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의 제목은 <동물 불구들>이다. 동물을 불구라고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인간의 투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투사는 비인간 동물들을 비장애 중심주의에 똑같이 억압받아온 주체로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동물들을 불구라고 부르는 행위는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사고하고, 느끼는지 그리고 무엇이몸을 가치 있는 것, 착취할 수 있는 것, 유용한 것 혹은 쓰고 버릴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는 소나 닭의 경험에 관한 우리의 일반화된 생각을 뒤흔드는 일이다. 또한 이는 라이플 총의 가늠쇠로 본 절뚝이는 여우가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멈춰 생각해보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동물 불구라는 말은 삶과 삶의 다양성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도록 한다. - P101
부이에게 눈에 띌 만한 뇌수술 후유증이 많지는 않았지만, 파우츠는 부이가 무언가를 가리킬 때 동시에 두 방향을 가리킨다는것 그리고 무언가를 그릴 때 도화지의 양쪽 모서리에 동시에 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술의 여파가 무엇이었든, 그게 부이의 소통 능력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부이는 파우츠의 가장열심인 학생이 되었다. 파우츠와 함께 일한 몇년간 부이는 50개이상의 단어를 외웠고, 이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 질문했으며,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연구소는 동물들에게 위험한 장소였다. 파우츠는점차 자신이 감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일종의 "친절한 간수"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양심의 고통을 줄이고 예측할 수없는 미래에서 와쇼를 구출하기 위해 파우츠는 와쇼와 함께 연구소를 떠날 방법을 알아냈다. 물론 자신이 수어를 가르치고 사랑했던 부이를 비롯한 많은 침팬지들을 뒤로한 채 떠나는 것은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부이와 다른 침팬지들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레먼 박사의 소유물이었기때문이다. - P107
부이는 수어를 꽤 배웠고 쓸 수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가 우리에서 풀려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명한 두 침팬지가 풀려나 대중의 항의가 축하로 바뀌었을 때, 부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는 C형 간염 연구에 이용되었고, 연구소에서는 고의로 그를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 후 13년간 부이는 LEMSIP의 우리에서 지냈다.
2000여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가 인간과 동물을구분 짓는다고 했다. 이런 믿음은 언어가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인간에게 고유하며, 인간을 정의하는 데 언어가 핵심적이라고 보는 서구 전통의 기반이 구축되도록 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듣기가 말하기를 위해 필수적이고, 따라서 사유에서중심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농인들에게 사고와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유산은 농인들을 동물과 유사한 존재 혹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낙인찍곤 했다. - P109
복잡한 소통 체계를 지닌 님, 와쇼, 앨리, 부이 그리고 그밖의 무수한 동물들의 소통 체계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언어와같은 "진정한" 언어로 정의될 수 있을지는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도, 가장 흥미로운 문제도 아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이런 것이다. 어떤 동물의 언어나 소통 능력이 어째서 그 동물을대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는가? 미국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외롭게 감금되고 실험당하는 삶을 선고받는 반면, 수어를 쓰는 침팬지는 어째서 해방을 촉구하는 대중적 항의를 불러일으킬 수있는 걸까? 의심의 여지없이 부이는 수어를 배우기 이전부터 감정을지닌 존재였다. 부이가 미국 수어를 습득한 것의 특별함은 그가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갑자기 감정을 가진 지적 존재로 거듭났 - P116
다는 데 있지 않다. 그건 그의 언어 사용이 인간인 우리를 그의지적 역량 그리고 정서적 삶과 비로소 대면시켰다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언어에 이렇게 높은 위상이 부여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첸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거의 틀림없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주요 기준 혹은 결정적인 자질로 여겨지며, 심지어 차별에 반대하는 이론가들조차 그렇게 여긴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폄하한다. 인간이 정보를공유하는 방식과, 인간과는 다른 동물들의 수많은 정보 공유 방식들 사이에 뚜렷하게 그어진 위계를 전제할 뿐 아니라, 이런 위계에 윤리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 P117
