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반 볼렌 부인은 엘킨스 경의 은밀한 대화에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장군은 눈치채지못했지만, 그는 부인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았다. 이제는 존경받으며 부유하게 살고 있는 클레르 반롤렌 부인의 몸속 깊은 곳에는 미끄러운 바닥을 위태롭게 걷듯이 불안에 떨며 조심히 다가가는 그 어두운 곳에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 어느 사건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 하나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가끔 꿈에 나타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공포, 자신의과거가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클라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삼십 년 전, 여자는 교묘한 수단으로 유럽을 벗어나 미국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안토니 반 볼렌을 만나 결혼했다. 안토니는 성실하기는하나 속물근성이 있는 평범한 남자였다. 클레르는 두 사람의 만남에 이바지했던 자기 돈의 출처를 안토니에게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 2천 달러의 돈이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 P193

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없었다.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지는 압박감과 적대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P217

으로 들어온 크리스티네는 밤새도록 꼼짝도 하지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단 하나생각에 사로잡혀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머릿속은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는 통증이 아니라, 마취 상태에 있는 환자가 살을 파고드는 외과 의사의 칼을 어렴이 느끼며 체험하는 둔통처럼 깊은 곳에서 둔탁하게박동하는 고통을 느꼈다. 여자는 실내를 가득 채운 침묵에서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보고 앉았다. 마비된 의식 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꿈처럼 흘러간 아흐레 동안 그녀의 자리를 차지했던 새로운 존재, 그녀와 똑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졌던 가공의 존재,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었던 폰 볼렌 양이 여자 안에서죽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얼어붙은 듯 뻣뻣한 목에 다른 여자의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을대담하게 바른 채 ‘폰 볼렌‘이라는 여자의 방에 앉아 있었다.  - P227

분한 마음에 얼어붙은 듯 의자에 앉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벽과 문을 통해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태평하게 자는 사람들의 숨소리도 쾌락에 몸부림치는 연인들의 비명도, 병든 사람들의 신음도,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발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벌써 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새벽산들바람 소리도 듣지 못했다. 방에, 호텔에, 우주에 혼자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녀의 육체는 마치 절단된 손가락처럼 여전히 온기는 남아 있지만 감각도 힘도 없이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같은 잔인한 삶이었다. 이대로 조금씩 조금씩 굳어가다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여자는 폰볼렌양의 뜨거운 심장이 마침내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는 듯 심장 박동 소리에 귀 기울이며 굳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 P229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잔크트 펠텐 역에 도착한 크리스티네가 지친 몸으로 열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플랫폼을 가로질러 급히 달려왔다. 스탈러 선생이었다. 여기서 밤새 기다렸을 것이다. 크리스티네는 한눈에 사태를파악했다. 그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손을 내밀자 남자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안경 너머 그의 두 눈이 어쩔 줄 몰라 하며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네는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쩔쩔매는 그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는 작은 동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고통도, 슬픔도, 놀라움도 없었다. - P237

여러 사람이 짐을 손에 들고 어헤헤 베고 내려가자, 나무 총계는 발을 디딜 때마다 심위치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마침내 모두 떠나다. 그들이 가자마자 크리스티네는 창문을 활짝 열했다. 그동안 냄새에 숨이 막혔다. 퀴퀴한 담배 냄제 싸구려 음식 냄새, 축축히 젖은 옷에서 나는 쉰 냄노파의 공포와 걱정과 한숨이 밴 냄새, 소름 끼치는 가난의 냄새.….
‘이런 곳에서 계속 살아야한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어디엔가 다른 세상이진짜 세상이 있는데 왜 매일 여기서 숨을 쉬어야 하지?‘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여자는옷을 입은 채 침대에 풀썩! 몸을 던져 누웠다. 자신도모르게 가슴속에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나자, 베개를 입에 물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눌렀다.
‘인간이 싫다. 세상이 싫어. 나도 밉고,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 꼴도 보기 싫다.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정말 지긋지긋한 삶이야.‘ - P247

