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쉬스마레프 
1973년 4월 11

친애하는 호시노씨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호시노 씨가 우리 집에 묵을 수 있는지를놓고 아내와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몇 월에 올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6월과 7월이면 여기에서는 순록을 돌보며
거의 마을에서만 시간을 보냅니다. 7월 10일부터 15일까지는 순록 뿔을 자르고 소유자 표시를 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언제쯤 도착할지 정확히 알려주면 도움이될 것 같습니다. 놈에서 쉬스마레프로 오는 교통편도 수배해놓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럼 이만.

클리포드 웨이오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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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호박 조각 하나가 국물과 함께 입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호박은 제대로 익지도 않았고 간도 덜 배어 있었다. 호박 조각뿐이아니었다. 된장찌개 국물은 뜨거워서 쉽게 입을 대기도 어려운데 국물 속의 건더기는 어느 것 하나 간이 제대로 배어 있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간이 덜 배어 맛이 없는 된장찌개, 일없이 뜨겁기만 한 된장찌개를 후후 불어서 억지로 식혀 가며 오로지 저녁 야근을 위해 빈배를 조금씩 채워 나갔다.
어쩌면 요즘 내 사는 꼴이 이 뜨거운 된장찌개 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겉으론 바쁜 척 열을 내며 살지만 기실은 뜨거운 국물속의 간이 배지 않은 건더기 같은 생활, 또는 일상. - P14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신문 속의 그림 ‘아기업은 소녀‘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이미 세상을 뜬 지오래인 어떤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기사와 함께 실린 그림이었다.
내 지나온 삶의 내력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볼 때, 나는 그림과는 애당초 사돈네팔촌만큼보다도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그 그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그림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그 그림에 자꾸 마음이 끌리는지 모르겠다.
사무실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그 이유를 알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그 그림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오늘 저녁까지 마쳐 놓아야 할 일들이 내 책상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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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일본 전쟁성의 작전 명령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강간과 성병을 막기˝ 위해 ‘위안소‘에서의 규제된 섹스를 옹호했다.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들까지 끌려왔다. 납치당하거나 간호 병동이나 공장에서 일한다고 속아 오거나 부모로부터 계약노동자로 팔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내진 곳은때로는 하루에 50명까지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유곽이었고, 그곳에 여러 달, 심지어 여러 해 동안 붙들려 있었다.
5만~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가 300만 일본군의 접대를 강요받았다. 전후에 일본 관료들이 문서를 파기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여성은 후퇴하는 군대에 살해당했다. 일본 군인의 폭력 때문에 생긴 합병증이나 성병으로 죽은 여성도 많았다. 자살한 여성들도 있었다.
1993년 UN의 세계여성인권침해법정 Global Tribunal on Violations ofWomen‘s Human Rights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미 90퍼센트의 ‘위안부‘가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매춘부‘라불리며 사회적으로 외면당했다.
일본은 침묵했다. 관료들은 위안소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 여성들이 매춘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츰 증언에 나서는 용감한 생존자들이 늘어났다.
1993년 일본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사과로 과거의 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거의 5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뒤에도 후임 총리 중 하나인 아베 신조는 그를 비난했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생존자들에게 10억 엔을 지급한다는 한국과의 합의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는 50명도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은 옛 식민 권력에게더 강력한 사과를 요구하며 여성들은 수요일마다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모여 ‘사과하라!‘ 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라고 외치고 있다.
일본은 계속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일본 공영 방송 NHK 편집자들은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에 이들을 ‘전시 위안부라 불리는 사람들‘로 묘사해야 했다.
2018년 10월 일본의 도시 아소카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안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진 것에 항의해 샌프란시스코와의자매도시 관계를 끊었다.

★ 옮긴이-당시 일본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중언 이후 진행된 조사 결과와 함께 발표된 ‘고노 담화‘에서 위안소 설치 및 관리에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며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표현했다.
★★ 옮긴이 -2015년 12월 아베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여 한국 정부가 위안부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10억 엔을 출연하기로 하였다. 이 합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회피했을 뿐 아니라 진상 규명과 역사 교육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지않은 정부 사이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P 248, 249




1997년 사라예보의 조사기록센터가 발표한 사상자 보고서인보스니아 사망 보고서 The Bosnian Book of the Dead>는 9만 2207명의 사망자 가운데 40퍼센트가 민간인이라고 기록한다. 사망자의 3분의 2가 무슬림이었다.
그리고 강간이 있었다. 강간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그 누구도 진짜로 알 수 없지만 2만~6만 명의 피해자가 있다고 추정된다. 대부분이 보슈나크인(무슬림)이지만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도 있고, 더러 남자도 있었다.
희생자들의 나이는 6세부터 70세까지이고 반복해서 여러 차례 강간당했으며, 몇 년 동안 붙들린 경우도 많았다. 많은 여성이 강제로 임신당했고 임신 중지가 불가능할 때까지 붙잡혀 있었다. 여성들은 소유물처럼 취급되었고 강간은 공포와 굴욕,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보스니아전쟁에서 강간에 쏠린 관심이었다. 구유고슬라비아에서 전쟁 도구로 쓰이는 강간의 확산과 강간 수용소에 갇힌 여성들의 이야기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아무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사에서 최초로 기자와 역사학자들이 인종청소와 제노사이드를 수행하는 무기로서 강간과 성폭력의 사용을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 P190

약국을 찾아그날 밤은 제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저는 세 번 끌려가서 강간당했어요. 처음에는 경찰서 지하실로 저를 끌고 가더군요.
거기에는 큰 안락의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있었고 벽 중간쯤까지나무판이 눌려 있었어요. 밀란 루키치 Milan Lukić와 그의 사촌인 경찰스레도예 루키치 Sredoje Lukić가 보였어요. 비셰그라드는 작은 도시여서 바로 그 사람들을 알아봤죠. 저는 밀란 루키치를 매우 잘 알아요.
우리가 과거에 그의 가족을 도운 적이 있거든요.
그는 초승달 모양의 칼을 뽑더니 제게 옷을 벗으라고 했어요.
저는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자가 칼을 제 코 앞에 들이대더군요.
시키는 대로 바지와 셔츠를 벗고 속옷만 입고 서 있었어요.
두 번째는 치료 시설에서였어요.
세 번째는 고등학교 건물에서였고요.
세 곳 모두에 저만 있었던 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많았어요.
그들은 집단 강간을 위해 여러 장소를 사용했어요. 경찰서, 지역 스포츠 센터, 심지어 아동 보호 시설까지요. 우리를 투르크인이라 불렀어요. 이렇게 말하더군요. ‘너희는 이제부터 투르크인이 아니라 세르비아인을 낳게 될 거야‘ - P200

