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선이 아니라 공간의 차원과 같은 하나의 차원이다. 만일공간을 구부릴 수 있다면 시간 역시 구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만일 필요한 지식이 충분히 있고 빛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스티븐 오빠였다. 그 당시 오빠는 공부할 때면 늘 여행용 적갈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두뇌에 피가 잘 흘러 영양이 잘 보급되도록 오랫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하곤 했다. 나는 오빠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오빠는 그때 이미 모호한 언어의 영역을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나는 시간을 어떤 형태를 가진 것, 볼 수 있는 무엇, 켜켜이 쌓여 있는 일련의 액체 투광지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간 선을 따라 회고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물속을 헤엄 - P15

치듯 시간의 심연을 통과해 가며 회고한다. 때로는 이것이, 때로는저것이 수면 위에 떠오르며 때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 P16

이제 나는 우리가 전차에서 내리곤 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보도에 쌓여 있는 1월의 눈 진창 속으로,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도회적으로 보였던 초라한 납작 지붕의 빌딩들 사이로 끽끽 째지는 소리를내며 불던 호수 바람 속으로 발을 내딛곤 했던 그곳. 하지만 이 지역은 더 이상 낮고 초라한 사양지가 아니다. 흘림체의 튜브형 네온사인이 개조된 벽돌 건물 전면을 장식했고 수많은 놋쇠 외장과 수많은부동산과 수많은 돈이 있다. 바로 앞쪽에는 차가운 빛으로 이루어진거대한 비석처럼 전체를 유리로 발라 번쩍거리는 거대한 긴 네모꼴건물들이 서 있다. 얼어붙은 재산,
나는 그 건물들이나 유행하는 옷, 수입품, 수제 가죽, 스웨이드 등등의 옷을 입고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대신 추적자처럼 보도만 내려다보며 걷는다.
나는 목이 조여 오는 것을, 턱 선을 따라 퍼지는 통증을 느낀다.
나는 다시 손가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손에서 나오는 피, 그 피 맛을 기억한다. 그것은 오렌지 맛 아이스 바, 싸구려 풍선껌, 붉은 감초, 잘근잘근 씹은 머리카락, 더러운 얼음의 맛이다. - P25

지금은 내 인생의 중반기다. 나는 이것을 공간으로 생각한다. 반을 건너고 반은 남은 강의 중간, 다리의 중간처럼. 이때쯤이면 여러가지를 축적해 두었어야 한다. 재산, 책임, 성취, 경험과 지혜. 상당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않는다. 마치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떨어뜨린 것처럼, 분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내 뼈에서 칼슘이, 내 피에서 세포가 빠져나간 것처럼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내 몸이 수축하는 것만 같고 차가운 공기나 부드럽게 내리는 눈으로 채워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가벼워졌지만 나는 상승하지 않고 하강한다. 아니, 유사속으로 미끄러지듯 아래쪽으로, 이 장소에 겹겹이 쌓여 있는 층 속으로 끌려 내려간다. - P30

진짜 삶과 더불어 나는 직업을 정확히 말해 진짜라고는 할 수 없을 수도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나는 화가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을 때는 여권에 화가라고 써넣기도 했다. 그 외에는 써넣을 수 있는것이 주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주부가 되었다는 것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때는 이것 때문에 위축되기도 한다. 품위 있는 사람은 화가가 되지 않는다. 오직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며 꾸며대는 사람들만이 화가가 된다. 예술가라는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나는 화가라는 직함이 더 좋다. 그것이 더 확실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말하듯 예술가란 대개 번지르르하고 게으른부류다. 만일 당신이 화가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한시선으로 쳐다볼 것이다. 야생동물을 그리거나 돈을 아주 많이 벌지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화가들의 질투를 자아낼 만큼만돈을 벌 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꺼져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많이 벌지는 못한다.
하지만 보통은 나는 내 직업에 만족하며, 가까스로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 P33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든 날들이 있다. 말을 하려 해도 애를 써야 하며, 목욕탕까지 가려면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발짝씩 천천히가야 한다. 한 발 한 발이 커다란 성취인 것이다. 치약 뚜껑을 열고칫솔을 입에 넣으려면 집중을 해야 한다. 팔을 입까지 올리는 것조차 힘겹다. 나는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내가 하는 일도 무엇이든 가치가 없으며 기껏해야 나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느낀다.
"뭐 변명할 말 있어?"
코딜리어는 그렇게 묻곤 했다.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와 연관된 그 단어. 마치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어젯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무(無)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 P71