우리는 동물윤리를 불구화해야 한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장애 정치학을 적용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일은 장애인과 비인간 동물 모두를 억압하는 공통의 체계와 이데올로기를 검토하는 것인데, 비장애 중심주의가 언어 외의 다른영역에서도 동물 억압을 영구적으로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장애 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또한비인간 동물들이 판단되고 분류되고 착취되는 방식에 대해 숙고해볼 때, 비장애중심주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장애학과 장애운동은 삶의 가치를 논하는 데 특정한 신체적·정신적 역량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장애 이론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지능, 이성, 민첩성, 신체적 자립, 이족보행 등과 같은 특정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 P118
이 분야에 몸담는 우리들 대부분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이든, 뇌성마비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면 중증 지적장애, 사지마비, 자폐혹은 나처럼 관절굽음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부한 자부심 선언이나 인간 삶의 신성함을 외치는 낭만적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장애인들이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특정한 신체들과 특정한 행동 방식을 우선시하는 문화 아래에서 가치절하되거나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 P119
인간의 동물 지배에 대한 정당화는 거의 항상 인간과 동물이 가진 능력과 특징에 관한 비교에 의존했다. 우리 인간은 언어, 이성, 복합적 감정, 두 개의 다리 그리고 다른 네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opposable thumbs" 을 가진 종이다. 동물들은 이런 특징 및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도덕적 책임 바깥에 존재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고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물을 어떤 능력을 갖거나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은 비장애 중심주의적이지 않은가? 이런 논의는 비장애abled 인간 신체뿐 아니라 신경전형적neurotypical 인간 지능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 P119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신앙부터 인간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믿음까지, 비장애 중심주의는 우리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떠받치고 있다. 비장애 중심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이 의심의 여지없이 동물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믿게 된다. 그것은 우리인간의 동작, 사고, 존재방식이 동물들보다 정교할 뿐 아니라 우리를 (동물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에 불을 지핀다. 열등한 야만 상태에 있는 동물은 별다른 윤리적 고려 없이 이용될 수 있다. 동물을 연상시키는 인간들(유색인종, 여성, 퀴어, 빈민 그리고 장애인 등) 또한 지적으로 모자라고, 가치가 적은 존재로, 때로는 심지어 인간 이하 less human의 존재나 비인간 non-human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특정한 능력이나 역량들이 인간을 정의할때 핵심 요소가 되고, 인류와 나머지 동물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다. 이런 식으로 비장애중심주의는 동물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인간으로 여기는지 구체화한다. - P121
비장애 중심주의가 동물과 장애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영향을 미친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동물들도 (장애인처럼) 의료화 담론과 중첩되는 방식으로 과학적 발견과 분류의 시스템에 매여 있지만, 동물들은 (적어도 우리 시대와 맥락에서는) 그들의 동물성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병리화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비록 자주 대상화되기는 하지만) 명백히 고기나 물건으로 가공되지 않는다. 즉 동물과장애인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소외와 지배를 경험한다.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비장애중심주의는 비인간 동물과장애인의 삶과 경험 모두를 덜 가치 있고 폐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며,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억압들로 이어진다. - P122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라는 성서의 구절을 이용하는 게 일반화된건 1910년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EllaWheeler Wilcox의 시가 출간된 이후부터다. 이 구절은 현재 수많은동물 옹호 문헌과 동물 권리 캠페인에 등장한다.
나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나를 통해 벙어리는 말할 것이다 이 세계의 먹은 귀가 듣게 될 때까지 말 없는 약자들이 겪은 불의를. - P125
오, 부끄러워하라 가르치기 위해 몸을 낮추지 않는 인간들의 어머니여 사랑스러운 눈망울에는 슬픔이 있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거리에서, 우리에서, 개집에서 마구간에서, 동물원에서 고문당하는 내 친족들을 가둔 벽이 죄악을 선언하네 힘없는 자들에 대한 힘 있는 자들의 죄악을.
