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왜 유희적이고 잉여적이란 말인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이 왜 센티멘털리즘이란말인가? 오히려 본질적인 것이 아닌가! 왜 아름다움에꼭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하나? 두길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사랑이 더 중요했다. 시를 공부하는 그에게 사랑은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었다. 무심하게보이던 사물들이 사랑으로 해서 더 아름답고 의미심장하게 보이지 않았던가. 사랑에 빠진 지금의 그는 낭만주의가 좋았다. 센티멘털리즘도 좋았다. 나중에 사회주의자가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랑에 열중하고 싶었다, 하이네가 그랬듯이. - P95
1945년 한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 제주도 인구는 대폭 늘어 이십이만 도민에서 이십칠만 도민이 되었다. 칠만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귀환동포 오만명이 왈칵 담긴 것이다. 오사카 등지에서 노동품을 팔면서 빈민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 그중 많았고, 나머지는 징용과 징병 삼년에서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청년들이었다. 해가 바뀐 뒤에도 조천 포구에 배가 들때마다 귀환자가 한두명씩 계속 나타났는데, 머나먼 남태평양의 섬들이나 인도차이나반도 같은 곳에 끌려갔던이들이었다. 거의 반년 동안 배편이 없어 거지 노릇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창세는 포구에서 거지꼴을 한 채버마 전선으로부터 귀환한 한 청년이 두 팔을 벌리고 울부짖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죽지 않고살아서 돌아왔다!" - P107
해방된 지 오개월쯤 된 시점에, 징용과 징병을 갔던 제주 청년들 중 어림잡아 절반이 죽고 절반만 살아 돌아온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천리에서도 사십여명 중 생활한자는 스물댓명에 불과했다. 전사 혹은 사고사 소식이 잇따라 바다를 건너 들어오고, 더이상 귀환자가 나타날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포구에 나가 기다리는 사람은 현옥미의 모친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슬픔은 흥청거리는 집단적 열광 속에서 서서히 잊힐 수밖에 없었다. 해방의 기쁨과 생존자 귀환의 기쁨은 엄청난 열광의 도가니가 되어 죽은 자들에대한 슬픔을 자취 없이 삼켜버렸다. 그 열광의 도가니는전쟁터에서, 탄광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잠자리에서 악몽을 꾸던 사람들의 후유증도 녹여버릴정도였다. 악몽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던 고승우도 이제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 P108
봄이 왔다.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그야말로 새봄이었다. 먼 땅에 끌려갔던 이들이 돌아왔고, 강남 갔던 제비들도 돌아오고 한라산 깊숙이 숨었던 노루들도 초원으로 돌아왔다. 전에는 흥이 나지 않아 부르지 않던 봄맞이노래가 여기저기서 즐겁게 울려퍼졌다. - P113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가혹한 시절이 끝나고 빼앗겼던 들판이 이제 다시 섬 주민들에게로 돌아왔다. 송진 채취 때문에 찍히고 벗겨진 소나무들의 상처에 새살이 돋도록 봄을 맞은 솔숲은 짙은송진 냄새를 풍겼다. 정두길이 자작시에서 찬양했듯이빼앗겼던 땅, 상처뿐이던 땅에 새살이 돋고, 사람들의 여윈 몸에도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창세에게도 봄이 그렇게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난생처음이었다. - P114
온 들판에 덮였던 눈이 녹아 설선(雪)이 한라산 기슭으로 물러나자 목장의 묵은 풀을 태우는 들불 놓기, 화입(入) 행사가 중산간 지역의 마을별로 벌어졌다. 3월초에 벌어지는 화입은 목축이 주업인 중산간 주민들에게는 거를 수 없는 중요한 연중행사였는데, 그럼에도 지난 이년간은 일제에 의해 금지당해온 터였다. 화입은 불의 온기를 차가운 땅속에 스며들게 하여 목초의 발아와성장을 촉진해주는데, 묵은 풀이 불에 타 재가 되면 그재를 먹고 새 풀이 쑥쑥 기운차게 솟아올랐다. 화입은 마소를 괴롭히는 가시덤불, 진드기와 쇠파리, 말파리 알을 - P114
태워 없애는 효과도 있었다. 들불은 자칫 크게 번져 재난이 될 수 있으므로 화입하기 좋은 날을 골라야 했다. 바람의 방향이 한결같아야 좋은데, 그것을 잘 맞히는 전문가가 마을마다 한두 사람씩은 있게 마련이었다. 구름의 종류와 흐르는 방향을 살펴서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다가 어느 쪽으로 바뀔지를예측하여 불을 놓았다. 온 마을 남정네들이 동원되는 그행사는 아침에 시작해 이튿날 아침까지 스물네시간 계속되었다. 불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방화선을 만들면서밤을 지새웠는데, 해변 마을에서 볼 때면 어둠 속에 긴띠를 이루어 붉게 타고 있는 들불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듯두려운 느낌마저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 P115