악의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추하고, 사악하고, 적대적으로만 보였다. 여자는 매일 아침 증오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것은 연기에 그을린 다락방 천장의 대들보였다. 낡은 침대, 싸구려 누비이불, 등나무 의자, 깨진 물주전자가 놓여 있는 세면대, 벗겨진 벽지, 판자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모든 것이 지지리도 궁상맞고 흉측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명종소리는 여자의 귓전을 때리며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었다. 해진 속옷, 역겨운 검은색 원피스...... 원피스의 소매는 이미 오래전에 찢어졌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옷을 고쳐? 이곳 얼간이 농부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아주 잘 차려입은 거야. 어서이 구역질 나는 방을 나가 출근하자‘ - P253

프란츠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잘 알고 있어. 자네는 할 수만 있다면 국립은행을 털어서라도 나를 장관으로 만들어 주고 싶겠지.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나는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 P293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언젠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다버리거나 토해낸 찌꺼기를먹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때까지 나는 계속 그렇게 할 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이해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정열이 담긴 큰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소리쳤다. 크리스티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이남자와 똑같은 감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넬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침내 화풀이할 기회를 잡은것이다. - P294

"휴가를 못 갔다고? 스위스의 초호화판 호텔에서 실컷 놀다 와서 왜 여기서 불평을 해?"
"나는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았어. 전쟁이 계속되는동안 쉬지 않고 불평했던 사람은 언니였어. 그리고 스위스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내게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거야. 나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를 이제야 알았어,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전쟁이 내게서 무엇을빼앗아 갔는지, 우리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조차 모르고……"
여자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낯선 남자의 시선을 느끼자,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초면의 남자앞에서 속내를 너무 많이 드러냈음을 깨닫고 목소리를낮췄다. - P295

저는 남의 행복을 시샘하지않아요.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남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면 자신은 왜 그렇게살지 못하는지, 자책하듯 스스로 묻곤 하죠.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저의 행복을 비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왜저는 행복하지 않은지를 생각할 뿐이죠."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크리스티네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줄곧 생각해 오던 것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막연하게 느끼던 것들을 남자는아주 명료하게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고 싶지는 않다고, 단지 내 권리를 찾고 내 인생을 살고 싶을뿐이라고, 다른 이들이 따뜻한 방 안에 있는 동안 추운바깥에서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서 있지 않기를 바랄 뿐‘
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 P303

여자는 남자에게 휴가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행 중에 겪었던 분노와 수치, 감격, 변신 등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풍요로움에 도취했던 경험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비록 괴롭기도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초라한 가방 하나만 들고 허름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호텔 프런트 종업원이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했던 일도 들려주었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여자의 말을 말없이 경청했다. 벌름거리는 콧방울만이 남자가 숨을 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듯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고, 푸대접받았던 여자의 분노에 공감했다. 한 번 댐이 무너지면 흘러가는 물을 막을수 없듯이 여자는 원래 말하고자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겨운 시골 마을에 대한 중 - P314

오, 아까운 청춘을 앗아간 전쟁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수 없이 생생하게 터져 나왔다. 여자는 누구에게도 그토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몸을 점점 깊숙이 웅크렸다.
"미안합니다." 마침내 남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전했다. "제가 어처구니없이 아가씨를 비난했군요.
시도 때도 없이 미련하게 화를 내고,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무나 걸리기만하면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듯이 퍼붓게 되는군요. 그리고 저 혼자만 전쟁하러 갔던 것처럼 착각하조 수백만이나 되는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데 저는 매일 아침 일터로 가면서, 집을 나서는 사람들을 관찰하곤 합니다. 잠에서 덜 깨어 얼굴은 지치고 창백하죠. 원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터로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면 다시 전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표정이나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겁죠. 아무 이유 없이, 혹은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모두 지쳐있어요.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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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니 마치 욕조에서 바로 나온 듯 상쾌했다. 행복한 기분에 온몸의 신경이 파르르 떨렸다. 이모부의 손을 잡고 몸을 굽혀 감사의 입맞춤을 했다.
방으로 돌아오자, 여자는 객실 안에서 혼자가 되었다.
사방이 돌연 조용해지고 혼자 있자니 무섭고 불안했다. 드레스 아래 맨살이 화끈거렸다. 여전히 흥분에 들떠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넓은 방이 이제는 비좁아 보였다.
여자는 발코니 문을 열었다. 드러난 어깨 위로 눈이 내렸다. 발코니로 나갔다. 추위로 몸이 떨리긴 했지만 기분이 상쾌했고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광활한 풍경을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심장이 거대한 밤하늘 아래서고동쳤다. 방 안의 고요함보다 더 적막한 자연 그대로의고요함이 느껴졌다.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없는, 부드러운 고요함이었다. 한낮에 빛나던 산들이 이제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다. 산들은 반짝이는 흰 눈에 덩치가 큰 까만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표면이 고르 - P110

