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그림들은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의 그림이 아니다. 과정의 순간이 캔버스에 포착된 것이다. 그것은 순수 회화다.
존은 순수에 열광한다. 그러나 그 열광은 오직 미술에만 한정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어머니들, 특히 그의 어머니에 대한 과장된 항의 선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살림살이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어쩌다 하는 설거지도 그는 빵 부스러기와 통조림 옥수수 낟알이 배수구에 걸려 있는 욕조에서 한다. 거실 바닥은 주말이 지나간 해변같다. 침대보는 그 자체가 ‘과정의 순간‘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순간이라는 것이 상당 기간 지속된다. 나는 그나마 덜 더러워 보이는슬리핑 백에서 자는 것을 선호한다. 욕실은 북쪽의 외딴 휴게소 화장실처럼 보인다. 변기 안쪽에는 갈색 테가 보이고 담배꽁초가 떠다니며, 타월이 혹시라도 있을 때면 손자국이 마구 찍혀 있고, 정체 모를 종이 조각들이 바닥 이곳저곳에 뒹군다. - P189

그러나 이 모임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알 수없다. 나는 어색하고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고통받지도 않았고 권리를 쟁취하지도 않았으므로 말을 꺼낼 권리가 없는 것이다. 문 안쪽에서 판결과 비난 어린 선고가 내려지는 동안 닫힌 문 밖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호감을 사고 싶기도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린다. ‘자매애란 내게 어려운 개념이야,
나는 자매가 없었으니까. 형제애는 어렵지 않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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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재빨리 내 손에 그의 손을 얹는다. ‘이 그림들세요" 그는 말한다.
요? 잘된 그림이 아니잖아요." 나는 묻는다.
토르비크 씨가 말한다. "나중에 그 그림들을 보고 당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사물을 아주 잘 그려요. 그러아직 실물은 그리지 못하죠. 신은 처음에 흙으로 머엄을 만들고영혼을 불어넣었어요.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해요. 흙과 영혼." 그는 짧은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지그시 누른다. "열정이 있어야 하는거라고요."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본다. 그의 말은 도를 넘어선 것이다. 사람들은 병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면 몸에 대해이야기하지 않고, 교회가 아닌 곳에서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흐르비크 씨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알지 못할수도 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당신은 미완성의 녀자예요. 그러나 이곳에서 완전히 끝나게 될 거예요." 그는 끝난다는 말이 못쓰게되고 끝장이 난다는 의미라는 것을 모른다. 그는 나를 격려하려고한 것이다. - P123

고대 그리스를 마치고 로마와 중세, 르네상스 시기로 들어서는다음달에는 사정이 좀 나아지기를 기대한다. 고전적인 것이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탈색되고 부서진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대부분의그리스와 로마 유적들은 신체 일부가 없어졌다. 이렇게 큰 규모로활과 다리와 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내 신경에 거슬린다. 부러진 남자 성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온통 회색과 흰색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든 대리석 상들이 예전에는 선명한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노란 머리와푸른 눈과 피부색, 그리고 때로는 인형처럼 진짜 옷을 걸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수업은 개관 수업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별 예술에익숙해지도록 하고 나중에 배울 심화 수업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한것으로, 토론토 대학의 예술과 고고학 과정의 일부다. 이 과정은 내가 미술에 근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공인된 경로다.
요한 길이기도 하다.  - P125

그들은 캐시미어 트윈 세트와 낙타털 코트와 질 좋은 트위드 치자를 입고 납작한 진주 귀걸이를 하고 다닌다. 단정한 중간 높이 굽이 달린 펌프스를 신고 맞춤 블라우스나 점퍼 스커트, 아니면 같은뇌의 치마와 단추가 달린 작은 조끼를 입는다. 나역시 이런 옷을있고 그들 속에 섞이려고 노력한다. 쉬는 시간에는 다양한 대학 휴게실과 식료품실과 커피숍에서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먹는다. 그들은 손가락에 묻은 도넛 설탕을 핥으며 옷에 대해 토론하거나 사귀고 있는 남학생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명은 이미 확실한 애정 고백을 받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들의 눈은 물기가 많아지고, 희미해지고, 물러지며,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아기 고양이 눈처럼 상처받기 쉽게 보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눈은 간교하고 생각에 잠겨 있으며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 P127

