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의 상태도 충격적이었다. 지저분했고 악취를 풍기는 초록색 물웅덩이들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임시 변소가 많다고, 3만 개가 있다고 구호본부장이 나중에 내게 말했다. 그러나 워낙 급하게세우다 보니 많은 변소가 이미 막힌 상태였고 잠금 장치가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많은 변소가 아이들이 물을 받아가는 우물 옆에 있었다. 우물을 워낙 얕게 판 탓에 4분의 3이 분뇨로 오염됐다고 구호원들이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설사로 고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들 가운데 4분의 1은 영양실조였다.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 가운데 많은 이는 너무 심한 스트레스로 젖이 말라버렸다. 또한 사생활이 조금도 없었다. 방글라데시는 안 그래도 세계 최대의 인구 밀집국이며 1억 6500만 명의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난민 수십만 명이 머물 공간을 찾는일이 쉽지 않았다. 맨체스터 인구 전체가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난 것과 다름없다고 한 구호원은 말했다. - P97
홍역은 이미 터졌고 내가 있는 동안에는 디프테리아가 발생했다. 안토니우 쿠테흐스 António Guterres UN 사무총장은 이곳의 상태를 ‘인권의 악몽‘이라 표현했다. 매일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수많은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눈이 따갑고 공기가 어둑해졌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침은 난민촌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질 정도다. 기침 소리와 ‘바이바이‘라는 외침 소리가. 외국인들은 오후 5시 이후에는 난민촌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저녁에 벌어지는 일들을 소문으로 들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들이나타나 매춘을 위해 소녀들을 낚아채 간다고 했다. 난민들은 밤이면납치당하는 아이들의 비명이 들린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딸을 잃었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콕스바자르의 긴 해변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어린 로힝야 여성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모습을 보았다. 배급되는 쌀과 렌즈콩만으로는 살 수 없는 가족들이여성들을 팔아넘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 P99
"그들은 제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아요. 저는 아직 밖에 나가지 않고안에서 지내며 요리를 거들어요. 가끔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요 원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어요. 강간당하고 죽은 소녀들도 있는데 저는 살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 군인들은 세상에서가장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딸이나 자매가 없을까요?" 내가 떠나기 전에 야스민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게 일어난 일은 정말 끔찍해요. 어떤 남자도 저와 결혼하지 않을거예요. 누가 저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가슴 아픈 질문이었다. 물론 야스민 또래의 소녀들을 결혼시키곤 하는 그들의 고향에서도 로힝야 소녀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적어도 야스민은 임신하지 않았고 그녀를 돌봐주는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난민촌에서는 사춘기 소녀들을 집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소녀들이 마음을 쓸 만한 일이 거의 없다. - P104
이 모든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불교 신자들을 생각하면 평화와 연꽃과 명상을 떠올리고, 아웅산수치 Aung San Suu Kyi를 독재에 저항한용기의 상징으로 존경하며 자랐다. 오랜 세월의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수 치는 15년 동안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와 두 아들과 떨어진 채 지냈다. 남편이 옥스퍼드에서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머리에 장미장식을 꽂은 채 그에게 작별영상을 찍어 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낸 영상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틀 뒤에야 도착했다. 그러나 이제 아웅산수치는 사실상 버마의 정부 수반인데도 - P104
이 모든 로힝야족이 그녀의 정부에 의해 나라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버마군이 섬뜩한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동안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버마 당국은 로힝야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대신에 마치 이들이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이주민인 양 벵골인이라 부르거나 ‘구더기‘ ‘침략자‘ 또는 ‘검은 쓰나미‘라 부르며 악마화했다. 사실 로힝야족은 여러 세기 동안 버마에 살았다. 그들이 사는벼 재배 지역인 라카인은 예전에 아라칸왕국이 있던 곳으로, 몇몇기록에 따르면 8세기부터 무슬림이 살고 있었다. 박해와 강간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버마왕정은 1784년 아라칸을 정복한 뒤 그곳을 약탈했다. 동인도회사의 외과 의사였던 스코틀랜드인 프랜시스 뷰캐넌은 아라칸 정복 이후에 그곳을 여행하며이렇게 썼다. "버마족은 4만 명을 죽였다. 예쁜여자를 발견할 때마다 남편을 죽인 뒤 차지했고 어린 소녀들을 거리낌 없이 범했다." - P105