지 못한 노란 진주 같은 보름달이 높이 떠 있었다. 음산하고 차가운 달빛을 받아 안개 자욱한 계곡의 윤곽이희미하게 드러났다.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녀가 아는 어떤 것과도 다른 신성하고 고요하고 부드럽게사람을 압도하는 풍경이었다. 차츰 고요 속으로 빠져들자 흥분된 마음도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금속성 소리가 들려왔다. 계곡 아래에 있는 교회의 종소리였다. 소리는 계곡 암벽의 왼쪽 오른쪽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여자는 마치 자신이 그 종이라도 된 듯 깜짝놀랐다. 그리고 안개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금속성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숨을 죽인 채 종소리의 수를 셌다. 아홉, 열, 열하나, 열둘, - P111

‘자정이다! 말도 안 돼. 이제 겨우 자정이라니? 수줍을 많고, 겁 많고, 내성적이고, 깡마르고, 보잘것없고, 소심한 영혼을 가진 여자가 도착한 지 이제 겨우 하루, 아니 열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야?‘
그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에 휩싸여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린 여자는 난생처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영혼은 신비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탄력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단 한 번의 체험만으로 무한히 커질 수 있고, 그 비좁은 공간에 온 세상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 P111

‘시간 맞춰 일하러 가야 해! 늦으면 안 돼!‘
지난 십 년 동안 습관이 되어버린 생각들이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곧 자명종이 울릴 거야……. 다시 잠들면 안 돼... 책임감! 책임감을 잊어선 안돼! 당장 일어나자. 여덟시에 업무가 시작되잖아. 그전에 일어나서 불 피우고, 커피 끓이고, 우유와 빵 사 오고, 방을 정돈하고, 어머니 붕대를 갈아주고, 점심 식사 준비도 해놓아야 하잖아?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더 있었는데 ...... 아! 맞아. 식료품 가게 여주인이 어제 외상 갚으라고 했었지...... 안돼, 자면 안 돼, 정신 차리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야해...... 그런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있나? 자명종이 울리질 않아....... 고장 났나? 태엽 감아 놓는 걸 깜빡했나? 자명종 어디 있지? 방 안에 빛이 벌써 환한데·· 세상에! 늦잠을 잤나보다. - P112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여자의 눈길이 천장을 더듬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연기에 그을리고 거미줄이 무성하며 경사진 다락방의 우중충한 잿빛 천장과 갈색 나무 대들보는 어디 가고 황금색 테두리에 푸른색과 흰색으로 깔끔하게 채색된 천장이 보였다.
‘이 빛은 전부 어디서 들어오는 거지? 간밤에 다락방에 새 창문이 생겼을 리도 없는데……. 여기가 도대체어디야?‘
여자는 자기 손을 보았다. 낡은 갈색 담요가 아니라, 붉은색 꽃으로 수놓은 새파란 푸른색 담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니야(첫 번째 충격)! 이건 내 침대가 아니야(두 번째 충격!) 여긴 내 방이 아니잖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기억을 되찾았다(세 번째 가장 큰 충격).  - P113

휴가, 여행, 자유, 스위스, 이모, 이모부, 으리으리한 호텔!
걱정할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다. 해야 할 일도 없고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다. 자명종도 없다! 불을 지피야 할 난로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몰려올 사람들도 없다. 십 년 동안 그녀의 생활을 짓밟아 온 끔찍한 굴레가 처음으로 벗겨졌다. 온몸에더운 피가 흐르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보드랍고 따뜻한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어도 괜찮았다. 커튼을 젖히기만하면 방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온기가 피부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눈이 다시 감겨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 그녀에게는 게으름 피울 권리가 있다. 꿈을 꾸어도 되고, 기지개를 켜도 되었다. 머리맡에 있는버튼을 눌러 종업원을 부를 수도 있다(여자는 이모가 해준 말이 기억났다).  - P114

