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문화미와 예술미는 훈련한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처음피카소의 작품을 볼 때 왜 좋은지 몰랐습니다. 좋다니까 감동을 짜내며좋은가보다 했죠. 그런데 지금은 좋은 걸 알겠습니다. 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같은 책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들을 읽고 난다음에 본 피카소의 그림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젠 앙리 루소의 어떤 그림을 보고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철수가, 최인훈이, 유홍준이, 김훈이, 그 외의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나를,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고, 해주고 있습니다. - P49

시이불견 청이불문而不見 聽而不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들으면서 그저 지겹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요,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이 된 거죠. <모나리자> 앞에서 얼른 사진찍고 가자‘는 시청이 된 거고요. 휘슬러 <화가의 어머니>에 얼어붙은 건견문을 한 거죠.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가가 저에게는 풍요로운 삶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겁니다. 존 러스킨은 "당신이보고 난 것을 말로 다 표현해보라"라고 했습니다. 나뭇잎을 봤다면, 나뭇잎의 균형감각이 어떻게 되어 있고, 앞뒷면의 촉감이 어떻게 다르고, - P49

헬렌 켈러는 또 이렇게 얘기했죠.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눈 사용이라는 필수과목을 만들겠다"라고요. 보지 못하는자신보다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더 못 본다는 것이죠. 전부 다 ‘시청‘을 했니다. 아름다운 영미 에세이 50선에 드는 헬렌 켈러의에세이, ‘삼일만 앞을 볼 수 있다면」에 나오는 말입니다. 헬렌 켈러는 책 첫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당신은 뭘 봤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별것 없었어요Nothing special‘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릴 수 있냐는 겁니다. 자기가 숲에서 느낀 바람과, 나뭇잎과 자작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만질 때의 전혀 다른 느낌과, 졸졸졸 지나가는 물소리를 왜 못 보고 못 들었냐는 거죠. 이렇게 인생이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에 떠오를 장면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거미줄에 달려 있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은 죽을 때 떠오를 장면들이 풍성하겠죠.
- P50

 유난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은 내가 아닌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게 중요하지 않고, 저 사람이 좋아해줄까가 중요해집니다. 관점이 모두 상대로 돌아서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연인들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서지 않는다고 알랭 드 보통은 말합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김훈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 게 있는데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사랑의 정의라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간을 바라지만 아니라는 거죠. 누군가를 사랑해서 내 사랑을 가지고 돌진을 하고, 형성이 되면 행복한 공간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형성되는 순간부터 싫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안 보이는 흠이 보이기 시작하고 사랑은 결국 그렇게 소진되어가는 것이죠. 알랭 드 보통은 그래서 사랑이 방향일 뿐 공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연인들은 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갈망과 연인이 된 후 오는 짜증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밖에 할 수없다는 건데요. 결국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는 거죠. 이러한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뒷받침하는 문장이 이 책에도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 P105

말 나온 김에 <담쟁이>를 읽어드릴게요.


저것은 벽
어쩔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수 없는 - P129

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번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P130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밥 튀겨 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 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나무 한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 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밟으며 지나갈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 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 P183

우리, 여기서 찍끔만 더 머물다 가자


이 시는 김화영의 것은 아니고 황지우 시인의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싶다>입니다. 김화영과 지중해 여행을 하면서 뼛속으로 스며드는 기이한 슬픔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시가 떠올랐습니다. 겨울이 가고 난 후 문득 눈을 감았다 뜨면 갑자기 출현한 꽃나무, 그 아래 유모차를 밀고 들어오는 가족의 꿈이 가득 차있는 순간의 모습, 그러나 시인은 잔인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맞아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힘든 신산이에요. 말짱한 영혼은 가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잠깐 동안 팝콘처럼 웃음을 터뜨리고, 그 웃음짓는 순간의 사람들은 이 세상사람들이 아니라는 이야기. 짧은 봄을 닮은 순간의 웃음 그리고 긴 신산함, 어느 시인은 꽃의 시절은 짧고 잎의 시전은 길다고 얘기했죠. 
- P184

해질녘 서편 하늘을 물들이는 장엄한 노을 앞에 섰거나, 한밤중 아득한천공에서 무수히 쏟아져내리는 별무리의 합창을 들을 때, 혹은 동틀녘세상끝까지 퍼져나가는 황금빛 햇살의 광휘를 온몸에 맞으면서, 어느누가감히 예술을 논하겠는가. 봄날 작은 꽃망울을 터뜨리는 햇가지들을가만히 들여다보자. 길고 짧고 굵고 가는 물기 오른 여린 가지들이이루는 조화와 오만가지 빛깔, 그것은 기적이다. 가을 새벽 거미줄에붙들린 조그만이슬 알갱이에 다가서 보자. 그 깜찍한 비례며 앙증맞은짜임새도 경이롭지만 알알이 비치는 방울속마다 제각기 살뜰한 우주가 숨어 있다. - P327