2016년 10월, 수치가 선출되고 1년 뒤 버마 보안부대는 라카인북부에서 이른바 ‘소탕 작전‘을 실시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아이들을 비롯해 수백 명을 죽였으며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약 9만 명이 폭력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52 퍼센트가 강간당했고 여덟 달된 아기들까지 목이 잘렸다. "로힝야 어린이들이 당한 끔찍한 잔학행위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UN 인권고등판무관으로서보고서를 제출한 요르단의 외교관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Zeid Ra‘ad alHussein이 말했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증오를 품었기에 엄마 젖을찾아 우는 아기를 찌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아기의 어머니가 살해 장면을 지켜보게 하고, 그녀를 보호해야 할 바로 그 군대가 그 어머니를 집단 강간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사실, 이 작전으로 수치 정권은 ‘침략하는 이슬람 무리‘에 맞선 불교 가치의 수호자로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군부는 버마에서 무척 인기 있는 페이스북을 이용해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 P107
나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뉴욕 타임스》 기자 해나 비치 HannahBeech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내게 그날 하루에 대해 물었고, 나는강간 희생자와 아이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인물 소개 기사를 쓰기 위해 부모 없는 아이 셋과 그들의 삼촌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츰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아니었고 상냥한 삼촌인 척했던 남자가 그들의 아빠였다. 우리는 둘 다 그날 일로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혹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알지 못하는 것일까? 난민촌 소장은 로힝야족 중에는 워낙 정신이혼란스러워서 살균제를 우유로 혼동하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끝없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 P114
어린 소년 하나가 우유통을 들고 자말푸르의 길을 건너는데 경비병 하나가 파키스탄군 캠프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경비병은 우유를 받고 소년에게 동전 두 개를 주었다. 그 안에서 소년은 온몸에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발가벗은 여성 세 사람을 보았다. 소년은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고 그 동전을 결코 쓸 수 없었다.
_방글라데시, 다카의 독립전쟁박물관에 게시된 전쟁 기록물 - P115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고 여성들이 수줍음이 많다 보니 그 일을감히 폭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죠. 그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전투의지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저 같은 남자들은 화환과 지원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형편이괜찮은 여성들은 침묵했고, 가난한 여성들은 구걸하는 삶으로 내몰렸죠. 몇몇은 사리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당신이 로힝야족에게서들은 것보다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곳 여성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허공만 응시했죠."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저는 이 여성 순교자들을 기리는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달리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죽으면 다른 해방 투사들처럼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제 관에 국기를 덮고 나팔을 울리게 할 겁니다. 비랑고나가 죽으면 아무것도없습니다." - P118
"분쟁에서 여성은 항상 쉬운 과녁이지요." 그가 말했다. "파키스탄군은 대량학살로 사람들을 한 방에 굴복시킬 거라 생각했어요. 벵골 민족주의자들을 말살시킬 일종의 ‘최종 해결‘로 여긴 겁니다. 그래서 시골로 들어가서 주둔지를 세운 뒤 곧바로 하는 일이 여자들을찾는 거였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소녀와 여성들이 집에서, 거리에서, 밭에서, 버스정류장이나 학교에서, 우물가에서 납치되었지요." 더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른바 현장 강간-강간당했다. 그들의 침대에서, 가족 앞에서 강간당할 때가 흔했다. 바나나나무에묶여 집단으로 강간당하기도 했다. 군부대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여성은 도망갈 수 없도록 벌거벗은 상태로 감금되었다. 사람들은 트럭에서 의식을 거의 잃은 여성들을 끌어내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부대에서는 포르노영화를 보여줘 부대원들을 흥분시킨 다음 마음대로 발산하게 했다. 많은 여성이 군부대 주둔지에서 죽었다. 총검으로 성기가 관통당한 채 피를 흘리며 죽기도 했다. - P119