법원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희 회원 중에는 20명의 가해자에게 50~100번 강간당한 여성들이 있어요. 헤이그 재판소 시절에는모든 것을 한 번만 진술하면 됐는데 여기에서는 가해자 한 사람이재판을 받을 때마다 증언을 하면서 그 모든 일을 다시 겪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원하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해요.
회원 중에 지금까지 열 명이 자살했고 많은 여성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우리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있지만 법정에 갈 힘을 내지 못한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증언하지 않으면 그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되잖아요. 이 남자들은 우리 안의 아름다웠던 모든것을 빼앗아갔어요. 과거를 지우고 이 고통을 끝낼 마법의 지팡이는없어요. 정말입니다. 제가 강간당하고 나서 처음 비누를 손에 넣었을 때 피가 날 정도로 저를 씻고 또 씻어봐서 알아요. - P208

보스니아에서는 피해자보다 가해자가 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가해자의 변론 비용은 정부가 지불하지만 우리는 법정 부담금을 우리 돈으로 내야 해요. 그리고 피해자 보상은 여전히 없지요.
가해자가 특정 액수의 돈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려도 그들은 대개 모든 것을 가족에게 이미 양도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돈이 하나도 없어요. 민사법원으로 가면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는데 그건 아무도 원하지 않지요.
배상금이 지불된 경우는 제가 알기로 딱 한 건밖에 없습니다.
가해자가 덴마크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보스니아에 돌아온 거예요. 우리가 그를 찾아냈어요. 그는 아버지를 묻는 순간에 체포당해서 전시 강간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지요. 그는 희생자에게도 배상했고, 형기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도 돈을 냈어요. 4만3000유로로 오명을 씻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법이 바뀌어서 전범들이 돈으로 형량을 치를 수 없게 됐어요. 이제 우리는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법을 개정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 P209

그녀는 감자를 키운 덕택에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사라예보에 살지만 주말마다 비셰그라드에 가요. 거기에 텃밭이 있어서 감자와 당근, 콩을 키워요. 제 땅에서 온전히 저 자신으로있는 게 좋아요.
우리 아이들이 다 살아 있으니 저는 아내이자 어머니, 할머니로서 무척 뿌듯합니다. 손주가 다섯이 있어요. 둘은 대학에 다니고 하나는 간호사로 일하고, 가장 어린 손주 둘은 학교에 다닌답니다. 저는 손주들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애써요. 전쟁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없었던 것을 손주들에게는 주고 싶거든요.
큰 손녀는 열아홉 살이에요. 제 딸이 강간당했을 때와 같은 나이이죠. 저는 손녀에게는 이 일을 말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나 믈라디치가 재판을 받을 때 제가 그 남자와 논쟁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손녀가 집에 와서는 대학에서 다들 그렇게 용감한 할머니가 있어서 좋겠다고 말했다더군요." - P211

심지어 바키라의 강간범 밀란 루키치가 강간 수용소로 사용했던악명 높은 빌리나블라스 스파호텔마저 다시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모르는 관광객들은 1992년에 호스로 피를 씻어내야 했던 로비로 들어와 사람들이 처형당했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한다. 그러나 트립어드바이저 사이트에 올라오는 가장 큰 고객 불만은 불결한 객실이다.
루키치는 감옥에 있고 에스토니아로 이송됐다. 2011년에는 그의 회고록이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에서 발표되었다.
헤이그 구치소에 수감된 다른 죄수들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정치인들에게 영웅으로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다. 극우 세르비아 민족주의 정당의 대표였던 예순여섯 살의 보이슬라브 셰셀 Vojislav Sešelj은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고 거의 12년간 복역한 뒤 2014년 세르비아로 돌아와서 리얼리티 텔레비전 쇼의 스타가 되었다. 2018년 그의무죄 방면 판결이 뒤집힌 뒤 그는 이렇게 으스댔다. "나는 나 때문에일어났다는 그 모든 범죄가 자랑스럽고 그 범죄들을 기꺼이 다시 저지를 것이다. 우리는 결코 대세르비아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P214

1995년 7월 믈라디치의 군대가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했을 때 네덜란드 부대는 맡은 임무를 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피난처를 찾아 군 기지로 몰려온 2만~3만 명의 민간인조차 보호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몇천 명을 기지 안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뒤에는 문을 닫아걸었고, 결국 모든 민간인을 세르비아군에게 넘겨주었다. 세르비아군은 파란 헬멧을 쓴 네덜란드 군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람들을분류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을 그려보기는 어렵지 않다. 남편과아들들이 오른쪽으로 보내지는 동안 노인, 아이들과 함께 왼쪽으로가라는 지시를 받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의 모습을 격납고들은 마음 아픈 이야기를 전하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제 아들의 손이 제 손에서 뽑혀나갔어요." 한 여성이 영상에서말했다. "아들은 끌려가면서 자기 가방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어요."
남자들이 끌려가고 난 뒤 더 많은 비명이 들렸다. 젊은 여성들이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 P221

"그들은 임신 상태인 그녀를 강간하면서 여덟살짜리 딸이 그 광경을 지켜보게 했대요. 딸 앞에서 여러 남자에게강간당한 거죠. 그러고 나서 이 강간범들은 딸에게 그들과 엄마의성기를 씻으라고 시켰답니다. 나중에 이 여성은 34주에 조산을 했는데 아기가 눈이 먼 상태로 태어났어요. 딸은 학교를 마치지 못했고성관계가 무척 문란해서 세 사람의 서로 다른 남자에게서 다섯 명의아이를 낳았다더군요.
듣기 힘든 이야기였어요. 그 남자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손상시켰어요. 이 여성이 자신의 트라우마야 어떻게든 견딘다 해도 눈이먼 아들과 부서진 딸은.…….
그녀는 강간당했던 이야기를 여러 해 동안 하지 않았어요. 그일이 일어난 뒤에 집이 불에 타 없어져서 살 곳도 없었고 아이들을부양하느라 힘들게 지냈으니까요.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강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덜 중요해 보였던 거죠. 많은 여성이 수치심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 P225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강간이 전쟁 무기로 이용된다는 것에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90년대 보스니아전쟁 기간이었다. 강간수용소가 처음 보도됐을 때 충격의 물결이 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유럽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고 푸른 하늘이 화창한 시월의 어느 날 나는 에스반 열차를 타고 동베를린이었던 트렙타워파크역에 도착했고 계단을 내려가 여행자 카페와 유리 지붕 달린 유람선이 있는 슈프레강을 따라 걸었다.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니 회색 석조 아치와 통로가 나왔다. 통로를 따라가니 슬퍼하는 어머니 러시아의 동상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흰자작나무 길을 걸어 망치와 낫이 그려진두 개의 거대한 붉은 화강암 깃발 사이에 있는 단에 올라섰다.  - P232

