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고 싶은얼마 전 신문에서, 안나푸르나 등반에서 조난당한 젊은대원의 일기를 보았어요. 그분은 삼십대초반의 나이였던것 같고, 사고 당하기 전날 밤 쓴 글이라 해요. 일부러 고심해 다듬은 글이 아닌데, 어떻게 칼바람이 부는 텐트 안에서군더더기 하나 없는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감탄과 존경의마음을 이길 수 없었어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 - P35
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이 글은 글쓰기의 완벽한 은유로서, 글 쓰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준엄하게 예시하고 있어요. 글을 쓴다는 것은생이라는 깎아지른 절벽 앞에 마주 서는 거예요. 그 앞에서는 온갖 지식과 경험이 쓸데없는 일이 돼요. 글쓰기에앞서 우리가 내쉬는 긴 호흡은 어떤 도저한 각오이면서 비장한 결단일 거예요. - P36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길이에요. 이 길은 오직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야 하므로, 우리 몸속에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가령거미같은 곤충을 보세요. 자기 몸속에서 토해낸 실을 밟고 공중에서 옮아가잖아요. 그처럼 이 길은 오직 우리자신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어요. 이 길은 김수영과 나쓰메 소세키처럼 ‘온몸으로‘ ‘소처럼‘ 밀고 나아가는 길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요행도, 행운도 없는 그 길에서 살아 돌아와야 해요. 그렇지않다면 목숨을 건 여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처럼삶은 의무이며 희망이에요. - P36
벤야민이 역설하는 것은 의미 전달이 끝나자 마자 효과가 소멸하는 ‘정보‘와 달리, ‘이야기‘는 그 의미를 최종적으로 유보하기 때문에 계속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이 같은 ‘이야기‘의 소생 능력을 벤야민은 피라미드에서 발견한 ‘밀알‘에 비유해요. 수천 년 버려져 있던 씨알에 물을 주면 싹이 튼다는 거지요. 최근 시베리아 동토(凍土에서 발견한 씨앗에서 만이천 년 전 패랭이꽃이 피어났고, 미국의 암염 광산에서 채취한 소금물에서 일억 년 전 박테리아가 헤엄쳐 나왔다고 해요. 그처럼 ‘아는 것‘이 정보의 생명이라면 ‘모르는 것‘은이야기의 생명이에요. ‘모르는 것‘이 남아 있어 ‘아는 것‘ 을 부추기기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어요. 반지름과 원의 넓이처럼,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것‘은 곱절로 많아진다잖아요. ‘아는 것‘이 무엇이냐는 안회의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해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 P53
현실경계 안에 있는 ‘동일성‘과 ‘차별성‘을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보자면, ‘무경계‘는 그 위로 나 있는 높이축에 해당된다고요. 또 십여 년 전 어느 자리에서 제가 문학에 대해 말한게 있는데, 이 또한 세 가지 좌표축으로 이해될 수 있어요. "문학이란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모든 게 허위가 되고, 그것을 말하면 모든 게 스캔들이 되는 것입니다(가로축). 또문학이란 그것을 말하기 전에는 모든 게 ‘이놈‘ ‘저놈‘으로있다가, 그것을 말함으로써 ‘이분‘ ‘저분‘의 상태로 드높여지는 것을 말합니다(세로축). 마지막으로 문학은, 등을 긁을 때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위로도 아래로도 닿지 않는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다 실패하는 것입니다(높이)." - P55
사물이나 사건이 제 본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은 반드시 와요. 그걸 믿어야 해요. 그러나 끝까지 지켜봤는데도그 순간이 안 올 수도 있어요. 그건 내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어떻든 그렇게 믿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왜? 보들레르 식으로 말하면, 글쓰기란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내가 누군지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글 쓰는 사람이 그 일을 제대로 할 때, 읽는 사람도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되고,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사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중요해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기 - P107
때문에 사고가 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직 모를 뿐只不知!‘이라는 경구는 참 소중해요. 가령 탐정소설 작가도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써야 끝까지 긴장감이 유지된다고 해요. 만약 범인을 미리 정해 두고 쓰면 독자가 벌써 김새를 차린다는 거예요. 자기도 몰라야 끝판에 가서 자기도 알게 되는 거지요 - P108