창세는 비석거리에 구경 나온 몇몇 사람들 틈에 끼어그 들불을 보았다. 특히 외갓집이 있는 와흘 마을의 상뒷동산과 주변 목장을 태우는 불은 4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라 두려움이 더했다. 불빛이 밤하늘에 뜬 연기와 구름에 번져 불이 더욱 커 보였고, 불빛은해변까지 밀려와 구경꾼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모두들 두려움이 섞인 야릇한 감동에 사로잡힌 채 그 불을바라보는데, 이민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P115
"묵은 풀은 불에 타 재가 되고, 그 재를 먹고 새 풀이자란다. 그것이 혁명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는 꽃샘추위가 여러날 계속되기마련이었다. 이때는 검정 암소 뿔도 오그라든다는 말이생길 정도로 바람살이 여간 맵차지 않은데, 그 바람을 사람들은 영등바람이라고 불렀다. 풍신(風神) 영등할망이그 바람을 타고 제주섬에 들어오면 해촌마다, 포구마다영등굿이 벌어졌다. 새콧알할망당에 심방이 수십명의해녀들을 모아놓고 징 소리 북소리 울리는 가운데 축원을 올렸다. - P116
"영등할마님이 오시는구나, 흰구름에 싸여오시는가, 바람 등 타고 오시는가. 우리 제주 산천구경오시는데, 산 구경 물 구경 오시는데, 어서 청하여 맞아들이자 천리 보고 만리 보는 할마님아, 우리 불쌍한 백성들, 축원을 여쭙니다, 축원을 여쭙니다. 우리 모두 할마님 자손 아닙니까. 부디 할마님이 도와주십서. 오곡씨주고 갑서, 미역씨, 소라씨, 전복씨도 주고 갑서. 고깃배, 화물선 타는 자손들, 모진 풍파 막아줍서. 우마 번식시켜줍서. 자손 만발하게 해줍서, 대대손손 칡넝쿨처럼 뻗어나가게 해줍서." 구름은 높이 떠 움직이지 않는데 영등바람은 티끌과 - P116
검불을 날리면서 낮게 불었다. 바람에 날린 티끌이 눈에들어가 창세는 몇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바람은 서서히 온기를 얻으면서 대지 위로낮게불어한뼘자란 보리밭을 흔들어 깨우고, 안뜰의 복숭아나무를 흔들어 꽃봉오리를 만들고, 마당의 빨랫줄에 널린 흰 빨래들을 깃발처럼 펄럭였다. 두말치물과 장수물의 빨래터는 겨우묵혀두었던 빨랫감을 빠는 아낙네들로 붐비고, 떠드는 말소리, 깔깔대는 웃음소리, 방망이질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 P117
봄볕은 나날이 짜랑짜랑영글어맨드라미같이생긴수탉의 벗이 더욱 탐스럽게 붉어졌다. 수탉은 벌레 잡고암탉을 부르고, 암탉은 알을 낳으려 꼭꼭거리고, 병아리는 지렁이 물고 달아나고, 대숲에는 죽순들이 뾰족뾰족지각을 뚫고 나오느라고 맨땅이 들썩거렸다. 갯가의 파래와 톳도 빛깔이 고와지고, 겨울 추위를 견뎌낸 보리밭도 푸른빛이 짙어졌다. 농사철이 시작되었다. 농사철을맞아 박털보의 대장간도호미, 낫, 괭이,쇠스랑, 삽따위를 만드느라 바빠졌다. 착착찰그랑 툭탁, 쇠 때리는 소리가 쉴 새 없었다. - P117
해변에서 시작된 초록빛이 목장으로 올라가 번지는중이었다. 들불이 검게 태운 들판에서 이제 그것은 초록의 들불이었다. 그 무렵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목장에는아침 안개가 자주 끼었다. 연둣빛 어린 봄풀들이 묵은 풀태운 재를 먹고, 촉촉한 안개를 먹고, 바람과 햇빛을 들이마시면서 쏙쏙 자라났다. 3월 중순이 되자 마소 방목이 시작되었다. - P118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수업은 역사 시간이었다. 망각을 강요당했던 제 나라 역사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역사 선생은 이웃 마을 신촌리의 청년이덕구였는데, 학병 장교 출신인그는 조천면 치안대 대장이기도 했다. 어릴 적 마마를 앓은 탓에 자국이 남아 얼굴이 유자 껍질처럼 우툴두툴했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자기를 소개하면서 박박 얽은얼굴을 신화에 빗대어 농담할 정도로 소탈한 인물이었다. 마마신이 강풍을 타고 빗발같이 화살을 쏘아대면 그화살을 맞고 아이들이 죽거나 곰보가 된다고, 제주도의돌이 우툴두툴 구멍이 팬 것도 마마신이 쏜 화살을 맞아서 그렇다고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육성 마이크‘ 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수업할 때 목소리가 유별나게 우렁우렁했다. - P125
해방 후 맞는 첫 봄, 신생의 기운이 제주섬 도처에서샘솟듯 기운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새봄, 새학교, 새일꾼, 새 나라, 새 희망! 그 모든 것이 청년들, 소년들의 것처럼 생각되었다. 꽃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서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침울했던 청년들의 가슴도 꽃망울 터지듯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렸다. 해방 직후 시작된집단적 열광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전장과 탄광 등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지독한 절망감이 이제 급격하게 강력한 에너지로 바뀌어 그들을 추동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지금은 귀향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상태라 취직난이 극심하지만 친일파들이 물러나면 자리가 생기리라고. 그러한 집단적 열광은 곳곳에 신설 중학원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 P131