그럴 것이다. 인생의 저녁, 저물어가는 노을빛 속에서 작품 제작의연월일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화폭에 가득 번진 환한 봄빛이있고, 내 가슴도 훈훈한 봄빛을 머금고 있는데, 더구나 이 늙은 가슴을이해하는 또 하나의 따뜻한 가슴이 곁에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림을 그렸을 때 김홍도는 노인이었다. 화폭에 떠도는 해맑은 동심이그것을 반증한다. 노인은 젊은이보다 봄을 더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더 - P330

소중히 여긴다. 아마 가을이 되자 봄이 더욱 그리워졌던 것인지도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마상청앵도>가 어느 계절에 그려졌는지조차알지 못한다. 하지만 봄이, 영원한 봄이 그 안에 있다.

이 구절에서 저는 특히 "김홍도는 노인이었다. 화폭을 떠도는 해맑은 동심이 그것을 반증한다." 이 문장이 참 좋습니다. 제가 나이 드는 게좋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고 했는데요. 이유가있어요. 젊은 사람들은 나뭇잎이나 꽃 말고 예쁜 여자도 봐야 하고 멋진남자도 봐야 하고 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면 자연이 눈에 들어오죠. 그리고 만약 화가라면 봄을 들여다보고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화폭에 드러난다는 겁니다. 저자는 또 다른 저서 그림 속에 노닐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특히 그림이 단순하다는 것은 핵심적이라는 말과통한다.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은 종종 노년에 다다라서야얻어지곤 한다. - P332

정현종의 무한 바깥이라는 시에서처럼 나는 내가 아닌 겁니다. 만물의 물결 중 하나일 뿐이죠.

방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 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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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장부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은
하늘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도
지모신에게 올리는 기도문도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도 아니다
곡물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였다

사실, 글이 어두운 시대에 한 동네의 최초
기록은 주막집의 외상장부 아닌가

힘 있는 인간들 우리가 발 뻗고 사는 꼴을 못 봐
세금 뜯어낼 온갖 지혜를 다 짜내었고
주막집 주모는 외상으로 먹은 자의
용모와 금액을 그려두어야 했다
인간에게 문자가 필요했던 것은 태어나면서 우리가
이 땅에 역사에 외상을 먹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기에 모든 책은 외상 장부 같다
내게 뭔가를 전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 갚을 거냐고 묻고 있다

사랑의 이야기도 혁명의 기록도
내게서 뭔가를 받아내려고 한다
지난 것 같지 않으면 더는 외상을 주지 않을 것 같다

그 외상장부가 말의 가락을 담아내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세워진 길


꼬리를 문 차량들의 질주
한걸음도 들여놓을 수 없던 난폭한 길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고 누군가는 몸을 던졌고
몸과 몸의 사슬이 쳐지고

속도가 거칠게 투우처럼 피 흘리며
바닥을 긁었고
길이 엎질러졌을 때
길은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음이 드러났다.

달리던 것은 실은 속도가 아니라
정지된 사슬이었다
바리케이드가 원하는 것은 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난폭한 선과 질주의 체제
세워진 길을 눕히는 것이었다

세워진 길 위로 달릴 수도 흘러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눕혀진 길 위에 광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의 광장은 다시 세워진 길이다

그때가 좋았지


깎은 네 머리는 누가 강제로 밀어버린 것만 같다
그 시절이 그래도 좋았지 않았느냐고
휠체어에 앉아 뒤를 올려다보는
제발 좋았다고 말 좀 해줘 애원하는 네 눈동자는
끓는 물에 데쳐버린 듯 고름이 차 있다

벌건 대낮에 거리를 걸어본 기억도 제대로 없고
외출복인 작업복에 기름때 페인트 얼룩
가셔본 일 없고 어디 따듯한 불빛 아래 여자아이들과 편한 저녁을 먹어본 적도 없었던 시절을
아련하게 그려보다니 그걸 추억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두자
그땐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땐 우리 근육이 강철이었으니까
철야를 하고도 축구 풀게임을 뛰었으니까
사막으로 가는 배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고통도 자학적인 쾌락이었으니까

우리 살아온 날들 그래도 꽤 괜찮았어
맞아 그땐 분명히 그랬어
그땐 이처럼 버려지진 않았으니까
그땐 이처럼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소를 끌고


