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저했다. 나는 장애에서 어떤 가치를 보고 있는 걸까?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답해야 하는 걸까? 피터싱어에게 장애가 왜 중요한지 설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머릿속을 뒤졌다. 상호의존이나 정상성 비판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핵심 요점이 머릿속에서 채정리되기도 전에, 내 안의 예술가가 불쑥 튀어나와 대답했다.
"저는 예술가예요. 그래서 창조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됩니다.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저는 누구에게도 입을 사용해 무언가를하는 방법을 배워본 적이 없어요. 모든 것 하나하나에는 어떤 차원의 창조성과 혁신성이 깃들어 있죠. 누군가는 이로 인해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중 많은이들에게 몸의 모든 측면이 미리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주 해방적인 일이에요……" 싱어는 즐거워 보였고, 흥미로워했다. "저는 왜 제가 장애나 장애인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지, 왜 - P236

2달러짜리 알약을 먹지 않으려는지 수많은 목록의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서로다른 행성에서 온 두 존재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예술가인 것은 아니고, 또 자기 삶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걸요?" 싱어가 지적했다.
"맞아요, 하지만 예술가만 그런 식으로 느끼는 건 아니에요. 저는 많은 예술가들을 알게 되긴 했지만, 이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장애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장애인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싱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확실히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도 기본적으로 똑같은 걸 말했어요. 자신이 행복하다고요. 근데 그녀는 예술가가 아니라....… 변호사였죠." - P237

왜 나는 2달러짜리 알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가? 알약을먹는다면 들판을 내달릴 수도 있을 텐데! 달빛 아래서 원을 그리며 춤출 수도 있을 텐데! 계단을 층층이 뛰어 오르내릴 수도 있을텐데!
2앨리슨 케이퍼는 자신의 저서 《페미니스트, 퀴어, 크립》에서 장애를 두고 치료 의제가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현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이 문제를 직면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가정하는 현실이야말로 치료 의제에 힘을 실어주고강제적이고 강압적인 권력을 부여한다"고 하며, "이 물음은 피 - P237

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썼다. 25이런 비장애 중심주의적 가정에도 불구하고, 대개 장애는장애인들의 삶에 스며들어 그 일부가 된다. 장애로 인해 우리가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우리가 장애인임을 항상 꼭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가 장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장애가 우리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우리 (혹은 적어도 우리 대부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애석해하면서, 이를테면 ‘장애가 없었다면 맨발로 해변을 걸어 다녔을 텐데‘라는 식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 P238

싱어에게 장애가 창조적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장애인 무용수이자 예술가, 시인인 닐 마커스 Neil Marcus 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장애는 ‘용감한 고투‘나 ‘역경과 마주하는 용기‘ 같은 것이 아니다.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이것은 예술가로서의 나 그리고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집거나 어디엔가 도달할 방법을창조적으로 알아내려고 하는 장애인으로서의 나, 이양쪽 모두와 공명한다. 마커스의 말은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라는 생각에저항한다. 게다가 그의 말은 우리가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반드시 중심에 두지는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촉구한다. 장애학 연구자 로버트 맥루어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겪을 장애를 환영하고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 P238

의미일 수 있는가?"25 이러한 정서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에 깃든 관능성,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아름다운 잠재력을 보도록 자극한다. 장애는해방적일 수도 있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지속적인 공세에서 벗어나게해주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
다양한 자폐 프라이드 autistic pride와 매드 프라이드mad pride운동이 증명하듯, 이런 시각은 비단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과만 관련되지 않는다. 이성과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능력이없는 개인들의 창의적이고 미적이고 관능적인 세계를 이해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구드DavidGoode의 작업을 생각해보자. 그는 1960년대부터 수십 년간 구어를 쓰지 못하고 대부분 지적장애도 있는 장애 아동들을 관찰했다. 구드는 자신의 작업에서 크리스와 함께했던 일에 대해 썼다. - P239

크리스는 시설에 수용된 어린여자아이로, 청각장애와 시각장애,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구드는 자신과 크리스가 상이한감각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이해했고, 그래서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고생각했다. 크리스는 머리를 특정한 각도로 구부린 채 딸랑이나숟가락을 치며 반복해서 몸을 흔들었다. 그녀를 몇 시간에 걸쳐 관찰한 구드는 그녀의 한쪽 귀와 한쪽 눈에 어느 정도의 청각과시각이 있다고 판단했다. 크리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잘 파악하기 위해 구드는 그녀의 감각적 지각을 느껴보려고 자신의 귀와 눈을 덮었다.  - P239

우리 대부분이 자신의 고통과 경험을 쉽게 분리해 명명할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은 이 딜레마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장애인 저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하는 일라이 클레어Eli Clare는 이렇게 쓴다. "어느 괜찮은 날엔 ‘내 몸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바깥의 일상적인 망할 비장애중심주의로 향하는 분노‘를 분리할 수있다. 하지만 전자의 분노를 후자의 분노로 바꿔서, 후자를 더욱타오르게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하거나 깔끔하지 않다."3" 외적으로 드러나는 비장애 중심주의, 차별, 억압과 내면화된 비장애중심주의, 고통, 슬픔, 상실이 서로 불가피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장애를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풀기 힘든 경험으로 만든다. 장애를 고려할 때 고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여지를 두는 것(이는 많은 장애인들의 근본 경험이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신체나 정신으로 살아가며 마주할 수 있는 슬픔의 여지를 두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 P249

만약 내가 내 신체의 접근권을 주장하며 그 행사에 참가했다면, 내가 내 몸이 드러나는방식에 대해 갖는 그런 자신감은 오인을 초래했을 것이다. 다시말해 내가 동물과 맺는 관계 그리고 동물과의 친밀감을 논하는것조차 장애에 대한 내 사랑의 제스처로 오인되지 않았을까? 내행동이 행사를 망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다른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편의를 요구함으로써 다른 종류의 식탁 친교를 주장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밤 내 말들의 뼈대를 만든 것은 공간의 접근 불가능성이었다. 그 불가능성은 나로 하여금 동물 억압과 장애 억압을그저 당연시함으로써 비가시화하는 방식에 주목하도록 했다.
스티어를 저녁식사로 제공하고 장애인을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도록 만든 것 말이다. - P269

나는 장애인 공동체가 먹는 음식이 동물, 인간환경을 황폐화하고 잔혹성과 연관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많거나 소위 자족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만이 취할 수 있는 음식을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연 우리는산업화된 현 음식 시스템이 남용되는 현실과 그 부적절성을 문제제기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자족적으로 먹을 수 있는 수입과 시간, 욕망(능력은 물론이고)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동물들을 그저 착취할 수 있고 상품화할 수 있는 의존적인 신체 이상의 존재로 바라보는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미래에 관한 더 급진적인통찰은 단순히 환경이나 소비자 개인의 건강에만 이로운 것이아닌, 비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를 포함한 위계와 억압의역사적 패러다임에 저항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아울러야 한다. - P296

다행히도 지속 가능성 운동은 획일적이지 않고, 그런 주제들에 무심하지도 않다. 무수한 운동가, 단체 조직가, 농부들이 환경 문제와 복잡한 사회문제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해 매우다채로운 생각을 보여준다. 예컨대 국내외의 음식 정의 food justice와 음식 주권food sovereignty 운동들은 저렴하고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음식, 음식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 커뮤니티가 자신의 음식 시스템을 직접 관리할 권리 등을 요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런 운동들이 항상 장애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고, 비거니즘이나 베지테리어니즘을 촉구하는 일은 더욱더 드물지만,
그럼에도 커뮤니티의 관리와 역량 증진에 대한 강조,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더 정의로운 미래에 대한 통찰 등은 비 - P296

