 있기라도한 듯 다른 가정들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으며, 그러한 가족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았고, 그러한 가정의 소년들은 소녀들로부터 더 인기를 끌었다.  - P47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두려운 것, 위엄 같은 것이생겨났다. 그것을 뭐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가슴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심장이 그렇게 밖으로 노출되어 있기때문에 상처받기 쉬울지는 몰라도 공격에 극도로 민감하고, 크고작은 모든 사물들-나비, 나뭇잎,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벌판, 혹은 오늘 내리고 있는 비만큼이나 처절하게 내리는 비-에 대해서도 기뻐하거나 슬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그의 심장 위로 쏟아져내린다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의 심장은 그것을 다 견뎌낼 것이며, 그 이상도 받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P48

그는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매우 놀랐다. 그러나 그런 바람 이상으로그는 현재 그가 받고 있는 기묘한 인상에 더욱 놀랐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턱이 조금씩 형태가 변해가는 같았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목젓까지 올라와 있었으며, 그들은 추운 겨울밤 내내 그날 분의 꼴을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그것을 되씹기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복수를 한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나흘이오, 댁은요?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거친 모직 외투에서 조금씩조금씩 흘러나왔다. 검은 바퀴벌레와도 닮은 그들의 이야기는 슬금슬금 기어다니다가 서로 부딪치기도 했다. 삼십 일간의 휴전 기간 동안 뭘 할 겁니까?
난 그동안 뭘 할까? - P87

문이 열리더니 한 낯선 사내가 들어왔다. 한눈에 그가 멀리서왔음을 알 수 있었다. 두세 차례 무심한 불빛이 그를 비추었다. 불빛은 그가 진흙투성이에, 후줄근하게 젖은 모습까지 알아볼 수있을 정도로 비추더니 그를 다시 어둠 속에 내동댕이쳤다.
깜짝 놀란 듯한 그 남자는 구석 쪽으로 가더니 나무 밑동 곁에자리를 잡았다. 그조르그는 불과 몇 시간 전, 그곳에 들어왔을 때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기 위해 곁눈으로 계속 그를 살폈다. 그 남자는 두건이 달린 망토를 벗더니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그의 사연은, 겉으로도 보이는 것처럼, 여전히 그의 내부 깊숙이 묻혀 있었다. 아직은 그의 목구멍에서 한참 먼 곳에 묻혀 있었다. 혹 그의 이야기가 아직 그의 육체와 일체가 되지 않았다면, 표면에, 그러니까 막 살인을 저지르고 꽁꽁 얼어, 완수하지 못한어떤 것을 이루고 싶기라도 한 듯 무릎 주위에서 신경질적으로떨리고 있는 두 손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 P88

"손님은 정말 반신의 존재야. 그리고 처음 온 자가 돌연 손님으로 변한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神性)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강화시켜주지 어느 집 대문을 몇 차례 두드리는 것만으로 하루아침에 신적인 지위를 획득한다는 사실은 신성을 한층 진실되게 해주지.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길손이 우리집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우리의 손님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며 그 순간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물, 범할 수 없는 지배자, 입법자, 이 세상의 불꽃으로 변하는 거지. 이런 변신의 돌연성이야말로 신성의 특성이라 하겠지. 고대 그리스인들의신들은 가장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불쑥 나타나곤 하지 않았어? 바로 그런 식으로 손님은 알바니아인의 대문 앞에 출현하는거지. 다른 모든 신들처럼 그는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어. 그는 운명이라 해도 좋고 숙명이라 해도 좋을 왕국에서 곧장 그리로 온거야 몇 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전(全) 세대의 생존이나소멸이 좌우될 수 있지. 산악 지방 알바니아인들에게 손님은 그런 존재라구." - P117

"그래서 베사로 결속된 손님이 불행을 당하는 것은 알바니아인으로서는 불행 중의 불행, 일종의 세상의 종말이 되는 거지."
그는 이 지역에서 자신의 손님을 배신한다는 것은 치욕 중의치욕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하면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아버지나 아들의 피의 회수는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손님의 피는 그렇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알바니아인의 집은 신과 손님의집‘이라는 그 굉장한 격언의 의미였다.
그녀는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 산들을 바라볼 때 세상의 종말이라는 시각보다 더 적절한 시각은 갖기 힘들리라는 인상을 받았다. - P118