캐럴은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우리 가족은 마룻바닥에서 잔다고말한다. 우리가 시외에서 왔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신념 때문에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풍기면서. 우리의 진짜 침대가, 다른 사람들 것과 마찬가지로 다리가 넷 달리고 매트리스 있는침대가 창고에서 도착하자 캐럴은 무척 실망한다. 그녀는 내가 어떤교회에 나가는지도 모른다는 것과 우리 가족이 카드놀이용 탁자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린다. 이런 사실을 경멸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국적인 특별함을 가미해서 말한다. 결국 나는그녀의 줄서기 짝이며, 그녀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럴은 그런 놀라운 사실을밝힌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이 경외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 P84

이 놀이를 하면 나는 늘 피곤해진다. 이 모든 물건의 축적, 돌보고포장하고 차에 싣고 다시 포장을 풀어야 할 이 모든 소유물이 지닌그 무게에 눌려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사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캐럴과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다. 그들의 마님들은 집에 혼자서 살고 있으며, 언제나 그곳에 산다. 마님들은 물건들을 자꾸만 보탤 수 있으며 식탁 세트, 침대, 타월 무더기, 그릇 세트로 스크랩북을 페이지 가득 채워 넣은 다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되는 것이다.
나는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들을 원하게 되었다. 땋은 머리, 실내용 가운, 나만의 손가방. 그 무엇인가가 내게 모습을 드러내면서 펼쳐지고 있다. 내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여자 아이들과 그들의 행동이라는 세계가 있으며, 나도 자연스럽게 그 세계의 일부가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빨리 달리거나 과녁을 잘 맞추거나 폭탄처럼 큰 소리를내거나 메시지를 해독하거나 신호에 따라 죽은 시늉을 하지 않아도된다. 이런 일을 잘했는지, 남자 아이처럼 잘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바닥에 앉아서 이튼 카탈로그에서 프라이팬을 자수가위로 잘라 내고, 내가 한 것은 형편없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안도가 되기도 한다.
- P92

술래들은 자신이 내놓은 상품의 이름을 외친다. "순수, 순수, 철공, 철공,"이 두 음절짜리 단어들을 외치는 소리는 잃어버린 개나아이들을 부를 때처럼 일정한 리듬을 띠다가 점점 낮아진다. 외치는소리는 의도하지 않았어도 구슬프게 들린다. 나 역시 다리를 벌리고앉아 차가운 구슬들을 다리 사이에서 굴리다가 넓게 펼친 치마에 그러모으며 후회하는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고양이 눈, 고양이 눈."
오직 탐욕과 쾌락 섞인 공포감만을 느끼면서.
고양이 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슬이다. 그 구슬을 따게 되면나는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꺼내 들고 빛에 비추어돌려 보며 점검한다. 고양이 눈은 진짜 눈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고양이 눈 같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존재의눈처럼 생겼다. 라디오에 달린 녹색 눈처럼, 먼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눈처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른색이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내빨간 플라스틱 손가방에 넣어 둔다. 다른 고양이 눈은 위험을 감수하며 목표물로 내놓지만 이것은 예외다. - P105

나는 구슬치기에 그리 능하지 않기 때문에 구슬을 많이 모으지못한다. 오빠는 악착같다. 아침에 크라운 로열위스키의 푸른색 주머니에 평범한 구슬 다섯 개를 넣고 학교에 가서는 위스키 주머니와호주머니까지 터질 듯 채워서 갖고 온다. 오빠는 따 온 구슬을 어머니가 준 마개 달린 크라운 보관용 단지에 담아 책상 위에 일렬로 세워 놓는다. 자기 기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단지를 늘어놓을 뿐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오빠는 자기가 모은 최상의 구슬들을, 순수, 물아기, 고양이 눈, 보물과 진귀한 것들을 단지에 모아 담는다. 그러고는 다리 아래, 협곡 어딘가에 갖고 가 묻어 버린다. 그런 후 정교한보물 지도를 만들어 그 장소를 표시하고 다른 단지에 넣어 마찬가지로 땅에 묻는다. 그렇게 했다고 내게 말해 주지만 왜, 어디에 묻었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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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카와 나는 최선을 다해서 리디아 아주머니가 요청한 대로 새 진주인 제이드를 교육했지만 허공에 대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손을 무릎에 모은 채로 참을성 있게 앉아 있는 법도 몰랐거든요. 몸을 비틀고 꼬물거리고 발을 가만히 두지 못했어요
"여자들은 이렇게 앉아야 해." 베카가 시범을 보이며 말하곤 했죠.
"네, 임모르텔 아주머니." 그렇게 말하며 노력하는 시늉을 하더군요.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다시 구부정하니 앉아 무릎 위로 발목을 꼬고 앉았어요.
아르두아 홀에서 제이드가 처음 저녁식사를 할 때는 어찌나 부주의한지, 우리 둘이 제이드를 가운데 두고 앉아 보호해야 했어요.  - P458