밝은 미래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이제 그 미래를 향한행동만이 남은 듯이 여겨졌다. 지금이 바로 그 미래, 새나라, 새 시대의 위대한 전야였다. 식민지생활 속에서애국심이 뭔지 몰랐던 그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온몸으로 깨달았다. 자기 나라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몸 바쳐 사랑할 나라를 갖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선생이 학생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말했다. "일제의 노예 경험이 너의 마음에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 그렇다, 내나라, 내 땅을 다시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거하여 신탁통치운운하면서 남북분단을 획책하고 있지만, 그것은 열화같이 일어난 거족적 반대 투쟁에 의해 반드시 분쇄될 것이다." - P133
해변 길을 달려간다. 신흥을 거쳐 함덕까지 가야 한다. 사흘에 한번꼴로 하는 마라톤이다. 보폭이 일정하게,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달린다. 턱턱턱턱, 메마른 땅에 부딪는 발자국 소리. 팔과 옆구리가 맞비벼지는 마찰의 감촉. 십분쯤 달려 연대 앞을 지나칠 즈음엔 몸이 달리기에 익숙해져 가뿐해진다. 앙가슴에 바람을 안고서 달려간다. 푸른 보리밭은 해풍에 물결치고, 검은 현무암의 해변에부서지는 파도는 하얗게 눈부시다. 그 풍경이 손뼉 치며달리는 창세를 격려하는 것 같다. 달릴수록 몸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점점 발바닥의 감촉도, 팔다리의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무아지경에 가까워진다. - P136
해방 후 일년이었지만 나아진 것 하나 없이 도리어 모진 흉년을 만나 굶주리게 되었다. 모두 해방이 곧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오직 허기진 입들만 뻥하니 뚫려 있었다. 먹자고 벌린 입은 너무 많고먹을 것은 너무 부족했다. 해방과 더불어 섬에 왈칵 담긴오만 귀향민까지 허기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오랜만에 지은 보리농사가 쭉정이가 되어버렸으니앞으로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농사 외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공장이 없는 곳이라 노동 품을 팔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 노동판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P186
가매장 터는 마을 밖 일주도로 곁에 있는 갑송네밭이었다. 땅을 얕게 파서 시신을 누이고 흙을 한꺼풀 덮는 것이 가매장이었다. 지게송장 뒤로 좀 떨어져서 가족들이 비척거리면서 따라갔다. 호열자의 위력에 주눅 든그들은 여전히 아이고아이고 곡소리를 내지 못했고, 좀전에 크게 울음을 터뜨렸던 갑송도 고개를 숙인 채 훌쩍훌쩍 흐느끼기만 할 따름이었다. 망인은 집안의 존경받는 가장이 아니라 무서운 호열자 보균자일 뿐이었다. 호열자에 대한 공포가 슬픔을 짓눌러 슬퍼도 진정으로 울수 없었다. 눈물도, 통곡도, 한숨도 뒷날로 미루어졌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 뭉개지고 인륜이 끊어지는 아픔을 가족들은 느껴야 했다. - P205
전국적으로 민중이 그렇게 기근과 역병, 두 재앙을 만나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느라 경황이 없는 동안, 미군정은 이때가 호기라고 생각했던지 한반도 분단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민중의 반응은 무기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굶주림과 죽음의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터에 무슨 기력이 있어 일어나 외칠 것이며, 방역한다고 도로마다 차단되고 마을과 마을, 집과 집,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로막힌 터에 어떻게 모여들어 군중을 이룰 수 있겠는가. 지난 일년 동안 끓어올랐던 청년들의 열정과 열광은 차갑게 시들었고, 눈치를 보면서 힘을쓰지 못하던 경찰은 미군정의 강경 정책에 따라 차츰 두려운 존재로 변모하고 있었다. 조천면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시범이 면장 지위마저박탈당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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