나는 그들과 있는 것이 마치 거짓 흉내를 내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다. 흐르비크 씨와 몸의 촉각성은 예술과 고고학과와 들어맞지 않는다. 나신의 여자를 그리려는 나의 어설픈 시도는 시간 낭비로 여겨질 것이다. 예술은 다른 곳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남은 일은 암기하는 일뿐이다. 실물화 강좌 전체는 거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노력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생명선, 내 진정한 삶이다. 점점 더 나는 그것과 맞지 않는 것을 제거하고 나 자신을 다듬기 시작한다. 첫 수업 시간에는 체크무늬 점퍼 스커트와 피터 팬 깃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 P127

입고 가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적응하는 법을 빠르게 배운다. 나는남학생들과 다른 여학생처럼 차림새를 바꾼다. 검은 터틀넥 스웨터와 청바지, 이 옷차림은 여타 다른 옷차림처럼 가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충실함의 표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기를 내어 대낮의 예술과 고고학 수업에도 이런 옷을 입고 간다. 단 어느 누구도 입지 않는 청바지는 제외하고, 그 대신 나는 검은 치마를 입는다.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도록 고등학교 시절처럼 앞머리를 길러 뒤로 넘겨머리핀으로 고정시킨다. 캐시미어와 진주를 걸친 여학생들은 예술가 행세를 하는 비트족들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고, 내게는 점점 더 말을 건네지 않는다. - P128

이것은 내 삶의 한 측면, 낮 동안의 나의 삶이다. 다른 측면의 삶, 진짜 삶은 밤에 펼쳐진다.
나는 수지를 자세히 관찰하며 그녀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수지는 사실 나와 같은 나이가 아니라 두 살 이상 많다. 거의 스물한 살이다.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고 애비뉴 로드와 세인트 클레어 애비뉴가 교차하는 곳 북쪽에 위치한 고층 건물의 1인용아파트에 산다. 부모님이 집세를 내 주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그 아파트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런 빌딩에는 엘리베이터와 화분이 놓인 넓은 홀이 있고, ‘몬테 카를로‘ 같은 이름이 붙어 있다. 이런 곳에 산다는 것은 대담하고도 세련된 일이다. 비록 그런 곳에는간호사 삼인조가 산다고 화가들이 비웃을 일이기는 하지만, 화가들은 블루어 스트리트나 퀸 스트리트의 철물점이나 여행용 가방 도매점 위층, 아니면 이민자들이 사는 골목에 산다. - P140

나는 캘리포니아의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오빠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는 자신이 편지를 쓰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오빠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 버렸다. 그리고 나 역시 편지를 쓰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가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내가그렇듯이 이전에 모르던 일들을 이제는 알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샌드위치를 먹으며 동시에 편지를 쓰고 있다면 오빠는 어떻게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일까? 그는 저격병 자리같은 그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에 만족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신중해야 한다. 내가 항상 용감함이라고 여겨 왔던 그의 자질은어쩌면 결과에 대한 무지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가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열린 공간에,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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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 일에 있어서도 우리 부모님의 책임이크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을 사지 않는다. 아버지가텔레비전은 우리를 백치로 만들 것이며 해로운 복사에너지와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방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 아이들이 나를 데리러 오면 아버지는 지하층에서 오래된 회색 펠트 모자를 쓰고 망치나 톱을 들고 나타나서 그들과 힘찬 악수를 나눈다. 아버지는 빈틈없고 반짝이고 풍자적인 작은 눈으로 그들을 평가하며, 마치 그들이대학원생 제자라도 되는 듯이 존칭을 붙여 부른다. 어머니는 고상한숙녀처럼 행동하며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아주예뻐 보인다고 남자 아이들 앞에서 말한다. - P71

나는 오빠의 이런 행동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예상했다. 오빠의 말은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남자 아이들에 대해 연애 만화책에 나오는 소녀들이 으레 품는 그런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전화를 할지 조바심을 내며 앉아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십대 잡지에 나오는 뺨에 진주 목걸이 같은 눈물을 흘리는 침울한 소녀들의 그림은 내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면에서는 남자 아이들은 내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게 심각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을 심각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들의 몸이다. 수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 현관에 앉아서 나는 그들의 몸을 듣는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이 침묵 속에서 이 몸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나에 의해 창조되며, 형태를 갖추게 된다. 남자아이들이 없어 심심할 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의 몸이다. 나 - P73

는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담배를 들어 올리는 그들의 손을, 어깨의경사를, 엉덩이 각도를 관찰한다. 곁눈으로 살펴보며 나는 그들을여러 각도에서 점검한다. 그들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시각적인 것이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움직이지 마. 그대로 있어. 내가 가질 수 있도록. 나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은 눈을 통해 유지된다. 내가 그들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는것은 한편으로는 신체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시각적으로 흥미를잃었기 때문이다. - P74