C 현관의 젊은 두 아주머니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걸 금세 깨달았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는 말을 섞고 지내는 관계가 아니라 내게는 그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베아트리스 아주머니는 토론토에서 나를 개종하려 할 때는 그렇게 친절하더니, 내가 일단 여기온 후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지나칠 때면 거리를 두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게 다였지요.
생각해 보면 나는 두려웠는데 두려움에 좌우되지 않으려 애썼던거예요. 그리고 몹시 외로웠어요. 여기에는 내 친구가 하나도 없었고, 그곳 사람들과 연락할 길도 없었어요. 에이다와 일라이자는 머나먼 곳에 있었어요. 조언을 구할 사람도 없었어요. 설명서도 없이 무작정 내 힘으로 해 나가야 했어요. 가스가 정말로 그리웠어요. 백일몽으로 함께했던 일들을 꿈꾸었어요.  - P462

제이드는 몹시 칠칠치 못했어요. 공용 거실에 제 물건을(스타킹, 새컨습 탄원자 유니폼 벨트, 심지어 구두까지) 아무렇게나 두고 다녔죠. 화장실을 쓰고 물을 꼬박꼬박 내리지도 않았어요. 머리를 빗을 때 빠진 그 애 머리카락이 욕실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고, 세면대에서 치약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샤워도 허가되지 않은 시간에 자꾸해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해야만 했어요, 그것도 여러 번 저도 이런 게 사소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비좁은 데서 함께 살다 보면 문제가 쌓이기 마련이에요.
게다가 왼팔의 문신 문제도 있었어요. 하느님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십자가 형태로 그려져 있었어요. 그 애 말로는 참된 신앙으로 개종한 증표라지만, 나는 그 말이 의심스러웠지요. 한 번은 하느님이 ‘상상 속의 친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흘린 적이 있거든요. - P464

그 밑에는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 역시 편집되어 있었어요. 주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현 소재 캐나다.
메이데이 요원으로 알려짐. 소재 불명.
내가 어머니를 닮았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요.
어머니 기억이 났느냐고요?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기는 했지요. 기억해 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과거는 너무 어두웠어요.
참으로 잔인한 것이죠. 기억이란 우리는 우리가 잊은 게 무엇인지 기억할 수 없잖아요. 우리에게 잊으라고 강요한 것도 여기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척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잊어야 했던 것도미안해요, 나는 속삭여 말했어요. 어머니를 되살릴 수가 없네요.
아직은.
나는 어머니의 사진 위에 손을 얹었어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느냐고요? 나는 그걸 바랐죠. 사랑과 온기가 이 사진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예쁘게 찍힌 사진은 아니지만, 그건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이 사랑이 내 손으로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유치한 공상이죠, 나도 알아요. 그러나 그래도 위로가되었어요. - P471

문서의 마지막 문단 아래, 파란 잉크로 쓴 흔들리는 필체의 글이한 줄 쓰여 있었어요. 일급비밀. 아기 니콜은 현재 여기 길리어드있을 수 없는 일만 같았어요.
울컥 감사하는 마음이 복받쳤어요. 내게 여동생이 있다니! 하지만 덜컥 무섭기도 했어요. 아기 니콜이 여기 길리어드에 있다면 왜 모두에게 알리지 않은 걸까? 온 국민이 기뻐하며 대규모의 축하 행사가 열릴 텐데, 왜 나한테는 알려 주는 걸까? 그물이 내 몸을 옭아맨 느낌이었지만, 칭칭 몸을 감은 그물은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내 동생이 위험한 걸까? 그 애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그리고 저들은 동생을 어떻게 할까?
이때쯤은 내가 보도록 파일을 갖다 놓는 사람은 리디아 아주머니가 분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 P472

