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누구나 똑같이 한 세트의 동기를 갖는다고 생각해 버리고는, 그게아니면 괴물이라고 하지."
- 조지 엘리엇, ‘다니엘 데론다』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볼 때는, 둘 다 단순히 혐오하는 얼굴을 보고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지요, 우리는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겁니까……?"
-나치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 리스가 늙은 볼셰비키 모스토프스코이에게, 바실리 그로스만, 삶과 숙명』

"자유는 무거운 짐, 영혼이 짊어져야 할 거대하고 이상한 짐이다……. 당연히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선택이며, 그런 선택은 어려울 수 있다."
- 어슐러 K 르귄, 아투안의 무덤

죽은 사람에게만 석상이 허락되건만, 나는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석상을 하사받았다. 이미 화석이 된 것이다.
이 석상은 내가 세운 무수한 공적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라고, 헌사에서 말했는데 이를 대독한 사람은 비달라 ‘아주머니‘였다. 윗사람들의 지시로 대독을 맡은 비달라 아주머니는 하나도 고맙지 않은 눈치였다. 내 안에 있는 겸손을 모조리 끌어올려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밧줄을 잡아당겨 수의처럼 나를 덮은 천을 걷었다. 펄럭이는 천이 땅에 떨어지자 내가 거기 서 있었다. 여기 아르두아 홀에서는 환호성을 올리지 않지만 얌전한 박수 소리는 좀 났다. 나는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 P11

석상이 대개 그렇지만 내 석상도 실물보다 크고 근래의 내 모습보다 젊고 날씬하며 훨씬 나은 모습이다. 어깨를 젖히고 똑바로 서 있고 휘어진 입술에 확고하지만 선한 미소를 띠고 있다. 나의 이상주의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헌신적 의무감, 모든 장애를 불사하고 전진하려는 결단을 표현하고자 시선은 우주의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그러나 아르두아 홀 정문에서 나오는 오솔길 옆 음침한 나무와 덤불속에 묻혀 있으니 하늘에 행여 뭐가 있더라도 내 동상의 눈에 보일리가 없다. 우리 ‘아주머니‘들은 주제넘게 굴면 안 된다. 심지어 돌의 형상이 되어서도, - P12

나의 왼손을 꼭 쥔 여자아이는 일고여덟 살쯤 되었고, 신뢰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내 오른손은 옆에 쭈그리고 앉은 여자의머리에 얹혀 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베일로 가리고 갈망이나 감사, 둘 중 하나로 읽을 법한 표정으로 눈을 들어 위를 본다. 우리 ‘시녀‘ 중 한 사람이다. 내 뒤로는 ‘진주 소녀‘ 한 명이 선교사업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서 있다. 내 허리를 감은 벨트에 걸린 물건은 테이저건이다. 이 무기를 보면 내 실패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좀 더 효율적이었다면 저런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목소리에 깃든 설득력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전체 군상으로 보면 대단한 성공작은 아니다. 너무 바글바글하다.
내가 좀 더 강조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제정신으로 보이는 건 다행이다. 이 늙은 여성 조각가는(수십 년째 참된믿음을 지켜 온 사람이다.) 열렬한 신심을 강조하기 위해 눈알을 툭 튀어나오게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그조차 안 됐을 수도 있다. 그 여자 - P12

가 제작한 헬레나 ‘아주머니‘ 흉상은 흡사 광견병에 걸린 몰골이고,
비달라 아주머니 흉상은 갑상선항진증 환자 같고, 엘리자베스 ‘아주머니‘의 흉상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석상 개막식에서는 조각가는 초조해했다. 자기가 표현한 내 모습이 충분히 보기 좋았나? 과연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걸까? 내가 기분이 좋다는 티를 내줄 것인가? 천이 벗겨지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도 측은지심을 아예 모르는 위인은 아니다.
"아주 실물과 흡사하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게 9년 전 일이다. 그후로 내 석상은 풍상에 닳았다. 비둘기들이 나를 장식하고 이끼가 내 축축한 틈새에 싹을 틔웠다. 참배자들이내 발치에 헌물을 두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다산을 비는 달걀,
만삭을 상징하는 오렌지, 달을 뜻하는 크루아상, 빵 종류는 무시하지만(보통은 비를 맞아 엉망이다.) 오렌지는 챙겨 호주머니에 넣는다.
오렌지는 정말 상큼하다. - P13

아르두아 홀 도서관 관내 나만의 성역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 땅전역을 휩쓴 열광적인 분서(焚書) 이후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도서관이다. 앞으로 반드시 도래할 도덕적으로 순수한 세대를 위한 청결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타락한 과거의 피 묻은 지문을 싹지워 버려야만 했다. 이론은 그랬다.
그러나 피 묻은 지문 중에는 우리가 찍은 것도 있고, 이런 자국은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무수한 유골을 파 - P13