소비에트 병사의 청동상이었다. 그는 으스러진 하켄크로이츠를 밟고 서서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작은 독일 소녀를 안고 있353었다. 높이 10미터에 무게가 70톤쯤 된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럴 의도로 만들어진 동상이었다. 트렙타워파크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유럽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공세였던 1945년 봄 베를린 진격전에서 목숨을 잃은 8만 명의 소비에트군가운데 7000명이 마지막 안식처로 잠들어 있는 곳이다.
나는 노랗게 물든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힌 그 모든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 그들을 잃은 어머니와 아내, 딸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조깅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유모차를 밀며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한무리의 여행자가지나갔다. 공원은 분주한 도로 곁에 있었지만 분위기는 조용했다.
계단을 올라가 동상의 기단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종교 프레스코화처럼 선명한 붉은색과 금색 모자이크로 한 무리의 사람을 묘사한 벽화가 있었고, 바닥에는 줄기가 긴 빨간 장미와 카네이션들이놓여 있었다. 벽화 위에는 러시아어와 독일어로 선언문이 쓰여 있었다. "소련인들이 파시즘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구했다." - P233

다시 벤치로 돌아와 나는 소녀를 안고 우뚝 서 있는 병사를 응시했다. 이 청동상이 전달하려는 영웅적 이미지와는 관계없이 많은독일 여성은 이 기념비를 ‘무명 강간범의 무덤‘이라 부른다. 이 묘석에 새겨진 전투와 해방의 장면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붉은군대가 독일의 수도로 진격하는 동안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대량 강간 현상‘이라고 표현한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 Antony Beevor에 따르면 베를린에서는여성 세 명에 한 명꼴로 많은 여성,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강간당했고, 전체적으로는 ‘최소한 200만 명‘이 강간당했다.
앤터니 비버는 그의 책 《베를린: 몰락, 1945 Berlin: The Downfall,
1945》를 쓰기 위해 일기장과 군인들의 편지, 공산당 정권의 기록을샅샅이 뒤지면서 발견한 사실에 충격을 받고는 이렇게 썼다. "많은 면에서 베를린 여성과 소녀의 운명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굶주리고 고통받은 병사들의 운명보다 훨씬 비참했다." - P234

침묵, 불처벌, 부정,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프가니스탄부터 짐바브웨에 이르기까지 내가 취재한 모든 곳에서 여성이 군대에 강간당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 강간이어떻게 전시에는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
나는 이 장의 첫머리에서 전시 집단강간이 세계 언론의 광범위한 관심을 받은 최초의 전쟁으로 보스니아 전쟁을 언급했다. 그러나내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자 전시 집단강간을 표현한 아주 많은재현물이 있었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18 전시실만 가도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의 그림 <사빈느 여인들의 강간The Rape of theSabine Women>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가 높은 단에서 지켜보며 지시하는 동안 치마가 들춰지고 가슴이 노출된 반쯤은 벌거벗겨진 고통스러운 표정의 여성들이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 있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 P241

전쟁에서 강간의 사용은 "분쟁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존재해왔다"라고 1998년 UN 여성기구United Nations Women의 보고서는 선언했다.
rape(강간)라는 영어 단어는 중세 영어 rapen, rappen (유괴하다,
강탈하다, 채가다)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는 훔치거나 붙잡거나 쟁취하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rapere에서 유래한다. 마치 여성이 재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 표현은 오랜 세월 남자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인이 여성들에게 저지른 집단 강간에 대해 썼다. "포키스인 몇이 쫓겨가다가 산 근처에서 붙들렸고 몇몇 여자는 너무나 많은 페르시아 병사들에게 잇따라 강간을 당한 나머지 죽었다."
구약성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투를 다루며 강간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명기》 21장 10~14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적과 대적하여 전쟁에 나갈 때 ...… 포로 중에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그녀를 차지하고 싶다면 …... 그녀에게 가서 그녀의 남편이 될 수 있다." - P243

1975년 프랑코가 노환으로 죽은 뒤 스페인은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길을 닦는 과정에서 과거를 지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했다. 1977년 스페인 의회는 ‘망각협정 Pact of Forgetting‘에 동의했고 사면법을 통과시켜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했다. 숙청도, 진실위원회도 없었고, 역사책에 아무 언급도 없었다. 시인 페데리코가르시아 로르카 Federico Garcia Lorca를 포함해 세비야 주민 5만 4000 명의 처형에 책임이 있는 데 야노 장군은 바로 그 도시에 있는 마카레나성당 특별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스페인내전이 시작되고 얼마 뒤 난징의 강간이 일어났다. 2차청일전쟁 기간에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한 일본제국군이 자행한 잔학 행위였다.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월까지 여섯주에 걸친 학살에서 일본군은 집마다 돌아다니며 열 살 소녀까지 찾아내 아주 많은 여성을 강간했다. 2만~8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진술에 따르면 많은 여성은 강간당한 뒤 살해되었고, 다리가 벌려지고 질에 나무막대와 잔가지, 잡초가 꽂힌 채버려져 있었다. - P247

1938년 일본 전쟁성의 작전 명령은 "군대의 사기를 진작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강간과 성병을 막기" 위해 ‘위안소‘에서의 규제된 섹스를 옹호했다.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들까지 끌려왔다. 납치당하거나 간호 병동이나 공장에서 일한다고 속아 오거나 부모로부터 계약노동자로 팔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내진 곳은때로는 하루에 50명까지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유곽이었고, 그곳에 여러 달, 심지어 여러 해 동안 붙들려 있었다.
5만~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가 300만 일본군의 접대를 강요받았다. 전후에 일본 관료들이 문서를 파기했기 때문에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여성은 후퇴하는 군대에 살해당했다. 일본 군인의 폭력 때문에 생긴 합병증이나 성병으로 죽은 여성도 많았다. 자살한 여성들도 있었다.
1993년 UN의 세계여성인권침해법정 Global Tribunal on Violations ofWomen‘s Human Rights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미 90퍼센트의 ‘위안부‘가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매춘부‘라불리며 사회적으로 외면당했다.
일본은 침묵했다. 관료들은 위안소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그 여성들이 매춘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차츰 증언에 나서는 용감한 생존자들이 늘어났다. - P248