그리고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는 걸까요? 내 어머니는 살아있지만,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었어요. 범죄자로 취급되고 있었어요.
아니, 심지어 테러리스트였죠. 내 안에는 어머니가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어떤 면에서 더럽혀진 걸까요? 그것이 내게 전하려던 메시지였을까요? 길리어드가 나의 반역자 어머니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그러면 나는 기뻐해야 하나요, 유감으로 여겨야 하나요? 내충성심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요?
그때, 충동적으로 아주 위험한 짓을 했어요. 보는 눈이 없다는 걸확인하고, 혈통 파일에서 풀로 붙인 사진이 붙은 두 페이지를 뜯어내서 여러 번 접은 후 내 소맷자락에 슬쩍 넣은 거예요. 어쩐지 그사진들과 헤어지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어리석고 무모한것이었지만, 내가 저지른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 그 일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지요. - P473

리디아 아주머니의 집무실을 나와서 베카는 주간 근무시간을 채우리 도서관으로 갔고, 니콜과 나는 함께 다시 우리 아파트로 걸어
"우리는 자매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그네스 언니라고 불러도좋아." 
"알았어요. 그렇게 해 볼게요." 니콜이 말했어요.
우리는 거실로 들어갔어요.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 잠깐만 기다려."
그리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어요. 혈통 파일에서 몰래 빼낸 두페이지를 작게 접어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두고 있었거든요. 나는 돌아와서 조심조심 다시 펼쳐서 판판하게 만들었어요. 내가 테이블에올려놓자 니콜도 (나처럼) 우리 어머니의 사진에 손을 얹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어요. - P485

"감사기도를 올려야 해." 아그네스가 경건한 아주머니의 말투를쓰는 걸로 보아, 아직 나한테 화가 난 모양이었어요. 우리 언니라고생각하면 이상했어요.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달랐거든요. 그렇지만 아직 그런 걸 알아볼 시간을 가진 적이 없으니까요.
"언니가 있어서 기뻐요." 화해하려고 내가 말했어요.
"나도 기뻐" 아그네스가 말했어요. "그래서 감사를 드리는 거야."
하지만 별로 고마운 말투가 아니었어요.
"저도 감사를 드려요." 내가 말했어요. 그게 그 대화의 끝이었어요.
나는 언제까지 이걸, 이런 길리어드식 말투를 유지해야 하느냐고 물어볼까 생각했어요. 이제 도망 길에 올랐으니까 우리 다 집어치우고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안 돼요? 하지만 어쩌면 언니에게는 이게 자연스러운지도 몰라요. 어쩌면 다른 방식은 모를 거예요. - P518

막상 영원히 길리어드를 떠나려 하니 질라와 로사와 베라와, 내가예전에 살던 집과, 타비사가 죽도록 그리워 향수병에 걸릴 것만 같았어요. 오히려 초반에는 어머니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엄마 없는 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지요. 리디아 아주머니도 엄하기는 했지만 일종의 어머니였는데,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거예요.
리디아 아주머니는 니콜과 내게 우리 진짜 어머니가 살아 있고, 캐나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지만, 거기로 가는 길에 내가죽을지 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죽는다면 이 생애에서는 어머니를 끝내 만나지 못하겠지요. 그 당시에 어머니는 그저 찢어 낸 사진 한장에 불과했어요. 부재였고, 내 안의 어떤 간극이었어요. - P526

알코올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운전을 잘했고 빨랐어요. 길은 구불구불했고 부슬비 때문에 번들거렸어요. 몇 킬로미터가 스쳐 지나갔어요. 달이 구름 위로 떠올라 우듬지의 검은 윤곽선을 은빛으로 물들였어요. 이따금 집이 나타났는데, 어둡거나 불이 몇 개밖에 켜져있지 않았어요. 나는 불안을 잠재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잠이 들고 말았어요.
나는 베카의 꿈을 꾸었어요. 베카가 트럭 앞자리 내 바로 옆에 앉아 있었어요. 볼 수는 없었지만 거기 있다는 걸 알았어요. 꿈속에서 나는 베카에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너도 우리와 함께 왔구나. 정말 행복해"
그러나 그 애는 대답이 없었어요. - P526