눈 덮인 낮은 집이 저 너머에 있다.
사방길은 지워지고 따듯한 섬 같은 집
감나무 한그루가 돛대처럼 지키고 있는 집
저녁연기가 목화솜처럼 깔리던 집

아궁이 곁불에 닭들이 졸고
아랫목에서 메주가 뜨고
설은 다가오고 까치는 마당에 내려와 놀고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몸을 녹이다 가고

장독간가는 길에 눈을 쓸고 김치를 내오고
볼이 튼 아이는 눈밭에서 뛰놀고
입김 불어 손을 녹이며 아낙은
소 없는 외양간 아궁이에 소죽을 쑤고

산 너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 밤새 들리고길을 재촉하는 부엉이 먼 산에서 울고

나는 아직도 희미한 그 집에 가고 있다

흙과 짐승과 나무가 주인인 집에
이랴이랴소 한마리 끌고 돌아가는 중이다

갈수록 멀어지는 그 사람들 그 집에
내가 살던 집도 아닌 그 집에
이상한 일이다
수십년 동안 나는 돌아가는 중이다

겨울비


겨울비 천장에서 떨어진다
거실 바닥 흥건하다
보일러 배관은 얼어 부풀었다 그래도
바닥이 편하다 모든 바닥은 따듯하다
노동이 빠져나간 몸은 퇴적암이다
어쩌라는거냐 문자메시지는 아침부터 부고다

세면실 거울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디피 삼백불 밤 완행열차를 타고
볼 터진 운동화 한켤레로 열여덟에 떠난 공단거울 속에는 내가 아닌 늙은 아버지가 있다

양치질할 때면 한번씩 가슴에 이는 불덩이는쌓인 쇳가루와 시너 가스와 최루탄 연기 뒤집어지나
빈손과 상처투성이 그리고 툰드라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고맙고 부끄럽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

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
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
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
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
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무게


시내버스에 앉아 졸고 있으려니
차가 기우뚱 쏠리면서 서서 졸던
살찐 사람의 무게가 사정없이 내 가슴을 밀어붙인다
그 당황한 무게의 여운이 얼룩처럼
몸에 남는다 연민처럼 번진다

모든 절박한 것은 무게다
슬픔의 모든 것은 무게에서 배어나온다
견디기만 해왔던 무게
들어내려고만 해왔던 그 무게에서

언제나 허덕여온 무게
벗어버리고 싶던 짐짝
초월을 꿈꾸던 중력
나의 배후에 수줍게 실려 있던 그 무게

그런데 이렇게 쾌활한 무게라니
묵직하게 실리는 무게의 실감이여
긍정적인 무게라니

나를 덜어내는 무게라니

정지의 힘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평범한 일상


천마리 악어를 사육하는 우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인이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에서의 그 일은 끔찍하지만
이 지구 위에서 가난한 자들의 삶에 대한
그저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구덩이 세상을 피해 악어의 아가리로 피신한 것인지
고깃덩어리밖에 안 될 무의미를
악의 없는 저들에게 그저 던져준 것인지
나의 상상도 역시 평범한 비유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장의 악어 껍질을 얻기 위해
많은 살아 있는 생명들을 도살해야 하고
그 먹이를 생산하기 위해 또 수많은
누군가의 껍질을 벗겨내는

누군가의 작은 기쁨을 위해
누군가를 벼랑으로 밀어붙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피를 뒤집어쓰는 노동을 해야 하는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일 뿐인 것에 대한

그 잔혹한 일상에 의미가 달아난 육신에 대한삶의 껍질이 벗겨진 육신에 대한
그 무의미한 고깃덩어리를 아가리에 던져
우두둑 뼈째 씹히는 순간에야 깨어났을 의미에 대한
하나의 사소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서만 매일
마흔명이나 걸어들어가는 그곳에 대한




주유소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오일 게이지는 이미 바닥이었지만
그녀는 위독했고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마디 말을 늦도록 찾지 못했다

캄캄한산자락에 걸린 지방도는 텅 비어 있었다
언제 차가 멈출지 몰랐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그녀는 도시를 버리고 숲으로 갔다
숲으로 가서 깊은 병이 드러났다
우리는 모든 걸 길에서 찾고 길에서 잃어버린다

어딘가에서 이 길도 멈출 것이다
기를 쓰고 달려온 길도 멈추고 보면 길이 아니거나
길 위에 길은 사라지고 언제나 속도만 깔려 있었다

캄캄한 갓길에서 시동을 끄고 기다렸다
미등마저 끄고 나니 뚜렷한 산 그림자 묽다
잿빛 하늘 비친 뿌연 개울이

산자락을 몇굽이나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탄 차는 통째 참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캄캄한 어둠이다
영영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어둠이다
흥건한 어둠이 내 안에 고여 있었다
희미한 빛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걸 길에서 찾고 길에서 잃어버린다
멈추지 않으면 길을 갈 수 없다