묻었다. 다시 파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단지 당신의 계몽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미지의 독자여, 지금 당신이 읽고 있다면 이 원고는 적어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미망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내게는 영영 독자가 없을지 모른다. 아마도 나에 대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오늘은 이 정도의 집필이면 충분하다. 내 손은 아프고, 내 허리는쑤시며, 밤마다 마시는 뜨거운 우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 장광설은 감시 카메라를 피해 은닉처에 숨겨 둘 것이다. 나는 감시 카메라들이 어디 있는지 안다. 내 손으로 설치했으니까. 이렇게 조처해두긴 했으나 여전히 내가 무릅쓰는 위험은 잘 안다. 글쓰기는 위험할수 있다. 어떤 배반이, 어떤 탄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르두아홀 내부에도 이 원고를 손에 넣고 기뻐할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잠깐 기다려, 나는 소리 없이 그들에게 충고한다. 훨씬 나빠질게야. - P14

이런 점에서 사령관 인형은 내 아버지 카일 ‘사령관‘ 같았어요. 아버지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착하게 굴었느냐고 묻고는 휙 사라졌어요. 차이가 있다면 사령관 인형은 서재 안에서 뭘 하는지 볼 수있지만(컴퓨토크와 서류 더미를 가지고 책상에 앉아 있었죠.) 현실의 아버지가 뭘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는 거였어요.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는 건 금지였거든요.
아버지가 그 안에서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들 했어요. 남자들이 하는 중요한 일들은 너무 중요해서, ‘종교‘ 과목을 맡은 비달라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뇌가 작아서 큰 생각을 못 하는 여자들이 관여할 게 아니라고 했어요. 고양이한테 크로셰 뜨기를 가르치려드는 거나 마찬가지야라고 ‘공예‘ 선생님 에스테 아주머니가 말하면우리는 왁자하게 웃었어요, 아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에요!
고양이는 하물며 손가락도 없잖아요!
그래서 남자 머릿속에는 손가락 같은 게 있다는 거야. 다만 여자애들한테는 없는 손가락이고, 그러니까 전부 설명이 되는 거지,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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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맑은 정신이라는 말을 가지고 말꼬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다시 말을 해도 괜찮다. 사령관이 주요 의례를 마치고 반지를 교환하고 베일을 거둘 차례가 왔기 때문이다. 우우. 나는 머릿속으로 야유를 퍼붓는다. 잘 봐둬, 이젠 너무 늦어버렸으니까. 천사들은 나중이 되면 시녀를 얻을 자격이 생길 거야. 특히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라면 더더욱. 하지만 너희 계집애들은 이제 볼 장다 본 거야. 이제 눈앞에 보이는 남자 외엔 그 누구도 없어. 하지만그들은 너희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아. 그냥 말없이 의무를수행해 주면 되는 거야. 의혹이 생기면,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볼수는 있지. 그 위에서 뭐를 보게 될지 누가 알겠어? 장례식용 화환들과 천사들, 먼지처럼 흩어진 별자리, 별과 다른 것들, 거미들이 남자고 간 퍼즐들. - P384

넌 언제나 그렇게 내숭이었어. 모이라가 말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애정이 묻어 있다. 참 그래서 덕을 많이도 봤겠다. 많이도봤어모이라가 옳았다. 지금 이 정말로 딱딱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지루한 의례가 이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이라가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 권력을 지닌 자들에 대해 음담패설을 속삭이는 데에는,
확실히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 짜릿한 쾌감이 있고, 뭔가 발칙하고,
은밀하고, 금지된 전율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일종의 주문 같다. 그런음담패설은 권력자들의 바람을 빼고 쭈그러뜨려, 우리가 조롱할 수있는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화장실의 페인트칠한 칸막이에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런 낙서를 긁어놓았다. ‘리디아 아주머니는빠는 걸 즐긴다‘, 그건 마치 저항의 고지에서 흔들리는 깃발 같았다. - P385

이제 여기 내 방의 이 지나치게 더운 공기 속에는 채워야 할 공간이 있다. 채워야 할 시간도, 저녁 식사로 끊어진, 여기와 지금, 거기와 그때 사이의 시공. 환자식처럼 쟁반에 받쳐서 방까지 가져다주는식사의 도착, 필요 없는 사람, 환자. 유효한 여권은 없다. 탈출구는 없다 - P388

에서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되지. 우리는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남자로 바꿨다. 변화는 언제나 좋은 거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리는 수정주의자였다. 우리가 수정한 건 물론, 우리 자신이었다.
옛날 우리의 사고방식을 돌이켜 보면 낯설기만 하다. 손만 뻗으면뭐든 가능할 것처럼 생각했다. 우연이라든가 한계 따위는 존재하지않는 것처럼, 한없이 뻗어가는 우리 삶의 경계를 마음대로 빚고 수정하는 일을 영원히 계속할 수 있을 것처럼, 우리는 믿고 생각했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행동했다. 루크는 내게 첫남자가 아니었고, 어쩌면 마지막 남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얼어붙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시간 속에, 허공 한가운데, 그때 그 나무들 사이에 떨어지던 모습으로, 그렇게 정지해 죽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 P393