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에 반하는 틀을 구축하게 하는 급진적 잠재성을 이 운동들에 부여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연결하는 조직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오클랜드에 기반을 둔 비건 음식 정의 단체인 음식을 통한 역량 증진 프로젝트 Food EmpowermentProject는 음식 접근성, 농가와 저소득층 커뮤니티를 위한 정의,
인종주의, 장애, 동물 학대, 환경문제 같은 이슈들을 연결한다.
이 프로젝트는 음식 운동들이 교차적으로 사고하도록(그리고 동물의 고통과 비거니즘을 진지하게 고려하도록 촉구하며, 동물 옹호가들에게도 교차적으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비건과 베지테리언에게 전통적 채식주의자의 목표인 "잔혹 행위없음 cruelty free"의 개념을 식물을 기반으로 한 음식을 기르고 수확하고 처리하는 인적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으로까지 확장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이 단체는 초콜릿 생산에서 발생하는 아동 착취, 우리가 소비하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극도로 열악한노동 환경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 P297

공장식 축산 농장과 도살장처럼, 전쟁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형태로, 부상을 입은 군인과 민간인의 형태로, 또한 오랫동안 남게 되는 전쟁 독극물이 중에는 에이전트 오렌지 AgentOrange*나 열화우라늄 처럼 의도적인 것도 있고, 하수 시설이 없는구덩이에 묻어버린 비행기 탈지제처럼 우발적인 것도 있다)의 영향이라는 형태로 장애를 만들어낸다. 손상을 입은 사람들이 그 후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부재하는 경우도 많다. 상호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과 그것을 지원하는 기관들이부재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전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대부분은 결국 빈곤해지고, 낙인찍히고, 일자리와 의료서비스,
커뮤니티의 지원 등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이 장애인들은인류 공포의 상징으로 구축된다. - P320

장애운동가와 학자들이 장애가 이 세계에 무언가가치 있는 것을 제공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장애를갖도록 만들어야 한다거나 사람들이 장애를 갖게 될 때 축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쟁, 도살장, 농업, 산업 오염물, 화학물중독, 사고, 병, 빈곤 혹은 사회적 서비스의 부재 등 그 원인이 무엇이든 장애는 흔히 끔찍한 불의가 가져온 결과이다. 설령 그 원인이 비교적 덜 유해한 경우에도 장애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장애를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P321

만약 내 몸에 대한이해가 단순히 "미군과 그 폐기물이 내게 장애를 가져왔다"에그친다면, 장애가 있는 내 친구들이 스스로를 불의를 나타내는표상으로밖에 여기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대안적인 존재 방식, 소통하고 공간을 이동하는 대안적인 방식,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며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대안적인 방식 그리고 특히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거나 지금도 끼치고 있는그런 불의에 저항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의 가능성이 더욱 사라져버린 그런 공허한 세계 말이다. 단순히 좋거나 나쁜 것으로 치부하기에 장애는 너무나 복잡하다. 하지만 장애를 만들어내는산업과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 판단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쉽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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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동물들과 비교되었다. 원숭이처럼 걷는다고, 개처럼 먹는다고, 가재 같은 손을 가졌다고, 그리고 전체적으로 닭이나 펭귄을 닮았다는 말도 들었다. 심술궂은 마음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치원 친구들이 나를 가리켜 원숭이처럼 걷는다고했을 때 당시 나는 그들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내가 왜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원숭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숭이장난감을 수십 개나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말하기를, 나는 걸음마 시절 거대한 킹콩을 보러 동네 미니 골프장에 가는 걸 무척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를 원숭이와 비교했을 때 그것이 내게 잘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 - P188

었다. 그것은 모욕이었다. 나는 그들이 내가 휠체어 없이 똑바로설 수 없음을 지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상 인간처럼 설수없는 것 말이다. 동물과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나는 이것이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들 말이 맞았다. 걸을 때 내 모습은 정말로 원숭이같다. 혹은 유인원, 어쩌면 침팬지와 닮았을 것이다. 나의 선자세는 <진화의 행진> 그림의 두 번째나 세 번째 형상에 가장 가깝고, 마지막 형상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 유사성은 손이나 도구를사용하지 않을 때 나의 먹는 모습이 개를 닮았다는 말처럼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다. 이런 비교들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는 않은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꼭 부정적일 필요는 없는 그런 사실일 뿐이다. - P189

언젠가 장애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장애 때문에 동물과 비교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많은 답변들이 날아왔다. 마치 개구리의 다리, 펭귄의 뒤뚱거림, 바다표범의 팔다리와 원숭이의 팔에 관한 동물 우화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리며 부정적으로 내뱉는 탄식들로 미루어보건대 이런 비교들 대부분이 기분 좋게 떠올리는 것들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한 친구는 어릴 적 엄마가 자기에게낙타처럼 걷는다고 했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손과 다리를 바닥에 대고 걷는 나를 보고 엄마가 그렇게 불렀어. 엉덩이는 낙타의육봉처럼 공중으로 내밀고 말이야.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어. 나에겐 낙타 프라이드camel pride가 있다고 말하곤 했으니까."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새아빠에게 내 팔이 원숭이 - P189

같다는 말을 듣는 건 싫었어."
장애인을 동물과 비교하고 동물처럼 다룬 역사적 사례 중19~20세기 초반 미국과 유럽의 사이드 쇼처럼 염치없고 뻔뻔하고 노골적인 예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이드 쇼는 초기의궁정 기형쇼를 대중화한 것으로, 당대의 식민주의적이고 과학적인 드라마들을 상연했다. 펭귄 걸 미뇽 Mignon the Penguin Girl, 개의 얼굴을 가진 소년 조조Jo-Jo the Dog-Faced Boy, 이게 뭐야? What-is-it,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the Missing Link, 유인원 소녀 크라오Krao, theApe Girl 등. 사이드 쇼라는 스펙터클에서는 동물성이 중심을 차지하는데, 여기서 가장 모욕적인 동물 비교는 유색인과 지적장애인의 몫이었다. 사이드 쇼에서 동물성은 연출 기법과 스펙터클을 통해 통상적인 범주나 구분을 위반함으로써 상상력에 불을지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인종주의, 제국주의적 팽창,
식민지화 그리고 장애에 대한 공포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 P190

어떤 차원에서 나는 내가 동물로 식별되는 게 항상 옳다고 느꼈다. 어릴 때, 잠깐 동안 나는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에게개처럼 짖곤 했다. 내가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에 따르면 진심으로 개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당연하게도 이런 나를 보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은 휠체어를 타는 어린이가 갖는 사회적인 의미에 대해서뿐 아니라 내가 짖고 있는 것까지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 P207

이 글을 나는 버클리 시내의 한 카페에 앉아 쓰고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을 가방에서 꺼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컴퓨터 패드 가장자리를 입으로 문 뒤흔들어가방에서 빼내야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키보드에 대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필요한 모든 것을 꺼내기위해 이 일을 몇 번 더 되풀이했다.
공적인 장소에서 손 대신 입을 쓸 때 나는 내가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비장애 신체의 에티켓뿐 아니라 사람이 몸에 어떤 방식으로 깃들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는 말하기 위해, 먹기 위해 입을 사용한다. 하지만 입은 세균과 입김, 침이 있는 구멍이며, 매우 개인적인 곳이다. 입은 성적이다. 입은 동물적이다. - P208

그러나 손은 인간적이다. 인간은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과 정교한 네 손가락을 가졌다. 직립 이족보행이 그렇듯 인간의 손은 우리의 뇌가 크다는 증거로 언급되었다.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 문화가 탄생할 수 있는 문이리기도 했다. 손은 우리 신체의 민첩성을 대표하고, 다른 종과의분리를 나타내는 징표이다.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 - P208

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동물성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비유적으로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는 우리가 동물 같다거나 동물이라는 관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기 위한 필수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두 주장 모두 맞지만 말이다. 내가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바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할 정도로 당연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잊어버리는 사실이다. - P209