나에게 이르는 길


몇해 전 살구나무 한그루 심어놓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주위에 살구나무가 한그루도 없어서인데
다음 해에 탐스러운 열매를 보고 또 믿기지 않았다
자가수분을 할 거면 열매로 시작하지 꽃은 왜

힘들여 피우나 속살 벌겋게 드러내고
천지사방 분을 날리고 향기로 어지럽히고
소음에 귀를 열고 온갖 것 불러 모으고
머리를 헤치고 밤바람에 싸돌아다니고
열린 몸은 거친 부리에 노출되면서

꽃에서 시작해서 꽃으로 돌아올 일을
왜 저리 요란을 떠나
나에게 건너가는 길이 내 안에는 없다는 건가저 바람 속에 햇살 속에 거친 눈보라 속에
저 인간들의 아비규환 속에 저 고단한 길 위에나 있어

바람이 나보다 한걸음 앞에 있어서길

길이 언제나 나보다 한발 먼저 있어서
말이 언제나 나보다 반걸음 앞에 있어서

밤이 끓는 동안


밤이 끊는다 현재는 끓는 밥이다
배부르지 않다 맛볼 수도 없다
뚜껑을 열어볼 수도 없다

현자들은 현재만을 살라고 충고하지만
현재를 살아볼 도리가 없다
지금은 끓고 있을 뿐이다

끓고 있는 지금 내가 먹는 것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허공이다
허공만이 실재라는 듯이

현재는 허기다 주린 배로 사냥에 나선
피에 젖은 발톱이다
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부러진 날개다

지금을 먹을 수 없다 죽을 지경이다
현재는 끓고 있는 창세기다

내가 어디까지인지


산길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곳에서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갈수록 그늘은 짙어지고
넓은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공기와 바위는 서로를 껴안고
그 그늘의 끝에서 생각은 허둥대고 문장을 잃고
한순간 내가 아니라 그늘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늘 하나가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무섬증이 밀려오고 가슴이 뛰었다
점점 낯이 익었다
나는 몸을 떨어야 했다
그뿐이었다 숲을 걸어나왔지만
그 그늘은 내게 묻어 지워지지 않았다

밝은 곳으로 나와보니 그것은 그늘이 아니라한 기억이었다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내 것이 그곳에 있었다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기억이 복원되어 밀려왔다

어디까지가 나인지 너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설산의 바람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 이십여분
나는 대합실 짙은 연무 같은
빽빽한 웅성거림에 담겨 있었지

저 혼자 떠드는 티브이 앞을 지나자
애타게 길게 뭔가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어히말라야 설산이 화면에 가득 비치고

마방들의 구음인지 늑대 소리인지
바람에 찢겨 늘어지고 휘어지며
새처럼 가파르게 거친 산을 넘는 소리

기차는 설산의 바람을 뚫고 달려가네
눈보라 차창을 때리고 졸음을 흔들고
기억에서 깨어난 듯 나는 머리를 흔드네

깨어보니 낯선 곳에 와 있네 나는 설산을
언제 떠난 걸까 소음의 짙은 연무에
싸인 저 불빛 거리는 나의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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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


변경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변경은 인터페이스, 문턱, 경계 지점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의 위험과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 신기루처럼 변경의 앞면, 즉 자신이 바로 변경이라고 주장하는 면이야말로 누구도 가보지 않은 땅을 향해 우리가 대담하게 나아가는 방향이다. 우리는 폭풍의 전선처럼, 전장의 제1선처럼 앞으로 돌진한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실제가 아니다. 그곳은 텅 빈 공간이다. 나는 위대한 변경 개척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을 좋아한다. "브리타니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직접 가기 전에는."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공간은 텅 비었다. 따라서 꿈과 희 - P56