이게 그 애란 말인가, 그 애가 이렇게 변했을까? 나의 보물어쩌면 이렇게 키가 크고, 달라졌는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꼭 옛날 첫 영성체를 하던 때 같다.
시간은 가만히 멈춰서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휩쓸고 지나가나를 깨끗이 지워 버리고 말았다. 나라는 존재는 경솔한 아이가 너두 발은 물가에 남기고 가버린, 모래로 만든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애에게 있어 이제는 하얗게 지워져 버린 존재다. 이 사진의반짝이는 표면 너머 까마득한 저 뒤에 존재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엄마들이 다 그렇듯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속에 나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애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살아 있다. 그 애는 살아서 성장하고 있다. 그건 좋은 일 아닐까? 축복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지워져버렸다는 사실을. 그녀가 차라리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 P396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좀 다르다. 나는 모이라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탈출해서 이번에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아니,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모이라가 ‘이세벨의 집‘을 폭파시켜서, 그속에 있던 사령관 50명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대담무쌍하고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끝내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뭔가 엄청난 일을, 그녀에게 어울리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결코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이라가 결국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끝을맺기나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후로 다시는 볼 수없었기 때문이다. - P436

이 이야기가 달라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좀 더 품위 있는 이야기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야기 속의 내가 더 행복해 보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더 적극적이고, 덜 우유부단하고 사소한 일들에 이렇게 넋을 놓는 사람이 아니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이라면 좋겠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갑자기 삶에서 정말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라거나, 아니면 최소한 일몰이나 새나 폭풍우나, 눈(雪)에 대한 이야기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도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사이에 중간에 너무 많은 다른 것들이, 너무 많은 속삭임들이, 타인에 대한 수많은 추측들이,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숱한 뜬소문들이, 너무나 많은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탐색과 - P459

비밀들이 끼어들고 만다. 그리고 너무도 오랜 시간을, 기름에 튀긴음식이나 짙은 안개처럼 지루한 시간들을 버텨내야만 한다. 고요하고 한가하고 몽롱한 거리에서 터진 폭발 사고처럼 시뻘건 사건들이한꺼번에 터져 버린단 말이다.
이 이야기가 이토록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교차 사격 한가운데 꼼짝없이 갇혀서 사살당하거나, 사지가 찢겨 능지처참을 당한 시체마냥, 내놓은 이야기란 것이 산산이 흩어진파편들이라서 미안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바꿀 수 있는건 없다.
그래도 좋은 일들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써왔다. 예를 들어, 꽃 같은 것. 그마저 없다면 도대체 지금 어떤 기막힌 지경에 이르렀을까? - P460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럽다.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때도 단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이 서글프고 굶주리고 황폐하고 절뚝거리고 사지가 절단된 이야기를 계속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기회가닿는다면, 미래에든 천국에서든 감옥에서든 지하에서든 다른 어떤곳에서라도 당신을 만나거나, 당신이 탈출했을 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까 미래, 천국, 감옥, 지하, 거기가 어디든 여기가아닐 것은 분명하다. 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 - P460

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부분은 결코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착하게 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무엇 하나빼먹거나 생략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무튼 당신은 이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고, 내가 빠뜨린 이야기들, 별건 아니라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P461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그 이야기다.
나는 닉을 다시 찾아갔다. 몇 번씩, 나 혼자서, 세레나 몰래, 누가시킨 것도 아니었고, 댈 핑계도 없었다. 그를 위해 한 일도 아니고,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내 몸을 그에게 준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 있어야 주지 않겠는가? 그가 나를 들여보내 줄 때마다 나는 베푼다는 생색이 들기는커녕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무모해졌고, 어리석게 모험을 했다. 사령관과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위로 올라갔지만,
그러고 나서 나중에 복도를 따라 뒤쪽에 달린 하녀들의 계단으로 걸어 내려와 부엌을 통과했다. 부엌문이 등 뒤에서 짤각 하고 닫힐 때면 나는 거의 매번 정말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그 소리는 쥐덫이나 무기 같은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 P461

서, 휘파하느님, 당신이 원하신다면 난 못할 일이 없어요. 나는 기도한다.
이제 주님이 내 주인이 되셨으니, 정말로 원하시기만 한다면 나 자신을 하얗게 지워 버리겠어요. 진정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참된 성배가 되겠어요. 닉을 포기하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까맣게 잊겠어요.
불평도 그만두겠어요.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겠어요. 희생하겠어요. 참회하겠어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어요. 모든 인연을 끊겠어요.
옳지 못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한다. 그들이레드센터에서 가르친 모든 것들, 내가 이제까지 저항했던 모든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한꺼번에 나를 덮친다. 고통은 싫다. 머리는 얼굴 없는 계란형의 천주머니가 되고, 두 발은 허공에 매달린댄서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장벽‘에 걸린 인형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날개 없는 천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가고싶다. 내 몸은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 쓰라고 맡기겠다. 그들이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나는 비굴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들의 진정한 힘을 실감한다. - P495