나는 의학적으로 변형된 지금의 몸보다 장애가 있는 "선천적인" 몸에 더 끌린다. 다소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지만, 이런 끌림은 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비장애중심주의 그리고내면화된 억압을 온몸으로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나는지금의 몸에 애착을 느낀다. 딛고 설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발, "원숭이 같은 자세로 잠시 나를 떠받치는 두다리를 나는 좋아한다. 만약 내가 다른 몸을 가졌다면, 나는 그몸으로 사는 법을 배웠을까? 그 몸에 (그 몸이 공간을 헤쳐가고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애착을 느꼈을까? 어쩌면 내 안에 비장애중심주의가 아주 깊이 뿌리내린 나머지, 의료적 개입이 있기 전 아기였을 때의 "더욱 심한 장애를 가진 몸에 그것을 투사했는지도 모른다. - P214

나는 내 몸이 인간의 개입과 불가분하다고 본다. 그렇지않은 몸이 과연 있을까? 인간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 때문에 꿀벌이 소멸해가고 북극곰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시대에 생태계 전체가 어떤 식으로 인간 사회의 영향을 받는지 생각해보는 것은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자연을 결코 우리 자신의 관점을 초월해서 볼 수 없다는 점을 좀 더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다.
우리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과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내가 상상하는 수술 이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수술 이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혹독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조차, 어떻게 해야 몸이 더 자연스러워보이고,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고, 몸이 어떤 식으로 공간에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에 단단히 매여 있다. 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 P216

장애학 연구자와 운동가들은 "불구의 시간crip time"이라는 개념을 오랫동안 이론화했다. 불구의 시간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인정하는 것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작가이자 장애운동가인앤 맥도널드 Anne Mcdonald는 자신의 시간 감각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삶을 슬로우 모션으로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나의 생각은 여느 사람만큼이나 빠르고, 동작은 약하고 불규칙하며, 말은 유사 속 달팽이보다도 느리다."20 장애는 속도 조절 그리고 진전에 대한 다른 감각을 조성하며, 때로는 수명에 대해서도 다른 감각을 조성한다. 옷을 입거나, 식사를 준비하거나,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과업을 수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우리에게 시간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면, 극심한지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나 매우 다양한 동물들의 시간은 어떻게 다시 개념화될 수 있을까?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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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신앙부터 인간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믿음까지, 비장애 중심주의는 우리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떠받치고 있다.
비장애 중심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이 의심의 여지없이 동물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믿게 된다. 그것은 우리인간의 동작, 사고, 존재방식이 동물들보다 정교할 뿐 아니라 우리를 (동물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에 불을 지핀다. 열등한 야만 상태에 있는 동물은 별다른 윤리적 고려 없이 이용될 수 있다. 동물을 연상시키는 인간들(유색인종, 여성, 퀴어, 빈민 그리고 장애인 등) 또한 지적으로 모자라고, 가치가 적은 존재로, 때로는 심지어 인간 이하 less human의 존재나 비인간 non-human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특정한 능력이나 역량들이 인간을 정의할때 핵심 요소가 되고, 인류와 나머지 동물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다. 이런 식으로 비장애중심주의는 동물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인간으로 여기는지 구체화한다. -P 121

이 장의 제목은 <동물 불구들>이다. 동물을 불구라고 부르는 것은 틀림없이 인간의 투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투사는 비인간 동물들을 비장애 중심주의에 똑같이 억압받아온 주체로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동물들을 불구라고 부르는 행위는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사고하고, 느끼는지 그리고 무엇이몸을 가치 있는 것, 착취할 수 있는 것, 유용한 것 혹은 쓰고 버릴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는 소나 닭의 경험에 관한 우리의 일반화된 생각을 뒤흔드는 일이다. 또한 이는 라이플 총의 가늠쇠로 본 절뚝이는 여우가 즐거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잠시 멈춰 생각해보는 일을 뜻하기도 한다. 동물 불구라는 말은 삶과 삶의 다양성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도록 한다. - P101

부이에게 눈에 띌 만한 뇌수술 후유증이 많지는 않았지만, 파우츠는 부이가 무언가를 가리킬 때 동시에 두 방향을 가리킨다는것 그리고 무언가를 그릴 때 도화지의 양쪽 모서리에 동시에 그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술의 여파가 무엇이었든, 그게 부이의 소통 능력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부이는 파우츠의 가장열심인 학생이 되었다. 파우츠와 함께 일한 몇년간 부이는 50개이상의 단어를 외웠고, 이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 질문했으며,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연구소는 동물들에게 위험한 장소였다. 파우츠는점차 자신이 감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일종의 "친절한 간수"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양심의 고통을 줄이고 예측할 수없는 미래에서 와쇼를 구출하기 위해 파우츠는 와쇼와 함께 연구소를 떠날 방법을 알아냈다. 물론 자신이 수어를 가르치고 사랑했던 부이를 비롯한 많은 침팬지들을 뒤로한 채 떠나는 것은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부이와 다른 침팬지들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레먼 박사의 소유물이었기때문이다. - P107

부이는 수어를 꽤 배웠고 쓸 수도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가 우리에서 풀려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명한 두 침팬지가 풀려나 대중의 항의가 축하로 바뀌었을 때, 부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는 C형 간염 연구에 이용되었고, 연구소에서는 고의로 그를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 후 13년간 부이는 LEMSIP의 우리에서 지냈다.

2000여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가 인간과 동물을구분 짓는다고 했다. 이런 믿음은 언어가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인간에게 고유하며, 인간을 정의하는 데 언어가 핵심적이라고 보는 서구 전통의 기반이 구축되도록 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듣기가 말하기를 위해 필수적이고, 따라서 사유에서중심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농인들에게 사고와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유산은 농인들을 동물과 유사한 존재 혹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낙인찍곤 했다.  - P109

복잡한 소통 체계를 지닌 님, 와쇼, 앨리, 부이 그리고 그밖의 무수한 동물들의 소통 체계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언어와같은 "진정한" 언어로 정의될 수 있을지는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도, 가장 흥미로운 문제도 아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이런 것이다. 어떤 동물의 언어나 소통 능력이 어째서 그 동물을대하는 방식을 바꾸게 되는가? 미국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외롭게 감금되고 실험당하는 삶을 선고받는 반면, 수어를 쓰는 침팬지는 어째서 해방을 촉구하는 대중적 항의를 불러일으킬 수있는 걸까?
의심의 여지없이 부이는 수어를 배우기 이전부터 감정을지닌 존재였다. 부이가 미국 수어를 습득한 것의 특별함은 그가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갑자기 감정을 가진 지적 존재로 거듭났 - P116

다는 데 있지 않다. 그건 그의 언어 사용이 인간인 우리를 그의지적 역량 그리고 정서적 삶과 비로소 대면시켰다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언어에 이렇게 높은 위상이 부여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첸은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거의 틀림없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주요 기준 혹은 결정적인 자질로 여겨지며, 심지어 차별에 반대하는 이론가들조차 그렇게 여긴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폄하한다. 인간이 정보를공유하는 방식과, 인간과는 다른 동물들의 수많은 정보 공유 방식들 사이에 뚜렷하게 그어진 위계를 전제할 뿐 아니라, 이런 위계에 윤리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 P117

우리는 동물윤리를 불구화해야 한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장애 정치학을 적용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일은 장애인과 비인간 동물 모두를 억압하는 공통의 체계와 이데올로기를 검토하는 것인데, 비장애 중심주의가 언어 외의 다른영역에서도 동물 억압을 영구적으로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장애 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또한비인간 동물들이 판단되고 분류되고 착취되는 방식에 대해 숙고해볼 때, 비장애중심주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장애학과 장애운동은 삶의 가치를 논하는 데 특정한 신체적·정신적 역량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장애 이론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지능, 이성, 민첩성, 신체적 자립, 이족보행 등과 같은 특정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 P118