"이것이 모두 섹스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분명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차가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차가 없는 아이들과 나는 버스나 전차, 새로 개통된 깨끗하고 안전하며 옅은 색 타일이 붙은 긴 목욕탕처럼 보이는 토론토 전철을 탄다. 이런 아이들은 집까지 나를 데려다 준다. 우리는 먼 길로돌아간다. 계절에 따라 공기는 라일락 냄새나 새로 깎은 잔디나 타는 낙엽 냄새를 풍긴다. 우리는 새로 지은 시멘트 인도교를 걷는다.
위로는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아래쪽에서는 시내를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다리 위 가로등에서 비치는 희미한 불빛아래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댄다. 그들의 팔은 내 몸을 감싸고 내 팔은그들의 몸을 감싼다. 우리는 서로의 옷을 들추고 서로의 등뼈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는 상대방의 등뼈가 부서질 듯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몸 전체의 길이를 느끼고 얼굴을 만지고는 경탄한다. 남자 아이들의 얼굴은 너무나 많이 변한다. 그들은 부드러워지고, 활짝 열리며, 아파한다. 그들의 몸은 순수한 에너지, 결정화된 빛이다. - P74

*빈 공간이야. 거의 존재하지 않지. 그것은 힘에 의해 한곳에 붙잡혀 있는 몇 개의 미세한 알갱이에 불과해, 원자 내부의 수준에서는 질량이 존재한다고 하기조차 힘들어. 그저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오빠는 지금 코딜리어를 더 혼동시키고 있어."
나는 말한다. 코딜리어는 담뱃불을 붙이고, 다람쥐 여러 마리가풀밭에서 서로 뒤쫓는 창밖을 내다본다. 그녀는 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빠는 코딜리어를 주시한다. "코딜리어는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어." 그는 말한다. - P78

"원자에 대해서요." 나는 말한다.
그는 말한다. "아, 원자, 나도 기억해. 그래, 요즘 원자는 어떤 변명을 하고 싶어 하지?"
"어떤 원자요?" 나는 반문을 하고, 그는 웃는다.
"어떤 원자, 그럼 그렇지. 정말 훌륭해." 그는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일종의 주고받기. 그러나로딜리어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 자기 아버지를 너무 두려워하는 것이다. 코딜리어는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코딜리어가 공포로 떨고 더듬거리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말,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어떤 연유에서든 그녀는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분노한다. 코딜리어에게 발길질을 퍼붓고 싶다.
어쩌면 저렇게 비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언제 제대로 배우게될 것인가?
코딜리어는 동물학 중간고사에서 낙제한다. 그래도 전혀 개의치않는 것 같다. 그녀는 시험 시간 절반을 몰래 여러 선생의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그림들을 보여 주며 과장되게 소리 내어 웃는다. - P89

서두르고 바쁜 척을 하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는외출에서 돌아오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을나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책망하는 눈으로쳐다볼 것이다. 마치 코딜리어의 현재 모습이 내 책임이라는 듯이,
마치 코딜리어가 아니라 내 모습에 실망했다는 듯이 내 실수가 아난 일로 왜 내가 그런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가?
"안녕, 코딜리어."
나는 현관에서 인사한다. 나는 코딜리어의 팔을 잠시 붙잡았다가그녀가 내 뺨에 키스하기 전에 재빨리 돌아선다. 뺨에 키스하는 것은 그 가족의 관습이다. 코딜리어가 나로부터 무언가를, 그녀의 옛생활, 아니면 그녀에 관련된 무엇을 기대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의 잔인함과 무관심, 친절함의 부재에 놀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 P103

기억에 관련된 여러 가지 질병이 있다. 예를 들면 명사나 아니면숫자를 잊어버리는 것. 더 복잡한 기억상실증도 있다. 어떤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과거 전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신발 끈을 어떻게 매는지, 포크로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어떻게 읽고 노래 하는지를 배워 가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친척들과 가장 오래된 친구들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소개받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에 기억상실증 환자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용서보다 더 나은 두 번째 기회를 부여받는다. 다른 기억상실증의 증상은 먼 과거는 기억하지만 현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5분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평생 알아 온 어떤 사람이 방에서나갔다 들어오면, 마치 20년 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할 것이다. 마치 죽은 사람과 재회한 것처럼 기쁨과 안도의눈물을 흘릴 것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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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는 교회 안에 들어가 보곤 했다. 나는 예술 작품을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내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여행 안내책자에 나와 있거나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으며,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 생각자체가 싫었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것이지 그 안에서진행되는 일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우연히 교회를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일단 교회 안에 들어서면 건축물 자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건축 관련 용어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클리어스토리*와 신랑(身廊)에 대해서 논문을 쓴 적도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으면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개신교 교회보다 가톨릭 성당을 선호했다. - P9