나는 내 방 창가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무릎 위에는 구겨진 별들이 한 뭉치 흩어져 있다.
이번이 내가 뭔가를 기다리는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뭘 기다리고 앉아있는 거야? 옛날에는 그런 말들을 썼지. 그건 ‘서둘러라‘라는 뜻이었다.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었지. 뭘 기다리고 있는 거니?라는말은 다른 질문이지만, 난 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꼭 기다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보다는 일종의 미결 상태라 하는 편이 좋을까. 긴장감도 없는 마침내 시간도사라지고 없다.
나는 정숙과 기품의 화신이 아니라 치욕과 굴욕의 상징이다. 이보다 더 참혹한 기분이 되어야 하는데. - P501

하지만 나는 고요하고, 차분하고,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다. 그 치들이 너를 짓밟게 내버려두지 마라. 이 말을 혼자 되풀이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거기 공기가 들어가게 하지 말라든가 아예 존재하지 말라고 말해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런 말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다.
비가 올지 궁금하다.


바깥에서 햇빛이 희미해지고 있다. 벌써 붉은 빛이 돈다. 곧 어둠이 찾아오리라. 지금은 조금 전보다 훨씬 어둡다. 이렇게 어두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P502

문 뒤에 숨어 복도를 절름거리며 걸어오는 세레나를 기다릴 수도있다. 참회는 형벌이든 처분을 무조건 받아들이며 고분고분하게 굴다가 불시에 덮쳐 머리에 날쌔고 정확하게 발길질을 할 수도 있다. 그녀를 고통에서 구해 주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도 고통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우리들의 고통에서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
그러면 시간도 절약될 텐데.
차분하게 계단을 내려가서 분명한 목적지라도 있는 듯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시험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간색은 너무 눈에 잘 띄니까.
ㅡ예전처럼 차고 너머닉의 방에 갈 수도 있다. 나를 방에 들여보내줄지, 은신처를 제공해 줄지 시험해 볼 수도 있다. 이제는 정말로 은신처가 절박하게 필요해지고 말았으니,


이런 허망한 대안들을 상상해 본다. 각각의 선택은 나머지와 꼭같은 비중이다. 무엇 하나 다른 것보다 나아보이지 않는다. 피로가내 몸 속에, 다리와 눈에 자리 잡고 있다. 결국은 거기 굴복하고 만다. 믿음은 그저 장식된 글자일 뿐이다. - P503

황혼을 내다보고 겨울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드럽고 가볍게 내리는 눈은 보드라운 결정으로 만물을 덮어 버리고, 비가 내리기 전의달무리처럼 사물의 윤곽선을 흐리고 색채를 말소해 버린다. 얼어 죽는 건, 첫 번째 오한만 지나고 나면 고통이 없다고들 한다. 어린애들이 만든 천사처럼 눈 속에 드러누워 잠이 들어버릴 수도 있다.
등 뒤에 그녀의 존재가 느껴진다. 나의 선임자, 내가 대역을 맡은그녀는 별들과 깃털로 만든 옷을 입고 샹들리에 밑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공중에 멈춘 새, 천사가 되어 버린 여자가 사람들한테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발견했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나 혼자밖에 없다고 믿어왔던 걸까? 언제나 우리 둘이 함께였는데, 그녀는 극복해야지 하고 말한다. 나는 이 신파극이 지겨워지려고 해. 침묵을 지키는 게 지겨워. 네가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없고 네 삶은 아무짝에도,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어라고 대꾸한다.
삶을 끝내 버리고 싶다. - P504

나의 의혹은 그의 머리 위 허공을 떠돈다‘ 나를 경고해 의혹을 몰아내려는 어둠의 천사, 그래, 알 것만 같다. 그라고 해서 ‘메이데이‘
를 모르라는 법이 어디 있나? ‘눈‘이라면 누구든 그 말을 알고 있을터이다. 그들은 지금쯤 숱한 육신으로부터, 숱한 입들에서 그 말을짜내고, 짓뭉개고, 비틀었을 터이다.
"나를 믿어요"
그 자체로는, 그 어떤 효력도 없고, 어떤 보장도 해 줄 수 없는 한마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그 제안에 허겁지겁 매달린다. 내게 남은 건 그게 전부니까. - P506

