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반 볼렌 부인은 엘킨스 경의 은밀한 대화에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장군은 눈치채지못했지만, 그는 부인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았다. 이제는 존경받으며 부유하게 살고 있는 클레르 반롤렌 부인의 몸속 깊은 곳에는 미끄러운 바닥을 위태롭게 걷듯이 불안에 떨며 조심히 다가가는 그 어두운 곳에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과거 어느 사건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 하나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가끔 꿈에 나타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공포, 자신의과거가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클라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삼십 년 전, 여자는 교묘한 수단으로 유럽을 벗어나 미국 땅에 정착했다. 그리고안토니 반 볼렌을 만나 결혼했다. 안토니는 성실하기는하나 속물근성이 있는 평범한 남자였다. 클레르는 두 사람의 만남에 이바지했던 자기 돈의 출처를 안토니에게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 2천 달러의 돈이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 P193
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없었다.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가슴에 묵직하게 전해지는 압박감과 적대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P217
으로 들어온 크리스티네는 밤새도록 꼼짝도 하지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단 하나생각에 사로잡혀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머릿속은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는 통증이 아니라, 마취 상태에 있는 환자가 살을 파고드는 외과 의사의 칼을 어렴이 느끼며 체험하는 둔통처럼 깊은 곳에서 둔탁하게박동하는 고통을 느꼈다. 여자는 실내를 가득 채운 침묵에서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보고 앉았다. 마비된 의식 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꿈처럼 흘러간 아흐레 동안 그녀의 자리를 차지했던 새로운 존재, 그녀와 똑같은 형상으로 만들어졌던 가공의 존재,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이었던 폰 볼렌 양이 여자 안에서죽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얼어붙은 듯 뻣뻣한 목에 다른 여자의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입술에는 붉은 립스틱을대담하게 바른 채 ‘폰 볼렌‘이라는 여자의 방에 앉아 있었다. - P227
분한 마음에 얼어붙은 듯 의자에 앉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벽과 문을 통해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태평하게 자는 사람들의 숨소리도 쾌락에 몸부림치는 연인들의 비명도, 병든 사람들의 신음도,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발걸음소리도 듣지 못했다. 벌써 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새벽산들바람 소리도 듣지 못했다. 방에, 호텔에, 우주에 혼자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녀의 육체는 마치 절단된 손가락처럼 여전히 온기는 남아 있지만 감각도 힘도 없이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같은 잔인한 삶이었다. 이대로 조금씩 조금씩 굳어가다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여자는 폰볼렌양의 뜨거운 심장이 마침내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는 듯 심장 박동 소리에 귀 기울이며 굳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 P229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잔크트 펠텐 역에 도착한 크리스티네가 지친 몸으로 열차에서 내리자, 누군가 플랫폼을 가로질러 급히 달려왔다. 스탈러 선생이었다. 여기서 밤새 기다렸을 것이다. 크리스티네는 한눈에 사태를파악했다. 그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손을 내밀자 남자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안경 너머 그의 두 눈이 어쩔 줄 몰라 하며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크리스티네는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쩔쩔매는 그의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는 작은 동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고통도, 슬픔도, 놀라움도 없었다. - P237
여러 사람이 짐을 손에 들고 어헤헤 베고 내려가자, 나무 총계는 발을 디딜 때마다 심위치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마침내 모두 떠나다. 그들이 가자마자 크리스티네는 창문을 활짝 열했다. 그동안 냄새에 숨이 막혔다. 퀴퀴한 담배 냄제 싸구려 음식 냄새, 축축히 젖은 옷에서 나는 쉰 냄노파의 공포와 걱정과 한숨이 밴 냄새, 소름 끼치는 가난의 냄새.…. ‘이런 곳에서 계속 살아야한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도대체 왜, 누구를 위해서? 어디엔가 다른 세상이진짜 세상이 있는데 왜 매일 여기서 숨을 쉬어야 하지?‘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여자는옷을 입은 채 침대에 풀썩! 몸을 던져 누웠다. 자신도모르게 가슴속에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나자, 베개를 입에 물고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눌렀다. ‘인간이 싫다. 세상이 싫어. 나도 밉고, 부자든 가난뱅이든 모두 꼴도 보기 싫다.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 정말 지긋지긋한 삶이야.‘ - P247
악의와 적개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추하고, 사악하고, 적대적으로만 보였다. 여자는 매일 아침 증오심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는 것은 연기에 그을린 다락방 천장의 대들보였다. 낡은 침대, 싸구려 누비이불, 등나무 의자, 깨진 물주전자가 놓여 있는 세면대, 벗겨진 벽지, 판자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모든 것이 지지리도 궁상맞고 흉측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있고 싶었다. 하지만 자명종소리는 여자의 귓전을 때리며 그런 작은 바람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옷을 입었다. 해진 속옷, 역겨운 검은색 원피스...... 원피스의 소매는 이미 오래전에 찢어졌지만,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옷을 고쳐? 이곳 얼간이 농부들에게는 이 정도만 해도 아주 잘 차려입은 거야. 어서이 구역질 나는 방을 나가 출근하자‘ - P253