망이 가득하다. 빛나는 일곱 개 도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그쪽으로 간다. 황금을 찾아서, 땅을 찾아서, 앞에 있는 모든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세상을 넓힌다.
변경의 반대 면은 음陰이다. 우리가 사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항상 거기서 살았다. 사방이 그곳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곳은 현실 세계, 확실한 진짜 세계, 현실로 가득한 곳이다.
거기서 그들이 온다. 그들이 존재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세상에서 온 그들은 우리에게서 우리 것을 가져가변화시키고, 고갈시키고, 쪼그라뜨려 소유물로, 상품으로 만든다. 그들이 우리 세상을 자기들 것으로 변화시킨 뒤에야 우리 세상이 그들에게 의미를 갖게 되므로 우리는 그들 사이에살며 그들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만의 의미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 P57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아, 변경 생존자이며 캘리포니아 토박이인 이시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나는 이시만큼이나 어머니의 책에도 깊이 감탄한다. 하지만 항상 그 책의 부제가 아쉬웠다. ‘북미 마지막 야생 인디언 전기‘라니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의미와 정신에 어긋나는 제목이 아닌가. 이시는 야생이 아니었다. 그는 황야에서오지 않았다. 그의 부족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변경개척자들보다 훨씬 더 탄탄하고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살던 곳은 황야가 아니라 소중하고 친숙한 세계였다. 그의 부족 사람들은 그 세계의 산 하나하나, 강 하나하나, 돌멩이 하나하나를 모두 잘 알았다. 저 황금빛 산들을 피와 슬픔과 무지의 황야로 만든 자가 누구인가?
문명과 야만 사이에 유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경계선이있다 해도 그것은 지도에 그어진 선이 아니다. 지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도 아니다. 오로지 마음속 경계선이다. - P58

북미 사람들은 서부의 땅을 보듯이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정복‘하고 길들여야 할 텅 빈 땅(동물, 인디언, 외부인은안중에 없다)에 잔뜩 들어가 자신의 행동으로 가득 채운다.
무의미한 공백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대부분의 사이언스픽션에도 바로 이런 미래가 나오지만, 내 소설은 다르다. 내 소설에서 미래는 이미 가득 차 있다. 우리의 현재보다 훨씬 더역사가 깊고 규모가 크다. 그곳에서 외부인은 우리들이다.
내 판타지 소설들은 힘의 사용을 예술로, 힘의 오용을 지배로 보고 탐구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상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신비한 경계선을 따라 오가며 변경을 탐험한다. - P59

제국을 계속 확장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경계선은 계속 움직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자본주의 정복자들은 영원히 엘도라도를 추구한다.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좋다고 그들은 외친다. 내사실주의 소설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음지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가정주부, 웨이트리스, 사서, 작고 우울한 모텔 관리인. 누군가는 이들을가리켜 정복자가 남기고 간 망가진 세상에서 원주민 보호구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항상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가 변경이며 그 자체로서는 어떤 가치도 어떤 충만함도 없는 세상, 수익만이 가치를 평가받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 P59

나는 미국 개척자 집안의 증손녀다. 우리 외가는 이주해서 땅을 사고 농사를 짓다가 실패하면 다시 이주하는 생활을하며 미주리에서 와이오밍으로, 콜로라도로, 오리건으로, 캘리포니아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양의 에너지를 따라갔지만, 발견한 것은 음이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캘리포니아의 산에 스페인 사람들이 씨를 뿌린 야생 귀리, 농장을 일구던 사람들이 하니 카운티와 맬리어 카운티에 남기고 간 풀인 치트그래스가 내게 전해진유산이다. 나의 일족들이 심고 내가 수확한 작물들이다. 짚으로 자아낸 내 황금이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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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건 다 차치하고, 지금 나는 노인이 되었다.
이 글을 쓸 때 나는 예순 살이었다. 예이츠의 말처럼 "예순 살의 미소 짓는 공인". 하기야 예이츠는 남자였다. 이제 나는일흔 살이 넘었다. 이건 모두 내 잘못이다. 사람들이 여자를만들어내기 전에 태어나 수십 년 동안 훌륭한 남자가 되려고열심히 노력한 탓에 젊음을 유지하는 법을 몽땅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젊음을 유지하지 못했다. 나의 시제가 뒤죽박죽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젊다가 갑자기 예순 살이 되고 어쩌면 여든 살이 될지도 모른다. 그다음은?
별것 없다.
진짜 남자라면 틀림없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좋은 아니더라도, 화장품보다는 더 효과적인 어떤 것.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젊음을 유지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내가 열심히 노력했던 것을 모두 되돌아본다. 나는 정말로 노력했다. - P20

가끔은 모든 걸 그냥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다. 가끔은 나의 선택권을 행사해서 게이트 앞에 우뚝걸음을 멈추고 나치주의자를 머리부터떨어지게 하는 편이 낫겠다 싶다. 내가 남자인척하는 데에도젊음을 유지하는 데에도 재주가 없다면, 그냥 늙은 여자인 척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누가 늙은 여자를 만들어낸 적이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 P21

몸을 밧줄로 묶는 사람들과 거대하고 무거운 것들은 그렇게 잘 변형돼서 불확실한 바닥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 마음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진흙 안으로 빨려 들어갈까 봐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빨아들이는 데에 관심이 없고 배가 고프지도 않다. 나는 그냥 진흙일 뿐이다. 상대에게 자리를 비워준다.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사람들과 그 거대하고 무거운 것들은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떠난다. 그냥 발에 진흙이 묻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달라져 있다. 여전히 이 자리에 있고 여전히 진흙이지만, 발자국과 깊고 깊은 구멍과 걸어간 자국과 흔적과 변화가 사방에 가득하다. 나는 달라졌다. 당신이 - P24