"햄릿은 분명한 동기에 의해 살인으로 내몰렸다고 말해야겠지. 그런데 그는 - 베시안은 손으로 그들이 지나온 길을 가리켰다ㅡ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동기, 때로는 그의 시대 너머에 존재하기도 하는 동기에 자극을 받은거야."
디안은 그 말의 의미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주의 깊게듣고 있었다.
베시안이 말을 이었다.
"그토록 먼 곳에서 온 명령에 따라 죽음으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거인 같은 의지가 필요할 거야. 실제로 그런 명령은 때론이미 죽고 없는 세대들을 포함하여, 실로 아주 먼 곳에서 오기도하니까." - P172

창 너머에는 고뇌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오한이들 정도로 추웠지만 캄캄절벽 같은 어둠 속에서 작고 연약한 빛을 애타게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불빛을 찾았다. 불빛은 저 아래, 같은 장소에, 깊은 심연 속에, 너무도 약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어서 어둠에 삼켜지기 일보직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했다. 한동안 그녀는 어둠의 심연 속에 있는 한 점 가느다란 그 붉은불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원시의 불, 지구의 속살로부터 한줄기 약한 섬광이 비친, 천년의 마그마에서 분출한빛 같았다. 혹은 지옥의 문으로부터 나오는 빛 같기도 했다. 돌연참을 수 없이 강렬하게, 이 지옥을 거쳐갔을 남자의 영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조르그, - P193

그는 죽음의 메커니즘이 태곳적부터 그곳에 밤낮없이 돌아가는 고대의 물레방아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피의관리인으로서 그것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그곳에서 추방됐다는 느낌을 가시게 하는 데 일말의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하여, 한층 낯선 모습으로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지도와 장례 식사 때 펴놓는 식탁보 사이의 그 무엇 같은 차가운 평원을 마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장서실의 창가에 서서, 죽음을 부르는 지역의 지도를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엄정한 순서에 따라고원지대의 비옥한 대지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 P221

그조르그는 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는 그곳에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위해 무란의 돌멩이들을 뽑아 사방으로 내던진 후, 그 위로 몸을날리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리가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은 맹렬히 길 위에서 돌멩이를 찾아 헤맸다. 마침내 그는 돌멩이를 하나 발견했고, 손의 살갗이 반쯤 벗겨지기라도 한듯 익숙지 않은 동작으로 그것을 무덤 위에 던졌다.
돌멩이는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두세 차례 굴러가다가 다른 돌멩이들 사이에 끼어 멈추었다. 그조르그는 다시 움직이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 그곳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그 자리에 영원전부터 그렇게 던져져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그는 그렇게 서 있는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 P236

그조르그는 그 지역을 여러 날째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여정은 자주 바뀌었다. 길을 따라 있는 주막들, 낯선 얼굴들. 그는 자기 마을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라프쉬가, 특히 겨울에는 사람들의 이동이 없는 곳인 줄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원 지대는 활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그들의 고장에서 중심부로 끊임없이 물밀듯 몰려들어오고, 또 그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쪽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갔고 어떤 사람들은 내려갔다. 대부분은 같은 마을을 지나면서도 올라가기도 하고내려가기도 했다. 그것이 하도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결국 사람들은 현재 있는 곳이 출발한 지점보다 더 높은 곳인지 아니면 더낮은 곳인지 분간할 수 없어 당황해했다. - P241

이따금 그조르그는 날짜의 흐름을 생각하곤 했다. 그로서는시간의 흐름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았다. 나날들은 어느시간까지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복숭아 꽃잎 위에서한동안 바르르 떨다가 갑자기 굴러떨어져 부서지고는 마침내 죽고 마는 물방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월이 왔다. 그러나 봄은정착하기가 매우 힘든 모양이었다. 이따금 알프스 산자락에 드리 - P241

워진 푸른 띠를 볼 때면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되었다. 드디어 사월이 왔군요, 주막에서 서로 소개를 하면서 길손들은 그렇게 말했다. 올해의 봄은 너무 늦게 찾아온 감은 있었지만 환영을 받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휴전 날짜의 종료에 관한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다. 충고 전부는 아닌, 그렇다고 충고의 일부도 아닌, 단지 "얘야" 하던 그 말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월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의사월은 두 동강 나 반쪽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것에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배낭 속에 빵과 소금이없을 때조차 결코 이야깃거리를 떨어뜨리는 법이 없는 길손들의이야기에 그는 열심히 귀를 귀울였다. - P242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지 마."
물론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무언가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만일 무언가가 회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 고원 지대에 있을때에 가능한 것이며, 일단 아래로 내려가고 나면 더이상 아무것도 회복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둠이 완전히 깔려 있었으며, 그는 더이상 그녀의 얼굴을 분간해낼 수 없었다. 그는 두세 차례 창가로 몸을 기울였으나,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 뒤 달이 길에 밝은 빛을 드리우자, 그는 차창에 이마를 붙였다. 차디찬 차창의 요동이 그의 머리로, 이어 전신으로 전달됐으나, 그는 한동안 그런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 P253