그 다음에는 동정녀 마리아를 보았다. 보통 때처럼 푸른색이나하얀색, 황금색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동정녀 마리아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왕관도 쓰고 있지 않았다.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얼굴에는 그늘이 지고, 손은 양옆으로 펼쳐져있었다. 발치에는 양초 토막이 있고, 검은 드레스 전체에 별처럼 보이는 것이 잔뜩 달려 있었다. 실제로는 동이나 주석으로 만들어진조그마한 팔과 다리, 양, 당나귀, 닭, 하트 모양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잃어버린것들의 동정녀, 상실된 것들을 회복시켜 주는 동정녀 마리아였다. - P11

내 두 딸은 "그래서요?"라고 되묻곤 하던 시기를 거쳐 갔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라는 의미다. 첫째가 열두 살인가 열세 살이되던 즈음이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나를, 자기들 친구를,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말하곤 했다. "그러지 마. 미칠 것 같아."
"그래서요?"
코딜리어 역시 같은 나이에 같은 짓을 했다. 똑같이 팔짱을 끼고똑같이 고정된 표정을 하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코딜리어! 장갑을 껴라, 밖은 무척 추워. 그래서? 나는 너희 집에 갈 수 없어, 숙제를 끝내야 하거든.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코딜리어, 너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여기도록 만들었어.‘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대답할 말이 없다. - P12

여름이 오고 다시 가고, 그 다음에 가을, 다음에 겨울이 오고, 왕이 서거한다. 나는 점심시간에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듣는다. 나는 눈덮인 거리를 따라 학교로 돌아가면서 생각한다. ‘왕이 서거했구나.‘
그의 생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이제 다 지난 일이 되었다. 전쟁,
한쪽 날개만 남은 비행기, 우리 집 밖의 진흙, 그외 많은 일들이 나는 동전에 새겨진 그의 수천 개의 머리를 생각한다. 이제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의 머리다. 동전의 문장도, 우표도 바뀔 것이다. 왕 대신 여왕의 모습을 그려 넣을 것이다. 여왕은 이전에는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나는 그녀가 훨씬 더 어릴 적의 사진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에 대한 다른 기억도 있지만, 그것은 희미하게만 남아 있으며 내 마음을 막연히 불안하게 만든다. - P13

나는 무언가를 망각했다. 내가 망각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나는 이전에 다니던 학교를 오직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 마치 그곳에 다녔던 것이 다섯 달 전이 아닌 5년 전 일인 것처럼. 나는 주일학교에 가던 것을 기억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스미스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런지는 잊어버렸다. 나는 기절하던 것과 접시 더미에 대해서, 시내에 빠진 것과 동정녀 마리아를 보았던 것에 대해서도 잊어버렸다. 나는 내게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을 잊어버렸다. 비록 코딜리어와 그레이스와 캐럴을매일 만나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다. 오직 내가 어렸을때, 다른 친구를 사귀기 전에 그들이 나의 친구였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들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옛 전투의 날짜와같이 매끈한 책장에 작고 건조한 글자로 새겨진 문장. 그들의 이름은 주석에 있는 이름들, 마구 번지는 잉크로 성경책 앞장에 써 놓은이름들과 같다. 그런 이름에는 어떤 감정도 결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먼 친척, 먼 곳에 사는 사람들,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 같은 것이다. - P14

그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이 사라져 버린 시간에 대해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언급하지 않는다. 가끔씩 어머니는 말한다. "네가 거쳤던 그 나쁜 시기. 그러면 나는 혼란스러워진다. 어머니는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나쁜 시기에 관해 언급하는 것에 대해 막연한위협과 막연한 모욕을 느낀다. 나는 나쁜 시기를 거쳤던 그런 부류의 아이가 아니다. 나는 좋은 시기만을 경험했다. 6학년 학급 사진속에서 나는 활짝 미소를 짓고 있다. "조개처럼 행복하지." 어머니는 행복함을 그렇게 표현한다. 나는 조개처럼 행복하다. 딱딱한 껍질이 굳게 닫힌 조개처럼. - P15