흘러가는 시간을 셌다. 몇 시간, 몇 분, 몇초인지. 내가 보낸 연락책들이 길리어드 붕괴의 씨앗을 가지고 멀리까지 갔으리라 기대할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아르두아 홀 최고 기밀의 범죄 파일을 복제해 놓은 것이 헛되지 않았다.
버몬트의 버려진 하이킹 도로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서 진주 소녀배낭 두 개가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진주 소녀 드레스 두 벌과 오렌지 껍질 약간, 진주목걸이 하나가 있었다. 수색견을 동원해 그 지역을 뒤졌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장치였으니, 몹시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 P558

현관 A와 현관 B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설비부서에서 조사를 시작했고, 물탱크 속에서 불쌍한 임모르텔아주머니가 배출구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아이는 다른 사람이 나중에 입도록 겉옷을 벗어두었다. 그 옷은 단정히 개어져 사다리맨위 가로대에 놓여 있었다. 속옷은 입고 있었던 것은 조신함 탓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임모르텔이 했을 법한 행동이었다. 그녀를 잃은 것을 내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자발적인 희생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이 소식으로 또 한 차례 무성한 추측이 나왔다. 임모르텔 아주머니가 살해당했는데, 제이드라는 행방불명이 된 캐나다인 신입보다그런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 P558

그분이 틀림없다는 느낌에 두 팔을, 성한 팔과 낫고 있는 팔을 모두 뻗었고, 우리 어머니는 내 병상 위로 허리를 숙여서 우리는 한 팔로 서로를 포옹했어요. 그분은 다른 팔로 아그네스를 안고 있어서한 팔만 썼어요. 그리고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내 소중한 딸들."
어머니의 냄새가 났어요. 그건 마치, 또렷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메아리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작게 미소 짓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물론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너무 어렸으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어요.
"네, 기억 안 나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리고 언니가 말했어요.
"아직은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기억날 거예요."
그리고 나는 다시 잠들었어요. - P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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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발소에 들르면 새삼스레 격식을 차려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다. 나는 이발하러 들른 것이고, 이발사는 이발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저고리를 벗고, 의자에 올라앉는다. 이발사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나일론 보자기를 두르고, 특별한주문이 없으면 알아서 머리를 깎는다. 얘기가 필요없는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일론 보자기와 면타월을 목에서 떼어낸다. 면타월을 탁탁 턴다. 그것으로 이발은 끝이다.
드라이한 과정이다. 그녀와의 섹스가 그랬다.
그녀는 말이 없을뿐더러 표정도 별로 없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얼굴은 희고 머리는 갈색이었다. 조금 살이 찐 편이었다. 키는 보통이었다. 말하자면, 별 특징이 없는 그런 여자였다. - P230

또 몇 날이 지났습니다.
남편은 제게서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제가 외출하고 온 날이면 제게서 끼치는 바깥바람 냄새가 좋다고 말하던 남편이었습니다. 그것을살아있는 것으로부터의 서슬‘이라고 남편은 명명했습니다.
바람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저로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외출에 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남편은 급기야 저에게 바람다운 바람을 쐬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바다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남편이 왜 그런저런 말을 했던가 알았지요. 남편은 은밀히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55

아이 여자는 세상과 얼마간의 완강한 거리를두고 있구나. 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입니다. 집착 뒤에 올지도 모르는 허무와 환멸 따위를감당해낼 저항력, 그것이 그녀의 몸에는 단 하나도없는 것처럼 보였지요.
허무와 환멸 따위를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것 같았습니다. 그 두려움이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유지하도록 그녀를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다 그녀는 그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걸까. 궁금했지만 그런 건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건 대개는 원형질과도 같은 것이어서 본인 자신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은 거니까요. - P266

저는 공주로 달려가기로 맘먹었던 겁니다. 갑사라는 절이 공주에 있으며, 그 공주라는 곳이 대천으로부터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같은 충청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기막힌 겨자소스를 먹는 순간, 저는 그곳 갑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있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남편과 어린 두 아이를 밤바다에 남겨두고, 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어떤 남자한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충동적이며 비현실적입니다.
- P287