이 분야에 몸담는 우리들 대부분은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이든, 뇌성마비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면 중증 지적장애, 사지마비, 자폐혹은 나처럼 관절굽음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부한 자부심 선언이나 인간 삶의 신성함을 외치는 낭만적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장애인들이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특정한 신체들과 특정한 행동 방식을 우선시하는 문화 아래에서 가치절하되거나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 P119

인간의 동물 지배에 대한 정당화는 거의 항상 인간과 동물이 가진 능력과 특징에 관한 비교에 의존했다. 우리 인간은 언어, 이성, 복합적 감정, 두 개의 다리 그리고 다른 네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opposable thumbs" 을 가진 종이다. 동물들은 이런 특징 및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도덕적 책임 바깥에 존재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고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물을 어떤 능력을 갖거나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은 비장애 중심주의적이지 않은가?
이런 논의는 비장애abled 인간 신체뿐 아니라 신경전형적neurotypical 인간 지능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 P119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신앙부터 인간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믿음까지, 비장애 중심주의는 우리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떠받치고 있다.
비장애 중심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인간의 능력이 의심의 여지없이 동물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믿게 된다. 그것은 우리인간의 동작, 사고, 존재방식이 동물들보다 정교할 뿐 아니라 우리를 (동물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든다는 생각에 불을 지핀다. 열등한 야만 상태에 있는 동물은 별다른 윤리적 고려 없이 이용될 수 있다. 동물을 연상시키는 인간들(유색인종, 여성, 퀴어, 빈민 그리고 장애인 등) 또한 지적으로 모자라고, 가치가 적은 존재로, 때로는 심지어 인간 이하 less human의 존재나 비인간 non-human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특정한 능력이나 역량들이 인간을 정의할때 핵심 요소가 되고, 인류와 나머지 동물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된다. 이런 식으로 비장애중심주의는 동물과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인간으로 여기는지 구체화한다. - P121

비장애 중심주의가 동물과 장애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영향을 미친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동물들도 (장애인처럼) 의료화 담론과 중첩되는 방식으로 과학적 발견과 분류의 시스템에 매여 있지만, 동물들은 (적어도 우리 시대와 맥락에서는) 그들의 동물성을 치료하기 위해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병리화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비록 자주 대상화되기는 하지만) 명백히 고기나 물건으로 가공되지 않는다. 즉 동물과장애인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소외와 지배를 경험한다.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비장애중심주의는 비인간 동물과장애인의 삶과 경험 모두를 덜 가치 있고 폐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며,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억압들로 이어진다. - P122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라는 성서의 구절을 이용하는 게 일반화된건 1910년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EllaWheeler Wilcox의 시가 출간된 이후부터다. 이 구절은 현재 수많은동물 옹호 문헌과 동물 권리 캠페인에 등장한다.


나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나를 통해 벙어리는 말할 것이다
이 세계의 먹은 귀가 듣게 될 때까지
말 없는 약자들이 겪은 불의를. - P125

오, 부끄러워하라
가르치기 위해 몸을 낮추지 않는 인간들의 어머니여
사랑스러운 눈망울에는 슬픔이 있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거리에서, 우리에서, 개집에서
마구간에서, 동물원에서
고문당하는 내 친족들을 가둔 벽이 죄악을 선언하네
힘없는 자들에 대한 힘 있는 자들의 죄악을.

그리고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
그리고 나는 그들의 싸움을 싸울 것이다
그리고 짐승과 새를 위해서 말한다
이 세계가 바로잡힐 때까지  - P126

세기가 바뀔 무렵 이 시는 동물의 고통에 대해 인식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또한 이 시는 일부 동물 옹호 운동에서나타난 동물성과 장애를 혼동하는 사례로서도 흥미롭다. 이시곳곳에는 동물성을 어떤 종류의 장애로 전환하는 구절들이 있다. 동물은 말을 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없고), 힘없고, 약하다. 목소리를 가진 돕는 쪽과 목소리가 없는 도움받는 쪽의 메워지지않는 간극 또한 암시한다.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자신을 변호하거나말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선사하기라는 시구는 불가 - P126

피하게 어떠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목소리 없는 자들은 스스로 말하거나 자기를 돌보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자들이라는 심상을 말이다. 이는 무수한 맥락에서 비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인도의 저술가이자 정치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 ArundhatiRoy의 지적이 통렬하다. "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침묵을 강요받았거나, 듣지 않으려 하기에 들리지 않게 된 자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윌콕스의 시구와 감성은 지금도도처에서 발견된다. 장애에 관한 적선의 모델에서 나타나듯, 의존적이고 취약한 자들에게도 행위 능력이나 의견이 있음을 인정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타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많은 이들에게 더 매력적이므로 일부 운동가들이 여전히 목소리 없는 자들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의사결정 과정에 단 한 명의 장애인 대표도 포함하지 않은 장애인 지원 조직이나 자선 단체들이 지금도 무수히 많다.  - P127

프라이스는 소위 이성적 인간을 자신이 수사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부르는 사람들과 대비시킨다. "장애가 있다"는 것은 수사적 차원에서 "(정신적 · 인지적·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유능하지 않고, 이해 불가능하고, 가치 없고,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함"을 뜻한다. "우리는 시설에 수용되고, 약을 투여받고, 뇌엽절제술을 받고, 전기충격을 당하고, 집 없이 생존하도록 방치된다. 정상적인 정신을 기준으로 할 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격의 상실을 뜻한다.
프라이스의 말은 비인간 동물들에게 중대한 함의를 갖는다.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동물들의 인격, 즉 누군가의이익을 위해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와 공감받을 필요성까지 부인하는 행위들이 사실상 정당화된다. 이성에 큰 강조점을 두는 - P141

동물해방론을 비판하는 살로먼, 베일리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이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어떻게 동물 억압을 강화하지않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베일리는 이렇게 쓴다. "동물윤리에대한 현대철학의 접근은 때때로 동물을 돕는 것만큼이나 이성을 정의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의 정당화는동물들을 희생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58베일리가 밝히듯, 문제는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이성이 감정, 감각 그리고 인식하고 존재하는 다른 방식들과 분리된 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격상되는 데 있다. 이성에 대한 이런 정의는 가부장제, 제국주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의 역사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형태의 억압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들은, 비인간 동물이나 현저한 지적장애인처럼 "이성"이 없거나 없을지도 모르는 이들을 위한 해방을 이론화할 때 특별히 중요하게 새겨야 할 것들이다. - P142

세계를 냄새를 통해 지각하거나 몸에서 빛을 발하며 소통하는 생물체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할까? 극도로 복잡한 이주를 하거나 바다 깊숙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지능이 필요할까? 우리는 지구상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능력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셈이고, 인간의 능력은 그 다양한 능력들 중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있지만 우리는 갖지 못한 지능과 역량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탓에 우리로서는 우리 자신의 것 너머에 있는 지능과 경험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 무언가 배우려는 시도를 멈춰선 안 된다. - P154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들이 이미 삶을 경험하고 느끼는 존재들에 대해 우리가 가하는 착취 · 상품화 · 살해를 변명하기 위해 제기되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특히 그런 주제가 지금 동물들의 삶에서 이윤을 취하고 있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들이 초래한 윤리적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는 않을지 더욱 염려하게 된다. 우리는 식물이나 굴이 고통을 느끼거나 정서적 삶을 사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개, 소, 물고기, 닭이 고통을 느끼고 정서적 삶을 산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간 동물human animal도 포함해) 동물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환경도 번성해야 하며, 이는 동물들을 위한 투쟁이 더 넓게는 환경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임을 잘알고 있다. - P157

내게 쾌고감수능력과 도덕적 고려의 문제가 갖는 복잡한 함의는 동물 정의animal justice가 불가능하고 어리석은 것임을 증명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러한 함의는 모든 존재들을똑같이 다뤄야 한다거나 인간 예외주의 human exceptionalism 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틀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쾌고감수능력 그리고 지구상의 매우 다양하고 신비한 생명체 및비생명체들은 다양한 능력과 그 능력에서 비롯된 다양한 종류의책임들을 섬세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모든 질문들에 끌린다. 이 질문들에 쉬운 답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이 질문들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간의 분석과 필요에 맞게 손쉽게 범주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산산조각낸다.  - P157