부모님은 계속해서 집 안 공사를 한다. 아버지가 틈이 날 때마다망치질과 톱질을 무수히 한 끝에 지하층에는 서서히 방들이 만들어진다. 암실, 단지와 젤리와 잼을 보관하는 창고. 잔디밭은 이제 제대로 모양을 갖추었다. 부모님은 정원에 복숭아나무와 배나무를 심고,
화단 가득 아스파라거스와 열을 지어 심은 채소를 재배한다. 정원가장자리에는 꽃들이 풍성하다. 튤립과 수선화, 붓꽃, 작약, 패랭이꽃 국화, 각 계절에 나는 각종 꽃들. 이따금 내가 도와야 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부모님이 진흙 밭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진흙 얼룩을묻히면서 땅을 파고 잡초를 뽑아내는 동안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을뿐이다. 부모님은 모래밭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 나는 꽃을 좋아하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 그런 노력을 들이고 흙투성이가 될 만큼 정성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 P15

"4차원이라고?" 나는 되묻는다.
"시간도 차원이야. 시간은 공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거야. 우리는시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거지."
오빠가 말한다. 변화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는이산 물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한다. 시공간은 곡선 모양이며, 이 곡선의 시공간에서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 아니라 그 곡선을 따라 그은 선이라고 한다. 또 시간은 늘이거나수축할 수 있으며, 어떤 장소에서는 다른 장소에서보다 시간이 빨리흘러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 중에 한 명만 초고속 로켓을 태워 보내면, 그는 돌아와서 다른 쌍둥이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더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오빠는 말한다. 나는 그건 매우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
오빠가 미소를 짓는다. 우주는 공기가 주입되고 있는 점박 무늬풍선 같은 것이라고 오빠는 말한다. 각각의 점은 바로 별들이다. 별들은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질문은 우 - P43

주가 무한하면서 경계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한하면서도 풍선처럼 경계가 있는 것인지 여부라고 오빠는 말한다. 내가 풍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터질 때 나는 폭발음뿐이다.
오빠는 우주 공간은 대부분 비어 있으며 물질이란 정말로 딱딱한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게자리 잡은 원자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어쨌든 물질과 에너지는서로의 한 측면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단단한 빛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과학적 지식이 좀 더 있다면 벽을 공기처럼통과할 수 있을 것이고,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되면 빛보다 빨리 움직될 수 있을 것이며, 그때에는 공간은 시간이 되고 시간은 공간이 되어 시간 속을 여행해 과거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오빠는 말한다.
이것은 오빠의 말 중에서 처음으로 내 흥미를 끌었다. 나는 공룡이나 다른 많은 것들,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인들 같은 것을 보고 싶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에는 뭔가 위협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내가 정말로 과거 여행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 P44

그녀의 수다스러운 문체는 진지하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때로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줄 모를 때 코딜리어를 보곤 한다. 그녀의 얼굴은 잠잠하고 아득하고 무감각하게 보인다. 마치 그녀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그러나 이내 코딜리어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웃는다. 그녀는 말한다. "저 애들이 저렇게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담뱃갑을 그 안에 넣는 거 너무 멋지지 않니? 저렇게 하려면 이두근이 있어야지!"
그러고는 평상시 모습으로 돌아간다.
시간을 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여건이 되면 호수에서 수명을 하고,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건포도와 땅콩버터와 꿀을 두껍게바른 크래커를 먹고, 내 또래 아이들이 없어 뚱한 표정으로 시간을보낸다. 부모님의 지치지 않는 활기도 안도가 되지 못한다. 부모님이 나처럼 퉁명스러우면, 아니 아예 더 퉁명스러우면 더 나을 것 같다. 그러면 적어도 나는 좀 더 정상적이라는 느낌이 들 것 같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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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돌아오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투명함과 서늘함과 흐트러지지 않은 빛의 층을 지나고, 마지막 노출화강암 광맥과 마지막 울퉁불퉁한 언저리가 있는 작은 호수를 지나서 남쪽의 탁한 공기와 축축함과 따스한 나른함과 귀뚜라미 소리와잡초투성이 목초지 냄새 속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오후에 집에 도착한다. 집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이상하게, 다르게 보인다. 엉겅퀴와 미역취가 집 주변의 진흙 속에서 가시투성이 울타리처럼 자라났다. 문 옆의 커다란 구덩이와 흙더미는 사라졌고 그 장소에 새로운 집이 생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말인가? 나는 그런 변화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레이스와 캐럴은 우리와 헤어졌던 바로 그 자리, 사과나무 사이에 서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과 같지 않다. 내가 지난 넉 달동안 머릿속에 간직하고 다녔던 영상과 전혀 다르다. 몇 개의 특징만이 남고 나머지는 계속 변화하던 그 영상. 다른 점 한 가지를 들자면, 그들은 더 커졌다. 그리고 다른 옷을 입고 있다. - P114