미친 해일이 일어 파도는 제 몸을 무너뜨립니다. 저는 소리를 지릅니다. 대지가 사정없이 요동치고, 어디선가 용암이 펑소리를내며분출합니다. 저는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바람이 자고, 바다가 잔잔해졌을 때, 그는 제 몸에서 천천히 빠져나갔습니다. 그때 저는 보았지요.
그의 두 뺨에 번들거리던 눈물을, 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순 있다. - P361

거기엔 거리가 있고 시간이 개입돼 있다. 두 달이조금 넘었을 뿐인데, 그녀와 나 사이엔 감히 겁(劫)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거리가 존재한다. 특별히 내가 비정하고 몰인정한 타입의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뭔가가 잘 정리된 듯하다. 정돈된 듯하다. 성적인 욕구를 모르고 살아가던 예전의 그 질서가 다시찾아온 듯했으나, 결코 예전의 그것은 아니었다. 훨씬 더 정리되고 정돈된 느낌.
어쩌면 나는 이런 형태의 안정을 찾기 위해 강보경이라는 혼돈의 늪을 건넌 건지도 모른다. 거듭말하지만, 물론 내 의지가 시킨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뭔가 나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아무려나 상관없다.
- P378

그것은 오히려 저를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이고어쩌면 신화적이며 상징적인 관계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저는 점차 다른 세상으로 멀어져가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몇날 며칠 그를 지독히도 그리워하고, 흐느끼고, 격정에 휘말리고, 관계의 해체를 두려워하고, 죽음처럼 고통스러워한 뒤로는 이제 그다지 혼돈스럽지만도 않습니다.
이해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이제 차라리 자유롭다고까지 느끼니 말입니다. 저어쪽 사납게 흐르는물 너머로 아이들의 땅이 보입니다. 남편의 땅이 보입니다. 저의 땅이 보입니다. 한 사내가 저를 태우고 격류를 가로질러 이쪽 땅 위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사내는 물을 따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이제 이곳에, 이쪽 세상에 또 다른 제가존재하는 것입니다. - P392

가생각해 보면 그런 암시는 이전에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한 여인의 낯선 오피스텔에서 제가 그를 처음 안던 날, 저는 혼돈을 느끼면서도 15층 상공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같다는 생각을 얼핏 했었지요. 침대에 누워<인도방랑>을 읽는 저를 제가 내려다보기도 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종종 있었지요. 애드벌룬을탄 제가 지상의 또 다른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덕수궁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입원한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저는 전혀 다른사람이 돼 있었지요. 하루에 밥을 일곱 번이나 먹는괴상한 여자로 변해 있었다는 게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갈아끼운 인간이란 게 가능하다면, 바로 그런인간이 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 P393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는 문득문득 이 세상이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곧 신발끈을 조여매고 먼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어쩌면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자라 허공을 떠올라야할 것 같았습니다. 선녀처럼. 제가 살던 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혹성인 것 같더란 말입니다.
저 자신이 불쑥불쑥 낯설게 느껴질 때마다 이게꿈이지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껏 내가살아온 현실이 오히려 꿈이지 싶었습니다. 이렇게무책임하게 세상과의 관계를 저버려도 되는 건가생각되다가도, 더 크고 원초적인 세계와의 관계에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레는 자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 P408

잠시 떠났던 세상의 구조로 다시 돌아간다는 게 저에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노력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구조가 좋아서면 그건 이제 아닙니다. 분명 그건 아니지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제가 불편함과 낯설음과 어색함을 감수하자는 것뿐이지요. 견뎌보자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게 최선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나. 저는 언제까지나 남편 곁에 있고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럭저럭 다시 그런 생활과 구조에 자연스럽게 물들어버리면 이전과 흡사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도 끝내 견딜 수 없어지면 독수리가 되든 선녀가 되든 해서 하늘이든 바다 건너든어디론가 날아가버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서.
- P409