그들은 마을 한복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파를 내려준후 걸어서 노파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어 마차는 주술이 걸린 것 같은 그 돌의 세계를 가로질러 다시 여정에 올랐다. 아, 저벽들 속에 사람들이 있다니! 수줍은 가슴을 지닌 처녀들과 신부(新婦)들까지 있다니! 라고 베시안은 생각했다. 한순간 그는 저딱딱한 외관 뒤로 끊어질 듯 팽팽하며, 베토벤의 리듬으로 벽을울려대는 생명의 맥박을 감지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로 외부의 벽들과 총안들, 그리고 그 위로 스치는 희미한 햇살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돌연 그는 속으로 외쳤다. 저런 것들이대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네 아내의 뻣뻣한 태도에나신경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는 갑자기 속에서 울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며, 이번에야말로 견딜 수 없는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의 태도, 그녀의 무력감, 그녀의 수수께끼에대해 속 시원한 해명을 요구할 생각으로 불쑥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 P262

마차가 그 불길한 마을을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아내와의 해명을 뒤로 미룬 이유는 오직 두려움 때문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두려워, 두렵다구, 그런데 이 두려움의 실체는 과연 뭐지?
그가 느끼고 있는 죄의식은 그들의 여행중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사실 그런 죄의식은 훨씬 오래전에 잉태된 것이었으며, 아마도 그가 이 여행을 계획했던 것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디안의 해명이 그의 죄의식과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는 두려움이 그를 전율케했다. 아니다. 그녀가 이 ‘십자가의 길‘을 지나는 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그녀가 미라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이 나았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말을 그녀에게서 듣지 않는 편이 나았다. - P264

"당신의 책들, 당신의 예술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오. 이 불행한 산악 지방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소재나 찾고 있소.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살찌우기 위해, 미(美)를 찾기 위해 이곳에왔소, 십중팔구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어떤 젊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당신은 그것이 살인의 미학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오. 당신은 내게 러시아 위선자들의 궁전에서 상연되던 연극을 연상시키오. 그곳의 무대는 수백 명의 연기자들이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큼넓은 반면, 객석은 오직 왕가만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요. 당신이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그 위선자들이란 말이오. 한 민족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 좌석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 - P294

그리고 그녀가 그 속에 들어갔다는 사실보다 더 한층 믿기지 않는 일은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
사람들이 그녀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근방을 헤매는 것을 보았는지도 모르지만 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의 행방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그녀에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곳까지 갔으며,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녀 자신조차 어떻게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몇 마디나마 고원 지대에 대해 그녀가 했던 말로 판단해보건대, 그녀는 아마도 그 순간 완벽한 초월의 경지, 그러니까 탑 속에 들어간다는 생각만이아니라, 그 문까지 걸어간다는 것도 대단찮은 일로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무중력 상태를 겪은 것 같았다. - P298

그는 폭포를 두고 돌아서기가 힘들었다. 직사각형을 펼쳐놓은듯한 길은 한없이 뻗어 있었으며, 그 끝은 주홍빛으로 얇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남아 있었다. 베사가 끝나면, 그는 카눈의 시간을 벗어날 것이었다. 시간을 벗어난다…… 그는 되뇌었다. 사람이 그처럼 자신의시간으로부터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은 조금 남았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서 그는다시 되뇌었다. 구름층의 으깨어진 장미들은 이제 약간 어두워져있었다. 그조르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했다. 어쩔 것인가 하는 수 없지! - P312

이따금, 그를 두렵게 만드는 마음의 평정이 찾아오면, 그는 고원 지대에 그만큼의 조공(租貢)을 지불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 그가 작품 속에서 묘사한 요정과 오레이아스들에 대해, 그가 들어앉아 유혈이 낭자한 사람들이 벌이는 연극을 보았던 극장의 작은 박스 좌석에 대한 조공을.
그러나 벌은 아무 데서든, 예컨대 티라나에서도 그에게 닥칠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그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생각했다. 고원 지대는 아주 멀리까지, 나라 전체에, 모든 시대에 그 파장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외투 소매를 올리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오였다. - P314