나를 변화시킨다. 나를 화강암으로 취급하지 말라. - P25

부족 안에서든 가정 안에서든 몹시 안전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사랑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원래 그래야 하는것이기도 하다. 사랑은 공기 같고, 사랑은 인간적인 요소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후안이 고향에서 쫓겨나 가난하게 살아가던 온화하고 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겠다. 사람들의 편협함이 그를 불한당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 1940년대의 세상은 그런 사람들 천지였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 천지다. 그때내가 눈치 있게 그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았을걸. - P38

그때인지 그 전인지, 하여튼 후안과 로버트가 모종의 경인 것이 분명하다. 내 바위가 네 것보다 크네 마네 하는 경쟁이었다. 로버트는 우리에게 멋들어진 야외 벽난로를만들어주었다. 기술적으로도 실제로도 신성한 장소다. 유록의상의 집처럼 지어졌기 때문이다. 지을 때의 의도도 그러했다. 그러나 명상하는 사람이 앉아야 할 자리에서 불이 타올랐기 때문에, 로버트는 사람들이 불가에 둘러앉을 수 있게납작한 돌들을 반원형으로 놓아 명상의 반원을 완성했다. 우리 식구들은 70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식사도 하고, 서로에게 이야기도 들려주고, 여름밤의 별들도 구경하는 중이다.
아버지와 로버트를 찍은 사진에서 한 사람은 열심히 듣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손을 들어 올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두 사람이 앉 - P42

아 있는 곳이 바로 벽난로의 그 납작한 돌이다. 로버트와 앨프리드는 이야기를 나눌 때 영어도 쓰고 유족의 말도 썼다.
뉴욕 출신 독일 이민 1세대의 딸인 내가 유록어를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아마도 이례적인 일이었을 텐데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모두 유록어를 쓰는줄 알았다. 그래도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 P43

도서관은 공동체의 초점, 신성한 장소입니다. 누구나 접할수있다는 점, 공개된 장소라는 점에서 신성합니다. 모두회 장소지요. 제가 저의 도서관이라고 생생하고 즐겁게 기억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요소들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친해진 도서관은 캘리포니아주 세인트헬레나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사는평화로운 소도시였죠. 작은 카네기 도서관이었습니다. 하얀치장 벽토, 서늘한 공기, 어머니가 오빠와 저를 그곳에 남겨두고 장을 보러 가시던 뜨거운 8월 오후에는 졸린 곳이기도했습니다. 칼 오빠와 저는 단어를 찾아다니는 미사일처럼 어린이 방을 돌아다녔습니다.  - P44

제 생애 두 번째 도서관은 가필드 중학교 근처에 있는 버도서관 분원입니다. 그곳에서 제 친구 셜리가 저를 ‘N‘
서가로 데려가서 "여기 E. 네스빗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모래요정과 다섯 아이들』이라는 책을 너도 꼭 읽어봐야 돼"라고 말하던 소중한 추억이 있습니다. 세상에, 셜리의 말은 정짤 울았습니다. 8학년 무렵 저는 어른 방으로 슬그머니 스며들어 갔습니다. 사서들은 모른 척해주었고요. 하지만 제가 로드 던세이니‘의 두꺼운 전기를 성물처럼 들고 어른 대출 창구로 갔을 때 사서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나중에 세월이흐른 뒤 시애틀에서 세관 관리가 제 여행 가방을 열었다가 스틸턴 치즈"를 발견하고 지은 표정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 P46

그다음 도서관은 바로 버클리 공립도서관 본관입니다.
버클리 공립고등학교에서 겨우 한두 블록 거리에 그 도서관이 있는 것이 축복이었죠. 저는 학교를 싫어하는 만큼 도서관을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 저는 10대들의 습속이라는 시베리아 벌판으로 추방당한 사람이었지만, 도서관에서는 고향에 온 것처럼 자유로웠습니다. 도서관이 없었다면 저는 고등학교 시절을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적어도 제정신으로는하기야 10대 아이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죠.
저는 외서가 있는 3층 쪽으로는 아무도 가지 않는다는사실을 알아차리고, 그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거미줄처럼 생긴 창가에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프랑스어판을 들고 웅크린 채 살다시피했습니다. 아직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프랑스어를 익히지 못했는데도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크면 알지 못하는 언어도 읽을 수 있게 된다는걸 그때 배웠죠. 사랑이 크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 P47