여기서 말하는 동물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는, 언뜻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질문에조차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류학적 기제를 이미 확정되어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기보다는 "동물"에 대한 나의 정의definition를넓게 열어두고자 한다. 우리의 환경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은 우리가 수립한 제한적인 정의를 완고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 P158

이 가상의 시나리오에서, 사람들은 페터가 인간적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비장애 중심주의적인 편견을 가질 것이다. 비장애중심주의는 페터가 평균적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면 사라질것이지만,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많은 차별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외모나 움직이는 모습 때문일 수도, 그의 출신지 때문일 수도, 그의 종 때문일 수도 있다.
종차별주의란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으로, 우리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를 점한다며 인간의 동물 이용 및 지배를 용인한다. 종차별주의는 약이나 가정용품 실 - P160

험에 동물을 사용할 때, 재주를 부리도록 하기 위해 코끼리에게 불훅을 사용할 때,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을 바라볼때, 우리의 이익을 위해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할 때, 우리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도살장에 보내거나 그 몸을 상품화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서구 전통에서 종차별주의는 우리의 역사적·종교적·문화적 가치 그리고 인간성에 관한 우리 자신의 서사 안에침투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종차별주의는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161

빨간 페터 혹은 실제로 존재했던 부이는 복잡하고, 감정이 있고, 지능을 가진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종차별주의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인가? 아니, 그 전에 동물이란 무엇인가?
〈동물로의 전환에 대하여>라는 짧은 글에서 역사가 해리엇 리트보 Harriet Ritvo는 이렇게 썼다. "동물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학자들 대부분은 인간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믿는다." 동물계를 묶는 유전적 유사성을 탐구하는 과학자들, 인간과 다른 종 사이의 정서적·지적·문화적 유사성을 검토하는인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ורום - P161

그가 동물이라는 말의 "더 통상적인 용법"이라고 부른 것, 즉 동물을 인간과 동떨어진 하위 존재로 보는 시각과 맞물려 끊임없는 모순을 자아낸다. 인간 자신도 동물이라는 이해는 여러 학문 분과에 걸쳐 보편적으로 구축되었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불편함과 거리 두기가 남아 있다. 인간은 양쪽을 모두 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해부학과 생리학 실험에 다른 종들을 대신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이다. 우리는진화 계통도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인간 본성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동물이다. 우리는 인간이 일으킨 최악의 행위를
"동물적 본성 때문"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정체성을 동물로 여기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동물이 아니다. 동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욕이다. 어떻게 이런 역설이 생겨났을까? 어떻게 우리는 동물이면서동시에 동물이 아닐 수 있는가? - P163

철학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는 〈동물, 그러니까 나인동물(계속)〉에서 이렇게 쓴다. "동물이란 하나의 말이다. 그것은 인간/남성이 만들어낸 호명이고, 그는 다른 생명체에게 이름을 부여할 권리와 권위를 스스로에게 준 것이다." 많은 동물학animalstudies 연구자들처럼, 데리다 역시 "동물"이라는 말이 게으르고 모욕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저작 전반에 걸쳐 그는 동물이라는 이름이 포괄하는 존재들이, 바로 그 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다양성을 제거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동물들에 대한 명명을 조사하기 위해 <창세기〉를 참조하는데, 이 이야기에서 명명과 지배가 같은 순간에 발생하는 양상을 살핀다.
ㅂ신은 아담을 자신과 닮게 만들고는 그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나는 것들,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복종케 하라"고 명한다. 그러고는 아담에게(이브가 창조되거나 명명되기 전에) 동물들을 명명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인간/남성은 이미 짐승들과 분리되어 있는데(그리고 여성과도 분리되는데 이 또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분리 과정에서 명명은 그 자체로 결정적이다. - P168

부이는 철창 안에서 손을 내밀었고 내 팔을 어루만졌다. 부이는 다시 행복해했다. 부이는 와쇼와 내가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에 레먼 박사 연구소의 침팬지 섬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와 똑같이 다정했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부이를 보자. 13년을 지옥에서 지냈는데도 나를 용서해주었고 여전히 순수하다. 부이는 아직도 나를 사랑해준다. 인간이 자신에게 저지른 그 모든짓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처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LEMSIP을 떠나면서 얀 무어 - 얀코프스키Jan Moor-Jankowski박사와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마치 방금 사업을 계약한 동업자라도 되는 듯 말이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부이의 간염에 대해서도, 무어-얀코프스키와 나 자신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품위가 이 모든 고통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님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꼈다.  - P181

부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하게 행동했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분히 감정이 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여전히 "꾸밈없고" "너그러운" "다정한 아이였다. 인간을 모방하는 게 부이에게 기쁜 일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탈출을위해서였을 뿐이라면?
파우츠 역시 가장 큰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할 방식으로, 즉 부이를 거의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줌으로써 그가 풀려나는 데 필요한 일을 정확히 수행했을 수 있다. 부이와 파우츠모두 탈출구가 필요했다. 즉 부이는 우리에서 나가야 했고, 파우츠는 자신의 양심을 짓누른 과학 학제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했다. 어떤 전술을 썼든, 그들 모두 결과적으로 숙명에서 벗어났다. 《가장 가까운 친족》에서 파우츠는 자신이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규칙을 어겼다고 썼다. "연구 대상을 사랑하지 마라. "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그 규칙을 깨뜨려주길 바란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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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 피고는 한국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 원래 한국은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문필로 세운 나라다. 그런데 일본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침략했다. 이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예전처럼 독립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재판장 :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총기로 살해하고 수행원들에게 부상을입혔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안중근 : 그렇다. 이는 3년 전부터 갖고 있던 계획을 실행한 것이다. 또한 한국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국 적장을 사살한 것이므로, 국제법에 따라 재판받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나는 일반적인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이기 때문이다. -P229

하얼빈에서 다롄은 991 킬로미터. 뤼순을 가려면 다롄에서 차를 갈아타야 한다.
중국 해군기지가 들어선 뤼순은 외국인 접근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경찰서를 방문해 ‘외국인 숙박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숙소를 정한 뒤 뤼순 역으로 나갔다.
안중근에게 뤼순은 꿈의 도시였다. 뤼순항을 개방해 중국·러시아·일본 3국의 대표를 구성한 다음 동양평화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공동 출자에 의한 재정 확보와 3국 청년들로 구성된 합동 부대 등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해놓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전쟁부터 막아야 했다. - P212

제정 러시아가 건설한 뤼순 역은 지금도 기차가 운행 중이었다. 하얼빈에서 압송된 안중근은 1909년 11월 3일 뤼순 역에 내렸다. 밖을내다볼 수 없도록 제작된 호송마차에 오른 안중근은 눈을 감았다. 온몸을 결박당한 채 끌려온 터라 몹시 지쳐 있었다.
뤼순감옥 특별 감방에 수감된 안중근은 저들의 행동을 오히려 의아스럽게 여겼다. 뤼순감옥에서 일하는 간수들이 너무 깍듯이 대해주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같은 일본인이 분명한데 어찌 이처럼 다를 수 있단 말인가?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들은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 P212

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어질고 후한 것일까? 한국과 뤼순에 있는 일본인의 종자가 다른가? 아니면 풍토와 풍속이 달라서 그런가?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극악한 이토를 닮아 그렇고, 뤼순에 있는 일본인들은 법원과 검찰청 관료들이 인자해 스스로 감화된 것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군 포로 석방 문제로 적잖은 곤욕을 치렀고, 일본인을 직접 혼내준 적도 있었다.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과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한국 사람이 타고 가는 말을 빼앗으려고 했다. 부아가 치민 안중근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왜놈 주제에 감히 남의 땅에서 행패를 부려?"
그자의 멱살을 틀어진 안중근은 권총을 꺼내 복부를 겨누었다.
"어찌하겠느냐? 빼앗은 말을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면 용서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땐 네놈을 당장 죽일 것이다."
주위에 일본인이 여럿 모여 있었지만 섣불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안중근이 권총을 뽑아든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그런데 감옥은 왜 이러는 걸까? 여전히 친절하고 여전히 조용했다. - P214

재판장 : 피고는 해외에서 활동한 3년 동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냈는가?