먹을 것도 충분히 주지 않았어요. 아파도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여성이 끌려간 주둔지에서 죽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었지요. 누군들 진짜 그런 일이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증거들이 있습니다."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여길 만한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었다. 야지디족과 보코하람에 납치된 나이지리아 소녀들, 로힝야족에게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파키스탄군에게는 강간도 체계적인 전쟁 무기였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정책이고 이념에 근거한 정책입니다." 모피둘이 말했다. "무슬림에 의한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지요. 우리를 열등한 존재로, 적절한 무슬림이 아닌 존재로 낙인찍고 우리를 학살한 겁니다. 강간은 불신자들을 정화해야할 그들의 ‘의무‘였습니다." - P121
나이지리아에서 보코하람에 납치된 소녀들처럼 이들은 이중의희생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간을 겪었고, 그 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는 외면당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모피둘이 이야기했다. "한 소녀가 강간당해서 임신을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 금 귀걸이를 빼주면서 ‘이걸 갖고 떠나라. 다시 돌아오지 마라‘고 했다더군요. 소녀는 항구의 어느 짐꾼 집에 신세를 지면서 사내아이를 낳았어요. 그러자 이짐꾼의 가족이 아기를 죽이고 다카로 가서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소녀를 설득했대요. 그래서 소녀는 아기 입에 소금을 채우고는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어요. 그 뒤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죠." 몇몇 여성은 자신이 겪은 강간에 대한 이야기로 돈벌이를 한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돈 가방을 받았다는 둥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돈을 받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비난받은 여성들도 있었다. - P123
2010년 셰이크 하시나 정부는 그녀의 아버지가 1973년 제정한법령을 토대로 마침내 국제전범재판소International Crimes Tribunal를 구성했다. 다카의 구 고등법원 건물에서 열린 이 재판은 2019년 3월까지 88명의 부역자와 정당 지도자들을 고문과 살해, 강간 혐의로 재판했다. 26명이 종신형을 받았고 6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가운데 여섯 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파키스탄은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과 파키스탄이 영토의 절반을 잃게 된 경위를 조사한 조사위원회는 상급장교들의 ‘부끄러운 잔학 행위‘를 비난했다고는 하지만 조사 결과를공개하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에 있는 군사박물관에는 잔학 행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으며 학교에서는 파키스탄이 사실상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역사를 가르친다. - P138
내가 본 것처럼 이 여성들은 오늘날까지도 어둠 속에 산다. "여전히 감춰진 고통이지요." 모피둘이 말했다. "최근에 한 소녀를 만났어요. 어머니 몸에 흉터가 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딸에게 그이유를 말해줬대요. 그 소녀는 노래를 하나 썼어요. <나는 비랑고나의 딸입니다〉라는 노래였어요. 아름다운 노래지만 공개할 수 없었어요. 사회는 지금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이 여성들에게 국가가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가 다시 덧붙였다. "이 나라에서는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요즘도강간당한 여자들은 외면당하고 비난받을 때가 많지요.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은 ‘비랑고나‘를 만나면 그들의 회복력에 무척 큰 영감을 얻었다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다고 늘 말한답니다." - P139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아기였던 딸아이만 업고 도망치는데 누군가 뒤에서 몽둥이로 저를 내리쳤어요. 제머리를 치려고 했는데 아기를 치는 바람에 아기의 머리가 깨졌어요. 퍽 소리가 들린 뒤 울음소리가 멈춰서 저는 아기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요. 저는 죽은 아기를 등에서 내려놓고 계속 뛰었어요. 아기를묻어주지도 못했어요. 투치족 몇몇은 나무들 뒤에 여러 날 숨어 있었죠. 4월이라 우기여서 무척 습하고 땅이 질었어요. 숨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종착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어느 날인가는 제 여동생의 시체를 우연히 마주쳤어요. 마체테로 난도질당해 죽어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여러 차례, 거듭해서 강간당했어요. 누구든 저를 붙잡을 때마다 강간했어요. ‘투치 여자 맛을 보고 싶다‘면서요. 한 사람씩, 차례로 얼마나 많이 강간당했는지 셀 수도 없어요. - P145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강간당하고 씻지도 못하고, 옷도갈아입지 못하고, 그러다 아침이면 비가 쏟아붓고 비가 내리다 내리다 그치면 밤이 되어 또 비가와요. 