1993년 일본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의 사과로 과거의 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 거의 50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뒤에도 후임 총리 중 하나인 아베 신조는 그를 비난했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생존자들에게 10억 엔을 지급한다는 한국과의 합의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는 50명도 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은 옛 식민 권력에게더 강력한 사과를 요구하며 여성들은 수요일마다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모여 ‘사과하라!‘ 와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라고 외치고 있다.
일본은 계속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부터 일본 공영 방송 NHK 편집자들은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에 이들을 ‘전시 위안부라 불리는 사람들‘로 묘사해야 했다.
2018년 10월 일본의 도시 아소카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안부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진 것에 항의해 샌프란시스코와의자매도시 관계를 끊었다. - P249

★ 옮긴이-당시 일본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는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중언 이후 진행된 조사 결과와 함께 발표된 ‘고노 담화‘에서 위안소 설치 및 관리에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며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표현했다.
★★ 옮긴이 -2015년 12월 아베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하여 한국 정부가 위안부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10억 엔을 출연하기로 하였다. 이 합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배상을 회피했을 뿐 아니라 진상 규명과 역사 교육 등에 대한 언급이 없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지않은 정부 사이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P249

1974년 키프로스 침략과 점령에 참여한 터키군도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광범위한 강간으로 악명이 높았다. 25명의 소녀가 터키병사들에게 강간당했다고 터키군 장교들에게 신고했다가 그 장교들에게 다시 강간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병사들과 비밀경찰들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가게와 가정집을 약탈하고 유정에 불을 질렀으며왕궁 바닥 곳곳에 배설물을 문대고 쿠웨이트라는 이름을 긁어내어쿠웨이트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
그러나 당시 수천 명의 쿠웨이트 여성과 필리핀 가정부가 강간당했다는 사실은 훨씬 덜 알려져 있다. - P251

"전쟁은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어난다." 마사 겔혼Martha Gellhorn이 1959년 《전쟁의 얼굴The Face of War》에서 쓴 구절이다. 그러나 전쟁은 다양한 방식으로도 일어나며 어쩌면 죽음이 최악이 아닐 수도있다.
나는 더 많이 읽고 더 조사하고,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가 역사에 대해 배워온 모든 것에 의문을 품게 됐다. - P251

1976년부터 1983년까지 7년에 걸친 군부독재 기간에 수천 명의 아르헨티나 남자와 여자가 ‘사라졌다.‘ 나중에 ‘더러운 전쟁‘이라불리게 된 이 시기 동안 공식 자료에 따르면 1만 3000명, 인권단체에 따르면 3만 명 이상이 사라졌다.
스포츠클럽과 버스 터미널, 군사학교, 심지어 서커스장까지 약600곳이 감금 수용소로 개조되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그곳으로 끌려가 고문받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시체들은 비밀 매장지에 버려졌고, 많은 사람이 비행기에 줄줄이 실려 플라타강이나 대서양에 산채로 던져져 죽었다.
납치된 사람 중 30퍼센트 정도가 여자였고 몇몇은 모니카처럼임신한 상태였다. 그들은 출산 때까지 감금 수용소의 특별실에 살려둔 다음 출산 뒤에는 이른바 죽음의 비행기에 실렸다. 태어난 아기들은 부모의 혈통을 전혀 모르는 아기 없는 부부에게 주기도 했고, 그들의 어머니를 살해한 군사경찰이나 비밀경찰이 데려다 키우는섬뜩한 경우도 있었다. - P254

고문자들이 임신한 수감자를 출산할 때까지 살려두었다가 아기를 빼앗았다니 디스토피아 소설에나 나옴직한 사악한 일이었다.
사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사건들이《시녀 이야기》에 포함된 몇몇 실제 사례를 제공했다"고 썼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아기들을 받아낸 의사나 산파, 아기들에게 세례를 준 신부, 그 일에 공모한 모든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러나 억압자 중에는 그들이 한 일을 이념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친부모의 ‘불경한‘
좌파 신념을 물려받지 않도록 공산주의자로부터 아이들을 구해 ‘품위 있는 가톨릭 가정‘에 건네준 행동이었다고. - P262

경악할 만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아르헨티나는1978년 월드컵을 주최했으며 스코틀랜드부터 스웨덴까지 여러 축구팀과 팬을 초청했고 우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와 결승전을 펼친 모뉴멘탈 경기장은 ESMA에서 1.6킬로미터 정도밖에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호르헤 아코스타를 비롯한 장교들은 얼마전까지 고문하던 여성들에게 키스를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한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아코스타가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하고 외치며 방에 들어왔어요.
내가 방문한 많은 장소와 달리 이곳에서는 적어도 이제는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층 홀에는 유죄판결을 받은 가해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보여주는 영상이 벽에 투사되고 있었다.
2005년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éstor Kirchner대통령의 촉구로 사면법을 폐지했다. 살인적 억압을 자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소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 P267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들을 조심해, 네그리타. 그들에게 상처받을 수 있어."
그녀는 자신이 동성과 관계한다는 말을 그에게 한 적이 없었다.
"전화를 도청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이후 여러 해 동안 그라시엘라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희는 강간당했지만 부역자들이라고 비난받았어요. 마치 제가 아코스타의 여자 친구였던 것처럼요. 우리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죠. 아무도 저희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어요."
‘30년에 걸친 고통의 시작‘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사진가이자 기록관리인으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홀로 살았다. "친구 중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늘 불을 켜두고 잤지요."
결국 동료 한 사람이 실종자들에 대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ESMA에서 목격된 사람들의 명단을 만드는 수요 모임에 가보라고권유했다. "그 모임에 다녀온 다음 날에는 늘 아팠어요." - P274