이 매혹적인 세계에서는 수만 번이라도 서비스를 주문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사람들이다. 원한다면 방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 버튼을 눌러도 되고, 안 눌러도 된다. 일어나도 되고, 안 일어나도 된다. 다시 잠을 자도 되고, 침대에 앉아 있어도 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되고, 뜨고 있어도 된다. 마음껏 공상에 잠겨도 괜찮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된다. 게으름을 피워도 좋다. 시간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있는 게아니다. 미친 듯 돌아가는 시간의 바퀴를 따라갈 필요가없다. 노를 배 안에 들여놓은 배처럼 눈을 감고 시간에몸을 맡기며 둥둥 떠가면 된다......
크리스티네는 꿈꾸듯 그 새로운 느낌을 즐기며 누워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일요일 아침 교회 종소리처럼몸에서 혈관이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속에서 윙윙거렸다. - P115

약한 시간 후에 산 경사면 한가운데 볼록하게 튀어오른 전망 좋은 자리에 다다르자, 여자는 풀밭 위로 몸을 던졌다.
‘이것으로 충분해!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묘하게 행복했다. 눈꺼풀 아래로 피가 고동치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드러난 피부가 쓰라렸다. 하지만 고통에 가까운 이런 느낌마저 새로운 재미로 여겨졌다. 여자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온몸을 뒤틀게 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젊음과 생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피가 이토록 힘차게 혈관 속을 흐르고, 맥박이 이토록 빨리 뛸 수 있는지 몰랐다. 한계를 뛰어넘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탈진한 상태에서도 이토록 민첩하고 힘이 넘칠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상쾌한 기분으로 얼음처럼 차고 향기로운 알프스의 이끼를 손으로 뜯으며, 파노라마처럼펼쳐지는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 P119

공상에 잠겼다. 깨어 있는 상태로 꿈을 꾸는 듯했다. 한두 시간 동안 여자는 그렇게 맹렬한 감정의 격동과 자연의 강하고 격정적인 움직임을 온몸으로 음미했다. 그때 입술을 태워버릴 듯 날카로운 햇빛이 여자의 얼굴에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산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노간주나무, 용담, 세이지 등 꽃 몇 송이를 땄다. 날씨가 추워서 꽃잎 사이사이에 수정 같은 얼음이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관광객답게 차분하게 걸어가다가, 이내 중력에 몸을 맡기면서 빠르고 대담하게이 돌에서 저 돌로 겅중겅중 뛰어 내려갔다. 가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고, 전에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리저리 굽은 길을 돌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여자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골짜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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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난방이 안 되어얼음처럼 차가운 객차를 타고 가 늦은 저녁에야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빨래하고, 옷을 꿰매고 깁고, 다렸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일한 후에야, 옆으로 넘어진 가방처럼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1918년,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지만 전쟁은 여전히계속되었고, 걱정 없고 자유로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거울을 보거나 골목길에 고개를 내밀 시간도 없을만큼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크리스티네의 어머니는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눅눅하고 쉴만한 공간이 없는 병원에서 일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붓는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에게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길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도 병원에서 너무 오랫동안 일하느라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매일 끔찍하게 사지가 절단된 70~80명 환자의 입원 서류를 타이핑하느라몸 한구석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 P43

1919년, 여자가 스물한 살 때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국이 끝없이 쏟아내는 법령 아래 숨었을 뿐이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전쟁 공채와 지폐의 방공호 아래로 교활하게 기어 들어가 숨어있던 가난은 뻔뻔스럽게 기어 나와 우묵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전쟁의 시궁창에 남겨진 것들을 집어삼켰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던 겨우내 하늘에서는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돈다발이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눈은 온기 있는 손에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돈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녹아버렸다. 다시 시장으로 뛰어가기 위해 나무 굽을 댄 구두로 바꿔 신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 버렸다.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항상 너무 늦었다. 생활이 수학이 되고, 덧셈이 되고, 곱셈이 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숫자들의 소용돌이가 되고,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시커멓고 탐욕스런 진공 속으로 빨아들이는 회오리바람이되었다.  - P44