그녀의 기록은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그녀의 글은 이어지지 않았다.
WAF그녀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만난건 짧은 꿈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대로 현실로 잠깐 퉁겨져 나갔다 긴 꿈으로 되돌아온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그녀는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린 존재였다.
느닷없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찬란하게 불타오르다.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환상이었다. 내게 있어 그녀가 그랬듯, 그녀에게 있어 내가 그랬나보다.
그녀는 날 더 이상 그리워하지도 않는다지 않은가. 다만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말했듯, 나로 인해일상적인 경험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버린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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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리도 우스웠던지. 저는 그녀를 먼저 보내고 카페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을 만나려면 아직 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남편을 카페로 불러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어둠으로 푸르게 물들어가는 바깥에서 만나는 게좋을 듯했습니다. 바깥 공기가 상큼할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R저는 손목시계와 저녁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시월의 저녁 여섯 시 오십 분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섶에도 활기참이 넘쳤습니다. 가로수며, 시청의 전자시계,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네온들이 아주 깨끗한 바람에 씻기운 듯했습니다. - P83

대한문 앞에는 이상한 어둠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상한‘이라는 말에 저는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일 재주가 없군요. 저는 언젠가도 그곳에서 남편을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라면 여덟 시 이후, 겨울이라면 여섯 시 이후의 어둠이 그렇습니다.
대한문 우측에는 55번이라든가 603번 좌석버스를 타는 곳입니다. 대한문 좌측으로 가면 지하철 입구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작은 파출소가 나오지요.
좌석버스 정류장이거나, 우측 지하철 입구께나, 파출소 앞은 그다지 이상할 게 없는 어둠들입니다.
그런데 대한문 앞에, 제가 말한 시간에 한번 가서보세요. 오싹한 기분이 들 겁니다.
그 시간대에 그곳에 있어봤지만 그런 기분을 못느끼겠더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위아래 흰옷을 입고 다시 한 번그 시간에 거기에 가서 보십시오. 그리고 푸른색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옷을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 P85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모호함의 정체를 알기 위해 저는 굳이 슈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동원한다고 해도 아마 알 수 없을 겁니다. 요컨대 우리부부는 문제 제로의 상태라는 겁니다. 문제 제로.
뭔가를 배우는 게 좋겠다는 건 제가 사양을 했고 가끔 밖에 나가는 건 제가 동의를 했으므로, 그날도 저는 밖으로 나와서 가고 싶은 델 갔던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가끔씩은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만, 저는 혼자인 것이 더 좋습니다. 수다를 떠는 건 제 쪽이 아니고 항상 상대편이었으니까요.
이것도 천성인지, 전 수다 같은 걸 떨 줄 모릅니다. 상대편의 이야기가 꼭 제 구미에 맞으라는 법도없지 않겠습니까. 응, 응 하고 최소한의 반응을 보이는 일조차 죽도록 힘겨울 때도 종종 있게 마련이거든요. - P98

고추냉이는 아주 비정한 맛을 가지고 있다. 맛이 풍요롭지 못해 생선회가 아니고는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겨자는 풍요롭다. 아주 좋은 겨자는 기름도 동동 뜨고, 쫀득쫀득한 게, 구수하기조차 하다.
겨자라면 나는 거의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그래서 막걸리에다 밥을 말아먹는다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식탁에 오른 거의 모든 음식을 이 겨자에 찍어 먹는다. 인절미도 겨자에 찍어 먹는다. 마늘도, 식빵도.
초장에서 고추냉이를 거쳐 겨자에 이르는 이 지극히 간단한 노정에다, 나는 거의 십오 년 세월을바친 셈이다. 이 정도면 기구하다고도 할 수 있지않을까.
나는 스카치 투명 테이프와 스테인레스 가위와,이 겨자를 좋아한다. - P117

이해되지 않아도 되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타당성 따위를 찾느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혼돈 자체가 질서가 되는 세상. 합리적이라 일컬어지는것들이 오히려 참을 수 없이 거추장스러운 세상. 제가 이전에 살던 질서와 가치와 의무와 도리의세상은, 저 숱한 빌딩숲을 건너고, 소음의 하늘을지나고, 시간의 강을 건너,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만큼 먼 곳에 조용히 버려져 있다는 기분입니다.
제 삼십사 년의 생애가 잔해되어 널브러져 있다는 기분입니다. 해가 지는 저 서녘의 멀고 먼 벌판위에 말입니다. 저는 제가 다다른, 설레는 이 혼돈의 세계에서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활기와, 새로운감정의 피를 수혈받고 있다는 기분입니다. - P143