그때부터 엘레나에게 악몽이 시작됐다. 한때 라팜파에서 밀의여왕으로 뽑힐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엘레나는 수용소 사령관 두란 사엔스Durán Sáenz의 눈에 띄었다. 국경일이던 6월 20일 그는 그녀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강간했다. "그는 [이튿날 밤까지] 저를발가벗긴 채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않고 그 침대에 묶어 놨어요."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임신 4개월째였고 눈으로도 분명 상태를 알 수 있었어요. 임신한 여자를 강간하다니 사디스트적인 짓이죠…… 우리 여자들은 남자들의 쾌락과 야만적인 의식 같은죄악에 이용되었어요."
"저는 두란 사엔스의 소유물이었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적절한 단어를 쓰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그와 ‘성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었어요. 누군가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상대가 동의했다는 뜻이지요."
엘베수비오에서는 강간이 흔했다고 엘레나는 말했다. 그녀는또한 악명 높은 술꾼이자 호색한인 프랑코 루쿠 Franco Luque 중령에게도 강간당했다. 보초병들은 여성 수감자들의 몸을 자주 더듬었다.
그들은 기니피그 한 마리를 키웠는데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막대에묶은 다음 다리 사이에 그 기니피그를 집어놓곤 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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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촌의 상태도 충격적이었다. 지저분했고 악취를 풍기는 초록색 물웅덩이들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임시 변소가 많다고, 3만 개가 있다고 구호본부장이 나중에 내게 말했다. 그러나 워낙 급하게세우다 보니 많은 변소가 이미 막힌 상태였고 잠금 장치가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많은 변소가 아이들이 물을 받아가는 우물 옆에 있었다. 우물을 워낙 얕게 판 탓에 4분의 3이 분뇨로 오염됐다고 구호원들이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설사로 고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들 가운데 4분의 1은 영양실조였다.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 가운데 많은 이는 너무 심한 스트레스로 젖이 말라버렸다.
또한 사생활이 조금도 없었다. 방글라데시는 안 그래도 세계 최대의 인구 밀집국이며 1억 6500만 명의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난민 수십만 명이 머물 공간을 찾는일이 쉽지 않았다. 맨체스터 인구 전체가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난 것과 다름없다고 한 구호원은 말했다.
- P97

홍역은 이미 터졌고 내가 있는 동안에는 디프테리아가 발생했다. 안토니우 쿠테흐스 António Guterres UN 사무총장은 이곳의 상태를 ‘인권의 악몽‘이라 표현했다.
매일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수많은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눈이 따갑고 공기가 어둑해졌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침은 난민촌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질 정도다. 기침 소리와 ‘바이바이‘라는 외침 소리가.
외국인들은 오후 5시 이후에는 난민촌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저녁에 벌어지는 일들을 소문으로 들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들이나타나 매춘을 위해 소녀들을 낚아채 간다고 했다. 난민들은 밤이면납치당하는 아이들의 비명이 들린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딸을 잃었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콕스바자르의 긴 해변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어린 로힝야 여성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모습을 보았다. 배급되는 쌀과 렌즈콩만으로는 살 수 없는 가족들이여성들을 팔아넘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 P99

"그들은 제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아요. 저는 아직 밖에 나가지 않고안에서 지내며 요리를 거들어요. 가끔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요 원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어요. 강간당하고 죽은 소녀들도 있는데 저는 살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 군인들은 세상에서가장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딸이나 자매가 없을까요?"
내가 떠나기 전에 야스민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게 일어난 일은 정말 끔찍해요. 어떤 남자도 저와 결혼하지 않을거예요. 누가 저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가슴 아픈 질문이었다. 물론 야스민 또래의 소녀들을 결혼시키곤 하는 그들의 고향에서도 로힝야 소녀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적어도 야스민은 임신하지 않았고 그녀를 돌봐주는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난민촌에서는 사춘기 소녀들을 집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소녀들이 마음을 쓸 만한 일이 거의 없다. - P104

이 모든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불교 신자들을 생각하면 평화와 연꽃과 명상을 떠올리고, 아웅산수치 Aung San Suu Kyi를 독재에 저항한용기의 상징으로 존경하며 자랐다. 오랜 세월의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수 치는 15년 동안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와 두 아들과 떨어진 채 지냈다. 남편이 옥스퍼드에서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머리에 장미장식을 꽂은 채 그에게 작별영상을 찍어 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낸 영상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틀 뒤에야 도착했다.
그러나 이제 아웅산수치는 사실상 버마의 정부 수반인데도 - P104

이 모든 로힝야족이 그녀의 정부에 의해 나라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버마군이 섬뜩한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동안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버마 당국은 로힝야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대신에 마치 이들이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이주민인 양 벵골인이라 부르거나 ‘구더기‘ ‘침략자‘ 또는 ‘검은 쓰나미‘라 부르며 악마화했다.
사실 로힝야족은 여러 세기 동안 버마에 살았다. 그들이 사는벼 재배 지역인 라카인은 예전에 아라칸왕국이 있던 곳으로, 몇몇기록에 따르면 8세기부터 무슬림이 살고 있었다.
박해와 강간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버마왕정은 1784년 아라칸을 정복한 뒤 그곳을 약탈했다. 동인도회사의 외과 의사였던 스코틀랜드인 프랜시스 뷰캐넌은 아라칸 정복 이후에 그곳을 여행하며이렇게 썼다. "버마족은 4만 명을 죽였다. 예쁜여자를 발견할 때마다 남편을 죽인 뒤 차지했고 어린 소녀들을 거리낌 없이 범했다."  - P105

2016년 10월, 수치가 선출되고 1년 뒤 버마 보안부대는 라카인북부에서 이른바 ‘소탕 작전‘을 실시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아이들을 비롯해 수백 명을 죽였으며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약 9만 명이 폭력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52 퍼센트가 강간당했고 여덟 달된 아기들까지 목이 잘렸다. "로힝야 어린이들이 당한 끔찍한 잔학행위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UN 인권고등판무관으로서보고서를 제출한 요르단의 외교관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Zeid Ra‘ad alHussein이 말했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증오를 품었기에 엄마 젖을찾아 우는 아기를 찌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아기의 어머니가 살해 장면을 지켜보게 하고, 그녀를 보호해야 할 바로 그 군대가 그 어머니를 집단 강간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사실, 이 작전으로 수치 정권은 ‘침략하는 이슬람 무리‘에 맞선 불교 가치의 수호자로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군부는 버마에서 무척 인기 있는 페이스북을 이용해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 P107

나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뉴욕 타임스》 기자 해나 비치 HannahBeech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내게 그날 하루에 대해 물었고, 나는강간 희생자와 아이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인물 소개 기사를 쓰기 위해 부모 없는 아이 셋과 그들의 삼촌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츰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아니었고 상냥한 삼촌인 척했던 남자가 그들의 아빠였다.
우리는 둘 다 그날 일로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혹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알지 못하는 것일까? 난민촌 소장은 로힝야족 중에는 워낙 정신이혼란스러워서 살균제를 우유로 혼동하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끝없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 P114

어린 소년 하나가 우유통을 들고 자말푸르의 길을 건너는데 경비병 하나가 파키스탄군 캠프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경비병은 우유를 받고 소년에게 동전 두 개를 주었다. 그 안에서 소년은 온몸에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발가벗은 여성 세 사람을 보았다. 소년은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고 그 동전을 결코 쓸 수 없었다.