어느 날 남자 넷에게 너무 거칠게 강간당해서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한 여자가 밭에 가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카사바를 하나 주며 조금씩 먹으라고 말했지요. 그때쯤에는 워낙 여러 날 굶어서 턱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한동안 저희는 시청 앞에 피신했어요. 거기에 여자와 아이들 수십 명이 있었죠. 시장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걸 알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어요. 이후 몇 주 동안 민병대와 지역 사람들이 저희를 반복해서 강간하고 구타했어요. 개들이 시신을 먹어 대서 우리가 묻어주려 하면 그들이 우리를 구타했어요. 저희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없으니 죽여 달라고 아카예수 시장에게 애원했지요. 그는 우리에게 ‘총알 낭비‘를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 P146
신은 다른 곳에서 그날을 보내고 있었는지 몰라도 르완다에서는 잠을 자고 있었다. 라고 르완다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투치족을절멸시키기 위해 르완다 곳곳에서 이웃들이 몽둥이와 마체테를 들고 이웃들에게 달려들던 그때 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르완다의 모든 사람이 무척 다정했고 모든 것이 무척 아름다웠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이 이처럼 끔찍한 악에 대한 이야기를 품 - P147
"저는 두 달 반 동안 분뇨 정화조에 숨어 있었어요." 운전사 장 폴Jean Paul이 말했다. "정화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온 가족이 살해당한 뒤였어요. 의사였던 아빠와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엄마, 일곱 형제자매 모두요." 그는 사람들 수백 명이 떠밀려 죽었다는 다리를 보여주었다. 용감한 지배인이 돈과 조니워커로 르완다군을 매수하는 동안 1200명이 겁에 질려 숨어 있던 밀콜린호텔도 보여주었다. 은신처를 찾아온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아 죽은 성당도 보여주었다. 금이 간 두개골들이 신도석을 따라 놓여 있었다. 나는 주말 브런치로 유명한 게스트하우스 헤븐에 묵고 있었는데 그곳을 운영하는 미국인 조시 Josh와 알리사 럭신Alissa Ruxin에 따르면 2003년 게스트하우스를 짓기 시작할 당시에는 비가 올 때마다 뼈들이 쓸려 나오곤 했다. 르완다 인구 800만 명 가운데 80만 명이 100일 동안 살해되었다. 나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살인이었고 UN은 창립 이래 최초로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를막기 위해 UN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148
"그 여성은 여섯 살짜리 딸과 함께 나무에 올라가 숨었는데 그때 그 아이가 이미 세 명의 남자들에게 강간당했고 그들의 이름을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검사가 증인의 말을 끊었죠. ‘네, 그 점에대해선 묻지 않았습니다‘라면서요. 조사관들이 그것에 대해 물어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증언 진술서에 없기 때문에 검사는 증인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면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질까 걱정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이 사람은 용기를 내 이곳까지와서 증언하는데, 그 끔찍한 일을 되살리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구나. 대체 우리가 뭐라고 이것만 듣겠다, 저것만 듣겠다 할 수 있나 싶었죠. 그녀는 일어난 일을 전부 말할 권리가 있잖아요. 그녀는시청에서 벌어진 다른 강간들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말했어요." - P167
"저희는 서로 함께했기 때문에 힘이 있었어요." 세실 무카루그위자Cecile Mukarug wiza가 말했다. 증인 중 가장 젊은 그녀는 제노사이드 당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고, 그 모든 세월이 지난 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겁니다." 세라피나처럼 그녀도 키갈리로 옮겨 와 키갈리 동쪽의 카카Kabuka 라는 시골 동네에서 흙길로 도착할 수 있는 언덕 비탈의 한 움막에 살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렸고 가끔 소가 울었다. 집 밖 관목에널어둔 빨래가 마르고 있었다. 집 안 벽에는 잡지에서 찢어낸 르완다 팝스타 조디 피비의 사진이 의무적으로 걸어야 하는 카가 포스터 옆에 붙어 있었다. - P169
그들은 아빠를 몽둥이로 때린 다음 변소 통에 던지고는 그 위로 변소를 부숴 무너뜨렸어요.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죽는 모습도 봤어요. 동생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 했는데 그들에게붙잡혀서 몽둥이로 맞아 죽었어요. 아홉살짜리 남동생에게는 연장을 주며 구덩이를 파라고 시킨 다음 거기에 집어넣고 산 채로 매장해버리더군요. 누군가를 붙잡을 때마다 그들은 언덕에서 소리를 지르곤 했어요. ‘우리가 아무개를 잡았ㅣ다.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다!‘ 아빠는 아내가 둘이었어요. 우리 엄마와는 다섯 아이를, 다른아내와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살해됐어요. 저는 죽음을 기다렸어요. 당신도 강간당하고 거기에 누워 있는데 그들이 막대와 이런저런 것들을 사용한다면 죽음 말고 다른 건생각할 수 없을 거예요.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했어요. 아마 당장, 아니면 몇 시간 뒤에, 아니면 내일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매일 그렇게살았어요. 민병대 한 사람이 저를 노예로 데려갔어요. 집에다 가둬 놓고계속 강간하다가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어요." - P172