어머니들이 말해 주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점점 깊어지기만하는 큰 간극, 심연이 존재한다. 그 심연은 말 없음으로 채워져 있다.
어머니들은 쓰레기를 신문지로 여러 겹 싸고 끈으로 꽁꽁 묶지만 그래도 쓰레기는 왁스를 새로 칠한 마룻바닥으로 떨어진다. 빨랫줄에는 속바지, 잠옷, 양말, 더럽혀진 은밀한 부분이 나열되어 있다. 어머니들이 탁하고 걸쭉한 물에 손을 담가서 세탁하고 헹군 것이다. 그들은 화장실 청소용 솔에 대해, 용변기에 대해, 병균에 대해 알고 있다. 어머니들이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세상은 여전히 지저분하며, 그들은 우리의 더럽고 시시한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대신 긴 귓속말이 한 아이에서 다음 아이로 전해져 공포감을 증폭시키며 우리 사이에 떠돌게 되는 것이다.
남자들 다리 사이에는 당근이 있다고 코딜리어는 말한다. 사실그것은 당근이 아니라 더 끔찍한 무엇이다. 그것은 털로 뒤덮여 있다. 그 끝에서 씨가 나와서 여자 배 속에 들어가서 아기로 자라나는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일어나게 된다. 어떤 남자들은 마치 귀걸이처럼 당근에 구멍을 뚫어서 고리를 끼워 놓는다고 한다. - P151

여학생들은 운동장이나 언덕 위에 작게 무리지어 서서 계속 귓속발을 주고받으며 실패를 감고 있다. 이제는 한쪽에 못이 네 개 박힌실패와 실 뭉치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다. 털실을 못에 차례대로 두 번씩 감은 다음, 다섯 번째 못으로 바닥에 있는 털실 고리와제일 위쪽에 있는 털실 고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실패 다른 쪽 끝에서 둥글고 두꺼운 털실 매듭이 대롱거리게 되면 납작한 달팽이 껍질처럼 감아 바느질을 해서 찻주전자 받침을 만든다. 나도 그런 실패가 있고 그레이와 캐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비록 제멋대로 엉클어지기는 했지만 코딜리어까지도 하나 가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이렇게 실패와 색색가지 털실 매듭을 손에 들고 귓속말을 하며 무리지어 있는 것은 남학생들과 관련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학생들의 그런 행동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리를 지음으로써 그들은 무리 밖의여학생들과 남학생 전체를 소외시킨다.  - P164

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 유일한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중요성, 텅 빈백지와 같은 중요성이다. 나는중요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 비밀을 전수받은 것이다. 나는선발되었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상실감을 느낀다. 또한 오빠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것이다. 오빠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나는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비밀을 누설해서 그를 조롱거리로 만들수도 있다. 나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있다. 그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있으며,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오빠가 예전 모습으로, 이전처럼 정복할 수 없는 그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 P167

처음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터널처럼 멀어져 가는어두움뿐 그러나 잠시 후 무엇인가가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진초록색 잎과 자주색 꽃, 짙은 자주색, 슬프도록 강렬한 그 색깔. 그리고물처럼 반투명한 붉은 열매 송이로 이루어진 덤불, 덩굴은 서로 감아오르며 자라나고, 다른 식물들 위로 너무나 많이 얽혀 있어 울타리치럼 보인다. 비옥한 흙 냄새와 또 다른, 찌르는 듯한 냄새가 잎사귀 사이에서 올라온다. 오래된 것들, 무성하고 무거우며 잊힌 것들의 냄새가, 바람은 불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잔잔한 파문으로, 저 혼자서 움직이는 것처럼, 이파리들이 흔들린다.
‘벨라도나, 나는 생각한다. 어두운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11월에는 벨라도나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흔한 잡초다. 우리는 그것을정원에서 뽑아서 버린다. 벨라도나 식물은 감자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래서 꽃의 형태가 비슷한 것이다. 감자 역시 녹색이 될 때까지태양 아래 놓아두면 유독한 식물이 될 수 있다. 그런 일을 알아내는것이 내 취미다.
나는 이 기억이 틀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강렬하고몽환적이며 황폐하고 슬픔으로 가득 찬 꽃들, 그 냄새, 이파리의 흔들림은 계속된다. - P174