_방글라데시, 다카의 독립전쟁박물관에 게시된 전쟁 기록물 - P115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고 여성들이 수줍음이 많다 보니 그 일을감히 폭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죠. 그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전투의지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저 같은 남자들은 화환과 지원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형편이괜찮은 여성들은 침묵했고, 가난한 여성들은 구걸하는 삶으로 내몰렸죠. 몇몇은 사리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당신이 로힝야족에게서들은 것보다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곳 여성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허공만 응시했죠."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저는 이 여성 순교자들을 기리는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달리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죽으면 다른 해방 투사들처럼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제 관에 국기를 덮고 나팔을 울리게 할 겁니다. 비랑고나가 죽으면 아무것도없습니다." - P118

"분쟁에서 여성은 항상 쉬운 과녁이지요." 그가 말했다. "파키스탄군은 대량학살로 사람들을 한 방에 굴복시킬 거라 생각했어요. 벵골 민족주의자들을 말살시킬 일종의 ‘최종 해결‘로 여긴 겁니다. 그래서 시골로 들어가서 주둔지를 세운 뒤 곧바로 하는 일이 여자들을찾는 거였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소녀와 여성들이 집에서, 거리에서,
밭에서, 버스정류장이나 학교에서, 우물가에서 납치되었지요."
더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른바 현장 강간-강간당했다. 그들의 침대에서, 가족 앞에서 강간당할 때가 흔했다. 바나나나무에묶여 집단으로 강간당하기도 했다. 군부대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여성은 도망갈 수 없도록 벌거벗은 상태로 감금되었다. 사람들은 트럭에서 의식을 거의 잃은 여성들을 끌어내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부대에서는 포르노영화를 보여줘 부대원들을 흥분시킨 다음 마음대로 발산하게 했다. 많은 여성이 군부대 주둔지에서 죽었다. 총검으로 성기가 관통당한 채 피를 흘리며 죽기도 했다. - P119

먹을 것도 충분히 주지 않았어요. 아파도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여성이 끌려간 주둔지에서 죽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었지요. 누군들 진짜 그런 일이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증거들이 있습니다."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여길 만한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었다. 야지디족과 보코하람에 납치된 나이지리아 소녀들, 로힝야족에게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파키스탄군에게는 강간도 체계적인 전쟁 무기였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정책이고 이념에 근거한 정책입니다." 모피둘이 말했다. "무슬림에 의한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지요. 우리를 열등한 존재로, 적절한 무슬림이 아닌 존재로 낙인찍고 우리를 학살한 겁니다. 강간은 불신자들을 정화해야할 그들의 ‘의무‘였습니다." - P121

나이지리아에서 보코하람에 납치된 소녀들처럼 이들은 이중의희생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간을 겪었고, 그 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는 외면당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모피둘이 이야기했다. "한 소녀가 강간당해서 임신을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 금 귀걸이를 빼주면서
‘이걸 갖고 떠나라. 다시 돌아오지 마라‘고 했다더군요. 소녀는 항구의 어느 짐꾼 집에 신세를 지면서 사내아이를 낳았어요. 그러자 이짐꾼의 가족이 아기를 죽이고 다카로 가서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소녀를 설득했대요. 그래서 소녀는 아기 입에 소금을 채우고는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어요. 그 뒤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죠."
몇몇 여성은 자신이 겪은 강간에 대한 이야기로 돈벌이를 한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돈 가방을 받았다는 둥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돈을 받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비난받은 여성들도 있었다. - P123

2010년 셰이크 하시나 정부는 그녀의 아버지가 1973년 제정한법령을 토대로 마침내 국제전범재판소International Crimes Tribunal를 구성했다. 다카의 구 고등법원 건물에서 열린 이 재판은 2019년 3월까지 88명의 부역자와 정당 지도자들을 고문과 살해, 강간 혐의로 재판했다. 26명이 종신형을 받았고 6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가운데 여섯 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파키스탄은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과 파키스탄이 영토의 절반을 잃게 된 경위를 조사한 조사위원회는 상급장교들의 ‘부끄러운 잔학 행위‘를 비난했다고는 하지만 조사 결과를공개하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에 있는 군사박물관에는 잔학 행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으며 학교에서는 파키스탄이 사실상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역사를 가르친다. - P138

내가 본 것처럼 이 여성들은 오늘날까지도 어둠 속에 산다. "여전히 감춰진 고통이지요." 모피둘이 말했다. "최근에 한 소녀를 만났어요. 어머니 몸에 흉터가 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딸에게 그이유를 말해줬대요. 그 소녀는 노래를 하나 썼어요. <나는 비랑고나의 딸입니다〉라는 노래였어요. 아름다운 노래지만 공개할 수 없었어요. 사회는 지금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이 여성들에게 국가가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가 다시 덧붙였다. "이 나라에서는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요즘도강간당한 여자들은 외면당하고 비난받을 때가 많지요.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은 ‘비랑고나‘를 만나면 그들의 회복력에 무척 큰 영감을 얻었다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다고 늘 말한답니다." - P139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아기였던 딸아이만 업고 도망치는데 누군가 뒤에서 몽둥이로 저를 내리쳤어요. 제머리를 치려고 했는데 아기를 치는 바람에 아기의 머리가 깨졌어요.
퍽 소리가 들린 뒤 울음소리가 멈춰서 저는 아기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요. 저는 죽은 아기를 등에서 내려놓고 계속 뛰었어요. 아기를묻어주지도 못했어요.
투치족 몇몇은 나무들 뒤에 여러 날 숨어 있었죠. 4월이라 우기여서 무척 습하고 땅이 질었어요. 숨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종착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어느 날인가는 제 여동생의 시체를 우연히 마주쳤어요. 마체테로 난도질당해 죽어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여러 차례, 거듭해서 강간당했어요. 누구든 저를 붙잡을 때마다 강간했어요. ‘투치 여자 맛을 보고 싶다‘면서요. 한 사람씩, 차례로 얼마나 많이 강간당했는지 셀 수도 없어요. - P145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강간당하고 씻지도 못하고, 옷도갈아입지 못하고, 그러다 아침이면 비가 쏟아붓고 비가 내리다 내리다 그치면 밤이 되어 또 비가와요.
어느 날 남자 넷에게 너무 거칠게 강간당해서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한 여자가 밭에 가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카사바를 하나 주며 조금씩 먹으라고 말했지요. 그때쯤에는 워낙 여러 날 굶어서 턱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한동안 저희는 시청 앞에 피신했어요. 거기에 여자와 아이들 수십 명이 있었죠. 시장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걸 알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어요. 이후 몇 주 동안 민병대와 지역 사람들이 저희를 반복해서 강간하고 구타했어요. 개들이 시신을 먹어 대서 우리가 묻어주려 하면 그들이 우리를 구타했어요. 저희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없으니 죽여 달라고 아카예수 시장에게 애원했지요. 그는 우리에게 ‘총알 낭비‘를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 P146