그러고는 또 울었죠. 아, 울기에 좋은 때있습니다. 도서관은 울기에 좋은 장소고요. 조용히 울기에그다음 도서관은 래드클리프 대학의 작고 사랑스러운 도서관입니다. 그다음은...... 하버드의 와이드너 도서관이었조 제가 아직 1학년생이었는데, 그것도 여자였는데, 그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유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정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유는 와이드너 도서관의 서가에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늘어선 그 서가들에서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의 기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약 스물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들고 있어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지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 P48

저는 뒤로 돌아서서도서관 건물의 널찍한 계단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저게 바로천국이지. 나의 천국이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모든 글이 저기에 있고, 난 그 글을 읽을 수 있어. 자유입니다, 드디어, 주님, 드디어 자유예요!"
제가 이 위대한 구절을 가벼운 마음으로 인용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저의 진심이 있습니다.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 - P48

니다. 훌륭한 도서관은 자유입니다.
그다음으로 파리에서 국립도서관과 짧지만 격렬했던 사랑을 나눈 뒤 저는 포틀랜드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보낸처음 몇 년 동안 저는 아이 둘을 낳고 키우느라 집에 있었습니다. 제게 기쁨을 안겨준 일, 제가 원하던 휴일, 제가 일주일이나 한 달 내내 고대하며 기다리던 일은 바로 보모를 구해아이들을 맡긴 뒤 찰스와 함께 시내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밤에 갔지요. 낮에는 불가능했으니까요. 도서관이 문을 닫는 9시까지 두어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언어의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넓은 정신의 벌판을 거닐고, 상상력이라는 산을 올랐습니다. 카네기 도서관의 그 아이가, 와이드너의 학생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바로 저의 자유고 저의 기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 P49

는 그 기쁨은 절대 상품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을 또 하나의 배타적인 특권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공립도서관은 공공의 것입니다.
그 자유에 누가 손을 대도 안 됩니다. 반드시 필요한 사람 누구나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필요할 때, 그러니까 항상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 P49

그래서 그다음에 떠올린 곳은 내가 내 머릿속에서 찾아낸 섬, 어스시라고 불리는 섬이었다. 이 군도에는 마법사, 주부, 그리고 환상적인 사람들이 산다. 나는 이 섬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섬들에 관한 책을 썼으니까. 그 섬들에 곤트와 로크와 해브너, 셀리더와 오스킬과 더핸즈라는 멋진 이름도 지어주었다. 어스시를 현실 세계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 번. 당시 나는 영국제도를 끼고 돌면서 오크니 제도와 헤브리디스제도를 지나고, 루이스해리스섬에 갔다가 스카이섬에 들른 뒤 서해안을 따라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지나는 배에 타고 있었다. ...... 그때 거기 내 섬이 있었다. 황금빛 바다에 흩어진 그섬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환상적이었으며 틀림없이 용들이 가득했다. 실리제도. 이 이름도 아름다웠다. 왜 웃는가?
내가 실리제도를 봤다니까!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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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맥켈란 1926이었다. 에든버러 어느 위스키샵에서 맥켈란 30년산을 본 적이 있다. 녀석은 다른 위스키와 달리 자물쇠가 달린 투명한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맥켈란 1926은 30년산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가의 위스키다. 만져본 적도 마셔본 적도 없지만 맥켈란 1926 의 명성은 나 같은 초짜도 익히 알고 있었다. 1986년, 전 세계에 40병만 출시된 술이다. 셰리 참나무통에서 60년간 숙성했다는 맥켈란 1926 40병은 병당 3,000만 원에 완판되었다고 한다. - P137

싱글몰트계의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맥켈란 1926 이내잔에도 가득 찼다. 녀석은 뜨겁고 깊고 진했다. 끈적끈적,
끝도 없는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맛이었다. 맥켈란 1926을입에 오래 머금은 채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세상 떠나기 전에 좋은 술, 맛이나 보라고 내 - P137

가 보내준 시바스리갈 18년산을 소주 한 박스와 바꿔 마신아버지를젊은 날에는 똑같이 민족의 통일과 평등을 주장했으나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다.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아버지의 삶이 늘 애달프고 서글펐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삶을 쓸쓸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맥켈란 1926을 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결말이 내 취향에 더걸맞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는 것을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 P138

누가 봐도 남자 같긴 했지만 나는 생물학적 여자여서(실제로 빨치산의 딸답게 지리산을 달려서 내려올 때면 남자들이 나를 두고 내기를 하곤 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심지어 두 남자를지나치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거봐. 남자지? 천원 줘. 이런 젠장!) A와 달리 보통 여성적이라 하는 것들을 동경하지않았다. 내게 긴 머리 짧은 치마 같은 건 선택의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A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금기가 풀리자 미친 듯 한때 금기였던 것들을 향해 돌진한 게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이해하기 어려워더라도 친구라면 기다려주어야 했다. 그런 게 친구다. - P147