안중근 : 한국 동포들을 위한 교육운동과 의병 활동을 했다. 그 필요성을절실히 깨달은 건 러일전쟁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체결된 을사조약과 3년 전에 체결된 정미조약이 나를 해외에서 활동하도록 만들었다.

재판장: 피고는 한국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 원래 한국은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문필로 세운 나라다. 그런데 일본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침략했다. 이를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예전처럼 독립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

재판장 :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총기로 살해하고 수행원들에게 부상을입혔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는가?

안중근 : 그렇다. 이는 3년 전부터 갖고 있던 계획을 실행한 것이다. 또한 한국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국 적장을 사살한 것이므로, 국제법에 따라 재판받는 것이 옳다고 본다. 나는 일반적인 살인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이기 때문이다. - P229

"나의 범죄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토의 죄상 또한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다. 나는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며, 하얼빈에도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임무를 띠고 왔다. 나는 전쟁을 벌여 이토를 습격했고 포로로 잡힌 것이다. 하여 관동법원과 내 사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군인 신분으로 싸웠을 뿐이다."
통역관을 거쳐 진행되는 재판은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힘들고어려워졌다. 전쟁터에 버려진 외로운 병사 같았다. 자세를 곧추세운 안중근은 그럴수록 더욱 힘을 냈다. 관동법원 법정은 벼르고 벼른 제3의 전쟁터였다. - P230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집필 중인 《안응칠 역사》터 마무리했다. 법원과 감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요청하면 틈틈이 서예 글씨도 써주었다.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는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로 나뉘어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편리한 실용기계 연구가 농업이나 상업보다전쟁물자보급에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관총, 전투기, 잠수함 등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을 해치는 것들이다. 수많은 청년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으며, 피가 냇물을 이루는 날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항소를 포기하고 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서문이다. 처음 계획은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 등 5단계로 구상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했다. 여러 달이라도 줄 것처럼 말하던 관동법원 측은 사형 집행일이 임박했음을 알려왔다. 결국 <동양평화론》도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 P236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해외에서 풍찬노숙으로 보내다,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는다.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죽은 자로서 여한이 없을 것이다.


사형 집행을 앞두고 쓴 안중근의 옥중서신은 어머니, 아내, 사촌 숙부, 뮈텔 주교, 빌렘 신부 등 모두 여섯 통이다. 안중근은 그 편지를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대신 전했다. - P242

1910년 3월 26일 새벽
뤼순감옥은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로 갈아입었다. 한복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흑색이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편지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P243

사형장에 도착한 안중근은 미조치 다카오 검찰관, 구리하라 사타키치 소장, 소노키 스에키 통역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대에 올랐다.
사형 집행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동양평화를 위한 만세삼창과 기도를 올리고 싶다."
사형 집행을 알리는 백포가 머리에 씌워지자 안중근은 묵도와 함께 기도를 올렸다. 감옥의가 안중근의 절명을 보고한 시간은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이었다.
짧은 시간, 먼 여정의 길을 함께 걸어온 우덕순도 그날을 기억하고있었다.
‘점심 무렵 간수가 불러내 갔더니 교회당에 조도선과 유동하가 먼저 와 있었다. 흰 천으로 덮인 운구가 보여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얼굴을보여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기도를 마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 P246

옅은 먹구름 사이로 번져가는 석양빛에 잠시, 뤼순감옥을 배회할때였다. 우덕순의 친일 문제는 마음을 무겁게 했다. 발단은 일제의 어용단체 ‘조선인민회 하얼빈 지부장에서 비롯되었다. 반론도 있었다.
우덕순의 변절이 위장 전술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예로 김좌진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친일 밀정이었던 배정자를 제거하려는 계획에 적극 동참한 인물이 우덕순이었다. 김좌진과 우덕순은 십여 년 넘게 관계를 맺어온 돈독한 사이였다. 당시 일제는 우덕순을 배일사상이농후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우덕순이 ‘조선인민회‘ 하얼빈지부장으로 활동한 사실이 친일로 밝혀진다면 그 또한 피할 수 없는화살이다. 항일운동사에서 친일밀정은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하는 까닭이다. - P247

안중근의 시신을 인수해 가려고 감옥 입구에서 기다린 두 동생은할 말을 잃고 말았다. 뤼순감옥 측은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라 안중근의 시신을 교부하지 않기로 결정이 났다며, 이미 매장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오냐, 극형도 모자라 시신마저 돌려주지 않는 너희 왜놈들의 극악무도함을 결코 잊지 않으며, 언젠가 반드시 오늘의 이 한을 되갚아줄날이 있을 것이다."
4개월 넘게 형을 옥바라지한 두 동생은 가슴에 피가 맺혔다. 통역을 맡은 소노키 스에키를 붙잡고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었다. - P247

뤼순감옥에는 안중근을 기리는 기념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사형 집행을 당한 곳이다.
‘안중근 의사 취의지 安重根 義士 就地(순국 장소)‘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벽면에 유묵이 걸려 있고, 헌화를 하는 사형장이 나타난다. 지상에서 사오 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는 교수형 밧줄을 지나 집행을 앞둔 사형수가 대기하는 먹방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꽉 막힌 먹방은 칠흑처럼어두웠다. 몸 하나 겨우 들어갈 공간에 갇혀 눈을 감고 서 있자, 기념관입구 벽에 걸린 색 바랜 유묵이 다가왔다.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안중근은 그렇게, 식민지 조국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애태우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 P248

사형장에서 나와 북문 쪽을 향해 걸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뤼순감옥에서는 별로 반갑지 않은 풍경이다. 오늘따라측백나무에 가린 담벼락 북문이 왠지 슬퍼 보였다. 마차에 실려 북문으로 빠져나간 안중근의 유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수인 공동묘지였던 뒷산마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자애로우신 나의 빌렘 신부여, 저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주시고, 최후의 장소까지 내림하시어 친히 모든 성사를 베풀어주신 홍은에 감사합니다. 저를 잊지 마시기를, 저 또한 결코 잊지 않겠나이다.
빌렘 신부에게 쓴 안중근의 마지막 편지가 애잔하게 들려왔다.
뤼순감옥에는 광복회 후원으로 조성된 ‘국제 의사들 기념관‘도 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의 흉상이 돋보였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은 1932년에, ‘역사를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가르침을 남긴 단재 신채호는 1936년 - P248

에 숨을 거두었다.
한반도 면적의 세 배가 넘는 만주 땅에서 뤼순감옥만 한 곳이 또있을까. 그곳은 한국의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거대한 기념관처럼 보였다.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홍범도, 김구, 백정기, 이강훈, 최흥식, 이강,
민필호, 유상근, 박희광, 황덕환, 채세윤……. 이렇게 많은 독립투사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신채호가 지은 한 편의 시가 절로 맴돌았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 사랑
두 사랑 사이 칼로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이가
줄줄줄 흘러내려 오리니
한 주먹 덥석 그 피를 쥐어
한 나라 땅에 고루 뿌리리
그 피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 P250

다롄에서 상하이는 일반 기차로 스물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먼 길이다.
랴오닝, 허베이, 산둥, 장쑤 등 네 개의 성을 지나야 한다.
광활한 만주 벌판을 벗어난 상하이행 기차는 톈진에 이르러 가쁜숨을 몰아쉬었다. 안중근은 산둥을 거쳐 상하이를 다녀갔고, 윤봉길은칭다오를 경유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차창밖들녘 너머로 안중근의기 띤 얼굴이 그려졌다.
1905년 6월, 상하이에 도착한 안중근은 대한제국 전권대사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을 방문했다. 러일전쟁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 민영익은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우리 대감님께서는 한국 사람은 만나지 않습니다."
문지기 하인의 말에 안중근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대감은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오?"
"그건 나도 잘 모르는 일입니다."
날도 저물고 해서 첫날은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민영익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세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한안중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P253

기차역에서 내려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 동안 상하이에서 머문 기간은 13년. 그후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항저우, 난징, 창사, 류저우, 충칭……. 아홉 번에 걸친 피난길은 그 거리만 4000킬로미터가넘었다.
집세 30원을 주지 못해 집주인에게 소송을 당했던 3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색바랜 태극기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대각선으로 연결된 - P256

두 장의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상징물처럼 보였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김구 집무실은 청사 2층에 자리했다.
해주경찰서로 연행된 김구는 다음 날 신문을 보고 알았다. 자신이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는지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아침 신문에 실려 있었다.