신은 다른 곳에서 그날을 보내고 있었는지 몰라도 르완다에서는 잠을 자고 있었다. 라고 르완다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투치족을절멸시키기 위해 르완다 곳곳에서 이웃들이 몽둥이와 마체테를 들고 이웃들에게 달려들던 그때 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르완다의 모든 사람이 무척 다정했고 모든 것이 무척 아름다웠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이 이처럼 끔찍한 악에 대한 이야기를 품 - P147

"저는 두 달 반 동안 분뇨 정화조에 숨어 있었어요." 운전사 장 폴Jean Paul이 말했다. "정화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온 가족이 살해당한 뒤였어요. 의사였던 아빠와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엄마, 일곱 형제자매 모두요."
그는 사람들 수백 명이 떠밀려 죽었다는 다리를 보여주었다. 용감한 지배인이 돈과 조니워커로 르완다군을 매수하는 동안 1200명이 겁에 질려 숨어 있던 밀콜린호텔도 보여주었다. 은신처를 찾아온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아 죽은 성당도 보여주었다. 금이 간 두개골들이 신도석을 따라 놓여 있었다.
나는 주말 브런치로 유명한 게스트하우스 헤븐에 묵고 있었는데 그곳을 운영하는 미국인 조시 Josh와 알리사 럭신Alissa Ruxin에 따르면 2003년 게스트하우스를 짓기 시작할 당시에는 비가 올 때마다 뼈들이 쓸려 나오곤 했다.
르완다 인구 800만 명 가운데 80만 명이 100일 동안 살해되었다. 나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살인이었고 UN은 창립 이래 최초로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를막기 위해 UN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148

"그 여성은 여섯 살짜리 딸과 함께 나무에 올라가 숨었는데 그때 그 아이가 이미 세 명의 남자들에게 강간당했고 그들의 이름을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검사가 증인의 말을 끊었죠. ‘네, 그 점에대해선 묻지 않았습니다‘라면서요. 조사관들이 그것에 대해 물어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증언 진술서에 없기 때문에 검사는 증인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면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질까 걱정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이 사람은 용기를 내 이곳까지와서 증언하는데, 그 끔찍한 일을 되살리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구나. 대체 우리가 뭐라고 이것만 듣겠다, 저것만 듣겠다 할 수 있나 싶었죠. 그녀는 일어난 일을 전부 말할 권리가 있잖아요. 그녀는시청에서 벌어진 다른 강간들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말했어요." - P167

"저희는 서로 함께했기 때문에 힘이 있었어요." 세실 무카루그위자Cecile Mukarug wiza가 말했다. 증인 중 가장 젊은 그녀는 제노사이드 당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고, 그 모든 세월이 지난 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겁니다."
세라피나처럼 그녀도 키갈리로 옮겨 와 키갈리 동쪽의 카카Kabuka 라는 시골 동네에서 흙길로 도착할 수 있는 언덕 비탈의 한 움막에 살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렸고 가끔 소가 울었다. 집 밖 관목에널어둔 빨래가 마르고 있었다. 집 안 벽에는 잡지에서 찢어낸 르완다 팝스타 조디 피비의 사진이 의무적으로 걸어야 하는 카가 포스터 옆에 붙어 있었다. - P169

그들은 아빠를 몽둥이로 때린 다음 변소 통에 던지고는 그 위로 변소를 부숴 무너뜨렸어요.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죽는 모습도 봤어요. 동생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 했는데 그들에게붙잡혀서 몽둥이로 맞아 죽었어요. 아홉살짜리 남동생에게는 연장을 주며 구덩이를 파라고 시킨 다음 거기에 집어넣고 산 채로 매장해버리더군요.
누군가를 붙잡을 때마다 그들은 언덕에서 소리를 지르곤 했어요. ‘우리가 아무개를 잡았ㅣ다.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다!‘
아빠는 아내가 둘이었어요. 우리 엄마와는 다섯 아이를, 다른아내와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살해됐어요.
저는 죽음을 기다렸어요. 당신도 강간당하고 거기에 누워 있는데 그들이 막대와 이런저런 것들을 사용한다면 죽음 말고 다른 건생각할 수 없을 거예요.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했어요. 아마 당장, 아니면 몇 시간 뒤에, 아니면 내일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매일 그렇게살았어요.
민병대 한 사람이 저를 노예로 데려갔어요. 집에다 가둬 놓고계속 강간하다가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어요." - P172

"외국의 법정에서 외국어를 쓰는 법복 입은 외국 판사에게 이야기해야 했지만 저는 두렵지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할 때는 두려울 게 없는 법이니까요." 빅투아가 말했다.
두 딸의 엄마인 필레이 판사는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타바 여성들의 증언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여자로서 그걸 듣는다는건, 여성들이 집단 강간당하고 남자들이 임신한 여성에게 달려들어강제로 낙태시킨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그 일을 느끼거든요."
‘남자 판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어 했죠.
더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증거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자기들은모르겠으니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의가 없었던 터라 저는 정의부터 내리기로 결심했어요." - P175

1998년 3월 아카예수는 결국 증인석에 섰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은 그저 명목상 최고 책임자일 뿐이며 그의 행정구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요 주장은 UN 평화유지군 사령관 로메어 달레어 RoméoDallaire 소장도 막을 수 없던 학대 행위를 자신이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그는 강간을 직접 지켜봤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자신의 강간 혐의는 여성운동이 대중적 압력을 행사한 결과이지 사실을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증인들의 신빙성도문제 삼았다. 예를 들어 임신 6개월이었다는 증인 JJ가 어떻게 나무에 올라갈 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14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법정은 심의를 위해 퇴장했다. - P175