스물여섯 살의 크리스티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런처녀들의 형태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자존심과 욕심, 빈틈없고 대담한 시선, 도발적인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남자아이들이 아무리 노골적으로 몸을 더듬어도 웃기만 하는 처녀수치심도 없이 남자아이들을 숲속으로 이끌고 가는처녀들과 마주치곤 했다. 여자는 그들을 볼 때마다 심한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욕망을 충족하고,
성에 대해 개방적인 전후 세대 젊은이들과 비교할 때자신은 너무 늙었고, 너무 지쳤으며,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압도당한여자는 경쟁하고 싶은 마음도, 경쟁할 능력도 없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경쟁하거나 애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조용히 몽상하고, 묵묵히 일하고, 창가의 꽃에 물이나 주면서 차분히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바라는 것도 갖고싶은 것도 없이, 여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새롭고 신나는 일도 찾지 않았다.  - P47

바위투성이 우뚝한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사람을 압도하는 낯설고 거대한 풍경이었다. 크리스네가 그동안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알프스산맥의 웅장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놀라움으로 몸을 떨었다. 동쪽에서는 아침 햇살이 산봉우리를 뒤덮은 만년설을 비추어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반사되고 있었다. 희고 깨끗하고 생경한 햇빛이 너무 눈부시고 날카로워서 여자는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놀라운 광경을 좀더 가까이 보려고 손으로 유리창을 누르자, 창문이 왈칵 열렸다. 찬바람에 날려 객차 안으로 들어오는 눈과 함께 얼음처럼 - P58

차고 유리처럼 예리한 공기가 화들짝 놀라 벌어진 여자의 입을 통해 폐까지 들어왔다. 생애 가장 깊고도 깨끗한 호흡이었다. 거세게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려고 여자는 두 팔을 벌렸다. 가슴을 부풀리며 들이마신 시원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아, 정말 대단해!‘
시원한 바람을 맞아 기분이 상쾌해진 여자는 고개를좌우로 돌리며 차창밖풍경을 감상했다. 점점 더 흥미를 느끼며 화강암 산비탈을 따라 눈 덮인 산 정상에서산허리까지 바라봤다. 곳곳에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폭포에서는 흰 물줄기가 계곡으로 쏟아져내리고 산허리에는 아담한 돌집 몇 채가 암벽 사이 깊고 좁은 틈새에 새집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산 정상 위에서는 독수리 한 마리가 서서히 선회하고, 그 위로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여자는 이처럼 강렬하며 행복감에 취하게 하는 대자연의 위력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 P59

어린 시절, 여자는 며칠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열이 내리자 어머니는 희고 달콤한 아몬드 밀크를 가져왔다. 아버지와 오빠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온 가족이 그녀를 돌보며 분주했다. 가족 모두 그녀에게 다정했다. 옆방에서는 카나리아가 지저귀고, 침대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학교에 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를 위해 존재했다. 비록 힘이 없어서놀 수는 없지만 침대 위에는 장난감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니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미용사들의 서비스를 마음껏 즐겨보자..……‘
여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어린 시절의 그런 아늑함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생각난 것이다. 피부가, 따뜻해진 관자놀이가 기억 - P86

불러내고 있었다. 손을 민첩하게 놀리던 미용사가 이마음 "좀더 짧게 자를까요?" 같은 질문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듯 약간 거만하게 이런저런 요구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앞에 있는 거울을 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용사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
빛나는 유리병에서 나오는 향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위로 흘렀다. 면도날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다. 머리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진 느낌, 목이 시원하게드러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비된 듯, 꿈같은 느낌이 기분 좋게 이어졌다.  - P87

그것은 여자가 꿈도 꾸어보지 못한, 노동도 가난도 없는 세상이었다. 이모는 여자에게 산봉우리와 호텔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나치면서 만나는유명인 호텔 손님들의 이름도 말해주었다. 여자는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외심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공간을 오갈 수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경험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마침내 이모가 시계를 보았다. - P89