학교의 남자 아이들은 서로 적이다. 우리는 적에게 눈덩이를 던지고, 적을 맞추면 기뻐한다. 적에 대해서우리는 증오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코딜리어는 내 친구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고 나를 돕고 싶어 하며,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친구들, 여자 친구들이며, 내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나는여자 친구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잃게 될까무척 두렵다.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싶다.
증오라면 오히려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증오가 있었더라면 나는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을 것이다. 증오는 분명하고 금속처럼 차가우며 편향적이고 동요하지 않는다. 사랑과는 달리. - P192

이 모든 것이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다.
어떤 날에는 이번에는 캐럴이 개선될 차례라고 코딜리어가 결정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그레이스와 코딜리어와 함께 앞에서 걷고, 캐럴은 뒤에서 따라오며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생각한다. 이때 나는 캐럴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 지나간 그 시간에 그녀도 내게 똑같은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그녀 차례인 것이 기쁘다.
그러나 이 기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캐럴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시끄럽게 운다. 그녀는 자기 울음에 자기가 휩쓸려 버린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고, 비밀을 지키리라는 신뢰를 주지못한다. 그녀에게는 무모한 구석이 있으며, 어느 한도까지만 압력을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지조가 부족하고, 그저 정보 조달자로나 적합하다. 이런 점이 나에게조차 빤히 들여다보인다면 코딜리어에게는 더 분명히 보일 것이다. - P193

우유가 얼어붙는다. 우유 크림이 울퉁불퉁한 기둥 모양으로 얼어서 우유병 목 위까지 올라와 있다. 럼리 선생은 내 책 위로숙인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짙푸른색 블루머는 그녀의 주변에 유쾌한 분위기를 퍼뜨린다. 그녀의 코 옆 피부는 불독의 뺨처럼 아로 처져 있다. 입가에는 말라붙은 침 자국이 보인다. "네 필체는자꾸만 나빠지는구나." 그녀는 말한다. 나는 당황해서 내 공책을 들여다본다. 선생의 말은 옳다. 내가 쓴 글씨는 둥그스름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거미줄처럼 미친 듯이 보인다. 어떤 곳은 강철 펜촉을 너무 세게 눌러 쓰는 바람에 잉크가 거무스름한 녹처럼 번져 글씨가기형적으로 보인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 나는 손을 오므려 손가락을 감춘다. 나는 럼리 선생이 너덜너덜한 내 손톱 가장자리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을 모두 캐럴이 듣고 보고 있으며, 나중에 코딜리어에게 보고할 것이다. - P203

나는 이 외국에 대한 그림들을 좋아한다. 이것들이 진실이라고믿기 때문이다. 나는 어딘가에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믿어야 한다. 비록 주일학교에서는그런 사람들은 굶주리거나 이교도이거나 아니면 둘 다라고 배웠을지라도, 내가 매주 내는 헌금이 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에게 음식을 주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데 사용된다하더라도, 럼리 선생은 그들이 교활하며, 기이하거나 혐오스러운 음식을 먹고, 영국 사람들을배반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스튜어트 선생의 말이 더 마음에 든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태양은 활기찬노란색이며 종려나무는 선명한 초록색이고 옷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들의 민요는 흥겹다고 한다. 여자들은 빠르고 알아들을수 없는 언어로 함께 수다를 떨고, 완벽하고 순수하게 하얀 치아를드러내며 웃는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나도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머물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 P257

나는 발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발은 장화에 찬 물 때문에 아주무겁게 느껴진다. 원한다면 나는 그냥 계속해서 이곳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 어두움이 내렸고, 땅을 덮고 있는 눈은 푸르도록 희다. 시내의 낡은 타이어와 녹슨 쓰레기 조각들은 눈에 덮여 있다. 주위에는 동굴처럼 반원형으로 휜 푸른 나뭇가지들밖에 없다.
모두 깨끗하고 고요하다. 시냇물은 차갑고 평화롭다. 이 시냇물은공동묘지에서, 무덤과 그 속에 묻혀 있는 뼈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것이다. 이것은 맑게 용해되어 버린 죽은 사람들로부터 나온 물이며, 나는 그 안에 서 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대로 얼어 버릴것이다. 나 역시 죽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처럼, 평화롭고 맑게. - P295