코라와 리타가 주방에서 황급히 나온다. 코라는 울기 시작한다.
내가 그녀의 희망이었는데, 꿈을 실현시켜 주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영영 아기 없는 여자로 남으리라.
밴이 이중문을 활짝 열어놓고 진입로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내 양편에 자리 잡고 선 두 남자가 내 팔을 부축해 태운다. 이것이내 끝이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이방인들의 손에 내 몸을 맡겼을 뿐.
"그래서 나는 차에 오른다. 그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암흑으로 아니 어쩌면 빛으로.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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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정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이며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에게 그러하다. 그에게 나는 그저 쓸모 있는 육체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나는 짐을 싣지 않은 배,
포도주가 담겨져 있지 않은 잔이 아니며, 속된 말로 빵 하나 못 굽는 오븐이 아니다. 그에게 나는 그저 텅 빈 존재가 아니다. - P282

"저도 이제부터 여기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즐거워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하지만 반짝이는 두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다. 하마터면 나는 그가두려워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오."
"제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고 싶으신 거군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직설적인 지적처럼 느껴졌다. 단호하고 의도가 분명한 진술, 내 삶이 견딜만하다면, 그럼그들이 저지르는 짓거리들이 다 정당화된다.
"그래 맞아, 나는 그랬으면 좋겠소."
"좋아요, 그럼" - P326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내가 그의 약점을 쥐었다. 그에 대항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나 자신의 죽음이다. 내가 잡은 약점은 바로 사령관의 죄책감이다. 드디어.
"당신은 뭘 갖고 싶소?"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볍기만 하다. 이게 단순한 금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사탕이나 담배를 사듯이 거래 규모도 아주 하찮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핸드로션 말고 말씀이시죠?"
‘핸드로션 말고."
그가 동의한다.
저는...... 저는 알고 싶어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이라,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어리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저한테 알려줄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하지만 그건 너무 경솔하게 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말이에요." - P327

밤이 내린다. 아니 이미 내린 지 오래다. 어째서 밤은 여명처럼 솟아오르는 게 아니라 떨어져 내리고 저문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일몰 시각에 동편을 보면, 밤이 내리는 게 아니라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름의 장막 너머 검은 태양처럼 어둠이 지평선에서부터 몸을 일으켜 뭉게뭉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불길로부터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산불이나 도시가 불탈 때 지평선바로 아래 죽 늘어서 타오르는 불길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아마 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지 모른다. 두꺼운 커튼이눈앞을 가린다. 양모 담요, 어둠 속에서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밤이 내렸다고 해야겠지. 돌덩이처럼 나를 짓누르는 밤의무게가 느껴진다. 산들바람 한 점 없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 곁에앉아 있다. 커튼은 활짝 걷어두었다.  - P331

더 좋은 세상이라고요? 나는 조그맣게 되뇐다. 어떻게 이걸 더 좋은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더 좋은 세상이라 해서, 모두에게 더 좋으란 법은 없소. 언제나 사정이 나빠지는 사람들이 조금 있게 마련이지. - P366

늦은 오후, 하늘은 아지랑이가 피고, 햇살은 퍼져, 마치 황동 먼지처럼 사방에 무겁게 깔려 있다. 나는 오브글렌과 함께 인도를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우리 둘이 한 쌍, 우리 앞에는 한 쌍이 더 있고, 길건너에 또 한 쌍이 있다. 멀리서 보면 우리는 보기 좋을 것이다. 마치 벽지의 부조 장식에 붙어 있던 네덜란드의 젖 짜는 처녀들처럼.
옛날 도자기로 된 소금 그릇, 후추 그릇이 가득 얹혀 있는 찬장 선반처럼,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변화 없이 이어지는 백조들의 선단 뭐 그런 것처럼, 그림같이 보기 좋긴 하겠지. 눈에 눈들에, ‘눈‘들에게 보기 좋겠지. 이 모든 쇼는 그들을 위한 것이니 우리는 ‘기도부흥성회‘에 참석해 우리가 얼마나 순종적이고 경건한지 보여 주러가는 길이다.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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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마는 울기도 했다. 너무 외로웠다면서.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난 친구들도 있었고 재수가 좋은 편이었는데, 하지만 그래도 외로웠어.
나는 어떤 면에서 우리 엄마를 존경했지만, 우리 관계는 한번도 쉽지 않았다. 내게 거는 엄마의 기대가 너무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당신의 생을 옹호하고, 당신의 선택을 편들어 주길 바랐다. 나는 내 인생을 엄마가 내건 조건에 맞춰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사상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완벽한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래서 싸웠다. 나는 엄마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에요. 나는 한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다.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바람은. - P212

여긴 덥고, 너무 시끄럽다. 주위의 여자들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나지막하게 읊는 음송이라도 날마다 침묵 속에서 지내던 내게는지나치게 시끄럽다. 역시 방구석에는 양수가 터져 나왔을 때 닦은피로 얼룩진 이불 홑청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다.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아챘다.
방 안에서는 냄새가 나고 공기도 텁텁하다. 창문을 하나 열어야하는데, 냄새는 다름 아닌 우리들의 살내다. 유기적인 냄새, 땀과 홑청의 피에서 나는 희미한 철분 냄새, 그리고 또 다른 냄새가 난다.
좀 더 동물적인 이 냄새는 틀림없이 재닌한테서 풍기는 냄새다. 동굴의 냄새, 사람이 살고 있는 동굴의 냄새, 난소를 제거하지 않은 고양이가 침대에서 출산을 했을 때 체크 무늬 담요에서 나던 냄새. 자궁의 냄새. - P213