그리고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 그리고 나는 그들의 싸움을 싸울 것이다 그리고 짐승과 새를 위해서 말한다 이 세계가 바로잡힐 때까지 - P126
세기가 바뀔 무렵 이 시는 동물의 고통에 대해 인식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또한 이 시는 일부 동물 옹호 운동에서나타난 동물성과 장애를 혼동하는 사례로서도 흥미롭다. 이시곳곳에는 동물성을 어떤 종류의 장애로 전환하는 구절들이 있다. 동물은 말을 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없고), 힘없고, 약하다. 목소리를 가진 돕는 쪽과 목소리가 없는 도움받는 쪽의 메워지지않는 간극 또한 암시한다.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자신을 변호하거나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선사하기라는 시구는 불가 - P126
피하게 어떠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목소리 없는 자들은 스스로 말하거나 자기를 돌보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심상을 말이다. 이는 무수한 맥락에서 비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인도의 저술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Roy의 지적이 통렬하다. "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침묵을 강요받았거나, 듣지 않으려 하기에 들리지 않게 된 자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윌콕스의 시구와 감성은 지금도도처에서 발견된다. 장애에 관한 적선의 모델에서 나타나듯, 의존적이고 취약한 자들에게도 행위 능력이나 의견이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타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많은 이들에게 더 매력적이므로 일부 운동가들이 여전히 목소리 없는 자들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의사결정 과정에 단 한 명의 장애인 대표도 포함하지 않은 장애인 지원 조직이나 자선 단체들이 지금도 무수히 많다. - P127
프라이스는 소위 이성적 인간을 자신이 수사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부르는 사람들과 대비시킨다. "장애가 있다"는 것은 수사적 차원에서 "(정신적 · 인지적·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유능하지 않고, 이해 불가능하고, 가치 없고,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함"을 뜻한다. "우리는 시설에 수용되고, 약을 투여받고, 뇌엽절제술을 받고, 전기충격을 당하고, 집 없이 생존하도록 방치된다. 정상적인 정신을 기준으로 할 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격의 상실을 뜻한다. 프라이스의 말은 비인간 동물들에게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동물들의 인격, 즉 누군가의이익을 위해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와 공감받을 필요성까지 부인하는 행위들이 사실상 정당화된다. 이성에 큰 강조점을 두는 - P141
동물해방론을 비판하는 살로먼, 베일리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이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동물 억압을 강화하지않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베일리는 이렇게 쓴다. "동물윤리에대한 현대철학의 접근은 때때로 동물을 돕는 것만큼이나 이성을 정의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의 정당화는동물들을 희생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58베일리가 밝히듯, 문제는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이성이 감정, 감각 그리고 인식하고 존재하는 다른 방식들과 분리된 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격상되는 데 있다. 이성에 대한 이런 정의는 가부장제, 제국주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의 역사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형태의 억압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들은, 비인간 동물이나 현저한 지적장애인처럼 "이성"이 없거나 없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한 해방을 이론화할 때 특별히 중요하게 새겨야 할 것들이다. - P142
세계를 냄새를 통해 지각하거나 몸에서 빛을 발하며 소통하는 생물체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할까? 극도로 복잡한 이주를 하거나 바다 깊숙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지능이 필요할까? 우리는 지구상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능력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셈이고, 인간의 능력은 그 다양한 능력들 중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있지만 우리는 갖지 못한 지능과 역량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탓에 우리로서는 우리 자신의 것 너머에 있는 지능과 경험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 무언가 배우려는 시도를 멈춰선 안 된다. - P154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들이 이미 삶을 경험하고 느끼는 존재들에 대해 우리가 가하는 착취 · 상품화 · 살해를 변명하기 위해 제기되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특히 그런 주제가 지금 동물들의 삶에서 이윤을 취하고 있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들이 초래한 윤리적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는 않을지 더욱 염려하게 된다. 우리는 식물이나 굴이 고통을 느끼거나 정서적 삶을 사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개, 소, 물고기, 닭이 고통을 느끼고 정서적 삶을 산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간 동물human animal도 포함해) 동물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환경도 번성해야 하며, 이는 동물들을 위한 투쟁이 더 넓게는 환경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임을 잘알고 있다. - P157
내게 쾌고감수능력과 도덕적 고려의 문제가 갖는 복잡한 함의는 동물 정의animal justice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것임을 증명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러한 함의는 모든 존재들을똑같이 다뤄야 한다거나 인간 예외주의 human exceptionalism 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틀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쾌고감수능력 그리고 지구상의 매우 다양하고 신비한 생명체 및비생명체들은 다양한 능력과 그 능력에서 비롯된 다양한 종류의책임들을 섬세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모든 질문들에 끌린다. 이 질문들에 쉬운 답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질문들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간의 분석과 필요에 맞게 손쉽게 범주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산산조각낸다. - P157
여기서 말하는 동물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는, 언뜻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질문에조차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류학적 기제를 이미 확정되어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기보다는 "동물"에 대한 나의 정의definition를넓게 열어두고자 한다. 우리의 환경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은 우리가 수립한 제한적인 정의를 완고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 P158