"외국의 법정에서 외국어를 쓰는 법복 입은 외국 판사에게 이야기해야 했지만 저는 두렵지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할 때는 두려울 게 없는 법이니까요." 빅투아가 말했다. 두 딸의 엄마인 필레이 판사는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타바 여성들의 증언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여자로서 그걸 듣는다는건, 여성들이 집단 강간당하고 남자들이 임신한 여성에게 달려들어강제로 낙태시킨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그 일을 느끼거든요." ‘남자 판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어 했죠. 더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증거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자기들은모르겠으니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의가 없었던 터라 저는 정의부터 내리기로 결심했어요." - P175
1998년 3월 아카예수는 결국 증인석에 섰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은 그저 명목상 최고 책임자일 뿐이며 그의 행정구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요 주장은 UN 평화유지군 사령관 로메어 달레어 RoméoDallaire 소장도 막을 수 없던 학대 행위를 자신이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그는 강간을 직접 지켜봤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자신의 강간 혐의는 여성운동이 대중적 압력을 행사한 결과이지 사실을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증인들의 신빙성도문제 삼았다. 예를 들어 임신 6개월이었다는 증인 JJ가 어떻게 나무에 올라갈 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14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법정은 심의를 위해 퇴장했다. - P175
"저는 유죄판결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강간범을 감자나염소를 훔친 도둑과 같이 분류할 때마다 늘 괴로웠으니까요. 그건정말, 정말 부당하잖아요." 세라피나가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깨웠어요. 그 일로 목소리를 낼 자신감을 얻었다고 제게 말한 여성들이많았어요. 하지만 그 판결로 제 삶이 나아지지는 않았지요. 제노사이드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저는 여전히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 이후로 관계를 맺어본 적52.6 440도 없어요." 세실이 동의했다. "처음에 증언하러 갈 때는 정말 무서웠지만일단 저희가 첫걸음을 떼고 나자 다른 사람들이 뒤를 이었어요. 그판결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웃으로 살지 못한 채 악의에 찬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을 겁니다. 저는 아카예수가 유죄판결을 받아서 행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힘들었어요. 제안이 망가졌다고 느껴요. 사람은 치유되지 않아요. 하지만 치유는 하나의 여정이니까요. 같은 곳에 머무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더 이상 과거를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아요. 매일 아침에 잠을 깨면 무엇을 먹을지 등록금은 어떻게 낼지 생각하니까요." 그들은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처럼 모두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 P181
"저희는 국제사회와 UN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희가 강간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고 비난했는데, 같은 일이 세계 곳곳에서거듭, 거듭 일어나고 있어요." 빅투아가 말했다. "저희는 배운 것 없는 여자들일 뿐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지 이해하기어렵습니다." 타바의 언덕에 자리한 오두막에서 자신이 몇 번이나 강간당했던 바나나 숲을 내다보는 그녀는 아주 외로워 보였다. "어쩌면 당신은 저희가 제노사이드에서 살아남았고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운이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희는 걸어 다니는 죽은 여자들이나 다름없어요. 저는 죽이는 것보다 강간하는 것이 훨씬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니까요. 다 자라서 겪은 일이니 저는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요.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마을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피부색도 같고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제게그 짓을 했어요. 저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삽니다. 저를 돕던 그 소년도 후투족이에요. 사람들은 묻지요. ‘왜 쟤를 옆에 놔두는 거야?" 타바의 여성들은 신체적 통증도 호소했다. - P182
이제 위협이 없으니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기 도시에서든 마을에서든 타바에서든 그 여인들을 만나면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밤에 집으로 돌아가 문을닫으면 그들 안에는 누가 무슨 수를 써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있을 겁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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