나는 하늘을 보며 시내 옆에 누워 있다. 더 이상 어디도 아프지 않다. 하늘은 불그스름한 기를 띠고 있다. 다리가 달라 보인다. 더 높이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마치 난간이 사라져 버렸거나 아니면 난칸 사이가 다 메워진 것처럼 더 단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빛이 흘러나온다. 그 주변에는 초록색 도는 노란색이며 내가 이제까지 본그 어떤 빛과도 다른 빛의 무리가 있다. 나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일어나 앉는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다리 위에 서 있다. 검은 윤곽이 보인다. 처음에는 코딜리어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그 사람이 아이가아니라는 것을, 아이치고는 키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얼굴은 볼 수 없고 그저 형상만 보일 뿐이다. 머리 뒤쪽에서 노란색 도는 초록빛 줄기가 흘러나온다.
나는 일어나 집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곳에 눈 속에작은 눈송이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매우 졸리다. 나는 눈을 감는다. - P296

누군가가 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 입을 가리고 말하는 것처럼 매우 나직한 목소리다. 내가 이 소리를 정말로 들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나는 억지로 눈을 뜬다. 다리에 서 있던 그 사람은 난간을 뚫고 움직인다. 아니, 그 안으로 녹아 없어진다. 그 사람은 여자다. 이제 긴 치마가 보인다. 아니, 긴 외투인가? 그녀는 다리 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마치 걷는 것처럼 나를향해 온다. 그러나 그곳에는 디딜 수 있는 발판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나는 무서워할 기운조차 없다. 나는 혼수상태로 눈 위에 누워서둔한 호기심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나도 저렇게 허공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297

이제 그녀는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과 머리에 두른 검은 스카프, 아니면 후드를 볼 수 있다. 아니, 머리칼인가?
그녀가 내게 팔을 내밀자기쁨이 솟아난다. 반쯤 열린 외투 안에서붉은 무엇이 언뜻 내비친다. ‘그녀의 심장이로구나.‘ 나는 생각한다. 심장일 것이다. 몸 바깥에서 네온처럼, 석탄처럼 타오르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그녀를 느낄수 있다. 나를 안아 주는 팔처럼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작은 바람 같은 그녀의 존재를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한다.
"이제 집에 가도 된단다. 모든 것이 괜찮을 거야. 집으로 가렴."
그녀는 말한다.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 P297

내가 눈속에서 얼어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으며, 보이지 않지만 나를 따스함과 고통 없음으로 감싸 주고있다. 그녀는 나의 기도를 들은 것이다.
나는 이제 큰길로 올라왔다.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이제 내의 양쪽에서 더 가깝게 빛나고 있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똑바로 걷지도 못한다. 그러나 내 발은 한 발짝씩 계속 움직이고 있다.
앞쪽에 거리가 펼쳐져 있다. 거기서 매우 빨리 걸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코트 단추도 채우지 않았고 머플러도 두르지 않았으며, 제대로 꿰어 신지 않은 덧신에서는 찰싹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를 보자 어머니가 뛰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대로 멈춰 서서,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불편한 덧신을 신고 뛰어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양, 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인 양 바라본다. 어머니는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내게 달려오고 나는 커다랗고눈물로 젖은 그녀의 눈을, 싸락눈이 먼지처럼 앉은 머리를 쳐다본다. 어머니는 장갑도 끼지 않고 있다. 그녀는 팔을 벌려 나를 안는다.
그와 동시에 동정녀 마리아가 사라진다. 아픔과 추위가 다시 솟구친다. 나는 심하게 떨기 시작한다. - P299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인 겁쟁이다.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몸을 돌려 걸어가 버린다. 이것은 공기가 나를 받쳐 주리라고 믿으면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고공기는 나를 받쳐준다. 나는 코딜리어의 말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그녀의 말대로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
"감히 우리를 무시하고 가 버리다니. 당장 이리 돌아와!"
코딜리어가 뒤에서 소리친다. 나는 이제 그녀가 하는 말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그것은 모방이며 연기일 뿐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놀이다. 내가 개선해야 할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놀이였으며, 나는속임을 당한 것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 P303

나는 주일학교에 가지 않는다. 방과 후에 그레이스나 코딜리어, 심지어는 캐럴과도 놀지 않는다. 더이상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공동묘지를 지나가는 더 먼 길을 이용한다. 그들이 무리를 지어 뒷문으로 나를 데리러 오면 나는 바쁘다고 말한다. 그들은나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친절을 베풀지만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않는다. 나는 마치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그들 눈에 어린 탐욕을 볼 수 있다. 왜 이전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던가?
나는 주인 없는 오빠의 방에서 만화책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도 고층 건물에 올라가고, 망토를 두르고 날아다니고, 손끝으로 금속을 뚫고, 가면을 쓰고, 벽을 투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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