나는 말한다. 이젠 나도진이 빠지고, 완전히 초주검이 되었다. 젖가슴이 탱탱하게 아파왔고, 심지어 젖이 약간 새기까지 했다. 가짜젖 간간이 이런 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벤치에 앉아 이송되어 간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어져 빨간 옷 뭉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는 아파한다.
우리 모두 무릎 위에 유령 하나씩을 존재하지도 않는 아기를 하나씩 품고 있다. 흥분이 사그라진 지금, 우리는 저마다의 실패와 대면해야 한다. - P221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받지 않아도 된다든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 P235

나는 어두침침한 복도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지나, 몰래 내 방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불을 끄고, 단추와 후크를 하나도 끄르지 않은 채, 빨간 드레스를 그대로 입은 채로 의자에 앉는다. 옷을 다 입고 있을 때만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내게 필요한 건 올바른 시각이다. 액자 하나와 평면 위에 배열된형상들을 통해 만들어진 깊이의 환영, 원근법이 필요하다. 그렇지않으면 고작해야 2차원뿐일 테니, 원근법이 없으면 벽에 부딪혀 납작하게 으깨진 얼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세상 만물이 거대한 전경(前景)이 되어 시시콜콜한 세부 사항, 클로즈업, 털이며 이불 홑청의싸임까지 눈앞에 훤히 보일 것이다. 심지어 얼굴의 분자들까지도 보일 것이다. 내 이 피부 위에 마치 지도(地圖)처럼 불모의 도해가 되어,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작은 길들이 지그재그로 교차하리라.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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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에 누워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유리잔의 테두리를물로 적신 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 소리가 난다. 지금 내가 꼭 그런 느낌이다. 유리잔에서 울리는 이 소리. 지금 내 기분은 꼭 ‘산산조각 나다‘라는 단어 같다. 내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곁에는 루크가 둥근 내 배에 손을 대고 있다. 우리 세 식구가 침대에 함께 누워 있다. 그 애는 내 안에서 발로차며, 몸을 뒤치고 있다. 창 밖에 천둥 번개가 치고 있어서, 아기도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다. 심장 소리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처럼 포근하게 어루만져주는 그곳에서도, 아기들은 듣기도 하고 자다 놀라서 깨기도 하는 거다. 아주 가까운 데서 번개가 번쩍 비치고, - P179

왔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나는 또한 루크가 어딘가에서 사각형의 물체 같은 것 위에 똑바로앉아 있다고 믿는다. 회색 시멘트나 일종의 선반이나, 침대나 의자같은 물건 끝에.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혔는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하지만 하느님 외에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어쩌면 알아볼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는 생각날 때마다 그들이 이가 쾬다며 깎아 주었지만, 면도는 1년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모습이다. 아니, 이 부분은 수정해야겠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았다면 수염도 깎아야 할테니까. 그렇지않겠는가. - P182

아무튼 그들의 이발 솜씨는 별로 좋지 않다. 머리카락은 들쭉날쭉하고, 뒷덜미에는 면도칼에 벤 상처가 있다. 하지만 더 나쁜 건 그가10년, 20년은 족히 더 늙어 보인다는 거다. 늙은이처럼 구부정하고, 눈 밑의 살은 축 처졌고, 뺨에는 조그만 자줏빛 혈관들이 불끈 솟아올라 있으며, 흉터가, 아니 상처가 있다. 아직 아물지 않아 튤립 꽃의 붉은 줄기 끝 부분 같은 검붉은 상처가, 왼편 얼굴을 따라 아래로 죽그어져 있다. 최근에 살갗이 찢어진 상처다. 육신은 참으로 쉽게 다칠 수 있고 쉽게 버릴 수 있다. 육신이란 수분과 화학 물질뿐, 결국모래사장에서 말라붙어 죽어가는 해파리와 다를 바가 별로 없다.
루크는 고통스러워 손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었는지조차 모른다. 이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뭔가, 뭔가 죄목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면 그를 왜 불 - P182

잡아두겠는가? 어째서 아직도 시체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틀림없이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가 루크에게 있다. 그게 뭔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지만, 뭔지 몰라도 루크가 아직까지 말하지 않았다는걸 상상할 수 없다. 나라면 벌써 불어 버렸을 텐데.
그의 온몸에서는 냄새가 자신의 냄새, 더러운 우리에 갇힌 동물의 냄새가 펄펄 풍긴다. 나는 휴식 시간의 그를 상상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을 상상하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칼라 아래, 소맷부리 위의 몸을 차마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의 몸에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그에게 신발은 있을까? 아니, 없다. 그런데 바닥은 차갑고 축축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서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까? 그렇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렇게 비참하게 전락한 상황에서는 뭐든 무조건 믿어야한다. 나는 이제 텔레파시라든가 에테르의 진동 따위 같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는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 P183