그날 밤 나는 A가 사 온 블루를, A는 매취순을 밤새 마셨다(그때만 해도 젊어서 밤새 마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 밥을 챙겨드리고 나니 우리밥 챙길 기운이 없었다. 해장할 필요도 있었다. 때마침 제자 B가 합류했고, 숙취가 가시지 않은 우리를 대신해 B가 운전을 하기로 했다. 벚꽃 흩날리는 길을 달리며 A는 흥이 났다. 벚꽃은 만개할 때가 절정이 아니다. 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 햇볕 환하고 바람 없는 날, 혹은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날, 어느 쪽이든 지는 벚꽃은 처연하게 아름답다. 아니 처연해서 아름답다. - P187

술꾼들의 내밀한 욕망인가, 어리석음인가 숙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장을 한다. 그런데 해장은 반드시 술을 부른다. 하여 숙취에 숙취를 더한다. 우리 또한 어리석어 운전자를 제외한 A와 나는 해장을 하며 다시 술을 마셨다. 밥집이니 당연히 소주였다. 두 병을 채 마시지 못했는데 취기가 흥건히 올라왔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B가 가자며 우리를 부추겼다. 실은 B도 술을 마시고 싶었던 거다. 빨리운전을 끝내고 집에서.
A의 차는 흰색 폭스바겐 골프였다. 섬진강을 건너자 이내 꽃길이 이어졌다. 우리가 술에 젖어가는 사이 바람이불기 시작해 길은 온통 흩날리는 벚꽃 천지였다. 차량이끝도 없이 이어져 좀처럼 나아가지 못했다. 멈춰 서다시피한 차 안에서 A가 지디(G-DRAGON)의 노래를 틀었다. 지디는 나의 최애 뮤지션이다. - P188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약간 내상을 입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왜 그렇게 싫은지, 묻지도 못한 채 혼자 속을 끓였다. 이럴 때 꼭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상금지! 절대사랑은 아니었고,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다. 그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에 대한 동경이나 질투뭐 그 비스꾸무리한 것이었다.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보다 깊고 넓다고 생각했던 A 또한 나와 똑같이 청춘의 허세를 부렸을 뿐이라는 걸. 청춘은 허세다. 그러니까 청춘이지, 스무 살 언저리의 A는 인생도 문학도 독고다이, 쓸쓸하게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 그런 찬란하게 유치한 마음으로 홀로 걷고 홀로 마셨던 것이다. - P195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다정한 제자와 술을 마시다그 이유를 깨달았다. 다정한 제자는 일행 중 누군가 깻잎을 집으면 기다렸다는 듯 잡아주고, 취한 듯 보이면 부축해서 방으로 안내하고, 누군가의 어깨에 보푸라기가 보이자 연인인 듯 다정하게 떼어주었다. 그에게는 물론 연인이있었다. 여럿이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행동해서 누구도 오해하지 않았지만 둘만 있었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설렜을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정하다. 불행히도 혹은 공평하게도 다정한 사람은 다정하지 않은 사람 - P198

‘보다 외로움을 잘 못 견디는 경우가 많다. 다정하니까. 마음이 말랑말랑하니까. 늘 아내의 곁에서 다정하게 함께했던 A의 아버지에게는 아내의 공백이 못 견디게 크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리도 빨리 새로운 다정의 대상을 찾아낸게 아닐까? 깨달은 그날 다정한 제자와 밤새 시바스리갈을마셨다. 야! 아무한테나 다정하지 마, 술꼬장을 부리면서.
"천성을 어찌할 수 있어?"
다정한 제자는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빈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날 나는 다정에 대한 오랜 갈급함을 버렸다.
다정한 사람도 무심한 사람도 표현을 잘하는 사람도 못 하는 사람도 다 괜찮다. 각기 다른 한계를 끌어안고 사는 셈이니까. - P199

술이 들어가고 말은 차츰 사라졌다. 누군가는 뚫어져라모닥불을 쳐다보고, 누군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누군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저 고요히 술을 마셨을 뿐인데 잠자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도 우리 곁에 털썩 주저앉아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들도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이런 순간에는 약간의 알코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그러니까 그냥 우리는, 그날 알코올의힘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거나 잠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경이를 경험했다. 새로운 별들이 떠오르고, 달이 - P208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술이 천천히 우리의 혈관을 매우고 모닥불은 사위고, 그렇게 초원의 밤이 깊어갔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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