축복받은 어느 먼 나라에서 온 와인이리라.
얇은 크리스털 잔에 담긴 와인이 투명한 호박만큼 눈부시게 빛났다. 와인은 달콤하고 시원한 크림처럼 목구멍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처음에 크리스티네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모금만 마셨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에 한껏 기분이 고조된 이모부가 줄곧 잔을 채워주었다.
크리스티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많아졌다. 코르크 마개를 뽑은 샴페인처럼 그녀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용돌이치듯 쾌활하게 터져 나오는말에 자신도 놀랐고, 그동안 마음을 가두고 있던 ‘불안‘
이라는 견고한 벽이 단숨에 무너진 듯했다.
‘이런 곳에서 불안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모, 이모부 모두 좋은 사람들이야. 주위에 말끔하고 화려하게차려입은 사람들도 한결같이 세련되고 품위 있어. 아아,
세상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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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이다 그가 휘파함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

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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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기쁘지도 않아?"
‘어머니 말씀이 맞아 맞는 말이야. 그런데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왜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떨리지도 않을까?‘
여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올 대답에 귀 기울였다. 하늘이 내려준 놀라운 선물을 받으면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있을 법한데, 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혼란스러웠을 뿐. 이상하게도 두렵기만 했다.
‘이상하다. 나는 왜 기쁘지 않을까? 우편물을 분류하다가 노르웨이의 잿빛 피오르 해안이나 프랑스 파리의가로수길, 이탈리아 소렌토 해변, 미국 뉴욕의 빌딩 사진이 인쇄된 그림엽서를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수백 번도 넘지 않았던가? 나는 언제쯤 이런 곳에 가볼수 있을지, 내게도 차례가 올지,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우체국 안이 텅 비어 있는 오전 시간 내내나는 무엇을 꿈꾸었지? 언젠가는 이 의미 없고 단순한일에서, 이 지겨운 시간과의 경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단 한 번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산산이 조각나고 갈기갈기 찢긴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가? 단 하루만이라도 똑같이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 P34

인정사정없이 잠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에 놀라 일어나서 옷을 입고, 방을 덥히고, 우유와 빵을 집어삼키고, 서둘러 우체국에 도착하면 우편물에 소인을 찍고, 서류를작성하고, 전화를 받고, 업무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다림질하고, 빨래하고, 음식 만들고, 해진 옷을 수선하고, 어머니를 돌보고, 그리고 마침내 피로에 지쳐 죽은듯이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을 바로 이 책상에서, 둥지처럼 비좁은이 의자에서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꿈꾸었어. 그리고 이제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어. 난 이곳에서벗어나 자유롭게 떠날 거야. 그런데 어머니 말대로 나는왜 기쁘지 않을까? 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걸까?‘ - P35

여자는 경직된 눈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리에 앉아, 낯설고 차가워 보이는 벽을 응시하며 마음에서어떤 기별이 오지 않을지, 늦게나마 설레는 느낌이 들지 않을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무심결에 호흡을 멈추고 마치 임신한 여자처럼 머리를 깊이 숙인 채 몸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의 몸은 새들이 떠나간 숲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스물여덟 살의 여자는 행복이란 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깨달았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배운 적이 있지만 지금은다 잊어버린 한때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외국어와 - P35

내가 최근에 행복을 느꼈던 게 언제였지?‘
여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숙인 이마에 가느다란두 줄의 주름살이 생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오래된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뿌연 거울을 통해보이듯이 어떤 모습 하나가 떠올랐다. 짧은 면 치마를입고 어깨에 멘 책가방을 흔들며 날씬한 다리를 움직여걷는 어느 금발 소녀의 모습, 친구 열두 명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다. 빈 교외의 공원에서 열렸던 크리켓 경기에서 공이 하늘 높이 올라갈 때마다 웃음소리도 함께 솟구쳐 올랐다. 신나게 재잘대던 맑은 목소리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밝고 자유로웠는지 새삼 기억났다. 즐거운 웃음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소녀의 몸속에서 피부를 간질이고 핏속에서 소용돌이치고 들끓었다. - P36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진정 자유롭던 시절이었다. 프랑스어 수업 시간, 우스황스럽게 들리는 프랑스어 단어가 나오거나 누가 발음을 엉터리로 하면 소녀들은 두 손으로 의자를 움켜쥐고입술을 깨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소녀들에게는 웃음의 물결이 퍼졌다. 선생님의 말더듬이 버릇, 거울을 보며 찡그린 얼굴, 제 꼬리를물고 빙빙 도는 고양이, 거리에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는경찰관……. 아무리 사소하고 의미 없고 작은 일에도 소녀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건자연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소녀는 자는 동안에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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