나는 또한 그들이 그를 붙잡기는커녕 따라잡지도 못했다고 믿기도 한다. 그가 탈출에 성공했다고, 강물을 헤엄쳐 강둑에 이르렀고,
국경을 넘어, 발을 질질 끌고 머나먼 해변에, 이를 딱딱 맞부딪치며헤엄쳐 어느 섬에 다다랐다고 믿는다. 가까스로 근처의 농가에 가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을 거라고 믿는다. 집주인도 처음에는 의심했겠지만 나중에는 그의 본심을 알고선 친절하게 대해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를 고발할 사람들은 아니었고, 어쩌면 퀘이커 교도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들이 몰래 그를 본토로 데그리고 가, 이 집 저집을 전전하며 숨겨 주었고 여자는 뜨거운 커피를 - P183

끓여주고 남편의 옷가지를 그에게 주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 옷차림을 그려 본다. 루크에게 따뜻한 옷을 입혀 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접선했다. 틀림없이 레지스탕스가, 망명 정부가 있을 거다. 저 밖에 누군가 있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있을 거다. 그림자가 없으면 빛도 없음을 믿는 것처럼, 아니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있을 수 없음을 믿듯이 나는 레지스탕스의 존재를 믿는다.
레지스탕스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텔레비전에 나오는범죄자들은 다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오늘이라도 그에게서 전갈이 올지 모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상상도 못한 사람을 통해서, 꿈에도 생각 못했던 사람에게서.
저녁 식사를 받쳐 내오는 쟁반 위 음식 접시 밑에 있을까? ‘순살코기정육점‘ 카운터 너머로 토큰을 내미는 내 손에 누군가가 쥐여 줄까? - P184

전갈에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씌어 있으리라. 조만간 나를 꺼내 주겠다고 그들이 어디로 데리고 갔건 우리 함께 그 애를 찾아내자고 씌어 있으리라. 그 애는 우리를 잊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 세식구가 함께 살게 될 거라고. 그동안은 꾹 참고 훗날을 기약하며 몸성히 있으라고, 내가 겪은 일들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나를 사랑한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씌어 있으리라. 전언에는 그 이야기도 꼭 씌어 있으리라. 끝내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바로 이 전갈이다. 나는 전갈의 존재를 믿는다.
내가 믿는 것들이 전부 사실일 리는 없다. 그중 하나는 틀림없이 사실이겠지만. 하지만 나는 셋 다. 세 가지 다른 모습의 루크를 한꺼 - P184

번에 믿는다. 이렇게 모순에 찬 믿음만이 지금 내가 무엇이든 믿을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것 역시 나의 믿음일 뿐이다. 이것 역사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된 교회 근처 공동묘지 묘석들 중에는 닻과 모래시계,
그리고 ‘소망 속에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소망 속에서‘, 어져서 죽은 사람 위에다 그런 말을 써놓았을까?
소망하고 있던 것은 시체였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루크는 소망할까? - P185

커튼을 통해 희미한 빛, 회색의 여명이 들어온다. 오늘은 별로 해가 좋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딱딱하고 작은믿음의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바깥을 내다본다. 아무것도 보이지다른 쿠선 두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한다. 한때는 세 개가 있었을 텐데, ‘소망‘과 ‘사랑‘까지. 그것들은 다 어디 처박혔을까?
세레나 조이는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다. 아주 해어져서 못 쓰는 물건이 아니라면 절대 버렸을 리가 없다. 하나는 리타에게, 하나는 코라에게 준 걸까?
벨이 울리고, 나는 시간이 되기 전에 벌써 일어선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옷을 입는다. - P190

내 앞에는 쟁반이 있고, 쟁반 위에는 사과 주스 한 컵, 비타민정한 알, 숟가락 하나, 갈색 토스트 세 쪽이 담긴 접시 하나가 있다. 또끝이 담긴 좋지 하나, 달걀 받침이 놓여진 또 다른 접시 하나가 있다.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몸처럼 생겨서, 치마 밑에는 달걀 하나를 더넣어 따뜻하게 보관해 두는 그런 용기다. 달걀 받침은 파란 줄무늬가 있는 백색 도자기다.
첫 번째 달걀은 흰색이다. 달걀 받침을 살짝 옮겼더니, 창문에서들어오는 축축한 햇살을 반사한다. 햇살은 밝아졌다. 시들었다. 다시밝아지면서 쟁반으로 툭 떨어진다. 달걀 껍질은 매끈하면서도 까칠까칠하다. 미세한 자갈 같은 칼슘 입자들이 햇살에 도드라져,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보인다. 황량한 풍경이지만 흠 하나 없이 완벽하다. 풍요에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봐 성자들이 들어갔던 사막이 이러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이 이 달걀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달의 생명체는 표면이 아니라, 안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달걀은 이제 자체적인 에너지가 있는 것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달걀을 바라보고 있자니 커다란 기쁨이 밀려든다.
햇빛이 사라지자 달걀은 빛을 잃는다. - P191