백여 쪽 분량의 서류를 들고 나타난 일본 경찰의 취조가 시작되었다. 해주경찰서가 모은 김구 관련 문서였다. 내심 김구도 급한 마음을내려놓았다. 이토 히로부미 피살 사건에 안중근이 개입했다면 쉽게 풀려나긴 어려울 듯싶었다. - P257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골목은 아주 사소한 일상들이 공존한다. 세탁한 옷을 대나무 막대에 걸어 말리는 풍경이 가을바람에 산들산들 그네를 타는 듯했다. 상하이만의 익살맞은 풍경은 훙커우공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어김없이 펼쳐졌다. 대나무막대에 걸린 색색의옷들이 마치 오랜 정경처럼 거리를 수놓았다.
지하철 훙커우쭈추창 역에서 멀지 않은 훙커우공원도 루쉰공원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인연이 지기처럼 느껴졌다. 루쉰이 잠든 묘지가 바로 윤봉길의 거사 장소였던 것이다. 펜을 무기로삼았던 루쉰 작가의 묘비문부터 찾아 읽었다.
‘나는 하나의 종착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다. 이것은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길에 있다. 길은 한 가닥이 아니다. 원래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된다.‘ - P260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국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는 편지를 남긴 윤봉길이다.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한 윤봉길은 청소년 시절에 벌써투사의 기질이 농후했다.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이 싫다며 학교를 뛰쳐나왔다.
1930년 6월 친구들이 마련해준 50원을 들고 상하이로 망명한 윤봉길은 안공근 집에 자리를 틀었다. 밤에는 공장 노동자로, 낮에는 야채 장사를 하며 길을 모색하던 윤봉길은 임시정부를 찾았다.
"제가 채소 바구니를 등에 메고 날마다 훙커우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상하이로 온 지 두 해가 다 지나도록 죽을자리를 찾지 못해 이렇게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저를 믿고 지도해주시면 선생님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 P262

윤봉길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김구는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 1월 히로히토 일왕의 암살 계획이 실패하면서상하이 임시정부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 맞춰 잘 오셨소 내가 요사이 계획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이었소. 신문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왜놈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오. 오는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큰 행사를 연다지 않소. 그러니 윤군은 일생의 목적을 그날에 달성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제가 그 일을 맡을 테니 선생님께서는준비만 잘 해주십시오." - P262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는 건 어떻소?"
"아닙니다. 제가 죽을 자리는 이곳입니다."
거사 계획을 안공근에게 맡긴 김구는 시먼루에서 폭탄 제조업을하는 김홍일을 찾아갔다.
창춘에 괴뢰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며 점차점령지를 늘려갔다. 훙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천장절기념식도 섬나라의 위상을 주변국에 과시하려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며칠 전부터 일제는 기념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점심 대용으로 도시락과 물병,
일장기를 준비하라며 신문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었다. 김홍일이 제조한 폭탄은 모두 두 개였다. 물병을 개조해 만든 것과 거사 후 자결용으로 사용할 도시락폭탄이었다.
4월 29일, 거사의 날이 밝아왔다. 일본식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선 윤봉길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구와 뜨겁게 악수를나누었다. - P263

"제 시계를 선생님 시계와 바꾸었으면 합니다."
"웬 시계를 ...…?"
"제 시계는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가 아닙니까. 그래서 바꾸려는 겁니다. 앞으로 한 시간만 더 지나면제 시계는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윤봉길은 양복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었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폭탄이 들려 있었다.
새 시계를 헌 시계와 바꾼 후 청사를 나설 때였다. 택시를 타려던 윤봉길은 순간 멈칫거렸다. - P263

"선생님, 이것도 받으시죠."
"그냥 넣어두시오. 약간의 돈은 필요하지 않겠소?"
"택시비를 주고도 5~6월 남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 나도 곧 윤군을 뒤따라가겠소"
그리고 오후 1시경이었다. 3만 명이 모인 훙커우공원에서 결행 소식이 들려왔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리카와 요시노리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는 현장에서 사망,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 제9단장 우에타 겐키치,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하이 총영사무라이 등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훙커우공원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일본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 P264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이미 죽기를 각오한 몸, 사나이로서 할 일을 했으니 기쁠 따름이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은 일본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두 아들에게 짤막한 편지를 남겼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국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丈夫處世兮 其志大矣(장부처세혜 기지대의 대장부가 세상에 처함이 - P264

여, 그 뜻이 크도다). ‘
‘丈夫出家 生不還(장부출가 생불환: 대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나서면, 그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는 하얼빈 거사 직전 안중근이 남긴 말이고, 다른 하나는 윤봉길이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긴 말이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가? 서로 닮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루쉰공원 안에는 윤봉길 기념관을 알리는 이정표가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루쉰 묘지에서 이정표를 따라 200여 미터 걸어가면 기념관입구가 나오는데, 나들이객으로 왁자하던 공원 숲속으로 들어가면 사위가 금세 고요해진다. - P265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이미륵(본명 이의경)은 3·1운동 가담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넌 그는 상하이로 향했다. 일제 치하에서 유럽 등지로 유학을 가려면 중국여권을 취득해야 했는데, 김아려의 집이 바로 한국 청년들이 모여드는곳이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 상하이 임시정부 청년외교단에서 활동한 이미륵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에 김아려의 이야기를 남긴 유일한 작가다.
두 남매를 키우며 남편의 빈자리를 지켜온 김아려는 1946년 2월27일, 상하이에서 생을 마쳤다. 만국공묘에 묻힌 그녀의 유해도 도시개발로 유실되고 말았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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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경 하얼빈 역에 도착한 안중근은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거사장소가 하얼빈 역으로 바뀌면서 안중근의 눈빛도 한층 예리해졌다. 내일 열리는 회담 때문인지 주변 경비가 물샐틈없었다. 승강장에서 걸어 나오던 안중근은 대합실로 연결된 비상구를 발견했다. 귀빈용 통로였다.
개찰구를 빠져나온 안중근은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합실 찻집 유리창 너머로 조금 전 기차에서 내린 승강장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저기다! ‘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 장소를 물색한 안중근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대합실 찻집에서 귀빈용 비상구를 통해 나가면 바로 승강장이었다.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전보 내용부터 확인했다. 두 동지를 차이자거우에 두고 오면서 머리가 무거웠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보냈습니다. 이토가 오늘 온다고 해서..…..."
유동하를 나무랄까 하다. 그만두었다. 내일 아침 9시면 모든 것이 밝혀질 일이었다. - P167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그곳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얼빈 도착 다음 날이었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초청으로 하얼빈공원 옆에 조성된 한인 공동묘지 개장식에 참석했다. 조성을 마친 공동묘지가 고려가에 모여 사는 한인 마을처럼 훈훈하게 느껴졌다. 뤼순감옥에 수감 중인 안중근은 사형 집행 날짜가 정해지자 하얼빈공원을떠올렸다. 안중근에게 하얼빈은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하얼빈공원 옆한인 공동묘지에 잠시 묻혔다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자오린공원으로 바뀐 하얼빈공원에는 현재 안중근 유묵비가 세워졌다. 청초당靑草塘은 ‘풀이 푸르게 돋는 언덕‘을 뜻하며, 중국 당나라시편에서 따온 연지는 ‘벼루 앞쪽에 먹물이 담기는 오목한 부분‘을말한다. 유묵비를 감싸고 있는 한 그루 소나무가 죽어서도 죽지 않는안중근의 이정표처럼 다가왔다. - P169