그조르그는 고개를 들고 구름층 밑으로 보이는 태양의 자취를더듬으며 생각했다. 정오로군. 그의 베사는 이제 종료되었다.
그는 대로를 따라 펼쳐진 황무지로 천천히 올라섰다. 지금부턴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릴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사방 풍경은인적이 끊겨 황량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카눈에 대한 위반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지였다. 멀리 경작지와 몇 그루의나무가 보였으나, 그의 주변에는 자그마한 동굴조차 없었다. 하다못해 몸을 숨길 만한 덤불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피신처를 발견하면 즉시 그곳으로 가서 숨어야지. 그가 그렇게 몸을 노출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숨을 만한 곳을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은 듯,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황야는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 P315

베시안은 집으로 아내의 빈 껍데기만 가져가고, 진짜 그녀는 산중 어디엔가에 놓아두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이제 한 달 전, 그들의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헐벗은 황무지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라프쉬를 보기 위해, 아마도 마지막으로 그곳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산들이 침묵 속에서천천히 줄을 지어 지나갔다. 희끄무레한 안개가 연극이 막 끝난무대 위로 드리워지는 커튼처럼 산들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 P325

같은 순간, 그조르그는 한 시간 전에 들어선 ‘깃발들의 대로‘
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대기 속에서 처음으로 석양의 서늘한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는 도로의 한쪽으로부터 몇 마디 짧은 말소리를 들었다.
"그조르그, 인사말 좀 전해주렴, 제프 크리예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어깨에서 소총을 내리려 했으나, 그의동작은 그 끔찍한 이름의 나머지 절반인 ‘키크‘라는 음절과 뒤섞였다. 그 음절은 어수선하게 그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그조르그는 땅이 앞뒤로 흔들거리다가 격렬하게 뒤흔들리더니, 이내 그의 얼굴에 와서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그조르그는 고꾸라졌다.
한순간 세상은 아주 고요해진 것 같았다. 이어 고요한 침묵 사이로 그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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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시렸다. 게다가 저린 다리를 조금이나마 움직일라치면발 아래 돌 틈새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나오곤 했다. 그러나사실 신음은 그의 내부에서 일고 있었다. 그는 큰길이 끝나는 지점, 즉 경사지 뒤쪽에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장시간을 부동자세로 있어보긴 난생처음이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아니, 그보다는 바짝 경계심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소총을 뺨에 대고 전방을 겨누었다. 곧 날이 저물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슴푸레한 빛때문에 소총의 가늠쇠조차 더이상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 P7

그날 늦게 소(小)휴전이 끝나기 몇 시간 전에, 크리예키크 가가 대(大)휴전에 동의했다. 마을의 원로 중 한 명이 베리샤 가의집으로 와서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그조르그가 이를 기회삼아 그릇되게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원로 대표가 떠나자, 그조르그는 매우 낙담하여 집 안 구석에처박혀 있었다. 앞으로 삼십 일간은 아무런 위험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그후로는 죽음이 사방에서 그를 노릴 것이다. 이제 그는 박쥐처럼 태양과 밝은 달과 횃불을 피해 어둠 속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삼십 일간이라・・・・・… 그는 혼잣말을 했다. 하여간 그는 강도처럼 어둠을 틈타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다녀야 할 것이다. 저 아래, 한길의 경사지에서 쏘았던 한 발의 총알이 돌연 그의 삶을 두동강 내버린 것이다. 한편에는 이때까지 살아온 이십육 년간의삶이 있고, 반대편에는 그날, 3월 17일부터 시작된 삼십 일이 놓여 있었다. 그 다음에는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예측할 수조차 없는 박쥐 같은 삶이 찾아오리라. - P26

곧 사월이 오리라. 아니, 오직 사월의 첫 보름만이 찾아오리라. 그조르그는 가슴의 왼쪽 한편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월은 이미 그에게 시퍼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그에게 사월은 늘 그런 느낌을 안겨주었다. 사월은 뭔가 마무리되지 않는 달이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사월의 사랑은..... 그의 마무리되지 못할 사월은…… 어쨌든 더 잘됐지 뭐. 그는 무엇이 더 낫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형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 잘됐다는 것인지, 일 년 중 이 시기에 피를 회수한 것이 그렇다는 것인지. - P27

그에게 삼십 일간의 휴전이 주어진 것은 불과 삼십분 전이었는데, 그는 벌써 그의 삶이 두동강 났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삶이 원래부터 그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었다는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지루할 만큼 더디게 흘러간 스물여섯 번의 삼월과 스물여섯 번의 사월, 또 그만큼의 겨울과 여름으로 이루어진 스물여섯 해라는 한 토막과, 절반의 삼월과 절반의 사월을 지닌, 서리 반짝이는 두 개의 부러진 가지 같은, 눈사태만큼이나 격정적이고 맹렬한 넉 주간의 짧디짧은 나머지 한토막.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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