그녀는 일원이 되지 못한다. 이 사회의 일원이되지 못한다.
일원이 된다 해도 한시적이다. 나나 그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다. 그녀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그런 식으로 이십팔 년 혹은 이십구 년을살아온 것이다.
일원이 되지 못하는 삶. 어쩌면 그녀에겐 이미그게 더 자연스런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함께직장에서 일한 것도 일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거처도 늘 일정치않다. 사당동에 사는가 하면, 어느 틈에 원효로다.
면그녀의 유일한 일원이라면 나 정도뿐이다. 적어도 우리는 7년 이상 만남을 유지해 오고 있으니까.
그녀와 한 번 잔 뒤로 또다시 그런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를 15일에 한 번쯤은 볼 수 있다. 왜 다시 자지 않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안다. 그녀의 몸 둘레에 씌워져 있는 투명막이라 - P178

는게 단추만 풀면 언제라도 벗어던질 수 있는 외위와는 정말 다르다는 것.
이제 또 그녀는 거처를 옮기려는 것이다. 정처없는 삶이란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그녀가 살림살이꾸려들고 서울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걸 보전 왠지 유민(民) 같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결혼을 해서든, 아니면 무슨 든든한 직장을 구해서든 왜 정주하지 못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을 수도있겠지. 그러나 그런 물음은 어쩐지 그녀에게 더 깊은 상처만 줄 것 같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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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여전히 낯선 여름에


낯선 계절이야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이해될 수없는 한 우리가 놓여 있는 세계 자체가 낯설지 않겠는가. 세계가 밤과 낮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낯선 계절이야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이해될 수 없는 한 우리가 놓여 있는 세계 자체가 낯설지 않겠는가 세계가 밤과 낮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세계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루어져 있는 거라면,
그 낮과 밤, 그리고 모든 계절이 세계라는 이유로얼마든지 낯설지 않겠는가.
필연과 우연은 어떠한가. 이해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필연이라 한다면, 이해의 세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상들은 우연일 것이다. 필연과우연이라는 건 말하자면 이해와 몰이해, 안과 밖,

낯익음과 낯섦의 관계일 수도 있다.
이해를 보자.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인문·사회 · 자연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세계를 이해의 세계라 한다면 그것으로 증명할 수 없는 세계를 몰이해의 세계라 할것이다. 이해의 세계가 몰이해의 세계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너무 쉽게부정해 버린다. 이해할 수 없어. 우연일 뿐이야. 낯설어....…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미지의 세계, 우연의 세계, 저 바깥의 세계를 부정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낯선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작동하지 않는 것이아니다. 그 낯선 세계는 우리의 삶 순간순간에 엄연히 개입하며 한 인간의 운명을 관장한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가장 극적이고 격정적이며 어떤 인간도 피해갈수 없는 낯선 세계가 사랑의 세계다. 사랑은 인류가구축해 놓은 가치와 제도와 문화와 규범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병적인 증상을 빼곤 이런 경우가 없다.

우리는 사랑을 병이라 일컫지 않음으로써 가까스로 낯선 세계를 긍정한다.
이와 같은 체계 긍정의 개인적 사례가 바로 사황이다. 이로써 모든 인간들이 영매자의 특별한 체힘을 공유한다. 이 낯선 계절의 혼돈을 통과한 자는미지와 우연과 저 바깥 세계의 신비를 알아 눈이 깊어진다. 그런 자라야 비로소 ‘나는 행복하게도 불륜에 빠졌다.‘라는 말로 첫 이야기를 떳떳하게 시작할수 있을 것이며, 그런 자라야 이 첫 문장이 낯설지
않은 독자가 될 것이다.

2005년 7월,
여전히 낯선 여름에
구효서

만성화되무너지면 강물에 빠져 죽기밖에 더하겠어? 이렇게 대범한 척해도 불길함은 언제나 주사 맞는 일만큼 새삼스럽다. 새록새록.
AU불길함을 없애기 위해 불길함이라는 세 글자를되풀이해서 읽는다. 불길함, 불길함, 불길함, 불길함‥…… 이렇게 수십 번을 되풀이해 읽는다. 그러면불길 ‘함‘은 마치 전 ‘함‘의 일종이거나, 특별한 용도의 사서함 이름 같아진다. 이쯤 되면 재미도 없지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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