프란츠아니야, 프란츠 내가 자네를 비난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 잘 알고 있어. 자네는 할 수만 있다면 국립은행을 털어서라도 나를 장관으로 만들어 주고 싶겠지. 자네가 선량한 친구라는 것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잘못된 점이자 어리석었던 점이야. 우리는 너무 착하고, 의심할 줄도 몰랐어. 그래서이용만 당했지. 하지만 나보다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에는 앞으로 절대 안 속을 거야. 내가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목발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으니행복한 것 아니냐는 따위의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숨 쉴 수 있고 먹을거리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는 이야기, 그 정도면 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나는 이야기에 설득당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아무것도믿지 않아, 신도, 국가도, 삶의 의미라는 것도 믿지 않아. - P293
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그런 권리를 찾지못하는 한, 세상이 내 인생을 빼앗아 갔고 나를 속였다고 생각할 거야. 언젠가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다버리거나 토해낸 찌꺼기를먹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때까지 나는 계속 그렇게 할 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이해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정열이 담긴 큰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소리쳤다. 크리스티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이남자와 똑같은 감정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넬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침내 화풀이할 기회를 잡은것이다. - P294
"휴가를 못 갔다고? 스위스의 초호화판 호텔에서 실컷 놀다 와서 왜 여기서 불평을 해?" "나는 누구한테도 불평하지 않았어. 전쟁이 계속되는동안 쉬지 않고 불평했던 사람은 언니였어. 그리고 스위스는……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내게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거야. 나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를 이제야 알았어,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전쟁이 내게서 무엇을빼앗아 갔는지, 우리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조차 모르고……" 여자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낯선 남자의 시선을 느끼자,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초면의 남자앞에서 속내를 너무 많이 드러냈음을 깨닫고 목소리를낮췄다. - P295
저는 남의 행복을 시샘하지않아요.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남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면 자신은 왜 그렇게살지 못하는지, 자책하듯 스스로 묻곤 하죠.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저의 행복을 비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왜저는 행복하지 않은지를 생각할 뿐이죠."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크리스티네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가 줄곧 생각해 오던 것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막연하게 느끼던 것들을 남자는아주 명료하게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고 싶지는 않다고, 단지 내 권리를 찾고 내 인생을 살고 싶을뿐이라고, 다른 이들이 따뜻한 방 안에 있는 동안 추운바깥에서 눈 속에 발을 파묻고 서 있지 않기를 바랄 뿐‘ 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 P303
여자는 남자에게 휴가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행 중에 겪었던 분노와 수치, 감격, 변신 등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풍요로움에 도취했던 경험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비록 괴롭기도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했지만, 마음은 개운했다. 초라한 가방 하나만 들고 허름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호텔 프런트 종업원이 자신을 도둑으로 오인했던 일도 들려주었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여자의 말을 말없이 경청했다. 벌름거리는 콧방울만이 남자가 숨을 쉬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듯 남자도 여자를 이해하고, 푸대접받았던 여자의 분노에 공감했다. 한 번 댐이 무너지면 흘러가는 물을 막을수 없듯이 여자는 원래 말하고자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겨운 시골 마을에 대한 중 - P314
오, 아까운 청춘을 앗아간 전쟁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수 없이 생생하게 터져 나왔다. 여자는 누구에게도 그토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몸을 점점 깊숙이 웅크렸다. "미안합니다." 마침내 남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전했다. "제가 어처구니없이 아가씨를 비난했군요. 시도 때도 없이 미련하게 화를 내고,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는 저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무나 걸리기만하면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듯이 퍼붓게 되는군요. 그리고 저 혼자만 전쟁하러 갔던 것처럼 착각하조 수백만이나 되는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인데 저는 매일 아침 일터로 가면서, 집을 나서는 사람들을 관찰하곤 합니다. 잠에서 덜 깨어 얼굴은 지치고 창백하죠. 원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일터로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면 다시 전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관찰합니다. 표정이나 발걸음이 납덩이처럼 무겁죠. 아무 이유 없이, 혹은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모두 지쳐있어요.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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