미니멀리즘 신봉자의 삶에서 쾌락은 달걀이다. 한쪽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은총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래반응해야 하는 정상적인 방식인지도 모른다. 달걀만 있으면 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이렇게 전락한 상황에서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이상한 대상에 집착케 한다. 나는 애완 동물을 키우고 싶다. 새나 고양이같이 뭐든 친근한 동물을, 영 형편이 안 된다면 쥐라도 좋지만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집은 너무 청결하다.
나는 숟가락으로 달걀 윗부분을 잘라내고 내용물을 먹는다. - P192

두 번째 달걀을 먹는 동안,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진다. 처음엔 아주 멀리서 아득하게 들리다가, 커다란 저택들과 바짝 깎은 잔디밭들을 꼬불꼬불 지나 내게로 점점 다가온다. 곤충이 윙윙거리듯이 가느다란 소리였다가, 가까워지면서 꽃처럼 피어나 급기야 트럼펫 소리처럼 활짝 벌어진다. 이 사이렌 소리는 일종의 선포다. 나는 먹다말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다시 창가로 가 본다. 파란색일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걸까? 하지만 모퉁이를 돌고 거리를 지나쳐 저택 앞에서 멈추는 걸 보니 빨간색이다. 아직도 소리는 커다랗게 울려퍼지고 있다. 아, 기쁘다, 이런 일은 요즘 정말 흔치않다. 두 번째 달걀을 반쯤 먹다 말고, 옷장으로 달려가 겉옷을 찾아입고 있는데 벌써 계단에서 발소리가 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 P192

옷을 입혀 주는 코라의 얼굴에는 정말로 미소가 떠올라 있다.
복도를 거의 달려가다시피 한다. 계단은 스키를 타는 기분으로 질주한다. 현관문은 드넓다. 오늘은 나도 정문으로 나갈 수 있다. 수호자가 서서 경례를 붙인다.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고, 임신한 흙과 풀의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운다.
빨간 ‘출산차‘가 진입로에 주차하고 있다. 뒷문이 열려 있고 나는기어 올라탄다. 마룻바닥의 카펫은 빨간색이고, 창문에도 빨간 커튼이 쳐져 있다. 차 안에는 벌써 다른 여자들이 셋이나 타고 있다. 그녀들은 밴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는 긴 의자에 앉아있다. 수호자는 이중문을 닫아 잠그고 운전석 옆의 앞자리로 올라탄다. 유리가 끼워져 있는 철창 사이로 그들의 뒤통수가 보인다. 머리위에서 사이렌이 ‘비켜 비켜!‘라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와중에 우리 차는 한 번 펄쩍 요동을 치더니 출발한다. - P193

확률은 1/4이라고 센 배웠다. 한때 화학 물질, 방사선, 방사터에서능 물질로 대기가 가득 차고, 물 속에는 독성이 있는 분자 화합물들이 녹아들었다. 이를 청소하는 데 수년이 걸리는데, 그동안 이러한물질들은 우리 몸으로 스며들어 지방 세포 속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누가 알겠는가? 바로 우리들의 육체가 오염되어 기름 범벅이 된해변처럼 더러울지도 모른다. 해변의 새들이 죽어가듯 태아들에게도 치명적이다. 어쩌면 당신의 몸을 먹은 대머리 수리는 죽을지 모른다. 밤이 되면 낡은 시계처럼 어둠 속에서 당신의 몸이 빛을 발할지도 모른다. 죽음의 시계라는 살짝수염벌레 일종의 딱정벌레인데, 시체를 매장한다.
- P195

오브오렌은 주인 침실에 있다.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 사령관과 아내가 밤마다 잠을 자니까. 그녀는 그들의킹 사이즈 침대에다 베개를 쌓아 몸을 받치고 앉아 있다. 몸은 커다게 부풀었지만 초라하게 작아진 재난, 옛 이름을 빼앗긴 재닌, 그녀는 하얀 면 잠옷 차림이지만, 잠옷은 허벅지까지 걷어올린 채다.
금작화 색깔의 긴 머리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로 모아 머리 뒤로 묶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심지어 이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그래 봤자 그녀도 우리 일원이다. 최대한 쾌적하게 살아 보자는 것 뿐이지, 무슨 지나친 욕심을부린 것도 아니다. 우리 중 그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가능한 한‘이라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재난이 잘하고 있는 셈이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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