이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사람들은 페터가 인간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비장애 중심주의적인 편견을 가질 것이다. 비장애중심주의는 페터가 평균적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면 사라질것이지만,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많은 차별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외모나 움직이는 모습 때문일 수도, 그의 출신지 때문일 수도, 그의 종 때문일 수도 있다. 종차별주의란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으로, 우리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를 점한다며 인간의 동물 이용 및 지배를 용인한다. 종차별주의는 약이나 가정용품 실 - P160
험에 동물을 사용할 때, 재주를 부리도록 하기 위해 코끼리에게 불훅을 사용할 때,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을 바라볼때, 우리의 이익을 위해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할 때, 우리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도살장에 보내거나 그 몸을 상품화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서구 전통에서 종차별주의는 우리의 역사적·종교적·문화적 가치 그리고 인간성에 관한 우리 자신의 서사 안에침투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종차별주의는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161
빨간 페터 혹은 실제로 존재했던 부이는 복잡하고, 감정이 있고, 지능을 가진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종차별주의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인가? 아니, 그 전에 동물이란 무엇인가? 〈동물로의 전환에 대하여>라는 짧은 글에서 역사가 해리엇 리트보 Harriet Ritvo는 이렇게 썼다. "동물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학자들 대부분은 인간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믿는다." 동물계를 묶는 유전적 유사성을 탐구하는 과학자들, 인간과 다른 종 사이의 정서적·지적·문화적 유사성을 검토하는인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ורום - P161
그가 동물이라는 말의 "더 통상적인 용법"이라고 부른 것, 즉 동물을 인간과 동떨어진 하위 존재로 보는 시각과 맞물려 끊임없는 모순을 자아낸다. 인간 자신도 동물이라는 이해는 여러 학문 분과에 걸쳐 보편적으로 구축되었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불편함과 거리 두기가 남아 있다. 인간은 양쪽을 모두 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해부학과 생리학 실험에 다른 종들을 대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이다. 우리는진화 계통도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동물이다. 우리는 인간이 일으킨 최악의 행위를 "동물적 본성 때문"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정체성을 동물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동물이 아니다. 동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욕이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생겨났을까? 어떻게 우리는 동물이면서동시에 동물이 아닐 수 있는가? - P163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동물, 그러니까 나인동물(계속)〉에서 이렇게 쓴다. "동물이란 하나의 말이다. 그것은 인간/남성이 만들어낸 호명이고, 그는 다른 생명체에게 이름을 부여할 권리와 권위를 스스로에게 준 것이다." 많은 동물학animalstudies 연구자들처럼, 데리다 역시 "동물"이라는 말이 게으르고 모욕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저작 전반에 걸쳐 그는 동물이라는 이름이 포괄하는 존재들이, 바로 그 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다양성을 제거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동물들에 대한 명명을 조사하기 위해 <창세기〉를 참조하는데, 이 이야기에서 명명과 지배가 같은 순간에 발생하는 양상을 살핀다. ㅂ신은 아담을 자신과 닮게 만들고는 그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나는 것들,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복종케 하라"고 명한다. 그러고는 아담에게(이브가 창조되거나 명명되기 전에) 동물들을 명명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인간/남성은 이미 짐승들과 분리되어 있는데(그리고 여성과도 분리되는데 이 또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분리 과정에서 명명은 그 자체로 결정적이다. - P168
부이는 철창 안에서 손을 내밀었고 내 팔을 어루만졌다. 부이는 다시 행복해했다. 부이는 와쇼와 내가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에 레먼 박사 연구소의 침팬지 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와 똑같이 다정했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부이를 보자. 13년을 지옥에서 지냈는데도 나를 용서해주었고 여전히 순수하다. 부이는 아직도 나를 사랑해준다. 인간이 자신에게 저지른 그 모든짓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처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LEMSIP을 떠나면서 얀 무어 - 얀코프스키Jan Moor-Jankowski박사와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마치 방금 사업을 계약한 동업자라도 되는 듯 말이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부이의 간염에 대해서도, 무어-얀코프스키와 나 자신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품위가 이 모든 고통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님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꼈다. - P181
부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하게 행동했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분히 감정이 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여전히 "꾸밈없고" "너그러운" "다정한 아이였다. 인간을 모방하는 게 부이에게 기쁜 일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탈출을위해서였을 뿐이라면? 파우츠 역시 가장 큰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할 방식으로, 즉 부이를 거의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그가 풀려나는 데 필요한 일을 정확히 수행했을 수 있다. 부이와 파우츠모두 탈출구가 필요했다. 즉 부이는 우리에서 나가야 했고, 파우츠는 자신의 양심을 짓누른 과학 학제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했다. 어떤 전술을 썼든, 그들 모두 결과적으로 숙명에서 벗어났다. 《가장 가까운 친족》에서 파우츠는 자신이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규칙을 어겼다고 썼다. "연구 대상을 사랑하지 마라. "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그 규칙을 깨뜨려주길 바란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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