주변 동태를 살피며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지홍차오 쪽에서 땡땡땡 요란한 신호음이 울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였다. 안중근은 주먹을 질끈 움켜쥐었다.
‘내 심장이 뛰는 한 마지막 기회다. 절대 놓쳐선 안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고 있었다. 승강장에 나와기다리던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그곳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회담은 이토가 타고 온 특별열차귀빈칸에서 삼십여 분간 진행되었다. 이틀 전에 도착한 코코프체프는 동청철도 시찰을 명목으로 이토히로부미는 만주 시찰을 핑계로 성사된 회담이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만주 관할 문제가 놓여 있었다. - P171

회담을 마친 코코프체프가 먼저 기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작달막한 키의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자인가?‘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어찌하여 세상은 이처럼 불공평하단말인가!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숱한 목숨들을 짓밟고 일어선 잔악한 살인자가 기뻐 날뛰고 있었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난안중근은 그것이 한스러웠다.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군악대 연주와 함께 러시아 군대, 중국군대, 외교사절단 순으로 사열이 이어졌다. 대합실 찻집에서 나온 안중근은 욱일기를 흔드는 환영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흑백사진에서 본 늙은 도적이 분명했다. - P172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안중근은 사열대 쪽을 훑었다. 러시아인세 명과 일본인 칠팔 명이 코코프체프와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고있었다. 러시아 군대 뒤에 서서 사정거리를 재고 있던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들었다.
‘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의 사격술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세 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배에, 나머지 세발은 남만주철도 총재 나카무라 제코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이토의 수행비서관 모리 야스지로를 쓰러뜨렸다.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임무를 마친 안중근은 손에 쥔 권총을 승강장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코레야 우라Kopen ypa‘를 외쳤다. - P172

여섯 발의 총성과 세 번의 함성이 울려 퍼진 거사 현장을 찾았다.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에 두 개의 보도블럭이 설치되어 있었다. 삼각형은안중근이 총을 겨눈 자리, 사각형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다.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에 마련된 안중근 기념관을 하얼빈 역에 개관한 건 2014년 1월이었다. 거사 현장에 기념관이 들어서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안중근 기념관에서 일하는 조선족 최태옥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소가 참 무서운 것 같아요. 개관한 지 1년 만에 10만 명이 넘는관람객이 다녀간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큰 성과는 중국인들의 자세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기념관이 민족예술관에 있을 때만해도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을올 때면 가슴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 P174

하얼빈 역사에 개관한 안중근 기념관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미묘한 자존심 대결도 펼쳐졌다. 선제공격은 일본이 먼저였다. "안중근은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테러리스트"라고 논평을 내자, 이에 중국 정부도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라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14명의 A급전범들은 뭐냐"며 맞받아쳤다.
기념관에 설치된 통유리 너머로 거사 현장이 나타났다. 대합실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린 1909년 10월 26일 아침을 다시 보는 것같았다. 거사 현장에 ‘안중근 격살 이등박문사건 발생지‘를 알리는 큼직한 표지판도 걸려 있었다. 여기서 격살은 ‘무기 따위로 쳐서 죽인다‘
는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는데, 중국 정부의 의도로 읽혔다. 러시아, 중국 모두 섬나라 일본에 패배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지 않던가. - P174

기념관을 관람하던 중 세 사람이 찍은 마지막 사진에 눈길이 머물렀다.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모두 무언가를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의거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한반도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함이었음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중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에 안중근 기념관을 최초로 설립한서학동(조선족) 씨의 음성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역사와 문화를 같은 수레바퀴로 보았어요 안 - P175

중근의사기념관 설립도 그래서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얼빈에서머문 시간이 극히 짧았던 것에 비해 역사적 행적은 그 이상이었으니까요 바로 그런 분을 너무 오래 묻어두었다는 게 자책감으로 다가왔고또 안중근 의사라면 뒷감당할 자신도 있었지요. 기념관이 사라졌으면사라졌지 안중근 의사께서 사라지기야 하겠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은 하얼빈 역 철도경찰서어 첫 신문을 받았다. 러시아 검사 밀레르는 안중근의 신원부터 확인했다. 그렇지만 안중근은 한국어 통역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말을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배경과 배후를 묻자 안중근도 대충 넘겨버렸다.
1차 신문을 마칠 즈음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파견한 소노키 스에키가 배석했다. 안중근은 소노키의 배석이 달갑지 않았다. 하얼빈은 러시아 조차지로, 사법권 또한 러시아 관할이었다. 러시아 당국이 안중근을 체포해 수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P176

그러나 한국 언론은 의외로 조용했다. 《대한매일신보》만 안중근의 검찰 신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였다. 물론 모두가 숨을죽인 것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친일파들의 추모행사가 한창일 때, 기꺼이 붓을 든 선비 학자가 있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이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하얼빈 소식이 동서양에 전해지니, 세계가모두 놀라서 한국에 아직 사람이 있다고 여겼다. 안중근과 거사를 도모한 십여 명이 모두 붙잡혔는데 안중근은 웃으면서 "나는 이미 일을성공하였으니 죽음이야 누가 알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그의 소식이서울에 이르자 사람들이 감히 통쾌하다고 칭송하지는 못하였지만 모두 어깨를 추켜세웠다. 그리고 저마다 깊숙한 방에서 술을 따르며 경하하였다.‘
1910년 황현은 한일합병 조약으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절명시 네 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 P180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청록파 시인 조지훈도 <안중근의사 찬〉이라는 시로 안중근을 추모했다.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 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는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날 하르빈 역두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 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면 민족의 의기를 - P181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줬을까


하얼빈 사건에 연루되어 끌려온 사람은 모두 열세 명이었다. 그들도안중근처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지하 감옥에 임시 수감되었다. - P182

1909년 10월 30일.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온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 미조치 앞에서 마침내 포문을 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15개항의 죄목이었다.

1. 한국의 왕비를 살해한 죄
2.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4.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5.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에게 신문 구독을 금지한 죄
10. 제일은행권을 강제로 발행한 죄
11. 국채 2300만 원의 빚을 지게 한 죄 - P182

12.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일목요연하게 진술한 안중근은 가두선교때의 일이 생각났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여기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때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에게 죄가 없다면 그만이고, 설령 죄가 있다면 그 사람만 다스리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죽였다면 어찌 한 사람 몫으로 그 죄를 다 갚았다고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이 수천만 명을 살렸다고 한다면어찌 그 사람에게 상을 다 주었다고 하겠습니까?"
안중근 자신과 이토 히로부미를 두고 한 연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야말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부추겨 죄를 범하도록 지시한(교사죄) 씻을 수 없는 범죄자였다. - P184

김아려를 영사관으로 부른 미조치 검사는 두 개의 문서를 책상위에 펼쳐놓았다. 분도의 청취서와 영사관에서 찍은 안중근 사진이었다. 김아려는 고개를 내저었다. 김성백의 집에서 들은 말이 있었다. 안중근과 부부라는 사실을 절대 밝혀서는 안 된다는 미조치 검사도더는 캐묻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열거할 때 안중근의 주번 조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참고인 조사를 마칠 즈음 김아려는 자못 의연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일본 검사에게 들려줄 말이 있었다.
"모르셨습니까? 집안 살림을 하는 아녀자는 지아비의 바깥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우리나라의 오랜 풍습입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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