"저는 유죄판결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강간범을 감자나염소를 훔친 도둑과 같이 분류할 때마다 늘 괴로웠으니까요. 그건정말, 정말 부당하잖아요." 세라피나가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깨웠어요. 그 일로 목소리를 낼 자신감을 얻었다고 제게 말한 여성들이많았어요. 하지만 그 판결로 제 삶이 나아지지는 않았지요. 제노사이드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저는 여전히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 이후로 관계를 맺어본 적52.6 440도 없어요."
세실이 동의했다. "처음에 증언하러 갈 때는 정말 무서웠지만일단 저희가 첫걸음을 떼고 나자 다른 사람들이 뒤를 이었어요. 그판결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웃으로 살지 못한 채 악의에 찬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을 겁니다.
저는 아카예수가 유죄판결을 받아서 행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힘들었어요. 제안이 망가졌다고 느껴요. 사람은 치유되지 않아요.
하지만 치유는 하나의 여정이니까요. 같은 곳에 머무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더 이상 과거를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아요. 매일 아침에 잠을 깨면 무엇을 먹을지 등록금은 어떻게 낼지 생각하니까요."
그들은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처럼 모두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 P181

"저희는 국제사회와 UN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희가 강간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고 비난했는데, 같은 일이 세계 곳곳에서거듭, 거듭 일어나고 있어요." 빅투아가 말했다. "저희는 배운 것 없는 여자들일 뿐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지 이해하기어렵습니다."
타바의 언덕에 자리한 오두막에서 자신이 몇 번이나 강간당했던 바나나 숲을 내다보는 그녀는 아주 외로워 보였다. "어쩌면 당신은 저희가 제노사이드에서 살아남았고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운이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희는 걸어 다니는 죽은 여자들이나 다름없어요.
저는 죽이는 것보다 강간하는 것이 훨씬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니까요. 다 자라서 겪은 일이니 저는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요.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마을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피부색도 같고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제게그 짓을 했어요. 저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삽니다. 저를 돕던 그 소년도 후투족이에요. 사람들은 묻지요. ‘왜 쟤를 옆에 놔두는 거야?"
타바의 여성들은 신체적 통증도 호소했다. - P182

이제 위협이 없으니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기 도시에서든 마을에서든 타바에서든 그 여인들을 만나면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밤에 집으로 돌아가 문을닫으면 그들 안에는 누가 무슨 수를 써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있을 겁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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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는 온통 카리부의 바다였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혹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위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바닷속에서 수만 마리의 카리부가 울려내는 발굽소리에 그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를 세우던 5월만 해도 이곳은 황량한 설원이었다. 지금은 벌써 7월, 툰드라에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고 북극권은 여름햇살로흘러넘친다. 나는 두터운 다운점퍼를 벗고 스웨터도 벗어버렸다. 땀에전 티셔츠에 북극 바람이 상쾌하게 스친다. 그 거대한 카리부 떼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벌써 한 달 이상을 아무하고도 말을 해보지 못했다. 소형 비행기의프로펠러 소리가 그리웠다. 알래스카를 여행할 때면 늘 이 소리를 기다렸던 것 같다. 부시파일럿 돈이 나를 데리러 세스나를 몰고 올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아마 능선을 응시하면서 온 신경을 귀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귓전을 앵앵거리는 한마리 모기 소리도 세스나 소리로 착각하기쉽기 때문이다. - P66

인간의 삶이 그림이 되는 순간이 있다.
백야의 북극해에 하얀 물보라가 솟아오르더니 그 자리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참고래가 바닷물을 뿜어 올리며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래잡이 캠프는 쥐죽은 듯 고요하다. 빙원에 있는 에스키모의 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는 참고래 한 마리에 쏠려 있다.
해안에서 바다로 1백 미터쯤 나간 곳에 설치된 각 캠프마다 언제든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우미악(턱수염바다물범 가죽으로 만든 에스키모의전통적인 카누)이 준비되어 있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보름달이 떴다. 사위는 백야의 엷은 빛에 싸여 있다. 바다는 고요히잠들어 있다.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십수 척의 에스키모 우미악이 일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반짝이는 바닷물 위로 많은 그림자들이 소리도 없이 한 점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 P67

5월이 되었다. 남쪽에서 도요새나 물떼새를 비롯하여 많은 철새가떼 지어 날아와 더욱 북쪽으로 향한다. 그들은 알래스카북극권에 둥지를 틀러 찾아가는 중이다. 봄의 전령 흰멧새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봄의 노래. 나는 자연의 질서를 느끼고, 그 철석같은 당연함에 종종 압도된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오후 시간을 얼음 감시대 위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꼭대기로, 리드를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는 고래를 일찌감치 발견하는 장소였다. - P72

저녁이 되어 이웃 캠프의 사람이 달려 왔다.
"조 프랭클린 패가 고래를 잡았다!"
몸 전체가 떨릴 듯한 흥분이 일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없었다. 고래가 우미악에 끌려 돌아온다. 사진을 찍어야지. 나는 캠프를향해 달렸다. 전령이 캠프 전체에 소식을 전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카메라를 준비한 나는 재빨리 얼음 전망대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에스키모의 노래였다. 보니, 아무도 없는 얼음 위에서 노파가 바다를 향해 춤을 추고 있다. 느릿느릿한움직임으로 무엇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이라였다.
아마도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래에 감사하는 춤일 것이다. 가까이가보니 마이라는 울고 있었다. 나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지금 춤의 원형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때로는 마음의 필름에만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 있다. - P73

커피가 바짝 졸아 있었다. 맥킨리 산의 잔조도 거의 사라졌다. 이제곧 동이 틀 시간이다. 일몰 2시간 후에는 해가 뜨는 것이다. 쓰디쓴 커피를 홀짝이며 푸르스름한 백야에 싸늘한 미풍을 맞고 있었다.
그 카메라를 지금도 쓰고 있다. 종종 그날 밤 사건을 생각한다. 이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카메라들 가운데 그 카메라는 이제 작은 사연을 가지게 된것이다.
언젠가 내가 늙었을 때 이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알래스카에서 말이야. 어느 날 밤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단다 ...... 이리 한 마리가……." - P83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며 석양 무렵의 가문비나무숲을 걷는다. 축축한 대기가 느슨하고 따뜻하다. 숲속 카펫에 떨어지는 무스(사슴과의 포유류) 똥에 물기가 조금 배어 있다. 버드나무의 새싹이 트기 시작했을것이다. 붉은다람쥐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숲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은 장작불이 흔들리고 있다. 타닥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의 마음을 풀어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역시 묘한 거야,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 자잘한 일상에 좌우되면서도 새 등산화나 봄기운에 이렇게 풍족해질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고 별이 나왔다. 랜턴을 켜놓고 일기를 쓴다. 올해가 다시시작되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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