시 쓰기는 언어로 하는 거예요. 시의 본령은 자신의 체험을 보고하거나 외부 현실을 기록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건 언어로 안 해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얼마든지 잘 할수 있어요. 시는 언어를 춤추게 하는 거예요. 너무 진지하면 춤이 안 돼요. 언어에 기대려면 차라리 술 한잔하는 게나아요. 그때 나오는 혀 꼬부라진 말, 더듬거리는 말, 실성한 말이 시에 가까워요. 어떻든 시 쓰는 사람이 시 속으로들어와 자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인형극을 보면 인형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 같지만, 막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대부분의 실패한 시는인형 조작하는 사람이 밖에 나와 관중하고 직접 말하는 것과 같아요. 시인은 끝까지 시 뒤에 숨어 있어야지, 독자 앞에 나오면 바로 죽어버려요. 햇빛을 죈 드라큘라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시는 고장 난 변기의 레버를 내리거나, 체인 벗겨진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과 같아요. 뭔가 저항하는 느낌이 안 나잖아요. 그 느낌이 없으면 시가 아니에요. - P110
바위투성이인 그 산은 깎아지른 절벽과 눈썹을 닮은 봉우리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나정말 아름다웠던 것은 거기서 내다보이는 다른 산들의 아스라한 모습이었어요. 액자처럼 드리운 가까운 산의 능선위로 드러나는 먼 산들의 정경은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떤 산이 아름다운것은 제 스스로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바라보이는다른 산들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어쩌면 한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다른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일 거예요. 한 존재의 올바름과 진실함 또한 다른 존재들의 진실함과 올바름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기 때문일 거예요. 그 자리는 영원하지만, 그곳에 머물다 가는 존재들은 덧없습니다. 그 사실을인정할 수 없거나, 자신을 그 자리와 동일시할 때 그 자리는 숨어버리지요. 잊혀진 그 자리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환기시키는 것이 시와 시인의 역할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 P111
ㅁ아름다움의 종교가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먹은 것만큼은 토해내야 해요. 최소한의 고통까지도 안 받으려 하면, 도둑놈 심보예요. 깨달은 사람은 치매 걸리는지 안 걸리는지, 깨달은 사람한테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다만 수레의 테두리와 중심축 사이 바퀴살 위에서, 지금 내 의식이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돌아보세요. 테두리 가까이 있으면 고통스럽고 중심축 가까이 가면 힘이 덜어져요. 하지만 테두리나 중심축이나 다 같은 바퀴살 위의 두 지점임을일지 막아야 해요. - P119
정말 좋은 문장은 눈물을 나게 하는 게 아니라, 눈물이깊은 속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거예요. 저는 문장을 어떻게써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카프카를 읽어요. 아무 페이지나펼쳐놓고 말이에요. 카프카의 문장은 전부가 시예요. 시적인 문장은 산문으로서는 약점이라 하지만, 카프카 문장은그렇지 않아요. 거기에는 아무런 비유나 장식이 없지만, 본질에 닿아 있어요. 저는 그의 문장들 몇 개를 지금도 외우고 있어요. 그러면 저도 언젠가 그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시를 쓰려면 시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보다, 좋은시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 또 좋은 작가가 되기보다 좋은 - P130
독자가 되려는 게 글쓰기의 지름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김수영, 카프카, 벤야민, 뭐 그런 이름들을 들 수 있겠지요. 어떤 작가를 스승으로 택한다는 건 배우자를 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 아까도 말했지만 시 쓰는 사람은 시가 씌어지는 자리를 자꾸 돌아봐야 해요. 삼사십 년 썼다고 어느 날 좋은 시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중학생은 바로 돼도 예순 살 먹은 문학박사는 잘 안 되는 게 이 세계예요. 바른 길을 찾아가지않으면 백 년 천 년이 가도 헛방이에요. 평생 서울 간다면서 부산 가놓고, 남대문이 왜 안 보이느냐고 떼를 쓰면 뭐라 하겠어요. 글쓰기에서 ‘서울가는 것‘은 자기 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나도 안 아프면서어떻게 남을 아프게 할 수 있겠어요. 결국 자기를 위한 공부를 해야 하는 거지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속으로깊이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돼요. 시가 뭔지, 시가 어디 있 - P140
는지 말이에요. 시는 시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에게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각각의 시 속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즉 ‘화자‘에게 있어요. 그 자리에 제대로 서면 모든 게시가 돼요.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들어요. - P1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